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 으흠. "
" 어이쿠, 어서오십쇼. "
어느 호화찬란한 기생집으로 들어가자 대문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인이 허리를 숙이고 인사를 건넨다. 나는 대충 손짓으로 화답한 뒤에, 그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 여기서 가장 뛰어난 기생이 누구냐. "
" 당연히 월화(月化)입죠. 그런데, 워낙 기다리는 손님들이 많아서. "
내가 품속에서 손톱만한 은을 꺼내 그의 품속에 넣었다. 하인은 주위를 한번 휙휙 둘러보고 허리를 더욱 깊이 숙이며 큰소리로 외친다.
" 아이쿠, 이리로 오십시오. "
역시 아랫것들을 놀리는 데에는 뇌물만한 것이 없다.
" 여기서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이봐, 향매를 데려와! "
그는 지나가던 하인에게 소리쳤다. 잠시 후에, 붉은 치마를 곱게 차려입은 처녀가 황급히 발을 놀리면서 나에게 다가온다. 꽤 미색이 곱다.
" 도련님 오셨군요. 이리로 오세요. "
향매라는 처녀는 내 앞에 걸어가면서 모양좋은 엉덩이를 씰룩거린다. 잠자는 공주를 찾기위해 지하통로에 갈때부터 지금까지 여자를 품지 못했기 때문에, 사타구니에서 상당히 강렬한 기운이 올라왔다. 하지만, 발정난 개마냥 몸을 놀리면 나에겐 좋을 것이 없다.
더군다나 고고한 기생들을 넘어뜨릴려면 더더욱 몸가짐을 조심해야한다.
" 여기로 올라오세요. 더 오실 분은 없으세요? "
" 혼자왔소. 여기서 제일가는 기생이 '월화'라고 하던데. "
" 월화는 조금 힘들 것 같네요. 다른 애들은 어떠세요? 초향이도 괜찮고, 운매도 좋아요. "
" 아니, 월화로 해주시오. "
이번에 내 품에서 나온 것은 작은 금붙이였다. 비록 손톱만한 금이었지만, 금은 금이다. 은이 아니라 금은 처음받아본 것인지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 자.. 잠시 기다리세요. "
처녀는 품에 금을 황급히 숨기고 나는 듯이 어디론가 달려간다. 나는 그녀가 안내해준 방에 들어가 촛불을 켜고 조용히 기다렸다. 몇몇 하인들이 음식 상을 가져와 방안에 차려놓는다. 혼자 먹기엔 너무 많다. 하지만, 내 목적이 음식은 아니니까.
일각(15분)이 한참을 지났을 무렵, 드디어 방문앞에 누군가의 음영이 어른거린다.
" 들어가도 되겠사옵니까. "
" 누구지? "
" 월화라고 하옵니다. "
" 들어와. "
나는 살짝 긴장한채 술을 한모금 마시면서 방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문이 스르르- 열리고, 월화가 들어온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긴장이 풀린다. 잠자는 공주가 아니다. 그녀 역시 나를 처음보는 듯한 모습이다. 아마 그녀가 잠자는 공주였다면 나를 보는 순간, 충격먹은 모습이겠지?
" 이리 오거라. "
" 예. "
그래도 이곳에서 가장 뛰어난 기생이라는 명함때문인지, 보기 흔치 않은 미모다. 아니, 이정도 미모로 고작 기생이나 한다는 것이 우스울 따름이다.
" 이름이 월화라고 했나? "
" 그렇습니다. "
" 나이는? "
" 올해 열아홉이옵니다. "
그녀의 기품은 평민이나 천민에게서 나올법한 것이 아니다. 아마 몰락한 양반가의 여식이었던 모양이다.
" 안타깝군. "
" 네? "
갑작스러운 나의 말에 월화가 목소리를 높인다.
" 여기서 썩기엔 네가 아깝다는 뜻이지. 물론 그대는 내가 찾는 여인이 아니지만, 좀처럼 보기 힘든 여자란 것은 확실하지. "
" … 그렇습니까. "
" 어차피 오늘은 다른 곳을 둘러보기 늦은 것 같고, 같이 술이나 하면서 얘기나 하지. 물어볼 것도 있고 말이야. "
나는 그녀에게 잔을 건네 술을 한잔 부었다. 그녀는 술잔을 받은 뒤에 몸을 살짝 돌려 한번에 입에 털어넣는다.
