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6화 (75/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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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이 라이트 마법을 사용한 상태로 깊고 음침한 지하통로를 향해 계속해서 내려갔다. 거의 한 사람이 간신히 지나갈 정도로 폭이 좁았는데, 폐쇄 공포증이라도 있는 사람에겐 거의 고문이나 다름 없을 정도랄까. 다행히 그 좁은 통로도 한 시간정도 들어가자 점점 넓어져서 이제는 두 사람이 손을 쫙 뻗으면 닿을 정도로 넓어졌다.

경사도 꽤 완만해졌지만, 높다란 천장만큼은 아직도 낮아지지 않았다.

" 잠시 쉬었다가 다시 출발한다. "

가장 먼저 지친 사람은 당연하게도 성녀 이렐린이었다. 물론 암흑 제국으로 들어갈 때 같이 동행하면서 고된 여행을 겪어본 바가 있었으나, 그렇다고해서 그녀의 몸이 단련될 정도는 아니었다.

그저 조금 익숙해진 정도랄까. 그뿐만 아니라, 침침한 지하통로는 바닥까지 미끄러웠기 때문에 자칫하다간 넘어지는 수가 있어서 계속 긴장한 채로 걸어야했기에, 다리에 상당히 많은 부담도 되었다. 마나를 운용할 수 있으면 아무런 문제도 안되지만, 성력은 미끄러움에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았다.

" 하아. "

이렐린은 지친 다리를 이끌고 벽에 살짝 기대었다. 순간 내가 그녀를 향해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려고 했는데, 갑자기 땅이 드르르륵- 하고 울린다.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 채 파악도 하기 전에, 높다란 천장에서 거대한 돌덩이 하나가 쿵- 떨어지더니 우리를 향해 데굴데굴 굴러온다. 이건 소드 마스터라고 해도 잘라내기 전에 꼼짝없이 깔릴 정도였지만, 다행이게도 나의 동행에는 호수의 지배자인 엘류나크와 그린 드래곤 란이 있다.

- 워터 쉴드!

- 매직 쉴드!

순식간에 생성된 수많은 쉴드가 굴러오는 돌덩이와 부딪혔다. 쾅- 하고 폭탄 터지는 소리가 울리더니, 돌덩이는 그 자리에서 멈췄다.

" 아.. 아.. 죄.. 죄송해요. "

이렐린이 어쩔 줄 모르고 우리들을 향해 고개를 꾸벅꾸벅 숙였다. 다시 한번 더 일행들에게 주의점을 상기시키려고 했었던 찰나에, 이렐린이 보기좋게 경고를 준 셈이라 여겼다.

한번 정도야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었고, 특히 일반인인 이렐린은 세밀한 기관 장치에 대해서는 감각이 둔할테니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 한번은 이해해줄 수 있어. 다들 봤지? 함부로 벽이나 이상한 장치같은 걸 만졌다가는 큰일나니 조심하도록 해. "

우리들은 배낭에 넣어온 물을 한모금씩 마시고 다시 천천히 통로를 따라 걸었다.

" 마나가 희박해지고 있다. 꽤 깊숙히 들어온 모양이야. "

맨앞에 서서 길잡이 노릇을 하고 있던 란이 나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 그러면 텔레포트는? "

" 아직까지 못할 정도는 아니지만, 정말로 깊숙히 들어간다면 나도 힘들어질 수 있어. "

물론 자신 한몸 정도야 빠지는 것은 일도 아니지만, 이정도 대인원이라면 드래곤이라도 만만치 않았다.

" 어머. "

어느정도 내려갔을 때쯤, 우리 일행의 눈에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벽에 붙어있는 수많은 보석 광물들. 형형색색 반짝이는 모습이 여간 아름답지 않다. 하지만, 만지는 것은 당연히 금물. 일행들은 그저 멍-하게 보석을 눈으로만 구경했다. 거기엔 드래곤인 란도 예외는 아니다.

" 정신차리고 빨리 가. 갈길이 멀다. "

" 칫, 알았어. "

내 느낌상으로 거의 반나절을 걸어온 것 같은 시점에, 성녀가 이젠 도저히 못 걷겠다며 백기를 들었다. 이 정도 버틴 것만 해도 대단하다고 해주고 싶었지만, 확실히 일행들에 비해 체력이 떨어지는 이렐린은 짐이 되었다.

" 엎혀. "

" ... 그러면 용사님께서. "

" 어차피 처리는 란하고 엘류나크가 알아서 해줄거야. 너도 체력을 적당히 아껴놔야지. 그래야 내일도 내려갈 수 있을테니까. "

지하통로의 깊이가 어느정도 되는지 알길이 없었기 때문에, 일단 식량은 넉넉하게 챙겨왔지만 너무 오래걸린다 싶으면 다시 올라간 뒤에 더 철저하게 준비할 생각이었다. 물론 통로는 하루만에 끝날 수도 있고, 일주일이 넘게 걸릴 수도 있다.

