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6/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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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된 이상 마르앙을 이용하는 동시에, 아르펜이라는 그 여자도 이용해야겠어. '

마르앙은 백설 공주를 미끼로, 아르펜은 나를 미끼로 이용하면 된다. 적당히 몰아서, 어느정도 달라붙고 난 뒤에 때가 되면 털어버리면 된다.

마르앙이라는 남자는 확실히 이용해먹기 쉬운 남자였다. 일단 여자를 매우 좋아한다는 것이 그의 최대의 단점이었으니, 그것만 잘 이용하면 손쉬울테고, 문제는 아르펜 공주였다.

그녀의 성향을 모르니 내가 시간을 내서 알아내야한다. 즉, 사적인 만남을 유도해야한다는 것. 나는 일이 터지자마자 곧장 그녀의 행동거지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녀가 묵는 장소에 사는 여러 인물들에게 그녀의 패턴을 알아봤다고 해야할까.

" 흠, 아르펜 공주님은 말타는 것을 좋아하신답니다. 종종 말을 타고 숲을 한바퀴 삥 돌고 오신답니다. "

다른 것은 큰 특징이 없는데, 유독 말타는 것을 좋아한단다. 그리고 숲을 한바퀴 삥 돌고 온다고? 기회의 냄새가 난다. 그녀와 자연스럽게 가까워질 수 있는. 이럴 때 셰넌이 있었으면 그녀의 호감을 사기에 더 좋았을텐데. 마침 오늘 저녁 식사 전에 아르펜 공주가 승마를 할 것이라고 말해놨단다.

' 기회다. '

공주에게 대충 둘러대고, 같이 데리고 온 말 중에서 가장 뛰어난 말을 골랐다. 그래도 보통 말과는 다르게 확실히 품종이 뛰어나다는 생각을 할만한 흑마다. 이제 막 정오가 지난 때라서, 피부 건강을 위해 공주들은 다들 나들이도 삼가는 시간인데, 아르펜은 복장을 갖춰입고 숙소를 나온다.

덕분에 오래 기다리지 않고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 당신은.. "

" 아, 아르펜 공주님. 승마를 좋아하신다는 소리를 들어서, 같이 즐기면 어떨까 싶어서 말이죠. "

" 흥, 제가 왜 당신과 그런 걸 같이 즐겨야하죠? "

생긴 것처럼 도도하다. 공주들은 다 이렇게 성격이 드센건가? 백설 공주도 그렇고, 아르펜 공주도 그렇다. 하지만, 지금 아쉬운 건 나니까.

" 제가 말을 좀 탈 줄 알아서 말이죠. 공주님을 조금 가르쳐드릴꼄 겸사겸사.. "

그녀를 살짝 도발한다. 역시나 그녀의 이마가 약간 찌푸려진다. 그녀는 바로 말을 올라타더니 빠르게 달려간다. 나도 질 수야 없지. '칼'이라고 불리는 내 흑마는 셰넌보다는 못해도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녀의 말도 명마인지 좀처럼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다.

- 다그닥 다그닥

순식간에 도시의 정문에 도달한다. 자주 승마를 즐긴다는 것 때문인지, 병사들이 그녀를 막지 않는다.

물론 나 역시도. 우리는 순식간에 숲속으로 달려간다. 마침 승마를 위해서 코스가 잘 닦여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별다른 장애물 없이 쏜살같이 달린다.

내가 칼을 조금 더 보채며 달리게 하자 그녀와의 거리가 서서히 좁아졌다. 좋아, 칼. 그래 조금 더. 세찬 바람이 얼굴을 훑고 지나간다.

어느새 그녀의 백마의 엉덩이까지 따라붙었다. 그제서야 공주는 내가 자신을 따라잡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말이 조금 더 속도를 낸다. 나도 발을 굴렸지만, 내 흑마는 이 속도가 한계인 모양이다. 그래도 한참을 달렸는지, 코스의 끝이 보였다.

