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42 106. 제국 선포 =========================================================================
제국은 고산국 건국 초부터 국영 및 공영 기업과 사기업들의 주식을 시장에 공개해 증권시장을 육성했다. 국가가 커가면서 덩달아 기업들도 성장했고, 압도적인 기술 우위를 바탕으로 내수와 무역에서 매년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이는 주가에 반영돼 주식 투자자들의 재산 증가로 이어졌다.
저축 이자율이 낮고 부동산 투기가 거의 불가능한 나라에서 주식만큼 고수익 금융상품도 없었다. 기업이 상장했던 초기에 주식에 투자하고 중간에 주가가 요동을 쳐도 끝까지 매도하지 않은 개인 투자자들은 매년 지급된 배당금 외에 주식을 매도하면서 큰 재산을 얻었다. 그리고 남들보다 일찍 은퇴해서 인생의 말년을 무척 여유롭게 보낼 수 있었다.
“박 사장 자넨 30년 넘게 원목가구 회사의 최고경영자로서 기업을 잘 이끌어왔네. 헌데 요 몇 년 간 직원들의 임금을 거의 올리지 않았더군.”
“황공하옵니다, 폐하. 이는 기업의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당연한 것입니다. 대신 주가가 크게 올라 황제폐하와 투자자들께 큰 이익을 드렸지 않습니까?”
여러 기업의 경영주들은 곧 퇴위를 앞둔 황제가 부르자 좋다고 달려왔다. 국가 번영에 이바지했다고 귀족 작위라도 내릴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황제가 설마 퇴위 직전에 개국공신이 아닌 기업 경영자들의 목을 칠 줄은 몰랐다.
“매출액과 이익 면에서 기업 규모는 훨씬 커졌는데 고용 규모는 그대로야. 신규 고용이 없는 것도 문제지만 직원들에게 더 많은 일을 시켰다는 이야기지.”
“그렇지 않습니다, 폐하! 직원들의 출퇴근 시간은 예전과 동일합니다. 기계화와 공장 자동화로 생산성과 근로 효율을 올린 것입니다.”
“인정하지. 그런데 직원들의 임금을 올리지 않고, 고용도 늘리지 않았다는 것은 큰 문제야. 국가를 운영하는 입장에서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뜻이지. 그런데 최고경영자인 박 사장 자네의 연봉을 대폭 올렸더군. 직원들 임금 평균의 천 배나 돼. 자넨 효율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내가 어떤 선택을 해야 효율적일 것 같나?”
우물쭈물하는 최고경영자에게 이민호가 선고했다.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하는 것과 같았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때 미국 기업들은 경영 위기를 명분으로 근로자들을 대량 해고한 반면에 CEO들에게 수천만 달러에 달하는 연봉 외에도 막대한 스톡옵션을 지급했다. 그러나 회사 수익률 제고를 위한다는 이유로 인력을 감원하면서 어째서 CEO 연봉을 올리는지 설명하지 못했다.
“자넨 기업 성장을 위해 뛰어난 업적을 세운 것도 아니야. 국가의 보호 아래 독과점 시장에서 땅 짚고 헤엄치기를 했을 뿐이야.”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렇다면 자네 하나를 잘라서 천 명을 추가 고용하거나 직원들의 임금을 30퍼센트 올려주는 게 낫겠지? 주주의결권 과반이 넘는 대주주로서 최고경영자인 자넬 이 자리에서 해고하겠네.”
이민호 입장에서는 사장 한 명에게서 충성을 받는 것보다는 직원 3천 명의 월급을 올려줘서 충성을 사는 게 훨씬 나았다. 소비성향과 금액을 따지면 중산층 혹은 그 이하인 직원들의 봉급을 올려주는 편이 경제적으로도 훨씬 효과가 컸다. 부자가 수입 중에서 소비하는 돈의 비율이 아주 낮기 때문이다.
