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여명이 밝아 온다. 저멀리 바다 지평선에서 붉은 태양이 떠오를때, 창밖을 보면서 차 한 잔을 하면 가슴 속에 있는 온갖 시련들이 다 씻겨 나가는 기분이다.
기분이 좋다. 이제 막 일을 하러 나가기 위해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창밖 너머로 보인다.
평화롭다. 이런 평화로움때문에 이 '헬문드'는 모든 귀족의 휴양지로 각광을 받는 모양이다.
- 후룩
이대로 한참 시간이 지났다. 이미 해는 바다 위로 쑥 올라가버렸다. 찻잔에 든 차도 이미 한 방울도 남지 않았다. 이젠 움직여야할 시간이다.
" 뤼벨. 뤼벨? "
그녀가 천천히 눈을 뜬다. 손으로 눈을 막 비비고 상체를 일으켜 세운다. 그녀의 아담한 젖무덤이 밖에 훤히 드러난다. 가슴에 내가 깨문 이빨 자국이 남아있다.
" 잘 잤어어어엉... 요. "
그녀가 말 중간에 크게 하품한다. 자리에 일어서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보였다. 몸매가 아주 좋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허리를 슥 훑고 엉덩이를 강하게 쥔다.
" 음, 좋은 아침. "
" 짓궂긴. "
뤼벨이 나에게 살짝 떨어져 옷을 입는다. 그녀는 긴 머리카락을 한대로 모아 몇번 묶는다.
" 아침은 어쩔까요? "
" 괜찮아. 생각 없어. "
" 그럼 저도 안 먹을래요. 헤헤. 침대에 더 누워있어요, 갈리브. "
" 안돼. 바빠. 조금 있다가 나가봐야돼. "
뤼벨이 시무룩해진다. 그녀의 마음은 이해한다. 휴양지인 '헬문드'에서 나와 같이 시간을 조금 보내고 싶은 모양이지만, 어쩔 수 없다. 뭐, 나중에 하루쯤은 시간내서 다녀도 될지도.
" 좋아, 그럼. 나중에 꼭 같이 놀러가자. "
" 정말이죠? 약속 했어요! "
그녀는 기분이 좋아서 방방 뜬다. 흐뭇하다. 나는 그녀에게 키스를 쪽- 하고 방을 나섰다. 백설 공주 방에 들렀다갈까- 하고 생각하고 문고리를 잡았는데, 돌려지지 않는다. 쳇, 꼼꼼하구만. 분명히 나를 노리고 문을 잠궜을게 분명하다.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돌려 건물을 나왔다.
" 으랏차차차! "
기지개를 한번 쭉 펴고, 마굿간으로 향했다. 칼은 막 여물을 먹고 있는 도중이다. 그 녀석이 여물을 전부 다 먹을 때 동안 기다린다.
- 푸르르
녀석이 콧바람을 뀐다. 다 먹었다고 말하는 모양이다. 그래, 영리한 녀석. 나는 칼의 콧등을 몇번 쓰다듬고 고삐를 잡고 마굿간을 나왔다. 곧바로 아르펜의 숙소까지 걸어갔다. 그녀가 보인다.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 아, 갈리브! "
아르펜이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든다. 나도 화답하며 손을 흔들어준다.
" 잘 잤어요? 사실 전 잠을 많이 설쳤어요. 기대되서... 헤헤. "
쌀쌀했던 모습은 이젠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한 명의 사랑에 빠진 여인이 되버린 아르펜을 보며 나는 입을 연다.
" 신나게 달리고 싶은데, 가볼까? "
" 좋아요. "
아르펜이 백마 위에 올라타 순식간에 달려간다. 나도 그녀를 뒤따라 달렸다. 정문을 지나 숲속으로 들어간다.
- 두구두구두구두구
10분을 넘게 달려 어제 왔던 쉼터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녀는 말에서 내리지 않는다. 나에게 조금 더 특별한 곳을 보여준단다.
" 사실 여긴 아무도 모르는 곳이에요. 따라와요. "
아르펜이 앞장서서 어디론가 천천히 걸어간다. 숲속 깊이 들어갔는데, 어느순간부터 초원이 보인다. 여긴..? 푸른 초원과 언덕, 그리고 푸른 바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또 있을까- 하고 생각이 든다.
" 정말 아름답죠? 사실 혼자 간직하고 싶었던 곳인데, 갈리브라면 저도 좋으니까. "
" 너무 아름다워, 아르펜. 고마워. 이런 곳을 가르쳐줘서. "
그녀가 수줍게 웃는다. 그리고 순식간에 어디론가 달려간다. 목표지점을 보니 언덕 위 큰 나무인 것 같다.
