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7화 (85/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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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직히 말한다면, 내 생각과 그리 틀리지는 않구려. 나도 오랜 세월동안 사서삼경을 계속 연구하고 공부했지만, 항상 걸리는 하나가 있었소. 주자학의 한계겠지요. "

"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백성들의 삶은 어떨까- 하는 물음이 없다는 것이지요. "

" 전혀 없는 것은 아니오. 하지만, 그에 대한 양은 매우 부족한 실정이지요. "

그 때, 갑자기 허질의 딸이 나를 바라보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그러면, 그에 대한 해결책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

" 모든 백성들을 위할 순 없어도, 대부분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있습니다. "

" 그것이 무엇이옵니까. "

나는 잠시 대답을 하려다가 흘깃 허질 선생을 바라보았는데, 자신의 딸에 대한 자부심이 담긴 얼굴이었다. 허질 선생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는 딸바보인 모양이다.

" 실질적 이치가 담긴 학문에 대한 것입니다. 이것을 저는 실학이라고 부릅니다만, 어디까지나 구상만 한 것이라 그리 장황하진 않습니다. "

" 대충이라도 얘기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

" 뭐, 못할 것은 없지요. "

나는 잔에 담긴 술을 한모금 마셔서 목을 축이고, 허질의 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물론 임진왜란이 지나고 난 후에도 실학이라는 학문이 생겨나지만, 나의 실학은 그것과 완전히 똑같은 것은 아니다. 물론 궤를 같이 하고 있긴 하지만, 나의 실학은 내 색깔을 조금 더 입혀놓은 것이랄까.

" 나라는 백성이 있어야하고, 백성은 나라가 있어야합니다. 그것은 맹자든 공자든 할 것없이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이치지요. "

" 그렇습니다. "

" 우리들이 생각해야할 것은 백성입니다. 그렇다면, 백성은 무엇이 가장 필요할까요. "

" 음식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

나는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 물론 그것도 필요합니다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게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땅입니다. "

" 땅…? "

" 자신만의 소유지인 땅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

" 아…! "

그녀는 무언가 알았다는 듯이 탄성을 지른다. 허질 선생도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정도 공부가 된 사람들이 내 말에 숨어있는 뜻을 모를리가 없었다.

" 그렇지요. 대부분의 농민들은 모두 소작을 짓는 사람들일터니. 그에 대한 소작비도 만만치가 않을 겁니다. "

" 뿐만 아니라,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양도 매우 부족하지요. 만일 그들이 스스로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된다면, 나라의 경제는 조금 더 활성화시킬 수 있고, 결국엔 나라와 백성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일입니다. "

" 하지만, 땅을 소유하고 있는 양반들이 그것을 찬성할리가 없잖소? "

" 땅은 거기 말고도 무수히 많지요. 나라가 직접 소유한 땅 말입니다. "

하지만, 허질 선생은 그것에 대해 완전히 의문이 풀린 얼굴은 아니었다.

" 하지만, 나라가 그것을 무상으로 내놓는다면 큰 손해를 보게 될 것이오. "

"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바로, 일정 지급료를 받도록 하는 것이지요. 단, 정해놓은 금액 이상을 회수하고 난 뒤에는 그 땅의 주인은 이제 그 농부가 되는 것입니다. "

" 호! "

허질 선생이 무릎을 탁- 치면서 탄성음을 내뱉었다.

" 좋은 방법이로군. "

" 그렇습니다. 어차피 놀고 있는 땅을 농부들에게 빌려주어, 일정 금액을 받고 팔면 그만큼 그들은 더욱 열심히 일할테고 나라에는 돈이 생길겁니다. 그 후에는 그 토지에 대해서 일정 세금만 걷는다면,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은 국고가 마련될 것입니다. "

" 하지만, 그에 대해서도 문제점이 있습니다. "

허질의 딸이 문제를 제기했다.

" 소작을 시키는 양반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창고를 채워주는 농민들이 전부 사라진다면, 양반들이 크게 반발하고 나설 겁니다. "

" 그것은 자연스럽게 해결됩니다. "

" 자연…스럽게… 말입니까? "

" 네. 일단 그런식으로 토지를 갖게된 농민이라고 해도, 그리 많은 토지를 가지지는 못합니다. 물론 자기 가족이 먹고 살만큼은 되겠지만, 사람은 모두 욕심이 있기 마련이지요. 여분의 돈을 더 벌고 싶어하는 것 말입니다. "

그녀는 나의 대답을 더 원하는 표정이었다.