낙수효과 운운하는 현대 정치인들은 그런 사실을 잘 알면서도 투자 증진과 고용창출 효과 운운하며 거짓말한다. 그러나 기업을 위해 줄여준 세금은 고스란히 사내 유보금으로 쌓인다.
“폐하!”
“동의하지 못하는 모양이군. 상관없으니 집에 가게. 회사에 가도 자네 책상은 이미 치워져 있을 걸세. 아! 주식 배당금 외에 그 동안 받은 과도한 급여는 몰수될 걸세.”
횡령과 배임 등 경제 범죄를 저지른 악질적인 기업주들은 엄밀한 회계감사를 통해 꾸준히 도태시켰다. 세무서 직원에게 뇌물을 제공해 세금을 깎으려던 자들은 형사 처벌을 받았다.
기업 경영자, 즉 상인들에게 적용되는 연간 세율 50퍼센트는 전혀 많지 않았다. 전국시대 일본 농민들은 화승 같은 공물을 포함해 실제 세율이 90퍼센트에 달했고 미국 공화당 출신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시 최고 소득세율은 91퍼센트였다. 예외적으로 조선 농민들이 부담하는 전세(田稅)가 1할도 안 될 정도로 낮았으나 공물과 요역을 합하면 50퍼센트를 훌쩍 넘어갔다.
오늘 황제 집무실에 불려온 경영자들은 합법과 불법의 경계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던 자들이었다. 그 동안 감사와 경찰 수사를 통해서도 꼬리가 밟히지 않은 자들을 회사 정관에 규정된 경영자의 최대 급여 조항 위반을 이유로 해고했다.
경영자의 연봉은 지금까지 거의 문제 삼지 않았기에 슬금슬금 연봉을 올렸던 경영자들을 오늘 한꺼번에 내칠 수 있었다. 이민호가 국내 모든 기업의 실질적 대주주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폐하! 제가 평생 일군 기업을 빼앗으시렵니까? 명목상 지분 절반이 황제폐하와 국가의 소유이나 실제로 제가 만든 기업입니다.”
“명목? 자네가 오해하는 모양인데 주식회사에서 모든 의결권은 주식 소유 비율로 결정돼. 국가와 황실 소유 지분을 포함해 51퍼센트를 가진 내 기업이야. 자네 지분은 겨우 5퍼센트에 불과해.”
원목가구 회사의 기술과 디자인, 재료 수급, 판로 확보 등 여러 분야에서 이민호와 정부가 관여했었다. 경영자가 그 동안 회사 관리를 잘했다지만 얼마든지 다른 사람으로 대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경영자는 초반에 49퍼센트에서 시작해 기업 공개 이후 지분을 꾸준히 줄여나갔다. 회사가 이토록 크게 성장할 줄 믿지 않았던 탓이었다. 지분이 적어서 배당금이 얼마 안 되는 탓에 경영자 급여를 대폭 올린 것이었다.
이 자리에 불려온 경영자들 대부분이 원목가구 회사 경영자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새 경영자 인선을 마친 후였기에 이민호는 마음껏 사장들의 목을 뎅겅뎅겅 자를 수 있었다. 이민호는 지분이 곧 결정권인 주식회사의 규칙대로 결정했을 뿐이었다.
“통계라는 것은 인문, 사회, 자연과학에 공히 사용할 수 있는 유용한 도구입니다. 작년에 김수찬 박사가 발표한 논문에서는 조선 21개 가문의 족보를 분석해, 성인 남성 5만 8,743명의 출생연도와 사망연도를 비교했습니다.”
황실의 저녁 식사 시간은 여전히 강의와 토론을 통해 공부하는 시간이었다. 시집장가 간 왕자와 공주들이 황궁 밖에 살아서 예전에 비해 저녁 식사 참가자가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황태자의 어린 자식들을 위해 발표와 토론 시간을 생략하지 않았다.
