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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름은 '김 태황(金 太滉)'. 할아버지는 영의정 좌(座)를 지내신 분이었고, 아버지는 과거에 합격하였으나 몇해 전에 병으로 돌아가셨다. 우리 집은 수도에서 열 손가락에 꼽히는 엄청난 재력가였는데, 대대손손 물려오는 땅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넓었고, 딸려오는 하인들만 해도 물경 백은 훌쩍 넘었다.
비록 요새는 예전만 못하다는 얘기가 많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수도 한양에서 무시못할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이 바로 지금 이 몸의 할아버지였다. 그는 글에 재능이 있던 아버지에게 상당히 기대를 가지고 있었지만, 병으로 죽은 뒤에 그 기대는 고스란히 내쪽으로 내려온 모양이다.
물론 지금 현재론 나는 아무런 재능도 없지만, 두고봐야할 일이다.
" 평양엔 무슨 일로 말이냐. "
아침을 간단히 끝내고 나는 그녀에게 평양으로 가겠다고 말했다. 물론 그 이유는 기녀가 된 '잠자는 공주'를 데려오기 위해서였지만, 당연히 내 이유를 말할 생각은 없었다.
일단 그녀의 처음 반응은 별로 신통치 못했다. 약간 인상을 쓰고 나를 바라보았는데, 납득할만한 이유가 없다면 가는 것은 무리일 것 같았다.
" 잠시 여행차 다녀오고 싶었기에.. "
" 여행? 후…. 내가 허락한다하더라도 아버님께서 반대하실 것이야. 더구나 지금은 과거 시험이 다가오지 않느냐? 시험을 보지 않을거면 조용히 몸을 수그리고 있거라. "
" 과거 시험이라 하셨습니까? "
" 관심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었더냐? "
" 그러하오나…. "
보아하니 할아버지의 허락이 없으면 평양은 꿈도 못 꿀 모양인가보다. 그렇다면 그녀에게서는 더 이상 일은 없다.
" 그러면 가보겠습니다. "
" 그러거라. 참, 그리고 방앗간댁 녀석들과는 더 이상 어울리지 말거라. 어디서 감히 상놈들이 양반들과 함께 어울린단 말이냐. "
" 알겠습니다. "
일단 내가 모르는 내용이 속속 나오니 귀담아 듣는 것이 좋았다. 방앗간댁 녀석들이라? 언제 한번 만나봐야할 듯 싶다. 물론 할아버지가 제일 첫번째지만.
' 꽉 막힌 사람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
조용히 그녀의 방에서 나오자 쨍쨍한 햇빛이 나를 반긴다. 벌써 해가 한참이나 떠오른 모양이다.
" 할아버지 방으로 안내해라. "
" 예, 도련님. "
나를 기다리고 있던 소년에게 말하자, 그는 공손히 머리를 숙이고 나를 안내한다. 갑자기 할아버지 방으로 안내하라는 말에 이상한 느낌을 받았는지 살짝 고개를 갸웃하기는 했지만, 그게 다였다. 얼마나 집이 넓었는지 한참을 걸어가서야 아담한 연못이 보이는 방앞에 도착했다.
할아버지라고 보이는 노인이 난초를 조심스레 헝겊으로 닦으면서 나를 힐긋 바라본다.
"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할아버지. "
" 무슨 일이냐, 황아. "
단정한 흰 복장에 곧게 기른 검은 수염이 인상적인 그는, 난의 잎파리를 닦는데 열중하고 있다.
" 할아버님께 허락받고 싶은 것이 있어서 찾아뵈었습니다. "
" 허락? "
그제서야 그는 몸을 살짝 고쳐앉고 나를 진지하게 바라본다.
" 네 녀석이 나에게 허락을 받는다? 그래, 어디 말해보거라. "
" 평양에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
" 평양? 거긴 왜? "
" 반드시 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한치의 흔들림도 없는 눈빛을 보여주었다. 그는 한참이나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주위에 있는 하인들을 향해 손짓했다.
" 다들 잠시 자리를 비키거라. "
" 예, 어르신. "
- 짹, 짹
이름모를 새가 운다. 잠시동안 나와 할아버지 사이에 심상찮은 기류가 감돌았다.
" 네 나이 올해로 몇이더냐. "
" 열 여섯이옵니다. "
" 너는 네 아비보다 그릇이 작다. "
" 어떻게 아버지와 저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
나의 말에 할아버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 무엇을 잘못 먹은게냐? 오늘따라 이상하구나. "
" 이젠 더 이상 기다릴 순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
" 무엇을? "
" 이 상황을 말입니다. 더불어 저 또한 말이지요. "
분명히 갑자기 변한 성격이 이상하다고 느낄 것이 분명하다. 더군다나 그의 말을 들어보면, 분명히 이 몸의 성격은 내성적이고 재능도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할아버지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던 것 같은데, 이젠 그것을 역전시킬 시간이다.
