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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와 엄청난 포부를 가지고 거창하게 이야기를 했었지만, 막상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왕비의 포옹을 받고 돌아온 내 궁전은 이미 난장판이 되어있다.
" 왕자님! 왜 말도 없이 가버리신거에요! "
청순한 미녀가 눈물을 펑펑 쏟으며 대성통곡을 한다. 나의 약혼자. '르세뜨리에 엔코(Lucetterie Annko)'. 공작의 막내딸. 돌아온 내 방은 이미 유리는 전부다 깨져있었고, 던질 수 있는 것은 모두 바닥에 내팽겨져있는 상태였다.
시종의 말을 듣자면, 나밖에 모르는 무식한 여자란다. 생긴거와는 다르게 머리에 든게 없나보다.
" 아아앙. 왕자니임. "
르세뜨는 내 품에 안겨 펑펑 울어댄다. 그녀의 발은 깨진 유리로 너덜너덜해져있었다.
철철 흐르는 피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에게 달라붙어 우는 것을 보니, 어떤 면에서는 섬뜩하기까지 했다. 일단 머리가 비었다는 것은, 이용해먹기 굉장히 쉽다는 것이고, 거기에 나밖에 모르는 여자라면 금상천화다.
일단 르세뜨는 예쁘고 몸매도 좋지만, 이미 손안에 들어온 고기다. 내가 낚아야할 대어는 백설 공주고.
" 일단 발부터 치료하자. "
" 네, 왕자님. "
공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시종이 황급히 시녀를 불러 그녀의 발을 치료하게 했다.
분명히 따갑고 아플텐데, 그녀는 나를 보고 웃기만 한다. 하지만, 왠지 눈동자에서 공허가 느껴진다. 입과 눈이 웃고 있지만, 무언가 비어있는 느낌. 나는 내 감을 믿는다.
몇번이고 위험한 상황에서 내 가슴 속에서 올라오는 감이 나를 지켜주곤 했다.
' 무언가 위험해. '
그녀가 무언가를 노리고 있는 것일까. 아까 그녀를 이용하겠다는 생각을 접었다. 조금 더 그녀를 알아봐야할 것 같다.
일단 그녀의 발을 치료하고, 내 궁에 있는 그녀의 방으로 르세뜨를 보냈다. 한사코 같이 있겠다고 발버둥치는 르세뜨를 간신히 설득시키고 시종과 둘만 덩그러니 남은 나는 그에게 조용히 입을 열었다.
" 이곳은 안전해? "
" 네? "
" 이 궁전은 확실히 나에게 안전한 곳이냐고. "
시종의 얼굴이 굳어진다. 그리고 눈을 몇번 돌리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위험하다는 말일까. 확실히 위험한 발언은 삼가는게 나을 것 같다. 어쩌면 아까 왕비의 방에서 했던 얘기도 위험했을지 모른다. 성급했던 것 같다.
" 이쪽으로. "
마크가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다가 벽에 걸려있는 금색 장식물을 잡고 내렸다. 그그긍-하는 소리와 함께 벽에서 구멍이 생긴다. 작은 문이다.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자 작은 공간이 나왔다. 겨우 두명이 들어갈만한 곳이다.
" 이야기 해보십시오, 왕자님. "
혹시모를 사태를 대비한 비밀공간인 모양이다. 그래도 윗 공간을 높이 만들어 긴 통로를 만들어놓은 것을 보니, 탈출구가 아닐까 싶다. 이런 것을 왜 만들어놨는지는 모르겠지만, 요긴하게 쓰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 아까 물었던 이야기야. 지금 왕궁 상황이 어떻지? "
느낌이 묘하다. 쉽게쉽게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내 약혼녀라는 공녀도 저 모양이고, 백설 공주도 심상치 않다. 내 물음에 마크의 얼굴이 약간 어두워진다. 무언가 알고 있는 모습이다.
" 사실, 왕자님은 위험한 상황입니다. "
" 위험? "
" 엔코 공작 영지와 리츠웰 왕국 사이의 세력싸움때문입니다. "
대충 시나리오가 머리속에 써진다. 아마도 나와 백설 공주를 두고 줄다리기를 하는 모양이지?
