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2화 (129/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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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나 리스본과의 점심이 끝난 뒤에, 그녀는 잠시 몸단장을 해야겠다며 저택으로 돌아갔다. 그녀와의 약속 장소는 광장 시계탑 아래. 수많은 커플들로 북적이는, 그야말로 명당 중의 명당이라고 해야할까. 나도 어설프게 준비할 생각은 없었기에 곧바로 내 개인준비실로 들어가 깔끔하게 옷을 갈아입었다.

전신 거울로 비치는 내 모습은 정말 남자인 내가 봐도 스스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질 정도였으니, 여자들은 오죽할까.

' 이러고도 안 넘어오면 여자가 아니지. '

깔끔한 검은색 외출복은 마치 정장과 비슷한 모습이었는데, 손목부위에 나풀거리는 프릴만 없었다면 내 마음에 더 쏙 들었을 것이다. 이 시대의 옷은 다들 이런 모양이 대세인지, 밖에 나가도 남자들은 전부 이런 프릴이 달린 옷을 입고 있었다. 물론 재질자체는 내것과 비교도 할 수 없지만.

' 흠, 너무 일찍 나와버린건가. '

남자와 여자의 준비시간은 그 궤를 달리하기에, 나는 너무 일찍 나왔음을 깨닫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커플들이 광장을 거닐고 있었다.

광장의 중심에는 거대한 분수대가 있었는데, 그 분수대 중심의 어여쁜 천사 모습의 동상이 들고 있는 항아리에서 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그녀의 주위로 작은 아기 천사들 역시 입에서 물줄기를 뿜어내고 있었는데, 정말 한눈에 봐도 아름답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환상적이었다.

과연 베네딕트 왕국 중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발전된 영지답달까. 이런 여가 문화의 모습부터가 칼리반 영지와는 차원이 틀렸다.

" 저…. "

내가 잠시 분수대에 한눈이 팔린 사이에, 누군가가 내 앞에 다가와 나에게 말을 건넸다. 한눈에 봐도 꽤 예쁘장한 여인. 자신의 미모에 자신이 있는건지 꽤 당당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사뭇 색다른 느낌이어서 나는 흥미를 가지고 그녀를 응시했다.

" 무슨 일이신지? "

" 혹시 레온 프라하스타 기사님 아니신가요? "

" … 맞습니다만. "

이미 세르비아 영지에는 내 소문이 자자하게 퍼져있었다. 베네딕트 왕국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절세미남. 굳이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그 소문에 대해서 부끄러운 마음같은 것은 없었다.

" 기다리시는 분이 있으신가요? "

" 있습니다만, 그쪽은…? "

" 아, 실례했어요. 전 하산 상회의 장녀 이리야 하산이라고 해요. "

하산 상회라면 여기 세르비아 영지에서는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대단한 부를 가진 곳이었다. 이 영지의 반은 하산 상회의 손을 거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곳에서의 영향력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런 이유때문에 나역시도 하산 상회에 부하를 심으려고 꽤 노력한 적도 있었고.

" 반갑군요, 이리야 아가씨. "

" 기다리시는 분이라면…, 혹시 여자인가요? "

그걸 직접적으로 당돌히 말하다니. 스스로에 대한 자존심이 상당한 여자인듯, 나에 대해서 한치의 부끄러움도 느끼지 않는 얼굴이었다. 하긴 그렇게 대단한 상회의 장녀라면 이만한 자존심은 익히 예상할만하니까.

" 네, 여성분입니다. "

" 흠. "

내 대답에 그녀가 침음성을 흘리며 시선을 살짝 옆으로 돌렸다. 그녀의 양옆에 붙어있던 호위가 이만 가자고 그녀를 향해 조심스럽게 말했지만, 그녀는 들은체도 안하며 다시 나에게 입을 열었다.

" 전 어떤가요? "

" 네? "

" 그녀랑 비교하면, 전 어떻냐구요. "

확실히 큐나보단 예쁘장한 얼굴이었지만, 아직 이리야는 큐나보단 덜 여문 몸매랄까. 전체적인 몸매는 큐나쪽이 훨씬 잘 빠졌다. 그렇다고 이리야가 별로라는 뜻은 결코 아니었다. 비록 가슴은 큐나보단 작긴 했지만, 그렇다고 너무 작아서 눈쌀을 찌푸릴 정도도 아니었다.

적당한 크기의 가슴에, 잘록한 허리, 그리고 언뜻 보기에 도톰한 엉덩이까지. 더군다나 거기에 꽤 돋보이는 초록색 드레스는 그녀의 젊음을 풋풋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감아서 묶어올린 금발 머리를 풀면, 그 모습 또한 상당히 색기있을 것 같았다.

" 아름다우십니다. "

" 그녀보다요? "

" 서로 비교하기는 힘들죠. 각자마다 서로의 개성과 아름다움이 다 다르니까요. "

나의 유연한 대답에 그녀는 입을 다물고 잠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나역시 꿀릴것은 없었기에 잠시 그녀의 눈빛을 받아주다가 씩- 웃었다.

