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7화 (76/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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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일행은 일어나서 눈꼽을 떼고 대충 배만 채운 뒤에 다시 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지금이 아침인지 아니면 밤인지 알 수는 없지만, 생체 리듬을 보아하니 대충 이른 아침인 듯 했다.

" 정말 누군지는 몰라도 무시무시할 정도로 깊게 팠네. "

" 어쩌면 천연적으로 만들어졌을지도 모르지. "

드래곤인 란도 이런 어마어마한 규모의 지하통로는 상상도 못했었는지 고개를 휘휘 젓는다. 내려온 길이만 해도 족히 수백m는 넘은 것 같은데, 왠지 아직도 맨 아래층에 도착하려면 더 많이 가야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공주를 구하면 다음은 뭘 할거야? "

" 다음이라. "

란이 나에게 다음 해야할 일을 물었지만, 사실 다음에 할 일은 없었다. 이제 소환수를 정하고, 게임을 끝내야할 시기가 다가왔기 때문에. 물론 끝나기 전에 나의 여인들을 만나고 싶은 생각도 조금 있었지만, 끝낼 때 과감히 끝내야 가상 현실의 중독에 걸리지 않는다.

" 그것까진 생각해놓은 것은 없어. 뭐, 이젠 할 일이 없을테니 조용히 살겠지? "

" 그렇군. "

내 말이 끝난 이후에는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그렇게 대략 몇 시간을 걸어내려갔다. 이렐린이 힘들어서 휴식을 취하자고 말할 타이밍때, 또다시 새카만 철문이 우리들 앞에 나타났다.

" 왔네. 이번에 우리들 목표가 있는건 아니겠지? "

" 모르지, 눈앞에 나타나지 않는 이상은. "

이번에도 전처럼 마나스캔을 하고 벽 구석구석을 샅샅이 살핀 뒤에 철문을 열었다. 이번엔 처음과 다르게 바닥은 딱딱한 돌이었다. 물론 캄캄한 것은 여전했지만. 그런데 왠지 모르게 오싹오싹한 한기가 느껴지는 것이, 범상치 않은 무언가가 있는 듯 했다.

" 다들 조심해. 이렐린은 우리들에게 축복을 내려주고, 그녀를 둘러 싼 채로 다들 위치를 잡도록. "

우리는 조심스럽게 앞을 향해 전진했다. 우리가 통과한 검은 철문으로부터 한참을 걸어갔을 때, 갑자기 앞서 걷던 란이 우뚝 멈춘다.

" 잠깐. 앞에 뭐가 있다. "

그녀가 말하기 전에, 나 역시도 앞에서 무언가 있음을 느꼈다. 단 하나. 하지만, 그 하나는 앞서 느꼈던 다크 트롤과는 차원이 틀린,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이건 드래곤인 란도 무시못할 기운이었다.

" ... 이건. "

" 정체가 뭐야. "

" 정말 위험한데. "

란은 말이 끝나자 마자 전투 모드로 모습을 바꿨고, 나 역시도 검을 뽑아서 앞을 겨눴다. 보리 역시 미세하게나마 그 기운을 느꼈는지 내 옆으로 다가와 검을 뽑는다. 하지만, 이정도 기운이라면 보리는 도움이 안될 가능성이 컸다. 그랜드 마스터라고는 하나 드래곤 하나도 어찌 못하는 약한(?) 존재니까.

" 다들 뒤로 물러서있어. 엘류나크 너도. 나와 란만 상대한다. "

내 말에 다들 천천히 뒷걸음질쳐서 우리들에게 멀어졌다. 빛이 두 갈래로 천천히 나누어진다.

" 온다. "

그 엄청난 기운을 가진 생명체가 서서히 우리들에게 다가왔다. 심지어 발소리도 숨기지 않고.

- 저벅, 저벅.

구둣발 소리가 우리 심장 소리를 더욱 쿵쾅거리게 만들었다.

" 음? "

사람이다. 하지만, 사람이 수백 년간 여기에 갇혀있는 상태로 살아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뻔하다.

" 마족. "

" 계약기간은 아직 남아있을텐데, 누구지? "

" 처음부터 전력을 다해. 상급 마족이다. "

내가 고개를 끄덕하자, 란은 마족이 반응하기도 전에 빠르게 검을 아래로 내리 그었다. 나도 방심하고 있을때 목숨을 잃을뻔했던, 그녀의 폭발적인 순발력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 마족도 그것을 온전히 피하지는 못했는지, 새카만 웃옷이 잘려 피가 흐른다. 하지만, 우리가 예상하는 중상은 아니라 아쉬움이 가슴 속을 파고들었다.

