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150)

8

석양이 붉게 하늘을 칠한다. 아름답다. 게임 속에서도 이런 자연의 아름다움을 직접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축복이라고 느껴진다. 달달한 레몬티까지 입에 넣으니 더 바랄게 없다. 오랜만에 가지는 여유로운 시간이랄까. 물론 곧 이어진 노크 소리에 평화가 깨져버렸지만.

- 똑똑똑

" 누구야. "

" 왕자님, 공녀님께서 오셨습니다만. "

" 들어와. "

- 끼익

발자국 소리가 한 두개가 아니다. 누굴 데려온 걸까. 고개를 살짝 돌려 뒤를 돌아보니, 은빛 번쩍이는 갑옷을 입은 기사 둘이 눈에 보인다. 걸을 때마다 척- 척- 하는 소리가 리드미컬하다.

" 뭐야, 벌써 데리고 온거야? "

" 잠시 데리고 있던 기사들이야. 인사해, 갈리브 왕자님이야. "

- 퉁

" 반갑습니다, 왕자님. "

둘이 동시에 외쳤다. 말소리에 이색적인 목소리가 하나 끼어있다. 어라? 얼굴좀 볼까. 내가 손등이 아래를 향하도록 주먹을 쥔 다음에, 검지를 위 아래로 흔들며 입을 열었다.

" 투구를 벗어봐. "

기사 둘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투구를 벗는다. 한 명은 이제 막 20대가 넘어보이는 청년이고, 한 명은 단발 머리의 여인네다. 나보단 약간 나이가 많아 보이지만, 왠지 무뚝뚝하고 차가운 얼굴이 마음에 들었다. 얼굴이 그리 예쁜 편은 아니지만, 당분간 심심하지 않을 것 같다.

" 저 애는 다시 데려가고, 이 기사만 데리고 있겠어. "

르세뜨가 얼굴이 약간 새초롬하게 변한다. 그녀도 내 의도를 대충 알았을테니까. 그렇다고 거부하거나 하고싶은 마음은 없는 것 같다. 그녀도 내가 호색하다는 것을 알고, 이정도는 그녀도 눈감아줄 수 있는 선이니까.

" 알았어. 레오, 다시 복귀해. 아뜨린느. 오늘부터 왕자님이 너의 주인이다. 목숨 걸고 그를 지켜. "

" 네, 공녀님. "

청년은 다시 방을 나갔다. 척- 척- 거리는 소리가 절도있었지만 나에겐 웃기게 들린다. 르세뜨가 팔짱을 끼며 나를 본다.

" 아침에 말한대로, 방에서 널 지켜줄 기사야. 숙소같은 건 알아서 정해주고. 내 직속 기사니까 적당히 믿어도 좋을거야. "

적당히란 말이 꽤 의미심장했지만, 그녀의 의도는 뻔했다. 아마 100% 믿지는 말라는 얘기겠지. 직속 기사지만, 혹시모르는 일이니까. 고개를 끄덕이자 공녀는 '그럼 이만.' 하고는 방을 나가버렸다. 그래도 내 여자가 되면 나갈 때 키스정도는 해야하는 거 아니야? 센스가 꽝인 여자구만. 물론 도도함이 내 마음에 들기는 하다만. 공녀가 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고개를 천천히 돌려 기사를 바라보았다.

" 이름이 아뜨린느라고? "

" 편하실대로 부르십시오. "

아뜨린느도 충분히 편한 이름이다. 그것보다 난 그녀의 복장이 편했으면 싶었다. 사실 갑옷에 감싸인 그녀의 숨겨진 몸매를 보고 싶은 거지만.

" 갑옷은 벗을 순 없나? "

" 벗으라면 벗겠습니다. "

뭔가 이상한 대답이다. 오해하지들 마라. 분명히 갑옷을 벗는다는 소리다. 물론 옷을 벗는다고 해도 사실 상관은 없다. 후후.

" 요 앞에 바로 방 하나 있거든. 그 방 쓰면 될거야. 뭐, 생활은 이제 거의 나와 같이 하는 셈이니 별 필요도 없을껄. "

" 네, 알겠습니다. "

기사란 작자들은 다 이렇게 딱딱한가보다. 물론 내 목표는 딱딱한 그녀를 부드럽게 풀어주는 것이지만. 그래도 가장 굴복시키는 맛이 있는 여자 기사라니. 르세뜨도 상관없는 모양이니 눈치볼 곳은 없다.

