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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허질 선생과 나는, 예비 장인과 사위의 관계가 되어버렸다. 그는 이렇게 기분 좋은 날에 술이 빠지면 되겠냐며 얼굴이 새빨개져있는 혜에게 술상을 차려오라고 시켰다. 물론 우리 둘은 신나게 술을 주고 받으며 시간을 보냈고, 나는 해가 져서야 허질 선생의 집을 나설 수 있었다.
" 그럼…, 조심히 가셔요. "
" 그래, 혜야. 너도 부모님 잘 보살펴드리고. "
" 네, 도련님. "
나는 그녀의 눈을 한번 그윽하게 바라보고 몸을 돌렸다. 이미 집으로 돌아가기는 늦은 것 같아서 난이나 궁의 방에서 잠이나 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녀들의 가옥 뒷문에 도착했는데, 누군가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누구지?- 하고 미간을 살짝 찌푸리면서 그들에게 다가갔는데, 한 명은 여인이었고, 다른 한 명은 사내였다.
" 누구시오. "
" … 아가씨. "
사내가 내가 온 것을 그녀에게 알린다. 설마- 하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는데, 장옥정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두 눈은 약간 속상하다는 기세를 품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내가 원하는 데로 잘 흘러가는 듯 해서 기분이 좋았달까.
" 여기서 잠시 기다리고 있거라. "
" 예, 아가씨. "
나는 얼른 뒷문을 두드려 문을 열게하고 그녀를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리고 다른 여인들 모르게 비어있는 방 하나로 들어가 촛불을 켰다. 그제서야 머리에 답답하게 쓰고있던 장옷을 벗고 한숨을 푹 내쉰다.
" … 도대체 어디를 갔다 오신겁니까. "
" 음… 일일히 설명해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
" 제가 얼마나 오랫동안… 큼. 어쨌든, 나중에 찾아올거라고 생각했는데, 안오시길래… 좀 실례를 했군요. "
그녀의 말에 나는 씩 웃으며 그녀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물론 장옥정은 부끄러운지 두 볼을 붉히면서 고개를 빙글 돌린다.
" 왜… 왜 그렇게 보시는건지…. "
" 아니, 이 야밤에 남녀가 한 방에 나란하게 앉아있다는 것 자체가 좀 우스워서요. 더군다나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지 않습니까? "
" 다… 당연하지요! 내가 왜 당신과! "
" 그저 일 얘기를 하러 온 것이지요. 아닙니까? "
" 맞죠. 맞는데…. "
장옥정은 숨을 들이마시더니 잠시 나를 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쉰다.
" 아까 아침에 했던 얘기를 계속 해보시지요. 저를 어떻게 하시겠다구요? "
" 당신과 잠시 동업을 하고 싶다는 말입니다. 처음엔 이용해먹으려고 생각했는데, 당신을 보니 차마 그런 짓은 못할 짓이어서. "
" … 상당히 당당하시네요. "
" 자존심빼면 시체인지라, 조금 양해부탁합니다. "
그녀는 어쩜 저렇게 한마디도 지지 않으려 할까- 하는 표정으로 살짝 입을 벌리고 내 위아래를 흘겨본다. 상당히 드세고 답답한 여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나의 선입견인 모양이다. 생각보다 그녀는 말이 꽤 잘 통했고, 융통성도 있는 편이었다.
" 좋아요. 어차피 지금 현재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것 뿐인것 같으니까. "
" 좋은 선택하셨습니다. 뭐, 지금 동업이라고 해도 사실 당신에게 시킬 일이나 부탁할 일은 없습니다만…, 그것이 왕후마마께서 돌아가시면 또 얘기가 틀려지겠지요. "
" … 전 전하의 총애를 받는 여잡니다. "
" 알고 있습니다. "
그녀는 잠시 멀뚱하게 나를 바라보다가 입을 달싹인다. 하지만, 끝내 말을 내놓지는 못한다.
" 걱정마십시오. 당신이 싫다면, 왕에게는 보낼 생각이 없으니까. "
" … 말이라고 너무 함부로 하시는군요. 제가 선택을 잘못했다고 생각하게 하지는 않게 해주세요. "
" 뭐, 저는 꽤 조심스러운 남자입니다만, 그저 조금 화가 났을 뿐이지요. 당신을 왕, 그 작자에게 보내고 싶진 않으니까. "
장옥정이 살짝 내 눈을 피하고 고개를 돌린다.
