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무시무시한 고요함이 천막 안을 휩싸고 돈다. 나를 안내하는 엘리트 병사도 지금 이 분위기를 이겨낼 수 없었는지 황급히 인사를 건네고 나가버렸다.
남아있는 자는 오직 여섯. 나를 포함하여 칼리반 영지 쪽이 세 명이었고, 세르비아 영지 쪽 역시 세 명이었다. 단연 후작은 들어오는 세 명의 사람들 중에서 나에게만 시선을 보냈고, 그 눈빛은 흥미와 함께 탐욕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는 나를 원하고 있었다.
" 어서오시게, 칼리반 백작. "
" 오랜만에 뵙는군요, 세르비아 후작각하. "
마치 오랜만에 만난 친우처럼 둘은 친근하게 인사했다. 만약에 지금이 전시가 아니라고 하면 분명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연출되었겠지만, 지금은 싸늘하고 날카로운 기운뿐이었다.
" 이거 거하게 당했군. 설마 이런 수를 염두해두고 있을 줄이야. "
" 제 아들과도 같은 사내입니다. "
" 그래? "
백작은 미리 아들이라는 말과 함께 나를 넘보지 말라는 작은 경고를 비췄지만, 후작은 그런 것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에르윈이 어떤 아버지 밑에서 자랐는지 알만하군.
" 일단 앉게. "
우리는 준비된 의자에 앉아서 반대편 의자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마주 바라보았다.
" 제안을 하나 하지. "
" 제안이라뇨? 전쟁은 저희가 승리했습니다만. "
" 승리라니? 우리가 패배하여 물러났다고 생각하는가? "
" 그게 아니란 소리십니까? "
백작과 후작은 연신 미소를 띄고 있었지만, 눈매만큼은 날카로웠다. 둘다 호락호락하게 물러설 생각은 전혀 없어보였다.
" 아직 우리 병사들은 대부분 건재하네. 그쪽은 벌써 반 이상이 없고 말이지. "
" 죽음을 각오한 방어전이었지요. "
" 말은 그렇게 해도 전체적인 승기는 우리쪽에 있었네. "
백작의 두손이 강하게 쥐어졌다.
" 그래서 제안하는 것이지. 충분히 일리가 있지 않나? "
" … 일단 들어는 보겠습니다. "
후작은 손가락을 까딱이며 나무 탁자를 톡톡- 쳤다. 백작에게 향하던 시선은 내쪽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딱봐도 그가 무슨 제안을 할지 알만했다.
" 그를 우리에게 넘기게. "
" 절대 안됩니다. "
" 그에 대해서 파격적인 보상을 해주지. 5년간 칼리반 영지를 보호해주지. "
" 안됩니다. "
" 5년간 우리 영지와의 교역에서 발생하는 세금을 주겠네. "
이건 상당히 파격적인 내용이었는지 백작은 안된다고 말하려고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다물었다. 이 영감봐라? 고작 그정도로 고민을 해? 꽤 기분이 나쁘긴 했지만, 그래도 계획대로 흘러가니 묵묵히 바라보기만 했다.
" 그… 그래도 안됩니다. "
" 베르테스 영지와의 교역길을 만들어 주겠네. "
" ! "
" 비용은 전부 우리가 충당하지. 인부는 자네 영지에서 고용하겠네. 이정도면 아주 파격적이라고 생각하는데. "
칼리반 백작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이정도라면 5년 안에 가히 백작 중에서 가장 큰 세력을 가질 수 있는 도약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을 정도였다. 후작의 양옆에 앉아있던 사내들도 그렇게나 많은 것을 대가로 줄거라곤 생각하지 못한 것 같았다.
" 후작각하! 좀 지나친 것 같습니다만. "
" 어떤가? "
후작은 백작의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눈만큼은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나는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를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씩 올렸다.
" 그… 레온 경의 의사가 중요하기에…. "
백작의 눈은 초조했다. 내가 만약에 방랑기사라는 것을 후작이 알게된다면 앞서 말했던 대가들은 모두 취소되고 말테니까. 아마 그도 이쯤에서 날 팔아넘기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 자존심도 없는 새끼. '
조금전만 해도 나를 보고 제발 떠나지말라고 애원하던 주제에, 이젠 후한 대가에 날 팔아넘기려고 하고 있었다. 그러든 말든 크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지만, 여기서 칼리반 영주라는 그릇의 크기가 보인 셈이었다.
