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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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 아무런 증상이 나타나지 않아서 손을 쓸 도리가 없습니다. "

참으로 곤란한 독이다. 이상하게도 멀쩡하다. 그런데 멀쩡하니까 도리어 더 무섭다.

일주일 후에 죽는다더니, 아직 3일이 지났는데도 몸에 아무런 영향이 없다. 벌써 이틀째 허탕만 치고 독 전문 의원이 다시 자신의 일터로 돌아갔다.

남은 시간은 이제 고작해봤자 4, 5일 정도. 처음에 르세뜨랑 관계를 맺고 혹시나 독이 빨리 퍼지면 어떡하나하고 걱정했었는데, 괜한 노파심이었나보다.

" 진짜 큰일이네. "

의원이 독에 정통한게 맞는걸까. 백설 공주가 날 물 먹이는 걸까. 아니, 그럴 필요가 전혀 없잖아. 날 고치기만 하면 자신이 훨씬 이득인데. 똑똑한 백설 공주가 그걸 이해하지 못할 리가 없다.

" 어쨌든 더 두고봐야 한다는 건가? "

사실 요새 통 할 일이 없어서 궁궐 이곳저곳을 기웃기웃 거렸다. 수시로 백설 공주에게도 가고, 르세뜨랑 연못을 구경하기도 했고, 날 위한 기사단의 훈련장도 가보았다. 물론 할 일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할 수가 없는 것이지만 다른 이의 눈에는 놈팽이가 할 일 없이 돌아다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 또 왔어? 너 독에 중독된거 아니야? "

백설 공주가 지겹다는 얼굴로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어깨를 으쓱이자 그녀는 읽던 책을 탁- 소리나게 덮고 탁자에 쿵- 내려 놓는다.

" 아쉬워서 그런건 이해하겠는데 말이야, 내 일상을 방해하지 말아줄래? "

" 어쩌겠어. 널 조금이라도 보고 싶은 날 이해해줘야지. "

" 니 약혼녀나 데리고 침대에서 뒹굴거리시지? 그것도 조만간이면 끝날텐데 말이야. "

얼굴만 청순할 뿐이지, 속내는 시커먼 여자다.

" 공주가 그런 말을 해도 되는거야? 생각보다 입이 험한데? "

" 너.. 너 따위니까 그런 소릴 하는거야! 아무한테도 이런 말 하지 않아! "

공주가 약간 당황하면서 소리친다. 흥- 하고 고개를 휙 돌리는데, 너무 귀엽다. 갑자기 이런 단어가 머리 속에 떠오른다.

' 츤데레. '

아직 자세한건 모르지만, 백설 공주는 츤데레에 가까울 것 같다. 공주라는 이미지때문에 생긴 성격인 모양이다. 흐흐, 이런 여자를 굴복시키는 맛이 특히 각별한 법이지.

" 그럼 나도 이만 갈께. 배웅은 할 필요없고. "

" 배웅? 하. 니가 왕자직에서 물러나면 기쁜 마음으로 배웅해줄게. "

이번에는 넘어오지 않는다. 아마도 내가 그녀를 놀리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았나보다. 몸을 일으켜 그녀의 방에서 나왔다. 물론 공주의 궁에서 나오기 전에 시녀들의 엉덩이를 한번씩 쓰다듬었고 말이다.

"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

연못 위에 배를 띄우고 르세뜨랑 한가롭게 여유를 즐기고 있을때, 그녀가 약간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 니 오빠라는 작자가 생각보다 무대포더라고. "

" 응. 무서운 남자야.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가족의 목숨도 희생시킬 수 있는 사내거든. "

정확하게 알고 있다. '프로이테드 엔코(Proitted Annko)'. 공작가의 외아들이며, 유력한 계승자. 여린 외모와는 다르게 성격이 치밀하면서 손속에 자비가 없다고 잘 알려져있다.

