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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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라하다. 후작가의 영지라고 해서 거대하고 좋은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다. 후작가의 영지라고 말만 안했다면, 후진 촌동네라고 해도 믿을 것 같다. 물론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내 예상을 너무 빗나가는 모습이라 황당하기가 그지없다.


" 허허, 아직도.. 이 모습이군요. 그래도 왠지 푸근한 느낌이 듭니다, 왕자님. "


난 전혀 그런 느낌이 없다. 푸근하고 자시고, 왜 후작가가 힘이 없는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영지 크기도 작아서 입구로부터 얼마지나지 않아 후작성이 보인다. 그래도 나름 후작이 사는 곳이라 그런지 봐줄만은 하다. 물론 가까이 갔을때, 성 자체가 얼마나 오래됬는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지만.


" 정말 오랜만에 와봅니다, 왕자님. "


한 바퀴 빙 둘러본다. 성 바깥과는 다르게, 안은 볼품없다. 그래도 하나 눈여겨볼 점이 있다면, 병사들의 모습이 나름 군기가 빠릇빠릇 잡혀있는 점이다.


' 그래도 병사들 훈련은 나름 잘 시키고 있는 모양이네. '


영지를 가지고 있는 영주의 힘은 병사들에게서 나온다. 기사들의 수도 중요하지만, 병력에서 차이나면 전쟁은 보통 거기서 끝이다. 이곳저곳 둘러보고 있는 도중에 누군가가 다가온다. 젊은 사내다.


" 반갑습니다, 왕자님. 이리로. "


누군지 몰라서 마크를 힐끗 봤는데, 그도 모르는 눈치다. 그러면 나도 알 필요는 없을테지. 젊은 사내가 우리를 안내한 곳은 저택의 가장 안쪽에 위치한 방이었다. 그래도 저택 내부는 제법 운치있게 지어놔서 수십 년이 지나보여도 그리 지저분하거나 낡아보이지 않았다.


- 똑똑


" 영주님. 모시고 왔습니다. "


" 들어오게. "


강단이 있는 목소리다. 제법 유연하다고 들었는데, 목소리는 고집이 있는 사내라고 느껴진다.

괜한 편견을 가질 필요는 없지만, 주의하는 것은 나쁘지 않다. 문이 천천히 열리자 맨 처음 눈에 띈 것은 백발이 듬성듬성한 머리카락이었다.

그 아래로 주름이 길게 한 줄 나있는 이마가 보였고, 콧등 위로 고풍스러운 금색 테두리 안경이 올려져 있다. 그 안경 너머의 두 눈은 현기(賢氣)가 가득차있다.

그의 눈빛이 마치 내 속을 휘젓고 다니는 느낌이다. 마치 한 순간에 벌거숭이가 된 느낌이랄까.


' 게임에서 이런 것을 느끼다니. '


웃음이 나온다. 게임 캐릭터라고 해서 하찮게 여길 수가 없을 정도다. 현실을 통틀어 내가 봤던 인물 중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고 해야할까.


" 오랜만이구나. "


" 네, 할아버님. "


그는 읽던 책을 덮고 안경을 벗어 그 위에 올려놓았다. 젊은 사내는 곧 문을 닫고 밖을 나갔다. 마크 역시 들어오지 않았다. 책이 많은 것을 보니 아마 여긴 서재로 쓰이는 방인 모양이다. 그리고 그 방에, 나와 후작이 나란히 바라보고 있다.


' 속일 수가 없다. '


은은한 미소를 짓고 나를 바라보고 있는 후작에게 무언가 말을 건네기가 참 곤란했다. 마크에게 듣기로는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했는데, 알고보니 '내(예전의 나)'가 일방적으로 후작을 어려워했던 모양이다.


" 그 동안 잘 지냈느냐? "


" 네, 할아버님. "


" 허허, 이리 와서 앉거라. "


포근하면서도 크다. 시골 촌동네같은 도시가 그래도 왜 후작 영지라는 명함을 가지고 있는지 이제 이해가 된다. 후작이 거대하다. 영지가 초라했지만, 영주는 초라하지 않다. 이런 사내가 내 할아버지였다니.


' 충분히 이용할 가치가 있다. 하지만, 내 능력으로는 도저히 무리야. '


차라리 모든 것을 털어놓고 도움을 요청할까. 아니면, 그냥 내 방식대로 나가는 편이 옳을까.


