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 ... 그리하여 '백설 리츠웰(Snow White Ritzwell)'을 동쪽 끝의 도시, '라인하르츠(Linehartz)'로 보내도록 하겠도다. "
공주는 말이 없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지만, 그녀의 두 손은 드레스 끝자락을 강하게 움켜쥐고 있다.
" 알겠..습니다. "
그녀가 쫓겨난 이유는 바로 내 몸에 큰 상처를 입혀서였다. 그녀도 지은 죄가 있어서 그런지, 쫓겨남에 대한 반발을 하지 못한다.
그녀는 왕을 향해 공손히 인사하고 천천히 일어났다. 그녀의 두 눈이 퉁퉁 부어있다.
밤새 울었는지 얼굴이 초췌해보인다. 백설 공주는 나를 한번 노려보고 돌아서 밖을 나간다.
나야 물론 그녀를 따라 나갔고.
" 백설 공주. "
그녀가 우뚝 멈춘다. 그리고 천천히 돌아보았다. 분노가 잠재된 비웃음이다.
" 이젠 이 나라 공주가 아닙니다, 갈리브 왕자님. "
" 이겼다고 생각했지? "
비웃음이 사라진다. 백설 공주는 몸을 돌려 나를 정면으로 노려보았다.
" 끝났다고 생각해? 하, 두고봐, 갈리브. 이 내가, 여기서 무너질 것 같아? "
" 역시 내 기대를 충족 시키는 군, 백설. 하지만 이건 꼭 기억해둬. "
내가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녀의 몸이 경직된다.
" 만약에 나에게 사로잡히게 되면, 이번처럼 순순히 놔주진 않을거야. "
이젠 더 이상 그녀에겐 용건이 없다. 이대로 그녀를 놔줘도 되냐고? 물론. 언젠가는 그녀는 돌아온다. 그 시일이 얼마가 될지는 확신하지 못하지만, 공작의 일이 마무리되면 곧바로라고 예상하고 있다.
" 조만간 다시 보지, 내 사랑. "
" !! "
내가 그녀 옆을 스쳐 지나간다.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나와 그녀가 헤어졌다.
" 어머니, 이걸 받으시죠. "
" 이..건? "
내가 왕비에게 작은 병을 내밀었다. 그녀는 병을 건네받고 무엇이냐는 표정으로 올려다본다. 그게 무엇일것 같아, 왕비?
" 독약입니다. "
" !! "
" 알아서 해주리라 믿습니다. "
왕비의 손이 덜덜 떨린다. 막상 실천하려니 두려운 모양이다. 나는 떨리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삐져나온 머리칼을 쓸어서 귀 뒤로 넘겨준다.
" 어머니, 하실 수 있겠죠? "
그녀는 자신의 손안에 담긴 병만 물끄러미 바라본다. 예전의 그 강한 모습을 보여주던 왕비는 어디로 갔을까. 그녀가 마른 침을 꿀꺽 삼킨다.
" 해.. 해보마. "
" 잘 생각하셨습니다. 이걸로 공작가를 무너뜨릴 순 없지만, 그래도 물러나게 할 수는 있습니다. "
" 너.. 정말로 갈리브가.. 맞느냐? "
왕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물론, 아니지 왕비.
" 맞습니다, 어머니. 걱정마십시오. 다 우리들을 위한 일입니다. 절 믿으십시오. "
" 그래.. 그래, 갈리브. 우리 아들.. 내가 믿으마. "
왕비가 이를 악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로 왕에 대한 일도 끝이다. 의원은 깔끔하게 처리했을테니, 이젠 내가 어떻게 해야 가장 인상깊게 왕으로 등극하느냐 뿐이다. 백설 공주에게 붙었던 세력들은 아마 새 줄을 타기 위해서 잡고 있던 썩은 줄을 놓을 것이 분명하다. 그 새 줄은 내가 될 것이고.
" 크흐흐흐. "
며칠이 지났다. 백설 공주도 가버리고, 왕비와도 되도록이면 만나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시간을 내 궁 안에서 보냈다.
할 일이라고는 르세뜨와 이야기하거나 침대에서 뒹구는 것 뿐이었지만. 물론 드디어 아뜨린느를 가지는 것도 성공했다. 몇번 치근덕대면서 희롱하다가 아무도 없는 밤에 그녀를 덮쳤는데, 그 이후로 만사천리였다.
르세뜨가 침대에 없으면, 아뜨린느가 그 침대를 차지했다.
시간이 되길 기다리는 오후, 누군가 내 방문을 노크한다. 르세뜨인가.
" 르세뜨야? "
" 접니다, 왕자님. 왕궁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
" 왕궁에서? "
정신이 번쩍든다. 드디어 때가 왔다. 이젠 조만간 왕이 죽겠구나.
