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5화 (83/150)

85

다음날, 나는 아침 해가 뜨자마자 씻고 대충 배를 채운 뒤에 곧바로 허질 선생의 집으로 출발했다. 허질 선생의 처가 마루에서 무언가를 깔아놓고 손질하고 있다. 방안에서는 조곤조곤 목소리가 흘러나왔는데, 허질 선생의 말과 그의 딸의 대답이다.

" 어머. "

" 잠시 신세좀 지겠습니다. "

" 아.. 아니에요. 저기, 안에 기척을 넣을까요? "

" 아닙니다. 이미 알고 있을 겁니다. "

그 증거로 허질 선생의 말과 딸의 대답이 잠시간 들리지 않고 있었다. 곧바로 다시 들리긴 했지만, 그들은 내가 방문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어제처럼 마당에 놓인 평상에 정좌세로 앉아서 저멀리 푸르른 산을 바라보았다. 산 풍경을 한없이 바라보다가, 천천히 생각에 잠겼다. 사실 허질 선생을 만나는 것은 할아버지께 조그마한 변명거리라도 만들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렇게 된다면 오기가 생기는 법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의 인정을 받을 작정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날이 점점 어두워지더니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장이 놀라서 나에게 뛰어와 얼른 돌아가야된다고 재촉했지만, 나는 이번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 기다릴 것이다. 너는 처마끝에 가서 비를 피해라. "

" 도련님, 안됩니다요. 비에 맞으시면 몸이 상하십니다. "

" 두 말 하지 않겠다. "

내가 그를 찌릿- 노려보며 말하자 장은 하는 수 없이 내 옆에 털썩 주저앉는다. 자신의 주인이 비를 맞는데, 몸종이 비를 피할 순 없는 법이다. 그나마 말이라도 비를 피하게 하기 위해서, 큰 나무 밑에 세워두었다.

- 후두두둑

비가 한 방울씩 오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장댓비가 되어 쏟아진다. 허질 선생은 딸의 글공부가 끝난 뒤에 한번도 나오지 않았기에, 아마도 내가 비를 피해 가버렸다고 생각할 것이다.

문은 꼭 닫힌채 한참이나 열리지 않는다. 그러자 더더욱 오기가 생긴다. 이미 옷은 흠쩍 젖었고, 속살까지 찬 기운이 파고 들었다. 하지만, 아직은 버틸만 하다.

- 끼익

아무런 생각없이 비를 하염없이 맞고 있는데,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허질 선생이다.

" 지금 뭐하는 짓이오? 당장 돌아가시오! "

" 선생의 말을 듣고자 합니다. "

" 지금 장난치시오? 양반이라는 자가 지금 그게 무슨 꼴이오?! "

" 고작 양반이라고 해서, 비를 맞지 말란 법은 없잖습니까. "

그는 나를 잠시 물끄러미 쳐다본다. 나도 지지않고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 오늘은 돌아가시오. 그대가 병이라도 걸린다면, 내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오. "

" 그리 말한다면, 돌아가겠습니다. 하지만, 내일도 오겠습니다. "

내 말에 가장 기뻐한 것은 옆에서 나와 같이 비를 맞던 장이었다. 그는 황급히 말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대문 앞에 끌고 왔다. 말도 이런 장댓비를 맞기 싫어하는 지 발버둥을 치고 있지만, 내가 그 위에 올라타자 온순해진다.

' 어디로 가지? '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기엔, 내 꼴이 정말 말이 아니다. 이건 양반이든 평민이든 상관없이 물에 빠진 생쥐꼴이니, 웃기지 않을 리가 없다.

' 그녀한테 가볼까. '

이곳에 와서 제일 먼저 들렀던 기생집. 그곳에서 가장 유명한 기생이었던 '월화', 그녀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비를 뚫고 한참을 걸어 기생집 앞에 도착했다.

장이 황급히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는다. 아마 이런 빗속에 누군가가 찾아올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다.

장이 한참이나 문을 두들기고 난 뒤에야, 누군가가 문을 열고 모습을 비춘다.

" 누구십니까? "

" 잠시 비를 피하러 왔습니다. "

" 어이쿠, 들어오십시오. "

그는 나와 장의 꼴을 한번 보더니 얼른 문을 열었다. 그제서야 비를 피한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면서 픽- 웃음이 터진다.

" 어허, 이놈. 감히 날 보고 웃어? 크크크. "

" 헤헤, 도련님 정말 물속에 풍덩 빠진 것 같습니다. "

우리가 두런두런 얘기를 나눌 때, 누군가가 사락사락- 하는 소리를 내면서 다가온다. 치마폭이 끌리는 소리다.

" 어머, 도련님? "

내가 전에 금붙이를 주었던 여인네다. 이곳을 관리하는 여자겠지.

