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2/15)

1

아키스 드 로텐베른의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루나라는 여인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다.

루나는 단 몇 단어로 줄여 설명할 수 있는 여인이었다.

조실부모, 가난, 불행 대잔치, 더부살이 구박데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줄기 빛처럼 남은 발랄한 성격.

루나의 집은 그녀가 어릴 적에 망했다. 그것도 전방위로 민폐를 끼치고 거하게, 폭삭.

루나의 아버지는 시내에서 큰 상회를 운영했다. 그때는 집안이 유복했다. 그녀가 어린 시절을 보낸 소담한 저택에는 손님이 자주 드나들었고, 하인들은 꽃병에 매일 아침 싱싱한 생화를 장식했다.

어머니는 루나가 세 살이 되기 전에 병으로 돌아가셨다. 그녀는 어머니의 얼굴조차 몰랐다. 아버지는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에 낙심했으나, 루나를 정성을 다해 돌보았다.

단둘뿐인 가족이지만 행복했다.

그리고 루나가 열 살이 되기 전, 그녀의 아버지는 상회의 대운을 걸고 동대륙으로 향하는 무역선을 띄웠다. 그리고 배는 허무하게 침몰했다.

덕분에 상회는 하루아침에 망했다. 빚투성이 고아가 된 루나를 마지못해 떠맡아 준 것은 숙부 부부였다.

‘제 부모를 닮아서 재수도 없게 생겼지. 참, 쓸모없는 것. 원, 나도 사람이 좋아 큰일이야.’

숙부는 그녀를 볼 때마다 혀를 차며 그리 말하곤 했다. 어린 루나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눈치를 보았다.

‘네 아버지가 끼친 손해를 생각하면 우리 같은 사람들 없다. 대대로 물려받은 재산들을 다 처분해 갚고도 빚이 이만큼이나 남았어!’

이건 계모이자 숙모의 입버릇이었다.

숙부는 그녀 아버지의 상회 공동 대표이자 동업자였다.

아버지의 배가 침몰하자 투자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성화를 부렸고, 숙부는 상회의 모든 재산을 팔아 겨우 상황을 모면했다. 그러고도 빚이 무려 금화 8천 개나 남았다.

‘네 아버지는 무모한 사람이었지. 내가 그렇게 말렸는데 부득불 투자자들을 모아서 태풍이 오기 전날 출항하더구나. 결국 얼마나 막대한 손해를 남기고 간 줄 아느냐? 쯧쯧, 원래라면 그 빚은 네가 다 갚아야 하는데.’

그때 루나는 어린 소녀였다. 아버지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종일 울기도 했고, 숙부와 숙모의 말에 상처받아 방에 틀어박힌 적도 있었다.

어느덧 어린 루나는 크게 소리를 내며 우는 법을 잊었다. 울면 숙부 가족들이 구박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루나의 숙부인 버몬드 남작과 그의 부인 벨레는 환상의 궁합을 자랑하는 부부였다.

둘은 똑같은 됨됨이를 가진 인물들이었다. 그들에게 가진 거라곤 빚뿐인 어린 고아 소녀 루나는 못 잡아먹어 안달인 존재였고, 마땅히 부려 먹어 부족함 없는 존재였다.

‘네가 상황이 좀 그러니. 참하기라도 해야 앞으로 살길이 열리지 않겠니. 그러니 미리미리 집안일을 좀 배워 둬라. 어차피 하녀가 많이 딸린 집에 시집가기엔 무리인 상황 아니냐. 우리가 다 널 생각해 그러는 거야.’

루나가 일할 수 있을 만큼 크자, 그들은 이런 핑계로 루나에게 하녀들의 일을 가르쳤다.

루나는 아버지가 남기고 간 빚에 대한 죄스러움 때문에 가능한 한 순종적으로 행동하려 노력했다.

‘언젠가는 숙부님 숙모님도 날 덜 미워할 거야.’

소녀 시절, 루나는 그런 순진무구한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터무니없는 착각이었다. 열일곱 살 되는 해, 그녀의 인생을 뒤흔드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건 다름 아닌 기묘한 꿈이었다.

* * *

루나가 열일곱이 된 해의 생일.

루나는 평소처럼 홀로 낡은 나무 침대에서 잠들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뿌연 안개 속을 헤매고 있었다.

‘이건…… 꿈?’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을 걷던 루나는, 홀연히 나타난 한 건물을 발견했다. 그녀는 이끌리듯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여긴, 도서관이네.’

루나는 책을 아주 좋아했다. 의지할 가족도, 친한 친구도 없는 그녀의 낙은 숙부와 숙모의 눈치를 보며 서재에서 어렵지 않은 내용의 소설책을 가져다 보는 것 정도였다.

‘와, 책 정말 많다.’

처음에는 참 기분 좋은 꿈이구나 했다. 이런 도서관을 가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재미있는 책이 많으면 좋겠다. 그녀는 미소 지으며 생각했다.

루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도서관의 내부는 그녀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양식으로 꾸며져 있었다. 큰 창 너머로는 금색 달빛이 스며들었고, 천장까지 닿을 듯 높은 도서관 책장에는 책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바닥과 벽을 이은 기둥들은 모두 금빛이었으며, 그녀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정교한 장식들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달이 이렇게 가깝다니, 이런 곳은 처음 봐. 아름답다.’

숨죽이고 도서관 안을 둘러보던 그녀는 조심스럽게 눈앞에 있는 책 한 권을 뽑아 들었다.

‘이건 무슨 문자지?’

책에 쓰인 것은 그녀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기묘한 형태의 문자였다.

루나는 미간을 찌푸리고 책을 뒤적였다. 그러고 있자니 분명 모르는 문자임에도 책의 내용이 머릿속에 서서히 들어오기 시작했다.

책의 내용은 한 여인의 일기장이었다.

‘어?’

일기 첫 장을 읽은 루나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이 일기는…… 내 일기잖아?’

[제국력 778년, 12월 8일.

혼인이 결정되었다.

내가 시집갈 곳은 공국의 시골이다.

숙부님은 부잣집 혼처라고 했다. 그런데 왜 불길한 예감이 드는 건지.

아무튼, 나는 이 혼담을 거부할 수 없다. 이것 또한 내 운명이라면 어쩔 수 없다. 남편이 좋은 사람이길 바랄 수밖에.]

‘나 결혼해? 그것도 3년 뒤에?’

경악한 루나는 급하게 다음 페이지를 읽기 시작했다.

첫날, 신부 드레스를 입고 신방에 들어선 루나는 비명을 질렀다. 신방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사내가 비쩍 말라비틀어진 시체 같은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신랑은 병을 앓은 지 오래된 사내였다. 사내는 오랜 투병 생활로 몸이 나무토막처럼 메말라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침을 흘렸고, 숨결에선 지저분한 죽음의 냄새가 났다. 루나는 시체 같은 사내의 옆에서 덜덜 떨면서 첫날밤을 지새웠다.

다음 날, 눈물 바람인 루나에게 시부모가 한다는 말이 이것이었다.

‘내 아들의 소원이 죽기 전에 혼인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산 사람 소원은 들어주지 못할 것이 뭐야.’

다 죽어 가는 제 아들에게 마지막으로 혼인이라도 시켜 주고자 늙은 영주 부부가 루나를 사 온 것이다.

‘이건 영혼결혼식이나 다름없잖아. 어떻게 숙부님은 나를 이런 혼처에…….’

일기장 속 루나는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숙부인 버몬드 남작은 루나를 보내는 대신 금화 8천 개를 대가로 받았다. 금화 8천 개는 아버지가 숙부에게 남기고 간 빚과 같은 금액이었다.

그녀는 돈으로 팔린 신부였던 것이다. 당연하게도 루나는 병자인 남편과 정상적인 부부 관계를 맺지 못했다.

루나는 밤낮으로 그를 간호했다. 그녀가 간병인인지 새신부인지 자신도 헷갈리기 시작할 무렵, 남편의 병세가 악화되었다. 결국 남편은 한 해를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루나는 어이없는 비탄에 잠겼다.

‘결혼하자마자 과부가 되다니…….’

‘이제 네가 이 성을 꾸리고 우리를 먹여 살려야겠다.’

시부모들은 말했다. 보수적인 시골 귀족들에게 며느리는 그 집의 재산일 뿐이었다.

시골 영지는 너무나 가난했고, 아들의 불치병을 치료하기 위해 늙은 영주 부부는 있는 대로 빚을 만들었다. 녹봉과 영지의 세금은 대부분 빚을 갚는 데 나갔다. 당연히 영지의 살림이 좋을 리 없었고, 영지민 이탈은 계속 일어났다.

그 뒤, 루나의 삶은 고생과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녀는 돈을 절약하기 위해서 뭐든지 했고, 돈을 벌기 위해서 온갖 잡일을 했다. 하녀가 부족하니 직접 텃밭을 가꾸었고 손이 부르트도록 삯바느질도 했다.

루나가 시집오기 전 머물렀던 숙부 집안은 약재상을 했다. 루나는 직접 하녀들과 바구니를 들고 산으로 가 약초를 채집해 말려 팔았다.

심지어 굶는 날도 있었다. 화사하게 피어났던 젊음도, 미모도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밤낮없이 약초를 고르고 바느질을 하자 눈도 침침해졌다.

과로로 루나의 몸은 점점 쇠약해져 갔다.

* * *

일기장을 든 채 루나는 숨을 들이켰다.

‘내가 이렇게 불행해진다고? 정말 끔찍한 일기 내용이야……. 정말 이상해, 내가 이 일을 겪는 것처럼 생생하게 광경이 떠올라…….’

기묘한 문자로 이루어진 일기는 신기했다. 단순히 글이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그 일들이 현실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마치, 그 일을 직접 겪는 것처럼.

수십 년의 세월을 빠르게 체험하는 기분이었다. 누군가 미래에 만날 사람들의 얼굴을 머릿속에 주입하는 것처럼 떠올랐다. 한 편의 연극을 보는 기분이었다.

루나는 다시 일기장으로 시선을 내렸다.

지옥 같은 외로움, 의지할 곳 없는 마음, 그리고 척박한 땅의 추위. 일기의 내용 대부분은 시골 생활의 끔찍함에 대해 묘사하고 있었다. 거기에 그녀에게 묘한 눈빛을 보내며 몸을 더듬는 시아버지까지. 음식조차 입에 맞지 않았다.

일기 속 루나는 늘 그곳에서 벗어나는 것을 꿈꿨다. 몇 번은 도망치려 하다 영지민들에게 잡혀 온 적도 있었다.

그러다 결국, 일기 속의 루나는 병을 얻는다. 가난한 시부모는 루나가 드러누웠지만 변변한 의사도 불러 주지 않았다. 루나는 고스란히 병을 앓으며 고통에 시달린다.

일기의 마지막 장은 세상에 대한 원망과 후회가 가득 적혀 있었다.

[다들 내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해.

날 불행하게 만든 모든 사람을 원망해. 다시는 이렇게 살지 않을 거야. 남에게 사랑 받기 위해 노력하지도 않겠어. 한 번만 더 기회가 있다면 이렇게 살지 않을 거야.

내 삶을 후회해.]

일기는 거기서 끝났다.

착한 아이, 순종적인 양녀였던 루나는 평생 노력했다. 숙부 부부에게 사랑받기 위해. 혼인 후에는 시댁 사람들에게 성심을 다했다. 그러나 그녀의 죽음은 쓸쓸했다.

‘……세상에, 나 이렇게 죽은 거야? 병들어서 이렇게 비참하게 죽었다고?’

그 어떤 괴담보다 끔찍한 결말이었다.

꿈속에서 루나는 몸을 떨며 일기장을 덮었다. 그녀는 책을 집어 던지고는 급히 도서관을 뛰어나왔다.

그 순간, 루나는 꿈에서 깨어났다.

등에는 땀이 흥건했다.

* * *

이튿날, 루나는 자신이 꾼 꿈이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꿈속의 그것이 내 미래라고……?’

달리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넌 넘어질 거야, 라고 누군가 조롱하는 듯한 기분. 여행을 시작하기도 전에 마차 사고가 날 거라고 누군가 속삭이는 느낌. 두근두근 가쁘게 심장이 계속 뛰었다.

‘꿈이라 치부하기엔 일기 내용이 너무 현실적이고 세세했어.’

가혹한 삶에 저항하듯 그녀의 일기장에는 어린 시절의 일들을 포함한 기억부터 일상의 작은 일들까지 모두 다 기록되어 있었다.

일기장에서 인상 깊었던 페이지 중 하나는 사촌인 새틴이 선물받은 드레스에 관한 내용이었다.

루나와는 달리 금지옥엽으로 자란 사촌 새틴은 곧 다가올 열일곱 번째 생일날 민트색 드레스를 선물받는다. 미래의 루나가 쓴 일기장에는 열일곱 새틴에 대한 부러움이 가득 적혀 있었다. 일기장에 적힌 루나는 열일곱이 아니라 스물여섯이 될 때까지 아무도 생일을 챙겨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기장에 적힌 새틴의 생일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설마, 아닐 거야. 루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루나, 이 드레스를 선물 포장하렴.’

그러나.

이윽고 다가온 새틴의 열일곱 생일 날, 숙모가 들고 온 드레스를 본 루나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 드레스는 일기장에 묘사된 것과 똑같았다. 은빛 리본이 달린 민트색 드레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하루하루 시간이 갈수록 루나는 일기장 속에 뒤죽박죽 쓰인 것들이 실현되는 것을 눈으로 보았다.

그리고 며칠 후, 새틴이 비단 리본을 잃어버린다. 루나는 그 일로 잘못을 뒤집어쓰고 크게 혼이 난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수도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사건이 터졌다.

‘체스터 후작 부인 사건.’

고위 귀족인 체스터 후작 부인이 금기를 저질러 온 수도를 떠들썩하게 했다.

제국의 여인들에게는 단 하나의 금기가 있었다. 고대의 언어, 마법의 언어를 배우지 말 것. 그 언어를 배우고 번역할 수 있는 건 오직 사내들뿐이었다.

‘대 명문가의 후작 부인이 고대어를 할 줄 아는 걸 들켜서 큰 파문을 일으킨 사건……. 일기장에 기록되어 있었지.’

그리고 체스터 후작 부인은 이례적으로 재판도 없이 곧바로 연행되었다. 한동안 수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사건이었다.

설마 했던 그 사건까지 모두 현실이 되었다. 그리고 루나는 절감했다. 그녀의 끔찍한 불행은 현실이 될 것이다. 그리고 벗어날 기회는 얼마 남지 않았다.

시간은 그녀에게 징수권을 든 채무자처럼 다가오고 있었다.

* * *

그간 눈칫밥을 먹으며 살았지만, 의지할 곳 없는 루나에게 숙부 가족은 유일한 혈육이었다.

어린아이는 의지할 곳에 본능적으로 정을 붙인다. 숙모는 가끔 선심 쓰듯 새틴이 쓰던 물건이며 드레스를 던져 주었다.

돌아 생각해 보면 그들이 루나에게 보여 준 선의는 개에게 던져 주는 먹이와 같았다.

‘절대 숙부 가족을 믿어선 안 돼.’

한동안 루나는 그들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루나는 살길을 생각해야 했다.

‘이 집을 나가야 해.’

루나는 미래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도망쳐서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돈도 한 푼 없잖아.’

이 세상은 보수적이고, 또 가혹한 곳이었다. 루나도 제 한 몸 보호할 곳 없이 혼자 사는 여자들이 보통 어떻게 사는지 알았다. 빨래나 청소를 하는 하녀가 되거나, 혹은 거리로 내몰려 창부로 전락하기 마련이었다.

수도 남쪽 벨로폰 거리에서는 가슴과 허벅지를 드러낸 창부들이 상체를 흔들며 사람들을 유혹한다.

그 광경을 떠올리자 배 속이 오싹해졌다.

루나는 아무 준비도 없이 도망칠 만큼 철이 없진 않았다. 집을 나가서도 밥벌이는 해야 했다.

‘무작정 도망을 가는 게 아니라, 독립해야 돼. 뭘 해야 나 혼자 살아갈 수 있을까?’

루나는 그날부터 고민하기 시작했다.

‘먼저 독립 자금. 넉넉한 돈이 필요해. 어떻게 해야 돈을 벌 수 있지?’

숙부가 약재상을 하기에 그녀도 약초를 다듬을 줄은 알았지만, 그 일로 먹고살 정도는 아니었다. 약초상에서 일하려면 어릴 적부터 도제가 되어 훈련받아야 했는데, 숙부가 그 일을 허락할 리 없었다.

‘아, 피곤해. 요즘 자꾸…….’

살길을 고민하던 중, 몰려오는 피로감에 눈을 여러 차례 깜빡였다.

루나는 그날 이후, 밤마다 그 도서관에서 일기를 보는 꿈을 꿨다. 정신 차려 보면 두통과 함께 꿈에서 읽은 기묘한 지렁이 같은 문자들을 속으로 중얼거리기 일쑤였다.

게다가 참 이상한 일은, 꿈속의 세부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는 것이다.

어느 날은 오른쪽 책장에 있는 책을 뽑고, 또 어느 날은 왼편 책장에 있는 책을 뽑아서 읽어도 책의 내용은 언제나 똑같았다. 미래의 루나가 쓴 세세한 일기장이었다.

그런 꿈을 일곱 번 꾸었다.

일곱 번 꿈을 꾸는 동안 일기장의 내용은 같았지만 각기 적혀 있는 글자의 모양은 달랐다. 그러나 루나의 머릿속에는 그 글자들이 술술 들어왔다.

그리고 꿈에서 깨어나면 일기장에 적혀 있던 이상한 문자들이 머릿속에 콕 박혀 떨어지지 않았다. 떨쳐 내려 해도 일기장 속의 문자를 머릿속으로 그리고, 내용을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분명히 이런 글자였지. 이상하다, 소리 내어 읽을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러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 루나는 자신도 모르게 빈 종이 위에 꿈속에서 봤던 내용을 쓰고 있었다. 루나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어? 지금, 나 무슨 글자를 쓰고 있는 거지?”

루나의 등에 소름이 돋았다.

루나는 자신이 지내던 다락방의 창문을 둘러보았다. 달도 없는 깜깜한 밤하늘이 창문의 유리를 새까맣게 메우고 있었다.

‘이 글자, 본 적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루나는 자신이 떠올린 생각에 배 속이 다 오싹했다.

‘설마……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루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내가 생각한 게 맞으면, 난 죽을지도 몰라……!’

제국의 건국 신화.

800년 전 카리노 대왕은 전설 속의 악녀, 세계를 멸망시킬 뻔한 마녀 에리스를 물리치고 제국을 건국한다.

고대 시대의 종말에 태어난 악녀 에리스.

신비한 힘을 가진 에리스는 날씨를 조종해 가뭄, 눈보라를 일으켰으며 악신을 소환하려 했다고 한다.

에리스는 죽어 가며 카리노 대왕에게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언젠가 내 유지를 이을 여인이 나타나 이 세계를 다시 바꿀 것이다.’라고.

에리스는 날 때부터 세상의 모든 언어들을 줄줄 꿰고 있었으며, 악마들과 대화할 줄도 알았다고 한다.

그때부터 제국의 여인들에게는 단 하나의 금기가 생겼다. 무궁무진한 고대의 지식들을 읽을 수 있는 언어, 이제는 사라진 언어인 고대어. 절대 그 고대어를 배우지 말 것. 전설 속의 에리스와 같은 여인이 다시 태어날지도 모른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고대어가 아무나 익힐 수 있는 언어는 아니었다.

고대어는 타고난 재능이 있어야만 익힐 수 있었는데, 에리스를 물리친 후 카리노 대왕이 펼친 마법으로 인해 더 이상 고대어를 깨우치는 여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한다.

고대어를 할 줄 안다는 이유로 체포된 체스터 후작 부인도 사실 고대어 몇 자를 배웠을 뿐이었다.

‘……그게 문제라고.’

그날 밤, 루나는 숙부의 서재에 숨어들었다.

숙부의 서재에는 단 한 권의 고대어 책이 있었다. 고대의 유물인 고대어 마법책은 고가의 골동품이기도 했기에 귀족들은 멋모르고 고대어 책을 수집하기도 했다. 숙부도 책에는 아무 관심 없으면서 경매를 통해 과시용으로 고대어 마법책을 낙찰했다.

‘제일 위 칸에 그 책이 있었지.’

숙부의 서재 책장 가장 위 칸은 유일하게 잠겨 있는 칸이었다.

루나는 숙부가 잠긴 칸의 열쇠를 책상 첫 번째 서랍에 숨겨 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집에서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자란 루나가 모르는 건 없었다.

루나는 열쇠를 꺼내 잠긴 책장을 열었다. 책장이 높아 의자를 밟고 올라가야 했다. 루나는 낡은 책 한 권을 꺼냈다. 그리고 책 위로 촛불을 비추었다.

‘여인이 고대어 책에 손을 대면 경을 쳐. 들키면 크게 혼나겠지.’

루나는 노발대발하는 숙부를 상상하곤 마른침을 삼켰다. 들켰다간 숙부가 어릴 적처럼 그녀에게 손을 댈지도 모른다.

‘하지만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는걸.’

루나는 깨지는 물건을 다루듯 조심스레 책을 펼쳤다.

‘……무슨 소리지?’

그때, 어디선가 똑똑 하는 소리가 났다. 소스라치게 놀란 루나는 책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녀는 겨우 비명을 지를 뻔한 걸 참았다.