" 아가씨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오늘은 힘들 것 같습니다. 다음에 생각있으시다면, 저에게 연락을 한번 넣으시지요. "

" … 좋아요. 오늘은 이만 돌아가겠어요. "

그녀는 양산을 쓰고 있는 손이 아닌 반대편 손을 손등이 보이도록 나에게 쑥 내밀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고 손등에 입을 쪽- 맞추며 눈을 치켜올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흐뭇한 미소. 무엇이 이리 자신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얼굴을 쾌락에 물든 표정으로 바꾸고 싶었다. 저 자신만만한 얼굴을 잔뜩 찌푸리도록.

" 다음에 뵙죠. 가자. "

내가 손을 놓자마자 그녀는 나에게 작별인사를 건네고 바로 몸을 돌려 어디론가 휘적휘적 걸어갔다. 호위를 맡고 있는 두 사내는 주위를 경계하며 그녀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 단장님? "

정말 타이밍좋게 이리야가 사라지자마자 큐나가 수줍게 웃으며 내 앞에 나타났다. 풍만한 가슴골이 보이는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큐나는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며 안절부절 못했다.

그녀의 모습에 나는 미소를 씩- 지으면서 손을 내밀었고, 그녀는 잠시 내 손을 멀뚱히 바라보다가 아주 천천히 그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 가지. "

" … 네. "

그 다음은 정말 별거 없었다. 그저 광장을 돌아다니면서 분수를 구경하고, 잎이 무성하게 자란 나무를 구경하고, 지나가는 사람을 구경했다. 나와 그녀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 것은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 어차피 의도는 했지만, 그게 얼마나 효과적일지는 미지수다. 결과는 내일이 와야 알 수 있을테니.

" … 너무너무 즐거웠어요. "

드디어 해질녘이 되자 큐나는 아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정말 즐거웠다며 내 손을 꽉 잡았다.

" 식사나 하고 갈래? "

" 저녁이요? "

" 응, 내 저택에서. "

세르비아 후작이 직접 내려준 내 저택으로의 초대에 큐나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그녀도 내 의도를 조금은 눈치채지 않았을까하고 짐작했지만, 분명 거절하진 않을 것이다.

" …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

" 당연히 실례가 되지 않지. 오늘의 일도 마무리할 겸해서 말이야. "

" 그럼 좋아요. "

*  * *

" 웁, 웁. "

내 입술과 그녀의 입술이 부딪히자, 큐나의 눈동자가 흐릿해졌다. 진득한 타액이 섞이며 요상한 맛이 났지만, 결코 싫은 맛이 아니었다. 무언가 톡쏘는, 달짝지근한 맛이랄까.

" 하아… 하아…, 다… 단장님. "

저녁 식사를 먹고 잠시 얘기를 나누던 나는 점점 분위기를 고조시켰고, 결국 그녀를 침실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했다. 결국이라고 말하면 내가 굉장히 노력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상은 매우 쉬웠다.

그저 애틋한 눈빛으로 오늘 자고 갈래?- 라고 물었을 뿐이었는데, 그녀는 선뜻 수락하며 나와 이렇게 부둥켜 안은 상태가 된 것이다.

" 생각보다 야한데? 우리 큐나는…. "

" 그…. "

" 처음이야? "

내 말에 큐나는 상당히 당황하며 내 눈을 맞추지 못했다. 처음이 아니란 뜻에 나는 얼굴을 굳혔다.

" 아…! "

" 그래…, 그랬군. "

" 아니…, 그건… 단장님. "

큐나는 말을 더듬거리며 눈물어린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면서 일어서려는 내 팔을 덥썩 잡았다.

" 내가 처음이 아니었구나. 그래…, 이해해. "

" 아니에요…! 단장님…, 단장님… 이건 어쩔 수가…. "

" 솔직히 말해줘. 내가 몇 번째 남자야? "

나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질문했다. 당연히 그녀는 내 눈을 바라보지 못하며 시선을 돌렸고, 잠시 더듬거리다가 입을 천천히 열었다.

" 두… 두 번째에요. 사실… 예전에 사귀었던 남자가 있었어요. "

" … 그래? "

" 하지만 결단코 마음을 주진 않았어요. 이건 첫 번째에요. 단장님이 첫 번째란 말이에요…. "

결국 그녀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내앞에 철푸덕 엎드렸다. 하지만, 나는 몸을 살짝 돌린채 꽤 차갑게 그녀에게 말했다. 물론 다 연기였지만, 그녀에겐 진실로 받아들여지겠지.

" 몸과 마음은 똑같은거야. 마음이 없었다고 몸을 주는 행위가 올바르다고 생각해? "

" 그… 그치만…. "

" 오늘은 이만하자. "

" 아… 안돼요…. "

분명 그녀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지금 나와의 갈등을 해소하지 못하면, 영영 나와는 잘될 수 없다는 것을. 어떻게든 그녀는 이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 할 것이다. 이미 내가 그렇게 그녀를 몰고가고 있었으니까.

