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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백설 공주가 영지를 떠났다. 그녀는 마지막 출발하기 전에 나를 찾아와서 안도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 이유야 뻔했다. 나는 갈 마음이 아예 없는 것처럼 행동했으니까. 하지만, 칼리는 그런 내 행동에도 의심의 눈초리를 지우지 않는다. 쳇, 의심많은 년.
" 칼리. 나중 오후에 뤼벨을 불러줘. 맛있는 야식도 같이 챙겨와라고 전해. "
" 애.슐.리.경. 입니다. 알겠습니다. "
애니메이션이었다면, 그녀의 이마에 핏줄이 하나 크게 생긴 채로 나에게 대답했을 것이다. 그만큼 그녀는 내가 그녀를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싫어한다는 말이었다. 참으로 인정없는 년이 아닐 수가 없다. 아직도 예전의 그 일에 대해서 꽁해있는 모양이다.
그러든지 말든지, 오늘 그녀는 나에게 된통 당하게 될 것은 뻔했다. 아무리 칼리라고 해도, 그런 생각까지는 해보지 않을테니까. 단지 그녀의 얼굴이 어떻게 변할지 보지 못하는게 아쉬울 뿐이다.
" 저를 부르셨다구요? "
" 응. 헤헤, 날 좀 도와줘야겠거든. "
이미 해가 넘어가버렸기에, 촛불에 의지하지 않으면 한치 앞도 잘 보이지 않는 시간대였다. 아직 조금 더 그녀와 여기서 머문 뒤에 계획대로 벗어나면 될테니까.
" 오랜만에 너와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지만, 시간이 촉박해서 말이야. "
나는 씩 웃으며 그녀에게 계획을 털어놓는다.
- 끼익
문이 열린다. 칼리가 보였다. 그녀는 내 뒷모습을 흘깃 보더니 다시 고개를 돌렸다. 캄캄한 밤이지만, 그래도 사람의 실루엣 정도는 구분할 정도니까 안심하기에는 일렀다.
" 잠깐. "
순간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설마 그녀가 눈치챈건가? 칼리가 다가오자 척-, 척- 하는 쇠마찰 소리가 들린다.
그녀는 검집 채로 칼을 쑥 내밀더니 천천히 이동 테이블 보를 걷어낸다. 내가 거기에 숨어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뤼벨에게 야식을 가져와라고 한 이유도 이런 이중 트랩을 설치해 그녀를 혼동시키려고 한 것이었다. 다행히 그녀는 그대로 속아넘어갔고.
" 가보시죠. "
나는 살짝 고개를 숙이고 다시 천천히 이동 테이블을 몰고 갔다. 뤼벨이 시녀복을 입고 왔기에, 내가 시녀복을 다시 입고 나갈거라는 생각은 못한 모양이다.
' 역시, 예상대로! '
그래도 내가 날씬한 몸이라서 어떻게든 시녀모와 시녀복을 착용했지만, 힘을 조금만 풀어도 터져버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깜깜한 밤이 아니었다면, 분명히 들켰으리라.
어쨌든 나는 수월하게 내 방을 벗어났다. 휘유, 성공인데. 나는 곧장 옷 보관방으로 들어가 나에게 대충 맞는 옷을 꺼내입고 성을 나왔다.
곧장 마굿간에 들러 '칼'을 데리고 나왔다. 그 녀석은 내가 오랜만이라는 듯, 콧바람을 푸르르- 하고 내었다.
" 그래그래, 오랜만이다, 칼. "
나는 칼의 얼굴을 몇번 쓰다듬고 말을 올라탔다. 있는 거라고 해봤자, 풀풀 날리는 먼지 뿐이라 보급은 마을마다 구걸을 해야할 듯 싶었다. 그래도, 이 정도 미모면 동네 아가씨정돈 후려잡을 수 있을테니까 걱정은 없다.
" 이럇! "
출발하려고 소리치는데, 뒤에서 칼리의 목소리가 들린다. 성 위의 창문에서 달빛에 비치는 내 모습을 본 것 같았는데, 그녀는 테라스에 나와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갈~ 리~ 브으으으!!! "
물론 나는 친절하게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아침까지는 버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그녀의 의심이 더 심했었나보다.
하지만 이미 나는 출발했고, 그녀는 먹이 놓친 고양이처럼 앙칼지게 내 이름을 되부를 수 밖엔 없었다.
혼자라서 그런지 5일만에 수도 언저리까지 도착했다. 수월하게 들어가려면 상인 행렬에 끼는 것이 좋았으므로, 만 하루정도 상인 행렬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날 이른 아침에, 긴 상인 행렬이 저멀리서 보였다. 무슨 상단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자연스럽게 그 행렬의 뒷꽁무니를 따라붙어 몰래 수도 안으로 잠입하는데 성공했다.
