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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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덜컹덜컹

몸이 흔들린다. 시내 시찰이라고 해봤자 뚱뚱한 사내와 같이 마차를 타고 도시를 한바퀴 삥 도는 것 뿐이다.

더군다나 그 뚱뚱한 사내때문에 비를 보면서 사색에 빠질 수도 없었다. 사내는 연신 두 손을 비비며 나에게 말을 걸고 싶어했다.

아마 궁에 닿은 연줄이 없는 모양이다. 권력자를 잡아서 힘좀 가져보겠다는 심산인 것 같은데, 적당히 맞장구나 쳐줘야할 것 같다.

" 하하, 준수하시다는 소문이 자자하신데 소문이 잘못된 것 같습니다? 하하. 제가 봤던 분들 중에서 가장 훤칠하시고 거대하신 분인 것 같습니다. "

대답하지 않고 빙긋 미소만 지었다. 그게 먹혔다고 생각했는지 혀놀림이 더 부드러워졌다.

" 제가 과년한 딸내미 하나가 있는데, 원하신다면 언제라도 불러주십시오. 바로 보내드리겠습니다. "

어깨를 으쓱했다. 중요한 대사에 여자가 많이 끼면 좋을 것이 없다. 하물며 이런 신분도 불확실한 사내의 딸이라면 볼 것도 없다. 이번에도 살짝 미소만 짓자 더더욱 열을 내며 그가 입을 놀렸다.

" 음. 잘 보이지 않는데, 아! 저기군요. "

한참을 잘 가다가 그가 갑자기 마차를 세웠다. 꽤 후미진 골목이다.

내가 듣기론 그는 나라에서 임명한 건축업자라고 했다. 아마도 건축허가에 대한 이야기를 나에게 건네려하는 모양이다.

주위를 보니 온통 싼 자재를 이용해 집을 만든 싸구려 판자촌이었다. 바닥을 보니 빗물때문에 온통 구정물로 뒤덮여있어서 차마 마차에서 내리기가 꺼려졌다.

" 이곳이 아까 제가 말했던 그곳입니다. 여기를 싹 밀어버리고 상업 건물을 올리고 싶어서 말이죠. "

그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두 손을 싹싹 비빈다. 돼지같은 얼굴이 더 역겨워보인다. 아까 들은 내용이라면 상업 건물이 아니라 도박장을 지을 모양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금 나한테 중요한 사항이 아니라서 일단 알겠다는 제스쳐를 취하고 마차를 출발시켰다. 그런데 하필 문제가 발생했다.

- 덜컹

갑자기 마차가 크게 요동을 치며 왼쪽으로 심하게 기울어졌다. 간신히 넘어지지는 않았다. 아마도 포장이 안된 도로라 빗물때문에 흙이 내려앉은 모양이었다. 사내가 연신 욕을 내뱉으며 마차의 문을 열었다.

" 이 개같은 경우가.. 켁! "

갑자기 날아온 화살이 사내의 목을 꿰뚫었다. 뭐, 뭐야?!

- 두두두두두

화살이 마차에 박히기 시작한다. 한 두개가 아니다. 나는 얼른 사내의 육중한 몸을 방패삼아 숨었다.

순식간에 사내의 몸이 고슴도치가 되었다. 이 씨발!! 백설 공주냐! 나는 곧바로 반대쪽 마차 문을 차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엄청 쏟아지는 장댓비에 앞을 잘 분간하기가 힘들었다. 하물며 처음 보는 이런 후진 동네라면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다. 이미 근위병은 전부 고슴도치가 되어 쓰러져있다.

" 하아.. 하아.. 지금을 노렸군. "

적들은 내가 딱 시찰나온 시점을 노렸다. 습격하기에도 좋은 날씨기도 했다. 빗물이 모든 증거를 다 쓸어버릴테니까. 내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다.

' 너무 자만했나? '

일단 무작정 앞으로 뛰어갔다. 이미 온몸은 다 젖어버렸고, 발은 흙탕물로 더러워졌다.

집안으로 들어가 숨을 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아마도 집 구석구석까지 다 뒤질 가능성이 높다. 일단 최대한 이 장소에서 벗어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안타깝게도 이미 시체가 되버린 사내가 이것저것 말을 거는 바람에 마차가 왔던 길이 생각나질 않는다. 젠장, 돼지같은 놈이 죽어서도 도움이 안되는구만!

' 어디냐! '

비때문에 저멀리 솟아있는 성도 전부 가려졌다. 사실 내가 지금 어디로 달려가는 지도 몰랐다.

