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10/15)

9

봄이 지나고 더운 여름이 왔다.

수도 인근의 황야 근처에서 한 소녀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약초꾼들이 발견한 그 소녀는, 공작의 의뢰로 정보 길드에서 은밀하게 찾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보나’라고 했다. 그녀는 고아 출신 하녀였다. 소녀의 배에서는 칼자국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그녀를 죽인 자는 흑마법사 휘멘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소녀가 흑마법사 휘멘의 하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리 공작이 수배해 놓은 사람들은 발 빠르게 시체에서 발견된 유품들을 빼돌렸다. 보나라는 하녀의 소지품은 정말 보잘것없었다. 편지 몇 통과 텅 빈 주머니뿐이었다.

디온의 보고를 듣는 아키스의 표정은 무표정했다.

“누군가 보나라는 하녀를 산 채로 황야에 버렸는데, 강도를 만나 죽은 것 같다는 말이지.”

“네, 그리고 하녀의 유품에서 자매라 지칭된 사람과 주고받은 편지가 있었습니다. 호적상의 관계가 전혀 없어 추적이 늦었습니다만, 알고 보니 고아원에서 같이 자란 자매였던 모양입니다. 그 자매는 라미라가에서 오래 일한 하녀인데, 이름은 케아라고 합니다.”

“친자매인가?”

“네. 그런데 따로 고아원에 들어오며 고아로 처리되어 호적이 분리되었던 모양입니다.”

아키스는 편지 모서리를 입가에 가져다 댔다.

이제야 모든 의문이 걷혔다.

휘멘의 사라진 독약. 그리고 그 약과 라미라가와의 연결 고리. 라미라 영애라면 그런 일을 저지르기 충분한 동기가 있는 이였다.

“슬슬 벌을 줄 때가 온 것 같구나.”

그가 속삭였다.

“그 케아라는 하녀는 어디 있지?”

“그것이…….”

디온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그 하녀 또한 행방불명되었다 합니다.”

* * *

“안테, 그 여자애는 상태가 어때? 제대로 감시하고 있지?”

달리아는 자신이 가장 아끼는 시종을 불러 물었다.

안테는 달리아가 자랑하는 용모가 준수한 소년 시종들 중, 가장 총애를 받는 아이였다.

“물론입니다, 아가씨. 창고 밖으로 한 발짝도 내보내지 않고 있습니다.”

보나. 달리아가 흑마법사의 약을 훔치도록 이용하고 죽인 하녀. 그리고 케아는 보나의 자매였다.

‘케아도 사라져야 해. 난 케아를 때리고 학대했지. 흑마법사의 하녀인 보나를 협박하기 위해서 말이야.’

자매를 살리고 싶으면 약을 가져오라고 했다. 그리고 보나는 아키스의 몸에도 통하는 약을 훔쳐왔다. 그리고 보나를 황야에 버려 죽인 뒤 죄를 뒤집어씌웠다.

추하고 천한 것들이니 그다지 죄책감은 없었지만, 긴장은 되었다. 보나의 시체가 발견되고, 자신이 용의 선상에 오를까 달리아는 전전긍긍하기 시작했다.

‘케아는 증인이자 증거야. 사라져야 해.’

그래서 달리아는 케아를 남몰래 외딴 창고에 감금했다.

그건 어렵지 않았다. 울먹이는 얼굴로 자신의 말이라면 죽는 시늉도 하는 시종들에게 말만 하면 되었다.

“먹을 것도 제대로 넣어 주고 있는데 왜 죽는 소리인지…… 정말 심하게 아픈 것 같았니?”

“……열병이 심하게 났습니다. 약은 주지 않았습니다.”

달리아는 혀를 찼다.

계속 비실비실하던 케아는 보나의 시체가 발견된 걸 안 후부터 심하게 앓기 시작했다. 차라리 콱 죽으면 좋을 텐데 질기게도 살아 있었다.

‘목숨도 질기지. 다 꼴 보기 싫어 죽겠군. 이럴 때 루나, 그 미친 여자의 소식은 왜 자꾸 들려오는 거야.’

신문에는 한동안 공작 부인에 대한 소식이 잔뜩 실렸다.

수도의 가장 최근 화제는 공작 부인이 편집으로 참여한 작품인 히트작 <월플라워 부인>이 연극화 된다는 내용이었다. 그것도 대배우 테세스의 극단이 모든 작품 일정을 미루고 바로 연극 준비에 들어갔다 했다.

‘이런 눈 가리고 아웅에 누가 당할 줄 알고…… 그 여자가 실제 작가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이건 잘못되었어. 거기다, 사교계에서 이 소설 때문에 허파에 바람이 들어 혼인하지 않겠다거나 잘난 체를 하고 다니는 계집들이 늘었다 하니 정말 큰일이야. 사교계의 질서를 위해서라도 이런 년은 꼭 혼이 나야지.’

달리아는 시종, 안테를 보며 물었다.

“세상 사람들이 보나라는 하녀 년을 죽인 게 흑마법사라고 떠든다지?”

“그렇긴 합니다만, 뜬소문이라서 아마 재판까지는 가지 않을지도…….”

안테가 눈을 굴리며 조심스레 말했다.

“나도 그렇게 덮을 수 없다는 건 알아.”

달리아는 초조하게 신문을 보다가 결국 눈물을 그렁거렸다.

“내가 이렇게 안 풀리는 건 그 공작 부인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천한 년 때문이야. 정말로, 다 그년 때문이야…….”

“울지 마십시오, 아가씨.”

측근인 안테는 달리아의 울먹이는 모습에 이를 꽉 물었다.

“어떻게 해 드릴까요? 제가 그 여자를 칼로 찌르고 올까요?”

“멍청한 소리. 그랬다가는 다 내 탓이 될 텐데. 사교계에는 사교계의 방법이 있다는 걸 왜 아직 몰라.”

달리아는 진절머리를 내며 말했다.

“……이왕 할 거면 죽는 것보다는 강간이 낫겠지. 그러면 공작 부인 자리에서 쫓겨날 테니까…….”

“그 여자가 하룻밤 잠자리로 공작님을 유혹했다 하니 사내에 약하지 않을까요?”

“……그것도 그렇지.”

하지만 아키스 같은 남자와 살며 다른 남자에게 쉬이 눈을 돌릴까? 그 여자를 어떻게 없앨 수 없을까.

달리아는 손톱을 깨물었다.

“거기다, 이년이 페니와 대놓고 친하게 지내 내 얼굴에 먹칠을 하고 있단 말이야. 페니를 받아주지 말라 내 누누이 그들에게 말했는데…….”

페니를 제 손으로 매장한 건 달리아였다. 루나는 존재 자체가 달리아에 대한 모독이었다.

‘페니와 아키스가 혼담이 오간 일은 지금 생각해도 이가 갈려. 거기다 페니도 날 배신하고 아키스에게 접근하려 했지. 걘 대가를 치른 거야.’

아키스에 대한 달리아에 대한 병적인 사랑은 워낙 오래되어, 이제는 아키스가 어떤 사람인지조차 중요하지 않았다.

‘절대. 난 아키스를 포기하지 않아, 절대로…….’

달리아는 입술을 깨물고 중얼거렸다.

그날 밤, 달리아가 감금한 하녀 케아가 열병을 앓다 죽었다.

달리아는 반색했다.

“하녀가 죽었다고?”

“네, 어젯밤 조용히 숨을 거뒀습니다. 며칠을 앓더니 이렇게 가는군요.”

“……그런데 시체를 어떻게 처리하지?”

“걱정 마십시오. 하녀가 병사하는 건 흔한 일인 걸요. 연고가 없으니 조용히 장례를 치러 주면 됩니다.”

믿음직한 말이었다. 달리아는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 처리해야 한다. 알겠지?”

“저희가 손을 댄 것도 아니고 제풀에 앓다 죽었는데요, 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래. 그건 그렇지.”

달리아는 매혹적으로 웃었다. 틀린 말이 하나 없었다.

달리아는 며칠이 지나자 곧 하녀의 일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리고 새로운 고민을 시작했다.

‘월플라워 부인 연극을 보러 가, 말아?’

수도 모든 귀족들이 그 연극을 보러 간다고 난리들이었다. 가지 않으면 제가 물러선 것처럼 보일 테고, 간다면 그거 그거대로 구설수에 오를 터였다.

결국, 달리아는 이를 갈며 가기로 결정했다.

* * *

월플라워 부인의 인기는 수도에서 파죽지세였다.

아키스가 테세스 남작의 극단을 인수한 덕에 루나는 수월하게 판권 계약을 할 수 있었다. 연극 수익의 몇 퍼센트를 루나가 받는 계약이었다.

마침내 연극을 하는 날, 수도 사람들은 모두 술렁였다. 루나는 일찍 연극 장소인 대극장으로 향했다.

‘……저 여자도 왔군.’

루나는 마차에서 내리는 달리아를 보며 생각했다.

‘이따 페니를 더 챙겨야겠어.’

루나는 입술을 한번 다물고 생각했다.

“뭘 보나요, 루나?”

“아, 아무것도 아녜요. 사실은, 달리아 드 라미라 영애가 책 출간 때 한 일이 있어 오늘도 무슨 일을 치지 않을까 해서 살피고 있었어요.”

“아마 앞으로는 자주 볼 일이 없을 텐데요.”

“네?”

루나는 아키스의 평화로운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 * *

<월플라워 부인> 연극 초연에는 내로라하는 귀빈들이 몰려들었다.

아키스가 잠시 안면 있는 귀빈들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 루나는 같이 발코니 석에서 함께 연극을 관람하기로 한 페니를 만났다.

“초연 이야기는 거절한 거지?”

“당연하지. 우리 작품의 원작이 첫 개봉하는 날인데, 많은 사람들 앞에서 보고 싶은 것이 당연한걸.”

아키스가 집 안에 극장을 지어 줬기에, 거기서 개봉 전 연극을 볼 수 있게 해 주겠다는 제안을 단칼에 거절한 루나였다.

페니를 보자, 루나는 달리아가 더 신경 쓰였다.

“페니, 괜찮아?”

“뭐가?”

루나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1열에 앉은 달리아에게 닿았다. 그 시선을 따라간 페니는 피식 웃었다.

“저 애가 이전만 못하긴 한가 봐. 평소라면 추종자를 몰고 와서 내게 시비를 걸었을 텐데, 오늘은 널 보고 얼씬도 못하는 걸 보니 말이야.”

“그래?”

“이젠 괜찮아. 나도 자부심이 있거든. 네가 일을 소개해 줬잖아. 달리아가 또 시비를 걸어도 이젠 아무렇지도 않을 것 같아.”

페니의 말에 루나는 작게 웃었다.

루나가 페니를 출판사에 추천한 이유는 스스로를 위한 이유도 있었다.

알고 지낸 지 오래되진 않았지만 페니는 믿음직한 성격이었다. 그래서 만일 일이 그르치게 되어 루나가 급히 수도를 떠나게 될 경우 페니에게 뒷일을 맡길 수 있다 생각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조용히 간직한 속내일 뿐이었다.

“공작님은?”

“곧 올 거야. 아는 사람들이 많아서 잠시 인사를 하고 오나 봐.”

페니는 무대 정면을 뚫어지게 보다가 루나에게 속삭였다.

“루나, 달리아가 싫으니?”

“……좋지는 않아. 내가 잘 모르는 사람이 나를 죽도록 증오하고 있다는 게 소름 끼쳐. 거기다 너와 사이가 좋지도 않고…….”

페니는 무언가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만일, 내가 달리아의 절대적인 약점을 알고 있다면…… 그래서 그걸 폭로하게 될 경우 달리아가 다신 널 건드리지 못한다면, 그럼 어떨 것 같아? 내가 그렇게 했으면 좋겠니?”

페니는 언젠가 본 광경을 떠올렸다.

달리아의 집에 놀러 갔다가 우연히 본 편지. 달리아의 파우더 룸 서랍에 있던 그 편지는 누군가 달리아에게 돈을 요구하는 내용이 적힌 편지였다.

페니가 편지를 보았다는 걸 알아챈 달리아는 악귀 같은 표정을 지었었다.

처음에는 왜 그러는지 몰랐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돌이켜 곰곰이 생각해 보니 편지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아가, 이번에 돈을 보내 주지 않으면 저택에 또 찾아갈 거야.]

형편없는 맞춤법과 철자로 쓰인 편지, 그건 여자의 글씨였다.

한참 후에야 페니는 그것이 달리아의 출생의 비밀과 관련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달리아가 페니를 짓밟은 이유가 자신이 본 편지의 내용과 관련 있다는 걸 확신하게 되었다.

막 사교계에서 몰락했을 당시, 그때는 아무도 페니의 말을 들어 주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지금 공작가의 힘을 빌어 그 건을 파고들면 달리아를 공격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매장이라니…….”

루나는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페니를 보았다.

페니는 진지한 표정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루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러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왜? 달리아가 널 귀찮게 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잖니?”

“하지만 그렇게 해서 네게 영향이 안 갈 내용이었다면 이미 했겠지. 그리고 그 비밀이 뭔지는 몰라도, 네가 달리아의 친구였을 때 안 비밀이라 지금까지 숨기고 있던 것 아니야?”

루나는 속삭이며 말을 이었다.

“네가 원한다면 해도 좋아. 하지만 내 의사를 묻는다면, 날 위해서라면 괜찮아. 네가 이유가 있어 지금껏 입을 다물고 있었겠지. 이를테면 그 일을 폭로하면 네 자부심이 상처를 받는다든가 말이야.”

페니는 루나의 말에 잠시 멍해져 눈을 깜빡였다.

‘도대체 이 여자는…….’

루나는 생각보다 대단한 여자인지도 몰랐다. 정말로 속이 깊었다.

그리고 루나의 말이 맞았다. 페니는 자긍심이 높은 성격이라 달리아를 매장하더라도 출생에 대한 것을 파고들어 폭로하고 싶지 않았다. 달리아와 같은 급이 되고 싶지 않았으니까.

페니는 피식 웃고 정면을 응시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아무튼, 오늘은 달리아가 아무 짓도 안 하면 좋겠는데…….”

“제 추종자들을 끌고 온 걸 보니, 아마 연극에 대해 트집 잡아 나쁘게 소문 낼 생각이겠지. 그건 좀 걱정되네. 그때는 원작 책의 홍보 담당으로써 힘내 줘, 알았지?”

“당연하지, 걱정 마.”

페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달리아는 1열 중앙에 앉았다.

루나의 생각대로 달리아는 루나에게 어떻게 해를 끼칠지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부모님의 인맥을 총동원해서 연극에 대한 악평을 소문내면…….’

안 그래도 보수적인 문학계의 인사들은 <월플라워 부인>을 증오한다 했다. 그들을 부추겨 규합하면 윤리적인 부분을 걸고넘어져 작품에 타격을 줄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다가 제 풀에 성이 난 달리아는 루나를 무대로 끌어내려 사내들을 시켜 침을 뱉고 구타하고 강간하는 장면을 상상했다. 그러니 속이 좀 풀렸다.

‘언젠가 제 주제에 안 맞는 감투를 쓴 대가를 치르게 될 거다.’

그때였다.

달리아는 누군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발견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아키스가 발코니 석 입구 난간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 보아도 황홀할 만큼 완벽한 모습이었다.

‘그, 그가 웬일이지?’

달리아의 심장이 뛰었다.

그녀는 천사처럼 완벽한 얼굴로 살며시 마주 미소 지었다.

아키스가 그녀에게 정면으로 관심을 보여 준 건 몹시도 오랜만이었다. 달리아의 기분이 들떴다.

그때, 그녀는 까맣게 몰랐다.

악마도, 맹수도 제물을 잡아먹기 전에는 제물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한다는 것을.

* * *

아키스는 조용히 달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그는 짧은 주문을 입안으로 읊조렸다. 그리고 손바닥을 들어 살짝 입김을 불었다.

곧이어 반짝이는 주문이 공중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천천히 달리아를 향해 스며들었다.

‘방금 뭐였지?’

발코니 석에 앉아 있던 루나는 1층에서 무언가 반짝이는 걸 본 것 같았다.

‘글자, 무슨 글자를 본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루나는 미간을 살며시 찌푸리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아키스가 발코니 석으로 들어왔다. 루나는 샹들리에에 반사된 빛을 본 것이려니 했다.

“어서 와요, 아키스.”

루나가 부드럽게 말했다.

페니가 아키스를 향해 눈인사했다. 관객들이 모두 착석했으니, 볼거리인 연극만 시작하면 되는 참이었다.

* * *

달리아는 정면을 응시하고 곧게 앉아 있었다.

곧 막이 올라가고 화려한 무대 세트가 드러났다. 사람들의 박수갈채가 터졌다.

샹들리에의 빛이 강해서일까, 달리아는 머릿속이 약간 몽롱한 듯한 기분을 느꼈다.

곧이어 연극의 여주인공이 무대 위로 걸어 나왔다.

천사같이 아름다운 여배우 세라였다.

그녀는 한때 사교계의 공주인 달리아를 닮은 얼굴로 유명세를 타, 대배우 테세스의 페어 역할을 맡게 됐을 정도로 유명해진 여배우였다. 그녀는 월플라워 부인 역할을 맡은 단독 주연이었다.

‘일부러 날 흉내 내 꾸민 건가?’

세라는 오늘따라 달리아가 즐겨 입는 스타일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별것들이 다 날 흉내 낸다니까.’

달리아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때, 두 번째 배우가 걸어 나왔다.

‘어……?’

달리아는 흠칫 놀랐다.

두 번째로 걸어 나온 여배우는 추하게 늙은 외모에 거지처럼 기운 옷을 입고 있었다.

‘이 연극에 저런 배역도 있었나? 그것보다 저 얼굴, 낯이 익은데…….’

달리아의 얼굴이 굳었다.

여자의 얼굴이 누군지 기억났다. 그 추하게 늙은 여배우는 달리아의 친모와 몹시 닮아 있었다.

‘이게 뭐야, 우연인가? 아니, 어떻게 이렇게 닮은 사람이 있지?’

달리아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늙은 여자는 히죽 웃고 기둥 한편에 섰다.

‘……왜 아무도 저 여자의 존재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 거야?’

섬찟한 가슴을 누르며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관객들은 아무도 달리아의 친모에게는 시선을 주고 있지 않았다.

그때였다.

세라가 사람들을 응시하며 한 걸음 걸어 나왔다. 그리고 대사를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모두들 내가 누군지 아시겠죠? 난 사교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교계의 공주거든요. 다들 날 그렇게 부르죠. 다들 내 목적은 아시겠죠? 난 공작과 반드시 결혼할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 언젠가 현재 공작 부인을 곧 찢어 죽일 거고요. 내가 총애하는 시종들을 시켜 어떻게든 스캔들을 만들고 말 거랍니다. 밤이고 낮이고 그 상상만을 위안 삼아 살아가죠. 걱정 마세요. 내가 원래 가져야 할 것을 되찾는 것뿐이거든요. 다들 제가 누군지 아시죠? 내 이름은 달리아예요. 오늘 내가 맡은 배역이죠.”

달리아의 턱이 덜덜 떨렸다.

“이게 무슨…….”

그녀의 비밀스런 욕망이 만천하에 까발려지고 있었다.

‘함정…… 함정이었구나…….’

분명 루나가 달리아를 조롱하기 위해 이 연극을 계획한 것이다. 여주인공을 달리아와 비슷하게 꾸며 자신을 조롱하다니. 이건 그녀조차 생각 못한 괴롭힘 방법이었다.

달리아가 이를 갈며 루나와 페니를 향해 고개를 휙 돌렸다.

‘둘 다 죽여 버릴 거야. 분명 둘의 합작일 거야. 가만 안 둬……. 날 조롱하기 위해 이 거대한 연극을 준비한 거야.’

달리아의 머리가 핑 돌았다.

그녀가 미쳐 버릴 것 같은 순간에도 여배우 세라의 입은 조금도 멈추지 않았다.

세라는 손을 치켜들어 나이 든 여자를 가리켰다.

“저기 서 있는 저 늙고 추한 여자 보이시죠? 저 사람은 내 친모랍니다. 그게 내가 평생을 숨겨 온 비밀이죠. 아버지가 하루 술을 마시고 실수해서 낳은 아이가 나에요. 하지만 걱정 마세요. 우리 부모님은 천사 같아서, 내 부탁이라면 뭐든지 들어주거든요. 내 친모는 종종 우리 가문에 나타나서 돈을 뜯어가죠.”

세라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

“난 그 비밀을 감추기 위해 절친한 친구인 페니를 매장해 버렸답니다. 뭐, 사실 그건 핑계였을지도 몰라요. 원래 페니가 명문가 출신에 순혈 귀족이라고 거들먹거리는 게 꼴 보기 싫었거든. 하지만 나 달리아도, 공작가의 일원이 되면 진짜 귀족이 될 수 있어요. 사생아인 내 핏줄을 세탁해 줄 사람은 공작뿐이니, 사랑하는 아키스와의 혼인이 내 인생 목표랍니다. 아무튼 그런 년이 그 천한 공작 부인, 루나인가 뭔가 하는 년하고 붙어 다녀? 이건 나에 대한 모독이에요. 두 년 다 꼭 찢어 죽이고 말 거예요. 페니 그년이 진짜로 강간당하지 않은 게 내 천추의 한이랍니다. 그 멍청이가 판을 깔아 줬는데 계집 하나 마음대로 못하지 뭐예요?”

달리아는 혼절하기 직전이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야, 이건 내가 아니에요!”

달리아가 날카롭게 소리 질렀다.

“페니가 강간당하도록 상황을 만든 건 내가 아니야, 이건 모두 공작 부인의 함정이야!”

여배우, 세라가 똑바로 달리아를 바라보았다.

“사실이 아니라고요? 그날 약에 취한 페니를 마차에 실은 건 당신이잖아요, 달리아?”

“내, 내가 아니야. 페니가 술에 취해 맘대로 그런 걸 어떻게 해. 내가 한 건 고작 술에 약을 넣은 것뿐인데, 장난이었는데…… 그건 장난이었어. 모두 믿어 줘요. 정말이에요!”

“그러면 공작 부인은요?”

“루나인가 뭔가 하는 그런 천한 년이 망하길 바란 게 뭐가 나빠? 다들 속으로 그렇게 생각할걸? 그 음흉한 년이 이런 함정을 파?”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방금까지 작게나마 웅성거리던 사위가 쥐죽은 듯 조용했다.

달리아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관객들이 모두 숨죽여 달리아를 보고 있었다. 달리아는 다시 무대를 보았다.

“……어?”

무대는 텅 비어 있었다.

“……아…….”

달리아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라, 라미라 영애.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지금 뭐라고 외치신 거예요? 정신 차리세요!”

자신의 옆에 앉아 있던 추종자인 영애들이 벌벌 떨며 그렇게 말했다.

“페니라면, 페니 드 르시타?”

“지금 이런 자리에서 공작 부인을 모독한 건가?”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달리아의 머리가 핑 돌았다.

“방금 연극에서…… 세라가…… 날…… 날 모독했잖아. 나랑 똑같이 꾸미고 나와서…… 그래서 난…….”

“아직 막이 올라가지도 않았어요, 영애. 세라는 나오지도 않았다구요.”

옆자리에 앉은 영애가 미친 사람을 보는 눈으로 중얼거렸다.

무대는 연극이 시작하기 전, 마지막으로 열리는 은빛의 투명한 막이 걷혀지지도 않은 상태였다. 달리아의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추태야?”

“실성한 것 아닌가?”

삽시간에 중얼거림이 번지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들이 놀란 눈을 뜨고 그녀를 보고 있었다. 흡사 광자를 보는 눈빛이었다.

“……아…… 아…….”

내가 술을 마셨나?

아니면 약을 했나?

달리아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녀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비틀대며 그 자리를 나섰다.

미친 듯이 뛰어 자신의 마차로 혼비백산 달려갔다. 그녀는 마차에 타 앞 벽을 마구 두드렸다. 그리고 마부에게 명령했다.

“당장 출발해!”

“벌써 연극이 끝났습니까?”

마부의 놀란 목소리에 달리아가 치를 떨었다. 연극의 연 자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호위들은…….”

“달리라니까? 당장 집으로 가!”

달리아가 히스테릭하게 외치자, 마부는 영문을 모르고 무작정 마차를 출발시켰다.

달리아는 몸을 바들바들 떨며 마차 안에서 몸을 옹송그렸다.

그때였다.

“……보나……? 케아……?”

분명 죽은 것이 분명한 하녀들이 마차 맞은편에서 달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의 하녀들이 미소 지었다.

케아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난 아가씨를 믿고 내게 친자매가 있다는 걸 알려 주었는데, 왜 그걸 이용하셨어요? 제게만 은화를 주셨잖아요…… 전 아가씨가 절 총애하시는 줄 알고 그랬지요.”

보나가 파랗게 뜬 얼굴로 물었다.

“흑마법사가 두렵지도 않으셨어요? 아니, 천벌이 두렵지도 않으셨어요? 왜 우리를 죽였어요?”

“히익, 히이이이익!”

달리아가 마차 벽을 긁으며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멈춰, 마차를 멈춰!”

마부가 급하게 말고삐를 당겼다.

달리아는 마차에서 거의 네발로 기어 내렸다. 그러자 하녀들이 여전히 웃는 낯으로 자신을 따라 내렸다.

“치워, 이 귀신들 치워! 이 미친년들이……!”

달리아는 자신을 귀신 보듯 보는 마부의 시선을 발견했다.

“……영애?”

“치우라고, 뭘 하고 앉아 있어?”

마부는 소름이 끼쳤다.

달리아는 계속 허공에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 * *

극장에서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다 달려 나간 달리아는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수도에 달리아 드 라미라가 미쳤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리고 또다시 기묘한 소문이 돌았다. 제국 3대 명문가의 촉망 받는 영애인 페니가 남자와 야반도주한 사건. 그 사건이 달리아가 강간을 사주한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소문이 커지자 그 사건이 있던 날, 페니와 마차를 타고 갔던 영식은 사교계에서 벌레 취급받기 시작했다. 보수적인 제국인 만큼 강간 미수범에게는 관대하지 않았다. 결국 그 사내는 가문에서 파문당하고 시골로 내려갔다.

“……별일이 다 있군.”

달리아가 미쳐 날뛴 덕에 연극은 엄청난 화제가 되었다. 루나는 오싹한 기분을 느끼며 신문을 보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키스, 혹시 짚이는 게 있나요? 달리아 영애가 미쳤다는데…….”

루나는 아침 식사 맞은편의 아키스에게 물었다.

“글쎄, 난 전혀 모르겠는데요. 정신병리학은 내 분야가 아니라서.”

루나는 아무렇지 않게 차를 마시며 대답하는 아키스가 무언가 미심쩍었다.

그러나 더 파고들 수도 없어 꺼림칙한 기분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원수에 가까운 사람이 미쳤다는 데 뭘 더 어쩌겠는가.

아키스는 느긋하게 미소 지었다. 그는 빚은 꼭 갚는 성격이었다.

* * *

한편, 라미라가에서는 갑자기 이상해져 돌아온 딸 때문에 미칠 지경이었다.

달리아가 자꾸만 헛소리를 떠들었는데, 그 말 하나하나가 외부로 유출될 경우 가문이 흔들릴 만한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아아, 그래. 공작에게 약을 먹이고 싶어서 하녀들을 죽였어. 최음 독약을 먹이면 굴복시킬 수 있다고 들었거든. 내 잘못이야. 하지만 너희 하녀 천것들이 시키는 대로 안 해서 그런 거잖아! 왜 순순히 약을 훔쳐 내지 않아서 날 곤란하게 만든 거야? 이제 속이 시원해? 사라져, 제발 사라지란 말이야!”

그뿐이 아니었다.

자기 때문에 공작이 죽을 뻔했다느니, 공작 부인을 꼭 망쳐 버릴 거라느니. 페니의 강간 사주를 했다느니.

“실레노스와는 연락이 아직도 안 되나?”

설상가상으로 가문의 자문 마법사와도 연락이 되지 않았다. 의사들도 모두 고개만 설레설레 저었다.

