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화 (55/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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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탈리아 왕녀는 자신의 심복들과 심도있는 대화를 나누고나서 나의 의견에 따르기로 결정했다. 그들도 아마 암울해진 왕녀의 상황에, 이 상황을 타파할 수 있는 방법은 그것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곧 왕녀는 계승권을 왕자에게 넘겨준다고 선언하고, 자신의 궁에 틀어박혀서 겔 왕국과의 전쟁에 대한 소식만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그로시아에서는 원군이 끊겼기 때문에, 프랑크 왕국은 울며겨자먹기로 병사를 긁어모아서 겔 왕국을 상대하는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왕녀만 내놓으면 쉽게 끝날 일이지만, 프랑크 왕국의 자존심상 왕녀를 내주고 포기한다는 것은 마치 자신들보다 겔 왕국의 힘이 강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 되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왕자 측 세력은 어쩔 수 없이 왕의 병사들과 함께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 전선으로 나갔다.

' 크크크, 과연 분노로 똘똘 뭉친 겔 왕국을 이길 수 있을까? '

전쟁이 일어나는 동안, 나는 왕자의 상태가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메넬과 브룩의 안내를 받아 야심한 밤에 그의 방을 찾아갔다.

" 으어...으아... "

이미 정신을 반쯤 놓았는지, 그는 침을 질질 흘리며 침대에서 몸을 빌빌 꼬고 있었는데, 침대 위에는 미소년으로 보이는 남자 둘이 나체가 되어서 왕자의 몸을 이곳저곳 애무하고 있었다. 왕자는 기분좋은 표정으로 헤롱거리면서 둘에게 몸을 맡겼는데, 메넬과 브룩은 입꼬리를 씩 올리면서 나에게 머리를 숙인다.

" 이젠 마약이 없으면 살지 못하는 몸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것입니다. "

" 크크크, 그래? 아주 잘했어. "

이젠 왕자는 완전히 끝난거나 다름없었다. 프랑크 왕국이 전쟁에서 지는 것만 남았으니, 나탈리아 왕녀가 계승권을 다시 되찾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왕자도 이모양 이꼴이니 왕으로 추대되기는 택도 없었다.

" 전쟁이 끝나거든, 마약을 끊어버려. "

" 네, 주군. "

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꽤 긴 시간이 걸릴테니, 나는 그 다음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 여행을 떠날 준비를 했다.

신성 제국을 향해.

' 백설 공주, 아니.. 이렐린 성녀. 기다려라, 내가 간다. '

신성 제국은 3 왕국을 합친 영토보다 훨씬 넓어서 중심이 되는 수도까지 가려면 어마어마한 시간이 걸렸다. 일단 프랑크 왕국에서 신성 제국의 영토 경계까지 가는데만 해도 무려 5일이 걸렸는데, 전쟁으로 어수선한 분위기때문인지 온 사방이 산적들도 들끓고 있었다.

물론 걸리적거리는 놈들은 남자면 목을 잘랐고, 여자면 잡아다 능욕을 해버렸다.

' 오랜만에 느끼는 강함이야. 워낙 내 정체를 숨기는 바람에 이런 강함도 제대로 느껴보지 못했는데. '

심지어 암흑 제국을 한번 분탕질 해보고 싶은 마음까지 생겼지만, 너무 시간을 지체하다가는 프랑크 왕국이 정말 멸망할지도 모르니까 다른 길로 빠지는 것은 피했다. 몬스터도 종종 등장해서 나를 귀찮게 만들었지만, 간단히 몇놈을 죽여버리니 놀라서 도망가버렸다. 그것 말고는 꽤 평탄한 여행이었다.

너무 지체된다 싶어서 빠른 걸음으로 3일만에 수도에 도착했는데, 역시 제국은 제국이었는지 크기가 다른 왕국의 몇 배나 되어보였다. 다른 수도와 차이점은 딱 하나뿐이었다. 다들 주신 '쥬논'을 믿는 것. 그것말고는 수도의 풍경은 다른 곳과 비슷했다.

"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금방 끝납니다. "

수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주신에 대한 신앙심을 테스트해야한다. 나야 물론 요정들이 축복하는 용사니 그것쯤은 쉽게 통과할 줄 알았지만, 용사인 것과 신앙심은 별개의 것인 모양이다. 그는 두 손에 신성력을 모아서 내 두 손을 잡았는데,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쳐다본다.

