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 너 소문 들었니? "
" 무슨 소문? 아, 그 빙화 도령님 말씀하는거니? 물론! 그렇게 잘 생기셨다면서. "
" 아아…, 그의 품에 안겨봤으면. "
여인은 잠시 황홀한 생각에 빠졌다가 아차- 하는 표정으로 다시 고개를 돌려 다른 여인을 바라보았다. 지금 이렇게 잡담이나 떠들때가 아니었다.
" 아참, 글쎄 오늘 빙화 도령께서 이곳 '빙화루'에 과감하게 도전장을 던졌다잖니? 오늘 아마 그 도령님을 볼 수 있을거야! "
" 정말?! 근데 어쩌지, 나 오늘 다른 남자랑 같이 술마시겠다고 약속했는데. "
" 참나, 너 고작 그것때문에 일생에 별로 없을 기회를 차버리겠단 말이야? 빙화 도령의 눈에 잘만 띈다면… 이딴 일도 다 집어 치울 수 있단 말이야! "
" 그게 무슨 소리야? "
그녀는 호호- 하면서 웃음만 실실 흘리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던 여인이 항복하겠다- 는 투로 두 손을 들었다.
" 좋아좋아, 내가 다음에 좋은 자리 있으면 불러줄께. 얼른 말해봐, 응? 그게 무슨 소리야. "
" 글쎄, 빙화 도령이… 평양에서 가장 부자댁의 장손이라잖아! "
" 뭐어? 어쩜…, 얼굴도 잘생겼는데, 능력까지! "
지금 이러한 말들은 이곳 '빙화루'뿐만 아니라, 평양에 있는 모든 기생집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였다. 왜냐? 이유는 바로 내가 기생집을 하나하나씩 도장깨기식으로 물리치고 있었으니까. 나는 허질 선생과의 약속 이후에 곧바로 기생집을 돌아다니면서 가장 뛰어난 기생을 만나서 그녀가 가장 잘하는 것으로 대결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노래면 노래, 시면 시, 악기면 악기, 모두에 만능한 내가(물론 노래는 시를 읊는 것에 불과했지만) 얼굴까지 잘생겼으니 금새 빙화 도령이라는 소문이 기생집에 쫙- 퍼졌다.
물론 내 악기는 피리뿐이었지만, 어렸을 때 클라리넷을 불렀던 경험을 되살려 피리를 조금 연습해보니 금새 익숙해졌다.
어쨌든, 기생집을 다섯 개정도 방문하고 나서 '빙화 도령'이라는 별명이 붙었고, 열 개정도 방문하고 나자 이젠 수많은 기생집에서 내가 찾아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열 개의 기생집을 방문해서 나와 대결했던 모든 기생들과 동침한 것은 말안해도 다들 알거라 믿는다.
" 어흠. "
" 어머, 도련님 어서오세요. 무슨 볼일로…? "
내가 '빙화루'에 들어가자, 킥킥거리면서 '빙화 도령'을 상상하던 두 여인이 공손히 나에게 말을 걸었다. 때마침 문지기가 뒷간에 간 모양인지, 주위에는 하인들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면 내가 오늘 찾아올 것을 대비해 한창 준비 중에 있는지도 몰랐다.
" 오늘 약속이 있어서 왔소만. "
" 누구와 약속이 하셨나요? "
내 잘생긴 얼굴때문에 두 여인이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꽤 예쁘장하게 생기긴 했지만, 이런 애들은 다른 곳에도 널리고 널렸기에 나에겐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그저 내 메신저 역할만 충실히 해준다면, 그걸로써 만족이었다.
" 이곳 '빙화루'의 최고의 기생과 약속을 했소. "
" 그… 그렇다면…! "
두 여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맞소. 내가 '빙화 도령'이오. "
빙화루는 난리가 났다. 아직 준비가 채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빙화 도령이 등장해버렸기 때문이었다.
보통은 밤이 좀 늦은 시각에 찾아온다고 했는데, 오늘은 해가 지자마자 곧바로 등장해버렸다. 덕분에 빙화루에 있던 다른 손님들도 모두 방을 나와서 소문의 '빙화 도령'을 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이미 내 주변은 기생, 양반할 것 없이 자리를 꽉 메웠고, 내 앞에는 루주가 버선발로 뛰어와 공손히 인사를 했다.
