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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짹짹.
이름 모를 새가 운다. 몸을 약간 뒤척이자 부드러운 천이 내 다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달작지근하고 좋은 향기. 향기?
" 깼어? "
바로 눈앞에 공녀가 있다. 눈밑이 약간 거무스름한게 보인다. 초췌하다. 그녀가 손을 들어 내 이마를 간지럽히는 머리카락을 쓸어올린다. 흙을 씹으며 복수를 다짐한 것까지는 기억하는데, 다음부터 기억이 없다. 마치 필름이 끊긴 것처럼.
"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넌 모르지? "
" 윽. "
몸을 일으키려하자 공녀가 부축해준다. 언제부터 이렇게 헌신적인 여자가 됬는지 모르겠다. 그렇게보면 여자란 참 알 수 없는 생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 얼마나 누워있었던거야? "
" 금방 일어난거야. 어제 저녁에 찾았거든. 난리도 아니었어. 왕비님이 얼마나 화가 났는지. "
안봐도 훤하다. 애지중지 키운 아들이 피투성이, 흙투성이가 되어 길바닥에 쓰러져있었다면 누구라도 머리끝까지 화가 나겠지. 그래도 오래 정신을 잃고 있지 않아서 다행이다. 분명 그정도 상처면 2, 3일은 정신을 잃었을텐데, 게임이라서 플레이어 보정을 좀 받았나보다.
" 물좀. "
공녀가 서둘러 물컵을 건네준다. 이제껏 마셨던 물 중에서 가장 달콤하고 시원했다.
" 한잔 더. "
그녀가 다시 물컵을 채워 준다. 다시 한컵을 비우자 갈증이 모두 해소되었다.
- 와장창
" 꺄! "
내가 힘껏 유리컵을 벽에 내던지자, 컵이 완전히 박살이 나며 바닥으로 흩어졌다. 공녀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며 몸을 움츠린다.
" 후. "
끓어오르는 가슴을 간신히 진정시키고 공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걱정마. 잠시 화가 났을 뿐이야. "
그녀가 두려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녀를 탓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어디까지나 이 일은 그녀가 조절할 수 없는 일이었고, 내가 안일하게 대처한 것 뿐이다.
' 일단 독약부터 어떻게 해결해야한다. '
해독제는 오지 않는다. 그건 확실하다. 사실 편지에는 특별한 얘기가 써있지 않다. 단지, 결혼을 일찍 당겼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는 소리만 했다. 아부를 조금 첨가시켰을 뿐이고. 후작에게 손을 뻗기에는 이미 시간이 촉박하다. 왕비라고해서 해결할 방법이 있는 건 아닐 것이다.
' 그럼 답은 하나 뿐이지. '
나를 도와줄 사람은 이제 한 명 남았다.
' 백설 공주. '
피가 적신 붕대를 칭칭 감고 백설 공주의 궁에 도착하자 시녀들이 나를 보며 수근거렸다. 하지만, 나의 살벌한 눈빛때문에 누구하나 다가오는 사람이 없다. 나를 제지하든 말든 무작정 밀고 공주의 방앞까지 도착했다. 전에 봤던 두 명의 시녀들이다. 내가 방에 한발자국 다가서자 그녀들이 내 앞을 막는다.
" 비켜. "
" 아.. 안됩니다. "
" 비키라고 했다. "
좋은 말로는 안될 성 싶다. 차라리 공주에게 허락을 받는 것이 나아보인다.
" 백설 공주! 얼굴좀 보지. "
" 공주님께서는 아무도 만나지 않겠다고.. "
시녀가 말하는 도중에 방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다.
" 들어오게 해. "
시녀들은 약간 머뭇거리더니 천천히 문을 열었다. 백설 공주다. 왼쪽 입꼬리가 길게 올라가 있는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아름다운건 여전하다. 내가 공주의 방으로 들어가자 문이 닫힌다. 머리로 방문을 살짝 가리키자 공주가 머리를 살짝 흔든다.
" 걔들은 상관없어. 확실한 애들이야. "
뭐, 이젠 들켜도 거의 상관없는 상황이긴 하지만. 나는 그녀를 마주보며 탁자 의자에 앉았다. 그녀의 비웃음이 심히 거슬린다. 만족스러운 얼굴이다.
"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내 마음에 쏙 들게 해놨네. 목이 매달려 있는 것만 빼면. "
" 글쎄. 내 목이 떨어지고나면 넌 안전할까? "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 법. 그녀는 충분히 그것을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나를 방안으로 들어오게 허락한거지만.
