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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 사왔어요. 입어보세요. "
드디어 뤼벨이 돌아왔다. 생각보다 시간이 꽤 걸려서 약간 조마조마했는데, 다행히 아무런 일은 없는 것 같다. 그녀는 양손에 고급스러운 옷들을 들고 있었는데, 바로 내가 입을 옷이다. 아주 철저하게 귀족행세를 할 생각이다. 물론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뤼벨은 나의 애인정도 되는 역할이고.
" 흠. 잘 어울려요. 그래도 몸에 딱 맞아서 다행이네요. "
이번 옷은 나에게 잘 어울렸다. 그래도 내가 꽤 귀티가 나게 생겼기 때문에, 고급스러운 옷을 입으니 딱 귀족같아 보였다. 뤼벨이 만족스럽게 웃는다.
" 좋아요. 이제 여기서 생활해요. 제 애인 행세를 하려면 그래도 방이 괜찮아야할텐데, 돈이 없으니까. 그냥 애인이랑 같이 살고 있다고 하자구요. "
" 좋아. 그러면 더 얘기를 나누도록 하지. "
탁자에 앉았다. 그녀가 차를 하나 내온다. 향이 좋다. 무슨 괴상한 이름을 말했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 그럼 도박장에 대해서 자세하게 들어보지. 물론 나중에 한번 방문할거지만. "
" 저도 한번 밖에 가본 적이 없어요. 거긴 입장료 비슷한게 있거든요. 물론 돈을 지불하는건 아니에요. 다만, 최소 100골드를 소지해야 들어갈 수 있어요. "
최소 100골드라니. 생각보다 스케일이 크다. 물론 부자나 귀족들에게 100골드는 돈도 아니겠지만.
" 종류는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주사위고, 다른 하나는 포커. "
역시 있다. 포커. 내가 원하는 게임이 바로 포커였다. 주사위는 정말로 운이 너무 많이 필요하지만, 포커는 다르다. 도움을 주는 한 명만 있다면, 게임에서 쉽게 이길 수 있다. 현실 세계의 영화에서도 종종 나오는 것처럼.
" 일단 난 포커로 해볼 거야. "
" 그래요? 돈은 있어요? "
" 있어. 그건 걱정마. "
구할 방법이 있긴 있다. 공주가 그걸 수락할지는 의문이지만. 물론 수락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확신을 하고 있으니까.
" 정말 있는거죠? 저도 괜히 실패할 일에 올인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그 쪽이 지금 귀족이라는 가정하에 믿고 따르는 거니까. "
그녀가 나를 날카롭게 바라본다.
" 있어. 걱정마. 돈은 충분히 있어. 넌 정보만 제공해. 그러면 확실히 큰 돈을 벌 수 있으니까. 너도 여기서 일은 청산할 수 있을거야. "
" 믿어볼게요. "
뤼벨이 계속 얘기한다.
" 포커의 룰은 간단해요. 참가자는 최대 3명. 딜러까지 합하면 최대 4명이 게임을 해요. 카드는 3장씩 가지고, 2장은 공유되는 카드에요. "
" 알고 있는 거군. "
" 그럼 설명 안해도 되는거죠? "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내가 아는 룰이다. 그러면 이젠 공주에게 가볼 차례인가.
" 어줍잖게 속임수를 쓰려고 하지마요. 그런 사람이 한 두명이 아니니깐. "
" 걱정마. 내가 누구야? "
" 아, 그런데 이름이랑 가문도 못 들었네요. 이젠 들어도 되겠죠? 저도 한 배에 탄 동료니깐. "
말을 해줘야 하나. 곰곰히 생각했다. 적당히 속이자.
" 내 이름은 글렌. '글렌 오르도(Glen Ordo)'. 후작 가문의 후계자다. "
" 좋아요. 그래도 꽤 거물을 잡았네요. "
뤼벨의 얼굴에 만족감이 퍼진다. 후작이면 상당히 높은 계급이다. 백작이나 심지어 남작이라고 해도 만족할 상황이었는데, 후작이라니. 그녀도 아직 백작 이상의 귀족 가문은 들어보지 못했다고 한다.
" 어디로 가는거에요? "
" 볼 일이 있어서. 참고로, 미행할 생각은 하지마. "
" 알았어요. 언제 올건데요? "
" 못 올지도 몰라. "
옷을 다시 벗고 아까 입었던 옷으로 갈아입었다. 일단 사람들 눈에 띌 필요는 없다. 어디까지나 나와 공주가 만나는 것은 은밀한거니까.