‘그냥 바람 소리잖아…….’

바람이 불면서 키 높은 나무의 가지들이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루나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더 빨리 움직여야 했다.

루나는 책의 첫 장을 펼쳤다. 고대어로 쓰인 모든 책들이 그렇듯, 이 책 말머리에도 똑같은 글자가 쓰여 있었다.

[제국 황제의 칙령으로 여인이 고대어를 읽는 것을 금한다.

지아비들은 아내와 딸이 이 책에 접근하지 않도록 통제하라. 규칙을 어기면 법에 따라 엄하게 벌하리라.]

루나는 그 경고문을 보자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죄책감은 놀람에 의해 날아갔다.

‘……세상에.’

그녀는 비명을 지를 뻔한 입을 틀어막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고, 고대어가 읽히잖아, 어떻게…….’

루나의 눈에 책 내용이 마치 제국어처럼 술술 들어왔다.

‘……풉.’

그리고 다음 순간, 루나는 터질 뻔한 웃음을 겨우 참았다.

‘이 내용은…….’

숙부가 거드름을 피우며 애지중지하는 고대어 책 내용은 대단찮았다. 고대의 하녀들을 위한 청소 노하우 책이었다.

‘고위 귀족들의 변소를 깨끗이 청소하기 위해서는 마법 물약을 사용해 닦아야 하며, 그다음에는 직접 손으로 걸레와 솔을 이용해…….’

심지어 루나가 펼친 페이지는 변소를 깨끗이 청소하는 방법에 관한 내용이었다.

‘숙부님은 이런 내용을 그렇게 큰돈을 주고 사 오신 거야? 정말 바보 같아. 고대어를 아는 사람이라면 크게 비웃겠네. 고대어 번역가들이 숙부님을 속인 거야. 하여간, 그치들은…….’

그 순간, 루나의 머릿속에 번개 같은 생각이 스쳤다.

‘그러고 보니 고대어 번역하는 일을 하면 돈을 엄청나게 번다던데…….’

돈. 루나가 이 집에서 도망치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그것.

고대어 번역가는 제국 최고의 고소득 직종 중 하나였다. 사라진 고대 사회. 당시 고대 인구의 절반 이상이 마법사였다. 그렇기에 그들이 남긴 마법서들은 끝없이 많았고, 마법서들은 대부분 고대어로 적혀 있었다.

그래서 마법사들은 비싼 돈을 내고 고대어 번역가를 고용했다. 마법서를 번역해야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대어를 읽는 재능을 가진 사람들은 한정되어 있었고, 번역가는 버젓한 전문직이었다.

루나의 머릿속 어느 지점에서 생각이 멈췄다. 떠올려선 안 될 생각이 떠올랐다.

‘돈을 벌 재주, 내가 할 수 있는 일…….’

루나는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숨죽여 제 방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좀처럼 제 침대에 앉지 못하고 방을 서성였다.

‘여자들은 고대어를 읽지 못한다고 들었어. 그런데 내게 왜 이런 능력이 생긴 걸까?’

루나는 겨우 진정하고 낡은 침대에 앉았다. 그리고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생각했다.

‘차라리 내가 남자라면 이 재주로 먹고살 걱정은 안 해도 될…… 잠깐.’

그녀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맞아, 차라리 내가 사내아이라면…….’

* * *

2년 후.

집안의 구박데기로 살아온 지 10년. 루나도 완전히 성장한 여인이 되었다.

막 성인이 된 루나의 벌꿀색 금발 머리카락은 굽이쳐 허리까지 내려왔고, 눈동자는 따뜻한 녹색이었다. 새하얀 피부는 포슬린 도자기처럼 매끄러웠다. 어느새 훌쩍 큰 키는 여성치고는 큰 편이었다.

이 미모로 사교계 활동을 한다면 꽤 날리겠지만, 안타깝게도 루나는 집안일을 하는 날이 더 많았다.

숙부 가족의 유별난 까탈에 시달리며 자란 루나는 집안일 장인으로 성장했다. 그녀는 웬만한 하녀 몇 명을 합친 것보다 일을 잘했다.

바느질은 수준급이었으며, 새틴의 시중을 드느라 몸종보다 더 능숙하게 화장을 하고 머리를 했다. 은식기는 웬만한 고급 시종인들보다 더 잘 다뤘고, 혼자서 파티 장소까지 꾸밀 줄 알았다.

‘아, 이 책 재미있네. 남자 주인공 멋있다. 고기 파이는 거의 다 구워졌고…… 토마토 수프도 맛이 뱄으니 다 끝내면 샐러드 밑 준비만 해 두자.’

그날도 루나는 한 손에는 읽던 책을 들고 나머지 한 손으로 냄비 안을 국자를 젓고 있었다. 그러면서 틈틈이 오븐 안의 파이도 체크했다.

“루나, 왜 내 드레스 준비 안 해 놨어?”

그때, 루나의 조용한 동선을 방해하는 목소리가 날카롭게 복도를 갈랐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오늘도 새틴이었다. 루나의 양자매이자 동갑 사촌인 새틴. 루나의 인생을 피곤하게 하는 주범이기도 했다. 새틴은 오늘따라 아침부터 심술을 부렸다.

‘아, 오늘이 약혼자와 만나는 날이라 했지. 이때마다 정말 매번 유난이라니까.’

새틴은 한 달에 한 번 약혼자와 식사를 했는데, 그날마다 유독 예민하게 굴었다.

루나는 귀찮다는 얼굴로 읽던 책을 탁―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느긋하게 오븐 안 파이를 확인하고 부엌 밖으로 나왔다.

“또 무슨 일인데? 드레스는 따로 꺼내 놓았잖아.”

“내가 핑크색 드레스 입고 싶다고 했지? 그런데 왜 안 다려 놓은 거야?”

새틴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양 루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새틴은 부모를 꼭 빼닮은 성격이었다. 그런 새틴의 주특기는 생떼 부리기였다.

‘또 시작이네.’

분명히 어제 새틴은 남색 드레스를 입겠다고 말했다.

이런 거짓말도 새틴이 늘 하는 일이었다. 이런 식으로 우겨서 억지 잘못을 만든 후 추궁하며 들볶는 일을 즐겼다.

“너, 일부러 그런 거지?”

예전의 루나라면 새틴의 행동에 상처받고 눈치를 보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루나는 이제 새틴이 뭐라고 하든 귓등으로 흘리곤 했다. 사실 요즘은 요리보다 새틴이 하는 말을 못 들은 체하는 일에 더 자신이 있었다.

“내 파우더 룸으로 따라와.”

새틴은 그리 통보하고 뒤돌아 성큼성큼 걸어갔다. 루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주방 일 뒷마무리하고 갈게.”

“당장 안 와?”

“간식으로 새까맣게 탄 파이를 먹어도 된다면 바로 갈게. 상관없지?”

새틴은 루나를 휙 노려보았다. 루나는 새틴이 노려보든 말든 쳐다보지도 않고 오븐에 집중하고 있었다.

‘요즘 루나가 왜 이렇게 건방져졌지?’

새틴은 자기보다 못하다 생각하던 루나가 요즘 이상하게 여유가 넘쳐흐르는 것에 울화통이 터졌다.

새틴에게 루나는 제 전용 하녀나 다름없는 하찮은 존재였다. 루나보다 나은 자신의 처지를 통해 자존감을 확인하게 해 주는 그런 존재.

예전이라면 새틴에게 바로 사과했을 루나였다. 그러나 요즘은 아무리 들쑤셔도 조금도 타격이 없어 보였다.

‘얘가 왜 이러지? 어릴 적엔 나한테 벌벌 기던 게. 간만에 제대로 눈물 빼게 해 줘야겠어. 오늘은 하나부터 끝까지 다 트집 잡아야지.’

새틴은 입술을 한 번 감쳐물고 생각했다.

“……거슬려 죽겠네.”

거기다 루나는 요즘 이상하게 생기가 넘치고 피부가 좋아졌다. 그 꼴도 이상하게 배알이 꼴렸다.

제 주제에 뭐 그리 기운이 넘치는지. 새틴은 입술을 핥았다.

* * *

‘제국에서 제일 운 좋은 여자가 누구죠?’라고 지나가는 귀족에게 묻는다면 그 귀족은 망설임 없이 버몬드가를 가리킬 것이다.

새틴 드 버몬드.

루나의 사촌인 그녀는 운 하나로 공작의 약혼녀 자리에까지 오른 여자였기 때문이다.

가난하고 명성도 없는 데다 심지어 제대로 된 인성조차 가지고 있지 않은 버몬드 남작가의 새틴이 공작의 약혼녀가 된 데는 동화 같은 사연이 있다.

바로 가문의 은원이라는 사연이다.

오래전, 새틴과 루나의 증조할아버지, 선선대 버몬드 남작은 숲속을 지나가다 다친 사내를 구한다.

그 사내는 독뱀에 물려 죽어 가고 있었다. 약재상을 하는 허울만 귀족인 선선대 버몬드 남작은 약을 처방했다.

그런데 구하고 보니 그 사내는 당시의 젊은 로텐베른 공작이었다.

‘내 목숨을 구해 주었으니, 뭐든지 하나 소원을 들어주겠소.’

그 순간 선선대 버몬드 남작은 영악한 지혜를 발휘했다. 그에게는 나이 든 노처녀 딸이 있었다.

‘뭐든지 들어주신다면야, 그럼 제 늦둥이 딸을 아내로 맞아 주시지요!’

그에 공작은 잠시 고민했지만 마지못해 알겠다며 약혼 증서를 써 주었다. 공작가의 가주와 버몬드 가문의 미혼 여식의 혼인을 약속하는 증서였다.

그러나 세상일이 그렇게 쉽게 풀리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급작스런 열병에 걸려 늦둥이 딸이 죽은 것이다. 괜한 욕심을 부리다 혼약은커녕 보답으로 금화 한 닢 얻지 못한 선선대 버몬드 남작은 땅을 치며 울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약혼 증서는 버몬드 가문의 어딘가에 처박혀 썩어 가고 있다가 새틴과 루나가 15세가 되던 해, 대청소를 하다 발견되었다.

‘됐다, 됐어! 소송을 걸어서라도 어떻게든 공작가가 이 약속을 지키게 해야 해! 우리 새틴이 공작 부인이 될 천재일우의 기회야! 내 딸을 어떻게든 책임지게 해야 해!’

버몬드 남작 부부는 꽁지에 불이 붙은 닭처럼 날뛰며 난리를 쳤다.

그리고 그들은 정말로 공작 가문에 서신을 보냈다. 버몬드가의 저택 고용인들은 그들이 미쳤다고 수군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는 공작 가문이었다. 제국을 뒤흔드는 최고의 명문가인, 일명 드래곤 공작가.

이 제국의 어떤 가문도 로텐베른가와 비교하면 진짜 귀족 가문도 아니었다. 로텐베른 가문은 이 제국에서 가장 유일하고 존엄한 가문이며, 가장 힘 있는 가문이었다. 얼마나 부유한지 로텐베른 공작가가 마음만 먹으면 제국 하나를 세우고도 남을 재산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게다가 젊은 로텐베른 공작, 아키스 드 로텐베른의 명성도 심상치 않았다.

공작은 사교계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하나였다. 공작을 지칭하는 말은 많았다. 미남자, 외골수, 폭군, 냉혈한, 인간 혐오증 환자. 그는 극도로 예민한 사내로 알려져 있었다. 동시에 피도 눈물도 감정도 없는 인물로 유명했다.

주변에 가깝게 두는 사람도 없었으며, 가까운 여인 또한 없었다. 일설에는 그가 여인을 멀리하는 남색가라는 말도 있었다.

그가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늘 그를 주시했다. 왜냐하면 그는 한 번만 봐도 잊을 수 없을 만큼 절세 미남자로도 유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런 공작이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법적 효력도 불투명한 약속을 지키겠는가.

그런데, 그런 일이 정말로 일어났다.

‘가문의 약속은 중요한 것이니 도리가 없지요. 혼인을 수락하겠습니다. 다만, 혼인은 몇 년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공작가의 답신은 짧고 단순했다.

그렇게 새틴은 하루아침에 서신 한 장으로 공작의 유일한 약혼녀가 되었다.

그 후로 제국 수도 사교계에서 가장 운 좋은 여자의 대명사는 새틴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가장 빼어난 영애냐 묻는다면 고개를 갸웃할 사람은 많았다.

새틴은 평판이 나쁘지 않았지만 그뿐이었다. 삐쩍 마르고 대단히 조신해 보이는 이미지였지만 얼굴에 비해 코가 큰 편이었다.

새틴의 미소 짓는 자태는 훌륭했지만 어디까지나 평범한 선에서 훌륭하단 이야기였다. 남성들에게 인기가 좋은 편이긴 했지만 폭발적이진 않았다.

그리고 그녀의 성품은 제 어미인 벨레와 비슷했다. 그래서 그녀가 공작을 차지할 만한 여자냐 하면 다들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법이라고, 그녀의 추종자들은 언제나 새틴에게 달콤한 소리만 했다.

“새틴 영애, 오늘도 정말 예뻐요.”

“공작님도 분명 좋아하실 거예요.”

“고마워요.”

자신을 둘러싼 영애들이 퍼붓는 아부 천국에 빠진 새틴이 부드럽게 대답했다.

겉으로는 온화한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오늘 루나를 어떻게 골려 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루나 이 계집애는 왜 이렇게 안 오지? 오븐에 데기라도 했나? 그러면 직접 혼내 줄 필요가 없어 편하긴 하겠군.’

그때, 새틴의 옆에 붙어 있던 한 영애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야간 서점 거리에서 일하는 점원에 대한 소문을 들어 보셨어요? 요즘 소문이 자자하던데.”

“그래요? 무슨 일인데요? 왜 일개 서점 점원이 화제가 되는 거죠?”

“그 소년이 흑발의 건강한 피부색을 가진 굉장한 미소년이래요. 미소년이라는 소문이 퍼져서 라미라 영애까지 시종으로 들이려다 실패했다더라고요.”

“그래요? 그분이 실패도 하나요? 정말 속이 상하셨겠어요.”

라미라 영애는 사교계의 여왕으로 대단한 미모의 소유자였다. 경쟁자인 그녀가 뭔가에 실패했다는 말은 무엇보다 새틴을 기쁘게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새틴은 티 내지 않고 무구하게 눈을 깜빡였다.

“시종 일을 하면 돈을 많이 벌 텐데…… 서점 점원보단 시종이 낫지 않나요?”

요즘 수도 영애들 사이에서는 미소년 시종을 곁에 데리고 다니는 것이 유행이었다.

그렇다고 시종들과 문란한 행위를 하는 건 아니었다. 영애들은 늘 공작새처럼 화려하게 자신을 과시했고, 미모의 시종들은 공작새의 장식 깃털인 셈이었다.

일종의 액세서리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시종들은 다른 시종들보다 급료를 많이 받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소년이 고대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실력자라는군요. 그래서 시종으로 데려가려던 영애들이 모조리 허탕을 쳤다지 뭐예요?”

“아, 하긴. 고대어 번역가 일을 하면 이 도시에선 돈을 떼로 벌 테죠. 굳이 시종 일을 할 건 없겠네요. 라미라 영애의 제안을 거절할 만도 하죠.”

공작의 약혼녀라는 단 하나의 신분을 가진 새틴과 달리, 라미라 영애는 대단한 명문가 출신이었다. 원래라면 새틴이 발끝에도 댈 수 없었지만, 운 하나로 공작의 약혼녀가 된 후로 새틴은 라미라 영애를 멋대로 경쟁자로 생각했다.

‘……미소년 점원?’

루나는 새틴과 그녀의 추종자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문 앞에서 엿들었다. 그러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어서 들어와, 루나.”

새틴 근처에 앉은 다른 영애들은 아무도 루나에게 인사하지 않았다. 심드렁한 표정의 영애들은 루나가 명목만 양자매고 사실은 새틴의 시녀나 다름없는 걸 잘 알았다.

“먼저 화장 좀 도와줄래? 성의 있게 좀 해 줘. 네가 내 드레스를 잘못 준비한 탓에 기분이 좀 초조해졌거든. 화장은 네가 제일 잘하니까 말이야.”

새틴이 나긋하게 말했다.

새틴이 운 좋게 좋은 혼처를 잡았다 해도 워낙 가난한 집안의 딸이었다. 새틴은 화장을 해 줄 레이디스 메이드(몸시중 시녀)를 고용하는 대신 루나를 십분 활용하고 있었다.

‘예감이 안 좋은데. 얘가 이런 날에는 꼭…….’

루나는 새틴의 표정을 보고 대번에 귀찮음을 감지했다. 오늘 새틴이 어찌 나올진 뻔했다. 하나하나 다 트집을 잡으려는 속셈이겠지.

새틴이 자기 추종자인 영애들에게 눈짓했다. 루나는 먼저 새틴의 뒤로 가서 머리를 빗기기 시작했다.

“아야! 아프잖아, 루나.”

역시. 얘는 뭐가 이렇게 척 하면 딱이지?

루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예상대로 새틴은 루나가 머리를 빗기자마자 아프다며 난리였다. 새틴의 뒤에 서 있던 무슨 무슨 영애라는 또래 추종자들이 호들갑을 떨며 루나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이분은 귀한 분의 약혼녀예요!”

“혹시 일부러 그런 거예요? 새틴 영애를 질투하는 건 아니겠죠? 주제도 모르고, 기가 막혀…….”

루나는 새틴의 추종자들을 속으로 ‘앵무새들’이라고 불렀다. 그녀들은 새틴의 옆에 붙어 새틴이 루나를 들들 볶을 때 앵무새처럼 함께 재잘거렸기 때문이다.

“새틴…….”

루나는 짐짓 놀란 표정으로 새틴을 보았다. 상처받았다는 듯이.

‘루나, 네가 그럼 그렇지.’

새틴은 안절부절못하는 루나의 표정을 보고 만족했다. 이 계집애는 어쩜 이렇게 멍청하고 굼뜬지, 좀 쪼아야 말을 듣는다.

“머리는 옷 입고 하고, 먼저 드레스나 입혀 줘. 네가 드레스 준비를 제대로 안 해 놔서 급하게 머리부터 액세서리까지 다 바꿔야 하니까.”

쉽게 말해 어제 루나가 준비해 놓은 액세서리며 옷을 다 새로 준비하게 만들 셈이란 말이었다. 이 또한 뻔한 새틴의 작전이었다. 뭘 골라도 싫다며 면박을 줄 생각이었다.

루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야, 드레스 끈에 몸이 긁히잖아!”

드레스를 입혀 주자, 기다렸다는 듯 새틴이 속사포처럼 흠을 잡기 시작했다. 새틴의 등 뒤에 선 루나는 침착한 표정이었다.

‘어쩔 수 없네.’

루나는 이럴 때 새틴의 입을 다물게 할 마법의 주문을 알고 있었다.

“새틴…….”

“왜?”

“너 혹시…….”

“뭐야,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갑자기 무서운 표정을 짓는 루나의 얼굴에 새틴의 추종자들마저 귀를 기울였다.

“드레스가 사이즈가 조금……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일순 방이 무거운 침묵으로 물들었다. 새틴은 신경질도 잊고 눈썹을 치켜세웠다.

꿀꺽. 새틴이 침을 삼켰다.

“뭐? ……뭐가?”

“이 드레스, 저번엔 조금 헐거웠던 것 같은데…… 아냐, 아무것도. 내 기분 탓이겠지.”

그러면서 루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다, 분명히 저번에 허리 부분이 딱 맞게 줄여 놓았는데 오늘은 왜 이러지?”

루나는 아주 무심하게 지나가는 척 작게 중얼거렸다. 새틴이 초조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뭐? 얼마나 꽉 끼는데?”

“글쎄, 아주 미세하게. 한 손가락 ¼의 반의반 정도?”

사실상 사이즈 변화가 거의 없다는 말이었지만, 원체 비쩍 마른 새틴은 조금이라도 살이 오르면 질색하곤 했다.

“어머나! 살이 찌셨나 봐요!”

새틴의 추종자들은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공작님은 마른 여자를 좋아하신다는데!”

“파티 시즌이 이렇다니까요! 만찬회가 너무 많았나 봐. 오늘 당장 공작님과의 약속 날인데 어떻게 해요?”

루나는 이미 앵무새 영애들의 특징도 파악하고 있었다. 그녀들은 불확실한 소문일수록 맹신했다.

‘아니, 너희가 그 공작이 마른 여자를 좋아하는지 어떻게 알아?’

루나는 그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꾹 참았다. 루나가 알기로 그 악명 높은 공작이 어떤 여자든 좋아한다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경거망동하지 마요. 별일도 아닌걸.”

새틴은 창백한 얼굴을 찌푸리고는 매무새를 살폈다.

“나, 정말 살쪘니?”

새틴이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글쎄, 아닌 거 같기도 하고…….”

넘어갔구만. 루나는 속으로 심드렁하게 생각했다.

아침과 오후의 몸치장 시간마다 루나를 빨래 짜듯 쥐어짜는 새틴과 벨레를 대하는 루나의 무적의 주문이었다. 그렇다고 루나 입으로 뭐라 하는 건 아니었다. 살짝 암시를 주는 것뿐이지.

예를 들자면.

