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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바다의 제국-1039화 (988/1,000)

01039  106. 제국 선포  =========================================================================

“마녀입니다, 마녀! 황제폐하께서는 세상에 다시없을 잔혹한 마녀를 이베리아 반도에 보내셨습니다.”

“윤지 공주는 그저 시집간 나라에 신민의 한 사람으로서 봉사하는 것뿐이라고 이미 해명했잖소? 대사는 감히 우리 제국에 도전하는 거요?”

“그건 절대 아닙니다, 폐하.”

포르투갈 독립전쟁이 격화되면서 예상과 전혀 달리 오히려 에스파냐가 수세에 몰렸다. 전투가 벌어졌다 하면 에스파냐 군대가 판판이 깨졌고, 포르투갈 기병대가 마드리드를 공격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깃발 하나만 꽂아놓고 퇴각한 일도 있었다.

결국 에스파냐 대사가 훌쩍거리며 이민호에게 중재를 요청하는 사태로 발전했다. 일단 포르투갈 군대를 국경선 안쪽으로 퇴각시킨 다음 두 나라의 종전 협정을 이끌었다.

“윤지가 많이 봐준 건 대사도 알고 있소?”

“예, 폐하. 그 전에 몇몇 일에서도 그랬고, 이번에는 카탈루냐 반란군 쪽에서 동맹을 요청했으나 포르투갈에서 거부했다고 합니다.”

“포르투갈 쪽 생각이 바뀌기 전에 얼른 독립을 인정해주고 전쟁을 끝내는 게 좋을 거요. 에스파냐가 멸망하기 싫으면 말이오.”

얼마 전까지 선형 전술에 대해 테르시오가 반드시 약한 것만은 아니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독일 내전에서 제국군의 테르시오는 덴마크나 스웨덴의 선형 전술을 상대로 아주 잘 싸웠고 가끔은 이기기도 했다. 그러나 포르투갈에게는 에스파냐의 정통 테르시오가 아주 판판이, 그것도 일방적으로 처참하게 깨졌다.

“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분명히 포르투갈 병력이 적은데 어째서 매번 전투마다 포르투갈이 병력 우세를 점한 상태에서 전투를 시작할 수 있습니까?”

“포르투갈 병사들이 죽어라 뛰어다닌 모양이오.”

내선의 이점을 이용하고 군장을 표준화해서 기동력을 높이고 하는 이야기는 해줄 필요도 없었다. 17세기 전반에 19세기 초반의 나폴레옹 전술을 상대하게 된 에스파냐의 불운일 뿐이었다.

그런데 포르투갈 왕비 윤지 공주의 진정한 업적은 군사적 승리가 아닌 행정체제 개혁에 있었다. 포르투갈 왕실은 귀족들을 설득해 단기간에 중앙집권제로 개편하고 도로가 새로 깔리는 즉시 우편마차가 달렸다. 세금 징수도 전국적으로 공평하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제국 사관학교에서 가르치기만 하고 실행한 적이 없었던 국민개병제가 포르투갈에서 처음으로 현실화됐다. 오히려 에스파냐가 포르투갈에게 정복당할 수 있다고 이민호가 누누이 경고한 이유였다.

“잘 좀 봐주십시오, 폐하.”

“이웃나라끼리 원수 질 필요가 있겠소? 예전 국경선으로 돌아가면 그뿐이오. 다만 에스파냐에서 먼저 공격한 만큼 배상금을 지불할 각오 정도는 해야 할 것이오.”

“폐하! 에스파냐에는 배상금을 지불할 돈이 없습니다. 카탈루냐 반란도 진압해야 하는데 군자금이 부족해 병력 동원을 못하고 있습니다.”

돈 빌려달라는 소리였다. 그래서 제국에서 은화 백만 페소를 주조해 일부를 에스파냐 국왕 몫으로 떼어놓고 나머지를 에스파냐에 넘겨주었다. 은화 1페소는 은 1온스를 담은 8레알, 독일의 8탈러에 해당하는 가치였다. 카탈루냐 사람들에게는 안 됐지만 결국 은 28톤에 해당하는 금액을 에스파냐에 대여한 셈이었다.