" 무슨 일로? "
" 폐하께서 편찮으시답니다. 빠르게 입궁하라고 왕비님께서 전달하라 하셨습니다. "
지체할 시간이 없다. 빠르게 입고있던 옷을 벗고 외출복으로 갈아입는다. 마크에게 마차를 서둘러 준비하라 명하고, 아뜨린느를 불러 르세뜨를 보고 '때가 됬다'고 전하라고 시켰다. 옷을 입자마자 궁의 입구에서 마차를 탔다.
" 최대한 빨리 가! "
마차가 출발한다. 평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달렸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왕궁이 보였다. 순식간에 마차에서 뛰어내린 나는 왕이 머무는 침실까지 달려갔다.
" 편찮으시다니? 이게 무슨 소린가! "
" 폐하께선 지금 잠드셨으니 목소리를 조금 줄여주십시오, 왕자님. "
내가 문을 향해 눈짓하자 시종이 천천히 문을 열었다. 침대에 누워있는 왕이 보인다. 얼굴이 푸르죽죽하다. 왕비가 그 옆에서 손수건으로 눈을 찍고 있다.
" 이게 무슨 일인가! "
" 저, 왕께서.. 중독이 되신 것 같아... "
" 중독? 혹시.. 나처럼 말인가?! "
" 그러신 것 같습니다만. "
내가 의원들을 살펴보다가 심각한 얼굴로 다시 말했다.
" 그 의원은? 나를 고쳤던 의원 말이다! "
" 사실.. 며칠 전에 변사체로 발견이.. "
" 뭐? 그게.. 그게 무슨 소리야! "
왕비는 내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고 생각하자 주의를 준다. 내가 의원들을 향해 나오라고 눈짓하자 그들이 고개를 숙인채 침실을 나온다.
" 그럼 너희들로는 저 독을 못 고친다는 얘기냐? "
" 그게, 갑작스럽게 폐하께서 쓰러지셨고, 또 독에 정통한 의원은 그 사람 뿐이라.. 저희들은 그냥 독에 대해서 얕은 지식밖에 없습니다. 송구합니다. "
" 하, 누구의 짓인지는 아느냐? "
의원들이 고개를 흔든다. 때마침 누군가가 걸어온다. 조사단의 우두머리인 '루시아르도 벤더(Louciardo Vender)' 남작이다. 근위병 대장도 그의 옆에 있다.
" 이게 무슨 일이오. "
의원들이 고개를 푹 숙인다. 나는 남작과 대장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들도 인사를 받고 입을 연다.
" 독이라니? "
" 제가 당했던 독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그 흉수를 빨리 찾아야할 것 같습니다. "
" 허허. "
남작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심각한 일이다. 왕의 목숨을 취하려 했다니. 왕자가 독에 중독된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다.
" 누군가가 방문한 적이 있는가? "
" 전에 한동안 폐하께서 방문을 거부하셔서, 요새 며칠간 밀린 업무때문에 많은 귀족들이 방문했습니다만. "
사건은 미궁에 빠지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어두운 표정을 짓자 남작이 입을 열었다.
" 뭐 알고 계시는 거라도 있습니까, 왕자님? "
" 저, 그게. "
내가 양옆을 눈짓하자 남작이 나를 혼자 데리고 비어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근위병 대장을 보고 입구를 확실히 막고 있어라는 말과 함께.
" 폐하께서 중독되신 독과 같은 독에 중독되셨다고 들었습니다. "
" 네, 맞습니다. 저도 그것때문에 죽는 걸 살아났죠. 설마 아버지께서 저와 똑같은 독에 중독되셨다니.. "
" 알고 계시는거라도...? "
남작의 표정이 심각해진다. 내가 뭔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물론 알고 있고 말이지.
" 하아. "
" 말을 해보십시오. 아무도 듣지 않습니다. 저에게 얘기해주시죠. "
" 절대 발설하지 마십시오. "
" 알겠습니다. "
그 후에 나는 찬찬히 그에게 말을 했다. 전에 시찰을 나가서 '프로이테드' 공자에게 습격을 당했고, 독을 억지로 먹게 되었다고. 그리고 만약에 이 일을 발설하면 처참하게 죽이겠다는 협박까지 들었다고 말했다. 며칠 뒤에 중독이 되었고, 독에 정통한 의원 덕분에 간신히 해독되었다는 말까지하고 입을 다물었다.
" 저도 그 얘기를 들었습니다. 사경을 헤매셨다고 했는데, 가보지 못해서 죄송하군요. "
" 아닙니다. 다 지난 일입니다. "
" 그러면 그 의원은..? "
나의 얼굴이 어두워진다.
" 저도 이상해서 의원들에게 물어봤는데, 이미 며칠전에 변사체로 변했다고 합니다. "
" 이럴 수가. "
남작이 한숨을 푹 내쉰다. 어마어마하게 큰일이다. 자신의 손이 떨릴 정도로.
" 좋은 정보 고맙습니다. 전 그럼 바빠서 가보겠습니다. "
" 네, 반가웠습니다, 남작님. "
" 네, 왕자님. 그럼. "
남작은 빠르게 방을 빠져나갔다. 근위병 대장에게 이것저것 손짓으로 무언가를 지시했고, 대장은 고개를 끄덕이고 어디론가 뛰어간다. 아마 왕의 방문록을 가지러 갔을 것이다. 공자가 왕을 만났는지를.