" 전 상관없습니다. 백작님이 원하신다면 그리 하지요. "
" 그…. "
나는 조금 심술궂은 마음이 생겨서 그에게 다시 결정권을 던졌다. 이미 그는 나에게 한 말이 있었기에 양심이 찔렸는지 계속 말을 더듬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후작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 좋네. 그럼 여기 싸인하지. "
이미 준비가 끝난 상태였는지 후작은 종이를 꺼내 백작의 앞에 건넸다. 백작은 빠르게 사인을 하고 지장까지 찍은 뒤에 다시 그것을 후작에게 건넸다.
" 이제 레온 경은 우리 영지의 기사일세. 가져가야할 물건이 있는가? "
" 이대로 바로 가도 됩니다. "
아직 칼리반 영지에 에르윈이 있긴 했지만, 그녀는 나중에 부하들에게 몰래 빼내오게 시키면 된다.
" 그럼 백작은 잘가게. "
백작은 차마 나를 바라보지 못하겠는지 후작에게 살짝 인사만 하고는 그대로 막사를 나가버렸다. 그가 나가자마자 후작은 비웃음을 내뱉으며 칼리반 백작을 씹기 시작했다.
" 멍청한 작자같으니라고. 이 선택을 평생 후회하게 해주지. "
" 후작각하, 아무리 그… 레온 경이 대단한 기사라고 해도, 아까 말씀하신 대가들은 너무 지나친 것 같습니다. "
" 아니, 절대 그렇지 않지. 이것도 난 싼 가격이라고 생각하네, 그렇지 않은가? "
그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그저 고개를 살짝 숙이며 화답했다.
" 그리고 아주 중요한 사실이 남아있잖는가. "
" 그게 무엇입니까? 전 도저히 후작각하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이 아둔한 저를 일깨워 주십시오. "
" 5년. "
" … 네? "
후작은 손바닥을 쫙- 펴고는 이가 보일 정도로 씩 웃으면서 다시 말을 이어갔다.
" 난 분명 5년이라고 말했네. 그리고 정확히 오늘로부터 5년 뒤에는, 칼리반 영지는 우리의 영지가 될 것이야. 그렇다면 이 투자는 결국 우리 영지를 위해 한 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덤으로 레온 경까지 얻으면서 말이지. "
" … 아! "
" 어떤가, 레온 경. 이정도면 만족할만 한가? "
" 칼리반 백작님보다 백 배는 나으신 것 같습니다. "
" 에잉, 백 배 가지고 되겠는가? 날 너무 낮게 보는 것 같은데. "
내 생각 이상으로 후작은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두 수, 아니 세 수 이상 앞을 바라보는 혜안을 가지고 있는 자였다. 왜 그렇게나 많은 인재들이 후작의 밑으로 몰리는지 알 것 같았다. 물론 그래봤자 나보단 아래겠지만.
' 그래도 내 결정이 좋았어. '
세르비아 후작의 영지로 가겠다는 결정은 정말 잘한 것 같았다. 그동안 그와 지내면서 심심하진 않을 것 같으니까.
* * *
따끔거리는 살기가 주변을 감쌌지만, 정작 그 목표가 되는 나는 아주 멀쩡했다. 상당한 중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헥스 경이 내뿜는 살기는 다른 병사들의 숨통을 꽉 막을 정도였다.
" 이제 둘이 같은 기사단이니, 앙금은 풀도록 해. "
" … 들었습니다. 상당한 대가를 치르셨다고…. "
" 됐네. 이제 그 이야긴 그만하지. 어찌됐든, 지금부터라도 서로 잘 알아가도록 해. 자주 만날테니까. "
" 알겠습니다, 후작각하. "
" 그럼 잠시 담소나 나누고 있게. 자리를 피해줄테니. "
후작은 눈치있게 자리를 피해 우리 둘만 남도록 했다. 잠시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할테니 아무 걱정 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 … 자네 나이가 몇인가. "
" 올해 스물 둘입니다. "
" … 놀랍군, 놀라워. 정녕 인간이 맞는가? "
" 당연히 인간입니다. 설마 절 유희하는 드래곤이라고 착각하신건 아니겠지요? "
헥스 경은 나에게 입은 상처를 내려다보면서 손으로 만지작거리다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날 노려보았다.