" 무슨 일 있느냐? "


사실대로 말하되, 숨길 것은 숨기자. 후작가가 힘이 약하다는 소리를 듣고, 여기서 무언가를 얻어가겠다는 생각은 많이 접었었다. 차라리 후작의 지지만 얻어내면, 그에 동조하는 귀족들의 지지 역시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군사력이나 다른 무언가는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으로는 지지를 얻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할아버님. "


그가 나를 쳐다보았다. 나도 그를 쳐다본다.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가 거대하지만, 나도 거대하다. 부족한건 연륜뿐.


" 왕이 되고 싶습니다. "


후작은 한참이나 말없이 내 눈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피할 수 없다. 과연 그는 뭐라고 할까.


" 시기상조다. "


" 멈추기엔 늦었습니다. "


" 흠. "


후작이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옆으로 보이는 창가로 다가갔다. 우거진 나무의 푸른 잎이 흔들거린다. 쏴아아-. 나뭇잎들이 서로 부딪히며 빗소리를 만들어낸다. 답답하다. 하지만, 먼저 여기서 말을 꺼내면 안된다. 초조해보일 필요는 없다.


정말 아주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후작이 입을 열었다.


" 변했구나. "


"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지요. "


" 그래서 너와 에르메를 보내기가 싫었다. "


에르메는 왕비의 애칭이었나보다. 아직 이름도 제대로 알지 못하지만, 느낌상 자신의 어머니라고 확신이 든다.


" 변할 것이란걸 확실히 알고 있었거든. "


더 대꾸할 필요는 없다고 느꼈다. 자, 후작나으리. 이제 답을 내놓아야할 시간이오.


" 난 너의 할애비고 널 지지할 수 밖에 없다. "


" 고맙습니다, 할아버님. "


" 그러나. "


인상이 찌푸려지는 것을 간신히 막았다. 역시 손쉽게 갈 수는 없는 모양이다.


" 너를 더 지켜볼 것이야. 할어버지는 너를 믿는다. 날 실망시키지 말거라. "


" 알겠습니다, 할아버님. "


좋다. 나의 예상대로 시나리오가 흘러갔다. 무난하게 지지도 얻었고. 가장 좋았던 것은 후작이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래도 의논이 필요할 때 가장 힘이 되어줄 것만 같다.


" 점심은? "


" 출출합니다. 이틀동안 죽어라 달려와서 말이죠. "


" 그럼 어서 식당으로 가자. "


문이 열린다. 하지만, 들어갈 때와는 다르게 내 얼굴에는 만족감이 퍼져있다.



정말 일주일은 금방 지나가버렸다. 하루에 한번씩 후작을 만나서 이것저것 대화도 하고, 땀내나는 훈련장도 가보았다. 한번씩 시녀들의 엉덩이도 만져주었고, 시내 순찰도 나갔다. 가장 두드러진 점이 있다면, 나와 후작의 관계가 엄청 발전했다는 것이다.


" 할아버님. 이제 떠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


" 그러냐? 아쉽구나. "


내가 후작에게 느낀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후작이 정에 많이 굶주렸다는 것이다.


" 그럼 건강히 지내십시오. 곧 할아버님을 데리고 가겠습니다. "


" 알겠다. "


다른 하나는, 예상 외로..


' 후작이 엄청난 야망가라는 것이지. '



상상 외의 수확이었다. 후작도 생각보다 야망이 크다는 것을 알았던 것은 셋째날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저녁을 먹고 나와 후작이 조용히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그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 사실 말이다. "


그는 젊었을 때, 야망이 매우 컸던 사내였다고 했다. 왕이 되지 못하지만, 그래도 왕국 최고의 실세가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할머니를 만나고 사랑에 빠져 모든 것을 접고 영지에서 조용히 살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나의 어머니가 8살쯤 되던 해에 할머니의 집안이 반역죄로 풍비박산이 나버리고, 후작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왕국으로 보내 죄를 물게 하였다.


영지와 딸을 지키기 위해서, 눈물을 머금고. 그 뒤로 거의 30년이 흘러, 과부가 된 딸이 왕비가 된다. 그 때부터 후작도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고 한다.