- 슈웅

화살이 내 귀를 스치고 지나간다. 정말로 죽을 뻔 했다. 벌써 적들이 뒤까지 따라붙은 모양이다. 조금이라도 반항하고 싶지만, 적의 수가 훨씬 많을 것이다. 심지어 나에겐 무기도 없다.

- 퍽

내가 코너를 도는 그 때, 앞에서 누군가가 내 머리를 향해 둔기를 내려쳤다.

깜깜해진다.

내가 죽었나? 아니, 죽었다면 게임 오버라고 뜰테니 아직 목숨이 붙어있는 모양이다. 머리를 정말로 제대로 내려맞아서 타격 감도를 낮게 맞췄는데도 불구하고 꽤 얼얼했다.

눈을 살며시 뜨자 앞이 흐릿하다. 머리를 두어번 흔들었다.

머리에서 무언가 볼을 타고 내려왔다. 뜨거운 액체. 바닥을 흘깃보니, 피가 고여있다.

" 깼나 보군. "

누구지? 남자의 목소리다. 고개를 들고 싶지만, 힘이 없다. 누군가가 걸어오더니 내 머리카락을 붙잡고 위로 올린다.

" 크으. "

머리가 어질했다. 이런건 쓸때없이 사실적이네. 눈을 희미하게 떠보니 누군가가 흐릿하게 보인다. 얼굴을 보니 아직 젊은 사내다. 왠지 누군가와 닮은 것 같은. 르세뜨. 그녀와 닮았다. 하지만, 묘하게 닮지 않았다. 아픈 머리 속에서도 여러 인물들이 스쳐지나갔다.

' 공녀의 이복 오빠.. 그 새낀가. '

그는 굉장히 비열하게 웃으며 몸을 내쪽으로 기울였다.

" 아아, 처음보는 거지? 우리 동생이 꽤 신세를 지고 있다고 해서. "

" 신세 보답치고는 환영 인사가.. 멋있군? "

" 많이 봐준거라고. 처음에는 소리없이 죽일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끈질기게 도망쳐서 말이야. "

서서히 시야가 돌아온다. 남자치곤 얼굴 선이 곱다. 하지만, 옷 밑으로 숨겨진 근육을 보면 꽤 힘을 쓰는 사내일지도 몰랐다.

" 일주일 전쯤에 속보가 하나 날아왔더라고. 결혼을 일찍 당기겠다는. "

르세뜨가 보낸 밀서를 말하는 모양이다. 그녀가 모든 일을 발설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도 이 일은 이 사내가 독단적으로 하는 행동일 것이다. 권력때문인가. 아마도 이 사내는 공작가와는 다르게 나와 르세뜨의 결혼을 탐탁치 않게 여기는 모양이다.

"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나 역시도 정보통이 있거든. 그런데, 분명 나는 니가 마약에 쩔어있다는 소리를 못 들었거든. "

나와 같은 인간. 머리가 비상한 사내구만. 어줍잖은 떡밥가지고는 걸리지도 않을 '대어'다. 공작이 그래도 지 앞가림하는 자식들은 잘 뒀구만.

" 그래서? "

" 그런데, 결혼을 앞당기겠다? 딱보면 나오지. 르세뜨 그 년이 돌아섰다는걸. "

르세뜨도 미끼였던 모양이다. 되면 좋고, 안되면 버리는. 이미 공작가에선 르세뜨를 믿지 않고 있던 것이다. 하하, 이거 완전히 한 방 먹었는걸. 이렇게 되면 나는 괜히 공녀라는 이득없는 짐만 짊어진 셈이다. 이 게임이 이렇게 어렵다니. 자유도가 100% 라더니 아주 초하드코어로 만들어놨구만.

하지만, 나도 숨겨둔 한 수는 있다. 만약에, 정말로 만약에 내가 르세뜨와 짜고 친 상황이 걸리면 내놓을 하나의 변명거리를. 혹시 몰라서 만들어두었던걸 바로 써먹을 줄은 몰랐다.

" 아직 편지가 도착하지 않았나봐? "

" 무슨 소리지? "

내가 히히히-하고 웃는다. 그는 내 웃음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나보다. 사내가 인상을 쓰자 내 머리를 잡고 있던 남자가 주먹으로 내 배를 후려치려고 주먹을 들었지만, 사내가 저지했다. 의자에 앉아있던 공자는 나에게 다가와 앞에 쪼그려 앉았다.