갑작스럽게 변한 것에 대해 합당하다고 생각하도록 만들기 위해선, 일부러 그런 식으로 행동했다고 보여주는 수 밖에 없다. 즉, 때를 기다리고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고.
" 좀 더 자세히 설명해봐라. "
" 더 이상 예전의 제 모습을 고수할 이유가 없다는 뜻이지요. "
" 그럼, 지금까지 보였던 모습이 모두 거짓이었다는 뜻이냐? "
" 완전히 그렇다고 할 순 없지만, 일단은 그렇습니다. "
그의 얼굴이 살짝 펴진다. 그리고 올라가던 입꼬리가 더욱 짙어진다.
" 방금 네 말에 대해 내가 화를 내어야겠지? 하지만 그러지 않겠다. 분명 그런 식으로 행동한 것에 대해 너의 이유가 있을터. "
" 물론 하늘같은 할아버지를 속일 마음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는 말이 있지요. 그것이 이유입니다. "
" 그것이 다냐? "
" 예. "
그리고 또 다시 우리 둘 사이에 한참이나 침묵이 자리잡았다. 그는 무언가 생각하고 있는지 내 두 눈을 바라본 채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갑자기 훗- 하고 웃음을 터트린다.
" 후하하하하하하. "
아주 즐거운 웃음소리다.
" 이거 내가 제대로 당했군. 내 눈을 이렇게 속일 줄이야. 예전에 자신만만했던 자신감이 여기서 이렇게 무너지는군. 하지만, 기분이 좋구나. "
다행이다. 그래도 자신의 가치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남자다. 아마도 고양이 새끼라고 생각했던 것이 호랑이 새끼인 것을 확인하니 기분이 좋아지는 모양이다.
" 아범은 영리한 아이였지. 하지만, 영리하기만 할뿐 영악하질 못했어.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영리한 것만으로는 부족해. "
" 그렇지요. 할아버지께서 제 마음을 알아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
" 고 놈, 참 물건이구만. "
그는 껄껄- 하고 웃으면서 계속 말을 잇는다.
" 그래, 평양에 일이 있단 말이지? "
" 예. 그리고 부탁이 하나 더 있습니다. "
" 말해보거라. "
나는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 입을 열었다.
" 폐하께서 총애했던, '장'씨 여인을 찾아주십시오. "
다행히 할아버지와의 일은 잘 해결되었다. 그는 아직 희빈이 되지 못한 '장'씨를 찾아주기로 약속했다. 나는 다시 한번 어머니에게 가서 할아버지께 허락을 받았다고 말씀드렸다. 그녀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 알겠다. 그렇다면, 몸 조심히 다녀와야한다. "
" 예, 어머니. "
나는 방을 나오려다가 다시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 어머니, 잠시 한번만 안아봐도 되겠습니까? "
" 뭐? 안는다고? "
" 예. 어머니의 품을 느껴본지 너무 오래된 것 같습니다. "
그녀는 약간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녀가 유별하다지만, 그래도 부모와 자식간이니 그리 거부감이 들진 않는 것 같다. 좋아, 이걸 좀 이용해봐야겠는데?
" 음, 어머니…, 사랑합니다. "
" 후후, 녀석도. "
나는 그녀를 한번 꽉 안았다. 손이 살짝 허리를 훑고 지나갔지만, 그녀는 그저그런 반응이다. 설마 내가 그녀에게 욕정을 품고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하고 있을테니까.
"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
" 그래. "
이번 일만 끝나면, 그녀도 나의 공략 대상일 뿐이다.
일단 춘향전의 네임드 캐릭터들은 총 6명. 그 중에 여자는 총 3명이었는데, 춘향이와 향단, 그리고 월매. 그녀들이 사는 곳은 전라북도 남원. 아직 그곳으로 가기엔 여기서 해결해야할 것들이 많다. 어차피 몽룡과 춘향이 만나는 시점은 지금으로부터 6년 후, 춘향이가 18세 되는 해이다.
' 아직 시간은 충분해. 이 곳에서의 일을 깔끔하게 끝마치고 남원으로 내려가는거야. '
책에서는 몽룡이가 일방적으로 춘향이에게 들이미는 것처럼 되어있다. 아마 몽룡은 양반의 자식이라는 것과, 춘향은 퇴기의 자식이라는 점때문이리라. 그렇다면 나는?
' 더 완벽하지. '
절대 몽룡에게 춘향을 내줄 생각은 없다. 아주 철저하게 뺏어서, 내 것으로 만들 생각이다. 그녀만? 향단이도 예외는 아니다.