‘어머, 새틴, 머릿결이…… 아냐, 아무것도 아니야.’, ‘어머 그 드레스…… 아냐, 아무것도 아니야.’, ‘어머, 혹시 그 영애가 너한테…….’, ‘어머, 머리를 그렇게 묶으면 살이 당겨져서 얼굴에 주름이…….’ 등등이 있었다.

이런 말을 하면 새틴이나 벨레는 대번에 정색하고 루나에게 뭐라고 하던 말도 다 잊어버렸다. 쉽게 말해 주의 돌리기에 최고였다.

물론, 이렇게 약점을 이용하는 것이 자랑스런 행동은 아니란 것은 루나도 알았다. 그러나 그녀도 어쩔 수 없었다.

‘머리 좀 제대로 빗겨! 내 머리카락이 세 가닥이나 떨어졌잖니. 너, 일부러 그런 거지? 나쁜 계집애. 아빠한테 말해서 매질하라 할 거야!’

‘화장을 일부러 천박하게 한 걸 보면 네 본성을 알 것 같다. 수준은 어디 안 가는 법이지. 더 청순하게 꾸며 주지 않을래? 처음부터 다시 해.’

이런 머리를 멍해지게 만드는 헛소리들을 기본 화음처럼 들으며 자라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라도 입을 다물게 만들지 않으면 피곤해지니까.

“네가 정 신경 쓰이면…….”

루나는 부드럽게 말했다.

“허리끈을 더 조여 볼까?”

“뭐 하니, 바로 안 하고?”

새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조여.”

“아, 그리고 분홍색 드레스보다는 어제 다려 놓은 남색 드레스가 낫지 않나?”

“남색 드레스가 어두운 색이라 허리가 더 가늘어 보일 거야! 그걸로 입을게, 어서 가져와.”

루나는 새틴의 표정을 보고 오늘 몸치장은 수월하게 끝나겠다는 걸 직감했다. 머리가 굵어진 루나에게 새틴을 다루는 건 성가신 일일 뿐이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루나는 이 집과 생활에서 벗어나기로 결심했다. 벗어나지 못할 인생이라면 새틴이 위협적이겠으나, 이제 루나에게 새틴은 피곤한 사람일 뿐이지 두려운 사람도, 질투의 대상도 아니었다.

전부 그때, 그 꿈을 꾼 이후부터였다.

루나가 변하기 시작한 건.

* * *

결국 그날, 괴팍한 공작은 새틴과의 약속을 취소했다.

그 탓에 집안이 한차례 뒤집혔다. 속상한 새틴을 달래느라 루나는 평소보다 늦게 자신의 방에 돌아왔다.

루나의 방은 본 저택 뒤쪽에 지어진 조그만 오두막이었다. 이전에는 사냥터지기들의 숙소로 쓰던 곳이다.

본래는 루나도 본 저택 안에 살았다. 그러나 새틴이 자라면서 그녀의 공부방이나 서재, 드레스 룸이 필요해지자 루나가 지내던 작은 방마저 빼앗겼다. 새틴이 공작의 약혼녀가 되고 나자 숙부 부부는 새틴을 위해 아낌없이 돈을 썼다.

종종 루나는 아버지 빚이 아니라도 새틴을 위해 숙부 부부가 쓰는 돈 때문에 자신이 팔려 갈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 스스로의 미래를 두고 자조적 농담을 던질 정도로 루나는 담담해져 있었다.

‘미워 죽겠어.’

물론, 처음에는 숙부 가족들만 봐도 손발이 떨리고 화가 나서 감정 조절이 안 되었지만 말이다.

많이 담담해진 지금도 루나는 종종 숙부 부부의 뒤통수를 마구 째려보며 남몰래 분노의 감정을 잔뜩 날려 주곤 했다.

‘내 결혼까지 1년 남았어. 꿈속에서 본 끔찍한 영혼결혼식…….’

루나는 숙부 가족이 다음 해 자신을 물건처럼 팔아 버릴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지금 당장은 그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여기 머무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루나는 그들과 최대한 거리를 두고 싶었고, 자유가 필요했다. 그녀는 그들의 시선 밖에서 몰래 이 집을 떠날 준비를 해야 했다.

결심한 루나는 숙부 부부에게 저택 뒤편의 조그만 오두막에 살겠다 말했다.

‘저택에 공간이 부족하기도 하고, 하녀들 숙소에 사는 건 저도 좀 그래요. 저녁 식사 이후에는 조용히 있을게요. 저택 안은 안전하니 별일 없을 거예요.’

숙부 가족은 오히려 기뻐했다.

그들은 루나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그저 루나가 일만 제대로 하면 된다는 듯이. 저녁에는 진짜 가족끼리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것이다.

루나가 지내는 조그만 오두막은 저택 뒷문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었다.

유일한 통로인 뒷문은 저택의 2층 계단과 이어져 있었고, 2층은 숙부 가족들의 방이 있는 층이었다. 뒤쪽 숲길과 이어져 있긴 했지만 높은 울타리 너머 숲길엔 아무도 출입하지 않았다.

‘여기 살게 되서 정말 다행이지.’

루나는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비밀을 가지고 있었다. 그 비밀을 지키려면 숙부 가족으로부터 멀어져야 했다.

‘이제 내 진짜 하루의 시작이군.’

저녁 식사 후에는 하녀들도 자유 시간을 가졌다. 저녁을 마치고 나면 하녀들은 숙부 가족들이 마실 차와 술을 준비한 후, 지하 숙소로 돌아갔다.

루나는 몸을 일으켰다.

“잠들면 안 돼.”

루나는 깜빡 무거워지려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눈을 비볐다.

저택의 하루가 끝난 시간.

이 시간은 루나의 진짜 하루가 시작되는 시간이기도 했다.

‘빨리 준비해야지. 이러다 날이 밝겠어.’

루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조심조심 침대 아래의 나무 바닥을 눌렀다.

마룻바닥 아래는 텅 비어 있었다. 그 아래에는 루나가 숨겨 놓은 상자들이 몇 개 놓여 있었다. 루나는 그중 한 개를 꺼내 열었다.

그 안에는 의복과 가발이 들어 있었다. 루나는 급하게 질긴 천으로 만들어진 갈색 원피스를 벗었다. 옷이 바닥에 떨어지자 낡은 스타킹에 둘러싸인 하얀 다리가 드러났다.

먼저, 소담하고 뽀얀 가슴을 붕대로 단단히 감는다. 그리고 사이즈가 작은 남성용 셔츠를 꿰어 입고, 또 그 위에 몸매를 감추는 면 조끼를 입었다. 그다음 남성용 재킷을 걸쳤다.

금발의 긴 머리카락을 단단히 묶어 틀어 올린 다음 흑발의 짧은 가발을 썼다. 그리고 거울을 보며 급하게 눈썹을 그리고 입가와 눈가에 까만 점을 찍었다. 마지막으로는 두꺼운 안경을 써서 얼굴을 가렸다.

‘내가 봐도 다른 사람 같단 말이지.’

루나는 거울을 물끄러미 보았다.

거울 안에는 흑발의 미소년이 서 있었다. 루나는 텅 빈 화장대를 보았다. 새틴의 호화로운 화장대와는 달리 루나의 화장대에는 변변한 분 하나 없었다.

‘지금 내게 필요한 화장품은 딱 하나뿐이지.’

루나의 화장대에는 꼭 필요한 종류의 미용 제품만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미용 약이었다.

‘미래의 내 일기장에 만드는 법이 적혀 있던 약…….’

루나는 옷과 함께 꺼낸 작은 주머니를 뒤집어 털었다. 갈색 약 하나가 나왔다.

루비트 씨앗으로 만든 약.

일명, 루비트 씨앗 약. 루비트 씨앗 약은 몇 년 후 나올 미용 약이었다.

그렇다고 크게 유행하는 약은 아니었다. 제국 귀족들 사이에서는 대리석처럼 하얀 피부가 유행이었는데, 루비트 씨앗 약은 피부를 햇빛에 탄 것처럼 만들어 주는 약이었기 때문이다. 이 약을 먹으면 약 일고여덟 시간 동안 피부색이 본래보다 검어졌다.

제국에서는 하얀 피부를 가진 이들이 각광받았지만, 무희들은 햇빛에 타고 오래 춤을 춰 탄탄한 피부를 요염한 것으로 쳤다. 그래서 루비트 씨앗 약은 무희들이나 사용하는 약이었다.

미래의 루나는 시골 영지에서 약초학 지식을 동원해 몇 가지 꼼수로 약을 만들어 팔았고, 루비트 씨앗 약도 미래의 루나가 만들 줄 아는 몇 안 되는 약 중 하나였다.

루나는 일기장에서 얻은 지식을 통해 텃밭에서 기른 약초를 사용해 직접 루비트 씨앗 약을 만들었다. 그리고 밤 외출을 할 때마다 인상착의를 바꾸기 위해 약을 먹었다.

그날 밤도 루나는 루비트 약을 삼켰다.

“언제 봐도 신기하다니까.”

루비트 씨앗 약을 먹자, 백옥처럼 투명한 그녀의 피부가 서서히 까무잡잡하게 변했다. 피부색까지 변하자 남자 옷을 입은 루나에게서 본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루나는 목에 건 펜던트를 매만졌다. 펜던트를 옷 안으로 잘 넣어 감추고 허리를 폈다.

‘이러다 밤일에 늦겠어.’

루나는 문을 빠끔 열었다. 그녀는 주변을 살피고 오두막을 나섰다.

누가 그녀의 행적을 볼 세라 조심스럽게 숲 뒷길로 향하는 그녀의 머리카락은 짧고 검었다.

오두막을 나서 숲길을 걸을 때, 그녀는 걸음걸이마저 바뀌었다. 성큼성큼 걷는 그녀의 모습은 영락없는 소년의 동작이었다.

* * *

제국의 수도, 멜베른.

통칭, 아카데미의 도시.

이곳의 명물 중 하나는 낮에는 수업으로 바쁜 아카데미 학생들을 위하여 활성화된 밤의 영업 거리였다.

밤에 영업을 하는 거리라고 해도 불법적인 곳은 아니었다. 몇몇 술집과 서점들이 밤새워 영업하기 때문에 야서점 거리로도 불렸다.

멜베른은 아카데미의 도시였으며, 동시에 마법사들의 도시였다. 수많은 마법사들이 연구를 위해 멜베른에 모여들었다.

마법사들은 밤에 더 왕성한 활동을 하는 기묘한 습관을 가진 치들이 많았기에, 그들 또한 24시간 영업하는 명물 야서점 거리의 단골이었다.

7번가 모퉁이에 위치한 <달빛 서점>도, 그런 서점 중 한 곳이었다.

소년 차림의 루나는 서점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24시간 영업하는 멜베른 최고의 지식 창고, 달빛 서점입니다!”

갈색 피부의 미소년, 루나가 카운터에 앉은 청년을 향해 인사했다.

“사장님!”

“오오. 루, 왔냐?”

문을 열고 들어온 루나를 본 젊은 사장 필립의 입가의 미소가 사라졌다. 대신 조금 더 친근한 표정이 떠올랐다.

“밥은 먹었냐?”

“네, 대충…….”

“잘 먹고 다녀.”

야서점 거리의 끝 쪽에 위치한 작은 고서적 전문점인 <달빛 서점>. 이 서점에는 명물 점원이 있었다.

어린 소년인데 웬만한 고대어 번역가들보다 더 고대어에 능숙하다는 미소년 번역가. 그 소년은 일주일에 몇 번 새벽 근무반으로 서점에 출근했다. 소년의 이름은 ‘루’라고 했다.

소년은 달빛 서점에서 늦은 밤, 몇 시간 동안만 카운터를 보았다. 그리고 동시에 번역 일을 했다. 번역을 몹시 잘하는 데다, 새벽 출근 시간에도 늘 생기가 넘치는 루는 필립에겐 보물 같은 존재였다.

“어제 제가 번역하고 간 거 보셨어요? 새로 들어온 일은 없고요?”

“아직은 없어. 곧 들어오겠지. 네가 일하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일이 쌓일 틈을 안 준다.”

소년 루의 모습을 한 여성, 루나는 필립의 말에 개구지게 웃었다.

“이제 교대할게요.”

필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라면 부산스럽게 퇴근 준비를 했을 필립이 그날따라 루나를 뚫어지게 보았다.

“왜 그러세요?”

“아무리 생각해도 아깝다, 아까워.”

필립은 한숨을 푹푹 쉬며 루나가 어제 작업해 놓은 문서들을 들춰 보았다.

“네? 뭐가 잘못되었나요?”

문서를 넘겨 보는 필립의 말에 루, 즉, 루나의 가슴이 불안하게 한번 뛰었다.

“이만큼 고대어 실력이 되는데 마법사나 상급 학자가 되지 않고 이런 데서 소일이나 하고 있다니. 정말 내가 다 아깝다, 야. 넌 크게 될 놈인데.”

필립의 말에 루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순간, 자신이 여자인 걸 눈치채진 않았나, 혹시 번역한 문서가 잘못된 건가 싶었다.

“에이, 학자는 아무나 하나요. 저는 공부엔 큰 관심 없어요. 그리고 마법사도 재능이 있어야 하지…….”

루나는 그러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이 일하면서 걸리지 않는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었다. 아카데미는 무슨 크게 되긴 뭘 크게 된단 말인가. 큰집. 즉, 감옥이나 안 가면 다행이지.

“그래도 너 정도면 아카데미에서도 모셔 갈 텐데.”

“아, 오늘따라 왜 이렇게 민망한 칭찬이세요? 제가 그만두면 좋겠어요?”

루나는 이제 제법 가까워진 필립에게 장난스럽게 말했다.

“아니, 내가 다 너 생각해서 하는 말이지.”

필립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말이야 그렇게 했지만 진짜로 일을 그만둔다면 큰일이었다. 루는 상당한 인재였다. 그 덕에 필립의 가게는 꽤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아카데미는 아무나 가나요? 저야 뭐, 그냥 소일거리로 할 정도의 재능인 거죠.”

필립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뭐가 그리 아까운지, 오늘따라 루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몇 번 고개를 끄덕거렸다.

‘쪼끄만 게 무슨 사정인 건지.’

어느 날, 루는 홀연히 달빛 서점에 나타났다.

유능한 번역가인 루는 필립이 봐도 대단한 재능의 소유자였다. 마법에 재능이 없어도 이 정도 능력이면 국가직에 종사하거나 아카데미에 언어 학부에 전액 장학금을 받고 다닐 수도 있을 터였다. 그러나 루는 지금 하는 일 외에 욕심은 전혀 없는 것 같았다.

‘도대체 어떤 집 애인지도 아직 모르니…….’

루에게는 좀 이상한 점들이 있었다.

성을 알려 주지 않는다는 점, 사는 곳도 모른다는 점, 먼저 연락을 할 방도가 없다는 점, 밤에만 홀연히 나타난다는 점, 등.

그러나 루가 몹시 일을 잘하기에 필립은 다 눈감아 주고 있었다. 어쨌든 루는 오기로 한날은 꼭 정확한 시간에 가게에 나타났다.

‘게다가 생긴 건 뭐 이렇게 쓸데없이 반반한지, 참 묘한 녀석이라니까.’

분명히 달릴 거 달린 사내놈이었다. 고대어 자체가 읽을 수 있는 재능이 사내에게만 발현되는 언어기도 했다.

그러나 중성적인 예쁘장한 얼굴의 루가 나긋하게 웃을 때면 보고 지낸 지 꽤 된 필립조차 야릇한 기분이 들곤 했다. 루의 입술은 연한 핑크빛이었고 속눈썹은 웬만한 여자들보다 길었다.

“그런데 오늘은 귀빈이 오시는 날인데, 너 혼자 괜찮겠어?”

그 말에 루나는 어깨를 움찔했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괜찮아요. 그분 오시는 게 처음도 아니고, 저 혼자 응대할 수 있어요.”

“고생 많았다. 큰 건을 맡은 덕에 이번 달 가게 매상이 좋아.”

“제 덕인가요, 사장님이 운영을 잘하신 덕이죠.”

루나의 칭찬에 필립의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잘생긴 놈이라서 그런지 성격도 참 좋은 녀석이었다.

필립은 오늘따라 뭉그적대며 루의 일을 도와주었다. 루는 제 집처럼 익숙하게 가게 카운터를 차지하고 앉아 분주하게 오늘의 업무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이 녀석이 일한 지도 벌써 꽤…….’

필립은 아직까지도 루를 처음 만난 날을 엊그제처럼 생생하게 기억했다.

그때가 딱 1년 전이었다. 필립은 루를 고용한 자신의 결정만 생각하면 정말 몇 번이고 자신을 치하하고 싶었다.

“네가 여기서 일한 지도 벌써 1년이네. 시간 빠르다.”

“아…… 그러네요.”

루나는 책을 꼽으며 흘리듯 대답했다.

벌써 1년이었다.

* * *

1년 전, 필립은 실의에 빠져 있었다.

‘이러다 가게를 말아먹겠어.’

그의 조부는 돌아가시며 <달빛 서점>을 필립에게 물려주었다.

조부의 <달빛 서점>은 크기는 작았지만 서부 던전에서 들어오는 고가의 귀한 마법 서적을 많이 유통했고, 또 유능한 번역가들과의 연결 고리도 많았다.

그러나 조부가 갑작스레 돌아가시며 필립에게 가게를 물려주었을 때, 필립은 가게의 장부를 보고 경악했다.

조부가 노환으로 가게를 자주 쉰 탓인지 가게의 재정은 상당히 악화되어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조부는 필립에게 고서점 운영에 꼭 필요한 인맥인 번역가들을 소개해 주지도 못하고 돌아가셨다. 필립은 흔들리는 배에 올라탄 것처럼 우왕좌왕했다.

‘그런데 이런 의뢰를 맡아 버렸으니 어째…….’

달빛 서점을 물려받은 필립은 며칠 전 대단히 큰 실수를 했다.

“귀하신 분의 의뢰입니다. 꼭 완수할 수 있을 때만 받아 주십시오. 제 주인께서는 인내심이 뛰어나신 분이 아니라 어서 연구 결과를 보고 싶어 하시는데 일에 지장을 주면 곤란하니까요.”

“아니, 이만한 의뢰비를 주신다니 어떻게든 해내야지요!”

그날, 엄청난 거물 손님의 심부름꾼이 다녀갔다.

그 손님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양의 고대어 번역을 맡겼다. 보좌관으로 보이는 문서를 가져온 사내가 흘린 말로는, 그 귀하신 분이 조부의 단골이었다는 것 같다.

필립은 어떻게든 일을 해내서 가게 운영을 만회할 생각으로 그 의뢰를 덥석 받았다.

큰 의뢰를 받으면 중간 수수료를 좀 주고 주변 서점에 의뢰를 나눠 주는 게 관례였다. 여차하면 주변 서점들에 도움을 청할 수 있겠지, 뭐 그런 심산이었다. 이만큼 큰 의뢰비라면 넉넉한 이중 수수료를 주고도 돈이 많이 남으니까.

그런데.

“아니, 당신 미쳤어? 이렇게 많은 일을 덥석 받으면 어쩌나?”

“이건 고대어 중에서도 가장 어렵다는 흑의 언어와 백의 언어 아닌가? 고대어 사용자 중에도 흑의 언어 사용자는 몹시 드물어. 알아는 보겠는데 다들 바빠서 바로 수배가 가능할지…….”

“잠깐, 이 가문의 문양은…… 세상에…… 의뢰인이 그분이라고? 이보게, 자네. 이런 대단한 분의 의뢰를 망치면 가게 명성이 떨어질 거야. 가게 문 닫을 각오해야 할 걸세.”

필립이 덥석 받은 의뢰에 주변 서점 주인들은 혀를 내둘렀다.

필립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덥석 의뢰를 받고 보니 의뢰 문서들을 감싼 종이봉투에는 드래곤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주변 서점 주인들은 이 문양이 제국의 유일한 공작 가문의 문양이라 했다.

‘아니, 로텐베른 공작의 의뢰인 줄 알았다면 절대 안 받았지!’

제국을 뒤흔드는 로텐베른 가문의 젊은 가주, 아키스 드 로텐베른 공작.

그는 아카데미의 고명한 교수이자 마법사로도 유명했다. 즉, 마법계를 꽉 잡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 성질 더럽다는 공작의 진노를 산 고서점이 어떻게 될지 필립은 정말 상상하기 싫었다. 거물 고객을 실망시킨 고서점이 걸을 길은 뻔하다. 가게를 말아먹을 날도 멀지 않았다.

아아, 할아버지의 유서 깊은 가게가 내 손에서 망하는 건가. 필립은 고민이 막심했다.

‘게다가 구하려는 번역가는 안 구해지고…….’

필립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며칠 전부터 멀끔하게 생긴 한 소년이 매일같이 찾아와 일을 달라 졸라 대기까지 하니 필립은 미칠 지경이었다.

소년이 찾아와 처음 일을 달라고 한 날. 필립은 심드렁하게 몇 가지 언어를 할 줄 아냐 물었다. 그랬더니 소년은 눈만 둥그렇게 뜨고 이렇게 대답했다.

“몇 가지 언어라뇨? 고대어가 다 고대어 아닌가요?”

필립은 더 말하고도 싶지 않아졌다.

그러나 이 소년이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 같기에 친절함을 발휘해 대답해 주었다.

“흑, 백, 청, 적, 녹, 금, 은의 언어, 고대어가 일곱 가지가 있잖느냐. 그중 뭘 할 줄 아는데?”