“……널 납치한 건 시종들이 한 일이라고, 난 몰라. 모른다고. 내 잘못 아니야! 안테에게 가서 붙으라고!”

라미라 후작 부부는 미쳐서 떠들고 다니는 딸을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결국 그들은 그녀를 외딴 신전의 요양소에 가두기로 마음먹었다.

비록 친딸은 아니지만 후작 부인은 달리아를 친딸처럼 키웠다. 라미라 후작 부부는 두 손을 맞잡고 울기까지 했다.

그러면서도 신신당부하는 걸 잊지 않았다.

“내 딸이 미친 것 같으니, 딸이 하는 헛소리들이 밖으로 절대 새어 나가지 않게 해 달라 신전에 전하게. 꼭이네. 신전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치료하게.”

그다음에는 호위 시종들이 문제였다. 라미라 후작은 그들을 남몰래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달리아가 총애하던 미소년 시종들이 문제였던가? 그것들의 영향을 받아 달리아가 해괴한 일을 하다 미쳐 버린 게 분명하구나.’

달리아가 그 시종들을 시켜 뭔가 일을 획책하려 했다면, 증인을 남겨 둬서는 안 되었다. 특히 안테는 조용히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가문의 안위가 우선이야. 딸을 보호하려면 가문이 무너져선 안 돼.’

라미라 후작가는 대 명문가였지만, 공작은 나라의 근간이요 가장 소중한 보물이었다. 드래곤 계약자의 혈통을 이을 사내를 해하려 했다면 아무리 라미라 후작가라고 해도 풍비박산 날 것이었다.

달리아가 마차로 이송되는 날까지도 그녀는 계속 환상을 보았다. 하녀들의 환상은 계속 달리아를 따라다녔다.

“제발 사라져, 사라지라고…….”

수도원으로 이송되는 마차에서 보나와 케아가 방긋방긋 웃으며 물었다.

“그런데 그 루라는 소년은?”

“……루?”

“아가씨는 그 소년과 무슨 관계지?”

“그 소년을 납치하려 한 건 실패했어. 난 아무 짓도 안 했다고…… 잘 몰라. 이름만 안다고!”

달리아는 정신을 놓아 가면서도 이전에 맹렬하게 집착하는 일들, 이를테면 공작이나 공작 부인, 페니에 대해서는 기민하게 반응했다.

보나가 창백한 얼굴로 달리아를 보며 물었다.

“그러니까 그 소년과 네가 아무 관계도 없단 말이지?”

“무슨 말이야? 그보다 아키스가 아직 그 소년을 사랑하니? 정말이야?”

달리아는 실성해 물었다.

보나와 케아의 환상은 빙긋 웃더니 눈짓을 주고받았다.

“잘못했어, 이건 아키스가 주는 벌이지? 제발, 제발 용서해 달라고 전해 줘! 난 그를 사랑한 죄밖에 없다고.”

“우린 사라지지 않을 거야.”

보나와 케아가 속삭였다.

“계속 네 옆에 있을 거야. 네가 지은 죄만큼 말이야.”

* * *

아키스는 서재 의자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고 있다가 천천히 눈을 떴다.

방금 달리아가 보는 환각에 간섭한 터였다. 그녀가 하녀들의 환상에게 한 말은 마법으로 이어져 아키스에게 정확히 전해졌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아키스는 달리아의 환상에 간섭하는 것을 끊었다. 이제 그녀가 어떤 환상을 보고 미쳐 가든 그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 되었다.

“……역시 달리아는 루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던 모양이군.”

그날, 고서점에 소년이 있던 건 어처구니없는 우연이었다. 운명이 만들어 낸 지독한 함정이었다. 왜 소년이 사라져 버렸는지, 그건 여전히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아키스는 눈가를 가볍게 눌렀다. 어두운 서점 속에서 전등 빛 아래서 미소 짓던 소년의 얼굴이 떠올랐다. 흩날리는 먼지 속에서 웃고 있던 소년의 모습.

‘……저지른 일이 있으니 귀한 주문으로 벌을 준 것이 과하지 않군.’

아키스는 달리아를 벌주기 위해 그가 가진 것 중 가장 어렵고 귀한 주문 중 하나를 사용했다. 죄를 지은 자에게 죄책감의 근원이 될 만한 환상을 계속 보여 주는 주문이었다. 아마도 1년은 환각에 시달릴 것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녀가 지은 죄가 없었다면 아무 타격도 받지 않았겠지.’

아키스는 달리아가 천벌을 받도록 유도한 것뿐이었다.

“디온.”

아키스는 종을 쳐 디온을 불렀다.

“하녀들은 신전으로 유해를 보내 제대로 장례를 치러 줘라. 철없는 달리아의 욕망에 휘말려 가엾게 되었군. 좋은 신관을 데려다 정성 들여 기도해 달라 하도록.”

“이미 다 준비해놓았습니다.”

충직한 디온의 말에 아키스는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들이라 하니, 달의 여신의 신전으로 보내면 좋겠구나.”

“예, 그리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 * *

루나와 페니는 이제 가장 친한 친구일 뿐만 아니라, 같이 사업을 하는 동료기도 했다.

만나면 항상 놀러 다니기 일쑤였던 예전과는 달리, 이제는 사무실에서 만나 일을 보거나 이런저런 일을 의논하고 그다음에 차를 마시러 빠져나오곤 했다.

“별일이 다 있다니까. 세상에 천벌이 있나 싶었는데, 사람이 한순간 그렇게 미쳐 버리기도 하는구나 싶어.”

차를 마시며 페니가 나직이 말했다.

루나는 페니가 먼저 달리아가 실성한 것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 전까지는 말을 조심하고 있었다. 그래도 한때 친구이자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는 사람이 잘못된 일이니, 제가 쉽게 거론하기 힘든 일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게 말이야.”

페니는 쓰게 웃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고 보니 페니는 오늘따라 피곤한 낯이었다. 그녀는 입을 가리고 작게 하품을 했다. 그녀의 흐트러진 모습이 생소했다.

“요즘 밤에 잠은 잘 자?”

“글쎄, 요 며칠 잠이 잘 오지 않더라고…… 바쁘기도 했고.”

“일이 많이 힘들어?”

“그건 아니야. 바빠서 행복해.”

페니는 늘 완벽하게 화장한 얼굴에 우아한 드레스 차림을 즐겼다.

루나도 화장 하녀의 솜씨가 좋아 늘 상큼하게 꾸미는 편이었지만, 페니는 오래 자신을 단장한 사람 특유의 느낌이 있었다.

“으응, 그래서 요즘 아침에 화장하는 시간이 너무 아깝다니까.”

“화장을 옅게 하거나 안 하면 되잖아?”

제국에서는 요즘 화장이 대유행이었다.

그러나 나이 든 보수적인 노부인들은 화장을 거의 하지 않기도 했다. 중요한 무도회나 모임 자리만 아니라면 화장하지 않고 다닌다 해도 무례한 건 아니었다.

페니는 그 말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난 내가 완벽하게 갖춰진 모습이 좋더라고. 화장하고 옷을 칼같이 입어야, 오늘 일이 잘되겠구나 싶어.”

“아, 그건 개개인의 성격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

“응, 다만 레이디스 메이드의 손이 좀 느린 것 같아. 아침 화장을 더 빠르게 하고 싶은데 말이지…… 그럼 효율적으로 시간을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문득 루나는 페니의 말에 입술을 살며시 다물었다.

“……미용 약이 있으면 될지도 모르겠네.”

“응? 뭐라고?”

“아, 아무것도 아냐.”

루나는 고개를 저었다.

하마터면 붉은 책에서 읽은 고대 미용 약에 대한 내용을 발설할 뻔했다.

* * *

일말의 불안 속에서도 루나의 일상은 평소와 같이 돌아갔다. 차기작을 편집하고, 요즘은 약학을 다시 공부하고 텃밭을 가꾸고 있었다.

루나는 텃밭에 허리를 숙이고 있다 고개를 들었다. 어떤 약초는 대단히 빠르게 성장해 몇 주 만에 쑥쑥 자랐다.

“……공작 부인, 이런 일은 저희에게 시키지 않고 그러십니까.”

쇠스랑을 든 정원사가 급하게 달려왔다.

“가끔은 내가 직접 봐 줘야죠. 그래야 성이 차요. 어떤 약초는 굉장히 섬세하거든요.”

루나는 장갑을 벗었다. 그리고 뒷일을 정원사에게 부탁하고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리본으로 묶어 고정한 챙이 넓은 밀짚모자를 벗고 그녀는 파우더 룸에 들어섰다.

‘약학을 오랜만에 다시 공부하니 좋네.”

루나는 약학 책을 펼쳤다.

어릴 적에 배우다 잊어버린 약학을 독학으로 다시 공부하고 있었다. 꿈속의 모친이 약학자였던 것이 루나에게 꽤 영감을 주었다.

약학 책을 보고 있노라니, 갑자기 루나는 얼마 전 페니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미용약이라……. 내가 만들 줄 아는 유일한 미용약은 루비트 씨앗 약이야. 피부를 건강한 색으로 만들어 주는 약 말이지…… 하지만 그건 만들어 봐야 용돈이나 벌겠지. 아무튼 지금은 흰 피부가 유행이니까…….’

루나가 고대어 소설 속에서 책에서 엿본 바로는 고대 귀족들은 타고나게 하얀 피부를 일부러 태워 갈색으로 만드는 게 유행이었던 시기도 있는 듯했다. 그러나 지금은 흰 피부가 유행이었다.

‘보석 영애 이야기에 나오는 약들을 재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루나는 최근 탈고를 눈앞에 둔 <보석 영애 이야기>를 떠올렸다.

혼전 임신을 주제로 한 이 로맨스 소설은, 주인공인 젬 영애가 미혼모의 신분으로 아이의 친부인 황족과 이어질 듯 말 듯한 내용이 백미였다. 그러면서도 그녀가 인간으로서 성장하는 내용도 담고 있었다.

루나가 특히 재미있어 했던 부분은 젬 영애가 ‘미용 약’ 사업으로 대성공 하는 내용이었다.

‘약의 제작 방법을 알 수가 없을까……?’

자료를 구하기가 힘들어 그렇지, 고대어 미용 약을 재연할 수만 있게 되면 엄청나게 돈이 될 것이 자명했다. 무엇보다 루나는 페니에게 그 약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보석 영애 이야기에는 정말 다양한 미용약이 나왔다.

눈에 맑은 광채가 흐르게 해 주는 약, 피부가 뽀얗게 변하게 해 주는 약, 손톱을 단단하고 붉은 윤기가 돌게 해 주는 약, 심지어 입술을 붉게 만들어 주는 약도 있었다.

‘책에 약 제작 과정이 상세하게 나오는 건 좋은데…….’

여느 때처럼 파우더 룸 문을 단단히 잠그고 소파에 앉은 루나는 붉은 책을 펼쳤다.

그때였다.

루나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관통한 것은.

‘그런데 이 책에 나오는 내용들은 수정되기도 하고 변경되기도 해. 미리 정해진 내용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는 책이라고……. 그러면, 내게 보여 주는 소설 내용 외에도 책에 입력된 정보들이 있지 않을까?’

밑져야 본전이었다.

루나는 책에 빠르게 글씨를 휘갈겨 썼다.

<안녕. 오늘은 물어볼 게 있어. 보석 영애 이야기에서 말인데, 여주인공인 젬이 만드는 미용 약의 레시피를 알 수 있을까?>

루나는 초조함을 느끼며 책의 대답을 기다렸다.

<내게는 한정된 정보가 저장되어 있습니다. 나는 만물을 아는 능력은 없습니다만, 내가 가진 지식과 정보들은 모두 소설 창작과 관련된 한정된 것들뿐입니다.>

루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럼 가능한 정보라도 줄래?>

곧이어 책에는 빠르게 글자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요청한 참조 정보를 제공합니다.

‘백옥 약 제작법’ 사향 약초 두 줌, 마르시엘라의 샘물 한 잔…… 씀바귀 풀 한 줌, 레몬 가루 두 줌…….

‘광채 시약 제작법’ 사과 껍질 두 홉 가루, 사철 풀 한 줌…….

‘장미 고약 제작법’…….>

어림잡아 다섯 가지는 넘는 약들의 레시피가 떠올랐다. 루나는 숨을 들이켰다.

‘이거 정말 어처구니없이 대단한 물건이잖아…….’

그녀는 책에게 고맙다는 말을 적었다. 그리고 급하게 레시피를 옮겨 적고 책을 다시 금고에 넣었다.

* * *

루나는 약방에 가기 위해 직접 나섰다. 호위들이 뒤를 따랐다.

“길이 좁은데, 여기서부터는 마차에서 내리셔야 합니다. 시장 통이라 사람이 많은데 괜찮으십니까?”

“네. 괜찮아요.”

루나는 호위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오랜만에 시장 구경도 하고 싶었다. 수도는 늘 사람들이 많아 활기찼다.

“붉은 머리에 걸 사람은 이쪽이오!”

“난 챔피언에 걸겠어!”

그때 루나는 소란스럽게 사람들이 모여 있는 걸 보았다. 내기 권투판이었다. 잘 차려입은 사내들까지 환호성을 지르며 난리가 났다.

‘야만적인 취미라니까.’

그때 루나는 익숙한 얼굴을 보았다.

‘휘멘?’

내기 권투를 하고 있는 사내는 휘멘이었다. 불그스름한 그의 머리가 햇빛 아래서 빛났다.

퍽!

주먹이 꽂히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손에 붕대를 감은 휘멘은 꽤 날래게 잘 싸웠다. 상대하는 사람이 챔피언인 것 같은데 조금도 지지 않고 기세 좋게 주먹을 꽂아 넣었다.

‘마법사가 주먹다짐이라. 볼 때마다 저렇군.’

루나는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걸음을 돌리려는데, 휘멘의 상대가 발로 바닥을 차 휘멘의 눈에 흙을 뿌렸다.

“비겁하다!”

사람들 입에서 ‘우우’ 하는 원성이 나왔다. 루나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휘청이던 휘멘은 몸을 숙였다. 그리고 상대의 배에 강렬한 어퍼컷을 꽂아 넣었다. 뼈 부러지는 소리가 루나의 귀에까지 들렸다.

“빨간 머리! 빨간 머리!”

사람들이 휘멘을 가리키며 박수를 쳤다. 바쁘게 은화와 금화가 오갔다. 루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 등을 돌렸다.

“이봐, 너-.”

그때 땀을 닦던 휘멘이 루나를 발견했다. 그는 자신에게 모여드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급하게 루나를 따라왔다.

“너!”

“너가 아닌데요.”

루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등을 돌렸다. 휘멘이 가까이 붙었다. 호위들이 칼집에 손을 댔다.

“괜찮아요. 남편의 친구입니다.”

루나가 호위들에게 입 모양으로 속삭였다. 휘멘에게선 땀 냄새와 약간의 피 냄새가 났다. 루나는 그의 입가가 찢어진 걸 발견했다.

“챔피언을 이기셨군요.”

“이젠 내가 챔피언이지.”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뒷골목의 챔피언이 자랑스러운지 그는 씨익 웃었다. 루나는 그 미소를 모른 척했다.

“여긴 무슨 일이지? 아키스가 널 돌아다니게 두나?”

“남편은 아내를 가두는 존재가 아니랍니다.”

그보다 아는 사이인 것처럼 말을 트는 건 뭔데? 루나는 어이가 없어졌다. 루라면 몰라도 공작 부인 루나는 휘멘과 모르는 사이나 다름없었다.

“그놈은 변태거든. 저번에도 널 보는 눈이 아주 이상했다니까. 완전 맛이 간 사람처럼-.”

“-그리고 남의 남편 욕도 하는 게 아니고요. 그런데 언제까지 따라오실 거죠?”

휘멘이 걸음을 멈췄다. 루나는 덩달아 멈췄다. 사람들이 그들 앞을 스쳐 바쁘게 지나갔다. 휘멘은 루나를 뚫어지게 보았다.

“너무 닮아서, 수상해서 관찰해 볼까 하고.”

“제가 누굴 닮았나요?”

루나는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마른침을 한번 삼켰지만 티내지 않는다. 아키스에게 언젠가 정체를 고백하고 싶은 열망이 있었지만 그건 동네방네 자신의 과거를 소문내겠단 뜻이 아니었다. 휘멘에겐 정체를 숨겨야 한다.

“하긴- 고대어를 할 줄 아는 여자가 태어날 리 없지.”

“절 닮은 사람이 고대어를 할 줄 알았나 보군요. 그런데 저번부터 그건 무슨 말이죠?”

“카리노 대왕이 편 태초의 결계 때문에 이 나라에서 고대어에 능숙한 여자는 절대 태어날 수 없거든.”

“…….”

“만일 그런 여자가 태어난다면 큰 이변이겠지.”

그는 아무렇지 않게 마법사들의 기밀 정보를 흘렸다. 루나는 눈을 깜빡였다.

“연유는 모르겠지만 제가 사내일지 모른다 의심하시는 것 같으니.”

“…….”

“마침 골목 앞이니 저쪽 안으로 잠시 같이 들어갈까요?”

그 말에 휘멘은 흠칫했다.

“뭐?”

“들어가서 보여 드릴까 하고요. 여자라는 증거.”

루나는 하늘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가슴 부분이 높아 다 가려주는 드레스였다. 루나는 무심하게 고개를 까딱였다.

루나의 시선을 따라간 휘멘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생각보다 순진하네.’

루나는 어이가 없었다.

“단, 남편에게 원한 사는 건 못 막아 줘요.”

“……나를 죽일 셈이냐?”

“제 남편이 무섭긴 하신가 봐요.”

이제 보니 이 여자가 숫제 자신을 가지고 논다. 휘멘은 발끈했다.

“그리고, 일단 전 친구의 아내이자 공작 부인이랍니다.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 주세요.”

그러고 보니 이 남자, 자신이 루일 때도 멋대로 예의 없이 말했었지. 처음 보는 사이에 너, 야. 이런 식으로 불렀고. 루나는 공작 부인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는 싱긋 웃었더니 휘멘의 표정이 더 묘해졌다.

“경도 한때 아카데미 교수였던 이라면 아마도 명예 기사 칭호를 받았을 텐데, 여인을 대하는 기사도를 다 잊은 건가요?”

루나가 나긋하게 말했다. 루일 땐 꼼짝도 못하던 휘멘을 약 올리는 기분이라 재미있기도 했다.

휘멘은 이제 알 수 없는 압력을 느끼며 마지못해 그녀의 손등에 키스했다.

“그럼, 이만. 이전에 공작가에서 차 한잔 대접하지 못했으니 다음번에 오면 꼭 대접하죠.”

“그건 힘들 것 같아. 서부로 돌아갈 거니까. 권유는 고맙군.”

휘멘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마침 약초거리가 다가왔다. 루나가 걸어가자 호위들이 뒤따랐다. 휘멘은 멍하니 호리호리한 뒷모습을 보다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응시하던 골목안의 그림자가 루나를 따라 조심스레 움직였다.

* * *

약방 주인은 호위를 줄줄이 붙이고 들어온 루나에 기겁했다. 그러고는 그 귀부인이 이것저것 구하기도 힘든 약초를 주문하는 것에는 더 놀랐다.

“마르시엘라의 샘물? 그건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씀바귀 풀은 구할 수 있습니다. 요즘 거의 사용하고 있지 않은 물건인데요…… 아, 그리고 사향 약초도 구할 수는 있습니다만, 며칠이 걸립니다.”

“좋아요. 며칠이 걸려도 되니 꼭 구해 줘요. 그리고 한꺼번에 로텐베른 공작가로 보내 줘요. 공작가의 위치는…….”

“아아, 부인, 이 나라에 공작가의 위치를 모르는 자가 어디 있습니까.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약초상은 루나의 모습을 빠르게 훑고는 눈치 빠르게 그녀의 신분을 파악했다. 그는 더없이 공손하게 굴었다.

“알겠어요. 최대한 빨리 보내줘요.”

“구할 수 있는 것들은 최선을 다해 구해 보죠.”

루나는 금액을 미리 지불했다.

“또 오십시오, 공작 부인.”

약방 주인이 인사했다. 루나가 고개를 마주 끄덕이고 문을 나섰다. 그러다 루나는 문을 열고 들어오던 후드를 눌러 쓴 사내와 부딪혔다.

“비키시오.”

호위들이 대번에 사내를 경계했다. 사내는 금발의 루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가게 한편으로 비켜섰다. 후드 아래로 새파란 눈동자가 보였다.

“실례하였습니다, 아가씨.”

사내가 후드를 벗고 빙그레 미소 지었다. 상당히 어려 보이는 사내였는데, 풍기는 분위기로 봐서는 소년은 아니었다.

‘좀 이상한 느낌의 남자네.’

루나는 남자에게 눈짓으로 작게 대답하고 문을 나섰다.

사내가 사라지는 루나의 금발 머리를 뚫어지게 오래 보았다. 그녀의 뒤를 호위들이 빠르게 뒤따랐다.

“이 약방이 언제 카페나 드레스 숍으로 변했소? 저런 귀부인이 다 드나들다니.”

가게 주인은 안 그래도 식은땀을 닦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새로 온 손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게 한편의 의자에 털썩 앉았다.

“원, 그냥 귀부인이면 얼마나 좋겠소. 말도 마시오, 엄청난 신분의 귀부인이니.”

“엄청난 분이라니.”

“보면 모르겠소? 저기 저 마차 보이나? 골목길 끝에 대기하는 마차. 좀 멀지만 자세히 봐. 드래곤 문양이 새겨져 있지 않소. 저 부인을 데리러 가려 대기하는 것이지. 이 나라에 드래곤 문양을 쓸 수 있는 이들은 황가 아니면 공작가뿐이고.”

“호오. 휘멘 스승님이 공작 부인과 길에서 환담이라. 신기하군. 쫓아온 보람이 있어.”

사내가 작게 중얼댔다. 약방 주인은 그 말을 듣지 못했다. 사내가 가까이 다가오자 약방 주인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거, 얼굴이 낯이 익은데.”

“나를 모르시오? 아주 오래전, 흑마법사 휘멘과 함께 여기 자주 드나들었는데……. 실레노스라고 하면 기억할지 모르겠군.”

그제야 후드 안의 얼굴을 확인한 주인장은 흠칫했다. 오늘은 범상치 않은 손님들만 꼬이는 날이다 싶었다.

“아니, 여긴 무슨 일이십니까. 흑마법사님이 그쪽만 발견하면 가만 안 두겠다 이를 가셨습니다. 약초 거리에서는 흑마법사님이 큰손이니, 어서 여길 떠나세요.”

“쯧, 휘멘 선생님은 아직도 그럽니까? 나 참, 다들 이렇게 간이 작아서야……. 그보다, 약초나 주시오. 내 잘 아는 집안의 따님이 미쳤다 하니 체면상 약이라도 지어 주려 하거든. 미친 걸 어떻게 고치라는 건지…….”

실레노스라는 사내는 울림통이 큰 중저음의 목소리와 달리, 소년처럼 천진한 외모를 하고 있었다.

주인은 실레노스가 내민 리스트를 훑었다. 그리고 빠르게 약초를 꺼내기 시작했다.

“어서 사서 나가시오. 아카데미 쪽은 얼씬도 마시고.”

주인장은 떨리는 손으로 급히 약초를 싸 주었다.

“그건 그렇고 방금 나간 미인이 공작 부인이랬지?”

“아이고, 그것도 아주 유명하신 공작 부인이지요.”

“왜 유명합니까?”

“전국을 가십으로 들끓게 하고 결혼한 데다, 크게 출판 사업을 한다든가 한답디다. 책을 내는데 그 책이 어찌나 신묘하게 재밌는지 수도 여자들이 사족을 못 쓴답니다.”

“참 이상한 일이로다.”

실레노스가 중얼거렸다.

“왜 내가 달리아에게 비법을 언질 해 주었는데 공작 부인이 되지 않고 광자가 되었지? 그 방법이라면 분명히 공작과 혼인할 수 있었을 텐데…….”

실레노스는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네? 뭐라 중얼대시는 겁니까, 마법사님.”

“아니오. 어서 약초나 주시오.”

주인은 약초를 꾸려 내밀었다.

“값도 저렴하게 해 드릴 테니, 제발 다시 오지 마십시오.”

그러나 실레노스는 들은 체 만 체했다.

‘공작이 무슨 바람이 불어 낯선 여인과 결혼했을까…… 알아보고 싶어지는데.’

실레노스의 입꼬리가 슬슬 올라갔다. 그 미소에는 장난기와 함께 악의가 스며들어 있었다.

* * *

‘……구할 수 없는 재료가 많아. 하지만 대체제만 구하면 복원하는 것도 문제는 아니야. 책이 준 레시피가 있는 한 복원할 가능성은 있어.’한동안 루나는 약초를 고르고 정리하는 작업에 빠져있었다.

약학은 많이 잊어버렸지만 약초를 다듬는 솜씨는 전혀 녹슬지 않았다. 어릴 적에 숙부가 아직 약방을 할 때 약초 고르기를 혹독하게 시켰기 때문이었다. 약초를 다듬는 건 눈을 감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숙련되어 있었다.

저녁에 아카데미에 갔다 돌아온 아키스는 식당 문간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이 귀엽기 그지없었으나, 그녀가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 이럴까 싶었다.

“루나.”

일에 여념이 없던 루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당신, 왔어요?”

“뭐가 그리 바빠 내가 기척도 몰랐어요.”

“아아, 요즘 약초학을 열심히 공부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약초나 다듬을까 하고…….”

“낮에 약방에 다녀왔다던데.”

“내친김에 약도 좀 만들어 보고 하려고요. 기억나요? 내가 꿈속에서 어머니가 약사였다고 했잖아요…… 그러다 보니, 어릴 적에 배운 약학을 활용하려고요.”

아키스가 다가와 그녀의 턱을 가볍게 치켜올리고 입가를 어루만졌다. 피부의 닿은 곳부터 긴장감이 서서히 퍼지기 시작했다.

“내게 할 말이 있지 않나요?”

“네……?”

“갑자기 당신이 약학을 열심히 공부하는 이유 말입니다.”

“그게, 왜요?”

아키스는 약학은 전공 분야가 아니라 들었다.

그가 뭔가를 눈치챈 건가? 루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새로운 약을 만드는 법을 배웠습니까?”

루나의 심장이 한번 두근 뛰었다. 생각이 복잡해졌다.

“그건…….”

아키스가 피식 웃었다.

“꿈속에서 어머니에게 레시피라도 전수 받았나요?”

“……아……. 네, 그래요.”

루나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키스는 그녀가 갑자기 약학에 매진하는 이유가 얼마 전 체험한 꿈 마법에서 만난 어미에게 무언가를 배웠다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럼 그렇지…….’

아키스는 루나의 놀란 마음은 모른 채 말을 이었다.

“원래 꿈 마법에서 배운 지식을 현실에서 사용하는 건 불법인데…….”

아키스가 루나를 안아 올려 식당의 대리석 테이블에 앉혔다. 그리고 그녀의 허벅지 위에 손을 얹고 귓가에 속삭였다.

“어떻게 할까요?”

루나는 귀가 훅 붉어졌다.

“그것도 잘못인데. 벌을 줄까.”

“그럼 꿈에서 알아온 정보들을 나만 간직하고 있으면 그건 무죄인가요?”

“엄밀히 말하자면 아니지요.”

아키스가 속삭이듯 말했다.

“꿈 마법 자체가 불법이니까.”

“그럼 우린 공범자네요.”

아키스가 입꼬리를 슬쩍 올려 웃었다. 그녀는 매력적이었다. 그가 루나의 몸을 확 젖혔다. 루나는 순식간에 다리 사이에 그를 둔 채, 상체를 식당의 큰 대리석 테이블에 대고 눕게 되었다.

드레스 사이에 갇힌 그녀의 가슴이 위로 밀려 올라가며 뽀얀 가슴골이 둥글게 드러났다. 아키스가 그 위로 입술을 댔다. 뜨거운 감촉에 루나의 다리가 살짝 떨리며 그녀는 무의식중에 그의 허리에 스타킹을 신은 종아리를 비볐다.