다시 돌아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드래곤까지 동행시켰건만, 이런 식으로 계속 내려가다간 텔레포트도 무용지물이 되고 말 기세였다.

" 더 말 시키게 하지말고 엎혀, 제발. "

" 네.. 죄송해요, 용사님. "

성녀의 몸무게라고 해봤자, 나에겐 정말 배낭에 짐을 조금 더 넣은 느낌뿐이었다. 어차피 소드 마스터를 넘어서면 범인의 범주를 뛰어넘기 때문에, 무게는 거의 의미가 없었다(물론 너무 무거운 것은 얘기가 틀리지만).

그렇게 성녀를 엎고 한참을 더 내려갔을 때, 란이 속도를 천천히 줄이기 시작했다. 저멀리 빛이 무언가 을멍을멍 비추기 시작한다.

" 문이군! "

생각보다 싱거운걸- 하고 생각하면서 우리들은 단단해보이는 검은 철문 앞에 다가섰다. 아무런 장식도 되어있지 않은, 무섭도록 새카만 철문이었다.

" 어떻게 여는거지? 그냥 밀면 되는건가. "

" 어떤 함정이 더 있을지 모르니 함부로 여는건 위험해. 일단 마나 체크부터 하고. "

란이 문 전체에 마나스캔을 했지만,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 이상은 없어. 하지만, 기계 장치면 나도 손쓸 방법이 없어. "

" 다들 최대한 긴장해. 뭐가 어떤 식으로 튀어나올지 모르니까. 다들 주위 벽을 둘러보고 이상한 구멍이 보이면 얘기해. "

라이트를 더 강하게 만들어서, 우리들은 혹시나 모를 함정을 대비해서 주위를 구석구석 살피기 시작했다. 한참을 살펴도 아무런 문제점이 없어보였기에, 나는 철문을 열기로 마음먹었다.

" 그럼 연다. 다들 긴장하고, 이렐린은 축복을 걸어줘. "

그녀가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 모두에게 강력한 성력 마법을 부여했다.

" 셋, 둘, 하나! "

- 끼기기기기긱

생각보다 철문은 쉽게 열렸다. 문이 활짝 열리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기에, 나는 조심스레 문안으로 발을 옮겼다. 경사면이 아닌 평평한 평지가 우릴 반겼다. 거의 운동장만큼 넓은 장소였는데, 온사방이 캄캄했기 때문에 라이트 하나로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 여긴 어디지? "

그 때, 란이 고개를 휙 돌려 어느 한 지점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무언가 포착된 모양이다.

" 무언가 있다. "

" 뭐? 어떤 생명체지? 적인가? "

" 적일 가능성이 매우 높지. 다들 전투 준비 시켜. "

다들 란의 말을 듣고 전투 준비를 완료했다.

" 상당히 몸집이 있어. 발걸음 소리가 매우 묵직하다. 그리고 보폭이 꽤 좁아. 보폭 소리도 꽤 짧고. "

" 어떤 놈인지 상상돼? "

" 이정도로는 아직 몰라. 예상되는 생명체가 너무 많거든. "

란은 라이트를 하나 더 생성시켜서 소리가 울린 곳을 향해 날렸다. 그러다가 다른 곳을 향해 또다시 고개를 휙 돌린다.

" 저기도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저기도, 저기도.. "

잠시 후, 그녀는 사방에서 무언가가 걸어온다고 말한 뒤에 긴장한 표정으로 전투 태세를 갖췄다. 예전에 나와 싸울 때의 그 발키리같은 모습이다.

" 마물이야. 하필 다크 트롤이라니. "

" 다크 트롤? "

" 만만치 않은 놈들이야. 어떻게 여기서 200년 가까이 버텼는지는 모르지만, 상당히 강한 놈들이야. "

그러고보니 이상하게 바닥이 부석부석한 것이 꼭 뼈가루를 밟는 느낌이었는데. 나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지금은 전투에 집중하자. '

" 다들 준비해. 절대 무리해서 들어가선 안돼. 무조건 동료를 등지고 싸워야 한다! "

내 말이 끝나자마자, 라이트에 놈들의 모습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이름처럼 온 몸이 새카만 트롤들은 수백 년만에 처음보는 빛에 두 손으로 눈을 가리면서 우리들을 노려본다. 두 눈에서 이상하게 형형한 색깔이 보였는데, 아마 스스로 발광하는 법을 배운 모양이다.

