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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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을 죽어라 달려야하는 길을 하루로 줄였다. 말은 영지에 도착하자마자 앞으로 쓰러지며 거품을 물었다.

- 탁탁

" 수고했다. "

거의 죽기 일보직전까지 달린 말의 몸통을 두어번 치고 후작 성으로 뛰어갔다. 밤새 달려왔기에 내 몰골도 말이 아니었지만, 여기서 시간을 지체할 순 없었다. 후작은 날 지켜줄 힘이 없다.

" 할아버님! "

" 갈리브? 갑자기 무슨 일이냐? "

후작이 놀라며 내 위아래를 훑어본다. 먼지 투성이에, 옷이 찢어진 곳은 피가 흘러서 붉게 물들어있다.

" 당했습니다, 하. 어머니를 데리고 나오지 못했습니다.. 제가.. 제가. "

" 괜찮다. 괜찮아. 그래그래. "

후작이 나를 안아준다. 그의 품에 안겨 거의 기절하는 듯이 눈을 감았다.

바스락 거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시녀다. 음식을 탁자 위에 놓고 있었는데, 내가 벌떡 일어나자 화들짝 놀라며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다. 머리맡에는 새 옷도 보인다.

" 저기, 죄.. 죄송합니다. "

" 아니, 아니다. "

시녀가 꾸벅 인사를 하고 황급히 방을 나갔다. 굉장히 허기가 진 상태라서 탁자를 향해 몸을 옮겼다. 일단 손에 집히는 대로 입에 쑤셔넣었다. 백설 공주가 날 받아줄까? 받아주지 못한다고 해도 가야한다. 이젠 다른 답이 없다.

대충 배가 불러왔다. 서둘러 넓적한 흰 천을 가져와 음식을 담았다. 최대한 마른 음식을 흰 천에 담고 물병을 하나 넣었다. 그런 다음에 새옷을 갈아입고 흰 천을 돌돌 말아서 내 등 뒤에 멘다. 후작이 지내는 침실 문을 두드리니 인기척이 느껴진다.

" 누구냐? "

" 접니다, 할아버님. "

" 들어오거라. "

문을 여니 촛불을 의지해 책을 읽고 있는 후작이 보인다. 그는 내 모습을 보더니 허허- 하고 웃었다.

" 벌써 떠나려고? "

" 여기에 오래 있을 수 없습니다. 빠른 말 한 마리만 내주십시오. "

" 흠. 따라와라. "

후작이 나를 마굿간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 백마 한 마리를 꺼내왔다. 기세가 보통이 아니다.

- 푸르륵

후작이 백마의 얼굴을 쓰다듬자 꼬리가 이리저리 흔들린다.

" '셰넌'이라고 한단다. 이 영지에서 가장 좋은 명마지. 타고 가거라. "

" 감사합니다, 할아버님. "

내가 안장과 고삐를 꺼내와 말에 씌우고 말에 올라타 후작을 바라보았다.

" 여기서 동쪽 끝 도시까지 가려면 얼마나 가야합니까? "

" 동쪽 끝 도시? '라인하르츠'라면 족히 일주일은 뛰어가야하는데? 설마 거기까지 가는 것이냐? "

고개를 끄덕였다. 후작의 입에서 작은 신음성이 터진다. 상당히 먼 길이다. 하지만, 가야한다.

" 할아버님. 건강하십시오. 꼭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

" 알겠다, 갈리브. 꼭 몸조심 하거라. "

" 네. 이럇! "

- 히히히힝

셰넌이 달린다. 처음에 탔던 말과 확실히 차이가 난다. 순식간에 영지에서 벗어나 밤길을 달렸다.

- 두구두구두구두구

말 발굽소리만 울린다. 어떻게 백설 공주와 합해야하는거지? 내가 가면 죽이려고 안달이 날텐데. 왕이 죽은 것은 아직 그녀에게 소식이 전달되지 못했을테니, 그것을 알려주면서 내 편으로 끌어들여야겠군.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백설 공주가 순순히 나의 말을 들을 확률은 적었다. 하지만, 이러나 저러나 죽는다면 그래도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이쪽에 도박을 해보는 편이 낫지 않을까.

" 이랴앗! "

벌써 5일째다. 며칠은 잠도 안자고 달렸으니 조만간이면 '라인하르츠'가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셰넌도 잘 먹고 달린 편이 아니라서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셰넌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조용히 속삭인다.

" 조금만 힘내자, 셰넌. 도착하면 먹고 싶은 것도 실컷 먹을 수 있어. "

- 히히힝

꼬리를 흔든다. 힘내겠다는 표시다. 그래도 명마라는 이름값을 하는지 무언가 통하는게 있다.

대충 휴식을 끝낸 나는 다시 셰넌의 등에 올라탔다. 어제부터 삭막한 사막이 보이더니 이젠 사방천지가 모래다.

