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눈을 떴을때, 아직 사방이 캄캄했다. 이른 새벽인 모양이다. 뤼벨을 슬쩍 바라본다. 내 품에서 조용히 자고 있다. 그녀를 깨울까- 하고 생각하다가 포기한다.
' 계획은 차질없어야 해. '
오늘로부터 이제 4일 후에 배가 떠난다. 시간은 새벽 6시. 아마 지금과 비슷한 시간일 것이다. 그러면 3일 밤에 모든 걸 끝내고, 빌린 돈을 모두 갚은 뒤에 출발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시나리오다.
사실 내 시나리오에서는 공주가 파산하고 내가 모든 돈을 따야했다. 서로 알지 못한다고 인식한 상황에서 나는 그녀 대신에 돈을 갚아서 그녀의 소유권을 주장하면 된다.
그 후에 내가 배를 타고 떠나면, 아무도 의심하지 않고 이 도시를 벗어날 수 있다.
' 이게 제일 완벽하지만. '
아쉽게도 계획이란 것은 항상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는 않는 법. 분명히 변수가 생긴다. 혹시를 대비해 200골드 정도는 내가 따로 숨겨놔야한다. 아무도 모르게.
아침이 되면 빨리 공주에게 가봐야할 듯 싶다.
- 똑, 똑.
" 누구세요? "
" 나야. "
문이 천천히 열린다. 카렌이다. 칼리는 또 음식을 사러간 모양이다. 공주는 이미 꽃단장을 끝마친 모습이다.
" 빨리 왔네. "
" 왠일이야? 보통이었으면 아직도 준비가 한창일텐데. "
" 누구누구가 아침마다 일찍 와서 그렇네요. "
어깨를 으쓱였다. 나야 뭐, 시간을 아끼면 좋으니까. 사실 오늘이 그녀와 사적으로 만나는 마지막 날이다. 그러기에 그녀에게 확실히 주의점을 주지시켜야 했다.
돈을 빌리는 것, 또 돈 일부를 나에게 넘기는 것, 그리고 도박장을 찾아오는 것. 그 외에도 아주 세부적인 것까지. 공주는 아마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 아침은 아직인가봐? 그럼 먹고 시작할까? "
" 아니, 칼리는 금방 나가서 다시 오려면 시간이 걸릴거야. "
나는 공주에게 눈짓으로 살짝 카렌을 가리켰다. 그녀는 곧 카렌에게 잠시 자리를 비켜달라고 말한다. 카렌이 방으로 들어가자, 나는 본격적으로 공주에게 하나하나 지시했다.
" 먼저, 오늘이 너와 내가 사적으로 만날 수 있는 마지막 날이야. 돈을 빌린 후부터는 만나선 안돼. "
" 응. 아마도 꼬리가 붙겠지? "
" 물론이지. 큰 돈을 빌려줬으니까. "
돈을 빌리면 그 후에 공주에게 꼬리가 붙을 것이다. 그러면 나와 관계가 어쩌면 들통날 수도 있으니까 만날 수 없다. 그렇다면 돈은 어떻게 전달하느냐는게 관건인데.
" 내가 미리 코너쪽에 숨어 있겠어. 뒤가 붙는다고 해도 코너를 지나가는 순간은 보이지 않을거야. 그 때 너가 나에게 돈을 건네주면 되니까. "
" 음. 괜찮은 것 같아. 그러면 돈을 빌릴때 미리 돈을 나눠야겠네? "
" 주머니를 두개로 나눠. 혹시 물어보면 만약을 대비한다고 말해. 어쨌든 너는 나에게 500골드만 건네주면 돼. "
" 500골드? 알았어. 그런데, 얼마를 빌려야 하는거야? "
2천 골드? 더 받을 수도 있을 것 같긴 하다. 그래도 공주는 굉장한 미녀고, 공주라는 신분까지 더해서 몸값은 상상을 뛰어넘을테니까. 귀족에게 직접 판다면 만 골드는 쉽게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여기는 도시고, 돈을 빌려주는 입장에서는 돈을 받아야하니까. 공주를 얻는다고 해도, 돈을 전부 날리고 싶은 생각은 없을 것이다.
" 2천 골드만 받아. 그 이상은 이자를 감당 못해. 이자는 많아봤자 천 골드 가량 될테니까. "
" ... 완전히 순 사기 아냐? 2천 골드를 빌려줬는데, 이자가 천 골드라니? "
" 어쩌겠어. 더러워도 빌려야지. "
공주가 살짝 걱정스러워한다. 당연할 수 밖에. 자신의 안위가 걸린 문젠데. 실패한다면 차라리 자결하는게 나을 지도 모르겠다.