" 엔코 공작은 야망이 큰 사내입니다. 그 싸늘하고 거만한 눈빛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사옵니다. 그에겐 자식이 둘 있는데, 이번에 스물 아홉이 되는 베르벨 공자와 왕자님의 약혼녀이신 르세뜨 공녀입니다. "
나는 아무런 리액션을 취하지 않고 묵묵히 마크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말을 끊지않고 이어나갔다.
" 사실 처음에는 베르벨 공자님께서 백설 공주님과 약혼을 하기로 되어있었습니다만, 아시지요? 선 왕비님께서 돌아가시고 왕자님께서 오시면서 얘기가 틀려졌습니다. "
" 그게 무슨 상관이지? 나보단 그래도 백설 공주쪽에 권세가 강할텐데? "
" 아시지 않습니까? 백설 공주님께서는 리츠웰 왕권 강화에 힘쓰고 있다는 것을요. "
물론 알고 있다. 아까 보았던 모습만 하더라도, 경계심이 강한 느낌이 들었다.
" 그런데? "
" 방향을 튼 모양이죠. 흠, 사실 왕자님께서 꽤 방..탕한 생활을 하셨잖습니까? "
마크가 말을 하다가 내 눈치를 보길래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내가 아니니 상관없다.
" 손대기 쉬운 존재라고 생각했겠지요. 그래서 공주가 아닌 왕자님을 어찌해보겠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이 궁의 대부분의 시녀, 시종들은 공작가의 사람입니다. "
" 너는? "
내 눈이 날카로워진다. 마크라는 이 시종을 믿을 수 있을까. 이 늙은이도 공작가의 사람일수도 있다.
" 전 아닙니다, 왕자님. 말도 안됩니다. "
마크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도 내 편이 없다면 이미 게임이 끝난거나 다름없다. 누군가를 믿어야한다면, 이 시종을 믿어보고 싶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가 진실해보이기 때문에.
" 좋아. 그러면, 난 내 약혼녀도 조심해야한다는 말이네? 백설 공주도 견제해야되고. "
" 네, 맞습니다. 왕자님께서 모르셨을수도 있지만, 저번에도 자객이 왔다가 실패하고 돌아간 적이 있습니다. "
내 이마가 찌푸려졌다. 자객까지 왔다고? 공작이 보냈을 리는 없다. 아마도 백설 공주 세력쪽에서 보냈겠지. 괜히 공작과 내가 손잡으면 곤란해지는 것은 자기들이니까. 백설 공주를 쉽게 끌어안아보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만만치가 않다. 일단 당장 위험해보이는 것은 백설 공주쪽 세력처럼 보인다.
" 일단 알겠어. 대충 흘러가는 상황은 이해했으니까. 나한테 뭐 힘이 될만한 사람들은 없나? "
" 왕비님이 있잖습니까? "
내가 모르겠다는 얼굴로 마크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마크가 두어번 고개를 흔들고 입을 연다.
" 후작가가 있잖습니까? 그걸 이용하십시오, 왕자님! "
아마 왕비는 후작의 자식인 모양이다. 그래도 영 없는 것은 아니라 마음이 놓인다. 어느정도 물정을 알았으니 이젠 흥정을 해야하는법. 비밀 공간에서 빠져나오자 뻐근한 허리가 날 반겼다.
" 으다다다. "
길게 몸을 뻗고 고개를 두어번 흔들었다. 마크가 다시 장식물을 잡고 내리자 비밀방은 언제 있었냐는 듯이 사라졌다.
" 일단 공녀한테 가봐야겠네. "
일단 나에게 주어진 유일한 방법은 '양패구상'. 공작과 백설 공주가 서로 죽을 때까지 싸워서 세력을 있는대로 갉아먹는 방법이다. 중요한건 그 중간 사이에서 서로를 이간질시키는 일인데, 어중간하게 일을 했다가 들키는 날에는 둘에게 집중포화를 받을 수 있기때문에,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한다.
' 공녀를 내치고, 백설 공주를 보내버린다. '
내가 생각하고 있는 가장 좋은 결과다. 적어도 백설 공주는 내쳐야한다. 그래야 공주쪽에 붙어있던 세력이 나에게 돌아올 수 있다. 스토리대로라면 백설 공주가 죽임을 당할 일은 없을테니 공작의 세력을 찍어누른 다음에 찾아가면 될테지. 뭐, 내 마음대로 일이 풀리는 것은 아니지만.