에스파냐에서 화폐 주조권이 국가 독점이 되는 시기는 18세기 초 펠리페 5세 시대였으므로 현재는 이렇게 하는 편이 제국 입장에서 싸게 먹혔다. 제국에서 만든 주화는 귀금속 비율과 무게가 극히 일정해서 시장에서 환영받았다.

평화협정을 맺은 포르투갈은 에스파냐로부터 독립을 인정받았고, 배상금을 받아 귀족과 병사들에게 수당을 지급했다. 나머지 돈을 국가발전 사업에 투자했으며, 제국에서도 본격적으로 포르투 북쪽에 군항을 건설해서 포르투갈 전체가 한동안 경제적 호황을 누렸다.

늦가을 오후에 이민호는 혜영과 함께 차를 마시며 난을 감상하고 있었다. 모든 공무원에게 업무 중 한 시간에 10분 비율로 쉬는 시간이 보장되는 것처럼, 황제나 총리 같은 황실 사람들도 가능하면 쉬는 시간을 엄수하려고 노력했다.

이때 황태자와 태자비가 굳은 얼굴을 한 채로 원손을 데리고 방문했다. 황태자가 검을 들고 제위 계승을 하러 온 것 같지는 않아 안심한 이민호가 그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원손과 함께 무슨 일이 있느냐?”

“죄송하오나 원손의 일로 아바마마께 상의를 드리고자 합니다.”

황태자의 장남인 원손은 13세로 아직 황태손 책봉을 받지 않았다. 형제자매 과반수가 성인이 되기 전에는 후계자 선정을 하지 않는 것이 제국의 가법이었기 때문이다.

원손은 잔뜩 상기된 얼굴을 푹 숙이고 있었다. 이민호는 이 나라 저 나라에서 영민한 어린 군주나 후계자를 자주 봤었다. 그들에 비해 황태자와 원손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에 가까웠다.

황태자가 유명한 등반가이긴 하나 명나라 황태자처럼 머리가 아주 뛰어나다고 볼 수는 없었다. 원손은 더더욱 특징이 없는 평범함 그 자체였다.

“할바마마! 저는 그림을 그리고 싶습니다.”

“오! 우리 황실에서도 예술가가 나오는 것이냐?”

“예?”

전혀 예상 밖의 반응에 원손이 눈을 크게 뜨고, 황태자와 황태자비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혜영은 몹시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시 말씀 드리자면, 저는 평생 그림을 그리고 싶습니다. 황태손으로 책봉되거나 공부를 하는 것은 제게 시간 낭비일 것 같습니다. 장차 정치를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원손은 왜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하느냐?”

“그야 그림을 그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반적인 군주라면 원손이 자제하지 못한다고, 혹은 쾌락에 저항하지 못했다고 호되게 나무랄 수도 있었다. 어쨌든 군주가 되기 싫다는 주요 후계자 후보가 건국 후 이렇게 이른 시기에 나온 것도 특이한 일이었다.

“화가라는 것은 단순한 기술자가 아닌 예술가다.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들에게 뭔가 관념을 전달해서 공감을 유도하거나 다른 주장을 내세울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철학과 역사, 물리 등 많은 공부가 필요하다. 너는 그게 필요가 없다고 보느냐?”

“저는 그런 건 모릅니다. 그저 그림을 그리는 게 즐겁기 때문입니다.”

이민호가 황태자에게 시선을 돌리자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황태자는 자식이 원하는 것을 하도록 내버려두자는 주의였다.

그러나 황태자비는 원손을 황태손에 올리고 싶어 했다. 장남이라는 이유도 있고, 또한 둘째와 셋째아들보다 책임감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황태손 후보가 되는 것만 해도 많은 공부와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이 황실 가족들의 일반적인 견해였다.