" 제발…, 단장님. 뭐든지 하겠어요. 단장님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겠어요. 그러니까 제발 절 버리지마세요…, 흑흑. "

아아, 여자의 눈물이란 왜 이렇게도 나를 흥분시키는 것일까. 그것도 나에게 달라붙으며 애원하는 여자라니. 순식간에 흥분이 일어났지만, 그걸 그녀에게 보여줄 생각은 없었다. 뭐, 이정도라면 이미 그녀는 거의 나에게 넘어온거나 다름없지만, 나는 확실함을 추구하는 남자니까.

" 내가 원하는 것… 모두? "

" 네! "

" 맹세할 수 있어? "

" 맹세하겠어요. 단장님이 원하신다면…, 뭐든지요! "

이제 끝이다. 물론 이런 식으로 말을 한다고 모든 일을 종속시킬 순 없지만, 잠자리에서만큼은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줄 것이다. 이미 나에게 죄책감을 느낀 상태였으니, 그렇게라도 하면 그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다는 생각때문이겠지? 한심한 여자같으니. 하지만 나는 이런 한심한 여자가 좋다.

" 좋아. 그럼 너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볼께. "

" 아…! 고마워요, 정말… 정말로. "

" 이리와. "

그때부터 그녀는 정말 나에게 엄청나게 괴롭힘을 당했다. 아니, 그녀도 좋아했으니까 괴롭힘이라고 하기엔 어색한 표현이겠네. 긍지높은 기사에게 한번도 하지 않은 펠라까지 시켰으니까. 그것도 목구멍까지 쑤실 정도였으니, 그녀가 얼마나 나에게 안달이 나있는지를 대충 알 수 있었다. 아직 항문쪽을 공략하진 못했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뚫리게 될 것이다.

그렇게 그날밤, 큐나 리스본은 내 손에 넘어왔다.

*  * *

- 쿵!

아침 일찍 기사단의 단장실에 도착한 나는 여유롭게 커피 한 잔을 즐기고 있었다. 물론 한 잔을 채 다 마시기도 전에 요란한 소리와 함께 단장실의 문이 벌컥 열리긴 했지만.

' 왔군. '

" 레온! "

꽤 화가 난 듯한 모습의 에르윈. 딱봐도 어제 나와 큐나의 데이트 목격담을 들은 모양인 것 같았다.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그녀에게 이렇게 이른 아침에 어쩐 일이냐고 상냥하게 물었다.

" 어제 그 여잔 누구에요! "

" 여자라니요? "

" 어제 광장에서 당신과 어떤 여자가 함께 있다는 걸 들었다구요! "

상당히 분했는지 에르윈이 씩씩- 거리며 눈물까지 머금고 있었다.

" 아, 그거…. "

" 그… 그거라니… 정말인거에요?! "

" 그거라면 정말입니다. "

" 레… 레온, 당신…! "

" 오해하신 모양인데, 그저 친목 도모를 위한 만남이었을 뿐입니다. "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에르윈에게 천천히 다가가 그녀의 볼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불만에 차있던 그녀도 내 손길에 차차 얼굴이 풀어지더니 종국엔 정말 아무 일도 아니냐고 물었다.

" 아무 일도 아니라니까요. 걱정 마십시오. "

" … 레온을 믿겠어요. "

" 하, 정말이지…. 불안한거에요? "

내 말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렴 이렇게나 잘생기고 잘났으니 오죽 걱정되겠는가. 물론 나는 일부러 그녀의 이런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있었다. 여자의 질투란, 아버지도 말리지 못하니까. 그건 큐나에게도 적용되는 말이었다.

' 안달나게 만드는데는 성공한 모양이군. '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에르윈도 나와의 약혼식을 빠르게 땡길 것이 분명했다. 에르윈도 귀족의 혈통이었기에 소유욕이 보통 만만치가 않았으니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 후작 당신이라도 그걸 막지는 못할거요. '

분명 그는 나를 어느정도 경계하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분명 차차 나를 흡수하는 식으로 움직일텐데, 이렇게 빠르게 약혼식을 진행시켜버리면 그도 분명 헛점이 생길 것이다.

나는 그 헛점을 비집고 들어가서 이 영지를 집어삼킬 것이고. 어차피 후작에게 장성한 자녀는 에르윈 하나 뿐이었다. 그나마 하나 있는 그녀의 동생은 이제 세 살이 된 갓난아이였다.

후작이 죽는다면 영지의 소유권은 자연스레 에르윈에게 옮겨갈 것이고, 그 권력은 내 손에 고스란히 들어올 것이다.

' 재밌겠군. '

============================ 작품 후기 ============================

오늘 연참을 한번 해봅시다!

(물론 오후에.. 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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