백설 공주와 공작가에서 서로 세력을 잡아먹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미끼는 뻔하다. 바로 '나', 갈리브 왕자다.
내가 공녀쪽에 붙는 모습을 보인다면? 백설 공주가 나를 가만히 놔둘리가 없다. 그러면 공녀쪽에서 나를 지키기 위해 소모전을 펼칠 것이고. 백설 공주쪽에 붙어도 상관은 없다만, 그녀가 나를 믿는 상황이 아니니 이왕이면 쉬운 길을 택하는 것이 좋아보였다.
" 왕자니임~ "
공녀가 내 몸에 달라붙는다. 나는 고개를 돌려 시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시녀는 아무 말 없이 문을 닫고 방을 나갔다. 이제 방안은 단 둘만 있다.
공녀는 뭐가 그리 좋은지 내 몸에 얼굴을 비비며 코로 냄새를 킁킁 맡는다. 그 야망있고 영리한 공작가의 딸내미라는 여자가 이런 짓을 쉽게 할 리가 없다.
이전에 나는 몰랐겠지만, 지금의 나는 다르다. 왠지 수상한 냄새가 풀풀 풍긴달까.
" 갈리브 왕자님. 어서.. 이리로 오세요. "
유혹하듯이 몸을 살랑살랑 흔들더니, 그녀는 손으로 내 사타구니를 한번 슥 쓸어올리고 침대로 걸어간다. 입술로 혀를 핥으며 야릇하게 어깨끈을 내린다.
속셈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입에서 침이 고인다. 백설 공주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공작가의 공녀다.
쉽게 볼 수 있는 미모는 아니란 소리다. 그런 여자가 덥썩 자신의 몸을 내어주면, 거절할 남자가 어디있겠는가. 그러면, 내가 이용당해줘야지!
" 좋아, 흐흐. "
" 어머, 응큼한 웃음~ "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가 가슴을 움켜쥔다. 아흥-하는 콧소리와 함께 그녀의 눈이 헤롱거린다.
남자 하나 후리는 건 수준급처럼 보인다. 공녀는 잠시 일어나 서랍을 열고 무언가 꺼냈다.
흰 가루. 순간 눈앞이 번쩍였다. '마약'. 여자는 자신을 마약으로 이용해먹을 생각이다.
역시 머리가 빈 여자가 아니다. 확신이 서고 나니 여자가 다르게 보인다.
그녀는 흰 가루를 꺼내 손에 털어 나에게 내민다.
" 자~ 아가야~ 맘마먹자~ "
그녀의 눈이 흥분에 휩싸인다. 아마 공녀는 사디즘의 한 유형일테지. 그녀가 사람을 조련하고, 그 조련한 남자를 농락하는 것에 흥분하는. 나는 잠시 멀뚱히 흰 가루를 쳐다보았다.
이걸 먹어 말어? 물론 게임이니까 이런 마약류는 현재 자신에게는 어느정도 내성이 있을테지만, 확실히 좋을 것은 없다. 하지만, 그녀에 장단에 조금 맞춰주는 것도 필요하겠지? 나는 그녀의 손을 들어 코로 약간 흡입하고 대부분을 입으로 가져가대었다.
" 어머, 아가야. 입으로 먹으면 안되지~ "
당연히 안된다. 하지만, 그녀에게 먹일려면 어쩔 수 없지. 나는 빠르게 그녀를 잡고 입맞춤을 시도했다. 그리고 입에 들어있는 침에 절어있는 마약을 그녀의 입속으로 투하시켰다. 설마 그러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는지 그녀는 얼떨결에 내가 넘긴 진득한 가루를 목구멍으로 넣어버렸다.
후아-. 약간 어질어질하며 사타구니부터 등줄기까지 간질간질한 느낌이 나오기 시작한다. 웃음이 괜히 튀어나오고 눈앞이 흐릿해진다.
" 도.. 도대체 무슨 짓을! "
생각보다 빠르게 마약의 효과가 돌았다. 적어도 몇분은 지날 줄 알았는데, 그녀는 마약을 섭취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몽롱해지고 침이 입으로 흐리기 시작했다.