나를 '왕'으로 만들기 위한.


그 소리를 듣고 온몸에서 소름이 돋았다. 무서운 사내다. 후작은 30년이 넘은 그 일을 아직 기억하고 칼을 갈고 있었다. 군자의 복수는 10년 후라도 늦지 않았다고 하는데, 후작은 무려 30년이 넘었다. 어찌됬든, 나에겐 든든한 후원자가 생겼다는 것은 두 말 할 것도 없다.



" 전부 설명해봐! 도대체 뭔 짓을 한거냐? "


궁으로 돌아오자마자 왕비에게 불려갔다. 공주 겁탈미수에 관한 소문이다. 이미 궁 안에 쫙 퍼진 모양이었다. 이걸로 확실히 공작가를 안심시킬 수 있으니 나쁜 전략은 아니지만, 일일이 해명하고 다녀야하는 것이 골치였다.


" 사실무근입니다, 어머니. "


" 아니 뗀 굴뚝에 연기나겠느냐? 사실대로 말해라, 갈리브! "


그녀도 나를 의심하고 있는 모양이다. 물론, 내 원래 성향이라면 그러고도 남았을 것이다. 오히려 이렇게 늦게 그런 일을 저지른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 정말입니다, 어머니. 그럼 공주를 불러서 얘기해 보시지요. "


" 믿어도 되겠지? "


" 물론입니다, 어머니. 오히려 제가 후작가로 가자마자 그런 소문이 퍼진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


왕비가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후작 영지를 가자마자 노렸다는 듯이 소문이 퍼진 것이 이상하기는 했다. 문제는 후작 영지를 가기 전에 백설 공주의 궁에 왕자가 방문했다는 점이다.


" 공주의 궁에는 왜 간 것이냐? "


" 제안때문입니다. "


" 제안? "


목소리를 크게 냈다. 왕비가 조금 목소리를 낮춰라고 눈빛을 보냈지만, 내가 노리는 것은 공주 측과 공작 측이 이 말을 서로 듣게 되는 것이다. 뭐, 전달되지 않아도 상관없었고.


" 공녀와의 결혼에 관한 것이어서 말입니다. "


" 목소리를 낮춰라. "


왕비가 사색이 된 얼굴로 말한다. 갑자기 얼토당토안한 말에 그녀가 놀라며 나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차가운 손으로 내 어깨를 잡았다.


" 지금 결혼이라고 했느냐?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것이야! 너무 이르단 말이야. "


" 걱정 마십시오, 어머니. 그런 것은 이제 제가 결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


" 갈리브! "


그 때, 내가 왕비에게 쪽지 하나를 건넸다. 왕비가 이게 뭐냐-하는 얼굴로 받았다. 천천히 글을 읽은 왕비가 눈을 힐끗 치켜올리며 나를 바라본다.


" 너에게 실망이다, 갈리브! "


" 죄송합니다. 하지만, 반드시 할 것 입니다. "


몸을 돌렸다. 아아, 너무 재밌다. 공주의 겁탈 미수건으로 아마 나에 대한 경계도가 한층 높아졌을터. 분명히 나와 왕비의 얘기를 누군가가 듣고 있을 것이다.

공작측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 이젠 결혼은 거의 기정사실로 확정된거나 다름없다. 당사자가 하겠다고 설치는데, 어머니가 어찌 막겠는가.

공주측과 공작가에선 내가 다 넘어갔다고 생각하겠지.


' 잘 했어, 왕비. '


쪽지에는 대충 이렇게 적혀있다.


- 이대로 상황에 동조할 것. 이유는 나중에 따로 말하겠음. 결혼도 사실 떡밥에 불과함. 쪽지는 바로 불에 태울 것.


천천히 왕비의 방을 걸어나온다. 문을 여니, 수많은 시선에 얼굴이 따끔거린다.


' 확실히 전달 됬겠지. '


어차피 전달되지 못해도, 발표할 것이므로 크게 상관은 없다. 단지 시간차이일 뿐이지만. 이젠 공주 측에서도 날 제거하려고 발버둥을 치게 되겠지. 내 목이 간당간당하지만, 이런 상황이 나에겐 더 짜릿한 즐거움을 준다.


' 모든 수를 다 써봐라고, 백설 공주! 히히히. '



보이지 않는 전쟁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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