" 일단 편한 복장으로 다시 와. "

" 네, 알겠습니다. "

분명히 난 편한 복장이라고 했는데, 이상하게도 두꺼운 가죽이 보인다. 철제 갑옷 대신에 입고 온 모양이다.

" 가죽 갑옷도 벗어. "

기사는 슬쩍 내 얼굴을 한번 보더니 말없이 가죽 갑옷을 벗기 시작했다. 하지만, 갑옷 안에도 두꺼운 옷이 하나 더 있다. 그것까지는 나도 벗어란 소리를 하기 어렵다. 역시 기사란 작자들은 융통성이 없어.

" 좋아. "

이젠 나도 할 일을 해야할 때다. 날이 벌써 어둑어둑해서 책상 주위로 촛불을 환하게 켰다. 탁탁-하고 초가 타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서랍에서 고급 양피지를 하나 꺼내 책상에 길게 폈다. 재질이 무척 좋지 않다. 고급 양피지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딱딱한 나무 껍질같은 느낌이다. 그러나 저러나 일단 편지 한통을 써야했으니, 이거라도 감지덕지다.

- 친애하는 공작저하께.

크게 중요한 말은 없다. 하지만, 마치 내가 공작에게 간과 쓸개를 줄 것처럼 애달복달하는 것처럼 썼다. 내가 비굴하게 공작에게 조아리는 듯한 느낌이 든달까. 르세뜨에게 들었던 공작의 성격이라면, 분명히 좋아하고도 남을 것이다.

르세뜨가 성공했다는 생각을 하면서. 사실 편지에는 영 소질이 없어서 몇번이나 양피지를 찢고 구겼다. 아홉번째 편지가 그나마 마음에 들었다.

이걸로써 공작에게 주는 떡밥은 끝이다. 이젠 공작도 본격적으로 내 결혼을 추진할테니까. 양피지를 봉투 안에 집어넣고 뒤에 인장을 찍었다.

리츠웰 표식이다.

" 아뜨린느. "

그녀가 조용히 다가온다. 내가 봉투를 건네자 그녀가 손을 내밀어 조심스럽게 받는다.

" 마크에게 건네줘. 공작가에 특.급.송달해라고. "

특급에서 좀 강하게 어필하자 그녀가 약간 긴장한 표정으로 몸을 옮겼다. 사실 그리 중요한건 아니지만. 한참이나 집중해서 쓰다보니 벌써 밤 시간이 다 된 모양이다. 창문 밖을 봐도 불빛이라곤 없다. 아뜨린느가 다시 방으로 들어온다. 이젠 나는 눈을 붙여야할 시간이고, 그녀는 날 지켜야할 시간이 되었다.

" 으함. 피곤하네. "

어제 중간에 자다가 황급히 도망치는 바람에 오늘은 상당히 피곤했다. 아뜨린느의 어깨를 두번 치고 '수고해.'라고 말했다. 폭신하고 부드러운 이불이 오늘따라 유난히 기분이 좋다. 아아- 좋다. 그 후에는 기억이 없는걸 보니 아마 바로 곯아떨어진 것 같다.

눈을 떴는데, 아직 날이 어둡다. 분명 새벽일테고, 날이 서서히 밝아와야할텐데 햇빛이 전혀 없다. 검은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있다. 비가 보슬보슬 내린다. 아마도 오늘은 해를 보긴 그른 모양이다. 아뜨린느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입을 연다.

" 일어나셨습니까. "

" 아, 수고했어. 아뜨린느. "

어젯밤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나보다. 오늘같은 날은 침대에 푹 파묻혀 뒹굴거리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도시 시찰을 나가야하는 날이다.

사실 시찰이라고 해봤자 마차를 타고 도시를 한바퀴 빙 도는 거에 불과했지만. 나는 아뜨린느를 보며 내가 돌아올 때까지 쉬라고 명했다. 기사라도 일을 안한다는 것에는 기분이 좋은 모양인지 그녀의 얼굴이 활짝 펴진다.

기사라도 일은 싫은 법인가보다.

" 르세뜨랑 아침 먹게 준비해, 마크. "

" 네, 왕자님. "

그래도 아침은 그녀와 꼬박꼬박 먹기로 마음 먹었으니 귀찮았지만 그녀의 방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공녀는 나보다 일찍 일어났는지 이미 치장이 끝난 모습이다.