" 아이구, 도령님 오셨습니까. "
" 전에 여길 오겠다고 말씀을 드렸었지요? "
" 그렇지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 이리… 이리로 오십시오. "
그녀는 아주 공손히 나를 안내하여, '빙화루'에서 최고의 기생이 있는 장소로 갔다. 그녀는 사방이 뻥- 뚫린, 제법 넓은 정자 한 가운데에 앉아있었는데, 나를 보자마자 벌떡 일어나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 미리 마중나가지 못한 점, 사죄드리옵니다. "
" 히야, '빙화루'의 꽃을 보게 될 줄이야. "
몇몇 양반들은 구경도 하기 힘든, 이곳 '빙화루'의 최고의 기생인 '유화'를 바라보면서 감탄사를 터트렸다. 확실히 이번에는 꽤 이름을 날리는 기생집이라 그런지, 그 역시도 이곳 빙화루의 최고의 여인은 앞선 다른 여인들과 급이 틀림을 느꼈다. 하지만, 나는 자신감빼면 시체나 다름없는 당당한 사내였으니 전혀 주눅들지 않고 그녀가 있는 정자 위로 올라갔다.
기생과 양반, 그리고 심지어 양반을 따라온 하인들까지 모두의 시선이 나와 그녀에게 쏟아졌다.
" 명성 많이 들었습니다. 수많은 기생집을 돌아다니시며, 굴복시키셨다구요. "
" 흠, 이곳은 어떠한지 궁금하군요. "
" 그리 만만치는 않을 것입니다. "
여인의 두 눈이 살며시 불타오르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꽤나 승부욕이 넘치는 여자네- 하고 속으로 피식 웃으면서 나는 자리에 양반 자세로 앉았다. 그녀 역시 다리를 살짝 모아 자리에 앉아 내 두눈을 응시했다.
" 그러면, 그대의 장기는 무엇이오. "
" 미천하오나, 한시를 좀 배웠습니다. "
" 호, 한시라! 어디 실력을 좀 봅시다. "
그녀는 살짝 입술 깨물고 준비했던 붓과 종이를 가져왔다. 그리고 먹을 조심스레 간 뒤에, 붓을 들고 먹을 듬뿍 찍었다.
" 후우. "
유화는 꽤 긴장이 되었는지 한숨을 깊게 내쉬고 붓을 벼루에서 천천히 떼내어 종이 위로 가져갔다. 사방은 침넘어 가는 소리만 들릴 뿐, 모두 침묵한 채 유화의 붓끝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처음에는 약간 머뭇거렸지만, 점점 거침이 없어지다가 나중에는 거칠 것 없이 빠르게 하나하나 써나가더니, 마지막 글자를 적고 붓을 벼루 위에 살며시 내려놓는다. 그리고 꽤나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어떠냐- 하는 눈빛으로 나를 물끄러미 보는데, 그것이 너무 귀여워서 웃음이 피식 나왔다.
" 웃… 웃기십니까. "
내 웃음에 약간 마음이 상했는지, 그녀는 두고 보라는 표정을 짓는다. 유화가 정자 아래쪽을 향해 눈짓을 주자, 누군가가 올라온다. 이름 모를 여인이었는데, 그녀는 유화가 건넨 종이를 공손히 받아들고 사람들 앞에 서서 그녀가 쓴 시를 노래하기 시작했다.
" 오오-, 정말 아름답고 슬픈 시로군. "
" 마치 차가운 눈밭에 걸어가는 느낌이야. 제법 실력이 좋아. "
양반들에게 칭찬을 들을 정도로, 유화의 시는 제법 좋았다. 꽤 오랫동안 고민한 흔적이 역력했는데, 그래봤자 최고의 시인들에게는 어쩔 수 없이 몇 수 떨어질 수 밖에 없는 실력이다.
" 그럼 내가 가겠소. "
나는 그녀가 사용한 붓과 먹을 이용해, 종이 위에 조금의 기다림도 없이 한자를 적어나갔다. 유화가 어떤 표정인지는 몰라도, 꽤나 볼만한 얼굴이었음은 틀림없을 것이다.
" 자, 끝났소. "
그녀가 한시를 적었던 시간도 꽤 짧은 편이 속했는데, 나는 그녀가 걸린 시간의 반만에 시를 전부 적었다. 이번에도 유화의 시를 노래했던 여인이 내 종이를 공손히 들고가서 한번 내 시를 쭉 읽어나간다.
그녀의 얼굴이 살짝 굳어지면서 입이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녀의 노래를 기다리던 몇몇 양반이 기다리다못해 입을 열었다.
" 왜 그렇게 오래 보느냐. 혹 모르는 글자라도 있는게냐? "
" 허허허허. "
몇몇 양반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여인은 죄송하다고 고개를 살짝 숙이고 내 시를 노래하기 시작했다.
