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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밝자마자 나에게 공자의 대리인이라는 사람이 찾아왔다. 질질 끌거 없이 오늘 당장 승부를 보자는 내용이었는데, 나는 흔쾌히 수락하면서 시간과 장소를 확인했다.
" 레온! 정말 받아들일거에요?! "
" 참고로 제가 먼저 제안했다는거 알죠? "
" 아무리 그래도 두 명은 심하다구요! 영지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라고 했잖아요. 그럼 분명 적어도 소드 마스터가 둘일텐데…. 아무리 레온이 강해도 두 명은 무리라구요. "
당연히 내 강함을 몰랐기에 에르윈이 이렇게 반응할거란 것을 알고 있었다. 아니,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이렇게 생각하겠지. 어쨌든 이미 발을 빼기는 곤란한 상황이었고, 공작도 묵인하고 있는 것을 보니 아마도 공자의 손을 들어준 것 같았다.
" 당장 우리 영지로 돌아가요. 이런 대접을 받고 여기 있을 순 없어요! "
" 에르윈, 걱정마요. 절대 지지 않으니까. "
" 몰라욧! 당장 돌아가요. 레온을 잃고 싶지 않아요! "
이건 승부다. 목숨을 건 승부. 죽어도 불만을 표출할 수도 없다. 그저 승부를 받아들이는 것뿐. 나는 여기서 공작의 영지에서 나온 기사 둘을 죽일 생각이었다. 그래야 공작이 나를 노릴테니까. 자기의 엄청난 전력을 둘이나 잃었는데 나를 곱게 보낼리가 없다.
" 에르윈, 지켜보고만 있어요. 정 무서우면 먼저 영지로 돌아가도 돼요. "
" 레온! 그걸 말이라고 해요?! "
" 쉿, 내 사랑. 날 믿어요? "
그녀는 나의 따뜻한 속삭임에 결국 눈물을 주륵 흘렸다.
" 싫어…. 왜 이렇게 되버린거야. "
" 걱정말라니까, 또 우는거에요? 내가 얼마나 강한지 모르죠? "
" … 흑. "
" 아마 깜짝 놀랄거에요. 아니, 아마도 전 대륙이 떠들썩하게 될테죠. "
나의 너무나 자신만만한 태도에 그녀도 조금은 반신반의해진 것 같았다. 이렇게나 자신만만한데 먼저 제안을 걸었으니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 … 정말 이길 수 있는거에요? "
" 물론이에요, 에르윈. 당신은 그저 느긋하게 차나 마시며 기다리고 있으면 돼요. 결투를 봐도 상관없지만…, 잔인할 수도 있으니까 왠만하면 보지마요. "
" … 알았어요. 꼭…, 꼭 이기고 돌아와야해요. "
" 그래요, 걱정말고 기다려요. "
물론 아직 꽤 많은 시간이 남아있긴했으나 누군가가 나를 만나고자 하기에 나는 에르윈의 방에서 나왔다.
" 누구신지? "
" 아, 여기서 말하긴 곤란하고…, 잠시 자리를 옮겨도 되겠습니까? "
" 어디로 말입니까? "
" 따라오시지요. "
정체불명의 사내는 나를 어디론가 안내했다. 함정이라기엔 별 의심스러운 부분도 없어서 나는 그저 그의 뒤만 졸졸 따라갔다. 그리고 그가 안내해준 마차를 탄 뒤에 어디론가 향했는데, 나와 에르윈이 머물던 곳과 그리 멀지 않은 외딴 궁전이었다. 아무도 없이 휑- 하기만 한 곳에서 누군가가 나를 기다린다?
' 재밌겠는데. '
함정? 그따위 시시한건 아닐 것이다. 혹시 도망을 염려해서 공자가 내 뒤에 붙인 그림자들은 언제 떨어져나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 날 보자는 사람이 누구야? "
" 가보시면 압니다. "
" 기밀인가? "
" 기밀입니다. 그것도 아주아주 기밀이지요. "
그는 몇번이고 미로같은 궁전을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어떤 굳게 닫힌 문 앞에 다가섰다.
" 들어가시지요. 전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
" 호, 이거 단둘이 만나는건가? "
" 그렇습니다. 안에서 어떤 소리도 나지 않으니 안심하시지요. "
"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
나는 자신만만하게 그를 바라보면서 입꼬리를 올렸지만, 그 역시 자신감이 넘치는 사내였다. 확실히 그럴만한 실력자인 것 같긴하지만, 아쉽게도 내 발끝도 못미치는 실력이었다.
