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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우스 왕자는 그 날로 곧바로 왕국으로 돌아가버렸다. 나탈리아 왕녀는 학원에 남은채 제대로 변명도 못하고 '걸레'라는 누명만 써버렸다.
내가 완벽히 바라던 시나리오다. 이 사건때문인지 그녀에게 붙었던 몇몇 학생들도 떨어져나간 듯 했다.
말 그대로 하룻밤 사이에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고 해야할까. 그것도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채.
이런저런 일이 일어난 사이에, 그로시아 왕국의 제 2 왕녀가 학원에 도착했다. 그녀의 얼굴은 정말 얼음장처럼 차가워보였는데, 그녀는 학원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일리아나 왕녀의 방을 방문했다.
사실 나도 그것때문에 그녀가 이 학원에 도착했다는 것을 안 것이다. 나와 일리아나 왕녀가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고 있을때, 갑자기 방문이 벌컥 열렸다.
" 필리아 왕녀님, 노.. 노크는 하셔야. "
그녀의 호위기사로 보이는 여기사가 더듬거리면서 말을 했지만, 필리아 왕녀라 불린 여인은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나와 일리아나를 바라보았다. 시릴 듯한 흰 피부에, 칠흙같은 검은 눈동자를 가진 이 여인이 바로 그로시아 왕국의 제 2 왕녀, '필리아 그로시아'였다.
" ... 언니? "
" 오랜만이구나, 일리아나. 손님이 있었는지 미처 몰랐다. 미안하다. "
필리아는 전-혀 미안하지 않은 표정으로 두리번거리더니 인상을 바짝 쓰면서 호위기사를 향해 자신이 들고 있는 가방을 건네주었다. 이곳저곳을 바라보다가 필리아가 입을 여는데, 완전히 막장 중의 막장이었다.
" 이런 후진 곳에서 지내고 있었다니, 정말 우리 왕국의 권위가 떨어질 데로 떨어졌네. 하긴, 일리아나 너니까 가능하겠지만. "
일리아나의 얼굴이 팍 찌그러졌지만, 필리아는 그녀의 표정을 모른채 빈 의자로 다가가 앉는다. 일리아나와 닮았지만, 그녀가 불이라고 한다면, 필리아는 얼음이라고 해야 맞는 표현이 될 것이다.
" 갑자기 여긴 왜.. 설마. "
필리아의 무표정한 얼굴이 처음으로 깨졌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면서 고개를 휙 돌렸는데, 일리아나는 건수를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비릿하게 웃으면서 필리아를 비꼬았다.
" 어머, 오빠에게 결국 꼬리를 내렸나봐요? 오빠가 여려서 언니한테 양보할 줄 알았는데 말이죠. "
" 그 입 닫지 못하겠니?! 그년들만 아니었어도 여기 있는 건 내가 아니라 그 놈이라고! "
" 흥. 가정이 뭐가 중요해요? 결과가 중요하지. "
필리아는 화가 난 표정으로 일리아나를 노려보다가 화를 가라앉혔다. 그녀가 여기 온 것도 아마 일리아나의 힘을 빌리기 위함일텐데, 처음부터 삐걱거리는 것은 그녀도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 어쨌든 너랑 다툴려고 온건 아니니까. 나랑 손잡자. "
" 하, 손잡자구요? 절 여기로 쫓겨나게 만든 사람이 누군지 알죠? "
하지만, 필리아 왕녀는 아무런 느낌도 없다는 듯이 빙긋 웃고 입을 연다. 이 정도로 제 2 왕녀가 무감각하고 독선적일거라곤 나도 몰랐다.
" 그건 미안해. 하지만, 너도 이제 물러설 곳이 없잖아? 나랑 손을 잡으면, 적어도 너에게 기회는 돌아갈 수 있어. "
기회는 돌아간다는 달콤한 말에 일리아나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확실히 지금이 기회였다. 필리아와 손을 잡아야했지만, 그것은 언제든지 뿌리칠 수 있다. 하지만, 필리아가 이런 식으로 허술하게 자신에게 손을 내밀리는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지, 그녀는 조금 곰곰히 생각했다.
" 아, 제 소개가 늦었네요. 전 그로시아 왕국의 제 2 왕녀인 '필리아 그로시아' 입니다. "
" 반갑군요. 전 그로시아 왕국 공작가의 후계자, '발더스 그레이스' 입니다. "
내 말에 그녀의 눈에 기이한 빛이 감돈다. 마치 먹잇감을 찾았다는 눈빛이 그러할까.