30대 중반 노총각 황자이며 역사학자인 고석진 박사가 논문 내용을 요약해 설명했다. 조선의 성인 양반 남성의 평균 기대 수명이 농사의 풍흉에 따라 53세에서 59세까지 변화한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조선 양반 남성들은 각종 병으로 죽기 쉬운 어린 시절을 지나 성인이 된 다음에는 사망률이 뚝 떨어졌다. 조선 전체 인구의 평균 수명이 겨우 25세에 불과하더라도, 20세 이상 양반 남성의 평균 여명은 30년이 넘었다. 20세를 넘기면 평균 수명인 25세를 훌쩍 뛰어넘어 50세를 지나서도 상당수의 사람들이 살아남는다는 뜻이다.
“양반들은 조선 사회의 지배층이며, 아무리 심각한 흉년이 오더라도 굶어죽을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족보 분석 결과 연도에 따라 기대 여명이 크게 달라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흉년에는 양반들도 많이 죽습니다. 원손 마마께서는 그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숙부님! 혹시 전염병 때문입니까?”
영사기에서 쏜 불빛이 흰 벽에 글자와 그림을 투영했다. 흉년이 심했던 해에 농민들이 양반보다 훨씬 더 많이 죽겠지만 정확한 숫자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일단 족보에 오른 양반들은 정확히 언제 사망했는지 제대로 기록돼 있었다. 인구의 일정 비율을 차지하는 노비들 때문에 정확한 통계를 내기 어려운 조선의 국가기록보다는 양반 가문 족보가 연구 대상으로서 훨씬 가치가 있었다.
“그렇습니다, 원손 마마. 양반들이 굶어죽지는 않지만, 기근이 닥치면 가난한 농민들이 굶어죽거나 병에 대한 저항력이 약해지면서 조선 전체에 돌림병이 유행하게 됩니다. 양반이 농민보다 질병 저항력이 높더라도 예년에 비해 돌림병에 의해 죽는 비율이 올라갑니다.”
“양반들이 더 오래 살기 위해서라도 농민들이 굶어죽거나 병에 걸리는 일을 막아야 하겠습니다.”
“매우 합리적인 논리입니다, 원손 마마. 그러나 조선 양반들은 그러한 사실을 모릅니다. 조선 왕실이나 양반들이 굶어죽는 농민들을 구호하는 것은 측은지심 때문이거나 유교 경전의 말씀을 따른 것에 불과합니다. 아니면 노동력 부족이 걱정돼서 구호사업을 벌였을지도 모릅니다.”
“이 사실이 조선에도 알려진다면 양반들이 가난한 농민들에게 더 잘해줄 것 같습니다.”
“자기 재산을 쓰지 않는 한도에서는 그럴 겁니다.”
여기까지는 순수 학문에 대한 토론으로서 괜찮았는데 고석진이 현재 제국의 상황으로 논제를 옮겼다. 이민호가 고개를 저어 제지했으나 고석진이 발언을 이어갔다.
“제국에서는 현재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농민이 아닌 직업이 많아지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직업을 어느 계층이 만들어내고 있는지 대답하실 수 있습니까?”
“예, 숙부님. 제가 알기로 제국 경제의 6할 이상이 소비에 의존합니다. 소비 여력이 풍부한 도시 중산층이 왕성한 소비활동으로 다양한 직업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기업의 고용은 소비의 증감에 반응해 늘리고 줄이는 종속 변수에 불과합니다.”
21세기 초반 미국에서 소비의 경제 비중은 7할 이상이었다. 제국의 농민들이 부유하다고 하나 워낙 일벌레들이라 소비할 시간이 부족해 소득에 비해 소비 수준이 낮은 편이었다.
제국 경제의 역동성은 폭발적인 인구 증가와 도시민들의 활발한 소비에서 나왔다. 소비 증가와 고용 증가, 임금 증가, 투자 증가가 선순환되면서 세계 경제 비중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게 이미 오래 전 일이었다.
“원손 마마의 논리가 무척 정연하시고 지식도 풍부하시군요. 멋져요!”