" 여긴 항상 똑같구만. "
돌아온지 어언 몇 개월 만이지만, 변한건 하나도 없었다. 이젠 백설 공주의 숙소만 찾으면 되겠지? 대충 수소문을 해서 그녀가 머무르는 곳을 찾았다. 혹시 궁으로 들어가버린건 아닐까- 하고 걱정했었는데, 다행히 그녀는 궁 밖에서 숙소를 정한 모양이었다.
지금은 낮이라 눈이 많으니 밤에 몰래 찾아가야할 듯 싶다. 그 전에 돌아다니면서 나라의 분위기를 살펴보니, 생각보다 평화로웠다.
' 백설 공주의 숙소 앞이나 지키고 서있을까? '
혹시 그녀가 외출하러 나오게 된다면, 살짝 접촉해서 내 존재만 알리면 될테니까. 하지만, 나는 뜻밖의 인물을 보게 되었다. 바로, 르세뜨 대공녀. 몇 개월만에 본 그녀는 예전보다 훨씬 수척해보였다.
얼굴에도 힘이 없고, 당당했던 모습도 사라졌다. 연기인가? 자신이 꾸민 일이 아닌 것처럼 연기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보는 눈이 있기 때문에. 그런데 왜 백설 공주를 찾아온거지? 르세뜨는 왔던 표정과 별반 다를 것 없이 다시 숙소를 나온다. 무슨 얘기를 나눴던 걸까. 아마도 나에 대한 얘기겠지?
밤이 기다려진다.
깜깜한 밤이 되어, 나는 숙소 앞으로 찾아갔다. 근위병도 일부만 알고 있는 내 얼굴을, 일개 사병들이 알 리가 없었으니 나는 당당하게 숙소의 정문에서 보초병에게 말했다.
" 백설께, '걱정하시던 그 분이 왔다'라고 전해주게. "
옷이 살짝 남루해보였지만, 내 태도가 심상치 않다라고 느꼈는지, 그 보초병은 서둘러 숙소로 들어갔다. 얼마 있지 않아서 백설 공주가 놀란 얼굴로 튀어나온다.
" 갈.. 글렌! "
" 반갑소, 백설. 늦게 출발해서 오늘 늦게 도착했구려. 같은 일행인데, 들여보내 주겠소? "
나는 보초병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백설 공주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나의 입장을 허가해준다. 그녀의 얼굴이 심상치 않지만, 아직 소리칠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노려만 볼 뿐이었다. 또 한참을 소리치겠구만. 나는 그녀의 안내를 받아 그녀의 임시방으로 들어갔다.
" 도대체가! 분명히 내가 말했을텐데! 절대 오지 말라고. "
정말 단단히 화가 났는지, 그녀의 표정이 굳어있다. 물론 이럴 때 여자의 마음을 풀어주는 것도 내 장기니까. 나는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가 작은 두 어깨를 잡았다.
" 널 보내고 얼마나 걱정했다고. 넌 아직도 궁의 표적이야. 왜냐하면, 나를 제외한 유일한 정통 혈통이 바로 너란 말이야. 내 마음을 아직도 몰라주겠어? "
그녀의 두 눈이 사정없이 흔들린다. 굳었던 표정이 서서히 풀리더니 그녀는 두 눈을 감고 한숨을 푹 내쉰다.
" 그건 내가 걱정할 일이야. 그리고 별다른 일 없을거고. "
" 나는? "
" 뭐? "
내가 진지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제 그녀의 마음을 뒤흔들 때다.
" 널 사랑하는 나는? "
그녀가 입을 살짝 벌리고 충격을 받은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절대 부끄러워하거나, 그녀를 압박해서는 안된다. 그냥 있는 그대로 진심을 보여주기만 하면, 그녀는 알아서 넘어올테지.
" 그.. 그게.. 무.. 무슨 "
" 나는 널 사랑하니까. 내 목숨보다도 사랑하니까. "
혼란스럽다는 듯이 내 시선을 피한 그녀는 어쩔 줄을 몰라하며 내 손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다시 어깨를 강하게 잡고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
" 대답을 기대해서 하는 말도 아니야. 니가 누구를 사랑하든 상관없어. 하지만, 내 마음은 오직 널 향해있어. 예전엔 다소 그 사랑이 삐뚤어져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아니야. "
아마도 예전에 내가 했던 말들이 떠오를 것이다. 내 목적은 백설 공주였다는 것. 그것을 기억했는지, 그녀의 얼굴이 새빨게진다. 좋은 징조다. 그녀도 나에게 어느정도 마음이 있다는 말이겠지. 그녀와 함께 고난과 역경을 겪으면서 나에게 천천히 마음을 열었을 것이다.