" .. 뭐냐. 다짜고짜 공격이라니, 하찮은 도마뱀년. "

" 마족은 우리들에겐 퇴치해야할 마물일 뿐이다. 천족도 마찬가지고. "

" 나는 계약에 의해 잠시 이곳에 있었을 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금 너에게 변명하고 싶은 생각도 없지만. 어차피 날 화나게 했으니, 각오는 했겠지? "

마족의 옷이 부풀어오르더니, 팡- 하고 터진다. 마족은 온몸이 전부 반들반들한 검은색 피부로 변함과 동시에 손톱이 아주 날카롭게 변하더니, 땅을 강하게 한번 딛는다.

- 쾅!

온 사방이 흔들릴 정도의 압박. 아까의 기세는 갈무리된 날카로운 예기를 뿜었다면, 지금은 마구 날뛰는 사나운 동물같은 느낌이랄까.

순간 번쩍- 했다. 정말로 잠시 번쩍- 했다고 생각했는데, 나와 란의 몸이 허공을 날고 있었다. 상황을 깨달은 내가 몸을 틀려고 했는데, 갑자기 내 배에 강한 타격이 느껴졌다.

- 콰앙!!

나와 란은 동시에 바닥에 꽂힌다. 다행히 나는 그의 팔을 대충 막아냈기에 손톱에 찔리지는 않았지만, 란은 아니었는지 몸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 크읏. "

" 뒤로 빠져. 내가 상대한다. "

나는 찢어진 상의를 뜯어내고 마족을 향해 한 걸음 걸어갔다. 란도 자신이 상대하기엔 무리라고 생각했는지, 마족을 한번 힐끗 바라보고는 곧바로 뒤로 도망쳤다.

" ... 여윤가? "

" 그래봤자 다 내 손에 죽을테니까. "

" 그럼 어차피 죽을 목숨인데 하나 물어봐도 되겠지? "

" 그래, 좋다. "

마족은 여유가 있는지 팔짱을 끼고 히죽 웃는다.

" 계약은 무슨 말이지? "

" 아, 그건 말해주지 못하겠군. 그것도 계약의 일부거든. "

" 그래? 그럼 넌 파수꾼같은 역할인가? "

" 기분은 나쁘지만, 틀린 말은 아니군. "

내가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 다시 검을 들었다.

" 좋아. 질문은 끝났어. 다시 싸우지. "

" 후후후, 얼마만의 전투인지.. "

하지만, 지금의 나는 방금 전과는 틀리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고, 더 나아가 생명체라는 틀을 벗어난 존재. 그게 바로 나다. 용사의 칭호를 얻고, 여기까지 온 나를 우습게 여겨서는 큰코 다치게 될테니까.

" 와ㄹ.. "

마족이 채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내 검이 그의 어깨에 내리 꽂혔다. 마족이 빠르게 몸을 뺀 덕분에, 검이 깊숙하게 박히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중상이었다.

" 크윽! 이 놈. "

" 이젠 넌 죽는다, 마족. "

몇번의 부딪힘으로 상하 관계는 명확히 나타났다. 확실한 우위는 나였고, 마족은 간신히 방어만 하고 있는 중이었다.

" 이럴 수가. 내가.. 내가 본모습을 보였는데도! "

" 상급의 마족은 이정도인가? 실망인데. "

" 닥쳐랏! 너.. 너따윈. "

하지만, 말과는 다르게 그는 진심을 다하는 나에겐 몇 수 아래였다.

" 어차피 내 목표는 네가 아니니까. 얼른 끝내도록 할께. "

" 너.. "

나는 정말 집중을 다해, 마지막으로 강하고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정말 진심을 다해서.

- 서걱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마족의 머리가 몸과 분리되어 땅에 떨어졌다. 그리고 마족의 몸이 천천히 검은 가루로 분해되더니, 시체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다.

" 후. 이거 갈수록 무서워지는데. "

물론 아직까진 내가 상대하기에 충분한 상대였지만, 다음번에도 적이 있다면 훨씬 강한 상대일 것이다. 물론 드래곤도 어쩌지 못하는 상급의 마족이 최종 보스일 가능성이 높지만, 만약 아니라면 충분히 대비를 해야한다.

