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화 (44/150)

45

" 꺄아아앗! "

음, 좋은 아침. 나는 눈을 비비고 일어나 자신의 몸을 더듬거리면서 사색이 되어있는 레이를 바라보았다. 그, 아니 그녀는 자신의 튀어나온 가슴을 만지면서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건지 영문을 모르는 얼굴이었다.

그녀의 흘러내린 금발이 입에 살짝 닿아있는 모습이 그렇게 예뻐보일 수가 없었다. 처음으로 무뚝뚝하던 얼굴이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바뀐 것이 꽤 볼만하다.

" 이.. 이게 도대체 무슨.. 고.. 공자님.. "

" 아, 설마.. "

레이가 울 것 같은 눈으로 나에게 천천히 시선을 돌리면서 털썩 주저앉는다. 깔끔하게 빗겨있던 그녀의 금발은 어느새 풍성한 머리숱을 자랑하면서 허리까지 길어져있었고, 일자로 굳게 다물어져있던 입술은 키스를 하고 싶은 도톰한 붉은 입술로 변해있었다.

" 무.. 무슨..? "

" 요정의 저주로군. "

" 저..주요?! "

나는 안됐다는 표정을 짓고 그녀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말이 없자 그녀는 나에게 달려와 황급히 내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기사가 감히 공자에게 손을 대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지만, 레이는 지금 이것저것 따질 여유가 없어보였다.

" 마.. 말해주세요! 도대체 무슨 저주요! "

" 너.. 기사의 본분을 잊었나? "

" 본..분이라뇨? "

나는 내 어깨에 올려져있는 그녀의 손을 치우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뒷짐을 졌다. 그녀는 슬픈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면서 내 말을 경청한다.

" 너는 분명히 기사의 본분을 잊었지? 어제 보초도 서지 않고 그대로 잠을 자버렸잖아. "

" 그.. 그럴 수가. 고작 그것 때문에 요정의 저주를 받다뇨! "

" 고작 그거라고? "

레이가 아차- 하면서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절대 해서는 안될 말을 꺼내버린 그녀는 사색이 된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정자세를 취하고 소리쳤다.

" 죄.. 죄송합니다, 공자님. 제가 잠시 정신을.. "

" 흠! 이번은 넘어가지만, 다음은 아니야! 고작 저주 하나로 기사도 정신을 잊어?! 자네가 그러고도 기사라고 할 수 있나! "

" 시정하겠습니다. 다시 마음의 안정을 찾겠습니다. 심려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

그제서야 그녀도 약간 마음을 다잡고 심호흡을 한다. 저주라고 하면, 분명히 그 저주를 풀 방법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방법을 알 도리가 없었다.

" 흠, 책에서 읽었던 내용이 있는데. "

" 어떤 내용 말씀이십니까? "

그녀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간절히 나에게 물어왔다. 남자일 때와는 몸의 크기가 달라져서, 그녀의 기사복이 약간 헐렁거린다.

" 저주를 풀 방법 말이야. "

" 어.. 어떤 겁니까? "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눈을 마주보면서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입으로 웃음이 터져나올 것 같아서 억지로 더 목소리를 낮췄다.

" 바로, 진실한 사랑을 하는 것이지. "

" 진..실한 사랑?! "

기사에게는 로맨틱한 말이면서도, 가슴에 새기기 힘든 말이 바로 사랑이었다. 기사의 사랑이라하면, 보통은 공주와의 로맨틱한 상상을 떠올리기 쉽지만, 아쉽게도 레이는 이제 여자가 되었다. 아직 남성의 사상이 뚜렷한 그녀가 진실한 사랑을 생각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 그러면.. 저주가 풀리는 겁니까? "

" 나도 잘 모르지. 그 방법이 저주를 푸는 방법이 맞는지도 모르는거고. 그 이상 자세한 건 나도 몰라. 저주가 걸린 사람을 보는건 나도 처음이거든. "

레이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절망한다. 마침 마부가 다가와 아침이 밝았다고 우리들에게 알렸다. 그리고, 여자가 된 레이를 보면서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것이 부끄러운지 레이는 살짝 몸을 틀고 마부의 시선을 피했다.