" 어차피 10분 이상 나오지 않으면 제가 들어갈 생각입니다. "
" 그럼 나에겐 10분의 시간이 있다라. 그 정도면 상대방을 죽일 시간은 충분한데? "
" 그러시지 않을겁니다. "
무슨 배짱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문을 열고 들어갔다. 커튼까지 싹 닫았는지 낮인데도 불구하고 방안은 캄캄하기 이를데 없었다.
꼭 악당들은 이런 곳을 좋아하던데. 문이 쿵- 닫히자 방 중앙에서 빛이 환하게 피어올랐다. 그리고 보이는 그림자. 후드를 쓰고 있어서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체구가 꽤 아담했다.
' 여자? '
그리고 후드를 벗는 순간, 내 입꼬리가 길게 올라갔다.
" 이로써 세 번째 만남이네요, 프라하스타 경. "
" 설마 당신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거 의외군요…. 공녀님. "
후드를 벗은 사람은 다름아닌 공녀였다. 천사같이 착하다는 공녀가 이런 침침한 곳에서 나와 몰래 만난다? 그렇다는 말은 그 소문이 전부 이 여자가 만들어낸 허상이란 뜻이었다.
순진하기 이를 데 없는 여인이 이런 걸 생각할리가 없으니까. 더군다나 소리가 방밖으로 빠져나오지도 않는다는 말은, 자신의 심복에게도 비밀을 숨기는 철두철미한 성격이란 뜻이었다.
' 이거 백설공주때보다도 더하군. '
순간 르세뜨가 생각나긴 했으나, 어쩌면 이 여자는 그녀보다 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적어도 르세뜨는 예상이라도 할 수는 있었으니까.
" 아직 제가 잘 행동하고는 있는 모양이네요. 의외라고 하는거 보니. "
" 안봐도 뻔하군요. 당신은 제가 이 승부에서 이기길 원하지요? "
내 말에 공녀는 의외라는 듯이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단번에 자신의 의도를 간파해낸 내가 좀 신선하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 … 기사라고해서 쉽게 생각해선 안될 것 같네요. "
" 적어도 공녀님보단 위에 있을겁니다. "
" 그건 좀 자존심 상하는 말인데요? "
" 그나저나 그것때문에 절 부른거라면 아쉽게도 실패하셨군요. "
내 말에 그녀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확실히 워낙 대단한 미녀다보니 어떤 표정을 지어도 예뻤다. 차라리 처음부터 그녀를 노릴껄 그랬다는 후회까지 들 정도로.
" … 무슨 말인지 이해가 잘 안되는데요? "
" 결투에서 제가 이기도록 도와주겠다고 말씀하실 생각 아니셨습니까? 그렇다면 필요없다는 말입니다만. "
내 말에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나오는지 궁금하군요. 그 남자가 데리고 오는 이들은 소드 마스터 중에서 상급에 해당한다구요. 아무리 당신이 소드 마스터라고 해도 그들 두 명을 모두 이길 수 있을거라 생각해요? "
자신이 나보다 우위에 서고 싶은 생각인가본데, 안타깝게도 이런 상황은 예전부터 신물나게 겪어왔었다.
" 걱정마시지요. 어차피 제가 죽든말든 그쪽과 아무 상관없지 않습니까? 아니, 오히려 제가 죽는 쪽이 원래 그쪽에겐 좋은 상황이잖습니까. "
" … 당신…! "
" 아, 대충 짐작이 가는군요. 이 영지가 탐나시지요? 멍청한 당신의 오빠보다 당신이 이 영지를 더 잘 다스릴 자신이 있다고 생각하지요? 그러니까 제가 결투를 이기고 당신의 오빠의 명예를 바닥에 떨어트릴 생각이잖습니까? "
그녀가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뻔했다. 그녀는 입을 꾹 다물고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 결투에 나서는 그 소드 마스터들이 죽었으면 하겠죠. 어차피 그들은 당신의 오빠의 세력이니까. 거기에 명예까지 실추되면 당연히 후계자의 권리는 당신쪽으로 상당히 기울테고. 그걸 발판으로 당신은 그 권리를 뺏어올 자신이 있는거겠지요. "
" 당신…, 누구야. "
" 그저 후작가의 기사입니다만. "
" 방금 생각이 바뀌었어. 당신 그냥 죽어야할 것 같아. "
힐다의 눈빛이 표독스럽게 변했다. 아마도 내가 상당히 무서운 남자라는 사실을 눈치챈 것 같았다.
