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화 (43/150)

44

" 아.. 버지? "

" 그래! 애비다, 아들아. 기억이 돌아왔느냐? "

" 모르겠어요. 아무 것도 기억이 나지 않아요. "

델프시 공작은 슬픈 표정을 지으며 나를 끌어안았다. 그래도 발더스라는 놈의 얼굴 가죽이 나에게 잘 맞는 모양이었다. 평생동안 아들을 옆에서 지켜본 부모도 이질감을 느끼지 못할 정도니, 입만 조심하면 평생 들킬 일은 없어보였다.

" 의원! 아들의 기억을 돌아오게 할 방법이 정녕 없단 말이야?! "

" 소.. 송구합니다, 공작 전하. "

" 이런!! 어쩔 수 없구나, 아들아. 그래도 몸이라도 멀쩡하니 다행이다.. 다행이야. "

" 전, 이 곳 공작가의 아들인가요? "

델프시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비통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그는 의원을 향해 아들을 잘 보살피라는 명령과 함께 나에게 인사를 하고 방을 나갔다. 이젠 내 몸이 멀쩡하다는 것을 알았으니, 그는 이제 공무를 수행해야했다. 좋아, 기억을 되찾는 척 하면서 천천히 의원에게 이놈의 신상에 대해서 알아봐야겠군.

" 저기, 저에 대해서 말씀해주실 수 있습니까? "

" 물론이지요. "

의원이 하나하나씩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름은 '발더스 그레이스'고, 그로시아 왕국의 유일한 공작의 외동아들이면서 올해로 21살이 되었다고 한다.

특기는 검을 좀 다룰 줄 알아서, 조만간에 3개의 왕국에서 공동으로 설립한 '대 왕국 학원'에 몇 개월간 가기로 되어있었다고 한다. 마침, 이 얼굴의 주인이 그 학원으로 가는 도중에 괴한들의 습격을 받아서 지금 이렇게 온거고.

나는 '대 왕국 학원'이라는 소리에 눈이 번쩍였다. 3개의 왕국이 공동으로 설립했다는 것은, 아마도 그 학원에 모든 나라의 귀족들의 자제가 모인다는 말이었다.

아마도 그들과의 친분을 쌓기 위해서 잠시 몸을 의탁하는 모양인 것 같은데, 사이가 좋지 못한 왕국들 치고는 '대 왕국 학원'에서 만큼은 친분을 쌓기 위해서 노력한다는 말이 있었다.

" 내가 거기로 갈 예정이었다는 말이죠? "

" 그렇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습격을 받으셔서 기억을 잃어버리시는 바람에.. "

" 흠. 다른 얘기도 해주시죠. "

그 외에는 별다른 것은 없었다. 어머니는 어릴 적 여의고, 홀아버지 밑에서 살았다는 것. 그런데 말을 하는 도중에, 의원이 계속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멈추기를 반복했다.

" 그냥 마음 편하게 얘기하세요. 절대 화를 내거나, 당신에게 보복을 할 생각은 없어요. "

" 그러면.. 제가 불충을 감수하고 얘기드리겠습니다. "

역시 얼굴값은 했던 모양인지, 발더스라는 이 놈은 상당한 호색이였던 모양이다. 이 저택의 시녀란 시녀는 모두 건들였고, 심지어 귀족 자제들에게까지 손을 뻗칠려고 하다가 된통 당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 왠지.. 여자를 보면 마음이 편안했던 이유가 있었구나. "

" 그..렇습니까? "

의원이 조금은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즐기기 위해서 게임을 하는 거니, 굳이 여자들을 거절하고픈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계획에 무리가 갈 정도로 호색질은 자제해야했다.

" 내가 따로 해야할 일은 없어요? "

" 네. 특별히 별다른 것은.. "

나는 조금 고민하는 척 하다가 의원을 향해 무언가를 결심한 척 하면서 눈을 빛냈다. 의원은 이런 내 모습은 생전 처음본다는 표정이었다.

" 아버지의 뒤를 물려받기 위해서, 익혀야할 것이 많겠죠? "

" 그.. 렇습니다만. 공자님께서 한사코 하기 싫다고 다 미루시는 바람에.. "

" 내일 부터 당장, 그것들을 시작하겠습니다. 아버지께 그 말을 전달해주세요. "

" 네?! "

의원은 마치 내가 새로운 사람이 된 것처럼 놀라더니, 환한 미소를 지으며 꾸벅 인사를 하고 방을 나갔다. 나의 발달된 귀에 그가 '사람이 되셨군. 차라리 이게 나으려나.'하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차피 물려 받을 거면 확실히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아야하니까, 눈으로 직접 실적을 보여줘야한다.

