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7/150)

17

백설 공주를 만나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잠시 큰 건물 앞을 지나고 있을때, 건물의 현관이 벌컥 열리더니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두건을 쓰고 있는 사람은 남자의 손길에 바닥에 쓰러졌고, 여 기사로 보이는 누군가가 쓰러진 사람에게 달려갔다.

" 공주님! "

공주님이라고? 무언가 이상하다. 공주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 헹! 꼴에 공주라고는. 이 도시에서 니같은 년에게 빌려줄 돈은 한푼도 없다! 혹시 모를까. 내 거시기라도 한번 빨아준다면. 낄낄낄. "

" 그래! 한번에 1골드씩 주지. 어때, 생각있으면 말하라고? "

남자 둘이서 공주를 보며 낄낄 거린다. 키가 큰 남자가 선심 쓰듯이 그녀의 앞에 실버 동전 하나를 떨어트린다.

" 그거라도 먹고 떨어져. 낄낄. 단, 공주가 직접 주워. "

여 기사가 둘을 노려본다. 쓰러진 채로 동전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공주가 천천히 기어가서 그 동전을 주웠다.

남자들은 바닥에 침을 한번 찍 뱉고 다시 건물로 들어갔다. 지나가는 행인들이 그녀들을 한번씩 쳐다보았지만, 무시하고 갈 길을 걸어간다.

비참하다. 솔직히 나도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도 어디서 의식주는 쉽게 해결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뭔가 안타깝다.

' 그래도 호감이 가는 여자였는데. '

괜히 그녀에게 심술 부린건 있었다. 함정에 빠트려 여기로 보내버린 것도 극적인 만남을 위한 의도였는데, 이런건 원치 않았다.

두건이 살며시 풀리자, 초췌한 모습의 백설 공주의 모습이 드러난다. 그 희던 피부는 푸석푸석해보이고, 윤기가 흐르던 금빛 머리는 더이상 반짝이지 않았다.

기사는 그녀를 부축해 일으켜 세우고 그녀의 몸에 묻은 모래를 털어냈다.

" 공주님. 괜찮으세요? "

백설 공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에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눈빛이 죽어있다. 그 자신만만하던 백설 공주는 사라져버렸다. 둘은 어디로 걸어가기 시작한다. 바로 그들의 뒤를 쫓아갔다. 골목 이리저리를 속속 다니는데, 하마터면 놓칠 뻔 했다. 코너를 도는 그 순간, 갑자기 목에 칼이 들어온다.

" 누구냐! "

내 미행을 기사가 눈치챈 모양이었다. 나는 두 손을 들어 해칠 의도가 없다는 것을 밝혔다. 하지만 기사는 칼을 내려놓지 않는다.

" 두건을 풀어. "

나는 천천히 머리에 쓰고 있는 두건을 풀었다. 백설 공주의 얼굴이 점점 경악으로 바뀐다. 기사가 뒤를 슬쩍보고 놀란 표정의 백설 공주에게 입을 연다.

" 알고 있는 사람입니까? "

백설 공주는 아무 말 하지 않는다. 나도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보기만 한다. 한참동안이나 서로 말이 없다가 백설 공주가 드디어 말문을 연다.

" 놔줘. "

기사가 내 목에 겨눈 칼을 천천히 내리고 검집에 넣는다. 백설 공주는 내 위아래를 슥 훑어보고 다시 입을 열었다.

" 따라와. "

백설 공주가 앞장 선다. 조금 더 걸어서 긴 골목이 있는 곳에 있는 수많은 문 가운데, 낡아보이는 문앞에서 백설 공주가 조그만 주먹으로 노크를 똑똑- 했다.

" 나야, 카렌. "

" 공주님. "

문이 열린다. 그 시녀들중 하나다. 예전 공주의 궁에서 공주의 방앞에 서 있던. 다른 한명은 보이지 않는다. 카렌은 기사를 보고, 다음 나를 보았을때 깜짝 놀란다. 숨을 헉-하고 들이마시며 굳었는데, 공주가 조용히 말했다.