" 아직 신앙심이 부족하시군요. 더욱 정진하셔서 수도로 꼭 들어오시길 바랍니다. "

그러고는 나는 거기서 쫓겨났다. 신분 검사도 아니고, 고작 신앙심이 부족하단 이유로 수도에 못 들어간다니,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욕지기가 터져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고 잠시 수도의 정문에서 벗어났는데, 몰래 들어갈 방법이 있어야한다. 차라리 성벽을 넘는 것이 쉬워보여서 밤에 몰래 성벽을 타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밤이 되자마자 나는 단검 두개를 역수로 쥐고, 겔 왕국의 왕궁 벽을 탔던 것처럼 천천히 성벽을 타고 올라갔다.

성벽이 얼마나 높은지 50m는 족히 되어보였다.

" 으으, 젠장. 이게 무슨 짓이람. "

일단 성벽을 타고 안전하게 들어가긴 했는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신성 제국의 성안으로 들어갈 방법을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차라리 성녀라도 만난다면 일이 수월해질텐데, 성안에 꽁꽁 숨어있을 것 같은 성녀를 찾기란 요원해보인다. 일단 그렇게 밤을 지새우고, 정보를 모으기 위해서 수도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는데, 기회가 될법한 내용을 알게 되었다.

바로 일주일마다 성녀와 교황이 수도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축복을 빌어준다는 것!

' 마침 이틀 뒤로군. '

닷새 전에 나왔다고 했으니, 이제 이틀만 있으면 교황과 성녀가 성 밖을 나올 것이다. 그 때를 노려서 성녀와 접촉하면 되겠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은 절대 아닐 것이다.

' 일단 경비가 엄청 삼엄하겠지? '

아무리 수도가 신앙심이 굳건한 사람들만 받아들인다고 하지만, 그래도 그 중에서는 불손한 마음을 품고 있는 자가 있을 것이다. 신앙심과 나쁜 마음씨는 서로 상반되는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저러나 일단 기회는 그것뿐이었으므로 만반의 준비를 해야했다.

" 교황폐하 만세! 성녀전하 만세! "

' 오랜만이군, 백설 공주. 아니, 이렐린 성녀. '

백설 공주의 얼굴을 하고 있는, 이렐린 성녀가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든다. 상당히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지, 반가운 마음이 무럭무럭 샘솟았다. 물론 그녀는 대중들에게 파묻힌 나를 알아볼리가 만무했다.

기회는 딱 한 번 뿐이다. 교황과 성녀가 사람들에게 축복을 해줄 때. 내가 성녀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 눈에 들어야한다.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만약에 그녀가 나의 소환수라면 무언가 느낌이라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 기대는 하고 있다.

그들은 거대한 수도를 한 바퀴 빙 돌고(대략 3, 4시간은 걸린 것 같다.), 지붕이 없는 마차에서 내렸다. 이제 축복을 줄 시간이다. 안타깝게도 수많은 대중들이 몰려서 그들의 눈에 띄기가 힘들었다.

" 성녀전하! 여길 봐주세요! "

" 교황폐하! 여기에요!! "

" 성녀전하!! "

사방은 완전히 시장바닥처럼 시끌벅적해졌다. 그래도 교황과 성녀는 얼굴 하나 찌푸리지 않고 웃는 얼굴로 사람들이 뻗는 손을 일일이 잡아주었다. 그리고 드디어, 내 손을 성녀가 잡는다. 처음으로 그녀의 얼굴이 살짝 굳어지더니, 내 손에 들려있는 종이를 가져간다.

그녀는 다시 자연스럽게 행동하면서 사람들의 손을 일일이 잡아주었지만, 아까와 같은 눈빛은 아니었다. 흡사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바라는 듯한 것이라고 하면 정확할까.

' 나중에 만나지, 성녀. '

그리고 딱 하루가 지났다. 나는 묵고 있는 숙소에서 포도주를 홀짝이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내 어깨를 툭 쳤다.

한 명의 여기사가 굳은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그녀는 잠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살짝 몸을 틀어서 시야를 넓힌다. 바로 그녀의 뒤에 누군가가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있는데, 아마 성녀일 게 분명했다.

" 조용히 따라오시죠. "

기사가 나를 데리고 으슥한 곳으로 데리고 간다. 물론 성녀도 우리의 뒤를 따라왔다. 아무도 살지 않는 집에 들어온 나와 기사는, 집안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탁자와 의자에 쌓인 먼지를 후- 불어서 치웠다. 잠시 후에 성녀가 들어와 의자에 앉고 후드를 천천히 벗었다.