" 사실 말이지, 나는 어떤 여인을 찾고 있는 중이야. 내 영혼의 짝이라고 할까. 안타깝게도 어렸을 때 헤어졌는데, 평양 기생이 되었다는 말만 들었지. "
" … 여기에 있는 기생들의 수만 해도 엄청납니다. "
" 그래. 그래서 최고의 기생들만 골라서 만날려고 해. 사실 오늘 너와 만난 것이 첫번째지만. 얼마가 걸리든지 꼭 찾아낼 생각이야. "
순간 그녀의 눈이 부러움에 가득찬다.
" …그렇습니까. "
" 그녀는 분명히 기생으로써도 최고의 지위에 있을 것이야. 장담할 수 있어. 그래서 말인데, 자네가 알고 있는 기생이 있는가? "
물론 기생이라고 물어봤지만, '최고의'라는 말이 숨겨져있음은 누가 들어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잠시 곰곰하게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앵두같은 입을 벌린다.
" 이곳 평양에서 가장 유명한 기생집이 두 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월화루'라고 하고, 다른 하나는 '난향루'라고 합니다. "
" 그래? "
" 이름값에 못지않게 기생들의 몸값도 상상을 초월하지요. 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습니다. "
" … 너의 가치를 낮게 보지마. 만약 알고 있었다면, 금덩이 하나를 주었을 것이다. "
월화는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흔든다.
" 저는 그 정도 가치는 없습니다. 고작해봤자 노래나 몇 가락 할 수 있는 것 정도 뿐이지요. "
" 그런데 어쩌다가 이 일을 하게 되었지? "
" … 이야기하자면 길지만, 제 스스로 이곳에 찾아온 것 입니다. "
" 스스로? "
스스로라니, 이건 생각하지 못한 시나리오다.
" 사실, 예전 제가 약혼했던 분께서 병으로 그만…,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당연히 여인의 몸으로 두 번의 약혼은 말도 안되는 일이지요. 아버지께서는 스스로 저를 내치셨습니다. "
" 말도 안되는군. "
" 의지할 곳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이곳에 오게 된 것입니다. "
" 결혼도 아니고, 약혼이었는데, 널 내쳤다는 말이냐? "
" … 어쩔 수 없다고 이해하고 있습..! "
나는 그녀의 손을 왈칵 잡아서 그녀의 시선을 올려 내 눈을 바라보게 했다.
" 아니.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지. 이건 말도 안되는 일이야. 아버지가 누구시냐. "
" … 말씀 드릴 수 없습니다. 가문을 욕되게 할 수는 없…! "
" 너를 소중히 여겨라. 인간은 낮고 높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남자이고 여자이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딸이면 어떻고 아들이면 어떠냐. "
이런 말을 하는 양반은 지금껏 만나보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연히 상놈보다 양반이 높고, 딸보다 아들이 귀하다고 여기는 것이 양반이니까. 그녀는 단순히 자신의 호감을 사기위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인지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하지만, 현대시대에 사는 내 말은 진심이었고, 그에 따라서 내 눈빛도 조금의 흐림도 없었다.
" 너무 밤이 늦은 것 같군. 오늘은 즐거웠다. "
" … 혹시. "
" ? "
내가 방을 나가려고 하자 그녀가 입을 연다.
" … 혹시 또 오신다면. "
" … 그래, 꼭 한번 다시 들르지. "
나는 한번 빙긋 웃고 방을 나간다. 일단 그녀의 마음을 상당히 사로잡은 것 같다. 오늘밤에 만리장성을 만드는 것은 무리일 것 같으나, 다음번에는 충분히 일을 성사시킬 수 있을 것이다.
' 크크크, 어차피 내 욕구를 풀만한 여자도 한 명 필요했으니까. '
그것을 떠나서, 지금 내 머릿속엔 상당한 계획이 하나 빙글빙글 돌아가는 중이었다.
조선을 한손에 쥐어잡을, 그런 계획.
" 도련님, 진지드십시오. "
이른 아침, 나는 술때문에 띵- 한 머리를 부여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밖을 향해 들어와라고 말하자, 누군가가 조심히 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온다. 익숙한 얼굴이다.
" 음? 아니, 이리 주십시오. "
" 아…, 아닙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
그녀는 작은 할아버지의 둘째 손녀였다. 아마도 내가 귀한 손이었기에 손녀들에게 직접 상을 차리도록 한 모양이다. 그녀는 내 앞에 상을 내려놓고 문옆에 다소곳이 앉았다.