" 걱정하지마. 들어와. "

백설 공주가 머리로 문 안쪽을 가리킨다. 화가 나서 펄펄 뛸 줄 알았는데, 그래도 나를 대할때 차분하다. 집안은 초라했다. 그 흔한 서랍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거라고는 안쪽에 방 하나에 바깥에 침대 하나, 탁자에 의자 하나 뿐이다.

" 거기 앉아. "

카렌이라는 시녀는 슬그머니 방으로 들어갔다. 아직 밖은 낮인데, 안은 어둑어둑했다. 기사가 촛불을 두 개정도 켜자 사물을 분간할 수 있었다. 백설 공주는 의자에 앉은 나를 멀뚱히 쳐다보고 있다. 분노도, 비웃음도 없다.

" 날 나락으로 빠트렸다고 생각한다면, 정답이야. 지금 완전 지옥이거든. "

난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공주는 기사를 보며 조용히 말했다.

" 자리좀 비켜줄래? 방안에서 기다리고 있어. 둘이서 오랫동안 할 말이 있을 것 같은데 말이야. "

" 네, 공주님. "

기사가 방안으로 들어갔다. 이젠 우리 둘 뿐이다.

" 그런데 솔직히 많이 놀랐어. 니가 여길 오다니 말이야. 행색을 보니, 무슨 사정이 있는 것 같은데? "

공주는 내 처지를 정확하게 짚었다.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녀를 속이고 싶은 마음도 없고.

" 맞아. 사정이 있어. 일단 그걸 떠나서,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

" 뭐? "

" 미안하다. "

백설 공주가 크게 숨을 들이쉰다. 눈이 사르르 떨린다. 입을 일자로 굳게 다물고 있는데, 울음을 참고 있는 것 같았다.

" 미안하다, 백설 공주. 이렇게 살고 있으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내가 너무 널 험악하게 대한 것 같다. "

" 그게... 다야? "

눈물이 한 방울 떨어진다. 그것이 그녀의 눈물샘을 터트려버린 것 같다. 그녀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턱을 떨었다.

" 흑흑. 나쁜 새끼. 지옥에 떨어질 새끼..! "

" 미안하다, 공주. 할 말이 없어. "

" 흐어어엉. "

그녀는 숨죽여 울기 시작했다. 한참을 울던 백설 공주는 눈물을 닦고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 널 절대 용서할 생각은 없어. "

" 그래. "

" 죗값은 언젠간 치뤄야 할거야. "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그녀와의 관계를 회복시켜야한다. 그 후에 그녀의 마음을 녹이면 될 일이다.

" 일단 감정 싸움은 여기까지로 하지. 넌 무슨 일로 온건데? 보아하니 나랑 사정이 크게 틀려보이지 않는데? "

" 그래. 르세뜨에게 배신당했다. "

" 호호, 결국 뒷통수를 맞았구나. 계속 비웃어주고 싶지만, 내 처지에 그럴 형편이 못되서 안타깝네. "

" 다행이네. 기죽은 백설 공주는 보기 싫었는데. "

그녀가 나를 노려본다. 흥- 하고 고개를 휙 돌리고 공주가 말했다.

" 그러든지 말든지. 그럼 날 왜 찾아온건데? "

" 힘을 합치자. "

" 무슨 소리야? "

" 공작가가 왕궁을 칠 것 같아. 나도 급히 도망쳐 나온거야. "

그녀가 다시 나를 돌아본다. 얼굴이 상당히 굳어있다.

" 그게 무슨 소리야. 공작가가 왕궁을 치다니? 감히 역적이 되겠단 소리야? "

"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

백설 공주가 입을 벌렸다. 눈을 몇번 깜빡이며 멍하게 있다가 천천히 한글자씩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 지금 내가 뭘 잘못들은 것 같은데? "

"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공작가 놈들에게. "

" 그럴리.. 그럴리 없어. 아버지가.. 아버지가 왜? "

" 독살 당하셨다. 내가 당한 독이랑 똑같은 독으로. "

공주가 양손으로 반대편 팔을 잡았다. 아아- 하고 입을 열었다가 괴성을 지른다.