“그게…….”

소년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아무거나 할 줄 아는데요.”

“거짓말 마라. 내가 아무리 번역할 줄 모르고 고서점 운영 일이며 중개 일을 한다고 해도 고대어가 뭔지는 안다. 거 왜, 고대어는 혈통의 언어 아니냐. 흑의 언어는 악마의 언어, 백의 언어는 요정의 언어, 그런 거 말이다. 네 선조 중 누군가가 그런 존재들에게 언어를 배웠어야 재능 발현이 가능한 엄청나게 대단하고 어려운 언어인데 그걸 다 할 줄 안다고?”

소년은 처음 들었다는 듯 핑크빛 입술을 살짝 벌리고 필립을 보았다.

그러더니 한다는 말이 이것이었다.

“더…… 더 설명해 주시면 안 돼요?”

이거 얼굴만 멀쩡하지 미친 애 아니야? 필립은 어이가 없어서 혀를 찼다.

장사도 안 되는 김에 소일거리 삼아 말해 주었다. 여자애도 아닌데 말 못해 줄 이유도 없었다.

“고대어가 이미 사멸한 고대의 마법사들이 사용하던 언어라는 건 알지?”

“네, 알죠. 그럼요.”

고대어는 주로 그 언어를 사용하던 고대의 마법사들을 지칭하여 주로 일곱 가지로 분류되었다.

흑, 백, 청, 적, 녹, 금, 은의 언어.

“그중 가장 어려운 건 악마들이 흑마법사에게 가르쳤다는 흑의 언어지. 그리고 고대 마법사들이 얼마나 괴팍한 치들인지, 두세 가지 언어를 사용하던 이들은 그 언어들을 섞어 최대한 복잡하게 엮어서 써 놓기도 했어. 최대한 비꼬아서 말이야. 왜, 자신의 비밀 주문을 남이 알면 그렇잖아? 그런 문서를 번역하는 데 가장 비싼 값이 들지.”

“네.”

“어쨌든, 그래서 고대어를 재능 언어라고 하지. 타고난 재능이 있어야 배울 수 있으니, 보통은 많아 봐야 두세 가지를 할 수 있을 뿐이야. 내가 네 말에 속아 넘어가지 않은 이유도 그거다, 욘석아. 고대어를 다 할 줄 안다니, 거짓말에도 정도가 있어.”

필립은 심드렁하게 말하곤 이제 그만 나가라는 듯 휘휘 손을 저었다.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소년이 또랑또랑하게 대답했다.

그래서 이제 포기했겠거니 했는데, 문제는 이튿날부터였다. 소년이 매일매일 가게에 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사람 마음 심란해지는 새벽에만 불쑥 찾아왔다.

그리고 매일 와서 한다는 말이, 일단 시도라도 해 볼 테니 아무거나 일을 시켜 달라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필립도 이제 귀찮아서 쫓아내는 걸 포기할 지경이었다.

‘아이고, 정말 가게에 불이 떨어졌는데…….’

공작의 의뢰에 대한 고민으로 필립이 잔뜩 시름에 잠긴 그날도, 소년은 접착제처럼 서점에 달라붙어 있었다.

“너 아직도 안 갔냐?”

필립은 반쯤 체념한 투로 말했다.

“그러니까, 일만 주시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니까요…… 점원 일이라도 상관없어요.”

“아니, 자격증도 없고 경력도 없는 놈을 어떻게 믿고 맡겨?”

“누구에게나 처음은 필요하잖아요. 왜, 저번에 사장님이 무허가도 일할 수 있다 했잖아요.”

필립은 어이가 없었다.

소년은 딱 봐도 신분증도 나오기 전의 어린아이였다. 제국에서는 열아홉 살이 되어야 제국 시민의 자격이 생겼다. 일명 무허가라 불리는 이들, 자격증이 없거나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번역가들도 상당히 많은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건 성년에 한해서였다. 미성년자라면 최소한 예전에 일을 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경력서라도 있어야 했다.

그런데 소년은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길드에 가서 시험을 보면 무허가들도 임시 허가증을 발급 받을 수 있었는데, 소년은 그것조차 하지 않았다.

“그럼 어느 가문의 아이인지 성이라도 대 봐.”

미소년, 루라는 가명을 댄 루나는 그때 필립의 말에 우물쭈물했다.

“집이 엄해서 일을 하는 걸 들키면 큰일 나거든요.”

필립은 한숨을 쉬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수많은 가게를 두고 왜 제게 일을 달라 조르냐 묻는 말에, 루나는 다시금 입을 꾹 다물며 생각했다.

‘역시 무리인가? 하지만 모처럼 생긴 능력이니 일을 맡을 수만 있다면…… 번역가를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 하던데…….’

루나가 며칠째 이곳에 와서 일을 달라 조르는 이유, 그녀가 <달빛 서점>을 택한 이유는 딱 하나였다.

그나마 그녀에게 번역가 자격증이니 경력증이니 필요하다는 것을 친절하게 설명해 준 사람이 필립뿐이었기 때문이다. 또 필립은 그녀가 봐 온 서점 주인 중 가장 젊고 어수룩해 보였다.

고대어와 마법사들의 세계.

여성인 루나는 결코 접근할 수 없는 세계였다. 몸으로 부딪혀 정보를 얻을 수밖에 없었다.

필립은 자포자기해서 중얼거렸다.

“그럼 계속 거기 있어라. 뭐 좀 먹을래? 어차피 가게가 망하게 생겼는데. 너, 집에는 안 들어가도 되냐?”

“가게가 망해요……?”

필립은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이 되어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소년에게 털어놓았다. 소년이 놀란 듯 바라보았다.

“이게 그 귀빈이 맡긴 문서예요?”

루나는 필립이 바라보며 한숨만 쉬고 있던 문서를 집어 들었다.

“야,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필립이 정색했다. 루나는 필립의 말을 무시하고 문서를 빠르게 눈으로 훑었다.

“이거, 제가 번역해 볼게요. 그럼 일을 주시겠어요?”

루나는 빠르게 문서를 훑었다. 뜻 모를 단어들의 연속. 그러나 단어 하나하나의 뜻은 확연히 머릿속에 들어왔다. 해볼 만할 것 같았다.

“그거 이리 안 내? 파손이라도 됐다가는 나는 당장 죽은 목숨이다, 인마!”

필립은 기겁했다.

그러다 소년의 표정을 보고 멈칫했다. 앳된 얼굴 위로 드러난 눈빛이 꽤 진중했다.

“펜 주세요. 지금 적어 드릴 테니까.”

소년의 얼굴은 표정이 다 사라져 있었다. 중성적인 목소리 톤도 더 낮게 변했다.

‘……에라 모르겠다.’

필립은 펜과 종이를 주었다. 그리고 루나는 제자리에서 빠른 속도로 글을 적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게 뭐가 어려워?’

루나는 필립이 엄살을 떠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냥 술술 읽혔다. 이제는 제국어보다 빨리 읽혀서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냥 읽히는 대로 쓰면 되는 것 아닌가? 아, 그런데 몇 번 봐야 단어 뜻이 떠오르는 부분들도 있었다. 이런 걸 어렵다고 하는 건가? 그래도 읽히지 않는 단어는 없었다. 물론, 문서 내용이 좀 암호 같고 해괴하긴 했다.

‘아…….’

머릿속으로 단어가 떠오르고 그 단어가 영상처럼 머릿속으로 재생된다.

고대어를 읽는 건 몹시 신비한 과정이었다. 어느새 정신 차리고 고개를 들어 보니 손이 아프고 등이 땀으로 흥건했다. 루나는 자신을 귀신 바라보듯 보는 필립을 발견했다.

“오늘 안에는 다 못해요. 일단 이만큼은 했어요…….”

루나는 그제야 뺨을 붉히고 고개를 확 숙였다.

어떻게든 일을 하고 싶은 생각에 무리해서 깡을 부리긴 했는데, 그것과는 별개로 들킬까 두렵지 않은 건 아니었다.

“왜요, 너무 느려요?”

필립은 루나가 적은 종이를 보고 홀린 표정이었다.

“……저, 정말 아무 경력이 없으신 거 맞죠?”

“네?”

루나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필립을 보았다.

‘이거, 지어낸 거 아냐?’

필립은 턱이 빠질 것 같았다.

고대어 번역가들은 온갖 미신을 가지고 있었다. 달이 뜨는 날에만 번역이 가능한 치도 있었고, 점을 보듯 물을 떠 놓고 정신을 집중해야 하는 이들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특정한 장소, 이를테면 산속이나 동굴에서만 작업이 가능했다. 그렇게 그들은 힘겹게 한 장 한 장을 번역했다.

그런데 이 속도는 무엇이란 말인가. 눈앞의 미소년은 순진무구하게 필립을 보고 있었다.

“너…… 너.”

필립이 문서 한 장을 내밀었다.

“이것도 해 봐.”

루나는 아픈 손을 주무르며 그 문서도 번역해 냈다.

이미 번역본이 있는 문서였다. 소년이 제대로 번역한 게 맞다는 걸 깨닫자 손발이 다 떨렸다. 이 소년은 천재였다.

“그래서…….”

필립이 마른침을 삼키고 말했다.

“일자리가 필요하다고?”

루나의 얼굴이 밝아졌다. 고운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일을 주실 거예요?”

필립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 순간 머릿속으로 강렬한 예감을 받았다. 반짝이고 무거운 것에 대한 강하고 근거 없는 예감.

바로 돈 냄새였다.

“일단…… 이번 건을 정식으로 한번 맡아 줄래?”

필립은 소년에게 진지하게 말했다.

그는 그리고 그날 소년을 믿고 일을 맡긴 자신을 두고두고 치하하게 된다.

* * *

“어이구, 어이구. 야, 천천히 먹고 마시면서 해.”

그로부터 사흘 후, 필립의 태도는 사뭇 변해 있었다. 필립은 집중해서 작업 중인 루나에게 간식거리를 나르며 말했다.

루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가공할 집중력으로 글씨를 써 내려갔다. 공작의 의뢰를 며칠간 닥치는 대로 번역했다. 공작은 기한으로 2주를 주었지만, 루나는 단 사흘 만에 모든 작업을 끝냈다.

“이걸로 끝났어요. 이게 마지막이에요.”

루나는 채 잉크가 마르기도 전의 문서를 필립에게 내밀었다.

“확실하지?”

“확실하고 말 것이 어디 있어요? 말이 그냥 말이지, 번역하면 되는 것 아니에요?”

루나는 필립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필립은 희열마저 느낄 느꼈다. 이 녀석, 진짜 천재 아니야? 필립은 속으로 그 말을 삼켰다. 루나는 그제야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어렵게 말을 꺼냈다.

“그럼, 의뢰비는…….”

“아, 의뢰비는 후불로 받기로 했다. 왜, 급전이 필요하냐? 선금 좀 당겨 줄까?”

“뭐…… 급한 건 아닌데요. 빨리 주시면 주실수록 좋죠.”

당시, 한 번도 돈을 직접 벌어 본 적 없는 루나는 자신의 순진함이 티 날까 전전긍긍했다. 루나는 긴장을 감추려 노력하며 여유를 연기했다. 그래 봐야 필립의 눈에는 뻔히 다 보였지만 말이다.

‘아니, 도련님처럼 곱게 생긴 놈이 무슨 사연이 있어서…… 저 허름한 차림은 무엇이며, 도대체 어느 집 애지?’

필립은 소년에 대해 캐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어차피 대답해 주지 않을 것 같았다. 필립도 그 정도 눈치는 있었다.

“의뢰가 빨리 끝났으니 공작가로 이 사실을 전달하마. 의뢰비는 빠르면 3일, 늦으면 일주일 정도 걸릴 거야. 그러니 일주일 후에 다시 와.”

“알겠어요. 이 시간에 오면 될까요?”

“그럼, 우리 서점은 24시간 영업이니까. 당분간 내가 계속 야간 근무할 테니 꼭 직접 오고.”

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의뢰인이 돈을 지불해야 그녀 몫이 떨어진다는 것 정도는 당연히 이해했다.

그리고 일주일 후, 루나는 묘한 초조함을 느끼며 서점으로 향했다. ‘정말 괜찮을까? 돈을 받을 수 있겠지? 나, 잘한 거지?’ 몇 번이고 속으로 되뇌었다.

루나는 자신이 의뢰를 제대로 하지 못했을 것이란 의심은 없었다. 고대어는 루나에게 의심 없이 술술 읽히는 언어였다. 도대체 왜 이런 능력이 생긴 건지는 모르겠지만.

다만, 금기를 깼다는 두려움과 필립이 저를 속이지 않고 제대로 돈을 줄까, 의뢰인이 만족했을까, 그런 여러 가지 생각이 들어 마음이 술렁였다.

“왔냐? 잘 왔어, 어서 이리 와.”

필립은 루나를 발견하자 대번에 손짓했다. 그녀는 소년을 흉내 낸 걸음걸이로 성큼 걸어 다가갔다.

“이게 아주…… 큰일이 났다.”

“네?”

“그게 말이야. 일이 생각보다 빨리 끝나 공작가로 연통을 보냈잖냐, 와서 계산하고 번역물을 가져가라고. 야, 그 대단한 곳에 사람을 보내는데 손발이 다 떨리더라. 그런데, 이 번역 의뢰가 꽤 급한 일이었나 보더라고.”

“그런데요?”

“그렇긴 뭐가 그래. 아주 극찬을 하면서 의뢰비도 약속한 것보다 훨씬 두둑이 쳐주더라니까. 우리 가게를 앞으로 잘 봐주고 일을 종종 맡기겠다느니, 아주 난리가 났다, 야.”

“잘된, 거죠……?”

“그럼, 그렇고말고! 로텐베른 공작은 아카데미에서 제일 저명한 교수니까, 이제 교수 고객이며 학생 고객들이 미어터질 거야. 정말 잘했다, 잘했어. 그 유명한 공작을 의뢰인으로 유치하다니, 이제 이 가게는 대박 날 거다!”

루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잘은 모르겠지만 자신이 일을 잘했다는 건 알겠다.

“그럼 의뢰비는…….”

“아, 그렇지. 이번 의뢰비는 바로 나눠 줄게. 자, 여기.”

필립이 작은 주머니를 내밀었다.

“세 봐.”

루나는 필립의 앞에서 조심스레 주머니를 열어 보았다.

‘이걸 다 준다고? 진짜로?’

그녀는 숨을 쉴 수 없었다.

숙식을 하는 하녀의 한 달 급료가 당시 제국에서 금화 열 개였다. 그런데 필립은 자그마치 금화 100개를 그녀의 몫으로 주었다. 루나는 하녀 열 명의 급료를 무려 사흘 만에 벌었다.

루나의 용돈이 한 달에 은화 세 개였다. 금화 한 개는 은화 열 개이다. 그렇게 손이 부르트도록 일하고 고작 숙모 가족은 그녀에게 은화 세 개를 용돈으로 주었다.

‘겨우 며칠, 몇 시간 일한 걸로 돈을 이만큼이나 벌었다고? 어렵지도 않은 일인데?’

이게 겨우 한 가지 의뢰로 받은 돈이면, 그다음엔……. 루나의 머리가 아찔해졌다.

“돈 벌고 싶다 했지? 이제 돈은 걱정하지 마. 물론, 공작 같은 후한 고객은 흔치 않아서 다른 의뢰는 기대 이하일 수도 있는데, 이제부터 내가 돈 되는 알짜 일만 잡아 올 테니 금방 돈도 모을 수 있을 거다.”

루나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돈을 번 것이 너무 좋아서. 그녀는 간신히 고개만 끄덕였다. 필립은 조심스레 루나의 눈치를 살폈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 서점 전속 번역가로 일할 생각 있어? 조건은 좋게 해 줄 테니까.”

필립은 루나가 거절할까 전전긍긍하는 눈치였다.

‘나한테 번역 일은 어렵지 않아. 얼마든 하면 되는걸. 정체를 들키지 않고 일하면, 그러면 1, 2년 안에 도망칠 자금을 만드는 것도 가능해…….’

이만한 돈을 벌 수 있다면 더한 일이라도 해야 할 판이었다.

공포와 죄책감을 현실이 이기는 순간이었다. 루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겠어요.”

* * *

그게 벌써 1년 전.

필립과는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

루나는 어떤 경력도 학위도 자격증도 없었다. 그녀는 아무 근거 없이 자신을 믿고 일을 맡겨 줄 살짝 어설픈 고용주가 필요했고, 필립은 가게의 경영난을 타개해 줄 탁월한 인재가 필요했다.

루나는 필립과 협상한 끝에 주 4일, 번역가 겸 점원으로 일하기로 했다. 필립이 쉴 수 있도록 다음 교대 직원이 출근하기 전인 열 시부터 새벽 두 시. 루나가 이곳에 근무하는 시간이었다.

루나에게는 최적의 조건이었다. 번역 일과는 별개로 점원 일로도 급료를 받을 수 있는 데다, 공짜 작업장까지 생긴 셈이었다. 게다가 번역하는 데 필요하다면 서점에 갖춰진 책을 참고할 수도 있었다.

루나는 작업물을 집으로 가져갈 수 없었다. 그러다 고대어 책들을 숙부 가족에게 들키면…… 상상도 하기 싫었다.

‘조금 졸린 게 흠이지만, 새벽 근무 시간엔 필립 사장님이 점원 급여까지 주시는 게 미안할 정도로 한가하니까.’

오늘따라 뭉그적대던 필립이 퇴근하자, 가게는 온전히 루나만의 공간이 되었다. 조용한 새벽 서점은 이미 그녀에게 익숙한 공간이었다.

‘정말 괜찮은 직장이야. 언젠가 이 도시를 떠야 하는 것만 아니면 평생 일하고 싶을 정도인걸.’

루나는 종종 생각했다.

이 거리는 밤에도 영업하는 가게들이 즐비했기에 안전했다. 치안 기사대가 새벽까지 순찰을 하니 취객이나 도적들이 들이닥칠 걱정도 없었다.

‘이런 좋은 일이 어디 있어.’

야간 영업을 하는 고서점의 야간 점원 겸 고대어 번역가 소년 루. 이 소년 모습이 루나의 비밀이었다.

그녀의 성공적 이중생활은 아직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다. 루나는 목에 걸린 펜던트를 습관처럼 쓰다듬었다.

‘그건 그렇고 새틴이 내 이야기를 할 정도라니. 나, 이상한 소문난 건 아니겠지?’

오늘 얼핏 새틴과 새틴의 추종자인 영애들이 자신에 대해 하는 말을 들었다. 달빛 서점의 미소년 점원이라니, 달빛 서점에서 일하는 소년 직원은 자신뿐이었다.

‘미소년인지 뭔지는 모르겠고, 여자니까…… 사람들 눈에는 중성적인 외모로 보이나 봐.’

얼마 전, 이상한 사람들까지 찾아왔다. 한 고매한 귀족 영애의 의전 시종이 되어 주면 두둑한 급료를 주겠다 했다. 라미라 영애의 제안을 받은 그 소년이 자신이라는 걸 알면 새틴은 기절초풍할 것이다.

‘큰일 나기 전에 더 몸 숙이고 조용히 살아야지. 이 일도 오래는 못하겠어.’

루나는 입술을 매만지며 생각했다.

‘아니, 그런데 이게 다 귀빈 때문이야. 귀빈만 아니었어도 내가 이렇게 주목 받을 일은 없잖아?’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루나, 그녀의 남장 모습인 ‘루’. 소년이 주목 받기 시작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그녀에게 붙은 귀빈 단골손님 때문이었다.

귀빈. 몹시 중요한 사람.

즉, 신분이 높고 돈을 잘 쓰는 고객이란 뜻이었다. 루나가 하는 일은 대부분 번역 일이니 어려운 고가의 마법서 번역 의뢰를 펑펑 맡기는 사람이란 뜻이 되겠다.

‘그런 대단한 분이 매일 이런 작은 서점에 드나드니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는 거 아니야? 그래서 주목 받는 건가? 지금껏 눈에 안 띄고 조용히 잘 지내고 있었는데…….’

단골손님이 너무 유명한 이였기에 그녀도 덩달아 주목 받기 시작했다. 그가 찍어 계속 일을 시키는 소년이 있다, 뭐 이렇게 소문이 시작된 모양이었다.

아직까지는 암암리에 소문이 난 정도였지만, 계속 그와 엮이면 루나도 곤란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많아졌다.

루나는 작게 하품을 했다.

미래를 위해 준비를 하는 시간이라 루나는 힘든 줄도 몰랐다. 하루에 서너 시간만 자는 데도 제법 익숙해진 참이었다.

오늘의 피로는 육체적 피로가 아니라 정신적인 문제였다. 오늘은 새틴이 법석을 피워서 그런지 유난히 피곤했다.

‘이게 다 공작 때문이야.’

공작이 새틴을 바람맞히지만 않았어도 새틴을 달래 주느라 힘을 뺄 일은 없었을 것이다. 루나는 새삼 그가 원망스러웠다.

뎅―

루나의 그런 생각을 눈치챈 것처럼 놋쇠 종이 달린 가게의 시계가 고독하게 시간을 알렸다.

어느새 시간은 새벽 한 시였다.

루나는 괜히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먼지 낀 거울에 자신의 얼굴을 확인했다.