" 성공할 수 있지? "
" 물론. 걱정할 필요없어. 내가 누구야? "
" 훗. 적이었을 때는 거북했는데, 그래도 아군이 되니깐 좀 든든하긴 하네. "
백설 공주가 피식 웃으며 말한다. 그러면 조금 더 설명해볼까.
" 니가 할 일은 적당히 판돈을 올리는 일이야. 너무 적게도 말고, 너무 많이도 말고. 전에 가르쳐줬지? 배팅 방법. "
" 응. 그 정도는 할 수 있어. "
" 넌 파산해야 돼. 그리고 그 돈을 전부 내가 따야되고. 그러면 내가 너의 돈을 갚아주면서 소유권을 가질 수 있어. "
" 알겠어. 이미 들은 내용이지만. "
하지만 아직 안심하기엔 이르다. 설명이 더 필요하다. 만약을 위해서.
" 만약에 너가 딸 수 있는 상황이라면 따도 괜찮고. 내가 파산해도 괜찮아. 내가 좋다면, 내가 따는 거고, 너가 좋다면, 너가 따는거야. "
" 응. 그러니까, 최대한으로 갈리브, 니가 따는 것이 좋지만, 내가 딸 상황이라면 내가 다 따버려도 상관없다는 거지? "
" 정확해. "
나는 살아남을 돈이 있다. 혹시모를 상황은 이렇게 하면 된다.
" 좋아. 일단 자세한 건 여기에 다 적어뒀어. 만약에 너가 이기게 된다면 이대로 행동해. 내가 이긴다면 필요없지만. "
그녀에게 쪽지를 건네준다. 아까 말한거부터 그 후의 일까지 전부 상세하게 적혀있는 종이다. 그녀는 그 종이를 꽉 쥐고 간단히 훑어봤다.
" 응. 그러면 오늘 정오에? "
" 아침먹고 바로 시작하면 될거야. 꼭 카드 룰과 신호는 외워. 반드시. 거기 적혀있는 대로만 하면 되니까. "
" 알겠어. 지금 갈거야? "
" 가야지. 나도 준비해야하니까. "
이제 모든 준비는 마쳤다. 거사는 정확하게 3일 저녁부터. 그녀와 나는 3일 후, 그 도박장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서로 모르는 채로.
" 이젠 한동안 못 만날거야. 칼리는 데리고 들어오지마. 감정 숨기는 게 어색하니까. "
" 응. 그럼 조금 있다가 봐. "
" 2천 골드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
" 그래. "
문을 나선다. 가슴이 답답하다. 불안하기도 하고. 하지만, 믿는 수 밖에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다하고, 결과를 기다려봐야한다.
' 행운을 빈다, 백설 공주. '
" 이거 어때요? "
" 응, 괜찮아. "
" 이건요? "
" 그것도 괜찮아. "
뤼벨의 얼굴이 뚱해진다. 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두 손을 허리에 얹고 퉁명스럽게 말한다.
" 흥. 제대로 보지도 않으면서. "
" 하, 뤼벨. 우린 놀러가는게 아니야. 잠시 상황을 보러 가는 것 뿐이라고. "
" 그치만, 글렌이랑 같이 가는 거잖아요. 내가 부족해보이면.. 안되니까.. "
그녀가 시무룩해진다. 뭘 입어도 나에게 부족해보이지는 않지만, 그녀의 생각은 다른가보다. 내가 여자가 아니라서 완전히 이해할 순 없지만, 그래도 이해해주려고 노력은 한다.
" 알겠어. 그러면 이것보다는 이걸 입어. "
" 빨간색? "
" 응. 너의 피부색과 잘 어울릴 것 같아. 파란색은 조금 이상해보여. "
" 네, 호호. "
뤼벨이 신나는 표정으로 달려간다. 곧 옷을 갈아입고 나왔는데, 괜찮다. 다리 폭이 좁고, 가슴이 돋보이는 빨간 드레스가 굉장히 그녀에게 어울렸다. 여기서 조금만 더 치장하면, 손색이 없을 것 같다.
" 좋아. 그 정도면 충분해. 머리를 이렇게 틀어올려봐. "
" 이렇게요? "
그녀의 붉은 머리를 틀어올려서 묶으니 정말로 괜찮았다. 곧 그녀는 화장대 앞에서 콧노래를 부르며 치장하기 시작했다.
" 시간 없으니까 얼른 해. "
" 네네. "
이름모를 화장품을 몇개 쓰고, 향수를 찍찍 뿌리자 드디어 끝났는지 그녀가 일어났다. 역시 여자는 화장을 하면 달라진다는게 정말이었다.
" 아름답네. "
" 정말요? 헤헷. "
나도 이미 쫙 빼입고 있는 상태여서 그녀를 데리고 바로 방을 나왔다. 1층으로 내려가자 웅성대던 소리가 멎는다.