" 물러가 있거라. 조금 있다가 갈테니까. "

마부는 '예.'하고 대답한 뒤에 계속 레이를 훔쳐보면서 우리들에게 멀어졌다. 상황이 절망적이었지만, 레이는 그래도 할 일은 해야한다고 생각했는지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나는 그녀가 준비한 아침을 간단히 먹고 마차로 향했다. 마부는 그 때도 레이를 계속 흘깃흘깃 훔쳐보면서 마차를 몰았다.

사실 그녀에게 걸린 것은 저주가 아니었다. 저주와 비슷한 요정 마법이라서, 그 마법을 건 요정이 다시 마법을 해제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하지만, 사람의 성별을 바꿀 정도의 마법을 걸 수 있는 요정은 매우 드물었기 때문에 아마도 대부분 사람들은 그것이 저주라고 여길 것이다.

저주를 푸는 방법은 여러 가지였다. 키스를 하는 것이 가장 대표적이었고, 특별한 방법이 될 때도 있었다.

성별이 바뀐 저주를 푸는 방법은 거의 대부분 '진실한 사랑'이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진실한 사랑을 느끼면 다시 남자로 되돌아가버리기 때문에 사랑은 거기서 끝나버린다. 진실한 사랑을 느낌과 동시에 사랑이 깨지는 것이 바로 저주였다.

레이도 사람들이 저주에 걸린 경우를 본 적이 있었지만, 이렇게 성별이 뒤바뀌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고작해봐야 하루종일 코가 빨갛게 변해있거나, 머리 카락의 색이 계속 뒤바뀌는 경우같은 사소한 것들 뿐이었다.

나는 마차의 창을 통해서 멍-하게 정신이 빠져있는 레이를 보면서 키득키득 거렸다.

' 크크크, 고민좀 해보라지. '

그 날도, 그 다음 날도, 그 다음다음 날도, 그녀는 계속 멍- 하게 지냈다. 볼 일을 보는 것도 굉장히 어색했는지, 참다참다가 도저히 못참겠다 싶으면 조용히 자리를 피해서 일을 끝내고 왔다.

" 레이, 오늘 중으로 학원에 도착하겠지? "

" ...네? 죄.. 죄송합니다만, 뭐라고 하셨습니까? "

" 오늘 중으로 학원에 도착할 수 있냐고 물었어. "

레이는 아-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 네. 오늘로 정확히 7일째 되는 날이군요. 아마도 오늘 정오쯤에 도착할 듯 싶습니다. "

수많은 귀족 자제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기대되었다. 백설 공주와 같은 머리 싸움이 분명히 있겠지? 예전엔 어쩔 수 없이 뒤통수를 맞는 일이 허다했지만, 지금은 다를 것이다. 아주 차근차근히 '대 왕국 학원'을 흡수해나갈 생각이었다.

레이의 예상대로 정오가 되자 아주 큰 건물이 나타났다. 숲속에 지어놓은, 화려하디 화려한 흰색 건물은 아름다운 숲속과 어울려서 마치 요정의 왕국을 보는 듯 했다.

넓은 인공 호수도 보였고, 스포츠를 즐길 수 있도록 잔디가 깔린 공터도 보였다. 크기도 상상 이상으로 거대해서 자칫 잘못하다간 길을 잃기 쉽상일 것 같았다.

" 도착했습니다, 발더스 공자님. "

가장 먼저 우리들을 반긴건 거대한 철창이었다. 레이는 그레이스 가문을 증명하는 징표를 보여주고 철창문을 열게 했다. 마차는 천천히 학원 안으로 들어가 한쪽에 마련된 마차 정거장에 멈추었다. 레이도 말에서 내려 시종으로 보이는 남자에게 맡겼다.

" 가시지요, 공자님. "

그녀도 이런 곳에 와서 어설프게 행동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는지, 옛날처럼 절도있는 행동과 말투로 변해있었다. 우리는 시종의 안내를 받아 학원장실로 들어갔다.