" 왜 날 죽이지 않은거지? "
" 괜시리 후작 각하께 미운털 박힐 순 없잖습니까. "
" … 처음부터 노리고 있었나? "
" 처음부터는 아니지만, 그래도 헥스 경과 싸우기 전에는 마음먹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
내 대답에도 그의 눈초리는 변하지 않았다.
" … 기사치곤 너무 영리해. 아니 영악하고 하는 편이 좋겠어. "
" 우직하기만한 바보 기사보단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
" 딴 마음을 품고 있진 않겠지? "
" 그게 무슨 소립니까? "
나는 여유롭게 미소를 지었다.
" 가령…, 무언가 거대한 것을 노리고 후작각하를 이용하겠다던가…! "
" 하하하, 제가 그런 힘이 있겠습니까? "
" 물론. 자네는 소드 마스터를 뛰어넘은 자니까. 나는 자네가 그랜드 마스터가 아닐까 하는 믿지 못할 상상까지 하고 있는 상태야. "
" 아직 거기까진 아닙니다. "
" 거기에 근접은 했단 소리로 들리네만. "
" … 헥스 경 또한 보통내기가 아니신 것 같습니다만. "
그제서야 그의 눈초리가 살그머니 풀렸다.
" 수많은 사람들을 보아오면서 길러진 눈이지. 물론 자네같은 사람을 본 적은 처음이네. 그래서 꽤 경계심이 드는군. "
" 걱정하지 마십시오. "
" 그러면 다행이겠지만…. "
대충 얘기가 끝난 것 같기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앙금을 남길 정도로 속이 좁은 사람도 아닌 것 같았다. 아니, 사실 나는 그가 꽤 마음에 든 상태였다. 자신의 주인을 위해서 정말 진심을 다해 충성을 바치는 사람이랄까.
' 나도 이런 부하가 한 명이라도 있다면…. '
그것만큼 든든한 우군이 없을 것이다.
" 이제 쉬십시오. 그래도 상당한 중상일테니까요. "
" 일단 목숨을 살려줘서 고맙네. "
" 별말씀을. "
나는 오른손을 아랫배에 올린 다음에 고개를 살짝 숙이며 병동에서 나왔다. 대기하고 있던 의무병들이 다시 병동으로 들어가 그를 간호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 소드 마스터가 둘이랬지? '
나머지 한 명은 영지를 지키고 있다는 말만 들었지, 정확히 어떤 사람인지는 아직 모르는 상태였다. 뭐, 조만간 만나게 될테니.
' 그나저나 에르윈을 무사히 세르비아 영지까지 데리고 와야하는데. '
일단 나의 충실한 심복 둘에게 시키긴 하겠지만, 그들도 완전히 믿을 순 없었다. 에르윈의 미모를 보면 또 어떻게 마음이 변할지 모르니까. 결국 그들도 남자에 불과한 짐승들이었다.
' 그 방법을 써야겠지. '
나는 에르윈을 떠올리면서 비릿하게 웃다가 서둘러 말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 * *
나를 포함한 세르비아의 군대는 곧바로 말머리를 돌렸고, 무사히 세르비아 영지로 귀환했다. 모두가 전쟁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한 눈치였다.
당연히 후작은 나를 얻은 것으로 전쟁이 엄청난 가치가 있었다고 포장했고, 시민들은 영지에 소드 마스터가 무려 세 명이 되었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더군다나 이번에 들어온 소드 마스터는 놀라울 정도로 젊었기에, 그 놀라움은 한층 더했다.
" 어떤가, 칼리반 영지랑 비교해보면? "
" … 감히 비교를 할 수 있겠습니까. "
" 그렇겠지, 하하하하. "
정말 칼리반 영지는 촌구석이라고 말이 나올 정도로, 후작의 영지는 크기도 거대했지만 도시 자체가 발전되어 있었다. 문화 역시 대단한지, 놀랍도록 아름다운 건축물도 곳곳에 보였다. 역시 베네딕트 왕국의 삼대 실세라고 불리울만 했다.
' 그리고 이곳이 내것이 된단 소리지. '
나는 속으로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나를 보고 환호하는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