" 생각해봤어. "
공주가 천천히 입을 연다. 그리고 몸을 살짝 앞으로 빼서 두 손으로 턱을 괸다. 요염하다. 항상 청순한 느낌만 들었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관능적인 여자의 냄새를 풍긴다. 그래봤자 지금은 그림의 떡이지만.
" 왜 니가 어줍잖은 연기를 펼쳤을까. 들켜도 금방 들킬 그런 짓을 왜 했을까 하고. "
나는 몸을 살짝 뒤로 빼서 의자에 기댔다. 그녀의 말을 들어보겠다는 뜻이다.
" 나에게 일부러 분노를 느끼게 만들고 싶어서라고 생각하고 있어. 그 정도 분노라면 정말로 피를 보더라도 잡아비틀고 싶었으니까. "
" 그래도 생각할 줄은 아는 모양이네. "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공주는 아무런 반응이 없다.
" 공녀와 결혼? 하. 웃기셔. 공작과 나를 대적하게 하려고? "
변명할 필요도 없다. 아무런 제스쳐없이 그냥 멀뚱히 공주를 바라본다. 그녀도 특별히 대답을 바라고 물어본 건 아니었을테니.
" 이젠 나에게 그런 모습으로 온 이유가 뭘까? 넌 뭐라고 생각해? "
공주의 하얀 이가 모습을 보인다. 웃고 있는 모습이 영락없이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현재로선 내가 패배자가 맞지만, 니가 이긴게 아니야, 백설 공주.
" '버림받았다'겠지? "
" 잘 알고 있네. 그러면 이젠 나에게 의지하고 싶은 모양이구나? "
사실 그녀가 나의 목숨줄을 잡고 있는 것은 맞다. 여기서 틀어지면, 난 죽을 것이다. 틀림없이.
" 그래. 지금 내가 손이 모자라거든. 도움을 요청하고 싶어서. "
" 아이, 뻔뻔해라. "
백설 공주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날 약올리고 있다. 더 긴 말 필요없다. 마지막 도박이라고 생각하고 품속에서 종이를 한장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백설 공주는 이게 뭐냐는 얼굴로 종이를 받았다.
" 호. "
의아하던 얼굴이 서서히 만족감으로 바뀐다. 그녀는 이게 정말이냐는 얼굴로 나를 올려다봤다.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 '각서'라. "
거의 계약서에 가까운 각서였다. 나를 완치해주는 대신에 왕의 계승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겠다는 것. 단, 이 각서의 파기는 백설 공주에게 권한이 있다는 것.
" 고작 치료에? "
" 어차피 난 버려진 몸이야. 이번엔 겨우 살아왔지만, 세작이 아직 궁에 숨어있을 수도 있어서. 그나마 안전한 너에게서 치료를 받길 원하거든. "
각서에는 전혀 이상한 점은 없다. 고작 두 줄 뿐이라서 사기고 뭐고 할 것도 없다. 맨 밑의 줄은 심지어 자신이 원한다면 각서를 파기한다는 말이었으니 안심해도 되는 것이고.
" 완치만 시키면 끝인거야? 너무 쉬운거 아니야? "
" 어차피 계승권은 포기했어. 그냥저냥 너의 얼굴이나 좀더 구경하고 나가겠다는 생각이지 뭐. "
너무 쉽다. 하지만 너무 쉬워서 백설 공주는 오히려 의심이 가는 표정이다.
" 진실이 없으면 이건 없는거야. "
이제 비굴하게 빌어야한다. 어쩔 수 없다. 내가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나 그녀 앞에 무릎을 꿇는다. 약간 의아한 얼굴로 나를 보다가 그녀가 씩 웃었다.
" 이게 뭐야? "
" 사실 독에 중독이 되었어. 난 지금 아무런 힘도 없어. 세력도 없고. 난 살고 싶어. 어머니가... 어머니가 혼자 남으시면 안되잖아? "
연기 좋고.
" 하,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 "
" 각서에 하나 더 적겠어. 만약에 내가 완치된다면, 어머니를 왕비직에서 물러나게 하겠다는거. "
" ! "
미끼다. 물지 않고는 못 배길 엄청난 미끼. 절대 그녀는 이걸 거부할 수 없을 것이다.
" ... 좋아. 해독해주지. 각서에 적어. 징표는 가져왔겠지? "
내가 여분의 각서를 한장 더 꺼내 내 앞에 두었다. 나중을 위해 각자 한장씩 나누어 가졌다. 각서에는 아까 말한 왕비 자리를 포기한다는 것까지 추가해서 적었다. 백설 공주는 자신의 도장을 가져와 내 앞의 각서장과 자신의 각서장에 찍었다. 나 역시도 도장을 찍었고.