루나가 전 재산을 털어 샀던 비싼 가발은 진짜같이 정교했고, 안경으로 가려진 얼굴 너머로 성숙한 소녀의 얼굴은 소년을 가장하고 있었다.

밤에 나올 때면 루비트 약을 먹고 인상을 바꾸는 화장을 했다. 그리고 입가와 눈가에 점을 찍었다.

루나는 사람들이 타인을 특징으로 기억한다는 것을 알았다. 본래 그녀에게는 없는 특징, 입가와 눈가의 점을 점원이자 번역가인 소년 ‘루’는 가지고 있었다.

루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정확히 한 시 5분이었다. ‘그’가 오는 시간이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오래된 문이 삐걱이는 소리가 루나의 심장 안을 세차게 두드리는 것 같았다. 이어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가게의 낡은 계단을 자극했다.

삐걱. 삐걱.

루나의 심장이 더욱 뛰기 시작했다.

계단을 내려온 사내는 검은 옷을 입은 흑발의 남자였다. 루나의 등이 긴장으로 힘이 들어갔다. 사내는 카운터 앞까지 천천히 걸어왔다.

그는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을 정도로 훤칠한 미남자였다. 미남자였으나, 남성적인 느낌이 물씬 풍겼다. 그리고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신비한 보랏빛 눈동자.

그는 고급스러운 긴 재킷으로 몸을 감싸고 있었다. 어깨는 넓었으나 몸은 후리후리했다. 밤이라서일까, 마치 피가 흐르지 않는 것처럼 창백해 보였다.

그는 천천히 루나의 앞까지 다가왔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그가 말할 때마다 핏대 선 목울대가 울리듯 움직였다.

“부탁한 일은 다 되었습니까?”

“네.”

루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조심스레 눈을 들어 맞은편의 사내를 보았다.

젊은 로텐베른 공작.

그녀가 아는 한 가장 아름답고 두려운 사내가 맞은편에 서 있었다.

‘언제나 제시간에 오는군. 정말 껄끄러울 정도로 존재감 강한 사내라니까.’

루나는 그의 보랏빛 눈을 힐끔대며 속으로 생각했다.

제국의 유일한 공작, 젊은 로텐베른 공작은 이 서점의 단골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루나의 단골이고, 귀빈이었다.

루나가 남몰래 간직한 비밀이다.

몇 번을 보아도 익숙해지지 않는 사내였다. 그는 묘하게 루나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경을 칠 것 같단 말이지. 저런 사람이 뭐가 부족해서 매일 여기에 찾아오는 건지…… 본인은 고대어를 못하나?’

도대체 무슨 그렇게 연구할 거리가 많은지, 언제 보긴 하는지 싶을 정도의 번역물들을 맡기는 그였다.

루나는 허둥지둥 문서들을 챙겼다.

“저번 주에 맡기신 의뢰품들…… 번역본은 여기 있고요, 또 그리고 그제 사람을 보내서 맡기신 건…….”

마음이 어찌나 급한지 손이 파르르 떨릴 정도였다.

“…….”

젊은 로텐베른 공작, 아키스는 사람을 뚫어져라 보는 버릇이 있는 사내였다.

그는 루나를 이상한 사람 보듯 처음부터 끝까지 찬찬히 관찰하곤 했다. 그녀가 무엇인지 알아내려는 것처럼.

루나는 사교계에 나가 본 적 없기에 젊은 남자와 오래 이야기해 본 경험이 거의 없었다. 그것도 아키스처럼 훤칠하고 단단한 몸을 가진, 아름다운 사내와는 더더욱. 심야의 작은 서점에 그와 둘만 있으면 긴장해서 심장이 쿵쿵 뛰곤 했다.

‘어, 분명히 어제 왔을 때 가게에 책과 문서를 두고 갔는데, 어디 갔지.’

루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분명히 이쪽 책장에 두고 잘 잠가 뒀는데…….”

그러나 문서는 온데간데없었다. 긴장한 루나의 등에 살짝 땀이 찼다.

“저, 관리를 소홀하게 한 게 아니라, 사장님이 더 안전한 곳에 치워 두셨나 봐요. 잠시만요.”

루나는 아키스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키스가 아무 말도 없자 루나는 신경이 바짝 탔다.

그는 여자에게 이상한 상상을 하게 만드는 표정을 가지고 있었다. 루나는 종종 그 시선이 ‘난 모든 것을 알고 있다’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그의 앞에서는 수그러들곤 했다.

‘잘생긴 인물이 아깝게 정말 표정 하나 없다니까. 눈매는 맹수 같아서 무섭게 생겼어. 얼른 찾아서 보내야지.’

루나는 서랍에서 열쇠를 꺼냈다. 필립은 가장 중요한 문서들을 책장 위 칸에 있는 서랍에 넣어 잠가 두곤 했다.

그녀는 여자치고 큰 키였지만, 나이 대 소년들만큼 크지는 않았다.

루나는 까치발을 들어 서랍을 열기 위해 낑낑거렸다. 고군분투한 끝에 겨우 열쇠를 꽂아 넣었다. 그리고 서랍을 열었다. 목을 빼 확인해 보니 그녀가 문서를 잘 넣어 둔 빨간 가죽 파일이 꽂혀 있었다.

‘꼭 이럴 때 발 받침대가 안 보인다니까. 사장님은 또 어디다 치운 거야.’

그녀는 속으로 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등 뒤로 재촉하는 듯한 아키스의 시선이 느껴졌다.

‘무서워…….’

루나 같은 소시민에게 아키스 드 로텐베른 같은 대귀족은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부하들이 들이닥쳐 ‘네 녀석! 어느 안전이라고 망발이냐!’ 하고 쳐들어와 그녀를 다그칠지도 모른다.

게다가 공작이 별로 성격이 좋지 않은 남자라는 것을 루나는 이미 새틴을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해 잘 알았다. 아니, 제국민 중에 공작의 성정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여기 있어요! 문서.”

루나는 아키스에게 급히 문서를 내밀었다. 아키스는 눈짓하고 문서를 받았다. 그리고 다음에는 아키스가 번역을 맡긴 고대어 책을 찾아야 했다.

루나는 서랍 바로 위, 책장 가장 위 칸에 필립이 소중히 꽂아 놓은 책을 발견했다. 무슨 정리를 이렇게 뒤죽박죽 해 놓은 건지. 필립의 나쁜 점 중 하나였다.

‘이건 아예 팔이 안 닿을 것 같은데.’

루나는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제야 발 받침대가 눈에 들어왔다.

‘찾으려 할 땐 꼭 없다니까.’

마법이 따로 없었다. 루나는 며칠 전부터 다리가 후들거리던 발 받침대를 딛고 올라가 책을 꺼냈다. 마음이 급했다.

“어?”

그때, 루나의 몸이 뒤로 휘청했다. 우둑하는 소리가 났다. 며칠 전부터 후들거리던 받침대 다리가 삐끗한 모양이다. 루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

그때, 루나의 뺨에 무언가 단단한 것이 스쳤다. 루나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단단한 무언가에 루나의 몸이 닿아 있었다. 이어 큰 손이 그녀의 허리를 잡았다.

‘아…….’

정신을 차려 보니 루나의 머리는 아키스의 가슴에 닿아 있었다. 그의 몸에서는 묘하게 알싸하고 달콤한 향기가 감돌았다.

아키스는 제일 위 칸에서 그녀가 꺼내려던 책을 어렵지 않게 뽑았다. 루나는 놀라서 고개를 돌렸고, 그러느라 그의 가슴에 코를 박았다.

“으!”

루나가 억눌린 소리를 냈다. 그녀가 휘청하자, 아키스가 그녀의 팔을 잡아 끌어당겼다.

“죄, 죄송…….”

루나는 너무 놀라고 심장이 쿵쿵 뛰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입이 얼음이 된 것 같았다.

아키스는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안에 들린 책을 한 번 보았다.

“조심하는 게 좋겠군요.”

아키스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키가 너무 커서 루나의 머리 위에서 그의 목소리가 울리는 것 같았다. 루나의 머릿속이 쿵쿵 울렸다.

너무 가까웠다. 여자인 걸 들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루나는 어깨를 움츠렸다.

“그리고 내 책은 여기 있고.”

아키스는 확인하라는 듯 책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루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끄덕였다.

“네, 맞아요.”

이렇게 심장이 뛰는 건 태어나 처음이었다.

루나는 눈만 굴렸다. 아키스가 비켜설 때까지 루나는 시간이 멈춘 줄 알았다. 루나는 뛰듯이 카운터 뒤로 숨어들어 갔다.

‘향수인가?’

그에게선 항상 독특한 향기가 풍겼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청명하고 부드러운 향이 코끝을 자극했다.

아주 희미했지만 향수 냄새 같기도 했다. 혹은 그냥 그의 타고난 체향일까. 루나는 눈을 내리깐 채 그의 향기를 곱씹었다.

“번역한 내용…… 확인해 보세요. 마법사 리보니치의 마법서 3장 56페이지부터 6장까지. 7장 88페이지부터 끝까지.”

그는 문서를 펼쳐 루나가 번역한 내용을 훑어보았다. 그는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하군요. 잘했습니다.”

“……네?”

루나는 뜻밖의 말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괜찮군요.”

“네, 네.”

루나는 심장이 더 거세게 뛰는 걸 느꼈다. 이 무서운 남자에게 칭찬을 받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아키스는 코트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보수입니다.”

“네, 감사합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는 평소보다 넉넉한 보수를 지불했다. 루나는 금화를 직접 세 보고는 남는 금액을 확인했다.

“잠시만요, 돈을 많이 주셨어요. 거스름돈을…….”

그는 손을 들어 루나를 멈췄다.

“몇 살입니까?”

“……네?”

루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보았다. 그리고 눈이 마주치자 얼른 고개를 숙였다.

“성년인지 아닌지 궁금해서.”

그가 나직이 말했다.

루나는 막 성년이 되었지만, 그에게 알려 주고 싶지 않았다.

“그게…….”

아무 대답 못하는 그녀를 보고 아키스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나는 누가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 데 익숙하지 않은데.”

루나는 저도 모르게 다시 눈을 들어 그를 보았다.

“죄송합니다. 일 외의 질문은 조금…….”

나이 따위가 무슨 대단한 비밀이겠냐마는, 루나는 그에게 조금이라도 괜한 정보를 주고 싶지 않았다. 지금도 그가 의심하진 않나 여러모로 걱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는데 불쾌함 때문인지, 아니면 그녀가 재미있어서인지 알 수 없었다.

“대답하기 싫으면 됐습니다.”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돌렸다.

“오늘은 중요한 문서를 맡기려 합니다.”

“네.”

“서부에 새로 발견된 던전에서 발굴된 마법서들입니다. 바로 처리해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럴게요. 오늘부터 바로 작업에 들어갈게요.”

루나는 자꾸 붉어지는 귓가를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며 그가 내민 마법서들을 체크했다.

이 정도 고급 마법서에 빼곡한 양이면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그녀는 급하게 셈을 하기 위해 애썼다.

“그러면, 가격이…….”

아키스는 루나의 말을 길게 듣지 않았다.

“보수는 통상의 두 배를 주죠. 그러니 무슨 일을 하고 있든 가장 최우선으로.”

셈을 하느라 루나는 그가 하는 말을 반 박자 늦게 깨달았다. 그녀는 작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최우선으로.”

그는 보랏빛의 깊은 눈동자로 빤히 루나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이렇게 그녀를 응시할 때면 루나의 심장은 주책없이 두방망이질했다.

아키스는 독특한 느낌의 사내였다. 표정이나 행동은 더없이 금욕적인데 몸에서 풍기는 기운은 날카롭고 활기가 넘쳤다. 이상하게 마음을 자극하는 분위기를 가졌다.

자신이 여자인 걸 그가 눈치채진 않았나, 그래서 묘하게 유별나게 굴지 않나, 그런 생각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은 그것이 아님을 아는데도.

‘만일 내가 여자인 걸 들키면 가만두지 않았겠지. 아카데미의 교수들은 보수적이라고 들었으니…….’

루나는 마른 입술을 핥았다. 아키스는 루나의 얼굴을 응시하다 조용히 물었다.

“이름이 루라고 했습니까?”

“네?”

“나는 되묻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가 나직이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울리는 듯한 미성이었다. 순간 루나는 그가 자신에게 무언가 의미 있는 질문을 한 것으로 착각할 뻔했다. 그는 여인에게 그런 여지를 주는 사내였다. 루나는 공작이 저의 가짜 이름을 알고 있다는 데 놀랐다.

“맞아요, 어떻게…….”

“저번에 서점 주인과 대화하는 걸 본의 아니게 엿들어서.”

루나의 귀가 괜히 붉어졌다.

“루.”

그가 나직이 그 이름을 되새겼다.

“당신 이름을 기억해 두죠.”

그가 속삭이듯 말했다.

루나의 머릿속이 둥둥 떴다. 그녀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등을 돌려 서점을 나갔다.

* * *

“나오셨습니까.”

대기하고 있던 그의 보좌관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키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봐도 냉엄하고 조용한 얼굴의 주인은 밤거리마저 고요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그는 마차에 올라탔다. 보좌관은 의아하다는 표정이었다.

‘도대체 여기에 왜 이리 자주 방문하시는 건지…….’

공작은 사람을 신용하지 않았으며 혼자 있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곁에 여자를 두기는커녕 술집도 드나들지 않았다. 오늘만 해도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악혼녀, 새틴 영애와의 약속을 취소하지 않았는가.

‘오늘은 밀린 연구가 많으니 식사는 취소하는 게 좋겠군.’

그런 그가 유일하게 애착을 가지는 것은 연구와 학문 정도였다.

새틴 영애는 보나마나 꽃단장을 하고 하루 종일 저녁 식사만 기대하고 있었을 텐데 아키스에게는 그 마음이 전혀 닿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만큼 주변인에 정을 두지 않고 가녀린 여인들에게도 무정한 사람이었다.

‘심부름이라면 아랫것들을 시키셔도 될 텐데, 자꾸 핑계를 만들어 드나드시니…….’

그런 그가 꾸준히 이 조그만 서점에 드나들었다. 그것도 특정 시간대, 새벽에만. 이건 또 무슨 바람인지.

‘집사님도 계속 외출에서 돌아오시면 도대체 무슨 일이냐 캐물으시는데, 만나는 사람이라곤 저 피죽도 못 얻어먹은 것처럼 생긴 조그만 남자애뿐이고.’

공작의 보좌관, 디온은 마차 문을 닫았다.

공작의 마차를 알아본 골목길에 서 있던 코르티잔의 하녀들이 수군거리며 이쪽을 응시했다. 코르티잔의 하녀들이 자신의 주인에게 아키스를 안내하기 위해 주춤 다가왔다. 마부는 그녀들이 접근하기 전, 마차를 출발시켰다.

젊은 공작인 아키스는 혼기가 꽉 찬 나이였다. 그와 같은 때의 남자들이 그렇듯 비밀스러운 연인을 두어도 이상할 것 없는 나이다.

그러나 아키스는 과할 정도로 결백한 사내였고, 지금껏 단 한 번도 여자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었다. 도리어 그는 여인을 멀리했다.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아키스는 장갑을 낀 손으로 턱을 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한 손에 든 문서에 붙잡혀 있었다.

“……천재라.”

아키스는 작게 중얼거렸다.

어두운 서점 골목 뒤쪽에서 아키스가 발견한 소년은 천재였다.

제국에서 가장 빼어난 마법사인 아키스조차 실력 있는 번역가는 꼭 필요했다. 지금껏 아키스가 그 소년에게 어떤 고대 문서를 가져다주든 소년은 완벽하게 번역했다. 이 정도로 고대어에 통달했다는 것은 전대미문의 재능을 가졌다는 것이었다.

약 1년 전, 큰일거리가 있었다. 고대 마법사의 연구실이 발굴되었는데, 그곳에서 게이트에 대한 마법 수식이 수십 가지나 발견된 것이다.

게이트는 공간과 공간을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는 이동 장치였는데, 수도에는 고대 시절 지어진 몇 개의 커다란 게이트가 존재했다.

게이트는 제국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이동 수단이었다. 새로 발견된 연구 자료가 꽤 충실하였기에 아카데미의 마법사들은 흥분했다.

‘이 마법서들을 번역해 주문을 구현하면, 게이트 증설도 꿈은 아닙니다!’

그 마법사의 책은 모두 흑과 백의 고대어로 적혀 있었다.

가용 가능한 모든 번역가들이 동원되어 문서를 번역했다. 사람 손이 부족한 가운데, 아키스는 학부 재학 시절 그가 자주 다니던 서점을 떠올렸다.

노인이 혼자 운영하던 <달빛 서점>.

그곳은 작지만 알찬 서적들을 다루기로 유명했고, 유능한 번역가들도 은근히 많이 연결되어 있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아키스는 보좌관, 디온을 달빛 서점에 보냈다. 그리고 기대조차 하지 않은 그 서점에서 가장 최단 시간에 많은 문서를 번역했다. 듣기로는 신인 번역가가 있다는 것이다.

덕분에 게이트 증설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흡족해진 아키스는 달빛 서점으로 넉넉한 보수와 치하하는 말까지 전달했다. 그가 그렇게 누군가를 후하게 칭찬하는 건 드문 일이었다.

그리고 1년 동안 그의 전속 번역가들의 일이 많을 때, 종종 달빛 서점에 사람을 보내 일을 맡겼다. 뭔가 이상한 걸 느끼기 시작한 건 요 몇 달 전이다.

‘뭘 시키든 말도 안 되는 속도로 해내는군.’

시험을 하듯 다양한 언어로 만들어진 문서를 보내고, 점점 더 촉박한 일정을 불렀다. 그러나 그 신인 번역가는 단 한 번도 실패한 적 없었다.

결국, 아키스는 결국 그 신인 번역가를 보러 직접 서점으로 향했다. 도대체 그 천재가 누군지 얼굴을 한번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몹시 어린 소년은, 흑발의 가녀린 미소년이었다.

‘……이런 속도는 본 적 없는데 말이지.’

만일 소년이 마법사가 될 수 있다면 상당한 경지에 이를 수 있으리라. 그게 아니더라도 이만하면 상당한 고대어 학자가 될 것이었다.

어느새 아카데미 전속 번역가들에게 맡기는 일이 줄고, 더 정확하고 빠르게 일을 해내는 소년을 찾는 일이 잦아졌다. 요 두 달 사이에는 아예 소년하고만 일을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다른 번역가들이 답답해졌다.

‘독점하고 싶은 재능이야.’

탐이 나는 인재였다. 아키스는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내렸다.

보좌관이 아키스에 대해 모르는 것이 있었다. 그가 애착을 가진 유일한 것이 연구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는 인재에도 애타는 갈증을 가지고 있었다.

* * *

긴 하루의 끝은 언제나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집에 몰래 들어오는 것이었다.

루나는 집으로 돌아와 가발과 안경을 벗고 침대 위로 엎어졌다.

‘……오늘 받은 보수.’

루나는 품에 소중히 가져온 돈주머니를 꺼냈다.

필립이 정산 하나는 확실한 사람이라, 그는 파격적으로 열흘에 한 번씩 루나 몫의 돈을 정산해 주었다. 거기다 공작이 종종 주는 팁도 모두 루 몫으로 몰아주었다. 팁이라고 해도 공작은 적은 돈을 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나무 마룻바닥의 빈 공간을 열었다. 그 안에는 그녀가 그간 모은 금화가 가득 든 작은 궤짝이 있었다.

금화는 물론, 맘씨 좋은 부자 마법사들이 종종 팁으로 준 원석 보석들도 군데군데 빠끔 고개를 내밀고 얼굴을 빛내고 있었다. 꽉 찬 궤짝의 눈부신 위용을 보자, 그녀의 입꼬리가 귀에 닿을 듯 올라갔다.

“……정말 고소득 직종이야.”

물론, 그만큼 위험 부담이 컸다.

그녀가 불법 고대어 번역가로 일하는 걸 들켰다간 곧바로 감옥행일 테니까.

‘절대 들키지 말아야지. 아무에게도…….’

그러나 이만큼 보수가 넉넉한 일이라면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할 만하지 않은가. 금화를 볼 때마다 루나는 가슴속 깊숙이 뿌듯함이 올라왔다.

새틴은 드레스를 사고 사교 파티에 나가는 게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다고 했다. 그러나 루나는 누군가 목에 칼을 들이대며 뭐가 제일 행복하냐 묻는다 해도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돈 모으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즐거웠어요.’

그녀는 한 푼 두 푼 돈 모으는 재미에 중독되어 버렸다.

이 금화들은 루나의 활력소이자 기쁨이었다. 사람이란 참 간사해서 격무로 인해 지친 마음도 이 금화 더미를 보면 사라지곤 했다.

‘……난 잘못이 없어. 하지만 우리 아버지가 숙부님께 폐를 끼친 건 사실이니까.’

루나는 금화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곧 이 집에서 사라질 생각이었다. 적어도 내년이 되기 전, 올해 말에는.

아무도 모르게 정체를 숨긴 채 변장하고 이 집을 떠날 것이다. 그 전에 아버지의 빚을 전부 청산하진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 돈은 남겨 두고 갈 생각이었다.

‘이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야.’

숙부 가족에 대한 애정은 전혀 없었다. 다만, 루나는 앞으로 제대로 살고 싶었다. 자부심을 가진 채 살아생전의 아버지처럼 떳떳하게 살고 싶었다.

