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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발할 수 있다면 최대한 빨리 출발하고 싶은데. "
" 그게 사실 문제가.. "
방안에 시녀 한명이 병에 걸려서 누워있단다. 기후가 맞지 않아서 풍토병에 걸린 모양이다. 그 외에도 말 못할 사정이 많았는지 그녀는 한숨만 푹푹 내쉰다. 말 안해도 이 꼴을 보니 대충 상상이 간다.
" 가고 싶지만, 지금 우린 돈이 없어. 여길 뜨고 싶어도 못가. 너도 와서 알겠지만, 사막을 횡단하려면 적어도 한사람당 말 하나는 있어야 돼. "
생각보다 큰 문제다. 리츠웰 왕국의 영토 중에서 가장 이질적인 곳이 바로 이 곳이다. 사실 예전에 여긴 다른 나라의 영토였다고 한다. 하지만, 리츠웰 왕국에서 여길 빼앗아버렸고, 단순히 교역적인 목적으로만 사용해버렸다고 한다.
' 그래서 공주가 푸대접을 받은 모양이군. '
어쨌든, 사막이라는 골치아픈 지역때문에 내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떻게 나가야하는거지? 자칫 잘못하다간 모조리 몰살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일행에서 나빼고 모두 여자다. 그런 극악의 환경에서 살아남는 생존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물론 기사는 빼고.
' 아, 방법이 하나 있긴 있네. '
배를 이용하는 방법. 최대한 사막을 지나쳐, 가까운 도시에 내려 '샬렛' 백작 영지로 가면 된다. 물론 그 뱃삯도 만만치 않다는 것이 문제지만.
' 말을 팔까? '
그래도 명마에 속하는 셰넌이다. 시세를 알지는 못해도 셰넌을 판다면 우리 모두의 뱃삯정도는 아마도 거뜬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 성급하게 팔 필요는 없다.
백설 공주의 몸을 훑어보니, 그녀도 돈이 될만한 패물은 전부 팔아넘긴 모양이다. 있는 거라고는 손가락에 낀 금반지 한개가 전부였다.
무슨 이유때문인지는 몰라도, 그것만큼은 팔지 않고 가지고 있는 것 같다.
" 해결법을 생각했어. 물론 돈이 문제지만. "
" 무슨..? "
" 배를 이용하면 돼. "
공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괜찮은 방법이다. 돈만 있다면. 때마침 누군가 들어온다. 기사다. 그녀는 손에 무언가를 가득 들고 들어왔다. 음식이다. 그녀는 문을 닫은 뒤에 나를 보며 멈칫한다.
" 오셨..군요. "
" 응. 반갑네. "
그녀는 탁자 위에 음식이 싸여있는 천을 풀어낸다. 내가 백설 공주를 흘깃 바라보자 그녀가 고개를 살짝 돌려 시선을 피한다.
" 아.. 아직 아침을 못 먹었어. 가게가 새벽부터 여는 것도 아니고. "
나는 의자를 공주에게 양보하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공주가 숙녀가 자는 침대에 함부로 앉는다고 투덜거린다. 침대에 뒹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기사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어서 차마 그러지는 못했다.
" 이름이 뭐지? "
" 칼리. '칼리 애슐리(Kali Ashley)' 입니다. "
" 칼리라고 불러도 되지? "
" 애슐리 경입니다만. "
나와 친하게 지내고 싶진 않은 모양이다. 공주와 악연때문이겠지. 역시 기사는 너무 유연성이 없다니깐. 공주가 다소곳이 음식을 조금씩 잘라서 입에 넣는다. 나 때문에 눈치가 보여서 저렇게 먹는건가? 아니면 정말로 매일 저렇게 먹는거야?
" 그럼 이만 가볼게. 얘기는 뭐 나중에 하든지, 내일 하든지 할테니까. "
" 그래, 알았어. 마중은 생략할게. "
밖을 나왔다. 아침 시간이 조금 지났을 때라 사람들이 가게를 열기 위해서 분주하다. 곳곳에서 빵 굽는 냄새도 구수하다. 돈벌만한 간단한 일이 없을까. 이왕이면 한방에 큰걸로. 나에겐 정보가 없다. 그러고보니 르세뜨가 생각이 난다. 그래도 정보가 필요할때 꼬박꼬박 알려주곤 했는데.
' 훗. 르세뜨는 이제 잊어버리자. 그녀는 날 배신했어. '
이젠 그녀에게 미련은 없다. 어차피 게임이 끝나면 사라져버릴 일회성 캐릭터. 백설 공주와 무게가 틀리다. 그럼 돈이나 벌어볼까.
옛날부터 내려오는, 쉽게 돈 버는 방법이 있다.