학원장실은 건물과 다르게 생각보다 검소했다. 학원장의 모습은 마치 인자한 이웃집 할아버지같은 노인이었는데, 웃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다. 그는 차를 마시고 있었는지, 한손에 찻잔을 들고 우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 아, 왔군요. 어디 보자, '그로시아 왕국'의 그레이스 공작님의 아드님이시군요. 저희 '대 왕국 학원'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하오. "

" 고맙습니다. "

그는 학원의 유례깊은 역사부터 시작해서 세 왕국의 설립 의도와 현재 학원의 상황까지 아주 세세하게 설명했다. 보통 귀족 자제들이라면 귀찮아서 대충 듣고 넘겼겠지만, 나는 아니었다. 여기서도 다른 이들과는 달리 두각을 나타내야하므로, 학원장에게 눈도장을 찍어놓으면 더할 나위없이 좋을 것이다.

다행히 내 의도대로 흘러갔는지, 그의 말을 진정으로 깊이 새겨듣는 내 모습을 보고, 학원장은 만족하는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연다.

" 다른 분들과는 틀리신 분이군요. "

" 모든 내용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는 법입니다. 어떤 것도 허투루 듣고 넘겨서는 안된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죠.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

" 허허허허, 오랜 만에 제 마음에 쏙 드는 분이 오셨군요. 진심으로 학원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발더스 공자. "

그도 기분이 좋은지 껄껄 웃으면서 시종을 불러서 우리들을 안내하게 했다. 나와 레이는 시종의 안내를 받아서 수 개월동안 지낼 방에 도착했다. 원래 내가 살고 있던 방보다는 작아도, 지내기에는 무리가 없었다. 내 방에는 또 다른 작은 방이 하나 더 연결되어있었는데, 그곳은 레이가 머무를 방이었다.

시종은 오늘은 푹 쉬고, 내일부터 수업을 듣게 될 것이라며 '좋은 하루 되십시오.' 하고 방을 나갔다. 레이는 들고온 짐을 풀어서 이곳저곳에 착착 옮겨놓고, 식사 준비를 하겠다며 방을 나갔다. 나는 방을 나가는 레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침대에 몸을 던졌다.

" 음. 평화롭군. "

학원은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하지만, 이 평화로운 분위기도 내 손에 의해서 바뀔 것이다.

완전히.

다음 날,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겨있는데, 누군가가 내 방문을 두드렸다. 시종인가- 하면서 문을 열었는데, 왠 청년이 활짝 미소를 지으며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만큼 그는 키가 작았다.

" 반가워요. 발더스 공자님이시죠? 전, 그로시아 왕국의 필립 백작의 아들인 아돌프라고 합니다. "

그가 손을 내밀어 내 손을 잡고 흔들었다. 나도 싱긋 웃고 반갑다고 인사했다. 그는 나보고 들어가도 괜찮냐고 물어왔다.

" 들어와요. 빨리 준비하면 되니까. "

때마침 레이가 단장을 끝내고 방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아돌프에게 인사를 건네고 내 시중을 들었는데, 아돌프가 약간 얼굴이 붉은 채로 탁자에 앉아 손을 꼼지락대고 있었다.

아마 내 호위 기사가 여자라서 그런 모양이었다. 대충 들은 정보에 의하면, 보통 귀족 자제들은 자신과 성별이 같은 기사를 데리고 오는게 정석이라고 한다.

물론 성별이 다른 경우도 있었지만, 대게 그런 귀족 자제들은 기사와 성관계를 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아마 아돌프라는 녀석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 확실히, 레이는 굉장한 미녀니까. '

하지만, 그녀는 그런 자세한 정보는 알지 못하고 있는지 무표정한 얼굴로 내 시중을 들고 있었다. 준비를 끝마치자 레이도 허리춤에 칼을 차고 내 뒤를 따라왔다.