" 내일이 기대되는군. "

" 공자님은 정말 영리하신 분입니다! "

세계 역사학을 가르치는 저명한 학자가 감탄을 하면서 내일이 기대가 된다고 공작에게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며 돌아갔다.

" 공자님과 같으신 분은 처음 만났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졌다고 생각할 정도니까요. "

경제학을 가르치는 유명한 학자도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나와 같은 인재가 또 있을지 궁금하다고 설토했다.

" 공작님이 너무 부럽습니다. 저도 공자님과 같은 아들이 한 명만 있었으면, 거지가 되어도 상관없을 것 같습니다. "

정치학을 가르치는, 예전에 왕궁에서 일을 했던 노인도 공작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 도대체, 어찌된 일이냐. 정말 너는 내 아들이 맞느냐? "

" 그냥, 저의 머릿 속에 있던 생각을 말했을 뿐입니다. 제가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면, 누구의 아들이겠습니까? "

그 날 이후로 공작의 행동은 완전히 바뀌었다. 항상 모든 일에 나를 데리고 다니면서 하나하나 일일이 알려주었고, 나는 그에 대한 보답으로 그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었다. 공작의 얼굴에는 이제 미소가 사라지는 날이 없었다.

" 아들아, 백성들에게서 소문이 자자하더구나. "

" 무슨 일 말씀이십니까. "

델프시는 다 안다는 표정으로 흐뭇하게 웃으며 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너의 돈을 풀어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했다는 소문 말이다. "

" 아, 그건 칭찬 받을 일이 못 됩니다. "

" 그게 무슨 소리냐? "

공작이 궁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돈을 풀어서 백성들을 구제한다는 귀족은 그 역시도 듣도보도 못한 일인데, 자신의 아들은 그것이 칭찬받을 일이 못된다고 말하다니.

" 백성들이 있어야 우리 귀족들도 그 위에 있는 법. 집을 지을 때도, 초석(주춧돌)이 아주 중요한 것은 아버지도 아시는 사실일 겁니다. "

" 그렇지. "

" 초석이 흔들린다면, 그 위의 집도 무너지게 됩니다. 우리들도 똑같습니다. 백성들은 초석과 같은 존재입니다. 아무리 집이 화려하고 멋있다고 해도, 초석이 흔들리면 집은 무너집니다. "

공작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랑스럽게 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 이제 내가 지금 당장 죽는다고 해도, 여한이 없구나. "

" 그런 소리 마십시오, 아버지! "

" 그냥 그렇다는 소리야. 하하하하, 이렇게 자랑스러운 아들을 놔두고 내가 빨리 죽으면 억울하지 않겠어? 하하하핫. "

이제 뜸이 다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공작에게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저기, 아버지. 저도 이제 '대 왕국 학원'에 갈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

" 흠. 혹시 또 괴한의 습격을 받을까봐 걱정되는 구나. "

" 방비를 철저하게 해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

공작은 한손으로 턱을 쓰다듬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구더기가 무섭다고 장을 담그지 못하면 아니될 일이다. 어차피 한 번은 갔다와야할 예정이었으니, 내가 원할때 보내면 좋겠다고 공작이 생각한 것 같다.

" 좋다. 단, 너 스스로도 몸을 단련시켜야 한다. 나도 공무 중에도 항상 틈틈히 몸을 단련하니까 말이다. "

그레이스 공작도 소드 마스터에 해당하는 실력자였다. 그런 자의 자식이라서 그런지, 이 얼굴의 원래 주인도 소드 익스퍼트 하급에 해당하는 인재였다고 한다. 20살의 나이에 익스퍼트 하급이면 결코 낮은 성취가 아니었다.

" 알겠습니다, 아버지. 출발은 되도록이면 빨리 하고 싶습니다. "

" 좋다. 가능하다면 내일이라도 당장 보내주마. "

" 감사합니다, 아버지. "

겉으로는 아주 선량한 미소를 지었지만, 내 속은 비릿한 웃음으로 가득차 있었다. 아주, 계획대로 척척 잘 진행되어 나가고 있군. 이제 '대 왕국 학원'에 갔다오면, 본격적으로 왕궁을 출입할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조금씩 손을 보다가 한번에 왕국을 집어삼키면 된다. 그럴려면 최대한 명성을 쌓는 것이 좋다.