“뭐, 그런 편이다만 우리 예쁜 크리스티나에게는 똑똑한 남자보다는 잘생긴 남자가 더 잘 어울리지 않을까?”
“무슨 말씀이세요, 폐하? 원손 마마는 무척 잘 생기셨어요.”
크리스티나 여왕의 눈에 하트가 맺힌 것 같아 이민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A가 B를 짝사랑하는데 B는 C를 짝사랑하는 주말드라마가 떠올랐다. 만에 하나 스웨덴 여왕인 크리스티나와 유력한 차기 황태자 후보인 원손이 맺어진다면 두 나라는 몹시 곤란해진다.
“그렇습니다, 원손 마마. 분업과 자동화가 생산효율을 증대시킵니다. 그러나 분업과 자동화가 진행되는 만큼 동일한 양의 생산에 필요했던 고용인 수를 감소시킵니다. 지금은 제국에 노동력이 약간 부족하지만 언젠가는 노동력이 남아돌지도 모릅니다. 많은 신민들이 실업자가 되어 평균 소득이 줄어들 것입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겠습니까?”
“석진아! 열세 살짜리 아이에게 어려운 질문이다. 넌 열세 살 때 격투기에 빠져 살았잖니?”
이민호가 나서서 토론을 중단시키려 했다. 그러나 노총각 역사학자는 멈추지 않았다.
“열세 살이라곤 하지만 원손이기 때문에 다릅니다. 장차 제국을 통치하려면 가능한 많은 것을 알아야 합니다.”
“원손은 아직 황태손이 된 것도 아니다. 미리 부담감을 줘서 좌절시킬 필요가 없다. 넌 황위에 관심 없다고 하면서 황위를 이을 후보들에게 정신적 압박을 가하는구나.”
“일개 신민으로서 제국의 미래를 걱정했을 뿐입니다, 아바마마.”
건국 초기에 대학을 설립하고 전공학과를 세분한 사람은 이민호였다. 이민호는 현대 대한민국처럼 학사 과정은 4년, 석사 과정은 2년, 박사과정은 의학 같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보통 3년을 설정했다.
그러나 전공마다 교수진이 구성되고 연구가 심화된 다음부터는 각 전공이 마치 생명체처럼 다양하게 발전해나갔다. 이민호는 이를 자연스럽게 여기고 애써 획일화하지 않았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학문이 다양하게 분화된 다음부터는 저마다 다른 발전 과정을 밟았다. 아직 학문의 깊이가 얕은 이공계 석사는 공부하는 동안 힘들더라도 일 년 반 만에 일찍 끝낼 수 있었고, 박사 과정도 기준보다 빨리 마칠 수 있었다.
그러나 역사가 오래되고 원래 지역별로 다양했던 인문학은 공부할 게 무척 많았다. 학위 과정이 점점 길어지더니 어느덧 석박사 과정에 최소 10년을 요했다. 특히 사학과는 석사가 기본이 4년, 박사는 8년을 넘겼다. 공부할 양이 많다 보니 고령의 독신자를 양산해 국가시책에서 벗어난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울 단계까지 왔다.
“군주가 경제학이나 역사학 같은 특정 분야 공부가 부족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차 하면 경제 장관에게 경제 문제의 전권을 맡기면 해결된다.”
“그러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아바마마께서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경제 장관과 기획청장은 아바마마의 제자나 다름없는 경제학자들입니다.”
“그러나 군주는 신이 아니다. 특정 분야를 잘 모를 수도 있는 평범한 인간이다. 군주가 누가 됐든 실제 일은 신하들이 나눠서 해야 한다. 내가 누누이 일렀지만 군주는 국가의 방향만 제시해도 된다.”
제국은 중국 역대 황실과 많은 면에서 달랐고, 훨씬 세계적이면서 일반화를 지향했다. 그래서 ‘짐’이라는 단어를 황제의 일인칭 대명사로 지정해 독점할 필요가 없었다. 황제라는 단어보다 일반적인 군주라는 명사를 즐겨 쓰는 것도 같은 이유였다.
