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1화 (118/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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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세상을 좋아하긴 했지만 워낙 몸을 쓰는 일에만 치중하는 편이라, 나는 마법에 대해선 무지한 편이었다. 물론 디텍트 마나나 매직 애로우, 파이어 볼같은 아주 기초적인 마법이라면 몰라도, 블링크나 텔레포트같은 마법은 어떻게 사용하는지도 모른다는 뜻이랄까. 덕분에 이렇게 쨍쨍 내리쬐는 햇빛 아래에서 도시를 향해 기약없는 행진을 하고 있는거겠지. 그나마 다행은 중간에 사람들이 다니는 길을 찾았다는 점이었다.

' 이 길을 따라 쭉 가면 되겠지? '

비록 추방되었다지만 마왕의 몸인지라 생리현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이 꽤 마음에 들었다.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실 필요도, 배가 고파서 밥을 먹을 필요도 없었다. 아직 하루가 지나지 않아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어쩌면 잠잘 필요도 없을 지도 몰랐다.

' 그런데 어쩌다가 추방당한거지? '

워낙 불친절한 게임이다보니 그 이유조차 알 수도 없었다. 어차피 그런건 앞서 게임을 하는 동안에 익숙해져 있었기에 별 상관은 없었다. 마계? 솔직히 그런 곳에 돌아가지 않아도 인간계에서 충분히 즐겁게 생활할 수 있다.

그렇게 주변도 둘러보면서 유유자적하게 길을 걸어가자 드디어 첫번째 마을이 보였다. 대략 수십 가구정도만 모여서 옹기종기 살고 있는 마을이었는데, 그리 풍족한 곳은 아닌 것 같았다.

" 여행잔가? "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입구에 한 사내가 벽에 기대서서 나에게 말을 걸었다. 내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그는 벽에 기대고 있던 몸을 반듯이 세워서 나에게 두 걸음 다가왔다.

" 잘 곳은 있나? "

" 이대로 지나칠 생각입니다만. "

" 큰일날 소리하는구만. 밤중에 저 숲속을 지나친다고? 산적한테 탈탈 털어먹힌뒤에 죽고 싶다면 그리해. "

" 그럼…. "

나는 상관없다는 듯이 무심하게 고개를 휙 돌리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당황한 쪽은 당연히 사내쪽이었고, 그는 다시 나에게 쪼르르 다가와 입을 나불거리기 시작했다.

" 아니, 가면 죽는다니까. 이제 곧 해가 진다고. "

" 그쪽이 상관할 바는 아니잖습니까. "

" 그… 그야…. "

설마 죽는다는 말에도 태연하게 발걸음을 옮길거라곤 그도 생각하지 못했는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 하… 하룻밤 쉬고 가게, 응? 싸게 해줄테니까. "

" 돈 없습니다. "

" 그러지말고…, 위험하게 밤에 넘어갈 필요는 없잖아. "

얼씨구. 하룻밤 자는 것 치곤 지나치게 나에게 달라붙는다는 생각이 듬과 동시에 입가에 미소가 씩- 새겨졌다. 그가 노리고 있는거? 뻔했다. 이런 보잘 것 없는 마을에서 살아가려면 그런 짓밖엔 없을테니까. 모처럼이니 한번 당해주는 척 해줄까- 하고 생각하며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 좋습니다. 그럼 오늘 밤만 지내죠. "

" 잘 생각했어. "

그는 호탕하게 껄껄- 웃으면서 나를 안내해 어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텅텅 비어있는 응접실에는 카운터에 있는 남자가 다였는데, 그는 나를 보더니 눈을 반짝 빛내며 사람좋은 웃음을 만들어냈다.

" 어서오시게. "

" 자자, 이 친구 맥주 한잔 줘. "

나를 안내한 사내의 말에 주인으로 보이는 대머리 사내가 맥주잔에 시원한 맥주를 가득 부어 나에게 건넸다.

" 서비스요. "

" 자자, 쭉쭉 들이키게. 여기까지 오느라 힘들었잖나. "

속셈이 너무 뻔히 보였지만, 하는 짓이 귀여워 한번 속아주고 싶었다. 어차피 마왕의 몸이기에 수면제따위의 약은 먹히지도 않지만, 모처럼이니 기가 막힌 연기나 한번 해볼까 했다.