" 어머, 공작가라구요? 아, 그 소문이 자자하던 발더스 공자란 말이죠? "
" 그렇습니다, 왕녀님. "
썩어도 준치란 말이 있듯이 그녀도 왕을 노렸던 사람인지라 사람보는 눈이 보통 수준은 훨씬 넘었던 모양이다. 날 찬찬히 훑어보더니 입꼬리를 살짝 올리는데, 왠지 그 모습이 일리아나 공주보다 더 마음에 들었다.
마치 나탈리아 왕녀를 보는 느낌이랄까. 그래도 나탈리아 왕녀는 겉으로 보기엔 따뜻하지만, 필리아 왕녀는 겉부터 찬바람이 쌩쌩 불어온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 소문은.. 역시 믿을 게 못되나보네요. "
" 하하, 죄송하지만 이미 전 일리아나 왕녀님과 약혼을 하기로 한 사이라서 말이죠. "
그 말은 그녀도 처음 듣는 말인지, 밀어올렸던 입꼬리가 축 쳐지면서 대신에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 그게 무슨 소리죠? 처음 듣는 말인데. 일리아나와 약혼을 하겠다고요? 하, 저런 애랑? "
" 언니. 그 이상 말은 용납 못해요. 그와 저는.. 사.. 사랑하는 사이니까. "
사랑이라는 말에 그녀가 얼굴이 살큼 붉힌다. 그녀가 나에게 사랑이라는 말을 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에게 틈틈히 자신의 마음을 보여주긴 했어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 말에 필리아 왕녀의 얼굴에 아깝다는 표정이 새겨졌다.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내가 흔히 볼 수 없는 귀한 기회였기 때문이었다.
" 흠. 그래? "
" 그래. 오늘 확답은 주기 힘들 것 같아. 다음에 내가 언니를 한번 찾아갈께. 오늘은 이만 나가줘. "
" ... 꽤 컸다, 일리아나? 나한테 축객령도 내리고. "
필리아의 얼굴이 굳는다. 일리아나도 그녀의 무시무시한 표정에 약간 흠칫했는지 시선을 피한다.
" 왕녀님. 이만 나가주시죠. 일리아나 왕녀님과 할 얘기도 있고 말이죠. "
" ... 좋아요. 다음에 한 번 만날 날이 있으면 좋겠네요. "
" 공자와 언니가 만날 날은 없을거야. "
필리아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방문을 잡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린 상태에서 싱긋 웃는다.
" ... 그럴까? "
역시나 밤이 되자마자, 필리아는 내 방으로 찾아왔다. 그녀는 살짝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내 방을 이곳저곳 훑어보는데, 허영심이 굉장한 모양이다. 만약에 내가 일리아나였다면 '역시 네 수준과 맞는 방이구나.'하고 한번 톡 쏘았을텐데, 그나마 나였기에 아무 소리도 않고 자리에 앉는 것 같다.
" 뭐 긴 말 하지 않겠어요. 일리아나랑 그만 만나세요. "
" 단도직입적이시군요. "
나는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쳤다. 그녀는 이렇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먼저 던지는 화법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 당신. 소문이 굉장히 안 좋았던 것은 알고 있죠? "
" 물론입니다. 하지만, 다 예전 일이죠. "
" 지금 생각하면, 당신이 일부러 그런 소문이 퍼지게끔 행동했다고 생각이 드네요. 물론 그렇다고 해도, 일리아나와 만나는 것은 제가 허락할 수 없어요. "
나는 몇번 낄낄 웃은 뒤에, 입에서 미소를 지우지 않고 두 손을 맞잡은 상태에서 팔꿈치를 탁자에 올렸다. 그래도 이런 욕심이 과한 여자들은 이용해먹기가 너무 쉬웠다.
" 그녀와 헤어진다면, 절 어쩌실려구요? "
" 호호호, 그야.. 내 사람으로 만들어야죠. "
그녀는 곧바로 자신의 속마음을 내비친다. 물론 필리아도 당장 내가 일리아나를 버리고 당신에게 가겠다-라는 말을 듣기를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도 일단 그녀가 나를 원한다는 정도만 내 머릿속에 박아넣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녀가 보기엔 내가 놓치기 싫은 대어일테니까. 마치 일리아나가 잡아서 끌어올리기 직전의 고기를 뺏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 화끈하시네요. 생긴 거와는 다르게. "
" 물론이죠. 겉은 이래도, 속은 화끈한 여자랍니다. "
필리아가 혀로 윗입술을 핥는다.
" 뭐, 찬찬히 생각해보겠습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죠. "
" 알겠어요. 좋은 대답 기대해볼께요. "
그녀는 찰랑이는 생머리를 한번 손으로 싹 쓸어 올리고 도발적인 표정을 짓고는 방을 나간다. 확실히 재밌는 여자다. 왕위 쟁탈전에서 꽤 잘 써먹을 수도 있을 것 같고.