“황실에는 뛰어난 능력을 가진 숙부님들과 고모님들이 계십니다. 그분들과 저를 감히 비교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무능한 군주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원손이 눈물을 뚝뚝 흘렸다. 어린놈이 벌써부터 그런 고민을 한다는 사실이 이민호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원손이 어려서부터 그림 감상과 그림그리기를 좋아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내버려두고 그림만 그릴 사람은 또한 아니었다. 현실이 두려워 그림 속으로 도망간 것에 불과했다는 뜻이었다.

“원손은 그들이 뛰어나다고 생각하느냐?”

“당연히 그러합니다, 할바마마. 핀란드와 이집트 왕국을 건국한 다음 성공적으로 통치하시는 숙부님들, 조선의 국모로 불리시는 지은 고모님, 루스 차르국을 중흥시킨 마르그레타 고모님, 포르투갈을 에스파냐로부터 독립시키신 윤지 고모님까지 다들 뛰어난 분들이십니다.”

“그럼 원손은 그들의 형이며 오빠인 네 아비를 어떻게 보느냐?”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황태자이신 아바마마께옵서는 몹시 인자하시되 군주로서는 평범한 분이 되실 것 같습니다.”

장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 발언으로 인해 원손이 황태자 부부를 비롯해 황실 식구들에게 단단히 찍힐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어쩌면 원손이 황태손으로 책봉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이런 발칙한 발언을 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범하지. 바로 그래서 황태자로 책봉된 거란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할바마마.”

“황태자인 네 아비는 여러 형제자매들 중에서 장남이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봐도 보통 사람들은 장남을 싫어한단다. 장남은 가문에 더 많은 책임감을 갖는 대신에, 동생들 몫을 빼앗아가면서도 당연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놀부가 동생인 흥부 몫으로 배정된 유산을 빼앗아가면서 조금이라도 미안해하더냐?”

원손과 황태자비가 황태자를 보며 동시에 갸웃거렸다.

“일반적인 장남에 대한 평가이신 것 같습니다.”

“그렇다. 그런데 네 아비는 달랐다. 어린 동생들을 돌보면서 자기가 가진 모든 것, 장난감과 지식을 나눠주려고 노력했단다. 네가 보기에 뛰어난 숙부와 고모는 네 아비에게서 많은 것을 배운 사람들이다. 그러나 네 아비는 평범하지. 그 이상을 스스로 배우고 깨우쳤기에 뛰어난 사람이 됐지만, 그 시작은 네 아버지의 평범함에서 비롯됐다.”

“잘 모르겠습니다, 할바마마.”

“후계자가 되기 위한 경쟁을 할지도 모를 형제자매들에게 황태자는 자기 것을 아낌없이 나눠주었다. 이것은 황태자 자신이 후계자가 되지 못하더라도 모든 후보들의 평균 수준을 높이려고 노력했다는 뜻이다. 황태자는 또한 관료나 장군들이 계속 새로운 것을 창안하도록 몰아침으로써 국가의 전반적인 수준을 높이고 있다. 밑에 사람들 입장에서는 매우 피곤한 인간이지. 하지만 백성들에게는 이상적인 군주가 될 수 있단다.”

“험! 험! 과찬이십니다, 아바마마.”

원손이 생각에 잠긴 동안 잠시 기다려주었다.

“사실 나는 누가 다음 황제가 되더라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 우여곡절이 조금 있겠지만, 평균적인 인간이라면 누구나 군주의 직을 수행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물론 총리의 도움을 많이 받아야겠지.”

이민호 개인이 여러 가지 과학적 기물을 만들고 음악과 소설을 창작한 것은 극단적인 예외에 해당했다. 유교 문화권에서 이런 것들은 군주가 할 일이 아니었고, 만약 할 경우에는 연발 조총을 만든 선조 임금처럼 오히려 신료들에게 비판을 받았다.