" 천천히 드십시오. "
" 알겠습니다. 맛있게 먹겠습니다. "
" 말씀을 낮춰주세요, 듣는 제가 거북스럽습니다. "
" 아니, 그럴 수는…. "
그녀는 고개를 돌린채 손을 꼼지락 거리면서 입술을 몇번 핥는다.
"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
" 말씀을 낮춰주세요, 제발. "
" 흠, 이름이 어떻게 되지? "
" … '연지'라 합니다. "
연지라, 예쁜 이름이다.
" 참 맛있군. 직접 한거야? "
" … 네, 감사합니다. "
나는 국을 떠먹으면서 그녀를 흘깃 쳐다본다. 순간 그녀와 내 눈이 마주친다. 연지는 깜짝 놀라며 황급히 시선을 돌렸지만, 그녀의 붉은 두 볼은 감출 수가 없었다.
" 밖에 아무도 없지? "
" 네? 네…. "
나는 상을 살짝 옆으로 치우고 그녀에게 조심스레 다가갔다. 그녀는 깜짝 놀란 얼굴로 나를 올려다본다.
" 왜…? "
내가 그녀의 손을 덥썩 잡자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손을 빼려고 한다. 아무리 가족이라도 아버지가 딸의 손을 잡는 것도 거의 금기시 되는 시대인데, 하물며 내가 그녀의 손을 잡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다.
" 놔… 놔주세요. "
" 왜 그래야하지? "
" 전 도련님의…. "
" 널 좋아하는 것도 안되는거야? "
그녀의 두 눈이 사정없이 흔들린다. 물론 멀찍이서 남자들도 많이 보았고, 몇번 말도 해본 적도 있다. 하지만, 나처럼 잘 생기고 심지어 신분까지 좋은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와 그녀는 이어질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이 문제였지만.
어쨌든 그녀에겐 내가 마치 왕자님처럼 느껴진 모양이다.
" 하지만 전…. "
" 알고 있어. 하지만, 아무도 안보잖아? 밖에는 아무도 없고. "
" 그치만. "
" 쉿, 괜찮아. 이정도는 아무도 몰라. "
나는 천천히 그녀의 손을 끌어당겼다. 아무도 들을 수 없고, 보지 않는다- 라는 말에 그녀가 긴장을 서서히 풀고 있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의 눈이 없다면, 그녀도 굳이 자신의 마음을 속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것 같다.
" 참 곱네. "
" … 도련님. "
남정네와 이런 식으로 행동한 적은 한번도 없었겠지만, 나쁜 기분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쓱- 쓰다듬다가 천천히 품에 안았다. 그것만큼은 아직 받아들일 수 없는지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나에게 벗어난다.
" 꺗. 이… 이건. "
" 뭐, 아직 이것까진 무리인 모양이네. "
" 마… 마음의 준비가. "
그녀는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한다. 어차피 밥도 먹고 싶은 생각이 없었으니, 나는 그녀에게 상을 가지고 나가라고 말했다. 그녀는 한숨을 후- 하고 내쉬며 상을 들고 내 방에서 나간다. 물론 나가기 전에 날 한번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긴 했지만, 그것뿐이다.
양반가의 자제가 대낮부터 기생집을 드나들 순 없으니, 낮에는 다른 일을 할 생각이었다. 어제 내가 생각한 계획을 이루기 위해선, 다른 사람이 필요하다. 나의 더러운 일도 도맡아 해줄 수 있는,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
' 방앗간댁 녀석들을 나중에 만나봐야겠군. '
믿을 수 있는지 없는지는 봐야 알겠지만, 되도록이면 믿을만한 녀석들이면 좋겠다. 그래야 사람을 찾는 데에 시간과 돈, 그리고 힘이 덜 들어가기 때문에.
" 거기 장이 있느냐. "
" 예, 도련님. "
내 말을 들은 장이 황급히 뛰어온다. 아직 앳된 청년이라 그런지 어제 평양에 도착했는데도 힘이 팔팔한 모양이다. 나는 말을 타고 왔기에 괜찮지만.
" 이곳에 유명한 선생이 한분 계시다지? "
" 예, '허질' 선생께서 평양에 머무르고 계시지요. "
" 그리로 가자. "
" 네, 말을 준비하겠습니다. "
그래도 평양에 기생을 꼬시러 왔다고 할아버지께 얘기할 순 없으니, 보여줄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허질' 선생이든 '하질' 선생이든 중요한 것이 아니다. 과거? 친다고 해도 합격할 가능성도 없었을 뿐 더러, 그에 대해서 시간을 낭비하고픈 생각도 없다.
그리하지 않아도, 모든 일은 충분히 해낼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