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8화 (77/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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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다. "

일어나서 출발한지 얼마지나지 않아서 하얀 서리가 붙은 철문 하나가 우리들을 반겼다. 우리가 거쳐온 다른 철문과는 다르게 화려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는데, 일행들은 왠지 이곳이 우리들이 목표하고 있는 장소라는 것을 예감한 모양이다.

" 도착한 것 같군. 이제 다들 마지막으로 집중해. "

이번에도 전과 같이 마나 스캔 후에 벽을 샅샅이 살피고 문을 천천히 열었다. 순간 엄청난 냉기가 우리들을 향해 쏟아져 나온다.

" 우웃! "

이렐린이 버티지 못하고 두 손으로 몸을 꽉 껴안았다. 그나마 란이 대부분의 한기를 막아주고 있어서 버틸만 했지만, 잘못하다가는 한순간에 동태가 되어버릴만큼의 시린 냉기였다.

" 저기가... 다들 뒤로 물러가! "

내 눈앞에 드디어 반듯하게 누워있는 여인네가 보였다. 시릴 듯이 하얀 백발에, 새하얀 피부, 유일하게 붉디붉은 입술. 가히 천상의 아름다움이라고 불릴만 했다.

그녀의 주위로부터는 엄청난 냉기가 뿜어져나오고 있었는데, 어째서인지 그녀의 몸은 얼지 않고 살아있는 그대로였다. 죽은 듯이 자고 있다는 것만 빼면, 당장 일어나도 하나도 이상할 것 같지가 않았다.

" 란! 최대한 냉기를 막고 있어! "

" 응. "

나는 온몸에 마나를 두르고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갔다. 그녀의 얼굴이 더욱 선명하게 나의 두 눈에 들어왔다.

' 만약 다른 네임드 캐릭터를 골랐더라면, 땅을 치고 후회했겠군. '

너무 아름다워서,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역시나, 이 동화의 최고의 주인공다운 미모랄까. 백설공주였던 이렐린도 그녀에겐 한 수 접어야할 정도의 차이가 났다.

하지만, 그레이트 마스터인 나도 그녀의 주위에서 뿜어져나오는 냉기에는 치가 떨렸다. 그것은 다가갈수록 심했는데, 잠자는 공주의 바로 옆에 도착하니 마치 한 겨울에 발가벗고 눈밭을 뒹구는 느낌이 들었달까. 도대체 어떤 저주에 걸렸으면 이런 무시무시한 냉기를 내뿜을 수 있는 것일까. 심지어 주위의 공기가 냉기로 인해 모조리 얼어붙었는지 숨쉬기가 힘들 정도였다.

' 공주를 깨울려면 멋있는 왕자의 키스가 필요한거겠지? '

물론 왕자라는 것만 다르지만.

- 쪽

이상하게도 냉기는 그녀의 몸을 전혀 침범하지 않았다. 아직도 촉촉하게 느껴지는 그녀의 입술과 내 입술이 서로 닿았다.

그 순간, 정말 거짓말처럼 뿜어져나오는 냉기가 천천히- 줄어든다. 이미 내 몸의 상당부분이 서리가 붙어있었는데, 마치 눈사람이 된 듯한 모습이었다.

몸을 한번 강하게 털자 서리가 우수수 떨어진다.

" 음. "

그녀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한다. 잠에서 깨어나는 공주. 드디어!

그녀가 눈을 천천히 뜬다. 검은 동공이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린다. 아마 오랫동안 멈춰있던 몸이 다시 움직이려면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다.

" 아.. 아아. "

공주가 입을 열고 목소리를 내뱉는다. 내가 느끼기엔 30분을 그 상태로 기다린 것 같았다.

대충 몸이 다시 생명순환이 이루어지기 시작한다고 느낄 무렵, 그녀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킨다. 수 백년이나 여기에 있었으면 더러운 먼지라도 묻었을텐데, 그녀는 티클하나 없이 깨끗하다.

정말 방금까지 수백 년간을 잠만 잤다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멀쩡하달까.

" 음. "

" 정신이 드는가, 공주? "

" .. 시간이 얼마나 흘렀지? "

공주의 말투가 약간 신경쓰였으나, 신분을 생각하면 그런 말투를 이해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마도 나를 기사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겠지. 그래도 그녀를 구한 은인에 대한 예우는 해줘야하는 거 아닌가- 하고 생각했지만, 그건 나중에 차차 고쳐나가면 될 문제다.

하지만, 내가 만약 여기서 그녀의 이상함을 빨리 눈치챘더라면.

" 정확히는 모른다. 하지만, 대략 200년은 넘었지. "

" ... 날 깨운 것이 당신인가. "

" 그래. "

그리고, 공주는 분노한다.