“여기 식당이에요…… 누가 보면…….”

아키스가 그녀의 뽀얀 쇄골 아래 입술을 내렸다.

그가 속삭였다.

“우리 고용인들은 다 눈치가 있으니 괜찮을 겁니다.”

“아, 정말 안 돼요. 당신 정말……, 으응……!”

아키스의 손이 급하게 치맛단 속으로 파고들었다. 루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차라리 침실로 가요, 아키스…….”

루나가 물기 섞인 목소리로 중얼대자 그는 그녀를 거칠게 안아 들었다.

그가 성큼성큼 침실로 향했다.

* * *

아키스는 침실로 들어오자마자 루나의 옷을 하나씩 벗겨 냈다. 마침내 침대에 도달했을 때 루나는 알몸이었다.

“잠시만.”

루나가 아키스의 옷에 손을 대자 그가 속삭였다.

“오늘은 좀 다르게 해 봅시다.”

“아직 저녁도 먹기 전인데.”

“당신 체력이 약해서, 지금 한 번 해야 밤에 또 하잖아.”

“아키스.”

루나의 뺨이 확 붉어졌다. 침대 기둥 옆에는 투명한 커튼이 쳐져 있었다. 그는 거기 달린 끈을 풀어 내렸다. 루나는 눈을 깜빡였다.

“손, 앞으로 돌려봐요.”

“……묶을 거예요?”

“그냥 기분 좋게 해 주려고 하는 거예요.”

“되게 위험한 남자처럼 말하네요.”

루나는 뺨이 붉어져 투덜댔다. 루나는 손을 내밀었다. 아키스가 그녀의 손을 조심스레 모아 묶었다. 세게 묶은 건 아니었지만 이상한 기분이 되었다.

그가 크라바트를 풀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을 가렸다. 루나는 순식간에 알몸에 눈이 가려졌다.

‘쳐다보고 있어.’

루나는 그의 뜨거운 시선이 온몸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자꾸만 몸을 곰질거리게 되었다. 아키스가 그녀의 눈을 가린 크라바트의 길게 늘어진 끝을 살짝 당겼다.

“아!”

그 작은 힘만으로 그녀는 침대 위에 폭 눕혀졌다. 그의 애무 세례가 시작되었다.

쭙쭙 소리를 내며 빨리는 아랫도리에 금세 흥건해졌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허벅지에 힘 풀어. 빨아 주는 거 좋아하는 건 알지만…….”

아키스가 키득거렸다. 그가 긴 혀로 그녀의 음핵을 살살 건드렸다. 손가락으로 뾰족하게 부풀어 오른 음핵을 살살 문지르다 그녀의 둔덕을 두 손가락으로 활짝 벌렸다.

“알아요, 내가 여길 문지르면.”

그가 음핵을 뭉근하게 문질렀다. 육벽에 배이기 시작한 애액이 대음순을 적셨다.

“당신 구멍이 움찔, 움찔거려. 그거 엄청나게 귀여운데. 당신도 이걸 봐야하는데.”

“아아!”

아키스가 혀를 길게 내어 대음순을 쭉 빨아들였다.

“아, 다음번엔 거울 앞에서 해야 하나. 그리고 내가 당신이 이럴 때마다 서는 걸 보게 되겠죠.”

“…….”

아키스가 그녀의 손에 묶여진 끈을 당겼다. 그리고 손을 자신의 바지로 끌었다. 바지를 밀어내며 솟아오른 큰 성기가 천 너머로 느껴졌다. 그대로 그녀의 작은 손을 잡고 그가 위 아래로 문질렀다.

“당신만 날 이렇게 만들 수 있거든.”

“아키스…….”

“어떻게 할까. 당신이 도망갈까 봐 무서워서. 너무 예뻐서.”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으려했다. 그러나 아키스는 루나를 단번에 자신의 무릎에 앉혔다. 루나는 앞이 보이지 않아 허우적댔다. 아키스의 손이 그녀의 손을 잡아챘다.

그가 자신의 얼굴로 손을 이끌었다. 흠칫했던 루나는 묶인 손목을 한데 모은 채, 오른 손바닥으로 아키스의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아키스.”

그가 마치 의존하듯 자신에게 기대고 있었다. 조각 같은 콧날. 매끄러운 살결. 그리고 촘촘한 속눈썹이 박힌 눈, 도드라진 눈썹 뼈. 루나는 아키스가 자신의 손에 얼굴을 문지르는 걸 느꼈다.

‘지금 무슨 표정을 하고 있을까.’

그의 표정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왠지, 그는 그녀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연약한 표정을 짓고 있을 것 같았다. 아키스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날 다 바쳐야 가질 수 있으려나. 당신을.”

그가 중얼거렸다. 루나는 심장이 타는 것 같았다.

‘도대체 왜…….’

왜 같이 있는데도 당신이 헤매는 것 같을까. 외로워하는 것 같을까. 루나는 침을 삼켰다. 그는 종종 몹시 불안한 사람 같았다.

“아아!”

아키스가 바지를 내리고 한 번에 그녀의 안에 치밀었다. 아래서 박아 오는 감각에 루나는 몸을 떨었다. 숨이 턱 막혔다. 겨우 숨쉬기 시작할 때, 그가 아래서 퍽퍽 치고 올라왔다.

눈이 보이지 않는 루나는 미아처럼 그를 찾아 헤맸다. 아키스가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고 끌어당겼다. 겨우 찾은 그의 품에 루나는 뺨을 대고 파고들었다. 아키스가 묶인 팔을 끌어당겨, 그녀의 팔 사이에 자신의 목을 가뒀다. 루나는 온몸으로 그에게 밀착했다.

“흐윽, 아, 아키스……!”

그대로 그가 팡팡 쳐올리기 시작했다. 질구에 성기가 크게 치고 빠지며 찌걱이는 소리가 울렸다. 침대가 삐걱였다. 아키스가 더운 숨을 몰아쉬며 중얼거렸다.

“당신이 허리 움직이는 것도 얼마나 예쁜지.”

“…….”

“얼마나 꼴리는지 보여줘야 하는데.”

아래서부터 아키스가 세게 쳐올릴 때마다 울컥울컥 애액을 토해 내기 시작한 루나의 뜨거운 안은 아키스를 잡아먹을 듯 삼켜왔다.

“내가 깊게 들어오면 이렇게 숨 막히게 하고.”

찔걱! 찔걱!

“나가면 아쉬운 듯 물고.”

“흐흑, 흐응……! 아키, 스…….”

아랫도리에서 튀는 불꽃으로 온몸이 타 버릴 것 같았다. 그의 말도 루나의 흥분을 부추겼다.

‘눈이 안 보이니까, 더 흥분돼.’

위험한 기분. 이상한 기분.

찔걱, 찔걱.

어느새 정신 차려 보니 루나는 정신없이 그에게 맞추어 허리를 흔들고 있었다. 엉덩이를 움직이고, 허리를 돌리고. 배뇨감 섞인 쾌락이 몰려들었다. 그와 한데 어울린 짐승이 되는 느낌이었다.

“흐응, 흐, 으……. 좋아…….”

절정이 다가오자, 아키스는 루나의 허벅지를 당겨다 앉혔다. 고환이 그녀의 둔덕을 때렸다. 그가 그녀의 허벅지에 힘을 주었다. 뿌리까지 넣을 것처럼. 동시에 몸이 전율하며, 아키스가 길게 정액을 토해 낼 때 루나의 온 내벽이 아키스를 빨아들였다.

“흐윽, 이상해……!”

부들부들 떨리는 내벽에 아키스는 더없는 쾌락을 느끼며 그녀의 허리를 꼭 쥐었다.

아키스가 단번에 크라바트 끝을 당겨 그녀의 눈을 가린 것을 풀었다. 젖은 루나의 녹색 눈이 드러났다.

“아키스…….”

춥, 춥. 굶주린 키스가 이어졌다. 서로를 원하지 않고는 참을 수 없는 사람들처럼.

* * *

‘……요즘 이 사람이 왜 이러지.’

아키스는 주체할 수 없이 그녀를 바랬다. 대낮부터 그의 품에 안겨 루나는 작은 콧숨을 쉬었다.

갑자기 땀을 흘렸다 체온이 식으니 초금 추웠다. 아키스가 이불을 덮어 주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꽉 짜인 단단한 근육이 움직였다.

“그래, 꿈에서 배워 온 약은 어떤 거죠?”

“여성용 미용 약품이에요. 당신은 전혀 관심 없을 내용이죠. 효과도 아직 잘 모르겠고요.”

루나는 아키스의 단단한 가슴에 뺨을 대고 속삭였다. 아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약에 관련된 일은 잘 모르니, 도와줄 내용이 없어 아쉽군요.”

“당신이 모르는 것도 있어요?”

“백마법사의 영역이 아니니까요.”

아키스가 짧게 대답했다.

“그럼 백마법사의 영역은 뭔데요?”

“백마법사는 꿈을 관장하고, 흑마법사는 죽음을 관장하죠. 그러기에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약물은 흑마법사의 관할입니다.”

문득 루나는 휘멘을 떠올렸다.

휘멘. 그 남자라면 약물에 대해서는 훤할 것이다.

‘하지만 엮여서 좋을 것이 없는 양반이니…….’

루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무슨 생각을 합니까?”

아키스가 루나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췄다. 루나는 체온이 달아오르고 심장이 간질간질했다.

* * *

“이게 뭐야?”

휘멘은 서부의 자신의 연구실에 있었다. 번역가들을 통해 전달된 서류를 보는 그의 눈이 흔들렸다.

믿을 수 없는 자료들이 가득했다. 그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 * *

“미백 효과가 있다고 알려진 기린초 가루로도 대체가 안 되고…… 그럼 뭘로 시험해 봐야 하나.”

루나는 앞치마를 두르고 골몰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레시피 가장 위쪽의 약초 이름을 펜으로 긁어 가위표를 했다.

“운 좋게 대체제를 찾은 약도 핵심 재료가 없고, 정말…… 이 마르시엘라의 샘물이라는 게 뭔지 꼭 찾아내야 할 것 같은데…… 약초 이름인지 샘물 이름인지도 알 수가 없으니.”

그녀는 턱을 괸 채 한참 고민을 하다 짜증스럽게 앞치마를 벗었다.

‘아아, 정말. 루의 모습이라면 어렵지 않게 정보를 구하러 돌아다닐 수 있을 텐데…….’

마법서나 과학, 의학 외의 지식이 담긴 고대어 책의 가치는 비교적 낮았다.

예전, 루나의 숙부 같은 호구나 마법책이라고 속아서 해괴한 고대어 책을 비싼 값에 거지, 흥정만 잘하면 저렴한 가격으로도 구입할 수 있는 것이 고대어 지식 책이었다.

하물며 기초 약학 책 정도는 저가에 구할 수 있으리라. 루나가 생각하기에 마법사들은 몹시 바보 같아 지식의 다양성이라곤 몰랐기 때문이다.

루나는 문득 시계를 보았다.

“……벌써 시간이.”

오후 내내 새로 마련한 약 연구실에 처박혀 있으니 벌써 오후 티타임 시간이었다.

아키스와 낮에 차를 마시기로 한 것이 떠올랐다. 루나는 매무새를 가다듬고 한 갈래로 묶었던 금발 머리카락을 풀어 내렸다.

그녀는 정원 앞의 오래된 테라스로 향했다.

야외 테이블 위에는 고용인들이 정성껏 준비한 차와 다과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무더운 여름이 지나 날이 한결 시원해졌다. 아키스는 얼굴을 찌푸린 채 어떤 글을 읽고 있었다.

“왜 표정이 그래요? 아직도 내가 저번에 길에서 휘멘인가 하는 흑마법사와 이야기한 것에 화난 건 아니겠죠?”

루나는 아키스의 볼에 키스했다. 아키스가 미간을 풀었다.

“휘멘 때문이긴 한데, 이번엔 그 일 때문 아닙니다.”

“…….”

“뭐. 그쪽도 아직 짜증나긴 하지만. 당신 말고 남의 아내에게 껄떡 댄 그놈에게.”

약방에 다녀온 날, 길에서 내기 권투를 구경하고 휘멘과 대화했다는 걸 나중에 보고들은 아키스는 골을 냈었다. 그 뒤 몇 번 질투하며 이야기 했기에, 그가 완전히 화가 풀린 지금 루나는 농을 던진 것이었다.

“정말 그자는 골치야.”

“뭔데요? 뭘 그리 열심히 읽어요?”

루나는 아키스에게 바짝 붙어 앉았다. 언뜻 보기에 논문 같았다. 아키스는 논문을 내려놓고 낮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휘멘이 새로 쓴 논문이 있어서요.”

“어려운 내용인가 봐요?”

“어렵진 않은데 문제 될 내용이긴 하군요.”

아키스는 여전히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한동안 서부에서 두문불출하더니, 갑자기 나타나 이상한 논문을 발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상한 논문이요?”

“…….당신이 알아서 좋지 않을, 아주 비관적인 내용입니다. 마법계에 영향력이 큰 자인데 큰일이군요.”

아키스는 혀를 찼다.

루나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요즘 은근히 자기 속내를 잘 드러냈다. 루나도 마침 휘멘에 대해 궁금하던 참이라 슬쩍 말을 꺼냈다.

“그가 몹시 유명한 흑마법사라 들었어요.”

“휘멘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흑마법사입니다. 마스터급의 마법사이니 세상에 봉사할 의무가 있죠. 그런 그가 아카데미를 박차고 나가 해괴한 일들을 하니 황가에서도 걱정이 많습니다.”

“제가 듣기로 그는 아카데미에서 쫓겨났다던데…….”

떠도는 소문으로는 사람을 납치해 불법 실험을 한다는 소문도 있었다. 루나는 돌려 말했다. 예전에 서점 사장인 필립에게 듣기로 아키스와 휘멘은 대판 싸웠고, 그 일로 휘멘이 아카데미에서 해임되었다 했다.

“혹시 그때 당신과 사이가 나빠진 건가요?”

“그놈은 그리 나쁜 자는 아닙니다. 어처구니없이 멍청한 놈이라 문제지.”

“무슨 일이 있었나요……?”

아키스는 잠시 멈칫했다 말을 이었다.

“……아주 큰 사건에서 서로의 의견이 맞지 않았습니다.”

루나는 아키스에 대한 일은 뭐든 관심이 있었다. 그녀는 그를 독촉하는 대신, 그가 마음속에 고인 물을 비워 내듯 지난 일을 말하길 기다렸다.

“마법사로서 의견이 맞지 않은 건가요?”

“말하자면 길어요. 알겠지만, 마법사들은 자신의 공간이 있고 어릴 적 그 공간을 여는 법을 배우지요. 그리고 그곳에 마법 주문을 저장하는 법을 배우고요. 그리고 그 공간을 여는 것을 도와주는 것이 스승 마법사의 역할입니다. 자신의 이공간의 규모로 마법사의 재능이 결정되지요…….”

그렇다면 그 끝없는 밤하늘을 가진 아키스는 대단한 마법사이리라. 루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나와 휘멘이 동시에 아끼는 제자 한 명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막 최연소 교수가 되었을 때 맡은 소년이었죠. 대단한 재능을 가진 자였으나, 그는 금기를 저질렀습니다. 일반인을 끌어들여 실험을 했거든요.”

“누군가 다쳤나요?”

“다행히 심하게 다치기 전에 찾아냈지요. 그리고 수법이 아주 나빴습니다. 가난한 부모를 꼬드겨 말도 안 되는 계약서를 쓰게 한 후, 아이를 넘겨받아 실험했거든요. 죄질이 지독했지요.”

“……그건 정말 끔찍한 범죄군요.”

“나는 고위 마법사가 죄를 지으면 죽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고위 마법사를 감옥에 가둔다 해도 완벽히 제어할 수 없기 때문이죠. 그러기 위해 나나 휘멘 같은 마스터급의 마법사가 존재하는 거고요.”

루나는 귀 기울여 들었다. 아키스 정도라면 비밀스레 마법사 하나를 처단하는 건 일도 아니리라.

“휘멘이 그걸 반대했나요?”

“그 녀석은 보기보다 정이 깊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의 그런 점을 경멸하고요. 마법사의 생명은 평범한 인간의 생명보다 위에 있는 게 아닙니다. 능력이 있으니 죄를 지으면 더 엄격히 처벌 받아야 하죠. 그러나 휘멘은 그 자를 살리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갱생이 가능하다고 믿었고, 멍청하게도 그 사내의 죄를 뒤집어썼지요. 그 결과 휘멘은 책임지고 아카데미를 사퇴했습니다.”

“그럼 그…… 제자는요?”

“똑같이 아카데미에서 쫓아냈습니다. 그리고 마법사의 규칙대로 처벌했지요.”

아키스는 잠시 생각에 빠진 듯한 표정이었다. 오랜만에 찝찝한 기억을 떠올렸다.

“그리고 살아가는 동안 나를 다시 만나지 않는 편이 신상에 좋을 거라 했죠.”

“……어떤 상황인지 알겠네요.”

루나는 문득 휘멘이 루를 구해 준 일을 떠올렸다. 그는 보기보다 마음이 약한 면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무거운 이야기를 해서 미안하군요.”

루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솔직한 이야기를 해 줘서 기뻤어요.”

아키스는 부드럽게 말을 돌렸다. 확실히 아내와 즐겨할 만한 대화 주제는 아니었다.

“가을부터는 행사가 많을 텐데, 새 드레스를 맞춰야 하지 않겠습니까?”

“안 그래도 내일 디자이너 모이라가 저택에 온다고 했어요. 사냥제에 참석하려면 새 드레스를 맞추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고위 귀족들의 가장 큰 행사 중 하나인 늦여름의 사냥제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전부터 아키스에게 사냥제 참석을 해야 한다는 것을 들어 왔다. 사냥제는 동부의 큰 숲에서 열리는 황가의 중요 행사라 했다.

“원하는 건 뭐든지 사도록 해요.”

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파문당한 자라 불리는 실레노스는 합법적인 의뢰가 아닌 뒷세계의 일을 주로 했다.

그러나 그의 도덕성과 상관없이 그에게 일을 맡기는 의뢰인들은 있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라미라 후작 가문이었다. 달리아가 실성하자 라미라 후작은 자주 일을 맡기던 실레노스를 불러 달리아의 상태를 보러 가 줄 것을 부탁했다. 실레노스는 의뢰를 받아 달리아가 갇힌 시골의 신전으로 향했다.

“제발 사라져. 사라지라고……. 약을 먹인 건 잘못했어요. 하지만 하녀들 따위 죽든 말든 뭘 그리 내가 잘못했다는 건가요? 아아, 공작님…….”

신전에 갇힌 달리아는 짐승이나 다름없는 꼴로 발발 떨며 계속 헛소리를 해 대고 있었다.

‘……꼴을 보아하니 정신이 아예 파괴되었군. 공작의 솜씨인데…….’

그 모습을 지켜보며 실레노스는 혀를 찼다.

‘쯧, 모처럼 공작에게 최음 약을 먹이라 충고까지 해 줬는데 여자가 멍청해 이 꼴이 났군.’

라미라 후작가에 드나들던 실레노스가 달리아에게 공작에 대한 정보를 주고, 충고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휘멘이 가진 약으로 아키스를 곤경에 빠뜨려 둘 사이를 악화되게 하려 함이었고, 둘째는 아키스를 증오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죄를 지어 아카데미에서 쫓겨났을 당시, 아키스는 손수 그의 능력의 일부를 봉인하는 형벌을 내렸다. 지금 생각해도 이가 이득 갈릴 만큼 치욕스러웠다.

‘마법사인 내가 대의를 위해 이런저런 실험을 좀 했다고 내게 그런 굴욕을 주다니, 휘멘이라면 날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을.’

아키스의 성정을 잘 아는 그는, 달리아가 약을 쓰면 반드시 아키스는 달리아와 혼인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면 그는 공작 부인이 된 달리아의 약점을 쥐고 손안에서 흔들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었다. 또, 자신이 지독히 싫어하는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게 될 아키스의 곤혹은 덤이었다.

‘아무튼, 약을 먹이는 데까진 성공하고 보복당했군. 그러면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지. 라미라 후작에게 제 딸에게 바람을 불어넣은 게 나라고 말할 순 없잖아?’

실레노스는 이번 일에 대해 입을 다물기로 했다.

‘어쩔 수 없지. 다른 도구를 찾아보는 수밖에…….’

실레노스는 고개를 숙이고 속삭였다.

“달리아 영애. 그래도 공작을 해하려 열심히 노력하셨다니, 내가 보답을 하겠습니다. 공작이 내 힘을 제압하는 중이지만 아직 자그만 재주는 부릴 수 있답니다.”

그가 속삭이며 작은 주문을 걸었다. 그 주문은 달리아의 몸에 스며들었다.

“하루에 한 시간은 제정신이 되실 수 있을 겁니다. 내가 보여 줄 자비는 이게 다요. 그럼, 건강하시오. 후작가에는 그대가 자연히 정신병이 발병해 실성했다 말해 둘 테니.”

달리아는 실레노스가 제게 걸어 준 마법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허공을 보며 계속 중얼대고 있을 뿐이었다.

실레노스는 씩 웃고 방을 나갔다.

* * *

새틴의 집이 풍비박산 나고, 가족들은 시골 영지로 돌아갔다.

사실 영지라고 할 것도 없었다. 버몬드가는 수도의 귀족이었고, 그들은 사실상 제대로 된 영지가 없었다.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땅은 대부분 처분한 상태였고 오두막 하나와 작은 토지 하나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공작가와 엮이지만 않았어도, 아니, 루나 그년만 입양하지 않았어도. 은혜를 원수로 갚아도 유분수지…….’

벨레와 아버지의 건강은 급격히 나빠졌고 그들은 매일 우는 소리를 냈다. 정말 가난해서 굶주릴 정도의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러던 와중 새틴은 달리아의 소식을 들었다.

‘그 여자가 미쳐 버렸다고?’

절세 미모의 달리아는 수도에서 워낙 유명했기에 그녀의 몰락이 지방 신문에까지 알려졌다. 이튿날 마을로 나간 새틴은 달리아가 치료를 위해 수도 근교 신전에 수용되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툴라 신전이면 이 근처잖아.’

걸어서 하루면 다녀올 거리였다.

‘……나도 이 꼴이 났는데, 달리아가 미쳤다?’

그 즈음, 새틴은 매일매일 생각했다. 어떻게든 루나의 옛 남자관계를 밝혀 낼 수 있다면 공작과의 오해도 풀고 용서를 받을 수만 있을 것 같았다.

루나가 공작의 총애를 빌어 집안을 풍비박산 낸 것이니, 루나에 대한 공작의 총애만 사라지만 될 것이라 믿었다.

‘루나의 남자관계에 대한 증거만 있으면 돼.’

새틴은 이튿날 남루한 복장으로 후드를 둘러썼다. 그리고 길을 나섰다.

툴라 신전에 도착한 새틴은 달리아를 면회하고 싶다 말했다. 곧 달리아를 담당하는 신관이 나왔다.

“저는 이전에 달리아 드 라미라 영애를 모신 적 있는 하녀입니다. 이곳으로 오셨다기에 인사라도 드리고 싶어 왔습니다. 저를 보면 기억하실 거예요.”

새틴은 달리아에 대해 아는 사실을 모두 말했다. 신관은 달리아와 아는 사이라는 말을 믿는 눈치였다. 거기다 새틴은 농민의 딸보다 더 남루한 꼴이었다. 귀족 영애보다는 하녀에 가까워 보였다.

“흐음……. 하긴, 그 환자는 딱히 면회 오는 사람도 없고 좀 시끄럽지만 누굴 해하지도 않으니……. 가서 얼굴을 보고 가시오. 그래도 마음이 갸륵하구만, 옛 주인을 찾아오다니.”

“제겐 정말 잊을 수 없는 분이라 말이죠.”

새틴은 입가에 간사한 미소를 띠었다.

사실은 달리아가 망한 꼴을 보고 싶은 마음도 좀 있었다. 한때 공작을 사이에 두고 싸운 그 둘 사이에는 아직 해묵은 원한이 남아 있었다. 새틴은 신관을 따라 어두컴컴한 지하 방으로 갔다.

‘생각보다 멀쩡한 방이군.’

달리아가 머무는 곳은 새하얀색으로 단장된 방이었다. 내부는 꽤 단아하게 꾸며져 있었는데 특이한 것은 방문이 쇠창살이 달려 있었다.

“환자가 자해를 할까 감시하려 쇠창살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 둔 거요.”

“아아, 저는 얼굴을 뵙고 대화를 하는 것만으로 충분해요.”

신관은 고개를 끄덕이고 쇠창살을 두드렸다.

“영애, 옛 하녀가 만나러 왔습니다.”

부스럭, 안쪽에서 소리가 났다.

곧이어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제아무리 새틴이라고 해도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곧이어 구석에서 누군가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하녀, 하녀라고? 아니야, 난 두 명밖에 몰라. 더는 아무도 안 죽었다고. 하녀는 싫어, 아아…….”

새틴의 등골에 소름이 오싹 돋았다. 이 목소리는 틀림없이 달리아의 목소리였다.

신관이 혀를 찼다.

“또 이러시는군요. 이상하게 하녀라는 말에는 발작을 하지 뭡니까. 좀 있으면 괜찮아질 겁니다…….”

새틴은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만이라도 곁에서 말을 걸어 드리면 안 될까요? 오래 머무르지 않겠어요.”

신관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계속 여기 있기도 귀찮아하는 눈치였다.

“……알겠습니다.”

신관은 조금 있다가 다시 상태를 보러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방을 나갔다.

새틴의 입에 간사한 미소가 번졌다.

“나예요, 달리아……. 정말 미쳐 버린 거예요, 아니면 미친 척하는 거예요? 그 잘난 당신이 이런 시궁쥐 신세라니…… 나 참.”

그러나 달리아는 새틴을 본 척도 하지 않았다. 새틴은 끈질긴 인내심으로 헛소리만 반복하는 달리아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진짜 미쳤나?’

몇 시간이고 기다리던 새틴이 제 풀에 포기할 때쯤, 기적이 일어났다.

‘여긴 어디지?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야……?’

어제 실레노스가 걸어 주고 간 마법이 천천히 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달리아의 정신이 묘하게 또렷해졌다. 하루에 단 한 시간. 그 시간이 지금이었다.

자신을 괴롭히던 하녀들의 환영이 천천히 사라지고 달리아는 그제야 피아가 구분되기 시작했다.

“네년이 여긴 무슨 일이지……? 새틴……?”

비루한 복장의 새틴을 달리아가 훑어보았다. 달리아의 표정에 진한 혐오감이 떠올랐다.

새틴은 이를 깍 깨물었다.

“왜긴요, 당신이 왜 이 꼴이 났는지 궁금해서 왔죠. 어떻게 된 거죠?”

“아아,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아. 조금 있으면 그것들이 다시 올 거야, 아아…….”

달리아는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루나 때문에 이렇게 된 건가요? 그년이 항상 원흉이죠. 그렇죠, 무슨 일을 당한 건가요?”

“그건……. 공작님이 내게 벌을…… 아…… 맞아. 전부 그년 때문이야.”

달리아는 루나의 이름이 나오자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새틴이 씩 웃었다.

“그래요, 배은망덕한 루나. 그년을 파멸시켜야 해요. 내가 방법을 안다고요.”

새틴이 쇠창살에 바짝 붙어 속삭였다.

“루나에게 혼전 애인이 있었던 건 사실이에요. 우리 집 하녀장은 거짓말을 할 성격이 아니거든요. 하녀가 루나의 방에서 사내가 나오는 걸 똑똑히 봤대요. 그년은 남자에게 받은 돈도 갖고 있었어요. 그게 아니고서야 그년이 어떻게 그렇게 큰돈을 가질 수 있겠어요? 하지만 내가 그 비밀을 알고서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죠. 지금은 증거가 없지만, 그 사내가 누군지만 알면 되어요. 루나의 밀회 상대 말예요.”