" 흐흐흐흐. "
이미 손을 다 써두었다. 왕비에게 시켜서 공자를 한번 왕과 대면시켜라고 했기 때문에, 아마도 방문록에는 공자의 이름이 떡-하니 적혀있을 것이다.
공자도 뒤가 굉장히 구릴 것이기 때문에 일단 용의자로 지목만 된다고 해도 의심을 벗어나긴 힘들 것이고. 결정적으로 내 증명이 있기 때문에 아마 남작은 속으로 공자가 범인이라고 확정짓고 있을 것이다.
" 크하하하하하하. "
프로이테드, 감히 날 물 먹였겠다? 그 때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렸다. 아직 부족해, 공자나으리.
복수는 끝나지 않았다.
" 일이 모두 끝나는대로 결혼을 준비해, 르세뜨. 난 지금 손대기가 애매해서 힘들거든. "
" 응, 갈리브. 헤헤. "
그녀가 수줍게 웃었다. 나와 결혼한다는 생각에 기쁜 모양이다.
공녀 정도면 충분히 좋은 색시감이라서 나도 기분이 좋다. 이젠 왕의 목숨은 길어봤자 3일 정도일 것이다.
나이도 꽤 들었으니 어쩌면 그것보다 훨씬 빨리 죽을지도 모른다. 독에 정통한 의원도 이젠 없고, 의원들이 손쓸 틈도 없이 죽겠지. 독에 골골대는 사람이 마약을 찾을리도 없고. 왕비도 그에 대한 증거를 전부 없애면 혐의는 오로지 공자만 둘러쓰게 될 것이다.
" 거의 다 끝났어, 르세뜨. "
" 응. "
르세뜨가 내 품에 안긴다. 공자도 대충 처리했으니, 이젠 남은건 공작. 사실 아들이 저리 크게 타격을 입으면, 공작도 타격을 입기 마련일테니 일단 단기적으로 본다면 내 승리나 마찬가지다. 이대로 왕이 되면, 공작을 친히 밟아주면 될테니까.
" 여기 증인이 있습니다, 공자님. 혐의를 부인하실 생각입니까? "
" 갈.리.비.오.르 !! "
공자가 이를 부드득 갈며 나를 노려본다. 당장이라도 날 죽일듯이 노려보고 있지만, 옆에서 근위병 두 명이 그의 팔을 잡고 있었다.
" 나는 모르는 일이다! 내가 방문했던 이유는 없단 말이다!! 폐하께서 날 부르시기에 잠시 들른 것 뿐이라고! "
" 하, 그러면 왕자님과 같은 독에 중독되었던 것은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
" 그걸 내가 어찌 알아!! 저 놈이 수를 썼겠지! "
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남작도 인상을 찌푸리고 들고있던 문서를 탁자 위에 탁- 하고 내던졌다.
" 이렇게 계속 부정만 하실 생각이십니까! 좋게 끝내자 이 말입니다! 험한 꼴 보기 전에! "
" 뭐? 험한 꼴? 하, 감히 너따위가 날 어떻게 할 수 있을 거라고 보나? "
남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혐의를 떠나서 자존심을 긁는 소리에 그의 머리 뚜껑이 열려버렸다. 그는 공자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근위병에게 소리쳤다.
" 이 자를 당장 감옥에 집어 넣어! 혐의를 인정할 때까지 물도 주지 마라! "
" 뭐라고!! 당장 이것 못 놔?! "
공자가 손을 흔들자 근위병이 휘청거린다. 두 명의 근위병이 더 달라붙자 겨우 그를 감옥에 끌고 갈 수 있었다. 눈앞에서 사라질 때까지 공자는 나와 남작에게 욕을 퍼부었다.
" 휴. 이번 사건 말고도 공자가 저지른 범죄가 엄청나더군요. "
남작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역시 내 예상대로 뒤가 엄청 구렸던 모양이다. 공작가에서 왕의 중독 사건에 대해 발언하러온 사람들이 이것저것 부실한 증거들에 대해서 해명했지만, 남작이 꺼내든 다른 비리사건과 범죄사건까지는 해명하지 못했다. 다들 처음보는 눈치였다.
" 일단 조금 더 조사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만, 거의 확정된 것 같습니다. "
" 다행이군요. 수고하셨습니다, 남작님. 저는 이만 아버지를 만나뵈러 가야겠습니다. "
" 네, 증언 감사합니다, 왕자님. "
완벽하다. 이젠 공자도 감옥에 집어 넣어버렸고, 공작가도 한 발 물러섰다. 왕의 상태는 오늘내일하고 있었으니, 나는 그의 옆에서 임종만 지키면 된다.
' 흐흐흐, 계획대로. '
============================ 작품 후기 ============================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더욱 더 재밌는 스토리로 보답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