- 꿀꺽 꿀꺽

시큼털털한 맥주를 한번에 쭉 들이키고 빈 맥주잔을 탁자 위에 탕- 하고 힘차게 내려놓았다.

" 호탕한데, 하하하. "

여기에 약을 탔는지 안탔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여기서 골아떨어진 척 해도 무리는 없을 것 같았다. 약을 타지 않았다면 술에 약한 척 하면 되니까.

" 윽. "

" 왜 그래? "

나는 손으로 머리를 한번 짚으며 둘의 눈치를 살짝 보았다. 예상대로 그들의 입가엔 당황보단 기쁨이 가득했다. 내가 함정에 걸려들어갔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 멍청한 새끼들. '

" 이거…. "

" 크흐흐. "

그리고 나는 앞으로 쿵- 쓰러진 척하며 눈을 감았다.

" … 성공이야? "

" 약효가 이렇게 빨리 돈 적은 없는데. "

" 술이 약하겠지. 얼른얼른 옮겨. 이야, 옷감좀 봐라. 어디 귀족집 아들내미같은데? "

" 그럼 곤란한거 아냐? "

" 어차피 우리 마을에 온 적도 없잖아? "

음침한 소리에 둘은 키득키득 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여행자들을 털어먹은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그리고 마지막엔 깔끔하게 죽여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 묻어버렸겠지?

' 이거 내가 악마가 아니라 이놈들이 악만거 같은데. '

잠시 후에 둘은 나를 앞뒤로 들어서 어디론가 데리고 갔는데, 눈을 살짝 떠보니 방안에 숨겨져있는 비밀 통로를 지나고 있었다. 꽤 여러사람의 목숨이 이곳에서 사라졌는지 피냄새가 내 코를 콕콕- 찌르고 있었다.

" 이놈 얼굴도 꽤 반반한데 아깝네. "

" 야, 귀족은 팔았다간 꼬리만 잡혀. 그냥 죽이는게 나아. "

그들은 침대 비스무리한 곳에 나를 올려놓고 시퍼렇게 날이 선 칼을 가지고 왔다.

" 일단 옷에 피가 튀면 안되니까 옷부터 벗겨. "

사내들이 막 내 옷에 손을 대려고 할때, 나는 눈을 번쩍 떴다. 갑작스럽게 눈을 뜬 나를 보며 둘은 흠칙 하며 놀라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 이… 이 새끼 일어났는데? "

나는 입꼬리를 씩- 올리면서 상체를 일으켜세웠다.

" 이거 살려둬선 안될 새끼들이네. "

" … 잠자고 있었으면 곱게 죽었을텐데. "

둘은 내려놓았던 칼을 집어들고 나를 노려보았다.

" 옷은 포기하자. 괜히 반항하면 우리만 귀찮아지니까. "

대머리 사내의 말에 다른 사내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자세를 잡은 채 나에게 한 걸음씩 다가오면서 한순간에 죽일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 웃기는 새끼들이네. "

하다못해 소드 익스퍼트라면 나에게 생채기라도 내겠지만, 그들은 고작해봤자 민간인. 아무리 칼로 나를 쑤시려고 해도 마왕인 내 몸에 조그만 상처 하나 내기도 불가능했다. 나는 하찮다는 웃음을 지으며 이들을 어떻게 요리할지 곰곰히 생각했다.

" 후, 어떻게 죽이지. "

" 이 새끼야… 죽는건 너야, 돌았냐? "

" 너무 무서워서 머리가 돌아버린 모양인가봐, 크흐흐. "

아마 내가 무기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그들처럼 평범한 사람이라고 착각한 모양인 것 같았다.

" 뭐, 일단 한놈만 있으면 되니까. "

그리고 순식간에 한놈의 머리가 터져버리며 피가 주위로 팍- 퍼졌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대머리 사내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서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머리가 없는 자신의 동료 시체를 보고는 칼을 땡그랑 떨어트리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 어… 어어…. "

" 아이고, 옷이 다 젖어버렸네. "

" 어… 어…. "

그는 내 손에 묻어있는 피를 보며 몸을 사정없이 달달 떨기 시작했다.

