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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부터 휘황찬란하더니, 내부는 말할 것도 없다. 무뚝뚝한 표정으로 서있는 근위병들만 아니면, 마치 천국의 성에 온 기분일 것이다. 시종의 안내를 받아 한참 걸어가자, 거대한 문이 보인다. 금색으로 칠한 용 두마리가 서로를 휘감고 있다. 시종이 근심어린 표정으로 나를 뒤돌아본다.
" 다 왔습니다, 왕자님. 부디.. "
뒷말을 흐렸지만, 무슨 말을 할지 느낌이 온다. 함부로 날뛰지 말란 소리겠지. 그럴 생각도 없지만, 내 위트정도는 상관없겠지? 문을 활짝 열고 식당으로 들어갔다.
어마어마하게 긴 탁자 저멀리로 왕관을 쓴 늙은이가 보인다. 양 옆에 두 명의 미녀가 있는데, 분명히 새 왕비와 백설 공주라고 생각했다.
약간 성숙하고 농염한 모습에 붉은 드레스를 입고 있는 여인이 아마도 자신의 어머니인 새 왕비리라. 이름은 아직 모른다.
그녀의 앞쪽에 앉아있는 청순한 금발머리 여인이 바로 백설 공주겠지. 입이 약간 벌려질 정도로 예쁘다. 네임드 캐릭터가 왜 '네임드'인지 알 수 있는 상황이다.
왕비도 네임드겠지. 자신의 어머니이지만, 공략 가능하다는 소리와 마찬가지다. 공략 가능하다고 무조건 육체적인 것만 따져서는 안된다.
아마도 모자 관계의 정을 이용할 수도 있는 모양이다.
" 아바마마. 아침 인사를 올립니다. "
무언가 말하고 있지만, 들리지 않는다. 손짓을 하는 것을 보니, 다가와라는 소리인가보다. 나는 천천히 걸어가 백설 공주의 옆자리로 다가갔다.
" 갈리브. 오랜만에 보는구나. 얼른 식사하도록 준비해라. "
" 예, 아바마마. "
나는 왕비를 보고 눈인사를 했다. 그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까이서 보니 더 날카롭게 생긴 미녀다. 냉기가 풀풀 날리는 것을 보니, 아마도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는 모양이다.
그것이 자식인 '나'라고 할지라도. 식탁의 배치를 보니, 왕비 옆에 식기가 놓여있었다. 아마도 내 자리가 저기였던 모양인데,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내가 고개를 돌려 백설 공주를 보았지만, 그녀는 미동도 하지않고 무표정한 모습으로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내가 옆에 대기하고 있는 젊은 시녀를 불렀다.
" 여기에 식기를 준비해줘. "
" 무슨 일이니? "
왕비가 입을 열었다. 약간 싸늘한 목소리다. 내가 백설 공주의 옆에 앉는다는 시늉을 하자 약간 기분이 이상한 모양이다.
백설 공주도 약간 인상을 쓰며 고개를 돌렸다. 시녀가 내 앞에 식기를 놓고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왕비와 공주에게서 뿜겨져 나오는 기운을 받아들이기 힘든 모양이었다. 물론 나도 약간 찌릿찌릿한 느낌을 받고 있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기운이 나에겐 이상야릇한 쾌감이 되고 있다.
" 별 뜻은 없습니다, 어마마마. 단지, 누이와 같이 앉고 싶어서 말이죠. "
백설 공주를 바라보다가 눈을 내려보니, 그녀가 손을 무릎에 놓고 강하게 옷을 꽉 쥐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약간 입술을 깨물고 있는 것을 보니, 무언가 분한 모양이다.
내 예상대로 나와 사이가 좋지 않는 것 같다. 이상하게도 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예뻤다. 아니, 정말로 내가 이상해서가 아니라, 그녀는 정말로 예쁘다.
그 말 한마디로 그녀의 모습을 말할 수 있었다. 어디하나 흠잡을 데가 없을 정도로 완벽하다.
" 좋지. 좋구 말구. 허허. "
왕은 왕비와 공주의 모습이 눈에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상당히 둔하다. 그러니, 저런 차가운 왕비를 두었는지도 모른다. 아마 내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는지, 음식이 이제 막 들어오기 시작했다. 간단하게 구운 오리 고기를 비롯하여, 빵, 과일.. 정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음식들이 식탁을 가득채웠다.
" 어서 먹도록 하자. "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긴 식탁에 있는 음식들이, 나중에 시녀나 시종들이 먹는다고 한다. 처음에는 그 사실을 모르고 아깝다고 생각했지만, 무리하게 먹을 생각은 없었다. 어쨌거나, 난 일단 품위를 지켜야하는 왕자이기 때문에.