" 사실 며칠 전부터 공작가에서 연락이 끊겼어. "

대충 예상은 했다. 중요한건 그녀의 어머니가 어떻게 됬냐는 것이고. 혹시 그녀를 인질삼아 르세뜨를 이용하려는 건 아니겠지? 나에겐 최악의 수다. 르세뜨의 선택은 뭘까. 내가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살레살레 흔든다.

" 걱정마. 널 절대 배신하는 일은 없어. 내 잘못인걸. "

그녀의 목소리가 떨린다. 눈물이 한방울, 두방울 맺히더니 결국 그녀는 참지 못하고 손으로 입을 가렸다. 이젠 그녀의 어머니를 구할 방법은 없다. 이미 나쁜 결과로 이루어졌는 지도 모른다.

" 흑흑. 구하고 싶어. 어머니를 구하고 싶어. "

생사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확인하고 싶다. 그녀의 솔직한 마음에 나도 가슴이 찡해진다. 그러나, 지금은 손쓸 도리가 없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 미안하다, 르세뜨. "

" 흐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

내가 그녀를 살며시 안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오열을 터트렸다.

" 엄마아아아... 으아아앙 엄마아아아아아아!! "

그래, 르세뜨. 내가 꼭 복수해줄게. 이것만큼은 약속하마.

지금 내 처지는 고작 이렇지만, 기다려.

깊은 밤, 나는 조용히 티타임을 즐기며 앞으로 해야할 일을 다시 한번 천천히 상기시키고 있다. 갑자기 몸이 뻑적지근한게 기분이 안좋다.

잠을 안자서 그런걸까. 몸을 일으켜 스트레칭을 해줘도 이상하게 편해지지 않는다. 아, 혹시 독의 효과가 나타나는건가? 자정이 지났으면 이제 오늘이 4일째를 맞이한다. 그러면 남은 기간은 4일.

" 아뜨린느. "

" 네, 왕자님. "

" 독의 효과가 나타나는 것 같다. 르세뜨를 불러줘. "

순식간에 다리가 후들거리고 이마에 땀방울이 맺힌다. 하지만 아직은 버틸만 하다. 한동안 아무렇지도 않아서 이렇게 갑작스럽게 효과가 나타날 줄은 몰랐다. 뭐, 독도 여러가지니까 결과도 여러가지겠지만.

" 네! "

아뜨린느가 서둘러 방을 나갔다. 다리에 힘이 없다. 간신히 터덜터덜 걸어서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이젠 모든 건 운에 달렸군. 내가 할만큼은 다 했다. 일의 성공의 여부는 약간의 운이 따라야 한다.

' 모두 잘해주겠지? '

쉬고 싶다.

눈을 떠보니 르세뜨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다. 목이 바짝바짝 탄다. 몸을 살짝 움직이려고 하자 온몸이 바늘 쑤시는 것처럼 아프다.

" 윽. "

이런건 좀 덜 사실적으로 만들어주면 안되나. 물이 마시고 싶다.

" 무.. 무우.. "

목소리가 안나온다. 르세뜨가 황급히 물컵을 들고 내 입에 천천히 부어준다. 감로수같이 달콤하다.

" 아직 독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몇개가 가능성이 있습니다. "

" 최대한 빨리 찾아내! "

아냐, 천천히 찾아도 돼. 최대한 버틸테니까. 시간을 끌어야 된다고. 그녀가 내 속마음을 알아들을리는 없지만.

" 갈리브. 힘내. 응? 알았지? "

그녀가 땀에 젖은 내 앞머리칼을 쓸어올렸다. 의원은 피를 뽑아가야한다면서 작은 병 몇 개에 담아갔다. 이젠 시간이 지나면 치료가 되겠지?

지친다.

또 다음날 아침이 되었다. 어제는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 자기만 했다. 르세뜨는 한시도 내 옆을 벗어나지 않는다. 헌신적인 여자다. 이젠 백설 공주보다 더 호감이 간다.

" 갈리브. 정신이 들어? "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어제보다 더 몸이 좋지 않다. 오늘은 의원이 오지 않았단다. 아마도 해독제를 만든다고 바빠서겠지. 제발 딱 내가 원하는 대로만 이루어지면 좋겠다.