" 편지는 무슨 소리지? "

" 하아, 정말이지. 일단 이것 좀 어떻게 해줄래? "

공자가 남자를 향해 눈짓했다. 그는 잡고 있던 내 머리카락을 놓고 날 바닥에 앉혔다. 머리가 띵-하다. 하지만, 살아날 구멍이 보인다. 내가 할 일은 이제 그 구멍을 충분히 넓히는 일이다.

" 공작저하께 이미 편지를 보냈다. 자세한 얘기는 그 안에 모두 적혀있고. 마약 건에 대해서도 적혀있어. 물론 공녀에 대해서도. "

그가 날 미심쩍게 바라봤다. 눈을 피하면 안된다. 한참이나 날 뚫어지게 쳐다본 공자가 손을 들었다.

" 이 자를 풀어줘. "

누군가 다가와 내 손을 묶은 줄을 풀었다. 후, 일단은 목숨은 벌었다. 하지만, 그의 미심쩍은 표정은 풀리지 않는다.

머리를 돌리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편지를 보지 않는 이상은 뚜렷한 답이 나올 리가 없지. 하지만, 이미 공작 영지로 출발한 편지를 지금 확인할 수는 없을터. 어차피 나의 실종이 알려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다행히 그가 머리를 쓰는 타입의 사람이라서 내가 살아날 확률이 높다.

괜히 죽였다가 일이 꼬이는 걸 싫어할테니.

한참이나 무언가를 생각하던 공자가 뒤를 돌아보고 누군가에게 손짓했다. 여리여리한 사내가 걸어온다.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었는데, 작은 통이다.

- 뽁

공자는 통을 열어 작은 알약을 꺼냈다. 왠지 느낌이 안 좋다.

" 먹어. "

먹고 싶지 않다. 하지만, 먹지 않으면 죽는다. 먹어도 죽을 것 같다. 날 죽일 생각인가?

- 꿀꺽

일단 선택의 여지는 없다. 알약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공자가 내 입을 벌리고 이곳저곳을 훑어본다.

" 먹자마자 가루가 되서 몸에 흡수될테니, 토해봤자 소용없을 거다. 너의 생각대로 그 약은 독이다. 해독제는 내가 지금 가지고 있고. "

그가 알약 하나를 내게 보여주었다. 내 목숨을 일시적으로 연장시키겠다는 말이겠지. 일이 꼬여도 단단히 꼬였다. 시간은 얼마나 있는걸까.

" 고작해봐야 일주일이 한계일거다. 더 버텨도 하루정도 더 연장될까. 하지만, 치사율은 100%다. 해독제가 없으면 누구라도 죽지. 물론 해독제가 완치율이 100%는 아니지만, 그래도 살아날 가능성이 생기지. "

그의 손에 내 목숨이 달려있다는 소리다.

" 편지를 확인해서, 괜찮을 것 같으면 해독제를 주겠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의심가는 점이 있으면, 일주일 후에는... 말 안해도 알겠지? "

그래, 더럽게 잘 안다, 이 새끼야. 입에 고여 있는, 피가 섞인 침을 바닥에 퉤-하고 뱉었다.

" 살려줘서 고맙군. "

" 별 말씀을. 일단 이 사태는 알아서 정리해주길 바란다. 알고 있지? "

그가 비릿하게 웃는다.

" 밖에 내보내줘. 증거는 확실히 없애고. "

" 예. "

몸이 붕 뜬다. 다리에 힘이 없어 바닥을 질질 닦으며 앞으로 전진한다. 몇 개의 문을 지나자, 거리가 나타났다. 음침한 골목이다. 이미 비는 멎은 모양이다. 하지만, 아직 바닥은 흙탕물에 지저분하다.

- 쿵

젠장. 놈들이 날 거리에 휙 던져버렸다. 입에 흙탕물이 조금 들어가버렸는지, 입맛이 쌉싸름하다. 아마 온 몸이 엉망진창이겠지. 르세뜨가 날 보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하다.

" 이 씨발.. "

욕지기가 절로 나온다. 이런 굴욕은 가상 현실 게임을 한 뒤로 처음이다. 강한 힘으로 적을 족치는 것이 나의 일상이어서 이런 경험은 신선하긴 했다. 하지만, 기분은 최악으로 더럽다. 그를 갈기갈기 찢어서 죽여버리고 싶다.

독약? 일주일? 하, 한번 해보자 이거지? 적당히 공작가를 밟아주고 끝낼 생각이었는데, 마음이 바뀌었다. 내가 굴복했다고 생각하지?

흙탕물을 으적 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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