“…….”

“하지만 내 능력만으론 부족해요. 정신 차려요. 이제 와 날 도울 사람은 당신뿐이니까. 전 국민이 그 마녀에게 속고 있어요. 제정신인 사람은 나와 당신뿐인걸요.”

새틴의 그 말에 달리아의 움직임이 멎었다.

‘……공작가를 건드렸다가 새틴도 내 꼴이 나면 내겐 손해 볼 것이 없지…… 이년이야 죽어도 상관없으니까.’

그 발상은 묘하게도 달리아에게 정상적인 생각이 가능하게 만들어 주었다.

“좋아, 도와주지.”

달리아가 비척이며 일어났다.

그녀는 방안을 뒤져 이곳에 올 때 가지고 온 패물함을 꺼냈다.

달리아는 지금 자신이 무력하다는 것도 알았다. 그리고 실레노스라는 마법사가 특이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마법사 실레노스는 예전부터 라미라가를 드나들며 특수한 일을 수행했는데, 그는 후작이 무언가를 조사시키면 그게 어떤 과거에 일어났던 일이든 귀신같이 진실을 알아 왔다.

후작에게 자세히 물어도 그의 능력에 대해 대답해 주지 않았었다.

“이걸 들고 가서 근방 여관에서 실레노스라는 마법사를 찾아. 시골은 마차가 자주 다니지 않으니, 아직 이 근처에 있을 거야. 돈을 좋아하는 자니 아마 의뢰를 받을 테지. 뭐든 할 수 있는 마법사이니, 그자라면 지혜를 빌려줄 거야.”

새틴은 이게 웬 떡인가 싶어 쇠창살 너머로 얼른 패물함을 받았다.

“그리고 그 자에게 날 다시 찾아와 달라 전해 줘. 그것들을 없앨 방법을 찾아 달라고…… 반나절이라도 좋으니, 제발 이 미칠 것 같은 시간을 줄여 달라고…….”

“좋아요.”

새틴은 달리아를 도울 마음은 조금도 없었지만, 일단 패물을 받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 슬쩍 열어 본 패물함 안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휘황찬란한 보석 장신구가 가득했다. 침이 꿀꺽 넘어갔다.

‘이 꼴이 나도 라미라 가문이라는 건가. 미친년에게 이게 무슨 필요가 있어? 내가 요긴하게 써 주지.’

새틴은 입이 찢어져라 웃으며 탐욕스레 패물함을 끌어안았다.

“또 찾아오겠어요.”

물론 새까만 거짓말이었다.

‘실레노스라…….’

새틴은 달리아가 알려 준 대로 급한 걸음으로 시내로 나갔다.

가문은 이미 빚투성이에 밑 빠진 독이었다. 이 돈은 자신의 것이었다.

‘부모님에겐 미안하지만 겨우 얻은 돈이니 달리아의 충고를 따라야겠어. 이 걸 다 써서 빚을 갚지도 못할 뿐더러 무지렁이 신세에 머무를 순 없거든. 이번엔 달리아를 철저히 이용해 주지.’

새틴은 신이 나서 마차를 잡아 올라탔다. 곧, 마차는 여관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 * *

시골의 여관에서 실레노스는 흐트러진 모습으로 남루한 손님을 맞이했다.

“저는 달리아의 절친한 친구랍니다. 달리아가 마법사님을 잘 안다며 제 사정을 말하면 도와주실 거라 했어요. 자기 몸이 편찮아 직접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이건 제 작은 성의 표시예요.”

그녀는 반짝이는 보석들을 몇 점 내밀었다. 달리아가 준 패물의 반 이상을 빼돌리고 남은 양이었다. 실레노스는 그것을 대충 훑어보았다. 모두 최상품이었다.

“그래, 사정이나 들어 봅시다.”

새틴은 거짓말에 능숙했다.

그녀는 달리아가 자신의 친한 친구이며, 그리고 자신이 현재 공작 부인의 자매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겪은 억울한 일들을 청산유수처럼 설명했다.

“그러니까, 공작 부인이 혼전에 서방질을 했다고?”

“네. 하지만 도통 증거를 찾을 수 없어요. 그 애가 얼마나 앙큼한지 혼인 전에 남자를 집에 들이고도 단 한 번도 들킨 적 없거든요.”

“나 참 그걸 무슨 수를 써서 도와달란 겁니까?”

“마법사잖아요. 마법사들은 뭐든지 할 수 있지 않나요? 아니면 정보 길드라도 연결해 주세요. 마법사들만 접촉할 수 있는 비밀스런 집단이 있다 들었어요. 소개비도 이미 받으셨잖아요?”

실레노스가 보기에 머리가 썩 좋은 계집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하는 말이 흥미로웠다.

“지금 나 혼자 힘으론 한계가 있어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요.”

“혼전이고 뭐고, 공작 부인이 불륜을 한다 해도 공작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텐데요?”

실레노스가 기억하는 아키스는 숨결까지 차가운 냉혈한이었다. 새틴의 얼굴에 경멸과 분노가 피어올랐다.

“아닐걸요. 공작은 그 악녀에게 푹 빠져 있으니까요.”

“……공작이 공작 부인에게 빠져 있다고요?”

“네, 아주 좋아 죽지요. 하지만 이제 달라질 거예요……. 사실이 다 밝혀지면 공작님은 제법 충격을 받겠지만 그건 그분이 꼭 알아야 할 일이거든요.”

실레노스는 무언가 생각에 잠겼다.

그의 얼굴에 악의 가득한 미소가 떠올랐다.

“……확실히 공작 부인의 약점을 잡을 수 있다면 좋겠군요. 나도 공작에게 원한이 깊은 사람이라.”

“원한이라뇨?”

실레노스는 입꼬리만 올렸다.

“의뢰를 받아 주죠. 공작에게 나쁜 일이 생기면 내겐 좋은 일이 생기는 격이니까요.”

공작은 그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아 갔다. 바로 그의 재능과 미래였다.

아카데미에서 쫓겨날 때, 실레노스는 벌로써 아키스에게 자신의 이공간을 봉인당했다. 한때 아키스와 휘멘에 버금가는 천재 마법사였던 그의 이공간은 형편없고 초라한 공간이 되었다. 그 뒤로 그는 아키스를 해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그 기회를 기다리며 실레노스는 밑바닥을 기며 서부 던전들을 떠돌며 귀중한 주문을 모으고, 또 모았다.

“……때가 무르익으니 이런 일도 다 있군. 그래서 불륜을 저질렀다 확신하는 장소가 어딥니까?”

“네?”

“장소 말입니다. 어떤 범죄든 일어난 장소가 있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났다 확신하는 날짜도.”

새틴은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대답했다. 날짜야 잘 알았다. 축제 마지막 날 밤이었으니.

“……루나는 자기 오두막으로 사내를 끌어들였어요. 그걸 본 사람도 있고요. 하지만 거기선 단서를 찾지 못할 거예요.”

“나와 함께 가면 달라질 겁니다. 당신 입으로 말했잖습니까. 마법사는 뭐든지 가능하다고.”

실레노스가 입이 찢어져라 미소 지었다. 제아무리 새틴이라고 해도 속이 다 오싹한 미소였다.

마침 이럴 때 아주 적합한 주문이 있었다.

“이리 와 봐요. 비밀 이야기는 은밀하게 해야 하는 법이지.”

실레노스가 새틴의 귓가에 속닥였다.

새틴의 눈이 커졌다.

* * *

아키스가 염려한 논문이 무엇인지는 곧 루나도 알 수 있게 되었다. 휘멘이 쓴 논문에 대한 칼럼이 제국 신문에 연일 실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인륜을 저버린 흑마법사, 멸망론을 지지하다.]

아키스의 말이 맞는 모양이었다.

휘멘은 보기보다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재앙이 일어날 것이라는 멸망론에 근거한 비관적 논문을 써 내기 시작한 휘멘에게 사람들의 비난이 집중되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루나의 시녀인 제인도 이런 말을 할 정도였다.

“흑마법사가 완전히 미쳤대요. 다들 저잣거리에서 그자를 욕해요.”

제인이 신문을 읽는 루나에게 홍차를 따라 주며 속삭였다.

“미치긴, 별 소문이 다 도는구나.’

“정말예요. 자기가 데리고 있던 어린 하녀도 죽였대요.”

루나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럴 리가. 그러고 보니 그를 처음 만난 날, 하녀가 도망쳤다며 화를 내고 있었지…….’

루였을 때 그녀를 미소년으로 오인한 변태들에게 납치당할 뻔했었다.

그때 일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났다. 분명 휘멘이 그때 하녀가 비싼 약을 들고 도망쳐 기분이 나쁘다는 구실로 자신을 납치하려 한 변태들에 맞서 주먹질을 했다.

루나는 신문에 일부 발췌되어 실린 논문에 집중했다.

[고대인들의 마법으로 인하여 혼란스런 마력 기장을 가진 제국의 미래는 앞으로 불안정할 것이며, 가뭄, 지진, 기상 이후들에 미리 대비해야 한다…….]

발췌 아래에는 칼럼 작가의 사설이 덧붙여 있었다.

[근거 없는 멸망론은 비관과 망상에 가깝다.]

칼럼은 악녀 에리스의 현신이라도 될 셈이냐는 말로 휘멘을 비꼬며 끝을 맺었다.

루나 또한 휘멘의 행보에 반발하는 사람들이 이해가 가긴 했다.

모두들 달콤한 이야기만 듣고 싶어 하니까. 루나가 소설이라는 꿈을 판다면 휘멘은 지독하고 불쾌한 현실이라는 가설을 팔고 있는 셈이었다.

‘읽다 보니 기분이 이상해져. 갑자기 왜 이렇게 극단적인 행보를 보일까, 이 사람? 정말 알 수 없는 사람이야…….’

그러나 이상하게도, 늘 화를 내는 데다 해괴한 짓을 하지만 도저히 나쁜 사람이란 생각이 들진 않았다.

그 논문 내용은 며칠 내내 루나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계속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 * *

수도로 올라오는 길 내내 실레노스는 새틴이 곁에 없는 것처럼 굴었다.

“이곳이에요. 뒤쪽 숲으로 돌아가는 길이 있어요.”

그들은 두 마리의 밤벌레들처럼 은밀하게 수도 뒤쪽 숲을 파고들어 옛 버몬드가의 저택에 도달했다.

새틴은 램프로 오두막을 비추었다.

‘이자, 정말 믿어도 될까?’

새틴은 마지막까지 실레노스를 의심하고 있었다.

‘현실을 재구성하는 마법이라니, 정말 그런 마법이 있는 거야?’

실레노스가 새틴의 귓가에 속삭이길, 어떤 곳이든 그곳에서 있었던 일을 재현하는 시간 제어 마법을 제가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말에 새틴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었다.

그러나 막상 낯선 사내와 밤거리를 떠돌고 있자니 자꾸만 마음이 불안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판사판이다.’

그러나 새틴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었다.

“어서 마법을 사용해 줘요. 정말 사용할 수 있죠?”

“아가씨, 난 원래 훨씬 대단한 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랍니다. 내 진짜 스승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생명을 관장하고, 두 번째 스승은 사람의 마음과 꿈을 조정하죠. 난 시간의 흐름을 읽는 마스터가 될 예정이었습니다만…….”

그가 손을 뻗었다. 그리고 낮게 주문을 읊조렸다.

“공작 덕분에 시간 재현 마법이나 사용하는 재주쟁이가 되었죠. 이 또한 몇 번 사용할 수 없지만 말입니다.”

곧이어 희미한 금빛 불티가 튀었다. 달리아의 눈이 커졌다.

“선물이 있습니다. 문을 열어 보시죠. 그날 일어난 일을 보게 될 겁니다.”

그가 키득이며 말했다.

“남의 불륜 구경은 오랜만이군요.”

그가 동공이 작은 눈으로 달리아를 보았다. 그 푸른 눈이 어둠 속에서 지독히 역겹게 느껴졌다.

달리아는 뛰는 심장을 느끼며 오두막 문을 열었다. 오두막 안은 대낮처럼 밝았다. 실레노스의 마법이었다.

“시간이 거꾸로 돌아갈 겁니다. 그날 있었던 일을 엿볼 수 있죠.”

오두막 안에는 그날 밤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텅 빈 오두막 안은 루나가 쓰던 초라한 가구들이 그대로 들어서 있었다.

그리고 방안에 루나가 있었다.

새틴이 알던 초라하고 가난한 그 루나였다. 새틴은 투명한 루나의 모습을 보자 이를 갈았다.

“저건 그냥 환영입니다. 너무 흥분하지 마요.”

실레노스가 속삭였다.

그의 마법으로 인해 불려나온 환영의 루나는 침대에 엎어져 있었다.

루나는 비밀 장소인 바닥을 열고 옷가지들을 꺼냈다.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일어나 옷을 벗기 시작했다. 실레노스가 휘파람을 불었다.

“애인이 오기 전에 옷을 벗고 있으려나 보군요.”

“원래 천박한 아이니 그럴 수도 있지요.”

그러나 실레노스가 기뻐할 만한 일은 더 일어나지 않았다. 루나가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가슴에 붕대를 감기 시작했다. 새하얀 도자기 같은 등에 붕대가 감기고 가슴이 완벽히 평평해지자 그녀는 셔츠 단추를 채웠다.

새틴은 눈을 크게 뜨고 여인인 루나가 소년 ‘루’가 되어 가는 과정을 보았다. 이윽고 루나는 문을 급하게 열고 뛰어나왔다.

새틴이 고개를 돌렸다.

루나를 지켜보는 하녀장의 환영이 그곳에 있었다. 하녀장은 씩 웃더니 등을 돌려 빠르게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이게 그날 밤에 일어난 일입니다.”

실레노스가 크게 혀를 찼다.

“그러니까, 애인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본인이 남장을 한 것이군요. 잘못 짚었네요.”

그런데 새틴의 반응이 이상했다. 그녀는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용서 못해…….”

“네?”

“용서 못해, 그 연놈들…….”

새틴이 이를 부득부득 갈며 말했다.

실레노스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 고개를 갸웃했다. 새틴의 부릅뜬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공작의 미소년 스캔들.

그걸 모르는 사람은 전국에 없었다. 서점 점원인 절세의 미소년이 공작을 홀렸다 했다. 그 소년은 짧은 흑발의 머리에 몹시 남루한 행색이지만 빛나는 미모를 가지고 있다 했다.

공작이 소년을 너무 총애해 소년을 만나러 매일 고서점 거리에 출근했다 했다.

“아아……. 아…….”

새틴의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아키스와 루나는 뒤에서 붙어먹고 있던 것이다. 둘은 처음부터 연인 사이였던 것이다. 말로만 저와 약혼하고 뒤에선 그녀를 비웃고 있었으리라.

“밀회를……. 밀회를 하려고 루나 그년을 남장시킨 거였어. 처음부터 날 기만했던 거였어…….”

새틴은 바닥을 긁으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속이 바짝 탔다.

“죽여 버릴 거야, 루나. 우리 집안을 망하게 하고 내 인생을 망친 그년을 죽여 버릴 거야…….”

새틴의 생각은 오해였다. 새틴은 루나가 남장한 모습을 보고 그녀의 정체가 아키스가 총애하던 미소년 루라는 걸 눈치챘다.

문제는 루가 아키스의 연정의 상대로 알려져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루나는 아키스의 아내였다. 그녀는 질투를 한 나머지 아키스가 루로 분장한 루나와 변태놀음을 즐기고 있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난 그것도 모르고 루나를 아키스에게 바쳤구나, 아아, 내가 어리석었어…….”

새틴은 가슴을 치며 울었다.

‘아키스가 그 미소년 때문에 상사병까지 걸렸던 이유가 있었어, 그년이 루나였으니…….’

그 섬뜩한 원한을 실레노스는 흥미롭게 보았다.

“의뢰 내용을 바꿀게요.”

새틴이 헐떡이며 말했다.

“공작 부인을, 루나 그년을 끔찍하게 죽여요, 조각조각 내 줘요.”

“정말입니까?”

실레노스의 표정이 변했다.

“그래요. 돈이 부족하다면 더 줄게요, 내 목숨이라도 바칠게요……. 그년을 죽이기 위해선 뭐든지 할 수 있어.”

실레노스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그는 달리아를 대체할 도구를 찾았다.

“그 각오가 정말이라면 의뢰를 받아 주죠.”

* * *

새틴의 기분은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 실레노스는 잠시 기다렸다 물었다.

“아아, 아가씨. 지금 나를 몹시 즐겁게 해 주시고 있습니다만 상황은 좀 설명해 주시죠.”

새틴은 달달 떨리는 목소리로 제가 한 생각에 대해 말했다. 실레노스는 흥미로운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공작이 애인 놀음을 위해 여자를 남장시켜 고서점에 갖다 두었다고요? 거긴 금녀 구역일 텐데……. 그건 심각한 범죄인데요.”

아키스 같은 냉혈한이 색에 미쳐 그런 짓까지 벌였다고? 상상도 되지 않았다.

“그게 아니고서야 걔가 고서점에 취직할 이유가 있나요? 루나가 고대어를 할 줄 알 리 없잖아요. 평생 한 거라곤 청소와 빨래뿐인 무식한 년인데!”

새틴이 이를 갈며 내뱉었다.

“공작도 체면이 있으니, 진짜 약혼녀의 자매와 대놓고 그런 짓을 저지르는 것이 창피했나 보죠. 역겨운 것들…….”

실레노스는 일이 재미있게 돌아간다는 걸 느꼈다.

“어쨌든 고서점 구역에 갔다는 거잖아요? 그렇지요?”

실레노스와 새틴은 동시에 서로를 보았다.

“그날 밤 있었던 일을 조금 더 지켜볼까요?”

실레노스가 다시 손가락을 튕겼다.

오두막에서 뛰어나간 루나의 환영이 다시 생겨났다. 루나는 어두운 숲을 뛰고 뛰었다. 그 길의 끝에 번화가로 나가는 오솔길로 그녀는 나갔다.

“여기서 한 바퀴만 돌면 바로 고서점 거리예요.”

“그래요. 나도 보고 있습니다.”

팟. 루나의 환영이 스르르 사라졌다.

새틴의 심장이 뛰었다. 실레노스도 새틴을 보았다. 그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둘은 똑같은 부류의 협잡꾼들이었다.

“공작이 혼전에 공작 부인을 남장시키고 고서점 거리에 데리고 가 희롱했다. 정말 멋진 스캔들이 될 것 같군요. 아마도…… 그렇게 고서점을 드나들며 고대어를 몇 자 배우지 않았을까요?”

“그래요. 정말 그래요. 어쩌면 특이한 취향을 가진 공작이…… 직접 고대어를 가르쳤을지도 모르죠.”

사실 여부 따위 중요하지 않았다. 이 사실을 잘 부풀리면 공작 부부의 절대적 약점을 잡게 되는 셈이었다. 루나가 남장을 하고 고서점에 드나들었다는 증거만 있으면 된다.

“달빛 서점.”

새틴이 빠르게 속삭였다.

“그년이 그곳에서 일했어요.”

증거를 어디서 찾아야 할지 알 것 같았다. 새틴의 머릿속에 음모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날이 밝으면 바로 일을 진행하죠. 약점을 잡으면. 그다음엔 내가 계획이 있습니다.”

“좋아요.”

새틴이 섬뜩한 광기에 젖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날 밤, 루나는 또다시 꿈을 꾸었다.

그녀는 절벽 위에 서 있었다.

‘또 이 꿈……?’

걸을 때마다 검은 꽃이 발목을 휘감았다. 루나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얼마 전 아키스가 선물한 꿈 때문인지 괜히 기분이 오싹했다.

루나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절벽의 끝에 못 보던 문이 있었다.

“이 문은……?”

루나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숨을 들이켰다.

도서관.

열여섯 살, 꿈에서 나타났던 그 신비로운 ‘도서관’이었다. 루나는 뛰어들 듯 급하게 도서관으로 들어섰다.

‘……내 미래를 알게 된 이후로 처음이야.’

커다란 달빛이 비추는 도서관.

그 아름다운 도서관의 위용은 여전했다.

‘……여긴 도대체 어딜까.’

루나는 문득 아키스의 비밀 공간, 마음속 도서관을 떠올렸다. 혹시 이곳도 어느 마법사의 도서관인 걸까?

‘……그럴 리가 없어. 아키스의 도서관보다 몇 배는 큰걸. 이 도서관의 주인이 신 같은 존재라면 몰라도…….’

루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책장으로 다가갔다.

‘……그날, 꾼 꿈 이후로 모든 게 변했지. 내 미래도, 목표도…….’

일기장의 마지막.

얼마 남지 않은 몇 개월간의 수명으로 병상에 누워 세상을 원망하며 죽어 가는 초라한 미래의 루나.

‘지금이라면 그다지 끔찍하게 느껴지지 않을지도.’

가장 행복한 미래도 보았고, 현재는 확실히 변했으니까. 루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일기장을 펼쳤다.

‘……어?’

그런데, 무언가 조금 이상했다.

‘내가 기억한 마지막 페이지가…… 분명 여기인데…….’

여러 차례 꾼 꿈에서 일기장을 달달 외울 만큼 읽었다. 그런데 무언가가 이상했다.

그녀가 일곱 번이나 꾼 꿈. 그때, 비참하게 병상에 누워 죽어 가는 루나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내용이 없었다.

그때, 백지였던 페이지들에 빽빽하게 글씨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루나는 숨을 들이켰다.

‘죽기 직전의 내 심경이라도 적혀 있으려나.’

그렇게 생각했지만 호기심이 치밀어 올랐다.

루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그녀는 펼친 페이지를 빠르게 훑기 시작했다.

<……내 이름은 루나다.

혼전의 버몬드라는 성도 아닌, 시집와서 강제로 붙은 성도 아닌, 이제는 그냥 루나다. 나는 그 이름만 남겨 두고 싶다.

영지에서는 내가 도망친 것에 감사해하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영지 같지 않은 쓰레기 땅의 주인이라 해도, 내가 죽고 나면 며느리가 죽을 때까지 의사 한 번 불러 주지 않은 것에 대해 비난당했을 터이니.

그렇게 나를 붙잡던 치들이, 내가 이번에 도망갈 때는 잡지 않았다……. 드디어, 나는 죽을 때가 다 되어서야 그 지옥 같은 곳을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난, 수도의 여성 구빈원에 머물게 되었다. 나처럼 죽을 날만 앞둔 여자들을 수용해 주는 곳이었다. 대부분이 나이 든 노파들이지만, 나처럼 젊은 여자도 몇 있었다.

이곳은 가난과 병마의 냄새가 가득하다…….>

‘세, 세상에…….’

글자는 계속해서 떠올랐고, 차마 상상도 못한 내용에 루나는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은 채 일기에 몰두했다.

<아마 난 루나라는 이름의 빈민으로 죽어 가겠지. 그 사건이 일어난 후, 사람들은 나와 같은 불우한 사람들에게 박해졌다.

빈민을 보기만 해도 죽이거나 화풀이를 하는 시골 사람들이 늘어나 큰일이었다. 이 난리 통에는 차라리 도시가 안전하리라.

오늘도 거리 곳곳에는 고아들이 참 많았다. 어떤 아이는 자기도 작은데 더 작은 아이의 손을 잡고 길을 떠돌며 구걸을 한다……. 불쌍했지만, 그들에게 나눠 줄 동전 한 푼 없는 내 처지에 동정은 가당치 않다. 그날 이후, 이 나라는 붕괴되기 직전이다.

오늘 수도 광장에서 연설이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수도의 시계탑은 네 동강 난지 오래고, 땅은 메마른 가뭄 바닥처럼 금이 가 있다. 내가 어릴 적에 보고 자란 수도는 참 아름다웠는데 지금 이 꼴은 차라리 폐허가 더 고귀할 정도이다.

나와 같은 빈민들은 골목 한구석에 몸을 숨겼다. 모두들 구원을 바라 듯 광장 중앙의 높은 단상에 있는 사내를 보았다.

태어나 그토록 아름답고 빛나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홀린 듯 그 완벽히 아름다운 사내를 모두가 올려다본다.

그는 키가 몹시 크고 어깨가 넓었다. 사내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외모였다.

“로텐베른, 로텐베른 공작이야.”

내 옆의 한 빈민 여자가 속삭였다.

그 남자가 공작이라 했다.

아키스 드 로텐베른.

사람들은 그자를 일컬어 이 나라에서 가장 신분 높은 사내라 했다.

그는 왕자도, 황제도 아닌데 참 이상한 일이다. 그는 이 나라 사람들이 현재 가장 숭배하는, 모두의 동아줄이라 했다.

공작은 음성 증폭기에 대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직한 그의 목소리는 듣고 있자니 홀리는 것 같은 느낌을 품고 있었다.

“어떤 일이 일어나든, 우리 제국은 극복해 낼 것이며, 두 번, 세 번의 비극은 없을 것입니다. 그 끔찍한 사건이 제국의 근간을 흔들었으나, 제국의 마법사들이 만들어 낸 태초의 결계는 아직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의 긴 연설이 계속해서 이어졌고, 사람들은 숨죽여 경청했다.

“제국은, 나라의 사람들은 멸망하지 않습니다. 코끝까지 바짝 쳐들어온 공국의 사람들도 나와, 이 나라를 수호하는 드래곤이 막아 낼 것입니다. 그러니 민심을 가라앉히고 제국에 대한 충정을 회복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그는 참 많은 연설을 했지만 난 이것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공작의 연설이 끝나자 사람들이 앞으로 물밀 듯 밀려들어 외치기 시작했다.

“로텐베른 공작 만세!”

“제국은 멸망하지 않는다!”

나는 아키스라는 이름의 사내를 노려보았다.

거짓말하지 마.

이 제국에는 끔찍한 재앙이 일어났어. 어차피 다 죽을 거야. 내 삶도 얼마 남지 않았지만…… 당신들은…… 모두…….

그런 나를 누군가 세게 치고 지나가며 광장은 금세 아수라장이 되었다. 다들 미쳐서 그의 이름만을 연호했다.

도망치듯 구빈원으로 돌아왔음에도 계속 심장이 뛰었다. 나는 종종 기침을 했고 새벽이면 몸을 떨며 일어났다. 피를 토할 때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구빈원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여인들을 설레게 하는 소문이다.

“국가에서 실험 대상자를 모집하고 있습니다. 스물에서 마흔 살까지의 병자인 여인이어야 합니다. 명심하세요, 반드시 이미 병에 든 사람이어야 합니다. 국가에서 무료로 치료도 해 주고 실험에 성공하면 돈도 많이 줍니다. 꼭 신청하세요.”

오늘은 정부에서 관리가 나와 전단지를 쥐어 주고 갔다.

나는 전단지를 꼭 쥐고 마른침을 삼켰다. 고민하던 끝에 나는 전단지 아래 신청서에 내 이름을 적어 넣었다.

성도 무엇도 없는 이름.

‘루나’라는 이름이었다.

어차피 동전 한 푼 없는 몸이다.

이왕이면 실험에 성공해서 돈이라도 벌어 몇 안 남은 삶을 돈이나 펑펑 쓰며 보내자…….

그래, 그게 좋겠다……. 그게 좋을 것 같아.>

* * *

일기장의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나, 그대로 시골 영지에서 죽는 것이 아니었나?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때였다.

도서관의 천장이 흔들렸다. 루나는 이 느낌이 익숙했다. 꿈이 끝나기 전이었다.

안 돼, 꿈이 끝나면 안 돼. 아직 더 알고 싶은 것이 있는……!

“헉!”

루나는 식은땀이 흐르는 등을 느끼며 눈을 떴다.

“루나?”

아키스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괜찮아요? 잠꼬대를 하더군요.”

약초 냄새가 코를 찔렀다. 루나는 뒤늦게 자신이 있는 곳을 인식했다.

공작가의 작은 응접실, 아키스와 앉아 시간을 보내곤 하는 그곳이었다. 루나는 그곳에서 소파에 다리를 올린 채 쿠션에 등을 기대고 잠시 짧은 낮잠에 빠져든 참이었다.