앞으로 혼자 살아가는 일은 많이 힘들 것이다. 그러니까 더욱 아버지의 빚을 나 몰라라 하고 도망쳤다는 기억을 가지고 싶진 않았다. 숙부 가족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자부심은 가장 큰 무기란다. 네가 자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돌아가더라도 항상 더 좋은 길로 나아갈 거야. 아버지는 그렇게 살아왔단다.’

아버지는 루나에게 말하곤 했다.

루나는 아버지를 떠올리며 씁쓸하게 웃었다.

‘물론, 내 앞가림이 가장 중요하지…….’

타지에 정착할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돈만 챙기고 떠나자. 어쨌든 공작 같은 거물 손님을 단골로 두고 있으니 무리는 아니었다.

‘빈손으로 떠날 순 없어. 밝은 미래를 위해선 두둑한 지갑이 필수지. 사는 게 그렇잖아?’

때가 되면 이 위험천만한 이중생활을 청산하고 안전한 도시에서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것이다.

‘작은 식료품점을 열까? 아니면 난 화장이랑 머리를 잘하니까 작은 살롱을 열어도 좋겠어.’

요즘 대도시에서는 중산층의 유한마담들을 상대로 한 중저가의 미용 살롱이 유행인 모양이었다.

‘간판은 예쁜 민트색으로 달고, 손님들에게 친절하게 대해야지. 그러면 인기를 끌 거야. 화장도 해 주고 머리도 말아 주자. 분홍색 앞치마를 입고. 그러다가 좋은 남자가 생기면 혼인할지도 모르지.’

미래는 달라질 것이다. 그녀는 고작 열아홉이지만 일이라면 신물이 날 정도로 했다. 그 덕에 재주는 많았다.

그러면 이 집안에서 노예 취급당하는 삶도 끝이었다. 평범한 여자아이처럼 즐기고, 또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꾸미며 살 것이다.

‘예쁜 드레스도 사 입고, 화장도 하고. 그러다 보면 친구도 사귈 수 있을 거야.’

그런 추상적인 밝은 미래를 상상하자 절로 입가에 웃음이 띠었다.

‘조금만 더 고생하자.’

그녀는 스스로를 다독이듯 생각했다.

루나는 빠르게 옷을 벗고 작은 욕실에서 몸을 씻었다. 그러고는 머리를 풀고 얇은 잠옷만 입은 채 침대에 털썩 누웠다. 곧 동터 올 시간이었다. 그녀의 피부는 다시 뽀얀 빛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나면 새벽의 마지막 절차였다. 루나는 목에 소중히 걸고 있던 자수정 펜던트를 꺼내 쓰다듬었다.

이 펜던트는 그녀가 가진 것 중 유일하게 값진 것이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그녀의 보물 같은 마도구. 루나는 쉬이 잠들지 못하고 펜던트를 계속 만지작거렸다.

‘빨리 자야 하는데…….’

건강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그것과는 상관없이 요즘 들어 가끔 몸 상태가 이상해질 때가 있었다. 딱, 이런 날 밤이 그랬다.

아키스가 찾아온 날 밤.

그런 날 새벽이면 그녀는 졸려도 잠을 이루지 못하곤 했다.

‘……새틴의 약혼자, 아키스 드 로텐베른 공작.’

루나는 어스레하게 동터 오는 창밖을 보다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아카데미의 상임 교수라고 했지. 그렇게 일이 좋을까? 약혼녀를 이유 없이 바람맞히면서도 번역 의뢰는 꼬박꼬박하러 오네. 그런데 왜 자꾸 우리 조그만 구멍가게 서점에 오는 걸까. 실력 있는 연구가며 번역가, 조교들이 줄 서 있을 텐데. 그리고 자주 오려면 진즉 그럴 것이지, 왜 갑자기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고…….’

‘왜’. 그를 만날 때마다 떠오르는 생각이었다.

‘내 이름은 왜 기억하고 있었을까.’

루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미래를 위해 나아가는 중이었다. 그런 이들이 그렇듯 루나도 매사에 조급했고 항상 바빴다.

‘왜’라는 질문은 항상 위험했다. ‘왜’ 다음에는 항상 ‘혹시’가 꼬리를 문 뱀처럼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런 고민이었다.

‘혹시, 나를 좋게 본 것이 아닐까. 항상 팁도 많이 주고…….’

루나는 고개를 다시 저었다.

‘아냐, 정말 학문에 심취한 사람일지도 모르지.’

루나는 피식 웃었다.

‘관대한 사람일 수도 있어. 큰 실수를 한 날 용서해 주었으니.’

루나의 작은 머리 안을 그가 성큼성큼 휘젓고 다녔다. 루나는 그 생각을 지우려 괜히 몸을 뒤척였다.

‘처음 만났던 날은 정말…… 뼈나 추린 게 다행이라니까.’

아키스를 처음 만났던 날의 기억은 정말 지금 생각해도 아찔했다. 그녀는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그날을 생각할 때면 루나의 입가에는 쓴웃음도, 미소도 아닌 묘한 감정이 걸렸다.

* * *

아키스를 처음 만난 날.

그날은 원래 낮에 가게 대청소를 하기로 한 날이었다.

“그러니까, 또 대낮부터 술 마시느라 다 못 끝내신 거 아니에요?”

필립의 조부 때부터 운영한 오래된 서점은 이제는 상품 가치가 없는 책들도 그득하게 쌓여 있었다.

루나는 필립에게 계속 정리해야 한다고 잔소리를 했다. 필립은 대청소 날을 잡아 오래된 책을 낮에 다 정리해 두겠다고 호언장담했으나, 루나. 즉, 루가 출근하는 시간까지 정리를 다 마치지 못했다.

때문에 루나는 번역 일을 시작도 못하고 투덜대면서도 정리를 도왔다.

“아니, 이 칸만 정리하면 끝난다니까.”

필립이 변명했다. 루나는 필립을 타박하면서도 그를 도와주었다.

“생긴 건 귀공자 같은 녀석이 아주 잔소리하는 말은 매섭다니까.”

“사장님이 잘해 두시면 되잖아요.”

그때쯤엔 필립과 티격태격하는 것도 몹시 익숙해져 있었던 것 같다.

루나는 문득 들어오며 신문 가판대가 텅 비어 있던 것을 떠올렸다.

“대청소한다고 신문을 아예 안 들여 두신 거예요? 가판대가 텅 비어 있던데.”

24시간 서점. 보통 종일 영업하는 서점에서는 아침에는 많은 종류든 적은 종류든 신문을 팔았다.

루나는 필립이 낮에 팔고 남은 신문을 정리하는 것을 시작으로 새벽 일과를 시작하곤 했다. 그리고 남는 신문은 시간 남을 때 읽기도 했다.

“아, 그거. 아침에 내가 보던 제국 일보 한 부가 남아 있을 거다. 카운터 아래에 봐 봐. 오늘은 신문 기사에 공작이 나와서 신문이 다 팔렸거든. 공작에 대한 특집 평론이 실렸다던가?”

“……이 거리에서도 신문이 다 팔려요?”

“너 모르냐? 공작이 신문에 나는 날에는 딸들이 신문 사 오라고 그렇게 아버지들을 들볶는다던데. 시내 가판대의 신문이 다 팔리니, 이 근방 거리까지 온 사람들이 딸이며 아내 등쌀에 우리 집 신문까지 매진시킨 모양이야.”

루나는 필립의 말에 피식 웃었다.

“공작 나리의 사진만 실리면 신문이 날개 돋친 듯 팔리지. 아무튼, 소문이 좋든 나쁘든 공작은 여자들에게 최고로 인기 있으니까. 그깟 신문 팔아 봐야 몇 푼 되겠냐 만은 그래도 꽤 짭짤하다니까.”

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은 정말로 유명인이었다. 공작에 관련된 가장 유명한 두 가지 에피소드는 저택에 처박혀 자란 루나도 몹시 잘 알았다.

하나는 어떤 영애 사건.

평소 로텐베른 공작을 흠모한 나머지, 야음을 틈타 한 영애가 황궁 내에 마련된 그의 방에 숨어든 적이 있었다. 로텐베른 공작은 속옷 차림의 영애를 붙들어 끌어내 정원 한복판에 집어 던졌다고 한다.

그다음으로 유명한 사건은 장갑 사건이었다.

자신의 장갑에 흠집을 낸 한 외국 사신을 그가 황태자의 눈앞에서 참수한 사건이었다. 황태자의 얼굴에 묻은 피는 몇 번을 씻어도 쉬이 지워지지 않았고, 황태자는 그 일로 충격을 받아 여름 내내 요양했다고 한다.

그 뒤로 공작의 성정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쉽게 말해 그의 성질이 더럽고 까다로운 건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러면 뭐 해요, 여인들에게 그렇게 무정한데.”

새틴은 아키스에게 정성 들여 편지를 쓰고, 직접 만든 선물들을 보냈다. 하지만 아키스는 단 한 번도 답장을 준 적 없다. 그는 냉정한 사내였다.

그럼에도 새틴은 공작을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정신의 소유자였다. 어쩌면 그런 면에서 그들은 천생연분일지도 모른다. 남에 대해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들.

새틴이 실망하든 말든 루나가 알 바 아니었지만, 그때마다 새틴이 루나에게 패악을 부려 문제였다. 공작은 본의 아니게 루나에게 은근한 피해를 주고 있었다.

필립이 책장에 책을 꽂아 넣으며 흘리듯 대답했다.

“듣기로는 공작이 여자를 지독히 싫어하는 남색가라는데?”

“아, 사장님. 책상 서랍 좀 어지럽히지 말라니까요. 그리고 공작이 무슨 남색가예요.”

루나는 필립이 며칠째 정리하겠다 하고 정리하지 않은 책상 서랍이 오늘따라 거슬렸다. 루나는 이참에 책상 안까지 정리하기 위해 서랍 속에 쌓여 있던 잡동사니들을 모두 꺼냈다.

“공작은 남자도 안 좋아할 걸요? 분명히 피까지 차가운 냉혈한일 거야.”

루나는 버릇처럼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그때,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그녀를 가게 문간에서 응시하고 있었다. 루나는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다.

가게 문간에는 어딘가 낯익은 얼굴의 훤칠한 사내가 비스듬히 서 있었다. 신문 사진 속의 공작과 똑같은 얼굴의 사내였다.

“가게 문이 열려 있군요.”

아키스 드 로텐베른.

그가 루나를 보며 중얼거렸다.

“소, 송구합니다.”

필립은 허둥지둥 일어나 부복했다. 어쩌다 보니 나라님 욕까지는 아니라도, 나라님에 준하는 분을 모독한 셈이 된 것이다.

그는 신문에 실린 사진과 똑같이 냉담한 무표정이었다.

“무, 무슨 일로 이런 누추한 곳에 직접 오셨습니까.”

아키스는 자신들을 이상한 사람 보듯 내려다보았다. 루나는 그가 당장이라도 자신과 필립을 공작 모독죄로 채찍질하지 않을까 하는 공포에 비장까지 쪼그라들었다.

“무슨 일이라니, 고서점에 올 때 다른 용무가 있어야 하는 겁니까?”

“그게, 평소에는 사람을 보내오시지 않습니까. 아무튼 뭐든지 도와드릴 일이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루나는 필립을 따라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키스는 루나가 했던 말을 들은 건지 아닌 건지, 먼지 쌓인 낡은 고서점 안을 휘휘 둘러보았다. 그리고 이곳이 제 집이라도 되는 것처럼 편안한 걸음걸이로 천천히 다가왔다.

“급한 의뢰가 생겼는데, 지금껏 내 일을 맡아 준 번역가를 만날 수 있습니까.”

아키스가 루나와 필립을 보며 입을 열었다. 아, 사장님 안 돼……! 루나는 속으로 짧게 외쳤다. 필립은 눈치도 없이 바로 루나를 지목했다.

“그게…… 우리 전속 번역가는 이 아이인데요?”

“소년이라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진짜로군요.”

아키스의 시선이 루나에게 가만히 닿았다. 루나의 심장이 콩닥대며 뛰기 시작했다.

‘나, 잡혀가는 거 아니야?’

루나는 울고 싶어졌다. 역시 남 험담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소, 송구합니다. 이 녀석이 아직 어려서 그런 것이니 용서해 주십시오.”

필립은 허둥지둥 일어나 부복했다. 아키스는 그들을 여전히 이상한 사람 보듯 내려다보았다.

“말실수를 하긴 했지만, 이 녀석이 그간 공작님의 의뢰라면 두 발 벗고 정말 열심히 하던 놈이랍니다.”

루나는 엉겁결에 고개도 들지 못하고 움츠린 채 고개만 주억거렸다.

“그럼 열심히 하지 않는 의뢰도 있단 말입니까?”

아키스는 묵직하게 물었다. 의외의 정곡에 루나는 움찔했다.

“그게 아니라, 특별히 열심히 한다는 뜻이지요. 하하…….”

루나는 필립이 하늘이 무너지는 표정을 짓는 걸 분명히 보았다. 필립이 루나를 툭, 쳤다. 루나는 엉겁결에 말했다.

“네, 진심을 담아서…….”

이쯤 되자 아키스는 루나를 아예 이상한 사람 보듯 보고 있었다. 루나는 자신의 입을 때리고 싶었다. 진심이, 뭐?

아키스는 가늠하듯 천천히 루나의 얼굴을, 정확히는 눈에 보이는 정수리 가마부터 작은 손까지를 살폈다. 루나는 눈을 굴리며 사과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공작님을 모욕할 의도는 없었…….”

“이 문서를 내일까지 번역하십시오. 잘해 내면 용서해 주도록 하죠.”

“……네? 네……?”

아키스는 나른하고 서늘한 시선으로 루나를 보았다. 그러고는 그 말만 남기고 가게를 떠났다.

* * *

그날, 공작이 맡기고 간 문서는 양이 많지 않았다. 세 가지 종류의 고대어를 실타래처럼 꼬고 꼰, 아주 악취미적인 마법사의 문서였다.

그러나 루나에겐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몇 페이지의 문서는 당일에 바로 작업을 마쳤다.

‘일은 다 마쳤는데…….’

남은 건 공작에게 작업물을 주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때 루나의 처분이 결정될 터였다.

‘언제 오나…….’

루나는 마치 벌을 기다리는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어제 왔던 시간에 올 거라는 예상과 달리 공작은 오지 않았다. 함께 기다려 주던 필립까지 기다리다 지쳐 퇴근했다.

필립은 무슨 일이 있든 내일 꼭 고하라 신신당부했다. 그리고 루나는 긴장된 기분과 함께 텅 빈 가게에 홀로 남았다.

‘설마, 공작이 죽이기야 하겠어요?’

사실 무슨 일이 있다 해도 필립이 도울 방도는 없었다. 만일 공작이 분노를 풀지 않으면 싹싹 비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새벽이라 그런가, 머리가 좀 어지럽네.’

달빛 서점에서 일하며 초반에는 생전 처음 벌어 본 두둑한 돈에 희희낙락했다.

일을 하는 건 하루하루 몹시 즐거웠다. 버몬드가에선 몸이 부서져라 일해도 무급이었다. 아니, 욕이나 안 얻어먹으면 다행이었다. 그러니 상대적으로 쉬운 일을 하고 큰돈을 받는 번역가 일은 루나에게 천국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평범한 여인이었고, 체력적 한계는 존재했다. 게다가 아무리 피곤해도 낮에는 티를 낼 수 없었다. 늘 씩씩하고 건강한 소녀 루나를 연기하며 잠을 못 잔 티를 숨겨야 했다.

‘긴장해서 그런가, 오늘따라 피곤해 죽을 것 같아…….’

계속해서 눈이 감겼다. 공작을 욕한 일에 대한 걱정까지 더해서 더욱 체력이 한계에 달했던 것 같다.

‘……죽겠다…….’

그때는 졸았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떠올려 보니 반쯤 기절했던 것 같다. 아키스에게 줄 문서를 끌어안고 루나는 카운터에서 잠시 눈을 감았다.

몇 분이 지났을까.

턱을 괴고 고개를 푹 숙인 채 꾸벅꾸벅 졸던 루나가 고개를 들었을 땐, 낯선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다.

“공작…… 님?”

루나의 입에 벌어졌다.

공작이 카운터 맞은편에 놓인 책장 옆에 의자에 걸어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눈을 내리깐 그의 옆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미쳤나 봐. 나 얼마나 잔 거야?’

그나마 고개를 숙이고 자서 다행이었다. 루나는 무의식중에 입가를 문질렀다.

오래된 고서점 천장에 매달린 램프아래 그의 얼굴이 희미하게 비춰지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명장이 붓질 한 번마다 공을 들인 그림 같았다. 정지된 그림이 천천히 움직이듯 그가 눈을 들어 루나를 응시했다.

“일어났나보군요.”

그가 나직하게 말했다.

몹시 무뚝뚝한 목소리였다. 그가 천천히 일어나 루나의 앞까지 다가왔다. 루나의 머리가 핑핑 돌았다. 천만다행으로 침은 흘리지 않은 것 같다.

“기다리시게 만들어 죄송…….”

“그런 말은 됐고, 작업은 마쳤습니까?”

“네, 여기요.”

루나는 기다렸다는 듯 품 안에 있던 문서를 번쩍 내밀었다.

아키스의 신비한 보랏빛 눈이 그녀를 살폈다. 루나는 녹색 눈동자를 데굴, 굴리고는 바닥을 향해 내리깔았다.

‘왜 안 받아?’

카운터에서 루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더 옹송그렸다.

그녀가 견디지 못하고 천천히 눈을 들어 올리자 자신을 바라보는 보랏빛 눈과 마주쳤다. 그녀는 화들짝 놀랐다. 그제야 아키스가 문서를 받았다.

“소중하게 다뤄 줘서 고맙군요.”

아키스가 비꼬는 건지 아닌 건지 알 수 없는 애매한 말을 했다. 루나가 문서를 끌어안고 잔 걸 빗대어 한 말인 듯했다. 루나는 민망함에 입술만 앙다물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곧장 문서를 펼쳤다. 그리고 루나가 벌벌 떨며 번역한 문서를 읽고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더니 한마디 남겼다.

“되었습니다.”

이제 넌 죽은 목숨이니 되었다,란 뜻인지. 아니면 업무를 잘했으니 되었다,인지. 순간 루나의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화를 내지 않는 걸 보니 후자인 것 같았다.

“다, 다행이에요. 그럼 계산해 드리겠습니다.”

루나는 급하게 영수증 용지를 꺼냈다.

그런데, 정말이지 그날은 최악의 날이었다.

주룩―

“아.”

그 순간 루나의 눈앞이 순간 노래졌다. 그대로 주룩하고 코피가 난 것이다.

‘거짓말…… 왜 이럴 때 코피가 나냐고…….’

그녀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순간 머리가 멍했다. 루나는 반사적으로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겨우 코를 막았다. 아키스가 어이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손수건을 가지고 다니는 소년은 이상한가?’

보통 제국의 하류층 소년들은 더 거친 태도를 가지고 있을 터였다. 루나는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김에 아예 꽉 눌렀다. 얼굴이 다 가려지도록. 그리고 흠흠, 헛기침을 하며 최대한 대수롭잖게, 호탕하게 행동하려 노력했다.

“별일 아닙니다. 영수증 적어 드릴게요.”

루나는 자유로운 손으로 급히 펜을 들었다. 아키스는 그녀를 보며 내뱉듯 말했다.

“혀 내밀어 봐요.”

“네?”

“어서. 잠깐 보죠.”

아키스는 한 치의 미동도 없이 다시 눈짓했다.

그에게 빨려 드는 기분이었다. 마치 홀린 것처럼 루나는 주춤하며 천천히 입을 벌렸다. 아키스는 그녀의 턱을 쥐고 목구멍 안쪽을 살폈다. 젊은 남자의 몸이 손에 닿는 건 처음이었다. 루나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아키스가 나직이 속삭이듯 말했다.

“목구멍이 부었군요. 혀 색을 보니 그냥 과로같습니다. 어디 심하게 아픈 건 아닌 것 같으니 그냥 쉬면 될 겁니다.”

루나는 얼어붙어 고개를 끄덕였다.

“의학 지식이 있으세요?”

“조금은. 백마법을 익히려면 의학이 필요합니다.”

아키스가 대답했다. 그리고 루나에게서 천천히 손을 뗐다.

“계산, 안 해 줄 겁니까.”

“아. 네, 여기…….”

루나는 왼손으로 얼굴을 꽉 누른 채 급하게 금액을 적은 쪽지를 내밀었다. 아키스는 그걸 보지도 않고 금화 주머니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루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는 잠시 고민하는 사람처럼 미간을 찌푸리더니 옷깃 사이로 손을 넣었다. 그리고 옷 안에 감추어 걸고 있던 얇은 사슬 펜던트를 풀었다.

“손.”

이제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한다. 루나는 뭐가 좀 이상하다고 느끼면서도 쭈뼛대며 손을 내밀었다. 아키스가 그녀의 손에 펜던트를 올려놓았다.

이게 뭐지? 루나는 손 위에 얹어진 작은 펜던트를 바라보았다. 자세히 보니 작은 자수정이 박혀 있었다.

“내겐 그다지 듣지 않으니 당분간 사용하세요. 단순한 체력 저하라면 이게 도움이 될 겁니다.”

“이게 뭔데요?”

루나는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어느새 코피가 멎어 있어 천천히 손수건을 뗐다. 코 근처에 피가 말라붙어 있어 볼만했을 것이다.