" … 말을 조심하세요. "
" 걱정마십시오. 말 한마디 잘못해서 죽고 싶지는 않으니까. 아직은 몸을 숙여야할 때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까지 잃어버리고 싶진 않군요. "
" 그만… 그만 가보겠습니다. "
" 좋습니다. 배웅까지는 안하겠습니다. "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할 찰나에 나는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어 그녀를 내 품안에 쏙 넣어버렸다.
" 아앗?! 무… 무슨 짓…! "
" 쉿. 잠시만… 잠시만 이렇게 계십시오. "
그녀의 두근거리는 심장소리가 들린다. 나는 속으로 20초정도만 세고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녀는 나를 보지도 않고 황급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 후후후, 귀여운 년. "
나는 비릿하게 웃은 뒤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난과 동침할 지, 궁과 동침할 지 고민하면서 방문을 열었다.
그 뒤로는 아무 무난하게 하루하루가 흘러갔다. 여인들의 공연 준비도 잘 되고 있었고, 장옥정 공략도 괜찮았다. 이젠 그녀가 나에게 안기는 것 정도는 스스럼없을 정도로 되었달까.
그 사이에 대추와 밤을 무더기로 사놓았던 것이 관청의 몇몇 관리들에게 걸리긴 했지만, 적당한 뇌물로 무마시켜놓았다. 어쨌든, 대추와 밤은 부족한 물량때문에 값이 점점 오르기 시작했고, 추석이 대략 10일정도 밖에 남지 않았을 때, 그 값은 3배까지 튄 상황이었다.
한꺼번에 물량을 풀면 꼬리가 잡히기도 쉽고, 값도 쉽게 떨어진다. 그러기 때문에, 아주 조금씩 지금부터 팔기 시작해야한다. 그래야 3배에서 5배 사이의 값을 유지한채 지속적으로 모든 대추와 밤을 팔 수 있으니깐. 문제는 그 일을 누구한테 맡기느냐였다.
" 부탁해. "
" … 저보고 그 일을 하라구요? "
장옥정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지만, 내가 그녀의 손을 포근하게 잡자 인상이 스르르 풀린다.
" 네가 꼭 안해도 돼. 믿을 사람에게 맡겨도 되고, 다른 사람을 고용해서 팔아도 돼. 하지만, 절대 꼬리가 잡혀선 안되고, 하루에 정해진 양만큼만 팔아야해. 값은 내가 정해줄테니까. "
" … 여인에게 그런 걸 시키는 사람은 당신 뿐일거에요. "
" 믿으니깐. 아, 넌 아직 모르겠지? 대추와 밤이 얼마나 있는지 말이야. "
" 얼마나 있는데요? "
땅을 사고 남은 돈으로 싹싹 털어서 샀기에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5만냥정도는 된다. 5만냥이라면 아주 큰 창고를 열 몇개나 꽉꽉 채울만한 양이었기에, 그녀는 눈을 크게 뜨면서 놀란다.
" 그렇게나 많은거에요? "
" 그래. 그러니까 네가 잘 관리해서 팔아야해. 여기서 수익은 대략 20만냥정도로 추정해. 후후, 작은 돈이 아니지? "
20만냥이면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논 100마지기가 400냥정도 했으니, 상상할 수 없을만큼 많은 돈이란 것은 알 수 있었다.
" 그… 그런 큰돈을 왜 제게…? "
" 널 믿으니깐. 뭐, 네가 그걸 들고 도망갈 사람도 아니고, 만약 도망간다면… 내가 사람을 잘못 본 댓가라고 생각해야지. "
물론 5만냥이 작은 돈은 아니다. 하지만, 이미 사놓은 땅도 어마어마하게 많았기 때문에 망하거나 할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그녀가 그 돈을 먹고 도망갈 여자도 아니었고.
" … 좋아요. 해보겠어요. "
" 그래, 고마워. 그럼 나는 이만… 가봐야할 것 같아서 말이야. "
" 벌써요? … 식사는 안 하실건가요? "
" 응. 너무 바빠서 말이야. 요새 꽤 귀찮은 파리들이 너무 달라붙어서 오래 있으면 좋을건 없어. "
" … 그렇군요. 알았어요. "
" 마중 나올 필요 없어. 몰래 뒷문으로 빠져나갈거니깐. "
장옥정은 고개를 두어번 끄덕였다.