" 내가 속아주니까 재밌었지? "

" … 네… 네? "

" 이렇게 여행자들을 습격하고 꽤나 빼먹었지? "

그는 아무말도 없이 두려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그런데 어쩌냐, 하필 나한테 걸려버렸네. "

" 제… 제발 목숨만 살려주세요. "

" 뭐, 생각해볼께. 참, 내가 돈이 좀 필요해서 말이야. "

" 드리겠습니다. 전부 드리겠습니다! "

그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사정없이 머리를 땅에 쿵쿵- 박았다. 재밌다. 인간들의 두려움을 조금만 이용하면, 이렇게 우스운 광경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 역시 마왕을 선택하길 잘했어. '

나는 한번 키득키득 웃고난 뒤에 그를 향해 그동안 모아둔 돈을 어디에 숨겨두었냐고 물었다.

" 가… 가져오겠습니다. "

" 아니, 같이 간다. 허튼 생각할 생각말고. 너같은 놈은 백만이 있어도 날 못 이겨. "

대머리 사내의 이가 달달 떨렸다. 이미 바지는 지릿한 냄새가 풀풀 풍기고 있었는데, 두려움에 오줌을 지린 모양이었다. 더러운 새끼. 나는 그의 배를 발로 한번 콱- 차면서 쓸모없는 새끼- 하고 욕을 내뱉었다.

" 배짱도 하나 없는 새끼가… 크흐흐. "

" 흐… 흐흑. "

결국 그는 두려움에 눈물을 줄줄 흘리기 시작했지만, 내가 언성을 높이자 화들짝 놀라며 얼른 나를 어디론가 안내하기 시작했다. 촛불 몇개만 흔들거리며 캄캄한 방안을 비추고 있었는데, 그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꽤 고가의 물건이 많이보이는 창고였다.

하나씩 찬장에 일일이 보관해둔 상태였는데, 꽤 좋아보이는 검도 있었고 지팡이도 있었다.

" 몇 명이냐? "

" 네…? "

" 니들 손에 몇 명이나 죽었냐고. "

그는 이를 달달 떨면서 고개를 살며시 흔들었다.

" 마… 많이 죽이진 않았습니다. 거… 거의 다 노예로 팔…았습니다…. "

" 그래? 이야, 아주 대단해. "

" 사… 살려만 주십시오.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나으리. "

그는 추잡하게 울면서 내 바짓가랑이에 달라붙었다.

" 금화도 많고…, 유용하게 잘 쓸께. "

대머리 사내가 마치 '그럼 난 산건가?' 하고 기대찬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을때, 나는 그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비릿하게 웃었다.

" 그런데 하나 빌려가도 되겠나? "

" 물론입니다. 무엇이든지 가져가십시오. "

" 그래? "

그리고 그는 자신의 가슴을 관통한 내 팔을 살짝 내려다보더니 왜…?- 하는 소리와 함께 옆으로 털썩 쓰러졌다.

" 네놈 목숨을 빌려가야할 것 같아서 말이야. "

내 손에 잡힌 심장을 터트리자, 피가 내 팔꿈치까지 줄줄 흘러내렸다. 이제 이 물건들은 전부 내거란 말이지? 하나같이 돈이 될만한 것들이라 전부 가져가고 싶었지만, 아공간같은 마법을 몰랐기에 모두 가져가는 것은 무리였다.

나는 가죽 주머니 하나를 집어들어서 금화와 보석을 가득 담아 내 품속에 넣었다. 그리고 상당히 날카로운 검도 집어서 내 허리춤에 매달았다. 아직 상당히 많은 물건들이 남았지만, 이건 이제 더이상 나에게 필요없는 물건들이었다.

" 그렇다고 딴놈한테 줄 순 없지. "

어차피 가지지 못하는 이상, 아무도 가질 수 없도록 만드는게 좋으니까. 나는 파이어볼을 만들어서 창고 곳곳에 던졌고, 비밀통로를 나와서 건물 내부에도 파이어볼을 던져넣었다.

- 쾅쾅

폭발음과 함께 건물은 순식간에 타오르기 시작했고, 곧 무시무시한 겁화가 건물을 집어삼켰다.

" 바이바이. "

마을 사람들이 나와서 건물에 붙은 불을 끄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이미 불길은 잡을 수 없을만큼 커진 상태였다. 캄캄한 밤중이라 아무도 내 얼굴은 보지 못했고, 그렇게 내 손에 죽은 첫 희생자들의 무덤은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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