나도 질 수야 없지. 순식간에 맹렬한 바람이 내 볼을 스치고 지나간다. 언덕 위의 이름모를 나무에 도착한 우리 둘은 말에서 내렸다.
아르펜이 준비해온 넓은 천을 나무 밑에 깐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하얀 백사장이 보였고, 푸른 파도가 흰 진주가 되며 부서진다.
나는 아르펜과 천 위에 앉았다. 그녀가 나에게 슬며시 기대온다. 나도 손을 들어 그녀를 안았다.
" 사랑해, 아르펜. "
" 저도.. 사랑해요. "
사실 게임의 목적만 아니라면, 정말로 그녀와 함께 사랑을 나누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분위기다. 아마도 그녀는 나와 같은 마음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우리 둘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키스를 나눈다. 어제보다 더 진한 키스다. 그녀가 천천히 뒤로 눕혀진다.
- 쮸웁 쯉
혀가 섞인다. 그녀는 두 팔로 내 목을 감싼다. 굉장히 진하고 농염한 키스를 나눈 뒤에, 우리 둘은 천천히 떨어져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진도를 더 나갈까? 아냐. 너무 성급하면 일을 망칠 수 있어. 내가 서서히 떨어지자 그녀가 살짝 의아해한다.
" 갈리브? "
" 괜찮아. 널 아끼고 싶어. 함부로 널 안고 싶지 않아. "
그 말이 더 감동적이었는지 그녀가 나를 와락 안는다. 오케이, 좋다. 내가 생각해도 뿅 갈만한 대사였으니까. 그녀의 품이 따뜻하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그녀를 얻은건 아니겠지? 빨리 달아오른 사랑은 빨리 식을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적당히 그녀를 달궈야한다. 아주. 적당히.
" 하지만, 나라도 괜찮을까? 난, 도망자 신세인 왕자잖아. 너는 한 나라의 사랑스러운 공주고. "
" 그런 말 하지마요, 갈리브. 전, 전 상관없어요. 아버님, 어머님도 다 이해해주실거에요. 제가 그렇게 할 수 있어요. "
그녀의 두 눈이 반짝인다. 그래? 그렇게 할 수 있다니. 아주 자신만만한 어조다. 자신의 발언권이 약한 모양은 아닌 것 같다.
" 사실... 아니에요. 그냥, 그냥 갈리브는 이대로 있기만 해줘도 되요. "
무언가 말을 하려다 멈춘다. 아직 그녀의 마음을 완전히 열진 못한 모양이다. 하지만, 시간은 아직 아주 많으니깐. 흐흐흐.
" 알겠어, 아르펜. 정말 너를 사랑해. "
" 저도 그래요, 갈리브. "
다시 진한 키스가 이어진다.
점심 때가 되어 우린 헤어졌다. 아쉽게도 그녀가 오늘 중요한 약속이 있단다.
어쩔 수 없이 그녀와 헤어진 나는 숙소로 돌아왔다. 이왕 이렇게 된거 뤼벨이랑 같이 시간을 보내면 좋을 듯 싶다.
백설 공주의 방에 잠시 들렀는데, 그녀가 보이지 않는다. 아마 그녀도 마르앙과 약속이 있어서 나간 모양이겠지? 몸만 버리지 않는다면, 그녀가 뭘 해도 상관하고 싶지는 않다. 그래도 자기 앞가림은 하는 여자니까.
" 뤼벨? "
" 어? 갈리브! 벌써 왔네요. 일은 끝난거에요? "
뤼벨이 책을 덮으며 활짝 웃는다. 나는 씩 웃고 고개를 끄덕였다. 순식간에 그녀의 손을 낚아채고 방을 나간다. 뤼벨은 내 행동을 깨닫고 모습이 이상하다고 앙탈을 부렸지만, 그대로 모습도 괜찮으니까.
" 잉, 갈리브! 이게 뭐에요. 화장도 안하고, 옷도 안 예쁜데. "
" 상관없어. 내 눈에 예쁘니까. "
" 그래도.. 그러면 나랑 갈리브랑 비교되니까. "
그녀가 뭐라든 상관없다. 뤼벨과 나는 시장 곳곳을 돌아다니며 구경했고, 백사장도 가서 맨발로 바다도 들어갔다. 시원하다. 주위에는 연인들이 많이 보인다.
" 헤헤, 정말 즐거워요, 갈리브. "
뤼벨이 날 보며 활짝 웃는다. 아아, 나는 죄 많은 남자구나. 이리도 여자들이 많다니. 물론 두 명이다. 뭐, 조만간 백설 공주도 합류하게 만들테니까.