" 워워. 칼. 그만 멈춰. 워. "

도착지점에서 속도를 줄인다. 그녀도 말을 멈춰 내린다. 공주는 말을 쉼터 옆에 세워두고 자리에 앉아 먼 바다를 바라본다. 나도 슬그머니 그녀의 옆에 다가가 앉았다.

" 흥. 제가 더 빨랐죠? "

" 이거 제가 한 수 가르침을 받아야겠는데요? 하하하. "

공주가 피식 웃는다. 호감은 어느정도 얻은 것 같다. 그녀의 목덜미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다. 나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 땀이 났네요. 닦아요. "

아르펜 공주가 날 빤히 보다가 손수건을 받고 이마와 목덜미를 닦았다. 그래도 예의는 있어서 나중에 빨아서 주겠다고 했다. 물론 난 그걸 노린 거고.

" 지금 얘기해줄 수 있나요? 왜 우리 나라의 귀족으로 사칭했는지. "

" 흠. 좋습니다. 뭐, 굳이 숨길 것도 없지만. "

그녀의 몸 방향이 살짝 내쪽으로 틀어진다. 좋은 징조다. 나에게 조금은 마음을 열었다는 소리니까.

" 사실 전 리츠웰 왕국의 사람입니다. "

" 풋. 그건 보면 알아요. 어디 귀족인가보죠? "

" 아니요. 귀족이 아닙니다. "

" 그럼, 평민이었던거에요? "

그녀의 얼굴이 살짝 굳어진다. 그래도 귀족이나 왕족들은 계급체계라는 것이 뿌리끝까지 박혀있는 모양이구나. 평민이라고 이렇게 반응이 달라지다니.

" 물론 아니죠. 전, 리츠웰 왕국의 왕자입니다. "

" 에에? 왕..자요? "

놀랐다는 표정이다. 하긴. 지금 내 위치가 아주 위태위태하니까.

" 그.. 리츠웰 왕자는... 쫓겨다닌다고. "

" 네. 한마디로 한다면, 배신당했다고 해야할까요. 약혼녀에게 뒤통수를 맞아버리는 바람에요. "

" 그게 무슨 소리에요? 배신이라뇨? "

" 말하자면 긴데 말이죠. "

내가 한숨을 푹 쉬며 저멀리 바다를 바라본다. 아아, 푸른 하늘과 푸른 바다라. 게임을 잠시 중단하고 하염없이 바라보고 싶을 정도로 아름답구나.

" 괜찮아요. 시간이라면 많으니까요. "

그녀가 완전히 내쪽으로 몸을 돌렸다. 좋아, 이제 시작해볼까.

" 사실. "

이야기를 시작했다.

" 흑.. 흑.. 어떡해.. 흑. "

예상 외로 공주는 마음이 여렸다. 처음 도도한 모습은 어디로 가버렸는지, 그녀는 내가 준 손수건으로 눈을 콕콕 찍으며 펑펑 운다. 내가 좀 맛깔나게 얘기를 잘한 면도 있긴 하지만, 공주가 울음을 잘 터트리는 성격인 것 같다.

" 힘드셨겠어요. 흑. "

" 아뇨, 이젠 괜찮아요. 어찌어찌 여기까지 오긴 왔는데, 참 인생이란게 묘하네요. 이런 순간에도.. 당신같은 사람을 만나다니요. "

" 흑, 네? "

아르펜 공주가 말끝을 올린다. 무슨 소리지?- 하는 얼굴로 나를 힐끗 보다가 뜻을 이해했는지 얼굴을 붉힌다. 순간 침묵이 흐른다. 고요한 바람이 나뭇잎들을 훑고 지니간다. 순식간에 사방이 비 오는 소리로 가득찬다.

- 싸아

공주가 어찌할 줄을 모르며 시선을 돌린다. 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짝 제끼고 목소리를 살짝 깔아서 분위기 있게 말했다.