루나의 손에는 아까 낮에 읽던 타이핑된 <보석 영애 이야기> 완고가 들려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다듬던 약초가 올려져 있었다.

“아…… 악몽을 꿨나 봐요.”

루나는 창백해진 낯으로 고개를 저었다.

“안에서 자지 않고요.”

“할 일이 좀 있었거든요. 인쇄소에 원고를 보내기 전에 마지막으로 읽고 있었어요.”

“과로하는 것 아닙니까?”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아키스가 손을 내밀었다.

그의 큰 손을 잡자 그는 루나를 한 번에 일으켰다. 잠깐 든 잠인데도 등에 땀이 흥건했다.

‘엄청난…… 꿈을 꿨어…….’

그러나 꿈속에서 본 일기장의 이어진 내용은 그녀의 기분을 계속 건드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지? 제국의 정세가 그렇게 나빠진다니.’

루나는 물음표에 머릿속이 꽉 차, 짓눌릴 지경이었다.

“루나?”

아키스가 그녀의 이상한 기색을 눈치채고 나직이 물었다. 루나는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에요. 아키스. 이젠 괜찮아요.”

“역시 침실에서 좀 쉬는 것이 낫겠어요.”

아키스는 루나의 허리에 손을 두르고 그녀를 안듯이 침실로 데려갔다.

루나의 심장은 계속 뛰고 있었다.

* * *

제국의 수많은 여성들이 후속작 출간일을 기다리고 있다 했다.

붉은 책, 작가 레드의 후속작인 <보석 영애 이야기> 출간이 코앞에 다가오자 루나는 비교적 한가해졌다.

고대 약을 복원하는 일은 일단 재료 부족으로 인한 유보 상태였다. 남은 건 곧 다가올 황가의 큰 행사인 사냥제 참석을 위한 옷을 맞추는 것 정도였다.

그런 나날들 속에서도 며칠간 그 기묘한 꿈 내용은 루나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둥둥 뜬 듯한 며칠이 지나갔다.

‘결국 도서관 꿈은 더 꾸지 못했어.’

그녀는 다시 일기장 뒷부분을 읽기 위해 낮잠을 자고 밤잠도 많이 자려 노력했다.

그러나, 그날의 꿈 이후로 더는 일기장을 읽는 꿈은 없었다.

* * *

그날은 며칠 만에 아키스가 깊게 잠든 날이었다.

루나는 아키스가 잠든 후, 그의 너른 등을 바라보다가 그의 등에 고개를 대고 숨을 들이켰다. 땀 내음 섞인 근육으로 꽉 짜인 단단한 등이 느껴졌다. 요즘 꿈에 정신이 팔려 그에게 신경을 쓰지 못했다.

‘이상하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모르겠어. 왜 그는 고민에 가득 찬 것 같을까.’

종종 아키스는 어떤 근심이 정신이 팔린 사람 같았다. 어쩌면 애정만으로는 그의 삶을 풍요롭게 하지 못할지 모른다.

‘속을 모를 사람이니…….’

루나는 몸을 일으켰다.

어찌나 격렬한 시간을 보냈는지 다리 사이가 아직 후끈했다. 일어나는 그녀의 뽀얀 알몸 위로 울긋불긋한 그의 흔적이 열꽃처럼 피어나 잔뜩 드리워져 있었다.

루나는 얇은 비단 가운을 걸쳤다.

문득, 소파 근처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제국 신문이 눈에 들어왔다.

‘……휘멘의 논문.’

제국이 멸망할지 모른다는 일종의 멸망론. 그 비관적인 논문을 읽은 후, 하루도 그 내용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은 날이 없었다.

루나는 꿈을 떠올렸다.

<어차피 다 죽을 거야. 내 삶도 얼마 남지 않았지만…… 당신들은…… 모두…….>

루나는 일기장을 통해 미래를 보았다.

지금도 그런 능력이 생긴 영문은 모른다. 그러나 확실한 것이 하나 있다.

루나는 휘멘의 가설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휘멘은 왜 이런 논문을 발표하는 걸까? 혹시 휘멘도 나와 같이 신비한 일을 겪은 걸까?’

꿈속에서 엿본 미래. 일기장을 통해 본 미래는 범상치 않았다.

‘정말 휘멘 말대로 제국에 재앙이 일어나는 거라면…… 그걸, 나만 꿈으로 볼 수 있는 거라면 그와 접촉해 꿈에 대한 단초를 알려 줘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휘멘은 그녀를 의심하고 있었고 그는 껄끄러운 사람이었다. 문득 루나의 머릿속에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다.

‘……만일 내가 공작 부인으로서 그의 의견을 지지하게 된다면?’

<월플라워 부인>을 출간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월플라워 부인>에 대해 쓴 칼럼과 논문을 썼다. 때로 자기가 직접 루나에게 자신이 쓴 분석 글이나 논문을 보내는 사람도 있었다.

“……출간된 논문이나 작품에 자기 의견을 표하는 건 자유니까.”

그런데 그에게 어떻게 연통을 보낸단 말인가?

번개 같은 생각이 루나의 머리를 스쳤다. 달빛 서점 뒤쪽. 그곳에 휘멘의 집이 있다.

‘……그의 집 위치를 아니까.’

고민하던 루나는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그녀는 타자기를 꺼냈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타이핑을 시작했다.

[논문을 주의 깊게 읽었습니다. 나는, 귀하의 의견에 동의하는 바입니다. 당신의 의견을 지지합니다.

관련하여 나누고 싶은 정보와 드릴 의견이 있사오니, 가능하면 은밀하게 한 번 만나고 싶습니다. 가명으로 내게 편지를 보내 주세요. 힌트는 <월플라워 부인> 편집부에 있습니다.

당신의 손등 키스를 받은 여인으로부터.]

이만하면 그가 알아들으리라. 휘멘에게 손등 키스를 받은 여인이 많진 않을 것이었다. 만일 은밀히 휘멘을 만날 수 있다면 자신이 꾼 꿈 내용을 살짝 흘려 줄 생각이었다.

다만 어디까지나 공작 부인으로서, 그와 대화할 생각이었다. 휘멘에게 정보를 주는 것과 자신의 안위 문제는 별개였다.

‘만일 그가 일리 있는 말을 하고 있고, 나만이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힌트를 줄 수 있다면…….’

하지만 과연 그가 편지를 확인할까?

집에 들어오기는 할까?

루나는 확신이 없었다. 그녀는 운명과 우연에 걸어 보기로 했다.

내일 아침, 제인을 통해 편지를 붙일 것이다. 만일 연이 닿는다면 그는 이 편지를 읽을 것이다.

* * *

‘일이 점점 재미있게 돌아가는데?’

기세 좋게 의기투합한 것과는 달리, 새틴은 고서점 거리에 접근도 하지 못했다. 그곳은 금녀 구역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고서점 거리를 돌며 조사를 한 건 실레노스의 역할이 되었다.

“공작가의 사람들이 그 소년 관련하여 이 거리를 한번 들쑤시고 갔지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감시하다 겨우 철수했습니다. 그다음에는 소년에게 거액의 현상금이 걸렸는데, 현상금을 노리는 그쪽 같은 떠돌이 치들이 거리를 들쑤셔 놓아 어찌나 정신 사납던지.”

고서점 거리의 사람들은 ‘루’라는 소년의 이름만 들어도 학을 뗐다.

“그 아이는 참 착한 애였는데 뭘 그리 큰 죄를 지어 높으신 분이 찾고 있는지…… 일도 굉장히 잘했습니다. 서점 주인인 필립은 그 애가 천재라고 극찬했지요.”

실레노스가 금화를 좀 찔러 주자, 한 서점 주인이 속닥였다.

그러나 그들의 공통된 증언은 달빛 서점이라는 곳에서 소년이 마법사들 사이에 평판이 좋은 뛰어난 번역가로 일을 했다는 것이다. 공작 외에도 마법사 고객이 꽤 있었다고 한다.

그에 달빛 서점에도 가 보았지만 문을 닫은 채였다.

‘……공작 부인이 능숙하게 번역을 할 정도로 고대어를 할 줄 안다고?’

몇 자 정도 어중이떠중이처럼 글자를 배워 고대어를 하는 건 몰라도, 진짜 번역가로 일할 정도로 본격적인 재능은 타고 나야 할 수 있었다. 고대어는 배운다고 술술 읽을 수 있는 언어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실레노스도 헷갈렸다.

‘정말 공작 부인이 남장을 한 것이 맞는 건가?’

그러나 사람들에게 듣기로 그가 본 루나의 남장 모습. 그 환영과 사람들이 묘사하는 루나라는 소년은 정말 똑같았다. 심지어 현상 수배서에 묘사된 모습과도 완전히 같았다.

실레노스의 가장 큰 의문이 그것이었다.

‘어떻게 고대어가 능숙한 여자가 태어날 수 있지? 카리노 대왕의 마법 이후 절대 그런 일이 없을 터인데…….’

태초의 결계.

고대의 제국 땅은 원래 마법의 땅이라 불릴 만큼 대기와 지반에 마력이 풍부했다.

그 마력을 가공하며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 고대인들이 제국 땅 전체에 친 결계. 이 땅을 뒤덮은 그 결계 위로 카리노 대왕은 여인에게 고대어 능력이 발현하지 않게 하는 마법을 걸었다 한다.

태초의 결계가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는 단순했다. 그들이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태초의 결계가 무너진다면 마법사들은 모든 힘을 잃을 것이다.

‘정말 그녀에게 고대어 능력이 발현했다면, 공작 부인은 불가능한 확률에서 태어난 돌연변이일까?’

몹시 흥미로웠다.

실레노스는 그 정보들을 기반으로 추측했다.

첫 번째는 공작이 일부러 만들어 낸 이형이자 괴물이 공작 부인일 가능성이다. 결계를 피하는 방법을 어떻게든 찾아내 고대어 능력을 개화시킨 여인이 공작 부인일 경우.

두 번째는 공작 부인이 1억분의 하나보다도 낮은 확률로 태어난 돌연변이일 경우. 그리고 그걸 눈치챈 공작이 그녀를 보호했을 경우였다.

아키스는 상당히 규칙을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진심으로 실레노스를 제자로 아낀 휘멘과는 달리, 아키스는 그에게 정을 주지 않았다.

그러니 작은 실수만으로 자신을 가차 없이 내쳤다. 그러나 그런 공작도 공작 부인 앞에선 다른 태도를 취한 것이다.

‘그 공작도 여자 앞에선 어쩔 수 없다,라…….’

실레노스는 진정으로 기꺼웠다.

아키스가 감정에 흔들려 실수를 저지른 것이길 바랐다.

어쨌든, 확연한 결론은 하나였다.

‘공작 부인은 고대어를 할 수 있다.’

그 사실이었다.

“크게 만들면 공작가가 흔들리고, 작게 축소해도 공작 부부를 꼼짝 못하게 할 약점이라…….”

너무 좋아서 웃음이 다 나왔다. 길에서 춤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단 하나, 의문이 있다면 공작이 왜 그 소년을 찾는다며 거대한 연극을 하고 있냐는 것이었다.

‘거액의 현상금은 당최 왜 걸었지?’

이 또한 끼워 맞추자면 논리적 접근이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공작은 ‘루’라는 가상 인물을 정교하게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대대적으로 자신을 홀린 미소년을 찾겠다며 현상금까지 걸어 버리면, 누가 공작 부인이 루라고 의심하겠는가. 간악한 지혜를 가진 공작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

“어떤 여자기에 그 양반에게 큰 죄를 저지르게 했을까.”

그 여인을 직접 눈으로 보고 싶었다. 정말 그 여인이 세계의 룰을 깨고 태어난 돌연변이라면 반드시 손에 넣고 싶었다.

거짓말쟁이인 건 실레노스나 새틴이나 마찬가지였다. 루나를 죽여 주겠다는 말은 빈말이었다.

공작을 해한 다음, 그의 모든 마법이 해방되면 희귀한 생물인 공작 부인을 납치하여 자신이 가질 생각이었다. 그 재능이 진짜라면 가둬 두고 마음껏 실험을 해 보고 희롱하면 된다.

그리고 재능이 가짜라면 그때 죽여도 늦지 않으리라. 거기다 공작 부인을 능욕할 수 있다면 공작에게도 최고의 복수가 될 것이다.

실레노스는 새틴을 만나게 해 준 운명에 감사했다

‘요 근래 운이 좋군.’

자기 자신을 태울 정도로 강한 분노와 원한. 그런 재료는 어디다 붙여 둬도 쓸 만한 법이다.

새틴과 실레노스는 하나는 똑같았다.

죽어도 상관없으니 상대를 해하고 싶어 한다는 점.

“뭘 하는 거예요? 당장 우리가 알아낸 사실들을 대대적으로 알리자구요. 전국에 알리면 그년은 마녀로 몰려 죽을 거예요.”

“진정하시죠. 그 사실을 떠들고 다닌다 한들, 공작이 신문과 소문을 다 막으면 방도가 없어요. 그냥 이 기회를 날려 버릴 겁니까? 공작 부인이 고통스럽게 죽었으면 좋겠다면서요. 공작은 이 나라의 무소불위의 권력자인데, 황가를 움직여 사람들의 입을 단속하면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이 약점을 잘 이용해 치명상을 줘야 해요. 당신 소원대로 공작 부인을 해하려면, 가진 패를 소중히 다뤄야죠.”

새틴은 입술을 깨물었지만 곧 수긍했다.

“……반드시 고통스럽게 죽여 줘요. 침을 뱉고 구타하고, 여자로서 망가뜨린 다음 죽여 줘요. 난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요.”

새틴은 울화병에 걸린 듯 계속 벽을 보며 중얼거리곤 했다. 루나를 증오한다는 말이었다. 누가 봐도 반쯤 이성을 놓아 버린 모습이었다.

‘단기간에 미친년을 너무 많이 보니, 기분이 이상하군.’

달리아에 이어 새틴까지 이 지경이자 실레노스는 혀를 차고 싶어졌다.

‘아무튼 공작이 정말 공작 부인을 사랑한다면 좋겠군.’

새틴은 공작이 공작 부인이라면 사족을 못 쓰고 귀애한다 했다. 실레노스는 달콤한 것들로 가득한 선물 상자를 받은 기분이었다.

공작에게 약점이 생겼다.

공작 부인의 약점을 이용하면 공작을 꼼짝 못하게 할 수 있다. 공작 부부의 안위는 곧 제 손안에 들어올 것이다.

“……이해했으면 사냥을 준비하러 갑시다. 사냥감이 크니, 아주 신중하게 준비해야 해요. 먼 길이 될 겁니다.”

실레노스는 콧노래라도 부르듯 말했다.

* * *

사냥제가 시작하기 직전, <보석 영애 이야기>가 출간되었다.

작가 레드의 전용 레이블인 러브 문에서 출시하는 두 번째 작품이었다. 월플라워 부인으로 생긴 팬들은 두 손을 맞잡고 기다리다 작품이 출간되는 날 또다시 서점에 문전성시를 이뤘다.

출간과 동시에 제국 호사가들의 뒤통수를 강하게 때리는 스토리로 소설은 상당히 주목 받았다.

“아아, 너무 재미있어요.”

“이번 작품은 애절한 내용이군요. 여 주인공인 젬이 아이의 친아버지를 숨기는 장면은 어찌나 슬프던지…….”

“그런데, 여주인공이 꽤 멋지지 않아요?”

이번 작품은 혼전 임신을 한 낮은 신분의 영애가 황족과 이어지는 단순한 스토리였다.

그러나 이 스토리 내용의 가장 큰 반전은, 한 사내의 아이를 임신한 여자가 독립하는 과정이었다.

보수적인 제국에서 귀족 영애가 혼전 임신을 했다. 사회적 생명이 끝남은 물론이요, 아이의 아비인 사내에게 결혼해 달라 애원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

그 사내가 그 여인을 거절하고 혼인해 주지 않으면 그 여자는 누구도 데려가지 않는 비참한 사회적 낙오자가 된다. 이게 보수적 제국 사회의 룰이었다.

그러나 이 소설은 달랐다.

여주인공인 젬 영애가 아이를 혼자 키우며, 사업적으로 성공하며 아이의 아빠와 밀고 당기기를 하는 내용이었다.

젬 영애는 사업 성공으로 점점 더 자존감이 높아지며, 비굴하게 혼인을 요구하기는커녕 자신을 쫓아다니는 남주인공을 여러 번 거절하기까지 한다.

[보수적인 혼인보다는 나와 내 아이가 더 소중해요.]

심지어 젬 영애는 이런 대사까지 했다.

여인들은 아이의 아버지를 밝힐 수 없음에 혼자 쓸쓸하게 울며 마음을 달래는 젬 영애에 공감하며 훌쩍였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그녀의 사고방식에 통쾌함을 느꼈다.

드디어 공작 부인이 보수적인 제국의 결혼 제도를 정면으로 건드리는 소설을 냈다.

사람들은 호들갑을 떨어 댔다. 이토록 잡음과 논란이 많으면서도, 글은 재미있으니 날개 돋친 듯 팔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전이라면 욕을 먹는 것에 꽤 떨었을 루나지만 이제는 아무렇지 않았다. 제 눈앞에 와서 침을 뱉을 사람도 없거니와, 아키스의 든든함을 믿었다. 또 저의 오른팔처럼 곁에 있어 주는 페니가 있으니 비난은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확실히 나는 이전과는 달라졌어……. 내게 좋은 말을 해 주는 사람들에게만 집중할 수 있다는 건 좋은 거야.’

루나는 싱긋 웃고 생각했다.

이번 작품도 좋아해 주는 귀부인이 많았기 때문이다.

책은 전국에서 어마어마한 판매고를 올리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출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루나는 부부 동반의 황가 사냥제 참석을 위해 지방으로 떠나게 되었다.

“울프를 데려갈 수 있어 정말 좋아요.”

사냥제기에 당연하게도 사냥개인 울프를 데려갈 수 있었다.

마차 옆자리에서 루나의 옆에 애인처럼 착 달라붙은 울프를 아키스는 상당히 불편한 시선으로 보았다. 몸은 집채만 한 놈이 뱀처럼 꽈리를 틀고 루나에게 주둥이를 비비며 애교를 떨고 있었다.

“저리 가라, 울프. 그 자린 내꺼다.”

울프는 끄응, 하면서 루나를 바라보았다. 루나가 머리를 긁어 주자 울프는 몹시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마차 바닥으로 물러났다.

‘이게 점점 사람처럼 굴어.’

아키스는 어이가 없었다.

“페니가 같이 못 가는 건 아쉽네요.”

페니는 이전부터 몸이 안 좋던 나이 든 친척이 노환으로 돌아가시자 장례식 참석을 위해 일가족이 시골로 내려갔다.

루나의 옆자리에 앉자 그녀가 익숙하게 그의 팔에 팔짱을 끼고 착 감겨 왔다.

아키스의 머릿속에서 순간 여러 가지 생각들이 날아갔다. 루나의 채취는 그를 안정시키고 홀렸다. 루나가 소곤거리듯 말을 걸었다.

“사냥제는 처음이에요. 울프도 사냥에 참가하나요?”

“작년까지는 그랬습니다. 울프는 나무 위로 올라간 사냥감까지 쫓지요.”

“요 귀여운 모습을 보면 상상이 안 가는데…… 맹견이긴 하군요.”

루나는 눈을 깜빡였다. 아키스는 피식 웃었다. 곧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루나는 아키스의 팔에 기대어 잠시 다른 생각을 했다.

‘결국 휘멘에게 연락은 받지 못했네.’

혹시 편집부로 오는 연락이 있을까 싶어 루나는 출발 마지막 날까지 기다렸다. 그러나 역시 휘멘은 답이 없었다.

‘내가 본 미래는 몇 년 후이니, 그 전까지 휘멘과 살아가며 한 번은 인연이 닿기를 바랄 수밖에…….’

루나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그러고는 마차 앞을 보다 아키스를 바라보았다. 문득 루나는 이전부터 가지고 있던 의문이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키스,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요.”

“뭐죠?”

“휘멘 말인데요.”

루나가 꺼낸 뜻밖의 말에 아키스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듣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 사람의 논문 이야기를 많이 하더라고요. 아키스 당신은 그의 논문을 전혀 신경 쓰는 것 같지 않던데 혹시…… 이유가 있나요?”

“그건 내가 이 세계에서 가장 마력을 많이 사용하고 있는 백마법사이기 때문이죠.”

그가 나직이 말했다.

“그가 주장하는 대로, 제국의 마력 체계에 문제가 생긴다면 나에게 즉각적인 영향이 나타날 겁니다.”

“영향이라면……?”

“몸에 병이 나거나 아프게 되겠지요. 그건 휘멘도 마찬가지고요. 마스터급의 마법사는 이 세계의 마력을 숨처럼 느끼기에 공기가 흐트러지면 호흡 곤란이 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난 그런 기미를 느끼지 못했고, 그의 이론이 몇 십 년 안에는 일어날 리 없다 판단했습니다.”

“그래요.”

루나는 조금 찜찜함을 느끼며 대답했다.

사실, 루나에게 일일이 말하진 못했지만, 현재 휘멘의 존재는 꽤 골치였다.

그는 일반인들에게 공개하면 안 되는 마법사들의 영역까지 아슬아슬하게 건드리며 위험한 논문을 계속 발표했는데, 특히 마법사들만 아는 ‘태초의 결계’에 대한 내용까지 건드리고 있었다.

마차는 계속 달렸다.

* * *

사냥제를 주최하는 장소는 매년 같았다.

동부의 스틸본 숲.

고대 시절부터 제국의 황가가 주도적으로 풍요를 기원하는 사냥제를 올리는 곳이었다. 황족들은 스틸본 숲의 오랜 신전에서 기도를 올리고 귀족들은 사냥을 했다.

루나와 아키스는 도착하자마자 그들을 위해 마련된 천막으로 안내 받았다.

두 개의 천막을 이어 만든 그곳은 부부 침실과 작은 거실, 그리고 거실 한편의 부인용으로 옷을 갈아입을 공간이 칸막이로 마련되어 있었다.

거기에 딸린 쾌적한 화장실과 호화로운 욕실까지. 천막생활이라 해서 열악한 환경을 상상했던 루나는 감탄했다.

“생각과는 다르네요. 날도 시원하고 주변 경치도 좋고요.”

아직 늦여름인데도 살랑살랑 부는 바람이 기분 좋았다.

창 밖에서는 시원한 폭포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아까 오기 전에 스치듯 본 숲의 정경이 꽤 절경이었다.

루나가 이곳저곳을 구경하는 사이, 궁내부의 사람들에게 일정표를 전달 받은 제인이 돌아왔다. 그녀는 이곳저것 돌아다니는 루나를 칸막이가 쳐진 임시 드레스 룸에 앉히고 구두 벗는 것부터 도와주었다.

“시간이 많지 않더라구요. 저녁 연회 준비를 하셔야 하니 바로 옷을 갈아입으셔야 해요. 화장도 고치셔야 하고요.”

“알겠어.”

제인은 루나의 화장을 고쳐 주며 조잘조잘 떠들었다.

“아까 다른 시녀에게 들었는데, 몇 백 년 전에 이 숲에는 일각수며, 날개 달린 사슴까지 살았대요. 아직도 그런 생물들이 살까요?”

루나는 그 말에 피식 웃었다.

“지금은 그런 생물이 없을걸. 그렇지만 이곳은 1년에 딱 한 번 사냥을 한다 하니, 남자들이라면 몹시 즐거워할 사냥터겠구나. 동물들이 사람을 경계하지 않을 것 아니니.”

루나는 그다지 사냥에 흥미가 없었기에 별 감흥 없이 말했다. 루나는 오늘을 위해 모이라가 지은 새 드레스를 차려입고 화장을 고쳤다.

어느새 칸막이 너머의 공간에서 먼저 준비를 마친 아키스가 루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래 기다렸죠?”

“…….”

아키스는 그녀를 보고 잠시 말을 잊었다.

아직 신혼 기간인 데다, 첫사랑에 젖은 나날을 보내고 있는 루나는 만개한 꽃처럼 매력적이었다.

‘주변을 빈틈없이 사수해야겠군. 오늘 참석하는 놈들 중 행실이 나쁜 놈이 누가 있더라.’

그는 그런 기색은 전혀 티내지 않고 점잖게 손을 내밀어 그녀를 에스코트했다.

“어때요?”

“눈부시군요.”

“이제는 빈말도 잘하시는군요.”

“난 지금도 예전도 빈말은 전혀 못합니다.”

아키스가 나직하게 말했다.

루나는 피식 웃고 걸음을 옮겼다.

“울프, 연회장은 같이 못 가니 주변에서 얌전히 놀고 있어. 알았지?”

루나는 마지막으로 울프의 머리를 쓰다듬어 달래 주고는 걸음을 옮겼다.

* * *

야외 연회장은 숲 한가운데의 큰 공터였다. 나무 가득 핀 여름 꽃들이 흐트러지게 만개해 숲 바람에 살랑이며 흔들렸다.

막 노을이 지기 시작한 시간이라 수많은 조명이 연회장 주변을 빛내고 있었다. 그 뒤로 스틸본 숲의 신화 같은 정경이 펼쳐져 있었다.

호화로운 금사 장식 천막 아래 사람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루나가 등장하자 사람들의 시선이 주목되었다. 얼마 전 발매한 신간을 포함해, 루나가 발간하는 소설은 수도 최고의 화제였다. 루나를 보는 사람들의 눈빛에는 이전과는 달리 묘한 선망과 호기심이 가득했다.

“공작 부인이 오셨군요.”

대부분의 여인들은 야외 연회임에도 불구하고 잔뜩 치마를 부풀린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에 비해 루나의 드레스는 단순한 디자인이었다. 엉덩이나 허벅지 주변을 전혀 부풀리지 않은, 흐르는 듯한 라인의 드레스는 은은한 하늘빛 색상이었다. 허리부터 잘 재단된 천은 루나의 몸에 완벽하게 흐르듯 달라붙어 있었다. 심플한 드레스는 숲속 배경에 어우러져 루나를 더욱 신비롭게 보이게 했다. 금발은 하나로 뒤로 땋아 곳곳에 진주 장식을 했다.

“아름답군요. 소문보다 더.”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유명한 소설의 출간자로 알려진 루나의 이력. 그 때문인지 남들과는 다르게 입은 것조차 지적이고 품위 있어 보였다.

특히 몇몇 사내들은 루나를 몹시 감탄하며 바라보고 있었다. 루나가 아키스를 하룻밤으로 홀린 요부로 알려져 있었기에 저도 한번 들이대 볼까 감히 흑심을 품는 놈들도 있었다. 아키스는 본능적으로 루나에게 향하는 흑심에 반응했다.

‘주제 모르고 누굴 쳐다보는 거지.’

아키스의 심기가 급속도로 나빠졌다.

못 오를 나무 정도가 아니라, 떨어지는 나뭇잎 한 잎만 잘못 스쳐도 그 스친 사내를 두들겨 팰 정도로 귀한 여인이었다.

아키스는 루나에 관련된 일에는 냉정함의 각도기가 아예 깨지고 있었다. 그는 불편한 심기를 겨우 누르고 루나에게 다정하게 말했다.

“이런 자리는 처음인데, 불편하지 않아요?”

아키스가 속삭이듯 물었다.

“괜찮아요. 1년 중 가장 큰 행사인데, 오늘 정도는 공작 부인의 역할을 해내야죠.”

루나는 작게 미소 짓고 저에게 수군대는 아키스에게 대답했다.

“피곤하면 언제든 천막으로 돌아가요. 어차피 이곳에 머무는 내내 연회는 매일 밤 열릴 겁니다.”

아키스는 사람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빈틈없이 붙어 허리께에 손을 올렸다. 부인을 보는 눈에 애틋함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이 가만히 귀부인들은 묘한 눈으로 그들을 보았다.

‘공작님께서 아주…….’

아키스는 아내, 루나에게 딱 달라붙어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지금의 아키스는 알려진 것과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공작님, 잠시 황후 폐하께서 뵙자 하십니다.”