" 해보고 싶은거 있어? "
" 해보고 싶은거라... 있어요. 갈리브랑 같이 해보고 싶은거. "
" 뭔데? "
" 정말 멋있으세요. 남자 친구인가봐요? "
" 아뇨. 제 남편이에요. "
여직원이 부러운 눈으로 뤼벨을 바라본다. 허, 해보고 싶다는 것이 이거였나. 그녀는 나를 삐까번쩍한 옷가게로 데리고 들어가 이것저것 옷을 입혔다.
나는 남자답게 상당히 잘생긴 편이라서, 멋있는 옷을 입을 때마다 여직원들이 황홀한 눈길로 쳐다본다. 뤼벨은 부러움과 시기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의기양양하게 미소를 짓는다.
" 계.. 계산은 어떻게.. "
" 전~ 부 살께요. "
무려 50골드. 하지만, 뤼벨은 지갑에서 전표를 하나 꺼냈다. 그리고 50골드를 적고 사인을 슥슥 한다.
" 자, 여기요. "
" 네, 감사합니다. "
지금 전표는 나중에 돈을 직접 찾아가라는 징표나 마찬가지다. 나라에서 직접 발행하는 전표는 그 약속을 직접 관리한다는 것이라서, 전표는 거의 현금과 마찬가지였다.
" 백설이 준거야? "
" 네. 공주님께서 돈을 많이 들고 다니면 귀찮다고 주신거에요. "
가게를 나온 나는 약간 황당하게 그녀를 쳐다보았다. 참으로 여자들은 이상한 생물이란 말이야. 여자들은 가끔씩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한다.
" 헷. 그야 갈리브는 남자니깐. 우리 여자들의 마음을 이해 못한다구요. "
그래그래, 남자인 나는 짐승이니까 말이지.
" 놀라운 소식이야. "
" 뭐가? "
마르앙과의 약속에서 돌아온 백설 공주가 다짜고짜 내 방문을 열고 소리친다. 뤼벨이 슬그머니 자리를 피한다. 공주는 문을 닫고 팔짱을 끼며 의기양양하게 나를 내려다 본다. 아, 물론 내가 침대에 누워있어서 그런 것이지만.
" 알고 싶어? "
" 물론이지. 빨리 말해. "
백설 공주가 랄랄라- 하면서 방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 물건을 이리저리 만지면서 들었다 놓고, 장롱을 열었다 닫는다. 뭐하는 짓이지?
" 뭐해? "
" 아니, 내가 뭐 얻을 게 없나 싶어서. "
젠장. 여유로운 표정이다. 하지만, 그 속에 들어있는 그 자존심 높은 콧대를 내가 보지 못할 리가 없다. 젠장맞을 년. 넌 나중에 꼭 두고봐.
" 그래그래, 아주 잘했습니다 백설 공주님. 천한 제가 그 소식을 좀 들어봐도 괜찮을까요? "
" 음... 안돼. "
약간 화가 치솟는다. 그런 모습이 기분이 좋은건지 백설 공주가 깔깔- 하고 웃는다.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에게 성큼성큼 다가간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전혀 바뀌지 않는다. 아직도 자신이 우위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 흥. 뭐 어쩔건데? "
" 계속 그러면, 확.. 키스해버린다? "
기겁하는 공주의 모습을 보려고 했는데, 그래도 그녀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해봐 해봐, 그럴 용기도 없으면서' 하고 날 도발한다. 으으, 이 년이. 나는 순식간에 그녀를 확 잡아당겨 입을 맞춘다. 그것도 아주 진한 키스로. 공주도 놀랐는지 입을 닫지 못하고 내 혀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 쮸웁 쯉 쯉
꽤 오래 키스를 했는데, 그녀가 날 확 밀어버렸다. 얼굴이 시뻘게진 채로 어버버- 하더니 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 이.. 이 죽일 노옴!! "
" 헤헷, 공주님의 키스가 기분이 너무 좋은데? "
그제서야 자신의 상황을 알았는지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방 밖으로 휙 도망쳤다. 잠시 후에 뤼벨이 의아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 왜 저러셔? "
" 아, 잠시 화장실이 급하다고 하더라고. "
" 그래? 흐응. "
뤼벨이 알 것 같다는 표정으로 내 위아래를 훑어본다. 눈치 하나는 예술적으로 빠르구만.
" 뭐, 그래 알겠어. "
나중에 백설 공주한테 다시 가봐야하나.
하지만, 공주의 방문은 잠긴 채 그날 내내 열리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모두 즐거운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