" 계속 말씀해주십시오. "

" 양반들은 자신의 토지를 놀게하고 싶은 생각은 없을 겁니다. 즉, 소작비를 조금 덜 걷더라도 누군가가 자신의 토지를 이용해주길 바라는 것이죠. 비록 자신의 이득이 조금 줄어들겠지만, 없는 것보단 나으니깐. "

" 아! "

" 그것에 만족한 농민들은 여분의 곡식을 더 얻기위해서 소작을 시작할 겁니다. 물론 그만큼 인구도 많아야할테니, 나라에선 인구 증산 장려책을 펼쳐야겠지요. "

" 이건…. "

비록 중간중간에 허점이 있었지만, 나중에 천천히 보완하면 충분히 가능성있는 얘기였다. 양반들의 줄어든 소작비는, 세금을 조금 낮춰주는 것으로 대체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아무도 손해를 보지않는, 완전히 윈윈 게임이었다. 물론 소작과 자신의 토지를 모두 이용할 수 있는 인구가 충분하다는 가정하에 말이다.

" 아주 훌륭해! 하하하하하! "

허질 선생은 이제껏 오랫동안 고민하고 걱정했던 문제를 한번에 해결하는 나를 바라보면서 정말 기쁘고 호탕하게 웃었다. 그 덩치에 맞게 웃음소리도 얼마나 큰지 방안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였다.

" 물론 아직 기뻐하기 이릅니다. 실천되지 않는 이론은 쓰레기나 다름없지요. "

" 이건 양반들도 크게 반대하지 않을 것이오. 어차피 자신의 이득이 줄어들지 않고, 농민들은 더욱 기쁘게 일을 할텐데 말이오. "

" 완전히 허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

" 모두를 만족시키는 이론은 없소. "

허질의 딸 역시 감탄하는 얼굴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자신의 추태를 깨닫고 핫-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숙인다.

" 이런 귀한 분께서 우리집에 오셨다니, 제가 다 황송하군요. 혜야, 상을 거하게 차려오거라. "

" 예, 아버님. "

그 날, 나는 허질 선생에게 극상의 대접을 받으며 유유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물론 내일 조금 더 자세한 얘기를 하기로 약속을 했다.

월화루와 난향루를 방문하는 것은 나중으로 미루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가봤자 최고의 기생은 커녕, 그 밑도 만나기 어려운 판국이었는데, 괜시리 아까운 돈을 날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일단 허질 선생과의 일이 마무리가 되면, 다음 단계를 펼칠 생각이었다.

" 대단하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소? "

" 그저, 조금 더 넓게 보았을 뿐입니다.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

" 아니오,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오. 당신같은 인재가 벼슬을 하여, 전하를 도와서 백성들을 어루만져야 할터인데. 허…. "

다음 날, 나와 허질 선생은 아침 일찍부터 다시 실학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이번에는 농업이 아니라 상공업에 대한 얘기였는데, 나는 아담 스미스(Adam Smith)의 보이지 않는 손을 이용하여 내 이론을 완성하였다.

물론 이 시대에 그런 생각은 상상치도 못하는 허질 선생은 새로운 세상이 눈이 뜨인 모양인지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 백성들 스스로 경제 활동에 대한 권한을 부여하면 스스로의 이득으로 인해 알아서 커 간다라…. "

" 물론 거기에 대한 단점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지금도 존재하고 있지만, 독점이라는 개념이지요. "

" 더 얘기해보시오. "

나는 계속해서 허질 선생과 상공업에 대한 얘기를 나눴고, 그는 점점 더 내 얘기에 폭 빠졌다.