' 돈으로 돈을 버는 것이지. '
그렇다. 돈만 많이 있다면, 순식간에 많은 이득을 차지할 수 있다. 물론 잃는다면 큰 돈을 잃을 수도 있지만. 문제는 그런 큰 돈이 있냐는 것이다.
' 있다면 이런 짓도 안하겠지. '
내 머리가 돌아간다. 좋은 방법이 하나 떠오른다. 이것 역시 돈이 필요하다. 그러나 어마어마하게 큰 돈은 필요없다. 하지만, 사람이 필요하다. 나와 손이 되어줄. 현재로서는 백설 공주뿐이다. 일단 정보가 필요한데. 정보가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은? 사람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이겠지. 여기선 아마 여관일게 분명하다.
" 여기 도박장이 어디지? "
붉은 머리 여자에게 묻는다. 담배 연기를 쭉 빨아드리더니 길게 내뿜는다.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날 판단하고 있는건가.
" 그걸 묻는 이유가 뭐지요? 보아하니 행색도 초라한데. "
한마디로 돈 없는 놈이 도박장을 알아서 뭐할래? 라는 물음이다. 어깨를 으쓱였다.
"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고. 난 도박장을 알고 싶을 뿐이야. "
그녀는 다시 담배 연기를 빨아들였다. 이번엔 내쪽을 향해 연기를 뿜어낸다. 독하다. 왠지 모르게 그녀의 표정이 살짝 바뀐 것 같다. 뭐랄까 흥미로운 것을 찾았다는 표정일까.
" 세 군데가 있지요. 하나는 천한 뱃사람들이 즐기는 도박장이고, 또 하나는 돈이 적당히 있는 사람들이 즐기는 도박장. 마지막 하나는. "
여자가 말을 질질 끈다. 눈을 반쯤만 감고 붉은 혀로 새빨간 입술을 살짝 핥는다. 무슨 짓이지? 날 유혹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그녀의 버릇인건가.
" 당신같은 귀족이나 갑부들이 즐기는 도박장이죠. "
이 여자. 내 정체를 아는건가? 아무도 알 수 없을텐데. 내 뒤를 미행했나?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교차한다. 여자는 풋- 하고 생글생글 웃더니 말을 이었다.
" 금반지를 그렇게 덥썩 내놓고, 아무런 흥정도 없이 2골드만 받아간다? 딱보면 물정 모르는 귀족들이 하는 행동이죠. 무슨 이유때문에 여기 온지는 모르겠지만. 내 눈은 정확해요. "
하. 여자가 보통이 아니다. 내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다.
" 그래서? "
" 별 뜻은 없어요. 그냥 당신은 이런 곳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거지요. "
" 너도 그런 것 같은데? "
여자가 나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시선을 피할 이유는 없다. 그녀는 뭔가 더 얘기하고 싶은 얼굴인데, 자리가 좋지 않다. 시끌벅적한 카운터에서 이런 얘기는 나 역시도 사양하고 싶다.
" 자리를 옮기죠. 셴! 카운터를 맡아. "
" 네, 지배인님. "
그녀는 나를 데리고 2층으로 올라간다.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더니 고급스러운 방문을 연다. 화려한 방이다. 여자 옷이 널려있었다. 물론 속옷도 있었고.
" 문닫고 들어와요. 제 방이니깐 안심하고요. "
- 탁
문이 닫힌다.
" 제 이름은 '뤼벨(Ruibel)'. 물론 성은 없고요. 누구완 다르게. "
그녀는 탁자를 가리키며 '앉아요.' 라고 말했다. 차가 필요하냐고 묻자 내가 고개를 흔들었다. 필요 없다. 그보다는 왜 그녀가 나와 대화를 하고 싶어하는지 알고 싶다.
" 날 불러온 이유가? "
" 성격도 급하시네. 딱 귀족 냄새가 풀풀 풍긴다니까. 어디냐고 물어볼 생각은 없으니까 안심해요. "
뤼벨은 품속에서 담배를 한 개피 꺼내서 다시 입에 물었다. 그 순간 내가 그녀의 담배를 낚아채서 바닥에 던졌다.
" 이유는? "
그녀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 아아, 별 것 없어요. 당신과 함께 한 몫 하고 싶다는 것 뿐이지. "
" 그게 무슨 소리지? "
뤼벨이 창밖을 바라본다. 짠내가 나는 바닷바람이 불어온다. 뭔가 아른한 시선이다.
" 전 여기서 22년을 살았어요.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아버지는 누군지도 몰라요. 뱃사람들은 워낙 자유분방하니까. 어머니는 창녀였어요. 소문으로는 날 낳고 얼마있다가 병에 들어서 죽었나봐요. "
그녀의 사연이었다. 계속 들을 가치가 있는걸까? 지금 이런 이야기 하는 이유가 뭘까.