" 전, 이만 일어나도록 하겠습니다. "
" 무슨 일이니? "
" 속이 안 좋아서요, 어..마마마. "
목소리가 딱딱하다. 백설 공주는 정면으로 왕비를 노려보고 입을 열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백설공주는 이런 성격이 아니었는데. 여기선 그 연약하고 순수한 공주의 이미지는 아닌가보다.
" 흠, 그럼 먼저 가보도록 해라. 정 속이 안 좋으면 의원에게 가보도록 해라. "
왕이 입을 열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이다. 백설 공주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 밖을 나갔다. 나이스 타이밍이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나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 아바마마, 어마마마. 제가 공주를 의원에게 데리고 가겠습니다. "
" 그래? 그럼 그러도록 해라. 허허, 보기가 좋구나. "
왕은 정말 즐겁다는 얼굴로 웃었다. 왕비의 얼굴이 더욱 굳었다. 무슨 속셈이냐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나는 싹 무시하고 몸을 돌려 식당을 나왔다. 벌써 어디론가 가버렸는지, 백설 공주가 보이지 않는다.
" 마크! "
" 아, 왕자님. "
" 백설 공주가 어디로 갔지? "
" 정원 쪽으로 가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만? "
" 그리로 안내해. "
마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와 공주가 그리 사이가 썩 좋지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 마크였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마크가 다리를 놀렸다. 그 짧은 다리로 용케 뽈뽈 거리며 빠르게 가는 것을 보니 그에겐 시종이라는 자리가 딱 맞는 천직인 느낌이 든다. 언제부터인지 꽃냄새가 솔솔 풍기기 시작했다.
" 여깁니다, 왕자님. "
" 잠시 밖에서 대기해. "
시녀들이 나를 보고 수근거렸다. 아마도 백설 공주의 전용 시녀일테지. 뭐라고하든지 상관없었다.
문을 열자 환한 햇살과 함께 백설 공주가 눈에 보였다. 반짝이는 금발과 흰 피부, 붉은 입술이 어찌나 내 마음을 진탕시키는지, 그 자리에서 덮쳐버리고 싶은 충동으로 휩싸였다.
물론 보는 눈이 많아 그러기는 힘들었다. 이상한 낌새에 공주가 고개를 돌린다.
그녀의 두 눈동자가 흔들렸다. 백설 공주가 벌떡 일어서며 드레스를 살짝 털었다.
못 볼 껄 봤다는 얼굴로 인상이 찌푸려지며 그녀는 황급히 그 자리를 피하려고 다리를 움직였다.
- 탁
내가 공주의 팔목을 잡자, 그녀가 불쾌하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이거 미움을 단단히 사고 있는 모양이다.
" 할 말이 있는데. "
" 놓고 말해. "
공주가 강하게 손을 뿌리치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사랑스러워 보인다. 내가 아주 단단히 그녀에게 빠져버린 모양이다. 그래봤자 게임 속 캐릭터에 불과하지만.
" 왜 날 그렇게 미워하는거지? "
" 하, 몰라서 물어? "
" 제대로 설명해보지? "
백설 공주가 날카롭게 나를 노려본다.
" 똑똑히 잘들어. 무슨 속셈으로 너와 그녀가 이 궁전으로 들어온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끝까지 두고 볼거야. 우습게 보다간 큰 코 다칠껄? "
" 후후. "
" 웃어? "
그녀가 팔짱을 끼고 입꼬리를 올린다. 상상했던거와는 너무 다르다. 하지만, 신선하다. 백설 공주가 이런 캐릭터로 변했다니.
" 만약에 말이야. "
내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간다. 그녀의 얼굴이 약간 변한다. 두 눈썹이 모이며, 고운 이마에 내 천(川)이 새겨진다. 내가 그녀의 귀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 입을 열었다.
" 그 속셈이 너라고 하면 어쩔래? "
" !! "
- 짝
내 고개가 홱 돌아갔다. 꽤 강하게 맞아서 입안이 얼얼하다. 입으로 몇번 아에이오우를 중얼거리며 볼을 만졌다. 화끈거린다. 하지만, 화나지 않는다. 이상하게 기분이 좋다. 낄낄-거리는 천박한 웃음이 입에서 나올 것 같지만, 꾹 참았다.
" 더러운 놈. "
" 이건 그에 합당한 대가라고 생각하지. "
다시 백설 공주가 손을 들었다.
" 하지만! "
손이 우뚝 멈춘다.