“국가의 방향을 제시하려 하면 군주가 그 전에 무수히 많은 것을 알아야 합니다.”
“네 눈에 드는 군주가 역사상 과연 있었을지 의문이구나.”
“아바마마가 계시지 않습니까? 국가를 세워 이를 세계적 규모로 확장하고, 무기와 각종 물품과 수송수단을 새로이 만들고, 모든 학문을 선도하고 예술을 만들어내신 분입니다.”
석진이 이민호의 업적을 열거했다. 객관적으로 봐도 세상 어느 군주들보다, 심지어 신화시대의 건국시조들보다 더 많은 업적을 세운 사람이 이민호였다.
그러나 이것은 아부가 아니라 도전이었다. 이민호와 비교해야 한다면 당장 황태자도 제위를 이을 자격이 없게 된다.
“나를 역사상 극히 예외적인 인간으로 생각해도 상관없다. 그러나 나는 대부분의 평범한 인간이 군주가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더 이상 미래의 황제 후보들에게 정신적 압박을 가하지 말기를 명한다.”
“황명을 받들겠습니다, 아바마마.”
고석진이 마지못해 고개를 숙였다. 이민호가 원손을 바라보니 심리적으로 큰 동요를 일으키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지금까지 무척 다양한 방법으로 압박을 받았을 원손이 안 돼 보였다. 앞으로도 비슷한 일이 얼마든지 생길 텐데 과연 원손이 제대로 버텨나갈 수 있을지 걱정됐다.
“국가체계가 잘 갖춰진다면 군주의 개인적인 능력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명나라나 오스만제국 황제들이 개인적으로 무척 뛰어난 인물들이지만 그들의 능력이 국정에 제대로 반영되었는지 의심스럽다. 군주로서 평범한 인간이 능력이 뛰어난 미치광이보다 훨씬 낫다. 군주 또는 후보자의 정신적 안정을 군주 재위시의 능력보다 더 중시하면 좋겠다.”
“그래도 사람 욕심이라는 게, 휴! 그렇습니다. 한때 정신병자들이 제위를 이어받았던 오스만제국을 볼 때 아바마마 말씀이 지당하십니다.”
능력이 뛰어난 대신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군주들은 국가를 위기상황에 몰아넣은 경우가 흔했다. 차라리 능력은 평범하더라도 조화를 이룬 통치를 하는 군주가 번영을 이룬 사례는 차고도 넘쳤다. 그런 사례를 더 많이 알고 있을 역사학자 고석진이 결국 승복했다.
“원손은 듣거라.”
“예, 폐하.”
황위 계승권자에게 여러 가지 이유로 압박을 가하는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다. 어쩌면 황태자비가 원손에게 가장 큰 압박을 가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결국은 후계자가 평생 지고 갈 짐이긴 한데, 불쌍한 감정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보통 사람들의 능력을 믿는다. 원손은 보통을 넘는 재능을 가진 사람이니 황제 자리에 부담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그리고 원손이 가진 건 제위 계승권이 아니라 우선권일 뿐이다. 네가 하기 싫다면 동생에게, 동생들도 싫다면 다른 형제나 사촌들에게 짐을 넘기도록 해라. 설마 원손과 같은 항렬 수백 명 중에서 황태자 하나 못 뽑겠느냐?”
“후련한 말씀이십니다, 할바마마.”
“그래서, 원손은 설마 황제 자리가 싫다는 말은 아니겠지?”
“저도 제 자신을 잘 모르겠습니다. 제 동생들이 성인이 되면 확실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전에 공부는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민호가 고개를 돌리자 황태자가 허탈하게 웃고 있었다. 황태자도 예전에 세자로 책봉되기 전에 많은 고민을 했었고, 결국 이겨냈었다. 성탄절은 이미 지났고 새해와 양위 및 즉위식이 며칠 남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다음 편부터 1638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