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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리브! "
아르펜 공주는 배에서 내리자마자 나를 향해 두 팔을 활짝 뻗으며 안겨왔다. 그녀는 두 팔에 힘을 강하게 주며 내 몸을 꽉 안았다. 나는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고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 다 큰 처녀가 이러면 되겠어? "
" 흥. 어차피 갈리브랑 결혼할건데요, 뭘. "
백설 공주가 약간 속이 상하는 표정으로 뚱-하게 나와 아르펜을 번갈아보더니, 자신에게 다가오는 마르앙을 향해 활짝 웃으며 몸을 살짝 낮추었다.
" 어머, 왕자님. "
" 하하하, 공주! 내가 왔소. "
마르앙은 금빛으로 번쩍이는 갑옷을 입고 멋을 잔뜩 낸 모습으로 백설 공주에게 다가갔다. 곧 그의 뒤를 따라 은빛 갑옷을 입고 있는 기사단이 척척- 소리를 내며 배에서 내렸다. 그 수만 해도 무려 500명. 하지만, 아직 대부분의 기사단이 다른 배를 타고 오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 뭔가 지나친데? '
흡사 정복 전쟁처럼 병사들의 수가 너무 지나치게 많아 보였다. 분명히 아르펜 공주에게 그에 대한 내용은 주지시켰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수가 많다? 뭔가 약간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물론 아르펜 공주가 날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확실히 단언할 수 있었지만, 무언가 약간 찜찜한 구석이 있었다.
" 갈리브, 우린 들어가요. "
" 어? 어. "
나는 백설 공주를 향해 눈을 찡긋했다. 그녀도 내 신호를 받고 살짝 눈썹을 올렸다가 내렸다. 백설 공주의 표정도 심상치 않은게, 아마도 그녀 역시 병사들의 수가 지나치게 많다고 느끼는 모양이었다.
" 아르펜. 병사의 수가 왜 이렇게 많은거지? "
" 네? 아, 전쟁을 확실하게 이겨야 하잖아요. 잘못하다가 전쟁에서 져서 갈리브를 잃을 순 없으니까요. "
그녀의 말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묘한 위화감이 드는게, 내 감이 자꾸만 위험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이상한 느낌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그녀에게 직접 불만을 털어 놓을 수는 없었다.
그녀의 의도를 알아보려면 차근차근히 속을 긁어봐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데리고 아르펜 공주를 위해서 준비된 방으로 들어갔다.
" 어머, 갑자기 왜. "
나는 더이상 기다릴 것 없이 그녀의 얼굴에 키스를 퍼부으면서 천천히 옷을 벗겼다. 그녀도 곧바로 나의 행동에 응했다. 우리 둘은 순식간에 알몸이 되어 서로 엉켰다.
방은 순식간에 후끈거리며 열풍이 휘몰아쳤다.
" 아깝지 않아요? "
" 뭐가? "
내가 아르펜의 가슴을 손으로 희롱하면서 놀고 있는데, 갑자기 그녀는 나를 향해 휙 돌아서 엎드렸다. 그녀의 단발 머리가 내 가슴을 간질간질 간지럽힌다.
" 왕의 자리요. 백설 공주에게 양보하기엔 아깝지 않냐구요. "
" 괜찮아. 그런 자리는 필요없어. 괜히 머리만 아프고. "
아르펜의 눈이 묘하게 빛난다. 그리고 그녀의 입에서 의미심장한 말이 튀어나왔다.
" 난... 아까운데. "
그녀는 무언가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아까 느꼈던 묘한 위화감에 해당하는 말이라고 확신이 들었다.
" 전, 그녀에게 여왕의 자리를 주기 싫어요. "
순간 내 가슴이 딱- 막혔다. 그녀의 욕심. 그 말을 듣는 순간에 내 머릿속이 휙휙 돌아갔다. 천천히 그녀의 목적이 보이기 시작했다. 설마. 내가 상체를 벌떡 일으키자 그녀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내 가슴에 작은 손을 얹었다.
" 걱정하지 말아요. 제가 알아서 다 할테니까. 그냥, 당신은 내 옆에만 있어주면 되요. 사랑해요. "
무서운 여자다. 어쩌면 나는 최악의 선택을 고른건가?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그녀는 아마도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일 것이다. 지금 리츠웰 왕국의 여왕과 비슷한 인종.