방향은 오직 북극성으로 찾아낼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물병에 물을 떠와서 다행이었지만, 내가 마실 물까지 셰넌에게 주었기 때문에, 지금 나는 갈증에 미쳐버릴 것 같다.

셰넌의 오줌이라도 받아먹어야할 상황이었다.

' 딱 하루만 더 달려보자. 아니면, 오줌이라도 받아마셔야지. '

말 오줌을 마셔야한다니. 물론 언제부터인지 셰넌도 오줌을 거의 싸지 않았다. 이 녀석도 물이 극도로 부족했다.

" 셰넌 가자! 이럇. "

- 히히히히힝

달린다. 끝없이 달린다. 간혹 이 길이 맞나 싶기도 했다. 내가 잘못 들어온 거는 아닌가하고 걱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너무 들어와버렸다. 돌아갈 방법은 없다. 무조건 앞으로 전진하는 수 밖에. 이젠 라인하르츠가 나오기만을 바랄 뿐이다. 셰넌에게 먹인 물도 이제 마지막이다. 먹을 것은 진작에 다 떨어졌다.

" 하아.. 하아.. "

아까 멀리서 보이던 무언가가, 다가갔더니 아무것도 없다. 이게 말로만 듣던 신기루인가. 셰넌도 이젠 힘이 다 빠져버렸는지, 겨우 터덜터덜 걸어간다. 포기하고 싶은 그 순간, 큰 사구가 하나 앞을 가로막았다. 포기할까? 나도 노력 많이 했잖아. 이정도면 최선을 다한거야.

' 이것만 넘어가자. 없으면 포기하자. '

셰넌도 움직이지 않으려고 한다. 내가 말에서 내려 겨우겨우 녀석을 달래서 사구를 올라간다. 발이 뜨거운 모래 속으로 푹푹 잠긴다. 머리가 어질하다. 하지만, 아직 쓰러질 순 없다. 쓰러지는 것은 사구를 넘고나서도 충분하다.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 아, 셰넌. 우린 해냈어. "

셰넌도 그 모습을 보고 좋았는지 힘차게 콧바람을 낸다. 눈앞에 푸른 바다가 펼쳐져있다. 수많은 배들이 항구에 정착되어 있었고, 도시는 큰 황토색 벽으로 둘러싸여있다. 사막와 바다를 낀 도시, '라인하르츠'. 정말로 눈물이 날 뻔 했다.

- 사람은 끝을 보기 전에는 포기해서는 안된다. 쓰러지기 직전이라도 마지막 산을 넘어봐야 한다.

갑자기 마음 속에서 희망이 샘솟는다. 없던 힘이 솟아오르고, 어지럽던 머리도 차츰 맑아졌다.

" 가자, 셰넌. "

나는 셰넌 위로 올라타서 고삐를 강하게 내리쳤다. 녀석도 좋은지 힘차게 달려간다. 드디어 '라인하르츠'에 도착했다.

라인하르츠에 들어오자마자 문제를 겪었다. 신분 증명이 필요하단다. 지금 내가 왕자라는 것을 밝혀도 될까? 밝혀도 그가 믿어줄지도 의문이고, 공주가 먼저 알아채서는 좋을 것이 없다. 최대한 은밀하게 그녀를 만나야한다.

" 이거면 되겠소? "

내가 그에게 손에 끼고 있던 금반지를 건넸다. 뇌물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상황에서 금반지 두 개를 끼고 있었던 것이 다행인 것 같다. 물론 다른 하나는 혹시를 위해 몸속에 숨겨두었다. 경비병은 흠, 하고 금반지를 보더니 곧 턱으로 안쪽을 가리킨다. 통과다. 다행히 뇌물이 먹혔다.

항구 도시라 그런지 도시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물건을 팔고 있다. 다른 나라에서 가져온 물건들과 리츠웰 왕국의 물건이 온 길가에 널려있다. 소음도 장난이 아니다.

" 자, 이걸로 말할 것 같으면 '에인탈(Eintar)' 왕국에서 불티나게 팔리던.. "

" 자자, 오세요! 싸게 드립니다! 물물 교환도 가능합니다! 물건만 가지고 오세요! "

주위를 둘러보니 여관이 하나 보였다. 상당히 높고 세련되어 보인다. 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여관 앞에서 무언가를 적고 어린 꼬마남자에게 건네자 그 녀석이 말을 건네받고 어디론가 데리고 갔다.

' 일단 저기로 가자. '

내가 여관 앞까지 다가가자 다른 꼬마아이가 나에게 달라붙어 종이를 내민다. 아무 말 없이 멀뚱히 나를 쳐다보고 있는데, 나도 뭘 해야할지 모른다.

" 뭘 적어란 말이지? "

" 손님의 이름과 말의 이름과 특징을 적어주세요. 나중에 찾아가실때 말씀하시면 되요. "

소년에게 목탄을 받아서 곰곰히 생각하다가 종이에 글을 적었다.