" 아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악!!!!!! "

방에서 기사가 튀어나와 공주에게 달려갔다. 카렌 역시 공주에게 뛰어가 안절부절 못하며 서있었다. 기사는 나를 홱 돌아보며 무슨 일이냐는 얼굴로 노려본다.

" 아아아아아.. 아버지..... 아버지.....!! "

그녀가 곡을 한다. 처절한 울음이다. 백설 공주는 한참을 아버지를 부르짖는다.

" 이만 돌아가주시죠. 공주님께선 휴식이 필요하신 것 같습니다만. "

" 알겠어. 일단 이걸 받아. "

내가 기사의 손에 10 실버를 건네주었다.

" 내일 또 올테니까 오늘은 이걸로 대충 지내도록 해. 먹을 것도 좀 사고. "

" ... 고맙습니다. "

기사가 뻣뻣하게 고개를 숙인다. 카렌에게 나에 대한 이야기를 대충 들은 모양인지 경계심이 역력하다. 그녀가 어떻게 생각하든 내 알바는 아니다. 내 목적은 오로지 백설 공주니까.

" 공주가 너무 슬퍼하지 않게 도와줘. 저러다가 병나지 않도록. "

그녀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 '그럼 이만.'하고 문을 쾅 닫는다. 젠장. 여기서도 내 신세는 처량하구만. 많이 피곤했다. 우연히 공주를 만나지 않았다면 빨리 여관에 들어가서 쉬었을텐데. 푹신한 침대가 그립다.

' 내일 다시 오지, 백설 공주. '

나는 아침을 먹자마자 바로 공주의 집에 방문했다. 문을 두드리자 카렌의 목소리가 들린다.

" 누구시죠? "

" 나다. 공주를 만나고 싶은데. "

" 기다리세요. "

그러고는 한참 아무런 소리가 없다. 문을 다시 두드려도 응답이 없다.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해서 문잡이를 돌렸는데, 걸쇠가 걸려있다. 날 지금 만나기 싫다는 뜻인가? 걸쇠쯤이야 손쉽게 딸 수 있으니까 대충 작대기 하나를 가져와 문을 살짝 열어 걸쇠를 튕겨 올렸다. 걸쇠가 풀린다.

- 벌컥

" 꺄아아아!! "

" 다.. 당장 나가세요! "

백설 공주가 속옷 차림으로 몸을 가린다. 내가 오해한 모양이다. 몸 단장을 하고 있는데, 강제로 문을 열고 들어갔으니 나도 약간 뻘쭘하다.

" 어.. 미안해. 대답이 없길래. "

" 뭘 그렇게 쳐다봐? 당장 나갓! "

백설 공주가 고래고래 소리쳤다. 기사는 보이지 않는다. 잠시 밖에 나간 모양이다.

" 길거리에서 기다릴 순 없잖아. 뒤돌아 있을테니까, 얼른 끝내. "

똥배짱을 부려볼까. 뒤통수가 가렵다. 아마 나를 노려보고 있는 것 같다.

" 당장 안나가?! "

" 왕궁도 아니고. 왕자를 길거리에 내몰거야?! "

" 내 상관이야? "

" 안볼테니까 빨리 옷이나 입어. "

말로 해선 안되겠다고 느꼈는지 아무런 대답이 없다. 스르륵 스르륵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주가 '끝났어.' 라고 대답한다. 그녀의 얼굴이 붉다. 시녀도 나를 흘겨본다.