" 정말 내 속을 확실하게 긁어주는구려. "

" 만족했다면 다행입니다. 저도 제 이론이 단순한 탁상공론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안 것만으로도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

" 아니오, 감사는 오히려 이쪽에서 해야지. 이런 신세계가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것은 그야말로 천금을 받은 것과 똑같소. 아니 그러냐, 혜야? "

" 그렇습니다. 저의 식견을 넓혀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도련님. "

이제 슬슬 나도 본론으로 들어가야할 시기였다. 어차피 여기에 온 이유는 그들과 이런 얘기나 나누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다. 나에 대한 가치를 인정할 수 있는, 명성있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 허질 선생님. 부탁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

" 말해보시오. 들어줄 수 있다면 흔쾌히 들어주겠소. "

" 저의 옆에서 이것을 실천할 수 있도록 힘을 보태주십시오. "

내 말에 허질 선생은 순간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일단 이곳에 익숙해져서 다른 곳으로 가고 싶지 않다는 것이 큰 이유일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 속에는 이 사내와 함께 직접 그것을 실천해보고 싶다- 라는 것이 있을 것이다. 종종 보아왔던 그의 눈빛은 나에게 그 생각을 확신시켜주었다.

" 허… 글쎄요. "

예전 같았으면, 당연히 안된다고 딱 잘라 말했겠지만, 그가 잠시 머뭇거린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장족의 발전인지 알 수 있었다. 허혜(허질의 딸) 역시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놀라워했다.

" 일단 이곳이 상당히 익숙해졌고, 사는 것도 큰 불편함은 없소. 하지만 그곳은 집도 없고,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 것이오. "

" 그건 걱정마십시오. "

" 아니, 당신에게 신세를 지기가 거북하다는 뜻이오. "

" 그렇다면, 이러지요. 외람되고 건방진 소리겠지만, 잠시 저에게 고용되어 주십시오. "

" 고용? 으하하하하하하! "

나는 그의 활활 타오르는 눈빛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마 허질 선생은 나의 그릇을 판단할 것이고, 이런 곳에서 마이너스가 될 순 없었다. 그를 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만 준다면, 그는 기꺼이 고개를 숙이고 내 밑으로 들어올 사내였다.

" 말은 고용이지만, 전 언제까지나 이 관계를 유지할 것입니다. 그저 허질 선생님에게 도움이 조금 되고자 할 뿐이지요. "

" 후후후, 고용이라. 나에게 그런 말을 꺼낸 사람은 당신이 유일하지. "

" 저와 함께, 조선을 바꿔봅시다. "

어찌 들으면 아주 위험한 발언이었다. 잘못하다간 역적으로 몰려 삼족이 멸할 수도 있었지만, 허질 선생은 묵묵하게 내 눈만을 바라보았다.

" 자신있소? "

" 자신빼면 시체입니다. "

허혜는 나와 자신의 아버지를 번갈아보면서 침을 꿀꺽 삼켰다. 한참동안이나 방안은 침묵으로 휩쌓였다. 물론 그것을 깬 사람은 허질 선생이었고.

" 좋소. 당신에게 고용되겠소. "

" 감사합니다. "

" 하지만, 나 역시도 고용된 주제에 뻣뻣하게 있을 순 없소. 이제부터 당신에게 말을 올리겠습니다. 부디, 제 눈앞에 조선이 바뀌는 것을 보여주십시오. "

허질 선생은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고 내 앞에 절을 올렸다. 나 역시도 그를 마주보면서 같이 절을 올린다. 혜는 그런 상황에 당황해 몸을 낮추고 고개를 숙였다.

" 저야 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허질 선생님. "

일단 평양에서의 일이 모두 끝난 것은 아니었기에, 나는 그에게 양해를 구하고 여기서 더 머물기를 부탁했다. 허질 선생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일단 급한 일부터 마무리를 하라면서 자신은 걱정할 필요없다고 못을 박았다.

대충 허질 선생의 일이 끝났으니, 이제부턴 월화루와 난향루의 일만 집중하면 될 듯 싶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허질 선생의 집에 영 방문하지 않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으니 이틀에 한번 정도는 방문하는 것이 예의리라.

" 일단 최소한의 명분은 생겼고…. "

허질 선생에 대한 얘기로 할아버지에게 평양에 오게 된 이유를 설명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제 조금 편한 마음을 가져도 될 터.

" 그나저나 확실히 백성들의 삶이 고달파보이긴 하는군. "

못사는 평민들은 거의 천민이나 다름없이 누더기를 입고 다녔고, 대부분의 평민들도 입에 겨우 풀칠만 하면서 명맥만 유지하고 있었다. 물론 내가 이런 상황을 바꿔야하지만, 큰 위기가 닥칠 정도까지는 필요없다. 어디까지나 내가 맡은 구역만 바꾸면 될 일이다.

어차피 내 목적은 '춘향'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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