" 길을 가다가 갑자기 비가 와서 이리 흠쩍 젖었소. "

" 아이고, 이를 어째. 잠시 옷을 챙기겠습니다. "

" 그리고 월화도 불러주실 수 있소? 내 사례는 넉넉히 하지. "

" 여부가 있겠습니까. "

그녀는 활짝 미소를 지으며 나를 안내했다. 장은 아마도 하인들이 머무는 곳에 갈 것이니 그리 큰 문제는 없다. 여인은 어디론가 나를 휘적휘적 데리고 가더니, 예쁘게 치장된 문앞에 서서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한다.

" 누구십니까? "

" 나다. "

" 어머. "

문이 스르르 열렸는데, 그 때완 다르게 청순하게 꾸민 그녀의 모습이 보인다. 그녀는 여인을 한번 본 뒤에, 고개를 돌려 나를 응시한다. 비에 완전히 흠뻑 젖은 나를 바라보면서 그녀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 도련님? "

" 도련님을 잠시 모시고 있거라. 괜찮겠지? "

" 무… 물론입니다. 누추하지만, 어서 들어오십시오. "

나는 그녀를 바라보면서 한번 싱긋 웃었다.

" 고맙소. 잠시 실례를 해야할 듯 하군요. "

" 말씀을 낮춰주세요. "

" 저는 옷을 가지러 가보겠습니다. "

나를 안내한 여인은 내 몸치수를 눈어림으로 재고 있는지 위아래를 살짝 훑어보고 자리를 벗어났다. 나는 월화의 진심어린 안내를 받으며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다. 한 사람이 아담하게 사용할 정도의 방에 은은한 향기가 감돌고 있었다.

" 바닥이 젖어서 미안하군요. "

" 아닙니다. 그리고 계속 그리 말씀하시면, 제가 너무 거북합니다. "

" 알겠어. 그건 그렇고, 이렇게 갑작스럽게 찾아와서 미안하군. "

" 아마 도련님께서 갑작스럽게 비를 맞으신 모양인 것 같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

원래 같았으면 처녀의 방에 남자가 찾아간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었지만, 내가 완전히 흠뻑 젖은 것을 보니 차마 거절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물론 비어있는 방도 있기야 하겠지만, 이번에 들른 것은 기생집을 방문한 손님으로써가 아니었기에 월화의 방에 들른 것이다.

" 그나저나, 여인의 방이라는 것이 이렇게 생겼군. "

" 부… 부끄럽습니다. "

나는 그녀의 방을 둘러보다가(물론 예의에 벗어난 행동이지만) 어느 한 지점에 시선이 멈췄다. 비가 적적히 오는 날이라 손님도 드물고하니 잠시 한시를 적고 있었던 모양이다. 내 시선을 알아차린 그녀가 살짝 부끄러워하면서 시를 적었던 종이를 둘둘 말아 넣는다.

" 그… 그냥 적어본 것이라…. "

" 한번 봐도 되겠지? "

" 그게…. "

그녀는 안절부절하다가 나의 진지한 눈빛에 하는 수 없다는 얼굴로 종이를 건넨다. 나는 종이를 펴서 그녀가 적은 한시를 천천히 읽었다. 이래뵈도 어렸을 때부터 영재 교육을 했었기에, 한문이나 한시를 드문드문 읽을 정도는 되었다. 완벽히 해석하기엔 무리겠지만, 드문드문이라도 뜻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랄까.

' 호오. '

내가 종이에서 시선을 떼 그녀를 흘깃 바라보았는데, 월화는 부끄러웠는지 고개를 돌린채 손가락을 꼼지락대고 있었다.

' 대충 무슨 이야기인지는 알겠군. 그리운 임에 대한 연정이라. '

이렇게 된다면, 나도 한수 써야할 타이밍이다. 어차피 이럴 때를 대비하여 몇몇 한시를 외워두었는데 역시 요긴하게 쓰일 것이라 생각했다.

" 종이와 붓을 써도 되겠지? "

" 네? "

" 나도 한 수 써볼까 싶어서 말이야. "

" 여… 여기. "

나는 그녀가 앉았던 상 앞으로 다가가 정좌세로 앉았다. 그리고 붓에 먹을 묻히고 천천히 종이에 한자를 한 글자씩 적어나갔다.

' 크크크, 그래도 어렸을 때부터 서예를 공부해왔던 것이 여기서 써먹히는군. '

近來安否問如何(근래안부문여하)月到紗窓妾恨多(월도사창첩한다)若使夢魂行有跡(약사몽혼행유적)門前石路半成沙(문전석로반성사)

이옥봉의 문집인 옥봉집에 실려있는 한시 중의 하나였다. 춘향전을 시작하기 전에, 혹시 모를 것을 대비해 한시 몇개를 외워두었는데, 정말 잘한 일인 것 같았다. 물론 게임을 잠시 정지시키고 외운 뒤에 적어도 되지만, 괜히 이런 분위기를 끊고 싶지가 않으니까.