" 어머, 긴장하지 말라니깐. 아직 결정한건 아니니까, 긴장풀어요. 후후. "
나는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지금 당장 백설 공주에게 가야한다. 그녀만이라도 여기서 빼내자.
" 잠깐, 바람좀 쐬고 오겠어. "
" 그러세요. 기다리고 있을께요.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마세요. "
나는 황급히 파자마를 걸치고 백설 공주의 방으로 뛰어갔다. 시간이 없다.
- 쿵쿵쿵쿵
" 백설! 백설!! "
잠시 후에 문이 천천히 열리면서, 백설 공주가 의아해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일단 그녀를 밀치고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궜다.
" 무..슨 짓이야! "
그녀는 내 옷차림을 보고 오해했는지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몸을 탁자 뒤로 피했다.
" 그런거 아니야. 당장 짐싸서 백작 영지로 돌아가. 절대로 아무도 믿지말고. "
" 무슨 말이야? 돌아가라니? 믿지 말라는건 또 뭐고. "
머리가 혼란스럽다. 나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백설 공주에게 찬찬하게 현재 상황을 설명했다.
" 지금, 킬백 왕국에서 리츠웰 왕국을 노리고 있어. 여왕이 되고 자시고가 문제가 아니라, 나라가 망하게 생겼단 말이야. "
" 설마. "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백설 공주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강하게 잡았다.
" 당장, 여기서 떠나. 나는 지금 떠날 수 없으니까, 너라도 영지로 돌아가! 만약에 나한테서 편지가 오더라도 절대 믿지마. 누구도 믿으면 안돼! 그리고 기회를 봐서 날 구하러와. "
" 가..갈리브! "
" 지금은 수도를 치겠다는 생각은 버려. 잘못하다가 창칼이 모두 너에게 겨누어질 수도 있으니까. 알았지? 알겠으면 고개를 끄덕여! "
백설 공주가 불안한 눈으로 나를 보면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막무가내로 떼를 피우지는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잡고 입을 맞췄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그녀도 내 얼굴이 떨어질 때까지 아무런 반응도 못했다.
" 사랑해... 얼른 가! 빨리!! "
그녀는 황급히 짐을 싸면서 이리저리 몸을 움직였다. 나는 곧바로 그녀의 방에서 나와 다시 아르펜의 방으로 돌아갔다. 괜히 오래 시간을 끌다가 의심을 살 수도 있었으니까.
" 왔어요, 갈리브? "
아르펜이 여유만만한 미소를 짓는다. 어쨌거나 난 지금 그녀의 비위를 맞춰줘야하는 상황이었다.
곧 다시 방안은 열풍이 휘몰아친다.
백설 공주가 사라졌다는 소식은 얼마지나지 않아서 곧 내 귀에까지 들려왔다. 마르앙이 직접 도시를 샅샅히 뒤졌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아르펜은 알듯 모를듯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천천히 물었다.
" 어머, 백설 공주가 갑자기 왜 사라졌을까요? "
나는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아르펜은 그 이상 나에게 더 말을 걸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무언가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녀는 그 때부터 르세뜨도 만나지 못하도록 방안에 날 감금시켰다.
' 큰일났구나. '
여우를 쫓아내려고 호랑이를 불러온 셈이 되어버렸다. 차라리 이렇게 된거, 리츠웰 왕국과 킬백 왕국이 백중지세로 싸워 서로의 세력을 모두 손실시키는게 나을 것 같았다. 그래야 그나마 백설 공주에게 조그마한 가능성이라도 생길 수 있을테니까.
" 지겹더라도, 조금만 참아요. "
" 아르펜, 실망이야. "
" 호호호, 내 진심을 알아줘요, 갈리브. 저도 마음이 아파요. 하지만, 당신을 사랑하니까 이런 일을 하는거라구요. "
그녀는 진심으로 슬프다는 표정으로 내 몸을 꽉 안았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안지 않았다. 어차피 그녀를 제대로 써먹지도 못하고 내가 뒤통수를 맞은 격이 되었으니까.
" 내가 당신의 목적을 모를 줄 알았어요? 날 이용하겠다는거요. 하지만, 전 이제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어버렸다구요. "
" 그래? 알고 있었단 말이지. 내가 널 사랑하지 않는것도. "
아르펜의 얼굴이 살짝 굳었지만, 그녀는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그러나 미미하게 떨리는 손이 그녀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 네. 알..고 있었어요. 당신이, 백설 공주를 사랑하는 것도. 하지만, 아직 기회는 있어요, 갈리브. "
그녀는 나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 지금부터라도, 절 사랑하면 되요. 백설 공주를 잊어요. 절, 비겁한 여자로 만들지 마세요. "
직접적으로 말한건 아니지만, 그녀는 백설 공주를 들먹이면서 나를 협박했다. 그렇게까지 나의 사랑을 얻고 싶어하는 것이다.