" 꿈에 그리던 여인을 만났는데, 하필이면... 이런 상황이라니. 정말 운명의 장난같네요. "

" 그... 그건. "

좋아. 다 넘어왔구나. 이젠 마무리만 잘 하면 되겠지. 확실히 내 징표를 박아놔야 그녀를 얻을 수 있다. 나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간다.

공주도 분위기에 휩쓸려 아무 것도 못하고 내 눈을 바라보다가 눈을 살짝 감았다. 내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닿는다.

촉촉하다. 쑥맥인 이런 여자에겐 처음부터 혀를 이용할 필요는 없다.

간결하게, 하지만 임팩트 있게!

- 쪽

10초정도 지나고 입술을 뗐다. 그녀의 두 눈이 살며시 열린다. 그제서야 상황을 깨달았는지 아랫 입술을 잘근잘근 깨문다. 끝이군. 이젠 계속 그녀를 달구기만 하면 알아서 오게 되어있다.

" 이정도는.. 괜찮겠죠? "

아르펜 공주는 고개를 푹 숙이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그녀도 나에게 이끌려 천천히 일어났다.

" 이제 돌아가보자구요. 시간이 너무 흘렀네요. 다른 사람들이 걱정하겠어요. "

" 네, 그래요. "

공주와 나는 말머리를 나란하게 두고 이야기를 나누며 천천히 도시로 향했다. 벌써 저녁 시간이 다될 무렵이다. 나는 그녀를 향해 저녁 식사때 다시 보자고 말했다. 아르펜 공주는 살짝 수줍게 웃고 고개를 끄덕인다. 후후, 다 넘어왔군.

" 어딜 그렇게 돌아다닌거야?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

" 걱정? 호, 날 걱정했다고? "

내가 히죽히죽 웃으며 말하자 백설 공주는 나를 흘겨보며 소리쳤다.

" 이 바보야! 그런 뜻이 아니잖아! "

" 그런뜻? 무슨뜻? 저녁 식사를 말한게 아니었어? "

백설 공주가 당황하며 어버버- 거린다. 뭐, 시간도 촉박하니까 놀리는 건 이쯤해두자. 나는 그녀를 향해 얼른 준비하라고 말했다. 그녀가 알았다며 멀뚱하게 서있는다.

" 뭐해? 준비하라니까. "

" 너 안나가? "

" 나가야되는거야? 우리 사이에? "

" 무.. 무슨 소리 하는거야! 오해할 소리 하지마! 얼른 안 나가? "

그녀가 탁자 위에 있는 물건을 집어 던질려고 머리 위로 든다. 에고고, 이젠 나가야겠네. 나는 두 손을 들며 방을 나왔다. 마침 소란을 듣고 나온 뤼벨과 만난다. 그녀가 뭐라고 할 새도 없이 나는 그녀와 입을 맞춘다.

" 퐈하... 하... 어머, 갈리브도 참. 누가 보면 어쩔려구요. "

" 그래? 이거 섭섭한데. 내가 부끄러운거야? "

" 그게 아니잖아요, 참. 심술 궂긴. "

뤼벨이 내 팔을 살짝 꼬집는다. 그래도 내 위안이 되어줄 수 있는 이런 여자가 한 명이 있다는 사실이 안도감을 느끼게 해준다. 뭐, 뤼벨이 르세뜨처럼 날 배신할 이유도 없고, 그럴 위인도 되지 않으니까.

" 오늘밤, 기대해. 찐하게 해줄테니까. "

" 애들 말이 틀린게 하나도 없다니깐. "

" 무슨 말? "

뤼벨이 손가락으로 내 가슴을 콕콕 찌르며 말한다.

" 남자는 다! 짐.승.이라구요. "

물론이지. 다 짐승이지. 그런데, 나는 그 짐승 중에서 아주 사악한 짐승이란 말이지.

나와 백설 공주가 약속한 장소에 도착하자, 마르앙과 아르펜이 우릴 맞이했다. 적당한 크기의 상 위에 새하얀 보(褓)가 깔려있다. 방 전체에 은은한 향기도 난다. 아르펜과 나는 서로 눈을 한번 마주치고 무음의 인사를 나눈다.