또 눈이 감겨온다.

죽고 싶다. 몸이 불덩이같이 뜨겁다. 게임을 하면서 이게 왠 고생이람. 당장 게임 접속을 종료해서 팩을 집어던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게임 설정에서 감도를 조금 더 낮췄다. 그제서야 불편했던 몸이 조금 나아진다.

오늘로 6일째니까, 이젠 슬슬 의원이 해독제를 가져와야한다. 내가 잠시 잠들어있는 사이에 왕비가 왔다가 갔다고 한다.

한참이나 내가 잠에서 깨어나길 기다렸다고 했다.

' 진전이 있는건가. '

이를 악물며 반드시 그 공자라는 놈을 고통스럽게 죽이겠다고 마음 먹는다. 때마침 의원이 황급히 들어온다. 르세뜨가 얼른 자리를 비켜주었다. 의원은 해독제라며 나에게 기묘하게 보이는 액체를 입에 부었다. 토하고 싶을 정도로 냄새가 이상하다.

- 꿀꺽

이젠 시간이 지나봐야안다. 내일 아침이 고비가 될 것 같다. 이대로 르세뜨를 두고 죽으면 억울할 것 같지만, 만약에 정말로 죽으면 이복 남매로 플레이하는 것은 포기해야할 것 같다.

' 아냐. 약한 생각하지말자. 우선은 살아야한다. '

다음날 아침에도 몸은 뜨겁다. 독이 해독되지 않았다. 르세뜨가 의원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친다. 이대로 죽는거구나. 갑자기 의원이 결심한 얼굴로 내게 다가온다. 그리고 푸르죽죽한 내 손을 잡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 왕자님. 마지막으로 저에게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절 믿고 따라와주십시오. "

거부할 이유도, 여유도 없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몇개의 병을 품속에서 꺼냈다. 그가 말하길 독이라고 한다. 르세뜨가 기겁했지만, 내가 고개를 살며시 저었다.

" 해. "

나는 작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르세뜨가 울음을 터트리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의원은 독을 하나씩 첨가하면서 내 상태를 보겠단다. 독을 독으로 몰아낼 생각인가보다. 최후의 방법이다. 이미 손쓰기에는 늦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하고 죽어야 후회가 없을 것 같다.

의원이 먼저 투명한 액체를 내 입에 부었다. 입에 넣는 순간 온몸이 따가웠다.

송곳을 쑤시는 느낌이 아니라 마치 상처부위에 소금을 발라놓은 느낌이랄까. 이를 부드득 갈면서 겨우겨우 버텼다. 감도가 최하에도 불구하고 이정도 느낌이라면, 감도가 보통이었더라도 버티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다.

의원도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다음번에 다른 독을 내 입에 부었다. 이번엔 온몸이 불타는 것처럼 화끈거린다.

얼마나 뜨거운지 온 몸에 있는 수분이란 수분은 모두 증발시키는 것 같다. 뒤늦게 들어온 르세뜨가 계속해서 내 몸을 닦아내며 열을 식힌다.

마지막으로 의원이 파란색 액체를 입에 부으며 말했다.

" 이제 마지막입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 왕자님. 꼭 살아나셔야합니다. "

그의 눈에도 내가 이렇게 버티는 것이 장하게 보인 모양이다. 파란색 액체를 마시자 얼마있지않아 온 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지기 시작한다. 너무 춥다.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기 시작한다. 마치 얼어죽을 것 같다.

" 우웨에엑 "

입에서 거무죽죽한 피가 튀어나온다. 코에서도 피가 줄줄 흘렀다. 르세뜨는 눈물을 계속 흘리면서 피를 닦아낸다. 그녀의 온몸이 피투성이다.

살았다.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의원이 허허- 웃으며 내 손을 꼭 잡는다. 나도 기분이 상당히 좋다. 이겨냈다.