' 이제 슬슬 시작해야하는건가. '
" 어떻게 하죠, 공자? "
" 흠. "
고민하는 척했지만, 당연히 필리아 왕녀와 손을 잡아야 했다. 물론 나는 잡는 '척'이겠지만, 일리아나 왕녀에겐 이런 사실을 말해줄 필요는 없다.
" 손을 잡아야겠죠. 왕궁으로 돌아가기 위해선, 그녀가 필요하니까요. "
" 그렇..겠지? "
하지만, 그녀는 왠지 뭔가 불안한 표정이다. 당연히 자신의 언니인 필리아 왕녀의 성향을 잘 아니까 쉽사리 손을 잡기가 거북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아니면 돌아갈 기회가 다시 오기가 쉽지 않았다.
" 좋아. 그럼 언니에게 말할께요. 손을 잡겠다고. 하지만, 끝까지 갈 생각은 없어요. 결국 그녀도 우리의 적이니까요. "
" 물론이죠. "
" 약속.. 하나 해줄래요? "
일리아나 왕녀가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 내 눈을 응시한다.
" 절대, 언니에게 넘어가지 않기로. 그녀는 소유욕이 굉장히 강해요. 원하는 거는 모조리 다 손에 넣으려하니까. "
" 물론입니다. 절대 당신을 배신하지 않을거에요. 하늘에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당신을 사랑하니까요. "
그녀가 수줍게 웃으면서 얼굴을 붉혔다. 이제, 이 곳을 벗어날 때가 왔다. 졸업? 그딴 것은 필요없다. 목표는 그로시아 왕국을 먹는거였으니까.
' 다음 목표는, 나탈리아 왕녀가 되겠지. '
그런 다음에는 겔 왕국까지. 모든 판은 이미 짜여져 있다. 이제 거기서 연기할 배우들만 필요할 뿐.
' 물론 서로 각자의 역할을 모르겠지만, 크크크크. '
우리는 필리아 왕녀와 손을 잡기로 결정하고, 그로시아 왕국으로 다시 복귀하기로 했다. 나는 아돌프에게도 돌아가도록 준비하라고 말했는데, 그녀는 약간 머뭇거렸다.
" 아.. 아직 제가 여자가 된 건 말하지 않았는데.. "
" 숨겨. 어차피 네가 남자였을 때랑 별다른 차이가 안느껴지니까. "
" 네.. 알겠어요. "
나는 레이에게 돌아갈 준비를 해라고 명한 뒤에, 학원장에게 떠나야한다고 말했다. 물론 그는 아쉬운 표정이 가득했지만, 여기엔 더 이상 볼 일은 없다.
" 가자! "
확실히 일리아나 왕녀나 필리아 왕녀는 결단력 하나만큼은 괜찮았다. 떠나자고 말한 다음날 모든 것을 정리하고 그로시아 왕국으로 출발했는데, 아돌프는 나의 마차에 탔다. 물론 왜 탔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 히잇! 히이이이잇! "
그로시아 왕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그녀를 아주 녹아나게 안아줬다. 덕분에 그녀는 이제 내 명령이라면 무엇이라도 들을 정도로 내게 복종하게 된 것은 안봐도 뻔했다. 정확히 일주일동안 녹아나게 안겼는데, 이제는 내 손만 닿으면, 거짓말 조금 보태면 질질 쌀 정도랄까.
" 도착했다. "
일단 나는 아돌프의 세력을 먹기 위해서 그녀와 함께 백작가로 갈 생각이었다. 일리아나 왕녀와 필리아 왕녀는 일단 왕궁으로 돌아갔고, 후에 나와 세력을 규합하기로 약속했다. 물론 내가 떠날 때, 일리아나 왕녀가 울먹이면서 손을 흔들었다.
" 백작가가 어떻다고? "
" 흣.. 저와... 남동생 하나가 있어욧... 학! "
" 그래? 남동생과 사이는 어떻지? "
아돌프는 내 몸을 두 손으로 꽉 안은채로 헐떡이면서 간신히 대답했다.
" 학.. 그냥.. 하읏.. 평범한.. 히잇!! "
미안하지만, 백작가는 아돌프의 손에 그대로 들어가야한다. 그녀는 아마 백작에게 나에게 충성을 했다고 말할 것이다. 만약에 백작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혹은 제 1 왕자의 편이었다면?
' 뭐, 조용히 처리하는 수 밖에. '
아돌프는 내 속마음도 모른채, 그저 몸만 맡기며 헐떡이고 있다.
모든 것은, 계획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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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헷! 오늘은 자정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