" 감히 네놈이 나를 깨웠단 말인가!! "

내 몸이 붕- 날아가 벽에 처박힌다. 설마 공주가 이런 힘을 가지고 있을거라곤 생각하지 못해서 불식에 당한 공격이었다. 아니, 공주라고 하기엔 뭔가 핀트가 미묘하다.

" 네 녀석이 내 계획을 다 망쳐놓았어! "

" 윽, 그게 무슨 소리야! "

갑작스럽게 공격하는 공주를 보면서, 일행들이 나에게 우르르 뛰어왔다. 그 중에서 유일하게 공주를 알고있는 엘렌이 우리들 앞에 나서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 다.. 당신은 누구죠?! "

엘렌은 마치 그녀가 누군지 모른다는 투로 말을 한다. 아무리 내 머리가 핑핑 잘 돌아간다고 해도, 지금 상황은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

" 엘렌! 그게 무슨 소리야. 그녀가 아니야? "

" 아.. 아니, 그녀는 맞아요. 모습은 제 기억과 똑 일치해요. 하지만, 이상하잖아요? "

그렇다. 한마디로 축약하자면, '이상하다'.

" 나? 나는.. 젠장! 조용히 닥치지 못해? "

갑자기 그녀가 한손으로 머리를 잡고 인상을 찡그리며 소리친다. 그리고 몇번 고개를 붕붕 젓더니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본다.

" 네놈때문에.. 네놈때문에 다 망쳤어! 내가.. 내가 그녀의 몸을 차지할 수 있었는데!!! "

" 뭐..라? "

무언가 잡힐 듯 말 듯하다. 몸을 차지할 수 있었다고? 그렇다는 것은, 설마.

" 이 모든 것이.. 하하.. 너의 안배였었구나. "

" 그래! 젠장할, 그 마족놈은 지키지 않고 뭘한거야! 수백의 남녀를 희생시켜서 소환한 놈이었는데! "

그 순간, 드래곤인 란도 그녀의 정체를 눈치챘는지 인상을 찡그리면서 입을 연다. 내가 예상한 말이다.

" 마..녀! "

" 에? "

그 말에 이렐린이 이해하지 못했는지 목소리를 올렸다. 나는 바닥에서 천천히 일어나 그녀의 어깨를 짚고 앞으로 걸어나갔다.

" 마녀다, 공주의 몸을 차지하고 있는 자는. "

" 그럴 수가.. "

하지만, 계획을 망쳤다는 것은 필시 우리들에겐 희소식일 것이다. 아마도 공주의 영혼을 소멸시키고 자신이 그 몸을 차지하려고 한 모양이다. 하지만, 이렇게 오랫동안이나 공을 들일 이유가 있는 것일까. 그것까지는 나 역시도 예측할 수가 없었다.

' 일단은 때려눕히고 알아내는 수 밖에. '

내가 흉흉한 기운으로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자, 공주의 몸을 차지한 마녀도 내 기운을 읽었는지 입꼬리를 피식 올린다.

" 호오, 감히 나에게 대적하겠단건가? 네놈 옆에 있는 도마뱀을 믿는 것은 아니겠지? "

" 당연하지. 네 년은 내 손으로 처리할거다. "

" 배짱은 두둑하군 그래. 음, 좋아 네 녀석은 평생 내 종으로 만들어주지. 그 반반한 얼굴도 꽤 마음에 들고 말이야. "

공주가 히죽- 웃는다. 비웃는게 분명한데, 그 모습도 너무 아름답다. 아마 마녀가 그녀의 몸을 차지하려고 했던 것도 이런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겠지?

" 그래? 다행이네. "

" 뭐가 말이지? "

" 나도 네 년을 내 평생 종으로 만들 생각이었거든. 그 반반한 얼굴도 꽤 마음에 들고 말이야. "

" ... 건방진 놈. "

그녀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한기가 쏟아져 나온다. 순식간에 그녀 주위가 급속도로 얼어붙는다.

" 다들 피햇! "

" 어딜! "

그녀가 일행을 향해 냉기를 뿜어냈지만, 나는 검을 뽑아 그녀의 냉기를 막는다.

" ... "

" 이래뵈도 용사거든. "

" 하, 웃기는 놈이네. "

다행히 그녀가 내뿜은 냉기를 막은 덕분에, 일행은 아무 피해없이 몸을 피할 수 있었다. 사실 내가 아무런 상처도 없이 그녀를 제압한다는 것은 불가능해보였다. 냉기도 보통이 아니었지만, 서서히 느껴지는 그녀의 마력도 내 상상을 뛰어넘는 중이었다.