" 어머. 갈리브?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

" 아침은 너랑 같이 먹어야할 거 아냐. 그래도 이제 같이갈 내 여잔데. "

공녀의 얼굴이 살짝 붉어진다. 입을 모으고 시선을 이리저리 옮기다가 '알았어.'하고 대답하고 시녀를 부른다. 대충 탁자 정리랑 방 정리가 끝나자 시녀가 방을 나갔다. 음식이 오려면 시간이 조금 있다. 난 그녀랑 다르게 센스가 있는 남자니까. 내가 그녀에게 성큼성큼 다가가자 공녀가 살짝 놀란다.

- 쮸웁

한 손으로 허리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허리를 쓸어내리며 엉덩이를 살짝 주물렀다. 당연히 입은 키스하느라 바쁘고. 혀와 혀가 얽히고 타액이 섞인다. 양치는 못하고 대충 물로만 입을 헹궜는데, 그녀가 불쾌하지 않은지는 모르겠다. 그녀를 보니 키스에 심취해있어서 크게 신경쓸건 아닌 것 같지만.

" 퐈아.. 하아. "

그녀의 얼굴이 상기되어 있다. 키스만으로 끝낼 생각이었는데, 이상하게 둘다 흥분한 상태다. 나도 아침 식사만 아니라면 그녀와 침대에서 관계를 맺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다. 그녀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고. 하지만, 아쉽게도 그건 오늘 밤으로 미뤄야할 것 같다.

" 좋았어? "

공녀는 아무 말없이 나를 살짝 흘겨보고 탁자로 걸어갔다. 살짝 비틀거리는 걸 보니 다리 힘이 빠진 것 같다. 그 정도로 격렬하게 한 건 아닌것 같은데. 처음에 봤던 요녀같은 모습과 매치되지 않는다.

" 오늘 시찰있다고 했었지? "

" 응. 금방 돌고 올거야. "

때맞게 음식이 들어온다. 상당히 넓고 둥근 탁자 위에 음식이 수북히 쌓인다. 다른건 몰라도 확실히 귀족이 되면 먹는 거 하나는 좋은 것 같다.

" 왕비님은 어쩔거야? "

" 아직 기다릴거야. 결혼하고 난 다음에도 시간은 충분해. "

- 탁 탁

한참이나 젓가락 놀리는 소리만 들린다. 그릇을 반 정도 비웠을때, 그녀를 흘깃 보니 아직 손도 거의 대지 않았다. 깨작깨작 젓가락만 만지고 있는 모습을 보니 뭔가 고민이 있는 모양이다.

" 고민있어? "

그녀는 말이 없다. 나와 눈을 마주치려고 하지도 않는다. 내가 탁 소리나게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 고민 있으면 말을 해. "

" 무서워. "

" 뭐? "

공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린다. 눈물이 글썽이는 얼굴이다. 굉장히 차가운 여자라고 생각했었는데, 눈물이 많다. 사람도 한꺼풀 한꺼풀 벗겨내면 새로운 면모가 보인다는 것이 이런 의미인가보다.

" 무섭단 말이야. 일이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나는 물론이고 어머니랑.. 갈리브 너도.. 다 죽는단 말이야. "

입을 열려고 했는데, 그녀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

" 매일 악몽을 꿔. 우리 일이 발각되서 어머니가 먼저 죽고, 다음에 너, 그 다음에 내 목이 잘리는 꿈이야. 너무 무서워. "

결국 그녀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어깨가 들썩인다. 여기서 괜히 말하면 마이너스 효과뿐이다. 그녀가 눈물을 그칠때까지 기다리고 있자, 공녀는 서서히 감정을 추스렸다.

" 흑. 미안. 내가 이런 애가 아닌데. 미안해. 괜히 너의 마음만 심란하게 만들어서. "

" 아니. 당연해. 무서운건 당연하지. "

공녀가 슬그머니 눈을 올려 나를 바라본다. 나는 자신만만한 얼굴이다. 거기에 입꼬리까지 비릿하게 끌어올린다.

" 내가 실패한다고? 죽는다고? 천만에 말씀. 절대 난 실패하지 않아. 일단 내것이 되면 절대 놓치지도 않을거고. 너도 예외는 아니야. 그리고 아직 안아보지도 못한 여자가 얼마나 많은데. "

" 킥. 마지막 말만 빼면 그래도 꽤 마음이 놓여. "

그녀가 웃는 모습은 처음이다.

" 그래도 하나는 꼭 명심해. "

" 어떤거? "

여유롭게 두 손으로 턱을 괴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굳은 얼굴은 펴지지 않는다.

" 우리 아버지를 조심해. "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정말로 감사합니다.

생각보다 문장이 어색한 부분이 많네요. 부분부분 조금씩 고쳐나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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