' 돌아가기도 너무 많이 들어온 상태인데. '

적당히 많은 몬스터와 싸운다면, 이렐린이나 에덴, 보리를 써먹을 수 있을텐데 이렇게 강한 마족이 한명 있다면, 내가 아차- 하는 순간에 다른 이들이 목숨을 잃어버릴 가능성도 있다. 그렇기에 지금 상황에선 그녀들이 별 필요가 없었다. 그래도 드래곤과 밖으로 보내기에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드래곤은 전력에는 큰 보탬이 되기 때문에.

마족이 죽었다는 것을 알았는지, 란을 선두로 일행이 모습을 드러냈다.

" 죽인건가? "

" 응, 죽였지. 아직은 약한 놈이지만, 다음번엔 장담하지는 못하겠어. "

마법으로 상처를 치유했는지, 란은 더 이상 피를 흘리지 않고 있었지만, 상당히 충격을 먹은 듯한 모습이었다.

" 이게 마지막이었으면 좋겠는데. "

" 장담은 못해. 일단은 위험은 대충 사라진 것 같으니까 잠시 쉬자. "

우리들은 중간에 불을 피운 뒤에 몸을 녹이기 시작했다. 상당히 지하로 왔는지 기온도 뚝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 저희들이 도움이 되는건가요? "

이렐린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 음. 솔직히 말하면,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별 도움이 될 것 같진 않아. 하지만, 이대로 보내기에는 또 어떤 상황이 닥칠지 모르잖아. 정말로 너의 성력이 필요하게 될지도 모르고. 그러니까 자신을 비하하는 생각은 하지마. "

개똥도 쓸 때가 있다-는 말이 있듯이, 지금 필요하지 않아고 해서 계속해서 필요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정말로 이렐린이나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필요한 순간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느 정도 휴식을 취했다고 생각해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들 출발할 준비를 하도록 명령했다. 우리는 다시 대열을 맞추고 마족의 공터를 벗어나 다음 철문에 다달았다.

" 이젠 약간 예상이 되는데. "

" 이런 식의 관문이 또 있을까요? "

" 모르지. 하지만, 또 있다면 이번엔 각오해야할지도 몰라. "

철문을 열자 다시 지하통로가 길게 뻗어있었다. 란을 선두로 다시 천천히 통로를 따라 내려갔다. 이젠 그 추위도 상당했기에, 이렐린은 배낭에서 챙겨온 옷가지를 몸에 둘렀다. 이젠 입에서 입김이 훅- 나올 정도랄까. 물론 그 전에도 입김이 뿜어져 나오긴 했으나, 지금처럼 심하게 나올 정도는 아니었다.

바닥은 공기 중에 있는 수분이 얼어서 굉장히 미끄러웠다. 그 때문에 이렐린을 내 뒤에 바짝 붙어서 걷도록 했다.

" 미끄러지더라도 벽을 짚지는 마. 엘류나크가 안전하게 받아줄테니까. "

이제 내려갈수록 통로가 점점 좁아지기 시작했다.

" 통로가 좁아지는데? "

" ... 거의 다 온 모양인 것 같네. "

예감상 목표 지점에 거의 다 온 것 같았다.

" 여기서 다들 쉬도록 하자. "

이젠 잠시 체력을 비축해야할 때다. 목표가 거의 눈앞에 있지만, 더 이상 욕심부렸다가는 위험한 순간이 올지도 모르니까.

일행들은 다시 침낭을 꺼내 바닥에 두었다. 경사가 있고 얼음이 바닥에 얼어있었기에 휴식을 취하기 적절한 곳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더 내려가거나 다시 올라가기엔 무리가 있으니까.

" 란! 부탁좀 하지. 파이어볼을 작게해서 적당히 온도를 유지해줄 수 있겠지? "

" 그정도야 가뿐하지. "

따뜻한 기운이 일행을 감싸고 돌았다.

" 다들 푹 쉬어. "

일행은 순식간에 잠에 빠졌다.

' 이제 마지막에 접어들었구나. '

어쩌면 내일 드디어 '잠자는 공주'를 만날지도 몰랐다.

그런 예감이 들었다.

============================ 작품 후기 ============================

작가의 예감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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