그때, 하인이 다가와 아키스에게 나직이 말했다.

“꼭 지금 가야 하나?”

“머리가 아파 연회에는 참석하지 못하시는데, 내일 행사와 관련하여 의논드릴 것이 있으시다 합니다. 아주 잠깐이면 되신다 합니다.”

아키스는 몹시 못마땅한 표정으로 하인을 보았다. 하인이 움찔했다.

“잠시 쉴 수 있는 곳에 데려다줄까요?”

아키스가 루나를 보며 딴판으로 부드럽게 속삭였다. 루나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아주 잠깐이잖아요? 다녀와요.”

루나는 아키스의 귀에 입술을 바짝 붙이고 간질간질하게 속삭였다. 아키스는 그런 루나를 바라보다가 그녀의 볼에 가볍게 키스했다.

“곧 올 터이니, 조금만 기다려요.”

지켜보던 사람들이 시선을 돌렸고, 귀부인들은 뺨을 붉혔다.

“마리벨 후작 부인이 곧 나올 겁니다. 그분 곁에 있어요. 조금 곤란하게 만들 때는 있어도 잘 챙겨 주시는 분이니.”

“저는 어린애가 아니랍니다. 어서 가세요.”

곧 아키스가 하인을 앞세워 사라지자, 루나에게 말을 걸 기회만 노리고 있던 귀부인과 영애들이 벌 떼같이 접근했다.

“아아, 공작 부인. 이번 책도 정말 잘 읽었어요.”

“전 하룻밤을 새서 읽었답니다.”

“언제 한번 티타임에 꼭…….”

어쩌면 책의 말대로 문화의 힘은 정말 강력한 게 아닐까. 루나의 위신은 두 번의 히트작 출간과 함께 달라진 지 오래였다.

게다가 달리아의 몰락으로 사교계에서 그녀의 영향력이 없어진 상태였다. 이제는 루나에게 들이대는 데 눈치를 보게 만들 사람도 없었다. 루나는 그녀들을 상대하느라 정신없게 되었다.

마침내, 오케스트라가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댄스 타임의 시작이었다. 영식들이 다가와 용기를 내어 하나둘 여인들에게 춤을 신청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야 루나는 여인들의 물결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한숨 돌리던 루나는, 누군가 자신의 어깨에 손을 올리는 걸 느꼈다. 낯선 사내의 큰 손이었다.

깜짝 놀란 루나가 뒤를 돌아보았다.

“이봐.”

어깨에 손을 올린 사내가 루나를 향해 말을 걸었다. 이런 장소에 어울리지 않은 투박한 목소리였다.

루나의 눈이 커졌다. 익숙한 얼굴이었으나 기억하는 것과 행색이 너무 달라 한눈에 알아보지 못했다.

“휘멘?”

그는 붉은색의 곱슬기 있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고 말쑥한 연회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원래 얼굴만은 멀쩡하다 생각하긴 했는데, 오늘은 정말 딴사람같이 보였다.

훤칠한 키와 수려한 그의 외모에 적색의 고급스런 연회복 재킷은 몹시 잘 어울렸다.

루나는 그가 이곳에 나타날 것이라 상상조차 하지 못했기에 순간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저자는 누구죠?”

“처음 보는 사람인 것 같은데.”

수려한 휘멘은 단연 눈에 확 띄었다. 젊은 영애들이 그를 가리켜 수군거렸다.

“휘멘 드 데펜데일이에요. 데펜데일 백작의 아들이요. 사교계에 나타난 건 오랜만이네요.”

“그럼…… 흑마법사요? 그 사람이라고요?”

“그 미쳐버린 흑마법사를 말하는 건가요?”

사람들이 휘멘을 보고 수군대기 시작했다. 이목이 모이자, 휘멘의 루나의 손목을 잡고 조용히 끌어당겼다.

“할 이야기가 뭐야?”

수군대던 소리가 잦아들었다. 사람들이 다 쥐 죽은 침묵하며 루나와 휘멘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루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 바보 같은 남자가. 분명 은밀히 찾아오라 했는데.’

루나는 속으로 탄식했다.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주변에 보는 시선이 너무 많았다.

‘휘멘이 귀족이었나?’

듣기로 이 사냥제는 고위 귀족중의 고위 귀족만 참석하는 자리라 했다. 혹은 그가 고귀한 흑마법사라 온 것인지도 모른다. 마법사는 특권 계급이니까.

“여기선 말 못해요. 그보다, 사람들 보는 시선이 많으니 조금 조심해서 말해요. 예의, 알잖아요.”

루나는 빠르게 소곤소곤했다. 휘멘이 저번처럼 그녀가 수상하다느니 트집을 잡으며 마구 화를 내면 곤란했다.

“또?”

휘멘은 마지못해 그녀를 보다 손등에 키스했다. 루나는 흠칫 놀랐다.

“됐지?”

지켜보던 사람들이 경악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은 루나도 마찬가지였다. 정말이지 환장할 노릇이었다.

‘아니 왜 이런 것만 제대로 기억하고 말을 듣는데?’

사람들의 시선이 더욱더 따가워지기 시작했다.

공작 부인과 그와 상극으로 알려진 흑마법사의 조합이었다. 이대로 휘멘과 비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사라지기라도 하면 수도로 돌아간 후, 온 사교계에서 이 이야기가 돌 것이다.

‘곧 아키스가 돌아올 텐데…… 어떻게 하지?’

때마침 곡이 바뀌었다.

잔잔한 무도곡이었다. 루나는 그대로 휘멘의 손을 잡아서 들어 올렸다.

“내게 춤을 신청해요.”

그녀가 빠르게 말했다.

“빨리.”

“……뭐?”

휘멘은 입을 벌렸다.

그러나 이상하게 이 여자를 거부할 수 없었다. 루나는 그를 끌어당겼고, 휘멘은 어물어물하다 루나의 손을 잡은 채 야외 플로어로 나왔다.

* * *

황가 사냥제 연회 첫날.

사람들은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는 중이었다. 다름 아닌 공작 부인과 공작의 앙숙인 흑마법사가 연회장에서 춤을 추는 장면이었다. 그것도 공작 부인의 첫 춤이었다.

야회 연회장의 중앙에는 꽃으로 장식된 화려한 분수가 하나 있었다. 그 분수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었는데, 루나는 휘멘의 손을 붙잡고 가장 끝으로 빠져 천천히 스텝을 밟았다. 휘멘과 수군대며 대화를 해도 의심 받지 않을 유일한 방법이었다.

“……아직도 내가 남자라고 의심하는 건 아니겠죠?"

“조금은 의심하고 있지. 지금도 매우 수상하거든.”

그렇게 말했지만, 아무 생각 없이 그녀와 춤을 추기 시작하자 달큼한 체향이나, 부드러운 몸이 너무 잘 느껴져서 휘멘도 도무지 그녀가 ‘루’라는 생각은 할 수 없었다.

이 도도한 귀부인이 그 루라니, 제가 생각해도 미친 생각이었다.

루나는 입술을 앙 다물고 휘멘의 발을 밟았다. 휘멘은 앗, 하고 작은 탄성을 냈다. 그리고 이를 갈더니 말투를 고쳤다.

“매우 의심하고 있소만, 증거는 없으니 그러려니 하지.”

“……나는 용기를 내서 경에게 편지를 보낸 겁니다. 용기에 예의로 대답해 줘요.”

루나는 루의 모습을 떠올리며 애써 반대로 행동했다. 조금은 도도하고 오만한 귀부인. 아키스의 아내에 걸맞은 모습.

‘어쩌다 휘멘에게 이런 성격을 가장하게 되었지…….’

루나도 좀 회의감이 들었다.

그리고 루나는 가까워지는 동작에서 휘멘의 귀에 입술을 기울이고 빠르게 속삭였다.

“여긴 어떻게 왔죠?”

“날 믿고 지지한다며? 그래서 오라고 하니 왔지 않소.”

루나는 어이가 없었다.

‘나의 뭘 믿고? 그 말 한마디에 달려왔다고? 그보다 원하면 어디든 나타날 수 있는 건가, 이 사람?’

그러고 보니 루로서 그를 불렀을 때도 한달음에 달려온 그였다.

‘……아니 이 사람 알고 보면 고분고분한 사람인가? 뭐 이렇게 말을 잘 들어?’

댄스곡은 길지 않았기에 빠르게 본론을 말해야 했다. 휘멘이 도대체 왜 그런 멸망론을 주장하기 시작했는지 알아야 했다.

루나가 입을 열었다.

“경, 혹시…… 이상한 꿈을 꾼 적 있나요?”

예를 들면 미래를 볼 수 있는 도서관에 대한 꿈이라든가. 루나는 휘멘을 살짝 떠보았다.

“아주 이상한 꿈 말예요. 예를 들면, 꿈에서 아주 신비한 장소를 봤다거나.”

“무슨 꿈 말이지? 공작 부인이 이상한 여자라더니, 정말 기묘한 소리만 해 대는군.”

기묘한 건 말만 하면 못된 말만 나오는 휘멘의 주둥이였다. 루나는 아키스가 휘멘을 대할 때 느끼는 두통을 이해할 것 같았다.

“그러면 도대체 그 논문은 왜 쓰기 시작한 거예요?”

“합리적 결론과 추론 끝에.”

“근거를 말해 봐요.”

휘멘과의 대화는 항상 팽팽하게 당겨진 밧줄 끝을 붙잡고 있는 것처럼 긴박감이 느껴졌다.

휘멘이 잠시 멈춰 서늘하게 루나를 노려보았다. 주변에서 스텝을 밟던 사람들이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그때, 곡이 바뀌었다.

다들 파트너를 바꾸는 모양이었다. 누가 뭐랄 새도 없이 그들은 자연스럽게 다시 클로징 자세를 취했다.

이번에는 조금 더 느린 곡이 시작되었다. 루나는 이 곡은 좀 더 신체 접촉이 많은 곡임을 떠올렸다.

휘멘이 루나의 등에 손을 올리고 무대 중앙으로 나아갔다.

“유적을 봤지.”

유적이라니? 루나는 숨을 죽이고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 유적에서 몇 가지 자료와 책을 발견했지. 그 유적의 주인인, 아주 오래전 한 학자가 쓴 현재 제국의 마력 상태에 대한 보고서였지. 그 보고서에 따르면 고대인들이 마법을 과용한 덕에 마력장에 문제가 생겨 몇 백 년 후에 큰 문제가 일어날 거라 했고, 계산해 보니 그 몇 백 년 안에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의 범위가 포함되어 있었지. 난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고, 논문을 발표하기 시작했소.”

휘멘은 찌푸린 채 말했다.

“그럼 저번에 우리 저택에 왔을 땐요? 그땐 아무 말도 없었잖아요.”

“그땐 거기서 나온 자료들을 검토하기 전이었고. 아무튼, 더 조사해 볼 필요는 있지만 그 자료들은 모두 일리가 있어.”

루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그가 나와 같은 경험을 한 건 아니군.’

일기장을 통해 미래를 읽게 된 건 저 혼자였다.

“그럼, 그런 명확한 근거도 없는 것 때문에 세상 사람들을 적으로 돌리는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고요? 언제 멸망이 올지 모르는 일이고…….”

“당장 내일이 될 수도 있지. 그리고 난 가능성에 대해 제시하는 것뿐이야. 이제 더 자세한 증거나 세부적인 것들을 수집해야지.”

“정보를 수집한 후 공표하는 게 나았다는 생각은 안 드나요?”

“나 혼자만의 힘으론 부족해. 그러니 그 증거를 모으는 과정을 도울 사람들을 찾기 위해 그런 거요. 그게 바로 마법사의 일이야. 일반인은 보지 못하는 진실을 찾아서 세상을 돕는 것.”

루나는 숨을 들이켰다.

휘멘은 의외로 정확히 춤을 출 줄 알았다. 턴하는 동작 다음에 다시 가까워지며 루나는 휘멘에게 숙이라고 손짓했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파고들지 마요.”

루나는 아주 작게, 빠르게 속삭였다.

그녀는 수십 번을 떠올린 꿈속의 문장을 떠올렸다.

가뭄이 난 것처럼 쪼개진 수도 광장, 수많은 부상자들, 그리고 고아들…… 루나는 그게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근 몇 년 안에 당신이 주장하는 재앙이 와요. 그리고 내 예상으로는…… 그건 아주 큰 사건이에요. 내 생각에 그건…… 지진, 혹은 질병인 것 같아요. 아주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아플 거예요. 하지만 그렇게 되는 연유는 모르겠어요.”

휘멘의 눈이 커졌다.

“어떻게 그걸…….”

휘멘이 루나의 팔을 꽉 붙잡았다.

“자세히 말해 봐. 뭘 어떻게 알았지?”

“아무것도 묻지 마요. 그리고 내 말을 참고해서 8년 안으로 상황을 좁혀 조사를 해 봐요. 사람들에게 충격을 줄 만한 내용은 숨기고 근거를 모아서 가져오면, 아키스에게 협조를 구할 수 있을 거예요. 그가 한 번 마음을 바꾸면 도움이 된다는 걸 알잖아요. 지금은 이것 밖에 해 줄 말이 없어요.”

그때, 루나는 아키스가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옆에는 황태자를 대동한 상태였다.

아키스가 천천히 이쪽을 응시했다.

그리고 아키스는 옆 사람과 무언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이 굳어 있는 것이 멀리서도 보였다.

“내게 연락할 일이 있으면 편집부를 통해 연락해요, 아시겠지요? 급한 연락이 있다면 다시 집으로 연통을 보낼게요. 남편에게 의심 받을지도 모르니 이만 물러나겠어요.”

“이봐. 내 집은 어떻게 알았지?”

“난 공작의 아내예요. 공작은 당신에 대해 잘 알고 있고요.”

곡이 끝나기도 전에 루나가 휘멘의 손을 부드럽게 놓았다. 휘멘은 엉겁결에 루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직 할 말이…….”

그 모습은 외부에서 보기에 휘멘이 루나를 붙잡고 열렬히 무언가를 애원하는 것 같았다.

루나는 휘멘에게 무릎을 굽혀 예의에 맞춰 인사하고 등을 돌렸다.

* * *

“……휘멘이 온다고요?”

“그가 황실 행사에 참석하는 건 오랜만이지.”

황태자는 직설적으로 말했다.

아키스는 황후의 부름에 따라 그녀가 머물고 있는 천막으로 걸음을 옮겼다. 몸이 아프다는 게 사실인지, 황후는 휘장 밖으로 나오지 않은 채였다.

그러나 그녀는 휘장 안에서 묵묵히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황태자의 말이 황후의 뜻임은 깊게 짐작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휘멘이 온다니, 의외긴 했다. 그는 명문가의 후손이긴 하지만 부모가 오래전에 타계한 데다 사교계에 드나들지 않고 외지를 떠돈 지 오래되었다.

‘요즘 들어 기행을 일삼는군.’

아키스는 속으로 혀를 찼다.

“난 보모가 아닙니다, 누굴 달래는 덴 재주가 없지요.”

“흑마법사가 황가도 두려워하지 않는데, 유일하게 그를 두드려 팰 수 있는 사람이 공작밖에 더 있나? 아무튼, 그가 정말 정신이 이상한지 판단해 봐야겠네. 그리고 그게 아니라면 입 좀 다물어 달라고 설득하고. 그놈의 미친 논문들 때문에 마법계부터 대신들까지 아주 시끄럽단 말이네.”

“그가 위험한 짓을 하면 말 그대로 정리해 주죠. 하지만 설득은 황태자 전하의 몫입니다. 알아서 하시죠.”

쌀쌀맞게 대답하는 아키스는 얼른 연회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눈치였는데, 황태자는 어렵지 않게 그가 왜 그러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

“공작 부인이 그리도 걱정되나?”

“쓸데없는 소리.”

아키스는 혀를 찼다.

“아무튼, 내 말 잊지 말게. 알겠지?”

아키스는 귀찮다는 듯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연회장에 돌아가자마자 그는 황태자가 당부한 머릿속에서 날아가 버렸다.

아키스는 황태자와 함께 연회장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루나를 찾았다. 그녀는 연회장 주변의 음식 테이블에도, 연회장 가장자리에도 없었다. 루나를 찾던 아키스의 시선이 천막 중앙에서 춤추는 남녀들에게 멈췄다. 그리고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아니, 흑마법사가 언제 도착했지? 그리고 댄스 파트너가…… 공작 부인 아닌가?”

황태자가 떨떠름하게 말했다.

아키스는 믿겨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잠시 그 이상한 광경을 눈에 담다가 눈을 마주친 영식에게 나른하게 물었다.

“……누구 내게 이 상황을 설명해 줄 사람이 없나?”

분명 아키스는 부드럽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주변 온도가 이유 없이 급속도로 낮아지는 것 같았다. 아키스 주변에 서 있던 귀족들은 알 수 없는 위압감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키스에게 지목 받은 귀족 영식이 더듬대며 말했다.

“그게, 공작 부인께서 흑마법사와 계속…….”

“계속?”

아키스의 매서운 눈빛을 받은 영식이 움찔대며 대답했다.

“……세 곡째 춤을 추고 계십니다. 아까부터 한 번도 파트너를 안 바꾸셨어요.”

뭐라고? 황태자가 눈을 크게 떴다.

“……그래.”

으득. 아키스가 이를 갈았다. 황태자는 그 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벌레가 꼬이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미친놈 중에 미친놈이 꼬여?’

아키스와 휘멘은 비슷한 인간 군상이면서 서로를 늘 미친놈이라 욕하는 사이였다.

그가 그 중간으로 쳐들어가 휘멘을 패대기치기 직전, 그러니까 그의 인내심이 경각에 달했을 때 루나가 휘멘의 손을 놓았다. 아키스가 빠르게 걸어 둘에게 다가갔다.

“루나, 이리 와요.”

아키스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나긋한 목소리와 반대로 눈빛은 휘멘을 갈아 죽이기 직전이었다.

“왜 이자와 같이 있는지 모르겠군요.”

“댄스 타임이 시작되길래…….”

루나가 궁색하게 변명했다.

변명이 무색하게, 아키스는 루나를 감추듯 감싸 안았다. 마치 휘멘의 시선에서 그녀를 감추려는 사람 같았다. 가장 아끼는 보물을 숨기는 어린애 같은 표정 같기도 했다.

“위험하니 어서 이자에게 떨어지세요, 루나. 너무 순진해서 사람을 볼 줄 몰랐나 보네요.”

휘멘은 묘하게 창백한 낯이었다. 평소라면 당장 드잡이질을 하자며 덤벼들고도 남았을 텐데 오늘따라 조용했다.

‘사람 성질을 참 다양하게 거슬러.’

아키스는 휘멘을 서늘하게 노려보았다.

이러다가 백마법사와 흑마법사의 싸움을 보겠다 싶은 황태자가 얼른 앞으로 나섰다. 만일 정말 싸움이 일어나면 이 숲이 날아가고도 남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휘멘, 초대를 했는데 경이 정말 와 줄 줄은 몰랐군. 황후 폐하도 자네 안부를 궁금해 했네. 어째 말도 안 하고 도착했나? 내 궁내부에 이르러 좋은 천막을 준비하라 하겠네.”

“됐습니다, 난 적당한 장소면 됩니다.”

휘멘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루나에게 슬쩍 눈짓했다. 루나는 그 시선을 알아채고 아키스의 품에 기댄 채 그를 달래듯 팔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그를 놓고 황태자에게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오셨군요, 전하. 그런데 휘멘 경과 안면이 있으신가 봅니다.”

“그는 명문가인 데펜데일 백작가의 장남이지. 뭐, 그가 작위 계승을 포기해서 지금은 가문이 비어 있는 상태지만…….”

황태자가 뭐라 말하든 말든, 휘멘은 숫제 루나에게 눈을 못 떼고 있었다.

의문과 관심이 가득 찬 시선이었다. 그걸 보는 아키스의 혈압이 상승했다.

“너무 내 아내를 보지 마라. 닳는다. 네가 보기엔 너무 귀한 여자거든.”

아키스는 부드러운 어조로 경고했다.

그러나 듣는 이의 고막을 묘하게 떨게 만드는 어조였다.

휘멘은 미간을 팍 찌푸렸다.

“뭐야?”

“할 말은 많지만 오늘은 사라져라. 꼴 보기 싫거든. 일단 내 아내에게서 20보쯤 떨어져.”

루나는 휘멘이 팍 성질을 내며 아키스에게 덤벼들지 않을까 긴장했다.

그러나 휘멘은 묘한 데서 분별력이 있는 성정이었는데, 예를 들면 남의 아내와 세 번이나 춤을 춘 것이 잘못이라는 건 저도 알고 있었다.

그는 드물게 꼬리를 내렸다.

“그래, 잘나셨군. 사라져 주지.”

“그래, 하하. 모처럼이니 나와 이야기 좀 하지.”

황태자가 이때다, 하고 가서 휘멘에게 친한 체를 했다.

그가 휘멘에게 몸을 숙이며 속삭였다.

“그대가 요즘 출간하는 논문들에 대해 내가 뭘 해 줄 수 있는지 대화해 보도록 하지. 이리로 오게.”

휘멘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황태자를 따라갔다. 아키스는 루나를 빤히 보았다.

“이걸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아키스가 루나의 허리에 감은 팔을 훅 끌어당겨 거의 안듯이 감싸며 속삭였다.

“설명 좀 해 줄래요.”

그의 목소리가 정수리 위에서 간지럽게 울렸다. 루나는 민망해져서 그를 살짝 밀어냈다.

“사람들이 봐요.”

“대답.”

루나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그냥 저 사람과 나, 둘 다 서로밖에 아는 사람이 없어 춤을 춘 것뿐이에요, 일단은 당신 친구잖아요?”

아키스의 분노 앞에 루나의 변명은 추풍낙엽 같았다.

아키스는 루나의 눈을 빤히 응시했다.

정말 속을 알 수 없는 여자였다. 하고많은 이 수많은 사람 중 흑마법사와 춤을 세 번이나 추다니.

“당신이 나쁜 사람은 아니라 하길래…… 그리고 모두가 미워한다니 조금 가슴 아프기도 하고요…….”

급조한 변명이었다. 말해 놓고도 아무 말이다 싶었다.

“화, 났어요?”

루나가 그의 눈치를 살피며 속삭였다.

아키스는 침통한 신음을 냈다. 안 그래도 너무 예뻐서 남자들이 쳐다보는 게 속 터지는데 이 순진한 여자를 어떻게 해야 할까.

“빨리 둘만 있고 싶군요.”

아키스가 루나의 등을 꾹 누르고 덧그리며 속삭였다. 그녀의 심장이 빠르게 뛰고 피가 돌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 몹시 화가 났거든.”

* * *

아키스는 휘멘과 세 번이나 춤을 춘 일에 대해 더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긴장감 때문인지 루나가 쉬이 피로감을 느끼는 것 같기에 그녀를 감싸고 먼저 연회장을 나왔다. 그들의 뒤로 한 번이라도 말을 붙여 보려던 귀족들의 아쉬운 시선이 따랐다.

연회장에서 대부분의 귀족들이 제대로 식사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각 천막에 따뜻한 야식을 제공했다. 공작 부부의 천막에도 미리 준비된 식사들이 차려져 있었다. 제인은 고용인 숙소에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뭔가 좀 들어요.”

아키스가 루나에게 아직 훈기가 남은 고기 파이를 잘라 접시에 담아 건넸다.

루나는 긴장이 풀어진 탓인지 갑자기 피로와 허기를 강하게 느꼈다. 그녀는 드레스 자락을 정리하며 앉아 조금씩 파이를 먹었다.

“많이 먹어야 할 겁니다.”

아키스가 그녀를 빤히 보며 말했다.

“야회 활동은 체력을 많이 소비하거든.”

그 말이 괜히 묘하게 느껴진 루나는 뺨을 붉혔다. 그녀는 아키스가 권하는 대로 와인도 조금 마셨다.

“제인을 좀 불러 줄래요? 잘 준비를 하게요…… 하인들 숙소에 있나 봐요. 너무 피곤해요.”

루나가 속삭였다.

“아직 오늘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제인은 조금 있다가 부르죠.”

그가 그녀를 일으켰다. 루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늘 저녁 행사는 따로 없다고…….”

“따라와요.”

그가 속삭였다.

“피로를 풀기 좋을 겁니다. 어서 일어나요.”

루나는 아키스의 부드러운 채근에 그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천막 앞에는 작은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마차에 올라타 천막 지대를 지나자 작은 건물이 드러났다. 새하얀 석조 건물이었는데 묘한 유황 냄새가 났다.

“여긴 어디예요?”

“온천입니다. 여독을 풀기에 좋죠. 이곳은 황족만 사용할 수 있는 곳이라 3일 중 황가의 사람들은 번갈아 가며 이곳을 사용합니다.”

“……아.”

황족들이 번갈아 가며 쓰는 곳을 첫날에 차지한 아키스의 위상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의 손에 이끌려 루나는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건물의 문을 열자, 그 앞에는 긴 의자가 놓인 휴식 공간과 탈의실이 있었다. 그 안에 연결된 열린 문사이로 훈기가 나오는 온천이 보였다.

“아키스, 스스로 할 수 있어요…….”

“아닐 텐데. 지금부터는 내 마음대로 할 거라.”

아키스가 속삭이며 빠르게 그녀의 드레스를 벗겼다. 정신 차려 보니 루나는 속옷과 비단 스타킹 차림으로 서 있었다. 그가 그것마저 빠르게 벗겨 내었고, 루나는 뽀얀 알몸을 드러내게 되었다.

루나는 새삼 부끄러워졌다.

아키스가 옷을 벗자 부끄러움은 배가 되었다. 탄탄하고 훤칠한 그의 몸이 건물 안을 밝히는 은은한 조명에 의해 드러났다.

그가 욕의를 걸쳤다. 루나가 그걸 입으려 하자 아키스는 루나를 알몸의 루나를 그대로 안아 올렸다.

“앗, 나도 옷 입을래요.”

“안 돼.”

루나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바로 욕탕으로 들어갈 겁니다.”

“당신, 정말…… 민망하게…….”

그가 문을 완전히 열자, 열 사람은 들어갈 수 있는 커다란 석조 욕탕이 드러났다. 물색이 은은한 녹색이었다.

온천은 처음 와 보는 것이라, 그녀는 구조가 몹시 신기했다. 아키스는 욕의를 벗고 몸을 담갔다. 그녀도 아키스를 따라 수줍음을 느끼며 온천 탕에 몸을 담갔다. 따뜻한 감각이 온몸에 퍼졌다.

“……따뜻해요.”

물 안에 들어서자, 순식간에 긴장이 풀리는 느낌이 묘해서 루나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물이 참 특이했다. 담그기만 했을 뿐인데 몸이 매끈매끈해지는 느낌이었다.

“이리 와요.”

아키스가 루나에게 손짓했다.

무릎에 앉으라는 뜻인 걸 눈치챈 루나가 증기 속에서 뺨을 화악 붉혔다.

“……여기, 황가의 온천이에요. 여기서 허튼 짓을 했다가는 모독죄라구요.”

“황가의 온천인 만큼 매일 청소를 하고 물을 교환하니 걱정 마요. 어서.”

아키스가 루나를 확 끌어당겼다.

따뜻한 물속에서 그의 탄탄한 허벅지 위로 앉게 된 루나는 수줍음을 느꼈다. 그의 온몸이 느껴지자 피가 빠르게 돌았다.

“그런 놈이 닿았으니 씻어야겠군요. 그렇죠.”

욕실 안에서 그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머리 위로 울리는 목소리가 평소보다 남성적으로 느껴졌다.

말을 마친 아키스가 루나의 쇄골에 입술을 묻었다. 따뜻한 느낌이 입술 아래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루나는 가슴이 뜨끔했다. 한 번도 아니고, 아키스가 한 여인과 수군대며 세 번이나 춤을 추면 그녀 또한 화가 날 것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왜 그랬습니까? 나 질투 나게 하려고?”

루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아……. 이런 무도회는 처음인 데다 신이 나서…….”

그녀는 애써 둘러댔다.

“많이 화났어요?”