" 당신에게 선물하겠소. "

" 이건…. "

그녀는 한시를 천천히 읽더니 애틋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 그…녀를 그리워하시는 건가요? "

" 물론 그리워하지. 하지만, 이건 당신에 대한 선물이오. "

" 감사히… 받겠습니다. "

월화는 내가 건넨 종이를 공손히 받아 장농 위에 올려놓는다. 때마침 아까 옷을 가지러 갔던 여인이 도착했다.

" 도련님, 옷을 가지고 왔습니다. "

" 내가 가지러 가겠어. 기다려. "

나는 방을 나와 옷을 가지고 온 여인을 마주보았다.

" 여기…. "

" 수고했소. 자, 받으시오. "

나는 금붙이를 무려 3개나 꺼내 그녀의 손에 넣었다.

" 오늘은 내가 월화와 지내겠소. 혹시 누군가가 그녀를 찾는다해도… 알겠지요? "

" 아이구, 여부가 있겠습니까. 편안히 있다가 가십시오. "

지금 당장 치마를 올려서 엉덩이를 내밀라고 해도 기꺼이 할 것처럼 그녀는 내 앞에서 살살 녹았다. 금붙이 3개는 그녀가 살아생전 처음으로 받아본 거금이었다.

" 그럼 가보시오. "

" 예예, 도련님. "

그녀가 내 눈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역시 금붙이 3개의 위력은 어마어마하다.

" 옷을 가지고 왔어. "

"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

월화는 얼굴을 살풋 붉히고 나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 그러면 고맙고. "

나는 푹 젖어있는 옷을 하나씩 벗었다. 이름은 모르지만 어찌저찌 대충 입은 옷들이었는데, 얼마나 젖었는지 속살까지 물로 범벅이었다.

" 닦아드리겠습니다. "

그녀는 천 몇 개를 꺼내 물기가 있는 내몸을 천천히 닦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내 사타구니까지 내려왔는데,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면서 그곳을 피했다.

" 거긴 왜 닦지 않지? "

내가 장난끼가 담긴 표정으로 히죽- 웃으면서 물었지만, 그녀는 얼굴만 붉힌채 대꾸하지 않고 묵묵히 다리를 닦았다. 아마 그곳은 내가 스스로 닦아라는 의미인 것 같았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얘기가 틀리겠지?

" 어멋! "

나는 물에 젖은 속옷을 확 벗어버렸다. 그녀의 눈앞에 거뭇거뭇한 털과 남자의 상징이 모습을 보이자 황급히 눈을 두 손으로 막으며 돌아선다.

" 이것도 다 갈아입어야하는데, 도와준다고 했지? "

" 도… 도련님! "

그녀가 당황한 음성으로 소리를 지른다.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눈을 가린 손을 붙잡고 천천히 내렸다.

" 아까 네가 적은 한시… 다 알고 있어. "

" 저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

" 지금이 아니면, 너에게 내 온전한 마음을 줄 수가 없어. 그녀를 찾는다면, 그만큼 내 마음은 그녀에게 가버릴테니까. "

" 도련님…. "

그제서야 그녀의 저항이 서서히 약해진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한번 바라보고 손으로 볼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 손을 천천히 내려 그녀의 옷고름을 풀었다. 사르륵-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녀의 가장 바깥에 있던 저고리가 벗겨진다. 다행히 전처럼 옷을 몇겹이나 입고 있지 않았기에, 내가 벗기기가 매우 수월했다.

" 아름다워, 월화. "

" … 부끄럽습니다. "

" 널 만나게 된 것은 나의 천운이야. "

그녀의 웃옷을 전부 벗기자, 아담한 유실이 먹어달라고 파르르 떨리며 모습을 드러낸다. 나는 그녀의 목부터 혀로 핥아내리면서 손가락에 유실을 끼워넣고 살살 돌렸다.

" 으읏! "

그녀의 두 속눈썹이 두려움으로 파르르 떨린다. 아마 오늘 파과의 고통이 다가온다고 생각하니 무서운 모양이다. 하지만, 이런 것쯤은 내 애무로 얼마든지 감쇠시킬 수 있다.

" 연모한다, 월화. "

" 흣. "

그녀의 떨림이 차츰 줄어든다. 애틋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럽다.

" 도련님을… 처음 보았을 때… 저에게 무언가 왔습니다. 그것이 연모의 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이것이 운명이겠지요? "

"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널 보게 된 것은 우연이었지만, 우연을 가장한 운명이었겠지. "

우리 두 명의 몸이 서로 휘감겼다.

빗소리가 더욱 맑게 우리들 귓속을 파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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