뭐, 플레이어 보정을 받은 나는 그런 마약류에 굉장히 내성이 있어서 거의 아무렇지도 않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많은 양이 넘어가지 않아서, 공녀는 정신을 잃을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 헤엣. 도대체.. 후잉. 하앙.. 기분 좋아아아.. "
공녀는 마약이 처음인 모양이다. 갑자기 침대에 늘어져서 몸을 흐느적대면서 발버둥친다.
그 강한 자극을 버티지 못하고 있겠지. 차라리 이 여자를 마약에 쩔어버리게 만드는 게 좋을까. 하책이다. 여자는 자신에게 필요하다.
유일한 공작가와의 연결이므로 괜시리 망가트려버리면 곤란하다. 차라리 나에게 넘어오게 하는건? 불가능할게 분명하다. 그러면?
' 딜을 해야지. '
르세뜨는 풀어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계속 무언가 말하려고 하지만, 입이 풀렸는지 웅얼거리기만 했다. 침이 입 옆으로 줄줄 새고 손가락이 마구 꼬인다.
마치 인간 문어처럼 보인다. 히히히- 볼만한 광경인데? 이 상태에서 성관계를 맺으면 괜히 악감정만 만들 수 있으므로 이 신기한 광경이라도 실컷 구경이나 하고 싶다.
" 우앙.. 아으응.. 헤헹... "
이상한 소리를 내며 몸을 꼬던 르세뜨의 움직임이 점점 줄어든다. 대략 한 시간쯤 지난 것 같다. 그래도 약의 양이 굉장히 작았으므로 이정도에서 끝난거지, 만약에 그녀가 내밀었던 모든 양을 공녀가 흡입했다면, 하루동안 정신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 깨워야겠지? "
- 찰싹
" 일어나봐. "
그녀의 뺨을 가볍게 쳤다. 묵묵부답이다. 제대로 골아떨어졌다. 더 강하게 뺨을 쳤다. 짝-. 그래도 일어나지 않는다. 탁자 옆을 보니 물컵이 보인다. 그대로 물컵을 들고 그녀의 얼굴 위로 뿌렸다.
- 촤악
" 아읏 "
그녀가 퉤퉤-하고 물을 뱉으며 눈을 게슴츠레 떴다.
" 자고 싶어.. "
" 일어나, 르세뜨 공녀. "
" 아가야.. 나 이만 잘래. "
" 마약에 쩔어보니까 장난아니지? "
" ... "
그녀의 눈이 점점 커진다. 정신을 조금 차린 모양이다. 내 목소리가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해서였을까. 그녀는 힘이 풀린 몸을 간신히 일으켜 침대에 기댔다. 한참이나 아무말없이 나를 멀뚱히 쳐다보던 공녀가 마침내 픽-하고 웃는다. 입꼬리가 올라간다. 한쪽만으로. 상당히 건방지고 안하무인같은 표정이다.
" 공주가 시켰어? "
" 그런 것 같아? "
공녀는 말이 없다. 머리가 아픈지 눈을 감았다가 뜨곤 했다. 하지만, 점점 눈빛이 살아나기 시작한다. 약의 효과가 거의 사라진 모양이다.
" 당했네. 병신인 줄 알았더니. "
" 이용해먹기 쉬운줄 알았나? "
공녀가 풀어진 옷을 하나씩 여미기 시작했다. 더 이상의 흐트러짐은 용납않겠다는 모습이다.
" 마약이 안 먹혔을리가 없는데. 방금 직접 몸소 겪었거든. 와, 정말로 이런거구나. 만약에 내가 이런 자리만 아니었더라도 한번 더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 "
" 그건 내 알바 아니고. 그냥 너랑 거래를 하나 하고 싶어서 말이야. 공작말고. 너랑 나 둘만의. "
공녀의 눈썹이 살짝 올라간다. 설마 이정도로 왕자가 치밀한 사내인지 몰랐다는 표정이다.
" 하, 내가 그래도 사람보는 눈 하나만큼은 누구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했는데. 완전히 내 오류야. 좋아. 원하는게 뭐야? "
공녀가 졌다는 듯이 두 손을 살큼 올렸다가 털썩 떨어트렸다. 하지만, 나의 다음 말에 그녀의 얼굴이 굳어졌다.
" 나랑 결혼식을 빨리 올렸으면 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