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150)

7

' 젠장할. 그렇다고 바로 자객을 보내는구만! '

자고 있는 도중에 이상한 낌새에 눈을 떴다. 창문 테라스에서 이상한 그림자가 서성이는 것을 보고 바로 비밀방으로 몸을 숨겼다.

아무리 게임이라도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일인데, 심장이 두근거리고 숨이 가빠지는 것을 막을 순 없었다. 벽에 살며시 귀를 대어 소리를 들어보려고 했지만, 아무런 소음도 나지 않는다.

내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바로 몸을 내뺀 모양이다.

' 혹시 비밀방을 눈치챈건가? '

어쩌면 구석구석 뒤지면서 비밀통로를 찾으려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생각 외로 이 비밀방은 찾기가 쉬워서, 오래 숨어있다가는 들킬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 높은데. "

위를 쳐다보니 굴뚝같은 긴 통로 위로 훤칠한 달이 보인다. 보름달이다.

다행히 내 머리 위로 정확히 떠있는 상태라 통로가 자세히 보였다. 달이 지나가기 전에 빨리 올라가야 그래도 안전하게 위로 올라갈 수 있어 보인다.

읏차-. 두 팔과 다리를 쫙 뻗고 조금씩 올라간다. 그래도 충분히 근력이 있는 몸이라서 생각보다 수월하게 올라갔다. 통로를 전부 올라가 얼굴을 쏙 내밀었다.

옥상 비스무리해 보이는 곳이다. 다행히 달빛이 아직 환해서 주위는 충분히 분간할 수 있을 정도다.

아직 누구의 발걸음도 닿지 않았는지 먼지가 수북하게 쌓인게 보인다.

" 읏샤. "

먼지가 묻던 말던 상관하지 않았다. 다행히 저 멀리에 또다른 통로가 보인다.

어딘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나도 모르는데 자객이 그 위치를 알 리가 없다. 적어도 내 방보단 안전할테니까. 구멍을 자세히보니 기울어진 미끄럼틀같은 모양이다.

헷-. 오랜만에 미끄럼틀이나 타 볼까. 경사가 그리 심하지는 않지만, 다시 올라오려면 충분히 힘들어보인다.

- 슈우우우

어느 정도 내려가자 달빛도 닿지않는 암흑천지가 되어버렸다. 다리와 손을 이용해 최대한 속도를 줄이면서 미끄러져 내려왔다.

순간 다리에 걸리던 벽의 촉감이 사라져버린다. 가슴이 철렁한다.

재빠르게 두 손으로 벽을 향해 강하게 밀었는데 역부족이다. 내 몸은 그대로 바닥에 떨어져버렸다.

다행히 그 바닥이 내 다리길이정도 되는 높이였지만.

- 쿵

" 어후, 간떨어질뻔했네. "

눈앞에 빛이 어른거린다. 달빛이다. 자세히보니, 누군가의 방이었는데 눈에 익숙하다.

르세뜨의 방이다. 후아-. 그래도 다행이네. 궁전에서 가장 좋은 두개의 방이 옥상에서 연결되어 있었다. 혹시모를 탈출을 위해 만들어 놓은 통로인 모양이다.

문을 살짝 밀자 그그긍-하는 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린다. 르세뜨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자고 있다.

' 헤. 자는 모습이 귀여운데. '

나는 그녀의 이불을 살짝 들어내고 몸을 집어넣었다. 그 순간 빛이 번쩍이더니 공녀가 나를 향해 팔을 휘두른다. 빠르게 몸을 굴려 피했길 망정이지, 잘못했으면 가슴에 바람구멍이 날 뻔 했다.

" 이, 썅! "

" 뭐야, 갈리..브? "

바닥에 주저앉아 헉헉-하고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공녀는 얼굴을 찌푸리고 방안을 촛불로 환하게 밝혔다.

" 뭐 하다 온거야? 그 옷은 또 왜 그러는데? "

" 자객이 왔더라고. 도망쳐나왔지. "

자리에서 힘없이 일어났다.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는데, 공녀의 표정이 말이 아니다.

" 그, 내 침대에서 좀 떨어져줄래? 거울좀 봐봐. "

침대에서 일어나 거울을 본다. 옷은 까만 먼지에 완전히 엉망이었다. 흙바닥에서 뒹굴어도 이정도는 아니리라. 공녀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러서는 것도 이해가 간다.

" 완전 굴뚝청소부 같구만. "

나는 옷을 다 벗고 속옷만 입은 채 손을 씻었다. 깨끗한 물이 순식간에 더러운 물로 바뀌어버렸다.