" 어디로 가는거죠? "

" 아, 일단 시간표부터 짜야하잖아요. 그리고 말놔도 되요. 같은 학생인데. "

" 뭐.. 좋아. "

나도 괜히 이런 아이한테 말을 올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여긴 학년이라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모든 학생은 동등한 위치를 가지고 있었다. 원래 규칙대로라면, 신분도 여기선 효력이 발생할 수 없었지만, 당연히 그런 규칙은 적용되지 않을 것이 뻔했다. 길어봤자 1년인데, 평생을 악연으로 살 수는 없지 않는가.

나와 아돌프가 도착한 곳은 '수업 준비실'이라는 곳이었는데, 몇몇 일하는 사람들이 우리를 보더니 다시 고개를 책상으로 처박았다. 아돌프의 말을 들어보니, 그들은 학원에서 일하는 평민들이라고 했다.

아돌프가 그들 중 한 사람에게 뭐라뭐라 얘기하더니 종이 한 장을 얻어왔다. 내 신상정보를 적는 칸과 수업명을 적는 칸이 보인다. 최대로 들을 수 있는 수업은 총 4개. 하나만 들어도 상관없고, 네 개 다 들어도 상관없다고 한다. 수업에 대한 정보는 다른 건물로 가야한단다.

" 저기, 저 건물이야. "

아직 이른 아침이라서 건물과 건물을 잇는 도보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우리는 천천히 도보를 따라서 반대편 건물에 도착했다. 건물의 현관 입구 옆에 큰 게시판 하나가 붙어있었는데, 거기에는 3개월동안 이루어지는 수업의 자세한 정보가 적혀있었다.

아돌프는 손가락으로 게시판을 가리키면서 나에게 말한다.

" 저기서 듣고 싶은 수업을 적고, 나중에 종이를 나한테 주면 돼. 내가 대신에 내줄테니까. "

" 그러면 고맙고. "

수업의 종류는 꽤 다양했다. 네 가지만 선택해라고 되어있어서 고작해봤자 열 개 남짓이라고 생각했는데, 스무 개가 훌쩍 넘었다. 그 중에서는 '교양으로 배우는 간단한 과자만들기' 같은 것도 있었고, '지식인으로 발돋움 할 수 있는 바이올린 배우기' 같은 것도 있었다.

나는 목록을 쓱 훑어보다가 나에게 필요한 두 가지를 찾아냈다. 하나는 물론 검술 수업이었고, 다른 하나는 정치 수업이었다. 이왕하는거 네 개 모두 채우고 싶었는데, 꼭 하고 싶다고 느낄만한 것이 없었다.

" 아돌프. 넌 어떤 걸 하는데? "

" 나? 어.. 저기.. "

아돌프가 손가락을 꼼지락 대면서 얼굴을 붉힌다. 이렇게 보니, 남자자식이 꽤나 귀엽다. 키도 작고 몸도 아담해서, 머리만 길면 여자아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 세계 역사 토론이랑, 바이올린이랑, 또... 검술.. "

마지막 검술이라고 할 때, 그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지면서 굳어졌다. 검술에 대해 안 좋은 기억이 있는 모양이다. 어차피 이렇게 인연이 된 거, 그와 수업을 같이 듣고 싶었는데, 세계 역사 토론이라는 말에 흥미가 생겨서 그걸 하기로 마음 먹었다.

" 취소는 가능한거야? "

" 응? 물론. 듣다가, 나랑 맞지 않다고 싶으면 취소해도 문제없어. "

그렇다면, 지금 한 선택들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나는 얻어온 펜으로 수업칸에 하나하나 적었다.

' '고급 검술', '왕국 정치', 그리고 '세계 역사 토론'.. 좋아! '

종이는 수업이 모두 끝나고 아돌프에게 건네주면 되겠지. 일단 첫 번째 수업은, '세계 역사 토론'이었다. 선생은 '그로시아 왕국'에서 초빙되어 온 '루크람' 이라는 사람이었다.

' 좋아. 시작해볼까나. '

대륙을 뒤흔들 돌풍은 '대 왕국 학원'에서부터 아주 천천히 휘몰아칠 준비를 한다.

============================ 작품 후기 ============================

혹시 싶어서 적는건데, 아돌프는 남자 맞습니다. 기대하지 마세요.. (환상을 깨버린 점... 미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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