" 당신인가요. "

" ... 오랜만이군. "

성녀는 두 손을 맞잡고 약간 슬픈 듯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아마 예전 백설 때의 그 느낌이 그대로 전해지는 모양인지 아니면 기억이 나는 건지는 전혀 알 수가 없지만, 확실히 나에 대한 호감은 100%일 것이다. 소환수는 게임 시스템이므로 어떤 방식으로도 거부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 당신을 처음 보는 거지만... 왠지 제가 아는 사람 같아요. 무언가 아련하고... 가슴이 아파요. "

" 그렇겠지. 다른 세상에서 당신과 나는 매우 사랑하는 사이였으니까. "

" 지금 무슨 소리 하시는 겁니까! "

기사가 터무니없는 소리를 한다는 식으로 소리친다. 성녀에게 사랑을 운운하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일단 성녀는 한 남자의 소유물이 될 수 없었다. 죽을 때까지 신을 위해 살다가, 죽어서도 신을 섬겨야한다.

" 아니, 르피네. 이 사람이 하는 말이.. 맞는 것 같아. 그런 확신이 들어. "

" 성녀님! 말도 안됩니다. 어떻게 처음 보는 남자를..! "

" 이렐린 성녀. "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슬픈 눈으로 날 응시하면서 눈물을 한 방울 떨어트린다.

" 당신은 날 보는 순간 느꼈을 거야. 날 사랑했다는 것을. 그리고 아직도 사랑한다는 것을 말이지. "

" 아아, 아아아아. "

이렐린 성녀가 가슴을 잡고 울음을 터트린다. 기사는 놀라서 그녀에게 다가갔지만 곧 그녀는 성녀의 행동에 깜짝 놀랐다. 성녀가 나에게 폭 안겼기 때문이었다.

" 오래전부터... 아주 오래전부터.. 누군가를 기다려왔어요. 그게 당신이에요. 아아, 사랑하는 나의 사람. 주신께서도 저에게 말씀하셨어요. 내가 섬겨야할 사람이 있다고. "

" 그래. 너의 옛날 이름은, 백설. 백설 리츠웰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이렐린이 되었지. "

" 아... 당신을.. 당신을 영원히 섬기겠어요. "

기사는 너무 놀라서 입을 떡 벌렸다. 그녀는 성녀를 단순히 호위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성녀를 존경하는 마음도 대단했는지, 그런 그녀의 행동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모양이다.

일단 주신이 성녀를 향해서 섬겨야할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는 것 자체가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성녀가 거짓을 얘기할 수는 없었으니 그것 또한 이해되지 않는다.

" 넌 성녀를 그저 믿고 따라가면 돼. 그녀는 진심이고, 나도 진심이야. "

나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가슴을 폈다.

" 나는 '레온 프라하스타'. 주신이 내려주셨고, 또 요정들의 축복을 받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내려온 '용사'다. "

그제서야 기사도 깜짝 놀라면서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조만간 이 세상에 용사가 내려와 대륙을 평정시킨다는 전설을. 지금 그녀는 그 전설을 눈앞에서 목격하는 중이었다.

" 요.. 용사님?! "

" 그래. 이제야 알겠어? 뭣하면 요정이라도 불러줘? 엘류나크! "

엘류나크가 우리들 앞에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바닥에서부터 물기둥이 천천히 올라오면서 사람의 형상을 만드는데, 몇초만에 아주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이 등장했다. 기사뿐만 아니라 성녀도 그 광경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요정을 보는 것은 처음이기 때문에. 그것도 엘류나크라면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이다.

" 호.. 호수의 지배자, 엘류나크! "

" 왜 불렀어요, 레온? "

" 내가 용사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직접 말해, 엘류나크. "

그녀는 기사와 성녀를 힐끗 보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 '레온 프라하스타' 당신은 요정의 축..복을 받은.... 용사입니다. "

사실 그녀는 아주 조용히 용사 앞에 '성욕'이라는 말을 덧붙였지만, 르피네와 이렐린은 그것을 듣지 못했다. 물론 귀가 밝은 나는 들었고. 크크크, 이게 나중에 한번 이걸로 트집잡아서 이것저것 시켜봐야겠는데.

" 이제 됬지? "

" 무.. 물론입니다, 용사시여. "

기사와 성녀 모두 나에게 고개를 숙인다. 용사는 신에 내려준 존재. 교황도 그에게 고개를 숙여야하는 존재였다.

" 그래, 후후후. 내가 바로.. 용사다! "

이제 이 길고 길었던 서막을 종결할 때가 온 모양이다.

============================ 작품 후기 ============================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헤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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