" 백설 공주가 보냈구나? "

" 그럴수도, 아닐수도. "

" 우리 쪽은 아니니까, 확실해. "

팬티 한장만 입고 있기에는 밤공기가 꽤 쌀쌀했다. 침대에 쏙 들어가 르세뜨를 향해 손짓했다.

" 들어와. "

약간 꺼림칙한 표정으로 침대에 슬그머니 들어온 그녀를 내가 확 잡아끌었다. 내가 그녀의 목덜미를 혀로 핥자 공녀는 몸을 살짝 떨었다.

" 지금 그럴 기분이야? "

" 뭐, 어때. 내껄 내가 핥는다는데? "

" 하. "

더 이상 말은 없지만, 그녀는 하는 수 없다는 표정으로 팔에서 힘을 뺐다. 내가 내 오른쪽 팔뚝을 툭툭 치자 그녀가 슬그머니 내 팔에 머리를 가져다댔다.

" 공주가 시켰을 게 분명해. 어제 우연히 만났는데, 얼굴이 장난 아니더라고. "

" 그래? 뭐, 내 목만 간수하면 계획대로 되고 있으니까 상관없어. "

공녀가 팔에서 머리를 떼어 나를 향해 엎드렸다. 약간 화가 난 얼굴이다.

" 니 목숨이 너 혼자만의 것이라고 생각해? 내 목숨은 생각 안해? "

" 그러면 니가 날 지켜주던가. "

르세뜨가 입술을 살짝 깨물고 나를 노려본다. 자기 뜻대로 내가 움직이지 않으니 답답한 모양이다.

" 좋아. 내가 기사 몇을 옆에 붙여주겠어. 그건 그렇고, 도대체 뭘 꾸미는거야? "

" 뭘 꾸미다니? "

" 적어도 나한테는 얘기해줘야하는거 아니야? "

그녀의 답답한 마음이 이해가 간다. 자기 딴에는 그래도 나한테 모든 것을 걸고 있을텐데, 나는 속마음을 다 보여주지 않으니. 약간 괴롭혀주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만, 기사까지 붙여준다고 했으니 줄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 넌 누구쪽이야? "

" 그건 또 무슨 소리야. "

내가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그녀는 눈이 살짝 흔들리더니 시선을 피한다. 아직 마음의 갈피를 정하지 못한건가.

" 그건 내 편이 아니라고 받아들여도 되는거지? "

" 그게 아니라.. 하아. 정말 날.. 완전히 파멸시키고 싶은거야? "

그녀의 두 눈이 흔들리더니 눈물이 한방울씩 맺힌다. 입을 앙다물고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것을 참고 있는 모습이 꽤 귀엽다.

" 선택하라는 의미지. 파멸이라니. 내쪽으로 완전히 붙는다면, 널 책임져주고 지켜주겠어. 그리고 왕비로 선택해주지. "

" 그 말은, 내 가문은 보장 못한다 이거지? "

대답 대신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흑- 하고 눈물을 닦고 다시 나를 바라본다.

" 그럼 딱 한 가지는 약속해줘. "

" 들어보고 결정하지. "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내 어머니를 도와줘. "

또 골치아픈 일이 생겼다. 알고보니 공작의 아들과 딸이 배다른 남매라는 점. 현재 존재하는 공작 부인은 아들의 친어머니이고, 공녀는 숨겨진 정부의 딸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공작은 이참에 공녀를 이용해먹을대로 해먹고, 조용히 죽여버릴 생각이었나보다. 그녀의 어미와 함께.

" 그것만 된다면, 끝까지 널 도우겠어. 대신 어머니를 도와줘. 너무 불행하게 살아오셨어. 나때문에 거기서 벗어나지도 못하셔. "

머리가 지끈하다. 괜히 공녀에게 정이 생기는 기분이다. 사실 냉정히 그녀를 내칠 생각이었는데, 그래도 마음이 착한 여자를 함부로 버리기에는 그나마 남아있는 양심에 걸린다. 그녀를 버리면 일이 쉬워지지만, 그녀를 데리고 가면 일이 복잡해진다.

" 좋아. 도와주겠어. 다만, 배신은 절대 용납 못해.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있다면, 바로 척결 1순위가 될거야. "

" 알았어. 절대 배신은 안해. "

내가 그녀의 머리를 살며시 안았다. 그녀의 따뜻한 눈물이 가슴에서 느껴진다. 아, 젠장. 네임드가 아닌 이런 캐릭터도 이렇게 매력적인데, 하물며 백설 공주의 매력은 어떨까. 궁금해 미칠 지경이다. 언젠가는 궁에서 내쳐야할 공주다. 하지만, 아직 때가 아니다.