" 호호호호호. "
끝났다. 이젠 돌이킬 수 없다.
" 치료는 당장 해주지. 독에 아.주. 정통한 의원을 붙여줄테니까. 호호호호. "
백설 공주가 각서장을 들고 너무 좋아했다. 기분은 당연히 나쁘다. 내가 호감을 가지는 여성이 나를 죽어라고 미워한다면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뭐, 그 웃음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미지수지만.
' 일단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한다. '
" 이젠 할 일도 끝났으니 그만 가보지. "
" 그래. 몸 조심해서 들어가. 호호호호. "
두고 보자, 백설 공주. 너도 이젠 진심으로 대해주겠어. 백설 공주에게 뒤돌아 섰을때의 내 모습은 아마 악귀처럼 무서웠을 것이다.
내 궁으로 돌아오자마자 난 양피지를 꺼내들고 펜을 휘갈겼다. 시간이 촉박하다. 하루하루가 아까울 정도로. 지금 왕비를 만나면 괜히 역효과만 날 수도 있으니 편지로 전달하는 것이 훨씬 좋았다. 양피지가 무려 3장이나 필요한 긴 장문이었다. 가장 신뢰할만한 사람이 필요하다.
' 마크가 필요하다. '
" 마크!!! "
큰소리로 부르자마자 마크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네모난 상자 하나와 편지가 든 봉투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 이걸 어머니께 직접 전달해. 누구에게도 보여주면 안돼. 반드시 직접 어머니에게 건네드려야해! "
" 네, 네! 왕자님. "
그가 황급히 방을 나갔다. 이젠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했다. 남은 건 내 몸에 있는 독을 해독시키는 것뿐. 오늘 온다는 의원을 내일로 미뤘다. 지친다. 이 힘듬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다.
" 아뜨린느, 르세뜨를 불러줘. "
" 네. "
잠시 후에 르세뜨가 방으로 들어왔다. 누군가가 옆에서 힘이 되어준다는 것이 이렇게 안도가 될 줄이야. 그녀는 나의 모습을 보고 사뿐히 걸어와 조심스레 내 몸을 안았다. 좋은 향기가 내 마음을 편하게 가라앉힌다.
" 힘이 드네. "
" 알아. "
이젠 서로가 없으면 안될 것 같다. 어느새 나도 공녀에게 마음이 가버렸다. 공녀도 나에게 마음을 줘버린 것 같다. 백설 공주도 처음부터 이랬으면 좋았겠는데. 괜히 이복 남매로 정해버린걸까? 차라리 귀족으로 골랐으면 더 쉽지 않았을까?
' 가지 않은 길에 대해서 후회하지 말자. '
후회보단 현재 있는 길에 최선을 다하는 편이 옳다. 한참을 서로가 안고 있다가 르세뜨가 내 손을 잡고 침대로 이끈다. 조금이나마 날 기쁘게 해주겠단다. 즐거운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는데, 뭔가 이상하다.
" 이리로 들어와. "
아뜨린느가 방으로 들어온다. 평소와는 다르게 가슴이 푹 파여있는 드레스다. 저런 옷을 입으니, 누구도 기사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것 같다. 르세뜨가 살짝 눈웃음을 지으며 입을 연다.
" 오늘은 우리들이 전적으로 해줄게. 몸도 아픈데, 그냥 누워있어. "
약간 기대가 된다. 아뜨린느까지 가세하는 모양이다.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있는 걸 보니, 아직 처녀의 수줍음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르세뜨가 그녀의 팔을 잡고 내 침대로 끌어왔다. 난 편한하게 누워있으면 되겠지? 그래도 르세뜨는 나와 경험이 꽤 많으니까.
" 이리로 와. 아이참. 부끄러워 하지 말고. "
" 저.. 저기 전.. 아직. "
" 왜? 왕자님을 모시게 되서 기쁘다고 했잖아? "
" 고.. 공녀님! "
아뜨린느가 버럭 소리를 지른다. 물론 자신의 행태를 깨닫고 고개를 꾸벅 숙이고 죄송하다고 몇번이나 사죄했지만.
" 갈리브. 두 명이랑 하는건 처음이지? "
물론 처음은 아니다. 다른 게임에서도 두 명이랑은 자주했었고, 세 명도 경험이 있다. 하지만, 여기선 처음이지.
" 기대 되는데? "
르세뜨가 요염하게 웃으며 혀로 입술을 핥는다.
세 명의 남녀가 불타오르기 직전이었다.
============================ 작품 후기 ============================
씬을 넣을까 말까 고민 중입니다.
그래도 제가 씬 하나만큼은 잘 적는데, 괜히 안 좋은 영향은 아닐지 걱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