결국 이민호의 과학적, 문화적 업적 대부분은 군주로서 사실상 필요 없는 일들이었다. 군주라면 당연히 신하들에게 시켜서 백성을 위한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더욱 바람직하기 때문이었다. 세종대왕이 장영실을 시켜서 측우기를 만든 것은 관료들에게 큰 환영을 받았지만, 대왕이 직접 한글을 창제한 탓에 관료들이 크게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한 나라의 군주가 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준비, 즉 공부가 필요하다. 뛰어난 인재가 아니더라도 일정 수준으로 공부만 하면 군주가 될 충분한 자격이 생긴다고 나는 믿는다. 그래서 그림도 좋지만 후계자 집단이 공부해야 할 시간에는 공부를 하길 바라는 것이 솔직한 내 마음이다.”

일반 백성들은 공부할 시간을 알아서 정해도 상관이 없었다. 이민호는 백성들이 고등학교까지 실컷 노는 것을 오히려 권장했다. 군대에 가서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본 다음 대학에 들어가는 것을 더 바람직하게 여기기도 했다.

그러나 미안하게도 황실 식구들에게는 그런 자유를 허용하기 어려웠다. 군주의 자식들로서 특권을 누렸다면 이에 따른 의무도 당연히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 이민호의 신념이었다.

“그럼 저도 공부를 하면 나중에 숙부나 고모님들처럼 될 수도 있다는 뜻입니까?”

“그렇지. 원손은 이제 겨우 열세 살일 뿐이다. 30대 후반 성인들과 단순 비교할 수는 없다. 걔들이 어렸을 때는 먹을 거나 밝히고 콧물이나 찔찔 흘렸지 원손처럼 인생을 고민한 적이 없었단다. 내가 보기에는 원손이 존경하는 왕이나 왕비들보다 지금 원손이 훨씬 영민하다.”

이민호는 애들과 이야기할 때도 어리다고 무시하는 법이 절대 없었고 동등한 한 사람으로 인정했다. 그래서 애들과 잘 놀아주는 것이 대표적인 장점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개나 고양이와 쉽게 친해지는 이유이기도 했다.

“명나라 황태자는 저보다 어린 나이에도 무척 영민하다고 들었습니다.”

“어린 천재들과 비교할 필요는 없다. 숭정제가 어렸을 때는 지금 황태자 주자랑보다 훨씬 영민했다. 그러나 통치의 방향이 잘못돼서 명나라가 그 모양이 돼버렸다. 나는 황실 식구들에게 군주가 되는 법이 아니라, 군주가 되고 나서 나라를 잘 다스리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

“나라를 잘 다스리는 법이요? 제가 황제가 되고 싶은 욕심은 별로 없습니다만, 그건 꼭 배우고 싶습니다.”

“제왕학이란 게 사실 별 거 아니다. 인문학 전반에 사회학 몇 가지를 포함시켰을 뿐이다. 어려서 강제로 주입하는 조기 교육일 필요도 없으니 평균적인 인간이면 충분히 배우고도 남는다.”

먼저 인간을 자세히 알고 나서 사회조직에 대한 통찰력을 키우면 그것으로 족했다. 철학자는 여기서 자연과학까지 알아야 하니 군주보다 더 골치 아픈 직업이었다.

“원손이 아주 괜찮네.”

“너무 긍정적으로만 보시는 거 아니에요? 원손이 군주가 되기에는 지나치게 유약하다는 평가도 있어요.”

“상이군인들을 문병했을 때 눈물을 쏟으며 미안하다고 했던 일? 인간적이고 황실 가족으로서 책임감이 강해서 좋잖아. 그걸 유약하다고 하는 건 후계자들을 유약하게 만들고 싶어 하는 자들이나 하는 소리지.”

황태자 가족이 돌아가고 나서 이민호가 혜영과 담소를 나눴다. 사람에게 따뜻한 후계자들이 이어지고 있으니 제국의 미래는 몹시 밝았다.

전쟁터에서 싸우는 군인이나 산업현장에서 실제로 일하는 사람은 황제가 아닌 백성들이었다. 백성들이 황제로부터 따스한 애정을 느낄 수 있다면 더욱 열심히 일하는 충성스런 신민이 될 것을 기대했다.

============================ 작품 후기 ============================

포르투갈 독립전쟁은 이렇게 해결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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