" 누가 호색 아니랄까봐. "

" 어이, 들린다. "

" 흥. "

공주가 오랜만에 치장한 모양인지 어제완 다르게 생기가 느껴진다. 그래도 슬픔을 빨리 이겨낸 것 같아 다행이다. 사실 오늘도 우울하게 있을까봐 약간 걱정이었는데, 그래도 공주치고는 결심이 커보인다.

" 아침은 먹었어? "

" 그런 걸 꼭 숙녀한테 물어봐야겠어? "

" 그럼 먹었다고 생각하고 얘기를 나눠보지. "

백설 공주가 계속 해봐라는 표정으로 나를 본다. 어제완 다르게 그녀에게서 힘이 느껴진다. 아마도 희망을 느낀 모양이다.

" 말해봐. "

" 솔직히 말하면, 지금 우리 둘에겐 아무런 힘이 없다. 어중간하게 대적하러 나갔다간 차라리 여기서 사는 것만 못할 수도 있어. "

" 그 정도는 나도 알아. "

" 힘이 되어줄 수 있는 가문이 있어? "

공주가 고개를 흔든다. 솔직히 왕궁이 넘어간 마당에 그녀에게 힘이 될 수 있는 가문이 있을 리가 없다.

" 잠깐. "

그녀가 무언가 생각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 하나 있긴 있어. 내 힘이 되어줄 수 있는. "

있다고? 뭐가 남은 거지? 그녀가 나를 쳐다본다.

" 내.. 어머니.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의.. 가문. '샬렛(Chalet)' 백작가. "

" 샬렛이라고? "

" 응. 어릴 때 몇번 가본 기억이 있어.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는 한번도 가지 않았지만. 외할아버님께서 날 예뻐해주신 기억이 남아있어. 어쩌면 거기로 가면 될지도 몰라. "

희망이 조금 생긴다. 백작가와 후작가가 힘을 합치고, 남은 몇몇 귀족들의 힘을 더 합치면, 어쩌면 가능할 지도 모른다. 왕궁의 재탈환을. 명분은 우리쪽이 더욱 강하다. 저쪽은 공작이지만, 우리는 왕자와 공주다.

" 그러면 상황이 나쁘지는 않네. 그럼 백작가에 갈 수 있나? "

" 난 여기로 쫓겨난거잖아? "

그녀가 살짝 비웃으며 나를 흘겨봤다. 나는 피식 웃고 그녀의 앞에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살짝 놀란 표정이다. 나는 그녀의 한쪽 손을 잡고 손등이 입을 맞추었다.

" 이 자리에서 내 목숨을 걸고 맹세하지. 절대 너를 배신하는 일은 없어. 왕위를 탈환하면 그 자리는 너의 것이야. 백설 공주. "

진심을 다해 말했다. 그녀의 눈이 사정없이 흔들린다. 곧 하아- 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그녀가 말했다.

" 좋아. 그러면 오늘부터 너와 나의 악연은 이제 끝인거야. 예전의 악감정은 모두 지우겠어.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서. "

" 고맙다, 백설 공주. "

드디어 그녀와의 관계를 다시 원점으로 되돌렸다. 왕위? 상관없다. 이 게임의 목표는 '소환수의 결정'. 내가 왕이 되려고 했던 것도 모두 그 목표를 위한 하나의 발판에 불과했다. 백설 공주를 소환수로 결정하겠다는 것은 이미 마음먹고 있었으니, 차라리 왕위를 쿨하게 포기하고 그녀의 환심을 사는 것이 더 좋다.

" 그럼, 잘 부탁해, 갈리브. "

" 나도, 잘 부탁한다, 백설. "

두 손이 서로 닿는다. 새로운 시작이다. 어쩌면 거대한 바람이 될지도 모르는.

============================ 작품 후기 ============================

처음 글을 올릴때, 종종 어색한 문장이 많이 발견됩니다. 저도 글을 다시 한번 쭉 읽으면서 하나씩 고치는데, 5분 정도 후에 다시 보시면 이상한 문장들은 고쳐져 있을 것입니다. 이 점을 기억해주세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