" 오시죠, 백설 공주. 아주 기다렸답니다. "

" 저도 반가워요, 마르앙 왕자님. "

우리는 서로서로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았다. 사실 처음부터 우리의 목적을 얘기하고 싶은 생각은 아니라서, 천천히 마르앙에서 우리의 상황을 얘기할겸 그렇게 오늘은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물론 나와 아르펜의 외도도 내 계획엔 포함되어 있지만. 그래야 백설 공주도 마르앙을 살살 달굴 수 있을테니까.

" 저녁은 뭘로 하시겠습니까? "

" 음, 간단하게 생선 종류로 하죠. 여긴 항구 도시이기도 하고, 생선 요리가 일품이기도 하니깐요. "

" 호, 좋습니다. 여기. "

마르앙이 대기하던 사내를 불러 이것저것 음식을 시켰다. 사내가 주문을 받고 방을 나간다. 잠시간 침묵이 흐른다. 먼저 침묵을 깬 사람은 예상 외로 마르앙이었다.

" 오늘따라 훨씬 아름다우시군요, 백설 공주님. "

" 호호, 칭찬 감사드려요. 왕자님도 참 멋있으세요. "

" 하하하하, 이거 부끄럽군요. "

마르앙이 기분 좋게 웃는다. 그들이 그러든지 말든지 나는 아르펜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미리 내가 백설 공주에게 알아서 둘이 얘기를 해라고 주문해놨기 때문에, 그녀는 마르앙을 자기 원하는 대로 이용할 것이다.

얼마 있지 않아 음식이 나온다. 무슨 생선인지는 모르지만, 맛이 괜찮았다. 마르앙이 자신감있게 요리에 대해서 이것저것 설명했고, 백설 공주가 맞장구를 치며 그를 치켜세워준다. 그는 좋다고 웃는다.

' 멍청한 자식. '

역시 예쁜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는구만. 나는 잠시 소화를 시킬겸 밖에 한번 나갔다 오겠다고 일어섰다. 아르펜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히려 마르앙은 기분 좋은 눈치다. 백설 공주와 단 둘이 있을 수 있으니까. 작업도 확실하게 걸 수 있을테고. 나는 살짝 백설 공주를 바라봤다.

그녀 역시 나와 눈이 마주친다. 나는 소리없이 입을 움직였다.

' 잘해봐. '

백설 공주는 두 눈썹을 살짝 올렸다가 내린다. 자신있다는 표정이다. 그녀도 보통 여자는 아니니까 알아서 잘 하겠지. 나는 또 내 일에 최선을 다하면 되니까.

나와 아르펜 공주는 밖에 만들어진 정원을 천천히 걸었다. 다행히 사람이 아무도 없다. 나는 그녀를 데리고 약간 으슥한 곳으로 옮긴 뒤에, 그녀를 와락 안는다. 그녀가 살짝 당황한 듯 보였지만, 곧 두 손으로 내 허리를 감는다.

" 보고 싶었어요, 공주. "

" 저도.. 요, 왕자님. "

살짝 공간을 열어주자 그녀가 나를 올려본다. 좋은 타이밍이군. 나는 망설일 것 없이 그녀의 입을 맞추었다. 아까보다 조금 더 진한 키스였다. 입술 안쪽까지 사용했달까.

" 하아, 왕자님. "

" 갈리브.. 갈리브라고 불러줘. "

내가 살짝 말을 놓았다. 하지만 불편한 기색은 아니다. 오히려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 아르펜..이라고 불러줘요. "

" 그래, 아르펜. "

남자를 아예 처음 겪는 모양인지 하루만에 완전히 나에게 넘어와있었다. 뭐, 이럴 수록 나는 더 편할 뿐이다. 이용할대로 이용해먹자.

" 내일도 시간있지? "

" 네, 갈리브. "

백설 공주도 잘하고 있으리라 믿는다.

둥근 보름달이 우리 둘을 환하게 비추고 있다.

============================ 작품 후기 ============================

다들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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