“마도구.”

아키스가 짧게 대답했다.

“1년 정도밖에 못쓰지만 쓸 만할 겁니다.”

마도구라면 몹시 귀한 물건이라는 것 정도는 루나도 알았다.

“이걸 왜 제게…….”

“내 일을 진심으로 잘 맡아 준 보답이라 치죠. 아, 그리고.”

루나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아키스가 말을 이었다. 루나를 꿀 먹은 벙어리로 만드는 말이었다.

“그리고, 나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를 좋아합니다. 둘 다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데선 맞췄군요. 그럼, 또 보죠.”

루나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그는 등을 돌렸다.

“저기, 펜던트를……!”

아키스는 무거운 발걸음 소리를 남기고 가게를 나갔다. 루나는 그가 나가자마자 의자에 주저앉았다.

루나는 차라리 누가 자기 뒤통수를 후려갈겨 줬으면, 하고 속으로 기도했다. 차라리 기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녀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손 위에 얹어진 자수정 펜던트를 응시했다.

그리고 이튿날.

상황을 전해들은 필립은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우리 벌 안 받는 거지? 하하, 그래도 공작 나리인데 뒤끝이 있을까. 일을 또 맡긴다는 걸 보면 괜찮을 거야. 일단 목숨은 건졌다. 거기다 너한테 선물을 준 걸 보면 네가 마음에 든 거 아냐? 왜, 마법사들은 유능한 번역가라면 환장하잖아.”

아니, 그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으면 좋은데. 루나는 그 말에 암담하게 곤란한 표정을 지었을 뿐이었다.

* * *

상념에서 벗어난 루나는 자수정 펜던트를 손안에서 굴렸다.

그에게 이걸 처음 받은 날의 기억이 종종 떠올랐다. 이 펜던트 덕분에 다시는 코피를 흘리는 일도 없었다.

‘이 펜던트를 받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왜 준 건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루나가 그에게 마도구를 받았다고 하자, 필립은 새벽 근무 시간에 마도구 감정업자까지 불러 주었었다.

‘이건 체력 회복 기능이 있는 마도구군요. 최상급 마법사가 만든 귀한 물건인데 용케 구하셨습니다. 체질에 맞으면 몸을 건강하게 만들어 준답니다. 아, 그런데 효력이 영원하진 않을 겁니다. 마도구에 담긴 마법이 사라지면 효력이 사라지는 식의 소모품 마도구죠.’

마도구 감정업자의 말로는 유물인 데다 최상급 마법사의 주문을 담은 마도구라는 것이었다.

그제야 루나는 아키스의 말을 이해했다. 아키스는 펜던트를 줄 때 1년 남짓 쓸 수 있다 했다. 그 말은 마법의 효력이 약 1년 정도라는 것이었다.

감정업자는 혹시 팔겠다면 알선을 도와주겠다 했다. 하지만 루나는 바보가 아니었다. 아키스가 준 물건을 팔았다가 사달이 나면 어쩌려고. 아키스가 변덕을 부려 언제 돌려받으려 할지 몰랐다.

‘그땐 몰랐지. 이렇게 효과가 대단할 줄은.’

아키스에게 펜던트를 받은 날. 코피를 흘린 날.

그 펜던트를 붙잡고 있자니 피가 멎었다. 아무 생각 없이 목에 펜던트를 걸고 숨긴 채 집으로 돌아갔는데, 갑자기 몸에 피가 잘 돌고 현기증이 없어졌다.

이튿날부터 밤일을 할 땐 펜던트를 걸고 다녔는데, 그때마다 놀라울 정도로 지치지 않았다. 항상 체력이 충만한 상태고 건강했다.

‘몸이 점점 건강해져서 곤란할 정도인걸.’

펜던트를 걸고 있으면 이중생활을 하는데도 피곤해지기는커녕 머릿결이 좋아지고 피부가 더 반들반들해졌다.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머리가 맑았고, 밤낮으로 아무리 일해도 지치지 않았다. 아키스가 준 펜던트는 루나의 비밀스런 이중생활의 비결이었다.

‘왜…… 내게 쓰라고 내준 걸까?’

루나는 손안에 펜던트를 굴리며 침대에 누워 생각했다. 조그만 펜던트는 낡았지만 아름다운 세공이 된 물건이었다.

‘마도구는 정말 귀하다던데. 당분간 사용하라는 말은 언젠간 돌려받겠단 말이겠지? 선물은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어. 하지만 이건 선물이 아니겠지…….’

그 뒤 고맙다는 말이나 돌려주겠다는 말을 해도 그는 몹시 심드렁하게 반응할 뿐이었다.

‘그게 고마우면 내 일을 항상 최우선으로 해 주는 걸로 보답하면 되겠군요.’

아키스가 나른하고 무심하게 이렇게 말한 날, 그는 루나의 영원한 귀빈이 되었다.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야. 고맙다는 말도 대충 받아넘기고…….’

이렇게 침대에 누워 남몰래 펜던트를 만지작거릴 때면 묘하게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래도 이런 큰 호의를 베풀어 주다니, 이상한 남자.’

새틴은 사교계에 드나들며 많은 영식들과 안면을 튼 모양이었지만, 골방과 부엌만 드나들며 자란 루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젊고 미혼인 사내와 안면을 튼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일까.

그를 만난 날이면 집에서도 그의 얼굴이 떠오르는 건.

루나는 눈을 꼭 감고 껄끄러운 기분을 지우려 노력했다. 그녀에게 쓸데없는 관심은 사치일 뿐더러, 애초에 그는 새틴의 약혼자였다.

‘사랑을 모르는 사내라…….’

루나는 속으로 속삭였다. 그는 그런 감정은 모를 것이다.

아키스 드 로텐베른.

젊은 공작이 사랑을 아는 이라면 새틴을 그리 대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는 새틴에게 냉정함을 넘어서 잘 모르는 사이처럼 대했다.

대부분 귀족은 사랑 없는 결혼을 했고, 의례적으로 가족 사이를 이어 갔다. 그게 보통의 귀족 가정의 모습이었다. 루나도 그런 결혼을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루나는 언젠가 누군가를 만난다면 서로 연모하며 사랑하길 바랐다.

‘네 엄마는 정말 멋진 여자였단다. 그녀는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여자였지. 내 인생에 가장 사랑한 여인이야. 정말로 유일하단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종종 루나에게 그리 말하곤 했다.

루나는 어렴풋이 어머니의 이야기를 할 때 아버지가 짓던 표정을 기억했다.

그때면 아버지의 눈동자는 겨울날의 호수처럼 몽롱하게 흐려지곤 했다. 평범한 중년 사내였던 아버지도 그때면 정말 특별한 사람 같았다. 루나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만큼이나 그 기억을 애틋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만일 가정을 만든다면 사랑하는 사람과 만들고 싶어.’

언젠가 이곳을 떠나 먼 도시에 정착한다면. 그녀만의 직업을 가지고 돈을 더 모아서 어딜 가든 당당하게 살 수 있게 된다면. 그때는 낭만적인 사랑을 하고 싶었다.

그녀도 사람이었다. 홀로 지내는 밤에, 의지할 가족 없는 삶에 익숙해졌다 해도 의지할 사람을 바라지 않는 건 아니었다.

‘나를 지켜 주고, 내가 지켜 줄 단 한 사람.’

언젠가 그녀도 그런 사람과 함께하고 싶었다.

루나는 느릿하게 밀려오는 시간 속에서 천천히 눈을 감았다. 꿈도 없는 깊은 잠을 자고 싶었다. 아주 깊게.

‘하지만.’

루나는 잠들기 직전, 생각을 떠올렸다.

‘하지만 공작은 의외로 친절한 사람이야……. 그것만 생각하자. 더는 안 돼. 친절하다는 이유로 계속 생각하는 건 안 돼…….’

그걸 마지막으로 그녀는 수면 속으로 곤두박질쳤다.

* * *

아키스, 로텐베른 공작이 신전에 가는 날은 공작가의 고용인들이 유난히 주인의 눈치를 살피는 날이었다. 그런 날에는 공작의 심기가 나빴기 때문이다.

아키스는 정확히 약속한 시각에 신전에 도착했다. 여느 때와 같이 찡그린 얼굴이었다.

한때 대륙을 움직였던 드래곤의 신전도 이제는 많이 축소되어 겨우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대대로 드래곤의 신전은 동굴 안에 있었다. 수도의 동쪽 산, 은밀한 동굴에는 빛나는 신비한 호수가 있다. 이전에는 마력이 가득 담긴 샘물이라 하여 영험하다는 소문에 온갖 마법사들이 몰려들어 이 샘의 물을 마시고 갔다.

그러나 지금은 그 전설도 무색했다. 지금은 이 샘에 찾아오는 이는 몇 남지 않은 드래곤의 신관들과 아키스뿐이었다.

아키스는 비단 가운만을 걸친 채 샘물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시중들은 모두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마력을 가득 품은 샘물은 아키스와 같은 특수한 체질을 지닌 이들의 체내 마력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했다.

살갗에 닿는 샘물은 서늘했다. 그리고 샘물 주변에는 수십 개의 촛불이 빛을 밝히고 있었다.

촛불 사이로 언제 제작된 건지 알 수 없는 낡고 음침한 석조 조각상들이 동굴 안을 메우고 있었다. 동굴의 음침한 모습마저 아키스의 속을 긁었다.

“이제 나오셔도 됩니다.”

아키스는 신관의 안내에 따라 천천히 걸어 나왔다. 젖은 가운 사이로 아키스의 탄탄한 복근과 넓은 어깨가 어슴푸레 드러났다. 그의 단단한 피부는 오래전 고대의 남신 조각 같았다.

“됐다. 내 몸에 손대지 마라.”

아키스는 다가오는 신관을 제지하고 직접 깨끗한 새 가운을 걸쳤다. 그의 검은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이 우스운 의식을 따르는 건 언제 생각해도 환멸이 났다.

신관은 아키스에게 잽싸게 말을 붙였다.

“기분이 어떠십니까, 여러 번 오셨으니 이제 익숙하실 때도 되었지요.”

“언제나 새롭게 더럽다. 네놈의 면상만큼이나.”

아키스는 차갑게 내뱉었다.

드래곤 신전의 신관은 언제 만나도 불쾌한 존재였다. 히죽히죽 웃는 하얀 낯의 신관의 미소는 마치 타인을 조롱하는 것 같았다.

“이쪽의 약을 드시지요.”

신관은 낯빛도 변하지 않고 아키스에게 약을 내밀었다.

아키스는 약을 삼켰다. 이 역시 체내의 마력을 다스리는 약이었다.

“계약은 원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드래곤께서도 아키스 님을 마음에 들어 하실 겁니다. 이렇게 수월한 적이 없었어요. 아무렴, 공작님께서는 이 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분이시니까요!”

신관이 주절주절 말했다.

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이. 황제가 아닌데도 그런 수식어를 붙여도 불경죄로 처벌받지 않을 유일한 이가 아키스였다.

어쩌면 황족보다 더 고귀한, 제국의 권력과 권세의 상징. 그것은 로텐베른 공작 가문의 특수성 때문이었다.

제국의 유일한 공작 가문인 로텐베른 가문. 다른 말로는 드래곤 공작가라고 불리는 가문.

오래전, 로텐베른 가문의 선조는 드래곤과 모종의 계약을 했다. 그 계약 내용에 대하여 추측만 무성할 뿐 결국 대부분은 베일에 감춰져 있다.

알려진 사실은 단 한 가지였다. 로텐베른 공작이 드래곤에게 이러한 소원을 빌었다는 것.

‘제국과 황가를 수호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때부터 제국의 소유자이자 상징은 드래곤이 되었다.

시간이 흘러 마법사들의 시대가 저물어 가고 드래곤들 대부분이 이 세계를 떠났다. 제국은 현재 유일하게 남은 수호신인 드래곤을 보유한 곳이었다.

드래곤은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제국을 보호하고 천재지변을 다스렸다. 현재의 제국이 타국으로부터 경외의 대상인 데는 그러한 연유가 있었다.

제국의 상징인 드래곤과 제국을 잇는 연결 고리, 로텐베른 공작가.

공작가의 계약은 세대와 세대를 통해 이어졌다. 드래곤의 계약을 계승할 수 있는 체질로 태어나는 자손은 반드시 눈이 보라색이었다. 동시대에 보라색 눈의 아이가 여러 명 태어나기도 했다. 그러면 그중 가장 강한 마력의 소유자가 드래곤의 계약자가 되었다.

“전 세계 유일한 드래곤을 다룰 수 있는 분 아닙니까. 아, 제가 그 드래곤의 모습을 단 한 번만 영접할 수 있다면…….”

신관이 멋대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아키스는 그 음침하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찌푸린 얼굴로 보았다.

“멍청하기는, 드래곤을 보는 날은 재앙이 왔다는 뜻이다. 바보 같은 놈이군.”

“하지만, 아키스 님이 계약을 완성하는 날에는 드래곤 님께서 현신하실지도 모르지요. 그렇다면 소생은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신관은 아키스의 말에도 겁먹지 않고 중얼거렸다.

“아무튼, 지금은 ‘계약 기간’입니다. 마치 마차 바퀴와 마차를 잇듯이 마력의 연결이 완성되어 가는 기간이죠. 이때 무엇을 조심하셔야 하는지 아시겠지요?”

신관이 흥얼거리듯 말했다. 아키스는 귀에 딱지가 듣도록 들어 알았다.

“잘 알고 있다.”

아키스는 그를 한 대 치고 싶다는 눈으로 삐딱하게 바라보았다. 드래곤의 계약이 완성되면 저놈을 베어 버릴까 고민하는 듯한 눈이었다.

그 은근한 살기를 눈치채지 못했는지 신관이 계속 조잘거렸다.

“절대, 절대 여자를 가까이하시면 안 됩니다. 여자를 조심하십시오. ‘각인’이 일어날지도 모르니까요.”

드래곤과의 계약이 완성되어 가는 시기에는 절대로 여성과 성관계를 맺으면 안 된다. 소년기 무렵의 아키스가 귀에 딱지가 붙도록 듣고 자란 말이다.

드래곤은 여자를 좋아한다.

드래곤은 항상 신부를 원한다.

이 또한 마찬가지로 아키스가 늘 듣고 자란 말이었다.

드래곤과 인간의 계약이 완성되는 시기. 선대로부터 계약을 물려받는 시기는 미완성의 시기. 그 시기는 항상 덜 여물고, 취약한, 나약한 시기였다.

그 시기에 섣불리 여인과 성관계를 맺으면 드래곤이 그 ‘여인’을 인지한다. 그리고 만약 로텐베른 공작가의 사람과 계약으로 이어진 드래곤이 그 여인을 마음에 들어 하면 일어나선 안 될 일이 일어난다. 드래곤이 인간 여인을 자신의 유일한 신부로 인식하는 것이다.

‘드래곤의 각인이라.’

그리고 공작 또한 드래곤의 방식으로 그 여인을 사랑하기 시작한다.

세계의 중심을 그 여인으로 두고, 그 여인을 사랑하고, 유일한 짝으로 인지한다. 그러니 당연히 그 여인을 통해서가 아니면 아이를 가질 수도 없다.

그것이 드래곤의 사랑이었다.

인간 남녀 사이에 일어날 수 없는 비정상적인 애착 관계, ‘각인’이 생겨나는 것이다.

각인이 일어나면 공작은 생사여탈권을 한 여인에게 온건히 바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상대 여인이 죽는다고 해도 그 사랑은 끝나지 않는다. 각인을 한 상대가 죽고 난 후, 실의에 빠진 공작들은 대부분 따라 죽거나 미쳤다고 한다.

즉, 공작가의 사내들에게는 암살 위협보다 더 큰 위험이 ‘각인’이었다.

“뭐, 인간이 드래곤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으니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요.”

“정신이 나간 놈이군. 이 집안의 대를 끊어야 기쁘겠나?”

“그걸 원하시는 게 아닙니까? 누구보다 이 세상에 환멸을 내시는 분이시지 않습니까.”

신관이 비죽비죽 웃으며 말했다. 아키스는 그의 말이 점점 귀에 더 거슬리기 시작했다.

“혹시 모르지요, 사랑에 빠지면 이 세상이 달라 보일지도. 목석같은 공작님께서도 드디어 여인을 아시고…….”

“닥쳐라, 혀를 베어 버리기 전에.”

신관이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했기에 아키스는 거친 말을 내뱉었다.

신관은 빙그레 웃으며 공작을 보았다.

“날 자극해도 드래곤 구경은 무리일 거다. 그보다 계약 기간이 끝나고도 네 머리통이 붙어 있을지나 생각하도록.”

드래곤 신전의 신관 중에서도 이자는 유독 드래곤에 미쳐 있었다.

드래곤은 국가적 재앙이 일어나거나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한은 쉬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들은 주로 자신의 둥지. 즉, 이공간에서 시간을 보냈다.

“계속 말씀드리지만, 소생은 드래곤님을 뵐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신관의 말에 아키스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서점에나 가 볼까.’

아키스는 피곤을 느꼈다.

문득 그제 새로 들어온 고서적이 떠올랐다. 아키스는 각지의 던전에서 발견되는 고서적들을 미친 듯 사들이는 수집가로도 유명했다.

‘그 소년을 좀 보러 가야겠군. 이름이 루라고 했나. 슬슬 아카데미로 데려와야겠어.’

아키스는 총명하고 순진한 이를 좋아했다. 요즘 그가 총애하는 이는 서점에서 발견한 천재 소년이었다.

그는 소년을 제법 오래 지켜봐 왔다. 소년은 연고가 없으니 그의 보호를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주거도 불분명하고 출신도 미천했지만, 잘 가르치면 마법계에 획을 그을 연구자가 될 것이다. 마법계를 만드는 건 마법사였지만, 학자와 역사가들의 역할도 컸다.

‘이제 눈도장도 충분히 찍었고.’

의례적인 뒷조사는 들어가야 할 터이다. 그러나 아키스는 자신의 직감을 믿었다. 소년은 별달리 수상한 자는 아닐 것이고, 그의 시험을 통과할 것이다.

‘처음 본 순간부터 예감했지.’

주변에서 뭐라 수군거리든 상관없었다.

소년을 처음 본 순간 어딘가 마음이 갔다. 꼭 예전부터 알고 있던 사람을 본 것처럼. 그의 과거를 떠올리게 했다.

아키스는 어린 시절 자신이 자란 지저분한 뒷골목과 가난한 마을의 정경을 어제처럼 생생히 기억했다. 아키스는 공작가의 정실부인의 소생이 아니라 사가에서 자란 사생아 출신이었다.

그가 공작가에 들어오기 전, 어린 시절 아키스는 고대어를 번역하는 능력을 깨우쳐 마법사들의 보조 일을 하며 살았다.

소년은 그때의 자신을 떠올리게 했다. 이 세계를 움직이는 것은 귀족 가문의 마법사들이었다. 그리고 고대어 능력자는 보통 마법사 가문에서 태어날 때가 많았다.

그러니 어쩌면 소년은 자신과 같은 귀족 가문의 사생아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아키스는 그에게 더 마음이 갔다. 피로에 찌든 얼굴로 코피를 흘리던 모습. 그 모습에서 아키스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읽었다.

‘내가 준 펜던트는 잘 가지고 있나 모르겠군.’

그래서였다. 드물게 큰 호의를 베풀어 마도구를 내준 것은.

사실은 흑심도 있었다. 큰 은혜를 입혀 인연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인재를 차지하는 데는 수단 방법을 가리면 안 된다는 걸 잘 알았다.

소년을 생각하자 아키스의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올라갔다. 새벽에 일해서인지 졸린 눈을 하고 부산하게 움직이며 일하는 루라는 소년. 가끔은 소년이 귀엽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주 가끔. 혹은 종종.

그 소년을 볼 때마다 떠올리는 생각이었다.

* * *

이튿날, 아키스는 서점에 찾아오지 않았다.

딱히 그를 기다린 건 아니었지만 루나는 한 번쯤 그에 대해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가 맡기고 간 자료들을 번역해야 했기 때문이다.

여느 때처럼 머리는 몹시 맑고, 새벽 근무인데도 정신은 매우 멀쩡했다. 두 눈에는 생기가 넘쳤다. 모두 마도구 펜던트 덕이었다.

‘어쩜, 맡겨도 이런 무시무시한 내용을.’

그가 이번에 맡긴 책 내용은 고대의 흑마법과 약학에 관한 내용이었다.

먹으면 사내를 극도의 흥분 상태로 만들어 결국 죽게 만드는 최음 독, 수면을 방해해서 점점 수면 부족으로 만든 다음 결국 잠을 박탈하는 끔찍한 흑마법 약물, 반대로 평생 깊은 잠에 빠져 일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수면 마법 약.

‘누구 죽일 사람이라도 있는 걸까.’

루나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아키스라면 그럴 수도 있었다. 루나는 찜찜한 기분에 흑마법서를 들고 이곳저곳 살폈다.

숙부가 약재상을 했기 때문에 루나도 새틴도 약초학은 조금 배웠다. 겉핥기나마 약초학을 아는 루나였기에 이 내용이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혹시 내가 이 책을 번역해서 누군가 죽기라도 하면 기분이 찜찜할 텐데 말이지.’

루나는 그렇게 생각하다 고개를 흔들고 피식 웃었다. 별생각을 다 하게 된다.