“네.”

아키스가 짧게 대답했다.

“다른 남자 손잡지 마요. 당신 어깨도, 손도, 눈빛도 허락하지 마요.”

아키스가 속삭였다. 배 속이 오싹할 정도로 아찔한 그의 소유욕이 느껴졌다.

루나는 약간 두려움과 설렘을 느끼며 대답했다.

“……나도 그렇게 할 테니까.”

“알았어요.”

이렇게 날것의 질투를 드러내는 남자가 아키스라고 누가 믿을까.

하지만 그게 싫지 않은 건 그를 너무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루나도 아키스가 다른 여인과 친밀하게 지내는 건 보기 싫었으니.

“당신한테서.”

그가 속삭였다.

“내 체향만 나면 좋겠어요.”

루나의 배 속이 오싹했다. 그가 허벅지를 튕기자 루나는 히익, 하고 숨을 쉬며 물 안에서 그의 상체를 끌어안은 채 목을 꺾었다.

“아!”

갑작스런 감각에 루나는 뺨을 붉히며 교성을 내질렀다. 온천물에 잠긴 하반신이 자신의 몸이 아닌 것처럼 생경하게 쉽게 달아올랐다. 물아래 잠긴 예민한 점막이 화끈해졌다. 그는 그대로 깊게 눌렀다.

루나가 달뜬 목소리로 속삭였다.

“안 돼, 여기선 안 돼요…….”

그녀의 새처럼 가느다란 목덜미가 바르르 떨렸다.

“아키스…… 흣…….”

수면이 출렁였다.

물 안은 따뜻했고 그 안에서 비벼지는 살결 사이에서만 느낄 수 있는 생소한 감각이 일었다.

몸 안으로 들어왔다 빠지는 물은 루나를 긴장감에 부르르 떨게 했다. 음탕한 찰박임이 귀에 얽히고 다리가 물 안에서 더 진하게 얽혔다.

“싫어, 물 밖에서……. 으응, 아키스, 아아…….”

루나는 물기 어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더 참지 못한 아키스가 루나를 달랑 들어 빼냈다. 그가 그대로 루나를 물 안에서 엎드리게 했다. 루나는 물속에서 엉덩이만 내놓은 채 그에게 박혔다.

“으흣, 흐응……!”

고환과 엉덩이 사이가 부딪히며 철썩이는 소리가 울렸다.

“물안에선 당신 안이 더 녹진한 거 알아?”

퍽,퍽. 철퍽.

“어디서 삼켜도 뜨겁지만.”

루나는 숨을 들이키며 울었다. 어느새 살짝 벌려진 입가 사이로 타액이 살짝 샜다. 그리고 다리 사이에서도 뜨거운 꿀물이 끝없이 샜다.

아키스가 앞으로 손을 돌려 루나의 입가를 문지르다 입안으로 손가락을 넣었다. 퍽퍽대며 위 아래 구멍이 동시에 쑤셔진다.

“흐읏, 으응! 읏…….”

“맛있어, 정말, 뜨겁고 달아. 당신은…….”

그는 한참을 루나의 안을 농락하다 내부에 길게 정액을 내쏘았다.

“아직 모자라죠, 그치?”

아키스가 몸에 힘이 풀린 루나를 달랑 안아다 욕실 한쪽에 마련된 방수천이 깔린 침대에 눕혔다.

“계속 봉사해야겠군. 당신 안은 몇 번은 싸야 만족하잖아. 내가 싸는 건 그만해 달라고 하면서-.”

그가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아키스는 루나의 몸 곳곳에 비누칠을 했다. 젖가슴을 돌리고 주무르며 만지고, 배 아래를 문지르고, 수풀을 해치고 비누 거품이 미끌미끌한 손으로 그녀의 아래를 쑤시기 시작했다. 음핵과 질구 안쪽을 동시에 손가락으로 농락하자 찔걱이는 소리가 났다.

“흐응, 이제 그만. 갈 것 같…… 아요…….”

비누거품 질척한 음문이 조여지며 루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왈칵하고 애액이 흘러나왔다.

“미끄러워서 더 감촉이 좋은데, 당신 안은 어쩌면 이렇게 감촉이 좋지. 내 손가락까지 이상해지는 것 같아. 녹진하고, 날 잘 물고.”

아키스가 미성의 목소리로 중얼댔다.

“한 번 더 갈 수 있지?”

그가 그녀의 안을 계속 애무하며 말했다. 루나의 허벅지가 떨렸다. 더운 신음이 욕실을 가득 울렸다.

“아키스, 흐응……! 읏……!”

결국 루나는 손가락만으로 가기 싫다고 그에게 애원해야 했다. 그는 단번에 그녀의 안으로 치밀고 들어와 성기를 쑤시기 시작했다. 욕실 안에 푹푹 박히는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 * *

길고 음욕에 찬 목욕이 끝나자, 루나의 머릿속과 온몸은 엉망진창이었다. 어린애 같은 소유욕과 질투를 드러내며 아키스는 그녀를 오래, 끈질기게도 괴롭혀 댔다.

그뿐만 아니라 물 안팎에서 그녀가 녹초가 되게 만들고는 휘멘과 잡았던 손이며, 춤을 출 때 닿는 등 위로 그는 이를 세워 왔다. 화상이라도 입은 듯 울긋불긋한 자국이 온몸에 피어났다.

결국 온몸에 힘이 풀려 숨을 몰아쉬는 그녀에게 욕의를 입히고 아키스는 그녀를 휴식 공간에 뉘였다.

“정말, 죽겠어요…….”

첫날부터 이렇게 기력을 빼 놓다니. 아키스는 그런 그녀를 집요하게 바라보며 머리카락을 넘겼다.

“싫었어요?”

그녀는 대답 대신 뺨을 붉혔다.

그렇게 매혹적인 얼굴로 사람을 녹일 듯 응시하면 그를 거절할 수 있는 여자가 어디 있을까.

루나는 그의 품에 얼굴을 묻고 자그맣게 고개만 저었다.

“다음에는 이러지 마요…….”

그는 작게 웃으며 알겠다 대답하고 그녀의 등을 어루만졌다. 그러나 둘 다 다음엔 그러지 않을 거라는 그 말을 서로 믿지 않았다.

‘너무 좋아서 미칠 것 같군.’

누군가에게 이렇게 집착하고 애착을 가지게 되는 날이 올 거라 생각도 못했다. 가끔은 주체 못할 만큼 그녀가 좋았다. 그녀를 한입에 베어 물고 맹수처럼 음미하며 하나하나 다 삼키고 싶었다.

이 마음이 사라지는 건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를 온통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으로 만드는 감정. 그녀에 대한 애착.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는 이 상태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조금도…….

각인에 대해 떠올리자 그의 마음속 불안이 피어오르며 소유욕이 솟구쳤다.

결국 혼절하듯 잠든 루나는 그녀는 그의 품에 안겨 천막으로 돌아왔다.

* * *

이튿날, 눈을 떴을 때 루나는 묘하게 머릿속이 맑아진 것을 느꼈다.

무언가가 부드럽게 손을 핥고 있었다. 놀라 눈을 떠 보니 울프가 손을 핥으면서 꼬리를 붕붕 돌리고 있었다.

“……잘 잤니, 울프?”

루나는 울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쟁반을 들고 들어오는 제인과 마주쳤다.

“일어나셨어요? 안 그래도 깨워 드리려 했는데…….”

“지금이 몇 시니?”

루나는 머리를 정리하며 일어났다. 울프는 침대 아래에 얌전히 앉았다.

“이제 오전이 다 끝나 가요. 간단한 식사를 가져왔어요.”

“점심 만찬을 놓쳤구나.”

루나는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피부를 더듬어 보자 온천 덕분인지 반들반들했다.

“내가 잠결에 화장을 지웠나?”

“어제 공작 부인께서 잠드시고, 공작님이 절 부르러 오셨어요. 제가 화장을 지워 드렸고요.”

“내가 그리 정신 못 차리고 잤니?”

루나는 몹시 민망해졌다.

제인이 묘하게 웃었다. 그녀가 왜 그리 정신없이 잤는지 잘 안다는 표정이었다.

“옷은 공작님이 갈아입히셨고요.”

“그건 기억난다.”

아키스가 옷을 갈아입혀 주며 그녀를 침대에 눕히던 것이 떠올랐다.

“그이는?”

“공작님께서는 만찬에 참석하셨어요. 부인께서 워낙 곤히 주무셔서 깨우지 말라 하시더라고요. 어서 식사하세요. 서둘러야 오후 스케줄을 따라잡으실 수 있어요.”

그 말에 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오전 스케줄을 놓쳤는데, 오후에도 제대로 참석하지 않으면 황가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이다.

루나는 그녀는 달콤한 산딸기 잼을 빵에 발라 베어 물었다. 그러다 그녀는 제인이 자신을 묘하게 보는 것을 깨달았다.

“저기 공작 부인…… 괜찮으세요?”

“뭐가?”

“소문을 들었는데…… 저기, 어제 흑마법사가 무도회에서 공작 부인을 기묘한 사술로 홀려서 강제로 춤을 추게 만들었다면서요.”

루나는 머리가 띵했다.

“그건 무슨 말이니?”

뭐라고 말하기도 귀찮았다.

알 만했다. 휘멘에 대해 나쁜 소문이 파다하니, 제인처럼 순진한 시녀들에게는 그가 여기 나타난 것 자체가 공포였을 것이다.

“그 사람은 처녀를 납치한다는데, 하녀들이 오들오들 떨었다니까요. 그런데 그 흑마법사가 정말 소문처럼 잘생겼나요? 전혀 악마처럼 보이지 않는다면서요.”

정말이지 대답할 가치가 없었다. 루나는 고개만 설레설레 저었다.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급히 옷을 갈아입고 몸을 단장하는데 황후의 궁인이 독촉을 하러 찾아왔다.

“공작 부인. 혹시 준비가 되셨는지요.”

밖에서 부르는 목소리에 루나는 머리를 치장을 마무리를 하는 제인의 손길을 받으며 일어났다.

“새 사냥이 곧 시작됩니다. 어서 가셔야 놓치지 않으십니다.”

“지금 나가겠어요.”

루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부인!”

제인이 루나의 발치에 엎드려 있던 울프를 손짓으로 불렀다.

“외출할 때는 꼭 울프를 데려가시라고 공작님께서 전해 달라 말씀하셨어요.”

“왜 자기가 데려가지 않고……. 알겠어.”

그의 사냥을 돕기 위해 데려온 것 아닌가? 루나는 의아해하면서도 울프에게 손짓했다.

울프는 그들의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알아서 루나에게 목줄을 물고 다가왔다. 정말 영특하다 감탄을 하며 루나는 울프에게 목걸이를 채웠다.

* * *

루나는 궁인의 안내를 받아 새 사냥터로 향했다.

“새 사냥은 사냥제의 가장 중요한 행사 중 하나지요. 아시다시피 사냥제 내내 남녀의 낮 일정이 유별한데, 새 사냥은 여인들께서도 함께하는 사냥 중요한 일정입니다.”

루나도 여기 오기 전 페니에게 미리 들어 알았다.

사냥제는 보통 사내들이 숲에 사냥을 나간 동안 여인들은 티파티를 하거나 황가 사람들 외에도 사용할 수 있는 욕탕에서 교대로 온천을 하고 절경을 구경하는 놀음을 한다 했다.

“숲 너머가 동부의 명물인 데이모 폭포입니다. 수심이 아주 깊어 이곳에는 신비한 물고기들이 산다 하죠. 이 숲과 마찬가지로 황가 사람 외에는 포획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안 그래도 천막에서도 계속 폭포 소리가 들리더군요.”

“절경이지만, 밤에는 위험하니 접근하지 마세요. 수심이 깊은 데다 절벽이 몹시 가파르고 잘못하면 빠질 수도 있거든요. 또 이 숲 또한 야생 생물이 많아, 천막 주변 외에는 조심해서 돌아다니시는 것이 좋습니다.”

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울프가 그녀의 옆을 충실한 호위병처럼 뒤따랐다.

“새 사냥터가 좀 멀군요.”

“보면 깜짝 놀라실 겁니다.”

궁인은 루나를 한참을 안내했다. 울프가 충실하게 주변을 경계했다.

이윽고 드러난 사냥터의 정경에 루나는 감탄했다.

“이렇게 큰 나무는 처음 봐요.”

궁인은 루나의 말을 듣고 미소 짓다가 루나가 사람들 사이에 합류할 수 있도록 물러났다.

몇백 년은 살아왔을 낮은 성만큼이나 큰 나무들이 신비로운 위용을 자랑하며 숲의 수호신처럼 솟아 있었다.

하늘을 떠받칠 듯 우뚝 솟은 나무들에서 한참 떨어져 그 앞으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사내들은 나무의 앞에 일렬로 서 있었고, 각자 손에 활을 하나씩 들었다. 아키스도 그 사람들 사이에 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 양산을 쓴 여인들이 옹기종기 서 있었다.

몇몇 영애들이 범상치 않은 체구의 울프를 보고 흠칫 놀랐다. 하인 한 명이 울프의 목줄을 받아 사냥개들이 대기하고 있는 자리로 데려갔다. 루나는 얌전히 있으라는 뜻으로 울프의 귀를 한 번 긁어 주고 보냈다.

황후는 나무에서 가장 떨어진 쪽에 시녀들의 양산 아래 앉아 있었다. 루나는 가장 먼저 황후에게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그녀가 어제 연회에 나오지 않아 처음 보는 황후였다.

“공작 부인이 왔군.”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반갑군. 왜 늦었는지 추궁은 않겠네. 신혼이니까.”

황후는 눈을 반달로 휘었다. 루나는 뺨을 붉혔다.

“이제 공작 부인이 왔으니 되었군. 공작의 파트너를 하면 되겠어.”

“아, 네.”

루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루나는 파트너가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다.

“저기 사내들이 제자리에 일렬로 서 있는 건, 활을 쏘아 새를 사냥하기 위해서네. 그리고 활을 쏠 때 사내 옆에 파트너인 여인이 붙는 것이 규칙이지. 사실, 날아가는 새를 맞추는 사냥은 몹시 어렵기에 숙녀의 격려가 필요하거든.”

황후는 사냥 관전이 처음인 루나를 위해 상냥하게 설명해 주었다.

루나에게 말하는 황후의 부드러운 어조에 시녀들은 은근히 놀랐다. 황후는 타인에게 그리 다정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 그렇군요.”

그 말에 루나는 궁인이 왜 새 사냥이 중요한 행사라는지 바로 이해했다.

날아가는 새를 활로 쏘아 맞추어야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단순히 사냥만 놓고 봐서는 큰 의미가 없는 행사였다.

그러나 미혼 남녀가 둘이 친밀하게 붙어 사내가 바로 옆에서 활을 쏘는 걸 지켜본다면 어떨까.

그러면서 다정하게 이야기도 나누니, 마음이 틀 가능성도 높을 것이다. 황가 사냥제에 참여할 정도면 모두 혈통이 보증된 영식과 영애일 터이고, 그렇기에 몹시 중요한 행사였다.

‘아……. 그래서 페니가 사냥제가 끝나면 혼인율이 올라간다는 말을 한 거였구나. 하여간, 사교계의 핵심은 미혼 남녀의 염문이지.’

루나는 납득했다.

황후가 박수를 쳤다. 그것을 신호로 바쁜 시선이 오갔다.

미리 사냥 파트너를 약속한 사내가 있는 여인들은 그들에게 다가가 옆에 섰고, 채 파트너를 구하지 못한 남녀도 숨 가쁜 눈치 게임을 하며 서로에게 다가갔다.

아키스가 루나를 에스코트하기 위해 다가왔다. 아침에 그의 모습을 보니 새삼 수줍어졌다.

“잘 잤어요?”

“네, 당신은요?”

“아침에 옆에 있어 주지 못해 미안하군요.”

그때, 뜻밖의 인물이 등장했다. 황태자와 함께 휘멘이 등장한 것이다.

황태자와 휘멘이 황후에게 가까이 접근하자 사람들의 눈에 경악이 퍼졌다. 루나는 그가 환영 받지 못하는 존재라는 걸 절감했다 아키스 또한 휘멘에게 시선도 주지 않았다.

‘단단히 기분이 상한 모양이네.’

루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어쨌든 휘멘이 아직까지 여기 남아 있다니 의외였다.

휘멘은 어제처럼 말쑥한 귀족 차림이었다. 그는 입을 꾹 다문 채 평소의 화난 표정 그대로였다.

황태자가 아키스에게 눈짓하고는 먼저 황후에게 다가갔다.

“어마마마, 평안히 주무셨는지요.”

휘멘은 황후에게 예를 맞춰 인사했다. 황후는 조금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인사를 받았다. 그러고는 황태자에게 손짓해 그를 가까이 불렀다.

“어제 밤 내내 휘멘과 술을 마셨다면서? 코가 삐뚤어졌겠구나.”

황태자는 친근하게 말을 걸며 황후에게 몸을 숙였다. 그 순간 황후가 속삭였다.

“흑마법사가 좀 말을 들을 것 같으냐?”

휘멘의 입을 닥치게 하라는 황후의 말에 황태자는 지난 밤 내내 술을 마신다는 핑계로 흑마법사를 어르고 설득한 참이었다.

황태자가 빠르게 눈짓으로 고개를 저었고, 황후는 찡그린 표정으로 입을 가렸다. 마스터급의 마법사는 황가에서도 도무지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황태자가 휘멘을 대동하고 나무 앞으로 다가갔다.

“그래. 그대가 황가 행사에 이렇게 오래 참석하는 건 오랜만이로군. 그렇지?”

“미리 말한 대로, 새 사냥까지만 참석하고 가겠습니다.”

휘멘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좋은 생각이야. 그러면…… 세릴 영애가 파트너가 없나? 휘멘의 파트너를 해 주면 좋겠군.”

황태자는 넉살 좋게 활을 가져오라, 파트너는 누구로 하라, 휘멘의 자리까지 지정해 주었다.

지목 받은 세릴 영애는 두려움에 찬 표정이었는데, 휘멘의 수려한 얼굴을 보자 조금은 두려움이 사그라든 듯했다.

그러나 세릴 영애가 다가오자마자 휘멘은 손을 내둘렀다.

“되었소, 파트너는 필요 없어.”

휘멘이 내뱉었다.

그 말에 세릴 영애의 얼굴이 민망함으로 창백해졌다. 근처에서 보던 루나는 미간을 다 찌푸렸다.

“……조금 더 부드럽게 말씀해 주심이 어떤가요, 경.”

루나는 저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갔다.

그녀는 소녀들이 민망한 꼴을 보거나 곤란한 모습을 당하는 것이 싫었다. 저가 구박데기 소녀 시절을 보냈기 때문이다.

휘멘이 그 말을 코웃음 치거나 비웃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휘멘은 잠시 루나를 거의 노려보는 듯한 시선으로 보더니 세릴 영애에게 바로 사과했다.

“내가 말주변이 없어 오해하게 했소. 무서워하는 것 같기에 배려해 주려 한 거요. 그리고 그대라서 거절한 게 아니라 그 누구라도 거절했을 거요.”

“예, 예에…….”

무시무시한 흑마법사가 뜻밖에 그렇게 말하자, 세릴은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흑마법사를 혼내는 루나를 보고 놀란 기색이었다. 그리고 아키스는 미간을 찌푸린 채 아무 말 없이 그 기묘한 광경을 보았다.

‘도대체 왜 흑마법사까지 공작 부인에게 꼼짝을 못하는 거지?’

그 광경이 생경하기는 황태자도 마찬가지였다.

“자아, 새 사냥을 시작합니다. 모두 위치로!”

마침 한 하인이 크게 외쳤다. 뭐라 말할 새도 없이 아키스는 루나의 손을 잡고 나무 앞에 준비된 자리에 섰다.

어느새 휘멘이 그 옆에 활을 들고 섰다. 정신 차려 보니 루나는 아키스의 가까이에 있었지만 그 옆엔 휘멘을 둔 채 두 남자 사이에 서 있었다.

“무슨 꿍꿍이인지 계속 궁금해지는데, 안타깝군. 내가 계속 관심을 가지는 게 네 신상에 좋은 일은 아닐 텐데.”

아키스가 활시위에 활을 매기며 속삭이며 말했다. 귀가 좋은지 휘멘은 그 말을 바로 알아들었다.

“그래도 너와 나의 인연이 깊으니 너를 홀린 여인이 누군지 궁금해 하는 게 그리 이상하냐?”

“인연을 끊는 김에 네놈 숨도 끊는 것이 좋겠군.”

루나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식은땀을 흘릴 뿐이었다.

휘멘도 활시위에 활을 매긴 채 루나를 곁눈질했다. 불타는 듯한 시선이었다. 루나는 등골이 다 싸했다.

‘내가 어제 한 이야기 때문에…….’

루나가 한 이야기에 휘멘이 깊은 흥미를 느끼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곳은 너무 시선들이 많아, 휘멘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데 용이하지 않았다.

루나의 곤란한 얼굴을 본 아키스가 어조를 바꾸어 부드럽게 말했다.

“루나, 새 사냥은 처음이지요?”

“네.”

“볼만할 겁니다. 스틸본 숲의 새 사냥은 1년에 한 번 있는 행사지요. 놀라지 마요.”

루나는 무엇에 놀라지 말라 하는지 몰랐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신호!”

왕의 하인이 그렇게 말했다.

곧 한 명의 마법사가 앞으로 나섰다. 그가 나무에 근처에서 무언가 주문을 외웠다.

쿠쿵!

나무가 흔들리고 작은 진동 소리가 났다.

‘아, 새를 날아오르게 하려고…….’

루나는 마법사가 나무를 흔든 이유를 깨달았다.

바로 직후, 동시에 100마리는 되어 보이는 큰 새들이 나무에서 솟구쳐 올랐다. 그 모습은 눈보라 같기도 했고, 역류하는 물줄기 같기도 했다. 난생처음 보는 진귀하고 큰, 다양한 종류의 새들이었다.

“발사!”

하인이 큰 소리로 외쳤다.

루나가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 수십 발의 화살이 동시에 발사되었다. 비와 같은 화살이 나무 위로 솟아오르는 새들을 향해 쏟아졌다. 딱 한 발만 궤도가 남달랐다.

“저런.”

황태자는 아키스가 한 행동에 혀를 찼다. 황후도 부채로 얼굴을 가렸다.

아키스는 발사 타이밍에 한 발짝 뒤로 물러나더니 정확히 휘멘을 겨냥해 화살을 쐈다. 휘멘의 근처에 있던 한 영애가 경악해 소리를 질렀다.

“어머나!”

화살은 휘멘의 코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주 아슬아슬한 각도라 그의 머리카락까지 흔들렸다. 더 기가 막힌 것은 그 화살이 새를 맞췄다는 것이다.

폭포 같은 화살비가 끝나자 단 두 마리의 새만 화살에 관통된 상태였다.

휘멘이 잡은 자고새와 아키스가 집은 이름 모를 큰 분홍빛 새였다. 아키스의 새는 놀라 바닥으로 솟구치는 비행을 한 큼직한 놈이었다.

둘 다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신묘한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아키스가 잡은 새는 휘멘의 코앞을 스치고 가 멀리 떨어진 나무에 화살에 관통된 채 처박혔다.

“이 새끼가!”

휘멘이 화살을 내리고 이를 갈았다. 아키스는 코웃음 쳤다.

‘아아, 정말 내 남편이지만 성질 하고는…….’

루나는 머리가 아릿해졌다.

으르렁대는 아키스와 휘멘을 뒤로하고 사냥개들이 달려가 떨어진 새를 물어 왔다.

아키스와 휘멘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황태자가 구령을 외치는 하인에게 빨리 진행하라 입모양으로 지시했다.

하인이 곧바로 외쳤다.

“두, 두 번째 장전 시작합니다! 이번의 오른쪽의 나무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일제히 자세를 바꾸어, 활시위에 활을 매겨 이번에는 오른쪽의 나무를 노렸다.

그사이 영애들은 화살을 집어 주기도 하고 화살에 표를 달아 주기도 했다. 분위기가 살벌한 사람들은 오직 아키스와 휘멘뿐이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화살촉을 향했다.

“둘 다 어린애들처럼 싸우지 말아요.”

루나는 순한 얼굴 가득 화난 표정을 담고 그들을 보았다.

“이럴 거면 난 천막으로 돌아가겠어요.”

둘은 동시에 자리를 이탈해 몸을 돌리는 루나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잠시만, 이봐.”

“루나…….”

사람들의 경악한 시선이 닿았다. 도대체 공작 부인이 어떤 여자기에 이들이 말을 듣게 한단 말인가.

컹컹!

루나가 큰 소리를 내자, 사냥개들 사이에 있던 울프가 튀어나와 크게 짖기 시작했다. 심지어 두 사내를 보며 으르렁거리기까지 했다. 울프의 덩치가 너무 컸기에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왔고, 루나는 머리가 더 아파 왔다.

“울프! 앉아!”

루나의 한마디에 울프는 울음을 뚝 그치고 그 자리에 꼬리를 내리고 앉았다. 사람들은 경이에 찬 시선으로 루나를 보았다.

두 커다란 사내가 루나를 따라가는 모습은 이곳에 있는 모두가 평생 두 번은 못 볼 광경이었다.

“루나, 돌아와요.”

아키스는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왜요, 아예 드잡이질을 하고 싸우시지 그래요? 사람들이 지켜보는 데서 볼만하겠어요.”

“……안 그러겠습니다.”

휘멘을 한 대 패고 싶은 표정은 여전했지만 아키스는 꾹 눌러 참고 말했다.

황태자가 상황을 보러 다가오자, 휘멘은 혀를 찼다. 그러나 루나가 휘멘을 바라보았기에 그도 움찔했다. 이상하게 공작 부인은 무시할 수 없는 여자였다.

휘멘이 사과를 해야 하나 마나 고민하는 사이, 루나가 먼저 쏘아 붙이듯 물었다.

“……경께서는 제게 용무라도 있으신가요?”

루나는 휘멘에게 빠르게 눈짓했다. 알아서 눈치 있게 아키스의 의심을 풀라는 눈짓이었다.

휘멘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저 이전 무례에 대해 사과하려는 생각이었소.”

“알겠어요. 받을게요.”

루나가 딱 잘라 말하자 아키스는 입을 다물었다. 황태자는 그 모습을 보며 소리 없이 경악했다.

‘허 참, 이 가녀린 여자가 두 남자를 아주 쥐고 흔드는군.’

휘멘은 시선을 회피했다.

“……역시 이런 황가의 행사 자리는 내게 어울리지 않는 것 같소. 이만 물러나는 게 좋겠군. 황태자 전하, 황후 폐하께 사과의 말씀을 대신 전해 주십시오.”

루나는 눈치 빠르게 앞으로 나섰다.

“그럼 남편을 대신해 제가 배웅해 드리죠.”

아키스는 칼날처럼 휘멘을 노려보았다.

“꼭 그럴 필요는…….”

“오늘은 당신이 먼저 무례를 저지르셨잖아요. 그에게 활을 겨누셨으니……. 울프, 이리 와.”

루나가 손짓하자 울프가 자리에서 발딱 일어나 루나의 옆에 섰다. 루나는 손에 목줄을 감아쥐었다. 울프가 옆에 있는 걸 보자 아키스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금방 돌아오겠어요.”

루나는 이번엔 아키스를 달래듯 말했다. 어찌나 그녀가 아키스를 잘 다루는지, 그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휘멘.”

아키스가 서늘하게 속삭였다.

“한 번만 더 내 아내의 손등에 키스하면 죽는다.”

루나는 아키스가 누군가에게 어제 그녀가 휘멘의 손등 키스를 받은 걸 전해 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어제 연회장에서 그걸 못 본 사람은 없었으니까.

‘그래서 화가 났군.’

루나는 울프의 목줄을 쥔 채 걸음을 옮겼다. 휘멘이 따라오자 그녀는 아주 작게 속삭였다.

“왜 이러는 거예요? 아키스를 도발해서 뭐가 좋을 것이 있다고.”