" 놈들은 엄청난 실력자들이니까 절대 방심하지마. 목을 정확히 잘라서 죽이도록 해. "

빛때문인지 놈들은 눈을 감고 우리들에게 다가온다. 그래도 걸음에는 전혀 이상이 없다. 놈들은 조심스럽게 우리 주위를 천천히 맴돈다.

' 왜 안 덤비는거지? '

그러다가 이렐린이 잠시 뒷걸음을 치면서 발자국 소리를 냈다. 그 순간, 트롤 몇마리가 우리들에게 순식간에 쇄도한다.

" 소리다! 놈들은 소리를 이용한다! "

두 마리의 다크 트롤이 나에게 기다란 손톱을 휘둘렀다. 다행히 두 트롤은 서로 손발이 맞지 않아서 자주 엉키는 덕분에 상대하기 쉬웠다. 아마 그들은 철저하게 독립적인 생활을 하게끔 적응된 모양이다. 그게 이곳에서 살아남는 방법이었을까.

" 놈들은 개인적인 성향이 강하다! 한놈씩 천천히 공략하도록 해. "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 검이 트롤 한 놈의 목을 서걱- 베어냈다. 그와 동시에, 트롤 몇몇이 죽은 트롤의 시체로 다가가더니 황급히 시체를 뜯어내고는 어디론가 휑 가버린다.

트롤 시체 하나가 정말 눈깜짝할 새에 모두 분해되서 눈앞에서 사라졌다. 남은 것은 핏물과 내장들. 몇몇 놈들은 내장에 다가가 냄새를 킁킁 맡더니 입에 물고 도망간다.

물론 시체를 가지지 못한 트롤이 더욱 많았기 때문에, 아직 전투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머지 트롤도 몇몇의 목을 치니 트롤들은 시체를 모조리 뜯어서 우리들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정말로 철저하게 이 암흑세상에 적응된 다크 트롤들이었다. 오로지 생존을 위한 발버둥이랄까.

" 정말 특이하군요. 보통 다크 트롤하고는 완전히 성정이 틀린데요? 몸집도 더 작은거 같고. "

" 아마 이곳에서 살아남으려면, 동족을 먹어야했을테니 저런 식으로 적응했겠지. 바닥에 있는 흰 모래들이 아마 그 증거일껄. "

과연 얼마나 많은 다크 트롤들이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을까. 그것은 상상에 맡겨두는 부분이지만, 아마 우리들이 상상하는 그 이상은 분명할 것이다.

" 빠.. 빨리 가요, 우웁. "

이렐린이 역겨운 피와 내장 냄새를 참지 못하고 구역질을 몇번 했다. 나도 옷에 이런 구린내를 배도록 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나도록 명령했다. 다행히 다들 원하는 만큼의 먹이를 가져간 덕분인지, 더 이상의 다크 트롤은 다가오지 않았다.

" 이게.. 끝은 아니겠죠? "

히폴리아가 약간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무어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어떤 말을 하든간에 그들에게 썩 좋은 영향을 주지는 못할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 문이다. "

일직선으로 쭉 향해가니, 다행히 또다른 문이 보였다. 아마 더 밑으로 향하는 출입구인 모양이다.

" 그럼, 다시 열겠어. "

다크 트롤의 공터를 지나, 다시 한참을 통로를 통해 내려왔다. 이젠 쉬어야할 시간이었기에, 나는 주변을 아주 꼼꼼하게 살피고 다들 가져온 침낭을 펴서 눕도록 시켰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엘류나크와 란, 그리고 엘렌은 불침번을 시켰다.

물론 바뀌지 않는 불침번이지만, 그들에겐 며칠 자지 않는 것 정도는 아무런 영향도 없으니, 당연한 조치였다.

" 다들 아무 걱정말고 자. 괜히 잠을 설치면 내일이 더 괴로우니까. "

이런 나의 걱정은 기우였는지 다들 눕자마자 코를 골면서 골아떨어졌다.

" 만만치 않을 것 같은데, 용사? "

" 그러게. 어줍잖게 들어왔다간 정말로 피를 볼뻔 했어. "

" 어쩌면 지금도 과소평가했을지도 모르지. "

" 글쎄. "

얼마나 더 남은지 모른다. 어떤 관문이 있으며, 또 어떤 생명체가 나올지도.

" 흠, 나도 좀 쉴께. 고생좀 해줘. "

" 알겠다. "

잠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어느 순간 정신이 멀어진다.

============================ 작품 후기 ============================

모두들 저의 특기를 아십니까?

2부의 끝도 이제 크게 머지 않은 듯 하군요.(먼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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