" 이게 뭐야? "
" 보면 몰라? 카드잖아. "
공주가 어이없는 눈으로 나를 본다.
" 누가 그걸 몰라서 그래? 지금 카드놀이나 하자는 거야? "
" 포커라고 알고 있어? "
백설 공주는 입을 일자로 다물고 나를 노려보았다. 이마가 살짝 찡그려져 있다. 어휴, 속은 꽉 막혀가지고는.
" 칼리는 포커할 줄 알아? "
" 애슐리 경입니다만. 성실한 기사는 도박을 하지 않습니다. "
" 이봐이봐. 내가 괜히 놀려고 이딴거 가져온 것 같아? "
공주의 얼굴이 묘하게 바뀐다. 나는 골드 동전 하나를 칼리에게 던져주었다.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오랜만에 보는 골드 동전이다.
" 저녁좀 사와. 좀 근사하게 말이야. 카렌도 데리고 가. "
" 아, 네. "
칼리는 카렌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발걸음 소리가 작아진다. 곧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때, 공주가 팔짱을 끼고 입을 연다.
" 설명해봐. "
" 우린 돈을 벌어야해. "
" 알고 있어. 요점만 말해. "
내가 탁자를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뭐라고 말해야 그녀를 확실히 유혹할 수 있을까. 말하는 핀트가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그녀는 아마도 거절할 것이다.
" 그러면 작은 돈으로 큰 돈을 버는 방법이 뭐라고 생각해? "
" 하, 설마. "
공주의 시선이 점차 내려와 카드에 닿는다. 그리고 다시 나를 올려본다. 말이 없다. 내가 괜히 이 말을 꺼낸건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처음에는 헛소리한다고 소리칠 줄 알았는데, 그래도 깊게 생각하는 모양이다.
" 방법이 이것 뿐이야? "
" 응. 시간도 촉박하거든. 빠른 시간내에 돈을 벌기 위해선 이것 밖엔 없어. "
" 가능성은? "
" 충분해. "
백설 공주가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올렸다. 그녀는 눈을 감고 후- 하고 숨을 내뱉는다. 결정하기 어려워 보인다.
" 자금은? "
" 그걸 너랑 제대로 말하고 싶어서야. "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그녀의 옆에 앉았다. 그녀의 한쪽 눈썹이 살짝 올라간다. 직접 눈앞에서 보니 정말 미인이라고 생각이 든다. 땀구멍 하나 보이지 않는 매끄러운 콧날이 매력적이다.
" 돈을 빌려. "
" 하, 어떻게 빌리는데? 방법이 없어. 더 이상 팔 것도 없고. "
" 아니, 하나 있어. "
" 어떤거? "
나는 손가락을 들어 그녀를 가리킨다.
" 너. "
" 이건 스트레이트라고 해. 어느 것이든 모양은 상관없어. 숫자가 나란히 오기만 하면 되는거고. "
" J, Q, K, A 순이야? 그 다음은 2고? "
" 응. 잘하네. "
처음에 내가 공주를 담보로 돈을 빌려야한다고 했을때, 그녀는 고래고래 소리치더니 울기 시작했다. 자신의 처지를 이해한 것이다.
내가 겨우겨우 달랬다. 간신히 울음을 그치고 백설 공주는 승락했다.
때마침 칼리와 카렌이 들어왔는데, 공주의 눈물을 보고 또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다. 백설 공주가 빠르게 설명해준 덕분에 오해가 쉽게 풀려서 다행이었지만.
" 다음은? "
" 이거야. 모양이 다 같은 것 5개. 이런 식으로. 이걸 플러쉬라고 해. 만약에 서로 같은 플러쉬라면 강한 순으로 A, K, Q, J 로 점차 내려와. "
" 응. 이해했어. "
" 그 다음은 풀하우스. 예를 보여줄게. 자, 이렇게. 트리플 1개와 원 페어가 성립하면, 풀하우스라고 하고, 대부분 게임에서 이겨. 물론 올인할 정도는 아니지만, 나올 가능성이 희박해. "
공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집중있게 설명을 듣고 있는 모습이 꽤 귀엽다. 다만, 옆에서 칼리가 인상을 찡그리며 내내 투덜거리는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 빨리 다음 말해. "
" 다음은 포 카드야. 들어보면 대충 알겠지? 같은 숫자 4개가 있으면 돼. 굉장히 나올 가능성이 희박해. 여기서부턴 올인해도 괜찮을거야. "
" 별거 아닌 것 같은데? 같은 숫자 4개 정도야, 쉽게 나올 것 같은데? "
처음 들어보면 쉬울 것 같지만, 내가 포커를 시작하고난 이후로 몇번 나온 적이 없다. 스트레이트 플러쉬는 아직 단 한 번도 나와보지 못했다. 물론 '5 포커'에서.