- 壇上月明夜 단상월명야 (장충단 달 밝은 밤)- 精靈說往情 정령설왕정 (혼령이 지난 날 말하네)- 早知今日事 조지금일사 (오늘 일 일찍 알았더라면)- 當日死還輕 당일사환경 (그 날 죽었으면 좋았을걸)
그녀의 아릿한 노래가 끝났지만, 사방은 쥐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몇몇 기생들은 눈물을 터트려 울었고, 양반은 입을 쩝쩝- 다시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 이 무슨…, 말도 안되는…. "
한시를 좀 읊는다는 사람도, 이 한시에 담긴 너무나도 깊은 슬픔에 가슴이 먹먹해짐을 느꼈다. 유화는 입을 떡 벌린채로 나를 응시한채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그렇게 대략 차 한 잔을 마실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양반 한 명이 휙- 뒤돌아서 어디론가 가버렸다. 그는 하인을 향해 오늘은 기분이 나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가자- 하고 말했다.
그것을 기점으로 '빙화루'에 있던 대부분의 양반들은 집으로 돌아가버렸고, 기생들은 눈물을 훌쩍이느라 자신이 맡고있던 양반이 집으로 돌아가는 줄도 몰랐다.
" 어떻소. "
유화가 바닥에 덥썩 엎드리고 고개를 박았다.
" 소… 소인, 하늘 위의 하늘을 몰라뵈었습니다. "
" 이러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일어나세요. "
유화는 고개를 천천히 들어 나를 바라본다. 그녀의 눈에도 눈물이 글썽 매달려있는게, 툭치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은근한 투로 물었다.
" 술 한잔 가능하겠소? "
" 물론입니다, 도련님. "
물론 오늘 장사는 거의 망쳐버린 루주는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런 기인을 한번 모셨다는 것이 훗날에 자신들에게 도움이 될지도 몰랐기에 그녀는 나를 공손히 방으로 안내했다.
" 그럼, 필요하신 것 있으면 불러주십시오. "
" 그리하겠습니다. "
방안은 곧 정적이 흘렀다. 유화는 옷고름으로 눈물을 살짝 닦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 그런데, 누구입니까…? "
" 응? "
" 그… 도련님의 마음속에 있는 분이 누구십니까? "
누구시길래 그리도 슬픈 시가 나오는 것입니까- 하고 더 물어보려는 것을 차마 말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그녀의 말로도 그 의미는 충분했다.
" 사실 내가 이런 일을 하는 것도 다 그녀때문이지. 그녀를 찾기 위해서. "
" 조금 자세히 얘기해주실 수 있나요? "
" 뭐, 시간은 많으니까. "
그리고 나는 잠자는 공주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물론 이런저런 살을 붙여서 매끄럽게 이야기를 진행시켰기에, 그녀는 조금도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대로 믿었다. 결국 그녀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나에게 죄송하다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 아니아니, 네가 울 필요는 없잖아. "
" 너무… 너무 슬픈 얘기라서… 죄송합니다. 꼭 도련님께서 그 분을 만나셨으면 좋겠습니다. "
" 미안해. 사실 나도 이러고 싶은 생각은 없었는데, 어쩔 수가 없었지. "
" 아뇨, 모두 이해합니다. 덕분에 저도 깨달은 것이 많구요. 한잔 올리겠습니다. "
나는 잔을 들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곧 잔은 희뿌연 술이 가득찼다. 나는 한번에 잔을 쭉 비우고 상 위에 탁- 하고 올렸다.
" 그럼 이만 가보지. "
" 네… 네? "
" 여기서의 볼일은 이제 끝이니깐. 인연이 되어 만났지만, 꼭 행복하게 살기를 빌께. "
나는 그녀의 볼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그녀의 눈이 파르르 떨리면서 눈물이 한 줄기 흐른다. 나는 그 눈물을 엄지로 슥 닦아주면서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이제, 그녀가 나를 붙잡느냐 아니냐는 그녀의 성향에 달렸다. 보통은 잡는 경향이 많았지만, 꽤 자존심이 강한 여인들은 그저 다음에 다시 찾아주기를 마음 속으로 빌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들은 적어도 다음에 다시 뵐 수 있냐고 물어왔다. 그렇다는 것은 거의 99% 나에게 넘어왔다는 소리다.
나는 울고 있는 그녀를 내버려두고 방문을 천천히 열었다.
" 다음에…! "
옳커니.
" 다음에 다시 한번… 뵐 수 있을까요? "
나는 고개를 천천히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 역시 나를 애처로운 눈으로 바라보면서 두 손을 가슴에 모았다.
" 그래, 다음에 꼭 다시 한번 들를께. "
" 네, 꼭 부탁드려요. 기다릴께요. 반드시 기다리겠어요. "
그렇게 또 한 송이의 꽃은 내 손에 직접 꺾이기를 갈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