' 이젠 나도 조금 진심으로 가볼까. '

왕이 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뭘까. 바로 '정당성'이다. 내가 왕의 뒤를 이를 '정당성'만 확보한다면, 백설 공주따위야 아무 것도 아니다. 문제는 그 정당성이 백설 공주에게 더 많이 치중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 정당성을 없앨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뭘까. '누명'이다. 죄를 뒤집어 씌우고 몰아넣으면 그야말로 만사형통. '정당성'은 자연스럽게 나에게로 올 것이고, 나는 왕이 될 수 있다. 그러면 현재 나에게 가장 방해가 되는 인물은?

" '왕'이다. "

" 설마. "

차를 한 모금 마시려고 찻잔을 들었던 공녀가 설마-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미안하지만 니가 생각하고 있는게 맞을거야, 히히히히.

" 너 정도라면 예상할 수 있겠지. "

" 우리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너무 위험해. 잘못해서 발각되면 그야말로 최악. 두 번의 기회는 없어. "

" 이봐, 르세뜨. 거꾸로 생각해봐라고. 발각된다면 우리가 파멸하지만, 발각되지 않는다면? "

상대측이 파멸한다. 르세뜨가 덜덜 떨리는 손을 주체하지 못해서 찻잔을 살며시 내려놓았다.

" 너무 위험해. 나는 찬성하지 못하겠어. "

" 그럴 배짱도 없는거야? "

" 니가 너무 무리하는거야! 배짱이 아니라고! "

확실히 무리라면 무리라고 할 수도 있다. 아무리 그래도 한 나라의 왕인데, 보안이 허술할리가 없다. 조금이라도 실수가 있다면 끝이라고 봐야한다.

" 그래서 너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거잖아. 방법이 전혀 없는거야? "

르세뜨가 나의 시선을 피한다. 하지만, 그녀를 끝까지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수락이 떨어질 때까지 바라볼 생각이었지만, 생각보다 그녀의 포기가 빨랐다.

" 지금 시간을 두고 천천히 할 순 없는거야? "

" 그래. 이미 전쟁은 시작됬어. 공주측도 신경써야할 판에, 공작측까지 무너트릴려면 시간이 촉박해. "

일단 르세뜨를 끌어안아야한다면, 먼저 결혼을 골인시켜야 한다. 이미 자신의 할아버지를 끌어안았으니, 공주 세력만 이겨내면 손쉽게 결혼할 수 있을터. 이미 약혼까지 한 마당이니 결혼을 작정하려면 순식간에 해치울 자신이 있었다.

' 그러면 왕에게 접근은? '

딱 하나 방법이 있다. 제일 가까이 접근할 수 있으며, 또 완전 무방비한 상태를 맞이할 수 있는 것.

' 왕비뿐이다. '

사실 지금 당장 왕비에게 이야기를 건네고 싶은 생각은 없다. 너무 빠르게 일을 진행시키면 실수가 잦아지는 법이니까. 일단 첫번째 할 일은 결혼을 성공시키는 일이다. 아직 왕비는 결혼이 떡밥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건 나중에 다시 차차 설명하면 되는 일이다.

- 수근수근

주위에서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아마도 나와 공주의 소문때문이겠지. 히히히. 지금 향하는 곳은 공주가 자주 다닌다는 꽃 정원. 마침 꽂아두었던 세작이 서둘러 뛰어와 공주가 나타났다고 했기에 이리 서둘러 가는 중이었다. 단순히 방문차원에서 간다면, 보나마나 거부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저멀리서 금발의 미녀가 보인다. 언제봐도 아름답다. 그녀를 반드시 내 소환수로 결정하고 싶다. 그러면 언제든지 그녀를 다시 볼 수 있겠지.

" 오랜만이군, 공주. "

백설 공주가 죽일 듯이 나를 바라본다. 일 없다는 듯이 드레스를 몇번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녀를 향해 내가 입을 열었다.

" 환영 인사가 거칠던데? 하마터면 목이 날아갈뻔 했다니까. "

" 죽이지 못해서 아까울 따름이야. "

공주가 나를 보며 으르렁거렸다. 나는 씩 웃으며 두 손을 들었다.

" 어이구. 무서워 죽겠군. "

백설 공주는 휙 뒤돌아 천천히 반대편으로 걸어가 버린다.

" 좋은 정보 하나 주지. "

그녀의 걸음이 멈춘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돌려 나를 노려본다.

" 또 무슨 수작을 부릴려고..! "

" 몸 조심해라고. 그럼 이만 가보지. "

나는 바로 몸을 돌려 정원을 빠져나왔다. 그녀가 뒤에서 뭐라뭐라 외쳤는데 잘 알아듣지 못했다. 아마도 욕 비스무리한 걸 나에게 쏟아냈겠지. 일단 먼저 왕의 궁에 있는 그녀의 세작들을 거의 다 정리해야한다.

' 싸그리 정리해주지, 백설 공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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