" 아니. 절대 아니야. 포 카드가 나오면 왠만하면 올인해. 뭐, 상황에 따라서 너가 판단하겠지만, 어쨌든 나올 확률은 정말로 아주 희박해. "
" 응. "
" 음, 다음은.. 어, 이건 그냥 안나온다고 생각하면 될거야. 하루만에 나올리도 없고. 스트레이트 플러쉬라는게 있는데, 스트레이트 알지? 그거랑 플러쉬랑 동시에 성립하는거야. "
" 아하. 같은 문양에 숫자가 연달아서? "
그래도 이해력이 빨라서 좋다. 배우려는 자세도 있고. 머리를 한번 쓰다듬고 싶지만, 칼리가 옆에서 노려보고 있어서 손을 올리다가 다시 내렸다.
" 칼리, 너는 대충 알겠어? "
" 애슐리 경입니다. 전 알고 싶지 않습니다. "
" 공주도 배우려고 하는데, 너는 배우기 싫다고? 지금 공주가 하찮은 걸 배운다고 생각하는거야? "
" 그.. 그게 아니라. "
그녀가 당황한다. 내가 공주의 몸을 툭툭 치자 그녀도 입을 열었다.
" 너도 배웠으면 좋겠어, 칼리. "
칼리가 눈을 감는다. 어쩔 수가 없는지 탁자로 천천히 걸어온다. 입술을 깨물더니 나에게 조용히 말한다.
" 다시.. 다시 설명해주십시오. "
" 으아아. 해보니까 어때? "
" 좀 재밌는것 같기도. "
공주가 살짝 웃는다. 밖은 완전히 밤이다. 싸늘한 밤공기가 목을 으슬으슬 간지럽힌다. 돌아가기도 애매하고.
" 너무 늦었으니까, 여기서 묵고 가도 되지? "
" 네?! 아.. 안됩니다. "
칼리가 펄쩍 뛰며 반대한다. 촛불에 일렁이는 그녀의 얼굴이 요상하다. 공주는 상관없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카렌은 어차피 방안에서 지냈으니, 보이지도 않는다.
" 왜? 너랑 나랑 같이 자면 되지. 너도 바닥에서 잘거 아냐? "
" 그.. 그게. "
그녀가 울상이 된 얼굴로 공주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이미 잘 준비를 마치고 이불 속으로 들어간 뒤였다. 우리 둘이서 알아서 해결하라는 것 같다.
" 그럼 끝났네. 담요 하나만 가져와. "
칼리가 원망스러운 얼굴로 나를 노려보다가 담요 하나를 강하게 건네준다. 몸이 휘청할 정도로. 젠장, 무슨 여자가 이렇게 힘이.. 사실 약간 음흉한 마음이 없던 것도 아니지만, 생각보다 그녀들이 별다른 반응이 없어서 재미가 없다. 담요를 하나 덮고 베개 대신에 깍지를 끼고 머리에 대었다.
" 공주님, 안녕히 주무십시오. "
- 후, 후, 후
칼리가 촛불을 불자, 사방이 깜깜해진다. 내가 잘하고 있는 것이 맞을까. 그녀를 도박장에 끌어들이는 것도, 그녀를 담보로 돈을 빌리는 것도 잘하는 짓일까? 아직 모르겠다.
" 백설. 자? "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그녀가 조그맣게 입을 열었다.
" 왜. "
그녀도 마음이 심란한 모양이다.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 쉽게 잠이 오지 않는 것은 당연해보인다.
" 미안하다. 이런 일을 시켜서. "
아무 말 없다. 한참이나 대답을 기다렸지만, 대답은 나오지 않는다. 자버린건가- 하고 생각하며, 나도 눈을 붙이려고 하는데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 신경쓰지마. 내가 선택한 일이니까. "
그리고 나와 그녀는 말을 나누지 않는다. 작게 코고는 소리가 들린다. 침대 위다. 잠들어버린건가.
그렇게 잠 못 이루는 밤은,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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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연휴에 아마도 연참할 듯 싶습니다만, 그날이 되어야 확실히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도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