" 네, 몸 조심하셔요. "
" 그래. "
일단 이렇게 밤과 대추는 해결된 셈이고, 이젠 공연에 힘써야할 시기였다. 나는 우연히 만난 양반 몇몇에게 돈을 쥐어주며 다른 양반들을 공연으로 데리고 와달라고 부탁했다.
돈에 눈이 휘둥그레진 그들은(물론 돈을 밝히는 양반만 구분했다.) 곧 자신들이 아는 양반을 유혹하여 미리 표를 사게 만들었고, 내가 가지고 있던 양반 전용 좌석표 100장은 순식간에 동이 났다. 그 가격이 100냥이나 했으니, 내 수중엔 순식간에 1만냥이 생겨버렸다.
물론 워낙 큰 돈을 만지작거리다보니깐, 1만냥에 별 감흥이 없었지만, 나는 그것을 조금씩 모았다.
' 이런 푼돈도 모아놓으면 다 쓸 곳이 있지. '
이제 내가 할 일은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는 것. 나는 장을 통해서 알음알음으로 평민이나 천민들의 집으로 가서 아픈 아이를 치료해주거나, 굶어죽는 아이나 어른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 그리고, 조금씩 조금씩 내 세력을 불려나갔다. 하인으로 삼기도 했고, 싸움을 전문적으로하는 싸움꾼을 만들기도 했다.
내가 기거하는 큰 기왓집은 거의 사람이 없었지만, 그 뒤로 북적북적해지며, 어느새 나는 그들에게 주인님이 되었다. 그 중에서도 내 심복이 될만한 녀석들을 골라서, 직접 은총을 내렸다.
그에 합당한 댓가도 주었고, 같이 살 여자도 구해주었다. 이런 식으로 나는 점차 나의 세력을 불려나갔다.
" 할아버지. "
" 오냐, 태황이 왔느냐. "
" 네, 몸은 건강하신지. "
" 뭐, 네가 보는 바와 같지. "
그는 여전히 자신이 애지중지 기르는 난의 이파리를 헝겊으로 조심스럽게 닦고 있는 중이었다.
" … 요즘에 꽤나 바쁘더구나. 사람도 많아지고, 돈도 상당히 번 모양이던데? "
" 모두 할아버지 덕분이지요. 조금 더 시간이 지나서 돈이 모이면, 할아버지께 받았던 은자를 다시 되돌려드리겠습니다. 이런 말하긴 민망하지만, 이자까지 쳐서 모두 갚겠습니다. "
" 끌끌, 녀석. "
보통은 양반들은 자신의 자식이나 손주들이 장사치 비슷하게 살아가면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장사치의 그릇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 사실 나는 지금도 놀라고 있는 중이다. 내가 아는 손자와는 네가 너무나 다르니깐. 마치… 수십 년된 노련한 사람을 보고 있는 기분이랄까. "
그가 형형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내 속까지 뚫고 보는 듯한 그 눈빛은, 꽤 내 심장을 벌렁이게 했다.
" 나도 쉽게 이룰 수 없는 일을… 넌 지금 해내고 있어. 물론 젊음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게 다는 아니겠지. "
" 너무 과한 칭찬이십니다. "
" 아니, 과한 칭찬이 아니야. 이것도 그대로 말한 사실이지. 그럼 좀 과하게 칭찬해볼까? "
내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 넌 어디까지 갈 생각이냐, 태황아. "
그의 말에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말할 필요가 없었다.
아무리 할아버지라지만, 장옥정이나 혹은 나의 여인들처럼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물론 허질 선생에게는 아주 조금 나의 사심을 드러내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아주 일부분일 뿐이다.
만약에 내 속마음을 보였다면, 그는 날 따라오지 않았을 것이다.
" 말하기가 곤란합니다. "
" 그래? 오히려 그 대답이 더 기분이 좋구나. 그만큼 신중을 기한다는 뜻이니까 말이지. 나한테까지 비밀로 할 정도로. "
" … 그렇습니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 아니다. 뭐, 나도 대충 짐작가는 바는 있으니깐. 어찌되었든, 중요한 것은 목숨은 귀하게 여겨라는 것이지. "
" 알겠습니다. "
하지만 그의 말이 끝나지 않았는지 난을 닦던 손을 멈추고 나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게 하나 있다. "
" … 그게 무엇입니까. "
" 적은 내 편으로 만들지 못하면…, "
나의 침이 목구멍으로 넘어간다.
" 없애버려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