" 나.. 난 사실 지금 혼란스러워. 니.. 니가 무슨 뜻으로 그런 말 한건지도 모르겠고. 일단 내일 다시 얘기해. 지금은 너무 머리가 복잡해. 방은 시녀에게 물어보면 알아서 해줄거야. "
그녀가 날 등지고 돌아섰다. 아마도 많이 혼란스럽겠지. 생각보다 두근거리고 기뻐하는 자신이 어색할테니까. 나는 생각보다 아주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고백했다고 생각한다.
' 밤새내내 고민해라고. '
아마 그녀에게는 오늘이 잠을 이루지 못할 밤이 될 성 싶다.
나의 보안을 최대한 강화시켜야해서, 백설 공주는 내 신변을 아주 철저하게 숨겼다. 그녀는 내가 너무 무리하게 행동했다고 나무랐지만, 걱정이 듬뿍 들어가 있는 어투였다.
어느정도까지 자신의 마음을 이해한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조금은 나에 대한 마음을 인정한 것처럼 보인다. 물론 나도, 그녀도 그것에 대한 말은 직접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여길 들어온거야? 잘못하다간 너의 목이 한번에 날아가버린다고. "
" 아무리 그래도, 어머니가 여왕인데, 그럴리가 있겠어? "
백설 공주가 한숨을 푹 쉬고 한손으로 이마를 만지며 말한다.
" 넌 아버지를 죽였다고 누명을 썼어. 그것만으로도 최소 사형이야. 더 심하면, 엄청난 고문까지 당해야할 판이라고. "
" 걱정마. 들키지 않을 자신 있어. 어차피 내 얼굴을 아는 사람도 궁안에 있던 일부 뿐이니까. "
하지만 그녀의 걱정은 사라지지 않았는지, 내내 한숨을 푹푹 내쉰다. 그녀가 조금만 도와주면 나도 더 수월하게 궁안으로 잠입할 수 있을테니, 그녀는 아마도 날 최대한으로 도와줄 것이다.
" 그런데, 어제 르세뜨는 왜 온거야? "
" 아, 그거? 너의 행방을 물어보던데? 만난 적 없냐고. 이상한 점이 많았지만. "
" 이상한 점? "
백설 공주가 곰곰히 생각하더니 천천히 입을 연다.
" 연기하는 거라면 정말로 깜빡 속아넘어가겠더라고. 얼굴도 헬쓱한게, 정말 니 걱정을 많이 하더라. "
조금 의아하다. 꼭 백설 공주에게 이럴 필요가 있을까? 아니면, 그녀는 내가 백설 공주와 이미 만났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어쩌면 내가 사자의 아가리로 들어온 걸지도 모른다.
" 뭐, 그건 신경 끄자고. 일단 내가 들키지 않고 어머니와 접촉할 수 있기만 하면 되니까. "
" 그래서, 귀족으로 잠입하겠단거야? "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한명씩 여왕의 앞으로 가서 선물을 건네주는 시간이 올테니, 그 때 나도 쪽지가 있는 선물을 그녀에게 건네주면 될테니까. 물론 모든 선물은 시녀장들이 검토를 할테니, 그녀가 반드시 선물을 그 자리에서 열수 있도록 어느정도 언급해주면 될 것이다.
자신의 어머니도 영리한 여자니까, 알아들을 것이다.
' 선물은.. 거울이 좋겠지? '
동화를 참고하면 그녀에게 줄 선물은 거울이 알맞을 것 같았다.
" 어차피 킬백 왕국의 귀족이라고 하면 되니까. 잠시 너희 영지에 머물고 있다고 하면 되고. "
" 징표는? "
" 여기. 혹시나해서 아르펜에게 주문해놨지. "
킬백 왕국의 귀족을 상징하는 반지. 이전에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 아르펜에게 미리 부탁을 해놓은 물건이었다. 그것이면 아무런 문제없이 성을 통과할 수 있을 것이다.
" 좋아. 단, 절대 나서서 움직이면 안돼. 조용히만 있어. "
" 물론. 나도 내 수명을 단축시키는 짓은 안해. "
백설 공주가 그제서야 약간 표정이 풀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여왕과 말만 잘 된다면, 자신들의 계획에도 큰 도움이 될테니까. 이번 일만 잘 넘어간다면, 상황이 많이 바뀔 수도 있다.
' 조만간 보겠군요, 여왕님. '
과연 그녀는 어떤 상황에 처해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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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편 달성! 이제 다시 흥미를 일으켜드리겠습니다. 후후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