* * *

그리고, 또 이튿날이 되었다.

루나는 생각보다 일찍 그가 맡긴 무시무시한 책의 번역을 마쳤다.

그날따라 달이 휘영청 밝았다. 루나는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때, 창문 밖으로 마차 바퀴 소리가 울렸다. 밤의 고요를 두드리는 듯한 소리였다. 루나는 얼른 창문을 닫고 카운터에 가서 앉았다.

곧, 반지하 서점으로 들어오는 낡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루나는 고개를 들어 들어온 사람을 확인하고 바로 고개를 숙였다.

예상대로 방문객은 젊은 공작, 아키스 드 로텐베른. 그였다.

루나는 평소처럼 그의 눈을 보지 않고 인사했다. 아키스는 루나가 인사를 다 마치기도 전에 나직이 물었다.

“일은 다 끝났습니까?”

“네.”

루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책상 위에 정리해 둔 문서들을 내밀었다.

“보세요.”

아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건네받은 문서들을 받아 훑어보며 흘리듯 말했다.

“오늘은 당신이 열쇠를 찾느라 헤매는 광경을 보지 않아도 되겠군요.”

“……네?”

루, 소년 모습의 루나는 잠시 귀를 의심했다. 그녀는 아키스가 농담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냉정하게 굳은 그의 얼굴을 보니 착각인 모양이었다.

루나는 그가 서서 문서를 검사하듯 자세히 훑어보는 광경을 훔쳐보았다. 시선을 느낀 그가 루나를 힐끗 바라보자, 다시 바닥을 바라봐야 했지만.

‘……왜 안가?’

루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돈을 주고 평소처럼 사라지기는커녕, 이제는 가게 한편의 의자에 앉아 그녀가 내민 번역본을 읽기 시작했다. 의자에 앉은 그의 자세는 곧았고 내리깐 눈에 촘촘히 달린 속눈썹은 깊었다.

“……정말 이것까지 해낼 줄이야.”

“네?”

“네,라고 묻는 건 버릇입니까?”

“네? 아뇨.”

루나는 바로 대답했다.

그는 문서를 끝까지 읽고 루나에게 다가왔다.

“고대어는 누구에게 배웠습니까?”

‘네?’ 루나는 다시 한번 그렇게 말하려다 그만뒀다.

그녀는 대신 선명한 어조로 되물었다.

“중요…… 한가요?”

루나는 국가 자격증이 없는 고대어 번역가였다. 아키스도 그녀가 불법으로 의뢰를 받고 있다는 건 어렴풋이 알 것이다. 그런데도 루나는 양심이 콕콕 찔렸다.

“당신이 누군가의 제자가 아니라거나 연고가 없다는 건 압니다. 미등록인 것도 알고요. 다만.”

“…….”

루나는 조용히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키스는 고요하게 루나를 바라보다가 미간을 한번 찌푸리고는 입을 열었다. 그는 이런 대화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처럼 굴었다.

“당신의 실력이 너무 뛰어나서.”

루나의 귀가 확 붉어졌다. 그녀는 지금껏 칭찬을 받은 적이 별로 없었다.

“네, 네에.”

“그냥 흥미입니다.”

루나는 괜히 목이 바짝 말랐다. 그녀는 바닥만 바라보며 조심스레 대답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가르쳐 주셨어요.”

물론 거짓말이었다.

루나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건 사실이지만 그는 평범한 상인이었다. 회계나 셈에는 밝을지 몰라도 고대어 같은 건 전혀 몰랐다.

“아버지가 마법사였습니까?”

“잘 몰라요. 아주 어릴 적에 돌아가셨거든요. 제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시절에 기초를 가르쳐 주셨고요. 저는 고대어와 제국어를 동시에 배우며 자랐어요.”

물론 이것 또한 거짓말이었다.

아키스는 무언가 납득한 듯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잘됐군요.”

“……네?”

잘되긴 뭐가 잘되었단 말인가. 루나는 어이가 없었다.

그는 할 말을 다했다는 듯 문서를 챙겼다. 그는 평소처럼 돈주머니를 카운터에 내려놓았다.

“거스름돈은 되었습니다. 일을 잘 마쳐 주었군요.”

“네, 공작 각하의 일에 도움이 되면 좋겠네요.”

그의 보랏빛 눈이 루나를 응시했다. 루나는 그 순간 저도 모르게 생각해 버리고 말았다.

‘……진짜 잘생기긴 했다.’

상황이야 어쨌든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니 조각 같은 생김새가 놀랍기까지 했다. 그의 머리는 제법 키가 큰 그녀와 비교해도 한참 높은 곳에 있었다. 루나는 괜히 어색해져 눈썹을 움직였다.

“그래서, 오늘은 맡길 일이 없으신가요?”

“없습니다. 다음번에 또 오죠.”

“네.”

아키스는 등을 돌리려는 듯 몸을 움직였다. 마른침을 삼킨 루나는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저기, 공작……님.”

루나는 덜컥 그를 붙잡았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루나를 보았다. 루나는 입술이 바짝 탔다. 그녀는 그가 가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죄송해요.”

그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보랏빛 눈동자로 의아하다는 듯 그녀를 응시했다.

“뭐가 말입니까?”

“처음에 여기 오신 날, 공작님을 보고 냉혈한이라고 한 거요. 그거…… 죄송해요.”

그는 일국의 공작이었다. 그런데도 뒷골목 서점의 점원에게 욕을 먹은 일이 대수롭지 않은지, 그는 그저 ‘아.’ 하는 나른한 소리를 냈다. 루나는 그가 생각보다 뒤끝이 없는 사람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반성했나 보군요.”

그가 나직이 속삭이듯 말했다.

“반성은 모르겠고, 죗값은 치렀다고 생각해요.”

루나는 중성적으로 꾸민 목소리로 대답했다.

“죗값?”

“대귀족 모독죄로 언제 잡혀 들어가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매일 밤을 지새웠거든요.”

루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그녀는 다음 순간 심장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아키스가 살짝 웃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깜짝이야, 웃기도 하는구나.’

절세 미남의 희미한 미소는 충격적일 만큼 인상적이었다. 루나는 그를 힐끔 보고 시선을 돌렸다.

“그럼 되었습니다. 용서하죠.”

루나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리고 또…….”

루나는 붉어진 뺨을 의식하며 조그맣게 이어 입을 열었다.

“또?”

이번엔 착각이 아니었다. 아키스의 입꼬리는 희미하게 올라가 있었다.

“펜던트를 주셔서 감사해요. 이거, 제게 큰 도움이 되었어요.”

“내게는 잘 듣지 않아 쓸모가 없었을 뿐입니다. 고맙다는 말은 됐다고 말했는데.”

“그래도…….”

루나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녀에게 이 펜던트는 정말 구명줄 같았다.

아키스는 그런 루나를 보며 피식 웃고 싶어졌다. 아무래도 소년의 머릿속은 정말 바쁜 것 같았다. 저에게 미안했다가, 고마웠다가. 아키스는 그걸 지적하려다 소년의 뺨이 더 붉어지는 것은 보고 싶지 않아 멈췄다.

“당신이 처음 번역해 준 문서를 기억합니까?”

루나는 아키스의 물음에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난생처음으로 받은 정중한 감사의 편지와 두둑한 보수에 대한 기억을. 덕분에 첫 일을 얻었고 자립하기 위한 준비 기반을 만들 수 있었다.

모두 공작 덕분이었다.

“당신이 그날 번역해 준 문서 덕분에 서부로 향하는 게이트 수를 늘릴 수 있었지요. 훌륭했습니다.”

루나는 수줍었지만, 그의 칭찬이 좋았다.

고맙다는 말도, 칭찬도 그다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아마도 그녀가 게이트에 관련된 연구에 조금 일조한 모양이었다. 그가 의외로 예의 바른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 줄은 몰랐어요. 사실 고대어 문자를 제국어로 번역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정작 제국어로 번역된 이론 내용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니까요. 하지만 굳이 이 가게에 오시지 않아도 주변에 일을 도와줄 사람이 많지 않으신가요?”

그 말을 내뱉어 놓고 순간 루나는 아키스에게 자신이 칭찬이나 인정을 바라는 건가 싶었다. 사실 자신의 능력이 필요하다는 말이라도 듣고 싶은 건가. 떠올리고도 어처구니없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전부터 궁금했다. 공작이 왜 이곳에 직접 드나드는지. 한 번은 혹시 절 보기 위해 오는 게 아닌가 하는 정성스런 헛생각까지 했던 루나였다.

아키스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이 서점은 본래 주인이 바뀌기 전, 이 거리에서 가장 유서 깊고 유명한 서점 중 한 곳이었습니다. 나도 아카데미 학생 시절에 고서적을 많이 부탁했던 곳이죠.”

“아, 몰랐어요.”

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이곳에 일자리를 얻은 것은 주인의 손자인 필립이 이곳을 물려받고 나서였다. 이곳이 유명한 서점이었는지는 몰랐다. 그녀는 길을 걷다 묘한 이끌림에 들어와 일자리를 청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당신은 뛰어난 번역가입니다.”

아키스는 대답하며 루나를 훑었다.

이 소년은 탐이 날 만큼 훌륭한 원석이다. 소년에 대해 더 알고 싶을 만큼. 아키스의 지식과 권위에 대한 욕구는 남 못지않았다.

“……혹시, 아카데미에서 지원 받는 것으론 인력이 부족하신 건가요?”

소년이 고개를 갸웃하며 소심하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아키스는 소년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 본 적이 없다. 곱살한 얼굴이라는 건 알았지만 원래 아키스는 타인의 외모에 무감각했다. 서점에서 일하는 직원이 상당한 미소년이라는 디온의 말에 그러려니 했을 뿐이었다.

“그럴 수도 있지요.”

소년의 말대로 그의 조수가 되겠다는 학생들은 차고 넘쳤고, 그가 원하면 일류 국가직 번역가도 전속으로 고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소년 같은 진짜 천재는 없었다. 가장 어려운 언어라는 흑마법사들의 ‘흑의 언어’까지 숨 쉬듯 번역할 수 있는 사람은.

그의 어중간한 대답에 루나는 조금 더 흥미가 생겼다. 아까부터 그녀의 머릿속에는 물음표가 떠다니고 있었다. ‘왜’라는 물음표. 낯선 남자를 향한 호기심. 그녀에게 좋지 않은 징조였다.

“항상 무서운 책을 번역해 달라 하시잖아요. 저주법이나, 독에 대한 내용의 책이나. 그래서…….”

“그래서?”

아키스가 나긋하게 되물었다.

“도대체 왜 이런 책의 번역을 부탁하나 하고요.”

“왜 내가 이런 걸 부탁하는지 모른단 말입니까?”

“네. 책을 번역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마법사에게 왜 이렇게 많은 마법서가 필요한지 잘 모르겠는걸요. 그리고 마법 주문이나 원리 같은 건 읽어도 모르고요. 특히 공작님 같은 상급 마법사들은 해괴한 책들도 많이 가져오시니까요.”

아무래도 소년은 성격이 솔직한 편인 것 같았다. 아니, 솔직함을 넘어서 맹랑했다.

지나치게 솔직한 말들이 꼴 보기 싫지 않은 이유는 왜일까. 그가 영민한 사람에게 관대해서일지도 모른다.

아키스는 소년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군. 정말 어처구니가 없어. 이런 재능의 소유자가.’

아키스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는 소년에게 번역을 부탁했던 책 한 권을 펼쳤다.

“이 내용, 기억합니까.”

“네, 기억해요.”

그는 번역된 내용 하나를 보여 주었다. 루나가 유난히 번역하며 애를 먹었던 암호 같은 페이지였다.

빛과 마력에 대한 장황한 설명이었다. 고대어를 읽을 줄 아는 것과 마법 주문을 이해하는 건 아예 다른 문제라, 루나에게 고대 마법서는 그저 단어의 연속일 뿐이었다. 이를테면 ‘나비, 나비, 빛, 어둠을 마신 고양이……’ 이런 단어의 연속 말이다.

“여기 보면 반복되는 단어가 있을 겁니다. 이쪽의 글자를 이어 보세요.”

“……네, 있어요.”

그가 속삭이듯 말했다.

“마법서를 번역하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고대의 마법서를 번역하면 고대 마법사들의 마법을 훔칠 수 있지요. 현대의 마법사들은 마법을 창조하는 능력을 잃었습니다. 던전에서 발굴된 이런 고급 마법서라면 이 안에 담긴 마법을 열 번은 쓸 수 있죠.”

그건 루나도 어렴풋이 들어 알았다. 마법서를 번역하면 고대의 마법사가 담아 놓은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고.

고대 인류는 숨 쉬는 것처럼 마법을 부렸다 했다. 고대 문명의 잔재들은 현대인들의 삶의 토대였다. 그리고 던전과 유적지에서 발굴되는 마법서들은 줄을 세워도 부족할 정도로 많았다.

“그럼…… 공작님도 이 책에 담긴 마법을 사용할 수 있으세요?”

루나가 조심스레 물었다.

말해 놓고 그녀는 자기가 바보가 된 것 같았다. 아키스가 어처구니없다는 눈으로 그녀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럼, 이 책은 무엇에 대한 마법이에요?”

루나는 바보가 된 김에 에라 모르겠다 하고 물었다.

“내게 이런 기초적인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만일 당신이 제 담당 학생이었으면 크게 혼이 났을 겁니다.”

아키스는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찼다.

그녀는 괜히 심장이 한 번 떨어지는 것 같았다. 아키스가 이어 미성의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라티아스.”

루나는 그게 마법 주문이라는 것을 짐작했다. 아키스가 이어 물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압니까?”

루나는 고개를 끄덕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랐다. 말 그대로 단어의 뜻은 알았다. 루나가 입을 열기도 전에 아키스가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특별한 사람.”

“…….”

그가 보랏빛 눈으로 루나를 길게 응시하며 말했다.

루나는 그의 눈동자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고개를 숙여 얼굴을 감추는 것도 잊은 채 가발의 긴 앞머리가 그녀의 얼굴을 가려 주길 바랄 뿐이었다.

“그런 뜻의 단어죠. 그러나 마법 주문이기도 합니다.”

다음 순간 루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주변에서 반짝이는 작은 반딧불이 바닥에서 떠오르기 시작했다. 루나의 핑크빛 작은 입술이 동그랗게 벌어졌다.

“……와.”

“그리고 빛의 마법이기도하고요.”

반짝이는 수천, 수백 개의 반딧불이 하늘에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루나는 튕겨 오르듯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났다.

“책이, 책들이 망가지기라도 하면…….”

“이건 그냥 환상일 뿐이니 책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키스가 그렇게 말하고 그녀의 어깨를 잡아 눌렀다.

루나는 그가 이끄는 대로 자리에 앉았다. 그의 큰 손은 따뜻했다. 손이 닿은 어깨가 화끈했다.

‘아…….’

아키스의 손이 떨어지자, 그녀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아름다워요.”

건조한 나무 천장에서 떨어지는 황금색 빛 덩어리.

그것은 몹시 아름다웠다. 이어 떨어지던 반딧불들이 흩어져 날리기 시작했다.

황금색 빛의 춤.

루나의 눈동자가 환상 같은 반딧불들을 정신없이 쫓았다. 루나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빛의 반딧불을 만졌다.

“와…….”

루나의 손끝에 닿은 반딧불들은 서서히 흩어져 사라졌다.

“루비 같아요.”

그녀는 손바닥에 떨어진 빛의 입자들을 보았다. 그녀의 몸에 닿은 반딧불들은 신비한 루비색으로 변했다.

라티아스.

마법이 만들어 낸 빛은 그녀가 살아오며 본 어떤 보석보다 아름다웠다. 그녀가 종종 밤 출근을 하며 보곤 하는 숲속의 별빛보다도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 반딧불 사이에서 아른거리는 그의 얼굴도.

그녀가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름다움이었다.

* * *

아키스가 떠나고 나서, 루나는 카운터에 엎드렸다.

‘내가 미쳤지.’

그녀와는 다른 신분의 사람이고 엮여 좋을 것 없는 사람인데 왜 말을 걸었는지.

‘이놈의 호기심.’

루나는 혀를 찼다.

‘그래도 마법은 처음 봤어. 신기해.’

아무리 제국이 마법 문명에 의지하고 있다지만 일반인은 마법을 볼 일이 거의 없었다. 그녀가 제국에서 인구수 대비 마법사 수가 제일 많다는 도시에 살고 있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루나의 손등 위에는 아직도 반짝이는 금빛 가루가 남아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아키스가 사용한 마법의 흔적이었다. 이내 금빛 가루는 루비 같은 붉은색이 되어 그녀의 네 번째 손가락에 내려앉았다. 그녀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마법이란 예쁜 거구나.’

그녀는 숨을 들이켰다.

‘……특별한 사람이라.’

문득 카운터 앞에 놓아 둔 작고 낡은 손거울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안에는 소녀 ‘루나’가 아닌, 어수룩한 소년 ‘루’가 비치고 있었다.

‘꿈도 꾸지 마.’

루나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하며 생각했다.

신분 차이는 그렇다 치자, 그리고 그가 새틴의 약혼자인 것까지 고사하더라도 그는 그녀가 사내아이인 줄 알았다. 만일 여인인 걸 들키면 공작의 손에 의해 감옥으로 끌려갈 것이다. 거기다 공작을 속인 괘씸죄로 가중 처벌 받을지도 모른다.

대외적으로 여인이 고대어를 하는 건 사회적 터부였다. 루나는 가슴에 손을 올려놓았다 내렸다.

멋대로 설렘을 느끼는 심장은 그녀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 * *

밤의 어둠을 가르고 공작의 마차가 저택 문을 통과했다.

공작저는 밤에도 낮처럼 밝았다. 집사는 새벽에 들어온 주인을 아무 불만 없이 맞이했다.

아키스는 곧바로 자신의 침실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 마부 대신 아키스를 보필했던 보좌관, 디온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공작님.”

“무슨 일이지.”

아키스는 별생각 없이 대꾸했다. 마차에서부터 아키스는 골몰이 생각에 몰두해 있었다.

“공작님께서 계속 찾아가시는 소년 말입니다.”

“그래.”

아키스는 여전히 무언가에 정신이 팔린 채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디온은 무슨 무언가를 계속 말하고 싶은 눈치였다.

“그 소년이 마음에 드십니까?”

“무슨 뜻이지?”

아키스는 디온의 묘한 질문에 그제야 그를 제대로 보았다.

“적절하지 않은 말이라는 건 압니다만, 세간에 소문이…….”

아키스는 나른한 소리를 냈다. 아, 하고. 사람들 시선이라는 걸 이제야 의식했다는 듯이.

“무슨 소문인지 네 입으로 말해 봐.”

“공작님께서 그 소년을 마음에 들어 하셔서 계속 드나드신다는 소문이 몇몇 영애들의 귀에 들어갔나 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공개적인 장소니까요. 밤에 몰래 사람을 보내 서점을 정찰하는 영애들도 있나 봅니다.”

디온은 담담하게 말했다. 아키스는 혀를 찼다.

“그따위 헛소문을 믿다니 어처구니가 없군. 우둔하긴.”

“믿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공작님께서 계속 그 소년을 찾으시는 걸 보니 무슨 뜻이 있으신가 궁금합니다. 혹시 특별한 의미라도 있으신지…… 그 소년이 빼어난 번역가인 건 알겠습니다만, 그 소년을 원하시는 겁니까?”

“탐이 나긴 하지.”

아키스는 흘리듯 말했다.

“네?”

디온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아키스는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신경 꺼라. 내가 하는 말만 믿도록.”

아키스는 대답도 듣지 않고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데려와서 잘 가르쳐야겠군.’

환경만 갖춰지면 소년은 훌륭한 고대어 연구가가 될 것이다. 의지할 곳이 없으니 루라는 소년을 이용할 사람도 없다는 뜻이고, 돈 욕심 외에 별다른 욕심이 없어 보였으니 오히려 다루기 쉽다.

아키스는 목적이 확실한 사람이 좋았다. 돈, 권력, 명예. 그런 걸 바라는 사람들이 훨씬 더 명쾌했다.

그런 자들은 원하는 걸 주는 한 배신하지 않는다. 도리어 성가신 타입은 의지, 사상, 양심으로 움직이는 자들이었다. 아키스는 고분하지 못한 이들을 싫어했다.

‘내 눈을 못 마주쳤지.’

루라는 이름의 소년은 자신의 능력에 자신감을 가지고 오만하기는커녕 아키스와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갈 때마다 그 조그만 몸을 하도 수그리고 있는 탓에 아키스도 소년의 얼굴이 가물가물했다. 얼굴에 점이 두 개 있고, 목덜미와 손이 가늘다는 것 외에는.

타인과의 접촉을 두려워하고 매사에 자신감이 없는 부류의 천재들도 있었다. 지금껏 천재에 근접한 이들을 수없이 봐 온 아키스는 알았다. 소년의 조금 부자연스러운 태도도 그러려니 했다.

‘그러고 보니.’

무심결에 오늘 소년의 손을 만졌다. 아키스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미미하게 눈을 찌푸렸다.

그는 타인과 접촉하는 것을 극도로 혐오했다. 그러나 소년은 그다지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그러나 그건 사전적 감상일 뿐 그는 아무런 흥미가 없었다. 남자는 물론 여자조차 극도로 무관심한 그였다.

그가 탐내는 건 소년의 두뇌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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