' 글렌. 셰넌. 백마. '

갈리브란 이름은 되도록이면 피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꼬마는 그 종이를 들고 말을 데리고 갔다.

여관의 뒤쪽으로 가는 것을 보니 아마 그쪽에 마굿간 비스무리한게 있나보다. 여관의 1층은 작은 식당을 하고 있었는지 사람이 가득하다.

식기가 잘그락 거리는 소리와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시끄럽다. 카운터로 다가가자 두 남녀가 나를 바라보고 인사를 건넸다.

" 어서오십시오, '푸른 하늘이 머무르는 곳' 입니다. "

" 좀 오래 묵을 것이고, 식사는 여기서 하겠네. 1인실이 필요하고. "

" 하루를 묵으시면 1실버, 식사까지 해결하실거면 1실버 추가해서 2실버입니다. "

왕자로 살아서 그런지 돈의 개념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옷 속에 있던 금반지를 만지작 거리다가 카운터 위에 내려놓았다. 둘의 눈이 약간 커졌다.

" 이걸로 최대한. "

" 어, 잠시만요. 지배인님! "

여자가 걸어온다. 탁자에 앉자있던 몇몇이 여자를 보며 휘바람을 불고 오늘 시간 되냐고 소리친다.

" 오늘 바빠서 안되요! "

남자들이 왁자지껄 웃는다. 또 차였다고 소리치며 주먹으로 가볍게 탁자를 쿵쿵- 쳤다.

" 무슨 일이지? "

" 손님께서 이걸 내셔서.. "

머리가 특이하게도 붉다. 가슴이 푹 파인 옷을 입고 있어서 큰 가슴이 강조되고 있었다.

" 2골드로 쳐드리죠. 얼마나 묵으실거죠? "

" 10일 묵겠소. 식사는 여기서 하고. "

여자가 살짝 눈썹을 올린다. 하지만 별말하지 않고 작은 골드 동전 하나와 80개의 실버를 꺼내서 나에게 건네준다. 나는 실버 10개를 각각 남녀에게 팁을 주었다. 붉은 머리 여자에게도 건네려고 했지만, 그녀는 받지 않는다.

" 팁은 필요없어요. "

안받는다면 뭐. 나는 돈을 싹 쓸어 주머니에 넣었다. 그래도 60개의 실버는 너무 많다. 우리나라 100원짜리 동전 크기정도여서 주머니에 넣었더니 빵빵해진다.

지배인이 건넨 열쇠를 들고 4층으로 올라갔다. 자그마한 방이다. 그래도 창문을 여니 푸른 바다가 눈앞에 펼쳐졌다.

여기서 바다와는 꽤 먼 거리였지만, 그래도 4층이라서 보이는 모양이다. 혹시 몰라서 골드는 침대 밑, 보이지 않는 곳에 몰래 숨기고 실버 60개 중에서 30개는 서랍에 넣어두고, 30개만 주머니에 넣었다. 일단 옷이랑 생필품 정도는 사야하니까.

여관을 나와 주위를 빙 둘러본다. 백설 공주는 어디에 있는거지? 라인하르츠에는 성이 없었다. 그러면 작은 저택같은 곳에 있는 걸까? 알 수가 없다. 물건을 사면서 대충 수소문 해야할 듯 싶다.

" 자 여기로 오세요, 멋있는 오빠! 얼굴에 비해서 옷이 너무 후지네. 여기가 딱 좋은 곳이에요! "

" 어머, 여기로 와요. 싸게 해줄게! 멋있게 만들어줄 수 있다니까? "

옷을 팔고 있는 곳으로 가니 여러 여자들이 나에게 엉겨붙으며 자기네들 가게로 오라고 유혹했다. 그 중에서 싸게 해준다는 말을 한 여자의 가게로 들어갔다. 할 수 없지. 일단 돈이 없으니까. 가게로 들어가자 주인되는 남자가 내 몸의 치수를 재고 옷을 꺼내왔다. 너무 촌스럽다.

" 아니아니, 색이 너무 화려한건 싫어. 되도록이면 갈색톤으로 해. "

남자가 다시 옷을 뒤적거리더니 황토색 옷을 꺼내들었다. 마치 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오는 옷같다. 바지는 회색 톤으로 나에게 준다. 주위를 둘러보다가 흰색 두건이 보여서 그것까지 샀다. 다 합치니 10 실버다. 생각보다 저렴하다. 계산을 하고 흰 두건을 머리에 칭칭 감았다. 이제야 주위 사람들과 비슷해 보인다.

' 이제 백설 공주를 찾는다. '

막막하다. 어디서 부터 시작해야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이러면 무조건 왕국에서 운영하는 장소로 가는 편이 옳다.

' 백설 공주, 어디있나! '

백설 공주와의 만남이 그리 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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