" 두 번은 아니야. "
내가 그녀를 날카롭게 노려보며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목울대가 꿀렁거렸다. 이를 꽉 물고 화난 표정으로 손을 부들부들 거리다가 그녀는 내 옆을 휙 지나가버린다. 픽-.
" 히히히히히. "
웃음이 터져나온다. 생각보다 그녀와의 관계가 더 나쁘다. 한마디로 '적'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것을 원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딱히 싫다거나 하는건 아니다. 오히려 정복욕이 몸속에서 샘솟는달까.
" 좋아좋아. "
아마 스토리대로라면, 미움받은 백설 공주는 왕비에게 쫓겨나게 된다. 사냥꾼이 그녀를 살려보내지만, 왕비는 공주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녀를 죽이려고 온갖 함정을 만든다.
아마 이 스토리대로 진행되지는 않을 터. 이 세상에 맞게 바뀌게 될텐데, 나는 아직 정확하게 그걸 모른다. 일단 백설 공주를 쫓아보내고 싶은 마음도 없었지만, 극적인 만남을 위해서라면 그것을 선택해야할지도 모른다.
" 저, 왕자님? 왕비님께서 잠시 만남을 원하십니다만. "
" 어마마마가? "
"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거냐! "
내가 왕비의 방에 들어가자마자 그녀의 입에서 고성이 튀어나왔다. 머리가 울릴 정도로 큰 목소리라서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녀는 내 볼에 새겨져있는 붉은 손자국을 바라보고 인상을 찌푸리며 다가왔다. 아까 식탁이 꽤 멀어서 자세히 보이지 않았는데, 상당히 젊어보인다. 어쩌면 40대 초반일지도 모르겠다.
" 이게 무엇이냐? 혹시, 공주한테 맞은 것이냐? "
" 아, 별 거 아닙니다. 제 선에서 마무리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
" 갈리브! "
왕비의 얼굴에서 약간 걱정스러움이 묻어나온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자신의 어머니인가보다. 그녀가 손으로 내 볼을 쓰다듬는다. 인상처럼 손도 차갑다. 화끈거리는 볼 위로 차가운 감촉이 기분이 좋다.
" 내.. 이 년을.. ! "
" 어머니! 고정하세요.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한 나라의 왕이 될 사람이 고작 이런 일에 화내서 되겠습니까? "
" ?! "
강하게 내 패를 보여준다. 왕비는 권력을 원하고 있을 것이다.
마법의 거울을 보며 누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냐고 물었지만, 개작된 이 동화에서는 그것이 문제가 아닐 것이다. 아마도 공주에게 주어진 권력! 그것이 자연스럽게 나에게 오도록 하는 것. 바로 내가 왕이 되는 것이 새 왕비의 목적일테지. 내 말이 끝나고 얼마지나지 않아서 왕비의 얼굴에 기쁨이 묻어나오기 시작했다.
" 오, 내 아가. 드디어, 어미의 마음을 알아주는 구나! "
그녀가 나를 안는다. 상큼한 냄새가 내 코를 자극시켰다.
역시나, 내 예상이 적중했다. 아마도 이 왕비의 눈에는 내가 세상물정 모르고 여자만 좋아하는 망나니처럼 보였을테지. 그래도 하나뿐인 자식이 자신이니까 기다리고 있었을테지만, 아마 마음에 차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제 내가 이 캐릭터가 되면서 얘기가 틀려지겠지만 말이다.
" 나는, 너의 재량을 알고 있었다. 너는 크게 될 사람이야. 이 어미말을 믿지? "
왕비를 얻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할까. 미션이 있을 것이다. 아마도 왕비의 마음을 얻는 것. 왕비를 소환수로 결정하는데 아주 중요한 것이 바로 내가 '왕'이 되는 것이겠지. 그렇다면, 백설 공주는? 아직 모르겠다.
감이 잡히지 않는다. 어렴풋이, 그녀에게 행복감을 가져다 주는 것이라고는 알겠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그녀가 권력을 잡고 여왕이 된다고 해도, 그것은 답이 아닐 것이라고 느껴진다.
" 믿습니다, 어머니. 반드시 왕이 되겠습니다. "
일단 내가 힘이 생겨야한다. 나에게 주어진 패는 뻔하다. 왕비가 나의 어머니라는 것과 내가 왕자라는 것. 백설 공주의 패는, 그녀가 선 왕비의 자녀라는 것. 일단 그녀를 만족시키는 방법을 알 수가 없다. 그렇다면?
' 일단 굴복시킨다. 그런 다음에, 그녀를 내 것으로 천천히 만들어야지. '
내 입에 초승달같은 미소가 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