" 전 어릴 때부터 고아였어요. 겨우겨우 얻어서 먹고 목숨을 연맹했죠. 그런 애들이 이곳에서는 한 두명이 아니에요. 거리에 나가면 보이는 여자들 있죠? 뭘 사가라고 달라붙는. 걔들도 다 그런 애에요. 남자는 다시 뱃사람이 되고, 여자는 창녀가 되는. "
" 그래서.. "
" 얘기 끝까지 들어봐요. 그런데 제 경우는 좀 특별하게 운이 좋았어요. 그래도 제가 사람보는 눈도 있고, 다루는 능력도 좀 있거든요. 절 좋게 봐준 이 여관 주인이 절 고용했어요. 그나마 몸 안팔고 돈 벌고 밥은 먹고 살게 된거죠. 여기서 일한지 거의 10년이 다되가네요. "
" 결론이 뭐지? "
뤼벨이 나를 돌아본다. 눈이 반짝인다.
" 여기 모든 여자들의 꿈이 뭔지 알아요? "
" 나야 모르지. "
" 바로, 귀족들을 잡고 한 몫 하는거죠. "
아, 이게 그녀의 목적이다. 귀족을 잡고 한 몫하는 것.
" 사실 귀족을 많이 봐왔어요. 대부분 이 도시에 오는 귀족들은 물론 이 여관을 오지 않죠. 여긴 뱃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는 곳이니까. 하지만, 종종 오기는 했죠. "
" 그럼 왜 하필 나지? "
" 전 보는 눈이 있어요. 아무리 귀족이라도 함부로 달라붙지 않아요. 잘못하다간 몸만 버리거든요. 그런 애들 많아요. 귀족의 놀잇감이 되다가 마지막에 버려지거나, 죽는. "
그녀의 말이 사실일까. 사실 그녀가 세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조금 했었다. 하지만, 그럴 리는 없다. 여기서 10년 동안 일했다고 하니, 그렇게 쉽게 들통날 거짓말을 할 리는 없을 것이다. 내가 보기엔 정말로 그녀는 나를 잡고 뭔가 해보고 싶은 눈치였다.
" 이 여관 주인어른께서도 그런 케이스죠. 귀족을 잡고 한몫 잡은. "
차라리 이런 여자가 더 믿을만하다. 다른 의도가 없고 오직 돈이니까. 물론 다시 돈에 넘어갈 확률도 있지만, 일단 날 귀족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그런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이다. 당연히 100% 믿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 그래. 뤼벨, 너가 말한 대로 난 귀족은 맞지. 하지만, 여기 온 이유가 좋지는 않아. 빨리 이 도시를 벗어나야 하거든. "
" 이유가 어찌됬든 상관없어요. 저의 목적은 단순해요. 나에게 한몫 단단히 챙겨주고 이곳에서 데리고 나가는것. "
이 여자를 믿을 수 있을까. 믿어보자. 르세뜨에게 당한 것도 있지만, 그걸 끝까지 생각하는 사람은 어리석다. 르세뜨는 르세뜨고, 뤼벨은 뤼벨이다. 일단 여기에서 알고 있는 정보가 아무것도 없으니, 뤼벨에게 손을 뻗을 수 밖에 없다.
" 좋아. 해주지. 너에게 한몫 단단히 챙겨주겠어. 단, 아직 자세한건 알려줄 수 없어. 일단은 너를 전적으로 믿을 순 없으니까. 내가 원하는 건 정보다. "
" 알았어요. 저도 이해해요. 제가 알고 있는 정보는 모두 넘겨주겠어요. "
좋다. 뜻하지 않게 일이 잘 풀린다. 좋은 생각이 떠오른다.
" 날 믿어? "
" 네? "
" 날 믿냐고. "
내가 그녀를 바라본다. 그녀도 뚫어지게 날 쳐다본다. 서로 한참 쳐다보다가 그녀가 픽- 웃었다.
" 믿어요. 이래뵈도 제 눈이 틀린 적은 없어요. "
" 돈이 있나? "
" 네? "
" 내가 지금 당장 돈이 없어. 만들 수 있는 돈은 있지만. "
뤼벨이 서랍으로 걸어가 묵직한 가죽주머니를 탁자 위에 올렸다. 둔탁한 소리가 난다.
" 거의 100골드 가량이에요. 제 전재산이죠. "
" 좋아. 처음은 이걸로 대충 해결해야겠어. 이건 꼭 다시 갚아주지. "
" 좋아요. "
그녀는 흔쾌히 수락한다. 생각보다 특이한 여자다. 아무리 그래도 처음보는 나에게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넣다니. 아니면, 그녀의 큰 도박인가? 지금은 다른 생각할 필요 없다.
" 해야할 일이 있는데 말이야. "
일이 수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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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