종종 뤼벨에게 치근덕대던 남자들도 다들 멍하게 입을 벌리고 나와 그녀를 바라본다. 그러든지 말든지 그녀는 내 팔짱을 꼭 끼고 나와 발을 맞추어 걸어갔다. 그들은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여관을 나와서 나와 뤼벨의 뒷통수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다.
" 놀랐나봐? "
" 그러겠죠? 제가 그래도 꽤 유명한 사람이라. 글렌도 귀족같으니까요. "
일단 도박장을 들르기 전에 공주에게서 돈을 건네 받아야 했다. 골목을 이곳저곳 들어가서 코너쪽에 서 있었다. 다행히 아무도 사람이 없어서 의심받지는 않을 것 같다. 초조하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 때, 드디어 백설 공주와 칼리가 보였다. 고개를 다시 넣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걸어가는 것처럼 포즈를 취했다.
' 하나, 둘.... 셋! '
- 쿵
" 꺗. "
그 순간 백설 공주의 품에서 주머니가 하나 쑥 나온다. 나는 그것을 얼른 받고 뤼벨에게 건네주었다.
그녀는 곧바로 묵직한 주머니를 치마 안쪽에 쑥 넣었다. 완벽하다. 그래도 무게가 상당했는지 뤼벨이 약간 버거워했다.
500골드면 상당한 무게일테니까. 백설 공주는 미안하다고 고개를 꾸벅 숙이고 다시 가버린다. 칼리는 나에게 눈길하나 주지 않았다.
쳇, 매정한 년. 곧이어 사내 둘이 내 옆을 스치고 지나갔는데, 아마도 꼬리가 이들인 것 같다.
' 이 돈은 잘 쓰겠어. '
일단 혹시 모르니 돈주머니를 바꾸기 위해서 다시 그녀의 치마 속에서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끈을 풀고 고급스러운 주머니에 쏟아넣었다. 촤르르륵- 하는 소리가 들린다.
" 와, 이게 500골드에요? "
" 그래. 우리가 써야할 돈이지. 자, 대충 이정도가 200골드인 것 같고. 가지고 있어. 이건 비상금이니까. "
" 네. "
그녀는 치마속에 넣어서 허리춤에 끈을 매었다. 시작이 좋다. 2천 골드는 무난하게 빌릴 수 있었던 모양이다. 그럼 간단한 견학을 해볼까나.
" 흠. 참가비가 얼마나 있으십니까? "
" 자. "
입구를 막고있던 사내에게 주머니를 끌러서 보여주었다. 번쩍이는 골드 동전이 그의 눈에 들어간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고 옆으로 몸을 옮겼다. 통과다. 뤼벨은 자연스럽게 내 팔짱에 손을 끼고 여유롭게 행동한다. 이 여자도 보통은 아니구만.
아직 낮인데도 사람들이 꽤 있다. 둘이서만 하는 곳도 있고, 세명이 참가하는 곳도 있다.
' 자, 어떤 놈이 욕심많고, 돈도 많을까. '
주위를 슥 훑어보니 한 놈이 유달리 눈에 띈다. 어리다.
나이는 대략 20대 초반? 꽤 날카롭게 생긴 사내였는데, 그의 눈이 뤼벨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좋아. 다행히 그의 옆자리가 하나 비어있다.
나는 뤼벨과 함께 그리로 천천히 걸어갔다. 다가갈수록 그의 엄청난 음심이 옆에서 느껴진다.
좋네. 이정도로 색을 밝힌다면, 아마도 백설 공주에게는 환장하겠지.
" 여기 껴도 되겠습니까? "
" 참가자분들. 어떠십니까? "
참가자 둘다 상관없다는 눈치다. 사내는 뤼벨을 살짝살짝 훔쳐보며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마르앙 킬백(Marreang Kilbac)'. 옆에 앉아있는, 30대로 보이는 사내는 '레멘 톳트(Lemen Toddt)'.
" 그쪽 미녀의 성함을 여쭈어봐도..? "
" '뤼벨'이에요. "
" 뤼벨이라. 혹시 가문이? "
" 평민이에요. "
그 순간 그의 눈빛이 날카로워진다. 내가 옆에 있어서 말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아마도 그녀를 하찮다고 여기는 것 같다. 평민이니까 감히 귀족인 자신에게 대들지 못할거라는 생각이다.
' 이 녀석을 잡아먹어야겠군. '
" 게임을 시작하겠습니다. "
단순한 포커 게임을 알리는 신호였지만, 나에겐 좀 더 특별한 시작의 알림이었다.
마르앙이라는 사내를 털어먹을.
============================ 작품 후기 ============================
안타깝게도, 이번 설 연휴에 연참은 안될 것 같아요.. ㅜㅜ 그냥 평소처럼 2개씩만 올릴께요. 시간이 부족하네요.. 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