“할 말이 있잖소. 내게 해 준 경고는 도대체 뭐지?”

“할 말은 어제 다했어요. 지금은…….”

루나는 말을 멈췄다.

“나도 그것밖에 몰라요. 그러니 당신 이론을 뒷받침할 증거가 필요해요. 그리고 논문 발표도 잠깐은 멈추는 것이 좋겠어요. 근거를 모은 후 사람들을 설득해도 늦지 않아요.”

사실 루나도 일기장을 엿봐 무언가 막연한 일이 일어난다는 것 외에는 아직 잘 몰랐다. 꿈을 더 꿀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녀는 휘멘이 너무 섣부르게 멸망론을 떠들고 다니다 오히려 그 일을 아무도 믿지 않게 될까 걱정되었다.

“……증거는 찾을 수 있을 거야. 이 세계를 둘러싼 마력이나 규칙에 문제가 생겼다면 기현상들이 일어날 테니까. 하늘색이 이상해진다거나 태어날 수 없는 동물들이 태어난다거나.”

“흉조 말이군요.”

루나는 그 말을 하며 속이 서늘해졌다. 마음이 짚이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아키스를 위시한 다른 마법사들을 설득할 수 있다면 가장 먼저 흉조를 찾아내야겠군요.”

“그게 내가 찾는 단서가 되겠지. 그러면…….”

“또 보죠.”

루나가 내뱉었다. 뒤통수에 닿는 사람들의 시선이 따가웠다.

휘멘은 나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냥이 재개된 것은 그 뒤로 10분 정도가 지나서였다.

* * *

불청객인 휘멘이 사라지고 나자, 그제야 하루가 순조롭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새 사냥의 결과,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냥에 실패했다. 그러나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만찬회에 유독 친밀해 보이는 남녀들이 몇 쌍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제국에서 가장 큰 나무라 불리는 스틸본 숲 중앙의 신비한 나무들은 이렇게 일 년에 딱 한번만 사냥하지요. 그러니 사냥하는 자가 없어 새의 개체수가 아주 많아요.”

“알 것 같긴 하네요. 난 사냥은 잘 모르지만요.”

마리벨 후작 부인이 그날 만찬회에서 루나에게 설명해 주었다.

“공작님이 잡으신 분홍빛 새는 아주 진귀한 새이니, 깃털은 보존했다 머리 장식을 만드시는 것도 괜찮겠군요.”

“……그럴게요.”

루나는 아키스에게 두 마리의 새를, 휘멘이 잡은 한 마리의 큼직한 자고새를 선물로 받았다.

정작 받아도 곤란한 선물이었기에 루나는 황가의 사람들과 요리해 먹는 걸 택했다. 만찬회 때 새 사냥에서 잡힌 요리가 나오자 사람들 사이에서 작은 박수가 터졌다.

스틸본 숲에서 남성에서 사냥감을 선물 받는 건 귀부인에게도 매우 명예로운 일이었다. 루나는 많은 여인들의 은근한 부러움을 샀다.

저녁은 테이블에 둘러앉아 식사하는 만찬회였다.

그리고 만찬 내내 루나는 주목의 대상이었다. 황후는 루나를 가까이에 불러 새로 출간한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도대체 어떻게 그녀가 공작은 물론 흑마법사까지 호감을 가지게 만든 건지 비결을 듣고 싶은 영애들이 줄을 서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공작 부부의 비위를 맞추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루나는 익숙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 속에 꽤 피곤하게 하루를 마감했다.

아키스가 사내들과 잠시 술을 마시는 자리에 간 사이, 루나는 먼저 천막으로 돌아왔다. 사람들에게서 해방되자 그제야 루나는 심장이 두근거리며 아까부터 떠오르던 생각을 정리했다.

‘……흉조라고.’

두근거리는 심장이 멈추지 않았다.

휘멘의 말대로라면 일어날 수 없는 일,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면 재앙이 일어난다는 근거라 했다. 루나는 그게 무엇인지 잘 알았다.

‘……고대어의 재능이 개화하는 여인은 태어날 수 없다.’

루나 또한 잘 알던 사실이다.

‘미래에 일어나는 이상한 일. 제국의 재앙. 그리고 흉조……. 만일 내가 그 흉조라면…….’

에리스의 신화가 떠올랐다.

여인이 고대어를 배우지 못하는 이유. 에리스의 후계자가 나타나 이 세상의 근간을 흔든다 했다. 설마 그 단초가 자신인 걸까……?

루나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하지만 이상해. 여인이 고대어를 하는 건…… 그건 잘못된 것이 아닌걸. 내가 하루아침에 에리스처럼 변해 버린다 해도 무슨 능력으로 이 세계를 그렇게 만든단 말이야?’

의문투성이였다. 하지만 마음속의 불길함을 지울 수 없었다. 루나는 침대에 누워 곧게 천막의 천장을 바라보며 숨을 쉬었다.

어째서 이런 능력이 생긴 건지, 그리고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미래를 엿본 건지 루나는 알 수 없었다.

‘언제까지 숨길 수 있을까.’

루나는 눈을 꼭 감았다.

‘아키스가 내가 루라는 걸 알고도 날 증오하지 않는다는 확신. 그게 필요해. 루를 죽이는 걸 포기하게 만들 수 있다는 확신.’

* * *

그날 남자들의 모임에서 돌아온 아키스는 루나에게 새벽에 자리를 비워야 한다는 걸 말했다.

“……오늘 밤이 신전에 가시는 날이죠? 난 안 가도 되나요?”

“괜찮습니다. 직계 황족만 참석하면 되는 행사니까요.”

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나도 미리 언질 들은 바가 있었다.

스틸본 숲에는 오래된 신전이 있어 황족 이상의 사람들은 모두 그곳에서 풍년을 기원하는 기도를 드린다 했다. 다른 귀족들이 잠든 사이 그들이 기도를 올리는, 몹시 중요한 행사였다.

황태자와 황후는 새벽에 잠깐 기도를 하고 오면 되지만, 마스터급의 백마법사이자 공작인 아키스는 스틸본 숲의 마력을 제어하는 정화 행사를 치러야 했다.

스틸본 숲은 서부 사막 지대와 통틀어 제국에서 가장 마력이 강한 지대이기에, 이곳의 생물들은 지나칠 정도로 크게 자랐다. 그래서 마력을 정화하는 백마법사의 의식이 필수였다.

“여기 오기 전, 새벽에 잠깐 자리를 비운다고 하신 건 기억나요……. 아침까지 걸리는 줄은 몰랐네요.”

“이 숲은 마력이 워낙 강해 맹수들이 흉포하지요. 그래서 맹수들을 잠재우는 주문을 거는 겁니다. 그게 동부 사람들의 안전에도 좋고요. 그리 오래 걸리는 작업은 아니고, 늦은 저녁에 나가 동이 트기 전에 돌아오니 당신이 눈을 뜨면 돌아와 있을 겁니다.”

루나는 그가 너무 급박한 일정을 소화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피곤하지 않겠어요?”

“……나는 괜찮아요. 다만 하룻밤 동안 당신 홀로 두고 가는 것이 마음이 걸리는군요. 차라리 황후나 마리벨 후작 부인의 천막에서 밤을 보내고 오는 건 어떻습니까.”

“나는 괜찮아요. 하룻밤뿐인걸요……. 행사가 잘 끝나면 좋겠네요. 황후 전하께서 이번에는 3대 명문가의 두 가문이나 참석하지 못해 풍요를 기원하는 사냥제가 퇴색될까 걱정하고 계셨거든요.”

페니는 나이 든 친척이 돌아가셔 급하게 지방으로 내려가느라 가족 단위로 참석하지 못했고, 라미라 가문은 외동딸이 미쳐 버린 충격으로 사교계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했다.

“새벽에 꼭 돌아오겠습니다. 약속하죠.”

“그래요.”

루나는 아키스의 입술에 키스했다. 그리고 그를 한번 꼭 끌어안았다 놓았다. 루나는 한층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기분은 좀 풀리셨나요, 공작님?”

“기분……?”

“질투하셨잖아요. 휘멘에 대한 일요.”

아키스는 그녀가 사랑스럽게 웃으며 말하는데, 기분이 이상해졌다.

질투.

맞았다, 자신은 질투하고 있었다.

그녀는 가끔 자신의 심장을 빨간 불로 태웠다가 다시 빚어 만드는 마법사 같았다. 이 기분은 격렬하기도 하고 또 불안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격렬한 만큼 달콤했다.

“당신이야말로 나 때문에 화난 것 아니었나요?”

“아까야 그랬죠. 하지만 내가 당신에게 어떻게 화를 내나요. 다른 분도 아니고, 공작님이신데.”

그녀가 미소 지었다. 참을 수 없이 고맙고, 또 사랑스러웠다. 그녀는 정말 이해심이 많았다.

아키스는 종종 루나가 행복해 웃는 건지, 슬픔을 감추기 위해 웃는 건지 궁금할 때가 있었다. 그녀의 불행한 어린 시절을 너무 잘 알아 그런지도 몰랐다.

‘……결론을 내야 해.’

그는 요즘 울적했다. 꽃이 계속 생겨나 그의 팔을 뒤덮어 가는 걸 보면서 반쯤 미치지 않은 게 신기했다.

그의 인생은 순식간에 매달렸고 뒤흔들렸다. 자신의 것이 아닌 손에 갇혀 흔들리는 인생을 보는 건 초조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결혼의 기한인 2년도 서서히 다가왔다. 그런 상황에서 그녀에 대한 마음을 점점 직면해야 할 때인 것이다.

휘멘의 도발은 아키스의 마음에 도화선이 되었다.

‘각인이 완성되어 내가 타인을 사랑하게 되면, 내가 아이를 줄 수 없는 걸 그녀가 알게 되면…….’

모두 불편한 진실이지만, 그녀는 알 권리가 있었다. 동시에, 그가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그녀는 알 권리가 있었다.

그는 그녀의 눈을 보며 그 순간 다짐했다. 그녀에게 모든 걸 고백하고 자신을 선택해 줄 수 있냐 묻겠다고. 그리고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각인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겠다 약속하겠다고.

“루나, 기억 합니까? 내가 만일 다른 사람처럼 차갑게 변하면 어떻게 할 거냐 물은 적이 있죠.”

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해변에서 그가 그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그 뒤 종종 그 질문이 떠올랐다.

“그때 당신은 좋았던 시절을 떠올리겠다 했죠. 그 마음은 변함이 없습니까?”

“변했어요.”

루나는 작게 웃었다. 아키스는 그녀에게 고개를 기울였다.

“변하다니?”

“과거를 생각하고 있지 않을 거예요. 만일 당신이 나를 냉대하게 되면 강압적인 방법을 쓰든, 뭘 해서라도 당신 마음속에 나를 하나하나 채워 넣을 거예요. 그럼 언젠가, 당신 안에서 난 다시 중요한 사람이 되겠지요.”

아키스는 맥이 풀렸다. 그는 그냥 작게 웃었다.

‘내 마음은 나의 것이니.’

그 각인이 무엇인지 몰라도, 꽃이 심장에 닿을 때까지 피한다고 해도 그녀에 대한 이 마음이 사라지는 건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렇군요.”

아키스는 나직이 말했다.

“……당신이 있으면 극복하지 못할 일이 없겠습니다. 당신은 그런 여인이니까.”

혼란스런 마음이 진정되었다. 아키스는 그녀의 손등을 어루만지고 키스했다.

“갔다 오면 할 이야기가 있어요.”

그가 속삭였다.

“저택으로 돌아가면 둘이 이야기를 좀 합시다. 중요한 이야기예요.”

루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그녀는 마른침을 삼켰다. 흉조, 그리고 자신의 과거. 다가오는 시간들…… 그녀는 눈을 감았다 떴다.

그에게는 자신을 다시 채워 넣겠다 했다. 그러나 그건 앞으로 루나가 아키스와 계속 사는 것을 선택했을 때의 일이다. 행복해서든, 불안해서든 더는 도망칠 퇴로가 없었다.

그가 자신이 기다리던 말을 해 준다면, 그렇다면…….

그녀는 감았던 눈을 떴다.

“나도 할 말이 있을 것…… 같아요. 다녀와요.”

아키스는 그녀를 한 번 끌어안고 등을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울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명했다.

“오늘 밤에 천막 안에서 자라, 울프.”

* * *

아키스가 떠나고, 루나는 일찍 침대에 들었다.

“저어, 공작 부인.”

잠옷 차림으로 누워 있는데, 제인이 천막으로 들어왔다. 루나가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이니?”

“저…… 방금 궁내부의 하인이 왔어요. 울프가 있는 것이 신경 쓰인다는 귀부인들의 항의가 많이 들어왔다고 해요…….”

제인은 머쓱한 표정이었다.

“직접 와서 그리 말하니?”

“네에. 하인이 제 숙사까지 찾아와 그리 말씀을 올려 달라 청하더랍니다.”

루나는 작은 한숨을 쉬었다.

울프가 엄청나게 커다란 아이라는 건 잘 알았다. 개를 무서워하는 사람은 이런 늑대만 한 개를 보면 기겁하리라.

“내 천막 안에서 재우는데, 그것도 곤란하다 하니?”

“개를 몹시 무서워하시는 귀부인 중 한 분이 밤에 개가 날뛸까 무서워 우셨다고 해요. 신경 쓰여 한숨도 못자겠다고…… 오늘밤이라도 사육사들에게 보내 주실 수 없냐 하더라구요.”

그렇다면야 어쩔 수 없었다. 규칙이었으니까.

루나는 제인에게 사람을 불러 울프를 동물 숙사에 데려다주라 했다.

“울프는 착한 개이니, 조심해서 다루고 잘해 주라 전하도록 해. 절대로 그 애의 몸에 손을 대지 말라고도 전하고.”

“네에.”

제인이 울프를 데리고 가자, 울프는 그날따라 서글프게 울며 루나에게 비벼 댔다. 루나는 울프를 달래느라 애를 먹어야 했다.

“착하지, 울프. 이제 곧 일정이 끝나니 낮에는 계속 같이 있을 수 있단다.”

겨우 울프를 달래 하인의 손에 들려 보냈다. 그러고 나서야 밤의 침묵이 찾아왔다.

루나는 침대에 누워 천천히 눈을 감았다. 천막 주변을 병사들이 순찰하는 소리를 들으며 루나는 천천히 잠들었다.

바스락.

잠에 들었던 루나는 새벽녘에 눈을 떴다. 낯선 인영이 천막 안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누구……?”

그 인물이 한 발짝 더 다가왔다.

루나는 비명을 삼켰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칼날을 본 탓이었다.

* * *

한 달 전.

루나가 남장을 하고 고서점에 드나들었다는 걸 알게 된 후, 새틴은 반쯤 정신을 놓아 버렸다. 울화병이 난 그녀는 혼자 미친 듯이 울었다가 정신을 차렸다가 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조차 실레노스의 기행들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도대체 언제 루나, 그년의 비밀을 터뜨릴 생각인 거야?’

실레노스는 루나와 아키스를 꼼짝 못하게 할 비밀을 알아내고도 지금까지 그 사실을 함구했다. 그러고는 새틴을 데리고 스틸본 숲으로 왔다.

스틸본 숲에 온 후, 그는 한 달 동안 곳에서 알 수 없는 행동들을 했다. 절벽 앞에 서서 중얼중얼 혼잣말을 하기도 하고, 또 밤새워 한자리만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어느 바닥에 글씨 같은 것을 쓰기도 했다. 그것이 일종의 마법이라는 걸 알게 된 건 한참 후였다.

그리고 한 달째 되는 날.

사람들이 스틸본 숲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새틴과 실레노스가 숨어 있는 숲 맞은편의 야영 지대에 천막을 치고 여러 가지 행사 준비를 했다. 새틴과 실레노스는 숲속에 숨어 그들의 모습을 몰래 지켜보았다.

“왕의 사냥 행렬입니다.”

실레노스가 새틴에게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우리의 사냥감은 공작 부부가 될 거고요. 우리도 사냥에 참가하게 되는 것이죠.”

실레노스의 말은 이러했다.

어차피 정정당당하게 싸움을 해서 공작을 이길 가능성이 없으니, 덫을 파고 기다리자는 것이었다.

사냥제에는 황가의 사람들은 물론 공작가의 사람들이 반드시 참석하므로 사냥제 기간 동안 공작을 유인해 내 일을 치르자는 것이었다.

“정말 공작을 죽이겠다고요?”

“네.”

“황족들이 오면 호위병을 끌고 올 거예요. 사냥제는 위험해요.”

“우린 황후나 황태자를 노리는 게 아닌데요.”

“공작을 공격하면 그들이 우리를 가만 두겠어요?!”

“그럴 때를 위해 비밀이 있는 거죠. 공작 부인을 끌어 낼 패가 있으니, 작은 사냥감을 사로잡으면 큰 사냥감도 자연히 따라오겠지요.”

실레노스가 속삭였다.

“내가 공작을 이기는 방법은 딱 하나입니다. 내가 원하는 위치로 공작을 끌어내 덫에 걸리게 하는 거요. 스틸본 숲은 최상의 마력 환경을 가졌죠. 여기서는 아무리 하찮은 마법진을 펼쳐도 위대한 마법이 된답니다.”

“……이곳이 신비한 곳이라는 건 들어서 알고 있어요. 그럼 제 역할은요?”

“공작 부인을 처리하는 역할이지요! 그걸 위해 온 거잖아요!”

실레노스는 유쾌하게 외쳤다.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할 겁니다.”

실레노스는 능숙하게 속내를 감췄다.

그가 하등 쓸모없는 새틴을 이곳까지 데려온 이유가 있었다. 공작 부인을 차지하고 아키스를 죽인 후, 그 죄를 새틴에게 뒤집어씌우기 위해서였다.

‘과거의 약혼자를 죽이고 자살한 옛 약혼자라. 그림이 되니, 길이길이 남을 치정 사건이 되겠군.’

그는 아키스에게서 자신의 마력, 즉 마력 공간을 돌려받고 나면 공작 부인을 납치해 끌고 갈 생각이었다.

그리고 루나를 느긋하게 요리하며 실험하고, 또 필요하면 그녀를 내세워 공작가의 재산을 약탈할 생각이었다. 공작에게 아직 자식이 없으니, 공작 부인을 제 것으로 만들면 자연히 남은 유산도 제 손에 떨어지리란 심산이었다. 새틴은 그 야망을 위한 도구였다.

그런 속내를 모르는 새틴은 숲속의 은둔 생활이 길어지자 점차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이봐요, 실레노스. 도망칠 때 나를 꼭 데리고 가 주어야 해요. 알죠? 내가 준 돈도 받았잖아요.”

“물론이지요.”

실레노스는 그런 새틴을 몹시 무시하면서도 겉으로는 웃으며 사냥을 해 식사를 대접하고 챙겨 주었다.

‘멍청한 년……. 미친 주제에 말은 많군.’

하지만 새틴이 자신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하지 않기 위해 종종 그녀의 정신이 혼미해지는 마법을 걸었다. 그녀의 화병은 그래서 더 심각해지고 이윽고 루나를 반드시 해코지하겠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하게 되었다.

‘누구나 때가 있지. 드디어 내게도 기회가 오는군.’

그는 일생 동안 모은 주문들을 전부 사용하기로 했다.

현대의 마법사들은 고대의 마법사와 달랐다. 가진 주문을 다 사용하면 그걸로 끝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고등 마법을 창조해 낼 수 없었다.

실레노스의 마법은 공작에 의해 상당수 봉인된 상태기에 그는 스스로의 목숨을 소진시키는 마법을 쓰기로 했다. 그의 마력 허용량을 넘어, 생명을 불태울 만큼.

‘공작을 죽이고 내 원래 공간을 돌려받으면 얼마든 새 주문을 구할 수 있어.’

그러던 와중, 드디어 기회가 온 것이다

“마법을 쓰다 죽을 수도 있다고요?”

실레노스는 새틴의 물음에 평화롭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당신이?”

“몇 번을 설명합니까. 오늘 안에 내가 공작을 제압하는 데 성공하면 난 살고, 그러지 못하면 죽습니다. 내 목숨의 한계까지 마법을 사용할 거니까요.”

“이해가 안 되는데요.”

“당신이 이해할 필요가 없죠.”

실레노스는 새틴을 불쌍한 것을 보는 눈으로 보았다. 마법사 우월주의자인 실레노스에게 새틴은 불쌍한 개나 벌레나 다를 바 없었다.

실레노스는 이전 아키스와 휘멘의 애제자였을 때가 있었다.

아키스는 고작 열일곱 살에 마스터급의 마법사가 되었다. 공작가의 사람들은 대대로 백마법사였는데, 그는 열일곱 살에 처음으로 아비를 대신해 스틸본 숲을 다스리는 제사에 참석했다. 그 후 매년 행사를 치르고 왔다. 그가 예전에 휘멘과 이야기하는 내용을 엿들었다.

공작은 스틸본 숲의 행사 중 하룻밤을 고대 신전에 들어가서 지새고 온다 했다. 그는 숲의 마력을 정화하는 작업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분명히 하룻밤은 공작이 숙소를 비울 것이다.

고위 귀족들은 스틸본 숲의 사냥제에 참석하며 각기 시종을 데려왔다. 물론 경비병들은 엄중했지만, 수많은 시종들 사이에 섞여 막사 주변을 돌아다니는 정도는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둘째 날 밤, 공작이 신전으로 향했다. 공작 부인을 이용해 공작을 유일한 기회는 오늘이었다.

새틴은 멍청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만일 당신이 죽으면, 나는요? 실패하면…….”

“이봐요, 실패하면 어차피 우리 둘 다 죽습니다.”

이 여자는 어쩜 이렇게 멍청하단 말인가. 실레노스는 쯧, 혀를 찼다.

“목숨을 내걸고 여기까지 온 것 아닙니까? 아니면 지금이라도 도망쳐, 그 증오스런 공작 부인이 호의호식하며 잘사는 모습을 평생 지켜볼래요? 뭐든지 하겠다는 말은 다 허세였습니까?”

그 말에 새틴의 눈에 독기가 서렸다.

도망가 봐야 비렁뱅이 생활에 다 죽어 가는 빚투성이 부모, 집 같지도 않은 헛간 같은 집만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새틴은 이를 아득바득 갈았다.

“……아뇨, 아니에요. 그년을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좋은 각오입니다. 그럼 이제 공작 부인을 만나러 가죠.”

실레노스가 씩 웃었다.

실레노스는 자신을 황가의 하인으로 가장해 공작 부인의 하녀를 찾아갔다.

“공작 부인이 데리고 있는 큰 개에 대해 귀부인들의 항의가 들어오고 있습니다만…….”

그리고 공작 부인 주변을 맴도는 영물, 키메라를 치우는 데도 성공했다.

거기다, 스틸본 숲에는 맹수들이 살았다. 맹수들은 깊은 숲속에서 거의 나오지 않는다 알려져 있었지만, 그래도 황가 사람들이 오는 사냥제에서는 경계 대상이었다.

스틸본 숲의 경비병들은 맹수를 우선 경계하지 사람을 경계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절호의 찬스였다. 실레노스는 어렵지 않게 천막 주변을 수비하는 병사들을 재웠다.

새틴과 실레노스는 야음에 공작 부인의 처소로 침입했다.

* * *

“거기, 누군가요.”

루나는 어둠 속에서 낯선 그림자를 보았다. 그 그림자는 루나에게 쏜살같이 접근했다.

“읍!”

순식간에 입이 막혔다. 사내의 억센 손길이었다. 그리고 그 사내는 루나를 침대에 꽉 누른 채 밧줄로 단단히 양손을 묶었다. 침대가 들썩였다.

“조용히.”

사내가 뭔가 주문을 중얼대자, 루나는 억센 손길이 그쳤음에도 입을 옴짝달싹 할 수 없었다. 상대는 마법사였다. 그녀는 눈을 크게 떴다.

“고분하게 굴어야지, 공작 부인.”

그 사내가 속삭였다. 그러면서 루나의 목덜미를 꽉 누르며 뭐라고 한마디 더 중얼거렸다. 루나는 그것이 덫이라는 뜻의 고대어라는 것을 알아들었다.

‘아…….’

갑자기 루나는 온몸에 천근 쇠가 달린 듯 몸을 도무지 움직일 수 없었다. 아무리 움찔거려 봐도 온몸엔 식은땀만 흐를 뿐이었다.

천막의 어둠 속에서, 루나는 혼란스런 와중에 사내의 뒤에 한 명이 더 있다는 걸 깨달았다. 체구가 작았다. 잠에서 깬 루나가 처음 본 번뜩이는 칼날을 가진 상대였다.

칼을 든 이가 그녀가 다가왔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있던 작은 램프를 켰다. 루나의 눈이 커졌다.

새틴이었다. 남루한 꼴에 거친 피부, 비쩍 마른 몸이었지만 분명히 그녀였다.

“한마디도 못할 겁니다.”

“아예 혀를 자르는 게 어떨까요.”

새틴이 간악하게 속삭였다.

“그건 천천히 생각해 보죠.”

이름 모를 사내는 피식 웃었다.

‘데리고 살지도 모르는 여자인데 벙어리보다는 아닌 게 낫지.’

실레노스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건 일단 잡아 가서 의논해 봅시다. 공작 부인, 아주 얌전하군요. 좋아요. 역시 품위 있는 귀부인은 다르군요.”

새틴이 칼날을 루나의 뺨에 비볐다. 서슬 퍼런 독기가 풍기는 그녀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날 그렇게 기만하고 우롱하고, 불륜을 저질러 우리 집안을 망하게 하고, 기분이 좋았니, 응? 그간 날 바보 취급하고 호의호식하며 기분이 어땠어? 말해 봐, 루나.”

새틴이 악취가 나는 몸을 숙여 중얼댔다.

“난 항상 네 얼굴이 꼴 보기 싫었어. 먼저 얼굴부터 그어 줄게.”

“그만, 멈춰요.”

루나의 뒤에 선 사내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언제 사람들이 몰려올지 모르니 쓸데없는 짓하지 마요.”

“어차피 죽을 년인데 무슨 상관이에요.”

“안 됩니다. 공작은 유인하고 죽여야 하니까. 얼굴이 엉망이 되면 공작이 그냥 내버려 버릴지도 모르잖습니까.”

새틴은 잠시 입을 다물고 루나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눈빛이 흉흉했다. 정신이 나간 사람이 따로 없었다.

“죽기 직전에 맘대로 가지고 놀게 해 주죠. 그러니 지금은 참아요.”

루나는 안간힘을 다해 몸을 뒤틀었다. 그녀는 경비병들을 부르기 위해 큰 소리를 내기로 했다. 천근 같은 몸을 간신히 움직인 루나는 어깨로 램프를 떨어뜨렸다.

“이런.”

그러나 램프가 바닥에 떨어지기 전, 허공에 멈췄다. 루나의 눈이 커졌다.

“어떻게 내 마법에 저항했는지 몰라도, 마법사를 너무 우습게 보는 것 아닙니까.”

그때, 루나는 그와 눈을 마주쳤다.

아주 순간의, 정신을 잃기 전의 일이었다……. 그 눈은, 언젠가 한 번 본 적 있는 것 같은 새파란 눈동자였다.

사내가 루나의 뺨을 세게 때렸다. 그녀는 재갈에 입이 막혀 비명을 지르지도 못했다.

그는 루나의 뒷덜미에 손을 뻗었다. 뒤통수에 강한 충격이 왔다. 루나는 순간 혼절했다. 마지막으로 루나가 들은 건, 사내의 수군대는 목소리였다.

“멀리가지 않을 겁니다, 그분을 기다려야 하니.”

결국 루나가 혼절하고, 그는 쓰러진 경비병들을 천막 안으로 끌어왔다.

“경비병들은 이틀은 푹 잘 겁니다. 그럼, 이제 공작이 쫓아 올 수 있도록 메시지를 보내면 되겠군요.”

그가 속삭였다.

그리고 실레노스는 루나를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기쁜 듯 실실 웃었다.

“그 사람만 알아볼 수 있는 메시지 말입니다.”

-6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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