" 다행입니다. 버티신 것만 해도 정말로 대단하십니다. "

르세뜨가 날 꽉 안는다. 얼마나 심하게 울어대는지 콧물까지 줄줄 흐른다. 의원은 내가 안정을 취해야한다며 르세뜨와 함께 방을 나갔다. 나는 멍하게 천장을 바라본다. 며칠동안 꿈을 꾼것 같은 느낌이다. 내 주위는 온통 땀과 피투성이다. 아마 오늘이 8일째되는 날일 것이다.

' 그래도 행운의 여신이 내 편인 것 같네. '

이제 백설 공주와의 약속만이 남아있다. 상관없다. 목숨만 붙어있다면.

며칠이 더 지나고, 평소처럼은 아니지만 평범하게 걷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치료가 되자 백설 공주에게서 전언이 왔다. '약속'을 지키라고. 약속이라고 표현했지만, 계약이나 다름없다. 내 인장까지 찍었으니 돌이킬 수도 없고.

" 마크. 어머니께 소식을 전해줘. 내가 공주의 궁으로 간다고. "

" 네, 왕자님. "

르세뜨가 펄쩍 뛴다.

" 갈리브! 아직 몸이 덜.. "

" 괜찮아. 이젠 멀쩡해. 알고 있잖아? 각서는 지켜야된다는거. 인장까지 찍었다고. "

그녀의 얼굴이 어두워진다.

" 기다리고 있을께. "

르세뜨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마차가 곧 준비되자, 바로 공주의 궁으로 향했다. 내가 가진 각서를 들고. 내가 공주의 궁에 도착하자 시녀가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왔다.

" 공주님께서 계속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

" 그래? "

어지간히 몸이 달은 모양이다. 이젠 각서대로만 하면 나는 궁에서 쫓겨나야한다. 왕비와 함께. 내가 왔다는 소식을 들었는지 공주가 홀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연회에 가는 모습도 아닌데 한껏 치장한 모습이 마치 천사같다.

" 어머, 몸이 나은 모양이네? "

" 그래. 덕분에 해독이 깔끔하게 됬지. 그 의원에게 상을 내렸으면 좋겠어. "

" 나도 상을 내릴 생각이야. 호호호, 아주 후한 상을 말이야. "

백설 공주가 기분좋게 웃는다. 그녀가 뒤쪽으로 손을 내밀자 종이 한장이 얹어졌다. 각서다. 그녀는 각서를 내 앞에 들고 보란듯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 이제 니가 행동해야할 차례지? "

기분좋아 죽겠다는 얼굴이다.

" 한번의 기회를 줄게, 백설 공주. "

" 뭐? 호호호호호. 그래, 말해봐. "

" 단 한 번의 기회야. 각서를 파기시키게 해줄 기회를 한번 줄게. "

" 호호호호호호호호호. "

그녀가 어이없다는 듯이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주위에 있는 시녀들도 피식피식 웃으며 내 위아래를 경멸스럽게 바라본다. 공주가 얼마나 심하게 웃었는지 눈에 눈물이 살짝 고여있다.

" 미안하지만, 그 기회는 필요 없어. "

" 그래? 안타깝군. "

나의 자신만만한 모습에 그녀의 표정이 살짝 굳는다. 뭐가 저렇게 자신만만하지? 하고 생각하는 것 같다.

" 빨리 궁에서 나가. "

" 잠시, 조금만 있어봐. "

" ? "

딱 맞춰서 누군가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약간 나이가 든 남자다. 백설 공주가 그를 모를 리가 없었다. 왜냐하면, 왕의 어명을 전하는 신하였으니까.

" 어명을 받들라! "

나와 공주를 비롯해 모든 사람들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남자는 고급스러운 긴 종이를 양손으로 쫙 펼친다.

" 오늘부로 '백설 리츠웰(Snow White Ritzwell)' 공주의 직위를 해제한다. "

백설 공주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고개를 든다.

" 무.. 무슨 소리야. "

그리고 천천히 내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아마도 내 입에 걸린 비릿한 웃음을 보았을 것이다.

" 이게.. 무슨 소리야아아아아아아앗!!!!!!!!!!!! "

============================ 작품 후기 ============================

대반전.

과연 주인공은 어떤 방법으로 왕을 구워삶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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