" 후후후, 두렵나? "

" 뭐,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확실히 너는 강하니까. "

" 그래, 강자를 인정하는 것도 용기지. 뭐, 네가 마음에 들었으니까 특별히 너는 용서해줄께. 어차피 이 년의 영혼도 얼마있지 않으면 사라질테니까. "

아마 공주의 영혼을 말하는 모양이다. 그녀를 위해서라도, 내가 마녀를 쓰러트리지 않으면 안될 것 같다.

" 미안하지만, 그럴 마음은 없다. "

" 그래? 안타깝네. 데스나이트는 아무런 재미도 없는데 말이...야!! "

순간 기습적으로 그녀가 나에게 냉기를 뿜어냈다. 내가 몸을 급격하게 틀어 그녀가 뿜은 냉기를 피하고, 바로 검을 휘둘렀다. 어차피 죽을 정도의 상처를 입더라도 란이 있으니 치료가 가능하다.

" 윽. 네 녀석.. 이 몸이 죽으면 나뿐만 아니라, 공주도 죽는걸 모르나?! "

" 뭐, 죽는다면 어쩔 수 없지. "

" ... "

마녀가 이를 부드득- 간다. 아참, 그러면 암흑 제국의 1황녀는 마녀가 아니게 된 셈인가? 그렇다면 만약에 공주가 죽는다면, 네임드 캐릭터는 엘렌 하나로 줄어드는 셈이다.

물론 그녀를 구하는 왕자따위는 내 알바 아니다. 성을 전환하더라 하더라도 그것은 이 세계에서만 통용되는 것이지, 다른 게임으로 넘어간다면 성별은 바뀌지 않는다.

" 하지만, 죽일 생각은 없어. 네 년만 처리하면 되니까. "

" 후후후, 과연 그게 쉬울까? 이래뵈도 세계를 호령하던 여인네라서 말이지. "

" 마녀주제에. 입만 나불대지말고 덤벼! "

그녀는 이를 악물고 흑마나를 힘껏 모은다. 어제 죽였던 마족과는 질적으로 틀리다. 흑마법사가 이정도로 강해질 수도 있다니. 그래도 네임드 캐릭터이가 괜히 네임드는 아닌 모양이다. 이정도라면 란도 잘못하다간 한방에 저세상으로 갈지도 모른다.

" 죽어엇! "

흑마력이 꿈틀거리는 뱀처럼 나에게 달려든다. 그 속도 또한 엄청나서 내가 간신히 이리저리 피했지만, 그래도 모든 공격을 다 피할 순 없었다.

내가 만약 용사가 아니었다면, 그녀의 공격 한방에 그대로 시체가 되어 데스 나이트가 되었겠지만, 그래도 주신의 가호가 있었는지 그녀의 흑마력을 어느정도 버틸 순 있었다. 물론 계속 맞는다면 얘기는 틀려지지만.

" 주신이여! 저 마녀에게 신의 철퇴를 내려주소서. "

그 때, 누군가가 영창을 하면서 성스러운 빛을 쏟아냈다. 이렐린이 성력을 이용하여 나에게 달라붙는 흑마력을 제거하고, 마녀를 공격했다. 역시 흑마력은 성력에 굉장히 취약한 모습을 보이면서, 그대로 소멸해버렸다.

" 넌..! "

" 후후, 혹시나해서 데려온 나의 숨겨진 필살기지. "

마녀는 분하다는 듯이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성녀가 다시 한번 영창을 외면서 두 손을 마녀에게 뻗었다.

- 번쩍

빛의 기둥이 마녀를 꿰뚫고 지나간다. 아마 엄청난 타격을 받았으리라 생각된다. 혹시 흑마력때문에 공주의 몸이 붕괴된 것은 아니겠지? 죽지만 말아라- 하고 빌고 있을때, 나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 펼쳐졌다.

" 호호호, 이거 정말이군. 설마하고 긴장하긴 했는데 말이야. "

" 어째서. "

나보다 이렐린이 더 놀란 모양이다. 필시 마녀라고 하면, 성녀에겐 쪽도 못 쓰는 존재에 불과했다. 그랬기에 마녀가 나보다 더 강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이번 공격으로인해 그런 여유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 뭐야, 어째서. "

" 호호, 궁금해? 뭐, 마지막 가는 길이라 여기고 친절하게 설명해주지. "

마녀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면서 말한다.

" 이 몸의 정체가 뭔지 알아? "

" 설마. "

내 뇌리에 아주아주 상상하기 싫은 것이 떠오른다.

" 그래도 눈치는 빠르네. 그래, 그러면 내가 이 몸을 차지하려고 했던 이유도 알겠네? "

" 너는.. "

마녀는 씩 웃으며, 마지막 말을 내뱉는다.

" 이 몸은, 예전에 '성녀'라고 불렸던 몸이지. "

순간 절망이 우리들을 급습한다.

============================ 작품 후기 ============================

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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