" 미안하지만, 이제 너는 더이상 나에게 관심받을 수 없을거야. "
아르펜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진다. 나를 향해 벌렸던 두 팔이 서서히 내려왔다. 한참동안이나 나와 그녀는 두 눈을 바라보고 서있었다.
" 결국 날 이렇게 만드는군요. "
" 그건 미안하다고 생각해. 널 이용한거 말이야. 하지만, 상황이 어쩔 수가 없었거든. "
" 그만! 내일 다시 오겠어요. 다시 한번 더 기회를 줄테니까. "
그녀는 바로 뒤돌아서 방을 나갔다. 문은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굳게 닫혔다.
차라리 포기하고 그녀를 선택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거짓으로라도 그녀를 사랑하는 척하여 방심을 유도하는 것이 나을까? 하지만, 이미 그녀를 이용할 목적으로 접근했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에, 아마도 전쟁이 끝날 때까지 감금되어있을게 뻔했다. 그럴 바엔 차라리 그녀의 심신을 힘들게 만들어서 전쟁에서 최대한 손실을 입히도록 만드는 편이 나았다.
" 후, 어떻게 꼬여도 이렇게 꼬이냐. "
다음날, 아르펜은 아침 식사를 들고 내 방을 찾아왔다. 그녀는 기분 좋게 웃으면서 탁자 위에 식판을 올려놓았다.
- 와장창창!
나는 손으로 식판을 바닥에 던져버리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아르펜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미소가 사라진다.
" 이런 짓 해봐야 소용없어. 더 이상 날 구속하려 하지마. "
" 아, 음식이 엎어졌네요. 다시 가져다줄께요. "
" 그만! 난 더 이상 널 사랑하지 않아. 널 이용했을 뿐이야. 그리고 버릴 생각이었지. "
아르펜은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하지만, 이런 말도 그녀의 정신을 무너뜨릴 순 없었다. 곧바로 싱긋 미소를 지으며 방을 나갔는데, 얼마지나지 않아서 다시 식판을 들고 들어왔다.
" 자, 드세요. 밥은 먹어야하잖아요. "
- 와장창창창!
이번에도 나는 식판을 들어 바닥에 내팽겨쳤다. 아르펜은 바닥에 떨어진 음식을 보더니 천천히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음식을 집었다.
" 이거.. 제가 오늘 새벽부터 일어나서.. 갈리브를 위해 만든 음식이에요. 아깝네.. "
그녀는 음식을 손으로 집더니 입에 넣고 씹기 시작했다.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이런 여자를 내가 이용하려고 했다니.
" 간도 잘 맞고, 맛도 있어요. 다시 가져다줄테니까, 이번엔 맛있게 드세요. "
아르펜의 행동에 이제 치가 떨린다. 잠시 후에 그녀는 다시 식판을 가져와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 와장창!
나는 볼 것도 없이 다시 식판을 벽에 던졌다. 그제서야 그녀의 입에서 미소가 천천히 사라졌다. 턱이 덜덜 떨리면서 물기 어린 눈으로 날 노려본다.
" 얼마나.. 날 더 비참하게 만들 생각이야..? "
" 이제 너와 나는 더 이상 인연은 없어. 나는 너의 목적을 알았고, 너도 나의 목적을 알았으니까. "
" 목적? 하. 내 목적이 뭔데? 단지 널 사랑하는 것 뿐이고, 백설 그 년에게는 여왕의 자리를 주기 싫었을 뿐이야. "
" 그게 나에겐 큰 장애물이 된다는거지. 그렇기 때문에 널 사랑할 수 없어. "
아르펜이 이를 강하게 악물며, 주먹을 쥔 채로 부들부들 떨었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모양이다.
" 그래. 그러면, 딱 하나 남았네. 당신을 가질 수 있는 방법 말이야. "
" 이제 그런건 없어. "
" 아니, 딱 하나 있어. 당신도 들으면 놀랄껄? "
설마. 아르펜이 비릿하게 웃으며 팔짱을 낀다.
" 백설, 그 년을 죽여버리면 되잖아? "
생각하기 싫은 최악의 수가 나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