' 그 전에 장희빈의 일도 해결해야겠지. '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듯이, 나는 말 꺼낸 김에 오늘 바로 출발할 준비를 했다. 나는 할아버지와 어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말을 탔다. 그래도 힘있는 가문의 자제였기에 따라 붙는 인원은 7명이나 되었다.
먼저 나와 가장 먼저 만났던 소년 몸종과 보디가드 역할인 하인들 4명, 그리고 여자 몸종 2명. 마침 평양에 할아버지의 형제분 한명이 계신다고 하시니, 잠시간 그 집에서 신세를 지면 된다고 하셨다.
" 네 이름이 뭐였지? "
" 그저 '장(長)'이라고 불러주십시오. "
내가 이름을 묻는 것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할게 틀림없었으나, 그에 대해서 불평할 간담은 없는 것 같다. 어차피 조선시대에 상놈은 그저 양반들의 비위만 상하지 않게 하면 되니까.
" 평양까지 얼마나 걸리지? "
" 넉넉히 잡으면 일주일정도 걸릴 듯 싶습니다. "
" 그래? 그럼 적어도 일주일 안으로는 도착한다는 얘기지? "
그동안 풍경이나 보면서 즐기면 될 듯 싶다. 어차피 그 사이엔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까. 여종 두명에게 눈이 슬쩍 갔지만, 보는 눈이 너무 많았기에 터치할 수가 없었다. 그저 빨리 시간이 지나 평양에 도착하기를 바라는 수 밖에.
우리는 딱 6일만에 평양에 도착했다. 형형색색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이름모를 모자를 비스듬히 쓴 기생들이 담배를 물고 나를 요염하게 바라보면서 지나간다.
몇몇은 술에 취해 기생들의 품에 안긴 채로 주정을 부리고, 또 다른 몇몇은 간이 도박에 심취해 시간가는 줄을 모른다.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평양은 상당히 주루와 도박에 깊은 관여를 한 도시인 모양이다. 그렇기에 괜히 평양 기생이 모든 기생 중에 으뜸이란 소리가 나오는 것이 아니리라.
' 여기서 공주를 찾아야한단 말이지? '
딱봐도 기생집이 수십 개는 넘을 것 같은데 말이지. 아마 머리를 써야할 것 같다. 그래도 내 소환수니까 다른 기생과는 다르게 특출날 것이다.
" 일단 작은 할아버지 댁으로 가자. "
" 예, 도련님. "
장은 내가 타고 있는 말을 몰고 작은 할아버지 댁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은 평양에서 권세있는 유력한 가문이었는데 갑작스러운 나의 방문에 놀란 모양이다.
" 어이구, 장손이 왔구나. "
작은 할아버지는 굉장히 기뻐하면서 나를 맞이했다. 안타깝게도 손자가 없어서 나를 굉장히 어여삐 여겨주는 모양이다. 손녀만 두 명이었는데, 그녀들은 나를 보며 공손히 절을 올린다. 심지어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사촌도 말을 함부로 낮추지 않았다. 촌수로만 따지면 나보다 위일테지만, 장손의 힘이랄까.
" 그런데 어쩐 일로 온 것이냐? "
" 잠시 평양에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조금 신세를 질 것 같습니다. "
" 아니다, 아니야. 언제든지 와도 괜찮다. 신세는 무슨 신세. 원하는 만큼 지내거라. "
" 할아버지께서 안부를 전해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
" 그래, 형님께선 건강하시고? "
" 네, 정정하십니다. "
우리들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 뒤에 상을 나란히 하여 점심을 먹었다. 일단 내가 일을 시작하려면 저녁이 지나야할테니, 그 전에는 조용히 집안에서 지내야할 것 같다.
' 그나저나, 걔들 참 예쁘던데, 흐흐. '
작은 할아버지의 두 손녀. 아직 마땅한 혼처가 없어 아직 둘다 혼인을 하지 못했다고 하는데, 오밀조밀하게 참 예쁘게 생겼다. 물론 둘째가 상당히 나에게 관심이 있어 보였는데, 아마 이 잘생긴 외모가 한 몫한 모양이다.
조심스럽게 다뤄야겠지? 조선 시대에서 처녀란 굉장히 의미가 깊고 중요한 것이다. 그렇기에 함부로 나댔다가는 큰 코 다칠 수도 있기에, 몸을 조심히 놀려야한다. 더군다나 이런 명문가 집안의 여식이라면 말할 나위도 없다.
' 이거 판타지랑 다르게 상당히 스릴있는데? '
나는 긴장감을 삼키면서 슬며시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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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돌아왔습니다!
자~알 놀다 왔습니다, 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