' 얘네들은 잘하고 있을지 모르겠네. '

에덴과 보리를 비롯해서 내 부하들에게도 중요한 일을 맡겨두었는데, 일의 중간 단계를 알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잘 하고 있을 것이라 믿는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일단 보리는 소드 마스터니까, 무력이 부족해서 일이 틀어지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 다그닥 다그닥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나는 턱을 괴고 하품을 쩍- 했다. 어제 공작 저택에서 출발했는데, 하루 종일 보이는 거라고는 울창한 나무숲 뿐이었다. 이대로 약 일주일을 달려가야한다는데, 그전에 내가 좀이 쑤셔서 죽을 것 같다.

" 이봐, 레이경. 재밌는 얘기같은거 없어? "

" 알고 있는 얘기가 없습니다만. "

그나마 말동무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내 호위기사가 된 무뚝뚝한 레이라는 청년이었는데, 역시 기사답게 정의로운 것 밖에 모른다. 생긴거는 더럽게 잘 생겨서 여자들을 향해 활짝 웃기만 해도 넘어가버릴만한 미청년이었는데, 그는 좀처럼 굳은 얼굴을 펼 줄을 몰랐다.

" 정말 없어? "

" 없습니다, 공자님. "

왠지 그를 골탕먹이고 싶었다. 그래, 재밌는 생각이 떠올랐어! 어차피 이대로 한참이나 가야하는데, 재밌는 장난감이라도 생겼으면 했다. 안타깝게도 그 타겟은 '레이'가 되어버렸다.

' 저 잘생긴 얼굴도 왠지 샘이 나고 말이야. '

나는 밤이 얼른 오기를 빌었다.

숲의 밤은 평소보다 빨리 다가왔다. 마차를 모는 하인은 말과 함께 지내기 위해서 그 주변에 자리잡고 휴식을 취할 것이라서, 숲 안쪽으로 조금 들어간 우리는 단 둘만 있었다.

레이도 어제부터 오늘까지 말을 타고 오느라 지쳤는지, 눈꺼풀이 가물가물해졌지만 한사코 자지 않겠다며 버텼다. 그래봤자 결국엔 지쳐서 옆으로 쓰러져 잠에 빠졌다.

나야 물론 이런 정도의 피로함은 아무 것도 아니었으니, 정신이 말똥말똥했다.

' 엘류나크! '

쉬이이- 하는 소리와 함께 엘류나크가 모습을 드러냈다. 언제 봐도 그녀는 아름다웠다. 무표정한 얼굴이 오히려 내 가슴을 더욱 진탕시킨다는 것을, 그녀는 모를 것이다.

레이는 얼마나 깊이 잠들었는지, 엘류나크가 등장한 것도 모르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손짓한 뒤에 레이를 가리키며 조용히 말했다.

" 그에게, 마법을 걸어. "

" ... 마법을.. 말입니까? "

" 그래. 요정들이 쓰는 마법 있잖아. 저주 비슷한거 말이야. "

물론 저주는 아니었지만, 요정 마법이라는 저주비스무리한 무언가가 있었다. 엘류나크는 상관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고 어떤 마법을 걸 것인지 나에게 물었다.

" 여자가 되는 마법. "

" ... "

엘류나크가 약간 어이없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바라보든 말든, 나는 레이의 당황한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의 잘생긴 얼굴이, 여자가 되면 어떻게 변할지도 궁금했고.

" 빨리 걸어. 뭐하고 있어? "

" ... 용사가 맞긴 한건지.. "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투덜거렸다. 그래도 내 명령을 이행할 생각인지 레이를 향해 손을 뻗고 천천히 마법을 중얼거린다. 이것은 마나를 이용하는 마법과는 틀린 것이라, 주문이 길었다.

엘류나크가 요상한 요정 언어로 뭐라뭐라 중얼거렸다. 그 순간, 그녀의 손에서 빛이 뿜어져나오더니 레이의 몸으로 흡수되었다. 마법이 끝나자 엘류나크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 나를 바라본다.

" 수고했어. 흐흐흐, 이왕 온김에 사랑이라도 나누고 싶지만, 보는 눈이 있어서 말이야. "

그녀는 내 명령도 없이 흥- 하고 모습을 감췄다. 젠장, 끝까지 말을 안 듣는군. 내 말이라면 불이라도 뛰어들 정도로 충성하는 아리엘과는 확실히 달랐다.

' 어쨌든, 완전히 변했네. 요정만큼이나 예쁘다니. 그 정도로 잘 생긴것은 여자로 치면, 이정도인건가. '

레이는 너무 예뻤다. 거의 인간들에게서 적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 그래도 가는 동안에 심심하지는 않겠군, 으흐흐흐. '

내일 아침이 기다려진다.

============================ 작품 후기 ============================

아직 루즈하다고 느끼실지도 모르겠지만, 조금 있으면.. 폭발하게 될 겁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