" 아쉽지만 죽지 않을겁니다. "
" … 그래, 그럴 것 같아. 이렇게 영리한 남자가 스스로 사지로 뛰어들리가 없으니까. 무슨 손을 썼겠지? 멀쩡한 방법으론 그 둘을 이길 수는 없을테니까. "
"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면 말리지 않겠습니다. "
" 설마. 아냐, 그건 아닐거야. "
그녀는 내가 그 둘을 정말 실력으로 이길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아무리 내가 검술의 천재라고 해도 소드 마스터 상급에 해당하는 둘을 이긴다는 것은 정말 말도 안되는 일이었으니까. 그건 천재라고 해도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그런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물론 겉은 인간이지만, 속은 마계를 다스리던 마왕이었으니까! 고작 이런 인간 세계에서 검좀 쓴다는 인간 둘을 상대하지 못한다는건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 할 말은 끝나셨습니까? 그럼 이만 돌아가고 싶은데…. "
" 경고하는데, 어설프게 입 열지 않는게 좋을거야. 당신의 말을 믿을 사람도 없을뿐더러, 입을 열면 내가 가만두지 않을테니까. "
" 어차피 절 몰래 처리할 생각이잖습니까? 그게 성공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지요. "
" … 두고봐야지. "
결투에서 죽는다면 그걸로 끝이겠지만, 만약에 이긴다면 그녀도 나에게 따로 손을 쓸게 분명했다. 자신의 진실된 모습을 아는 이는 적으면 적을 수록 좋을테니까. 아마 그녀는 상반된 마음일 것이다.
내가 이겨서 자신의 오빠의 명예가 바닥까지 추락하기도 바라고, 내가 져서 깔끔하게 목숨을 잃는 것도 바라고 있을 것이다.
" 그럼 다음에 보지요, 공녀님. "
" 잠깐. "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던 공녀는 몸을 돌려 방을 나가려던 나를 불러세웠다.
" … 나도 제안 하나 하지. "
" 후후, 제안이라. 꽤 급하신가보군요. "
" 닥치고 듣기나 해. "
꽤 험악한 말에 왠지 모르게 재밌다는 감정이 마음 속에서 샘솟았다. 설마 여기서 이런 반전이 있을 줄은 나도 몰랐으니까.
" 만약이야. 만약에 네가 이긴다면…, 나와 손잡는게 어때? "
" 어이쿠, 이제야 그 말을 하시는군요. 자존심도 강하셔라. "
" 난 입을 함부로 나불대는 놈을 제일 싫어해. "
" 손을 잡는다라…. "
나는 잠시 빛이 환하게 나오는 구슬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죄송하지만 거절입니다. "
" … 뭐? "
" 제가 왜 쓸모도 없는 당신과 손을 잡아야하는지…? "
설마 이런 식으로 노골적인 조롱을 하리라곤 그녀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나는 숨을 죽이며 그녀의 반응을 기다렸다.
" … 하! 재밌는 놈이네. 하하하하, 진짜 오랜만에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야. "
" 그렇습니까? 이거 제가 손핸데요. 가르침을 주고 아무 대가도 없었으니. "
" 이거 진짜 대단한 놈이네. 이건 칭찬이니까 감사히 받아들여. "
" 이걸로 전 당신의 적이 된게 맞습니까? "
" 아직은. 조금 더 두고보겠지만, 일단 가능성은 많지. "
오랜만에 즐거울 것 같았다. 지금까지 워낙 시시한 놈들밖에 없었는데, 이런 짜릿한 적도 한 명쯤은 있어야 부서트리는 쾌감이 있었으니까. 더군다나 그 적이 이렇게 아름다운 미녀라면, 굴복시키고 난 후의 즐거움이 기대되었다.
" 어차피 제가 이길 싸움이니 선물을 하나 드리지요. 당신의 오빠라는 작자를 물먹이고 난 후에, 두 달동안 이 영지에 손을 대진 않겠습니다. "
" 두 달? "
" 그 두 달동안 이곳을 잘 삶아먹어보시지요. 그 정도면 충분한 시간이지요? 물론 능력이 부족하다고 시인하시면 조금 더 늘려드릴 생각은 있습니다만. "
내가 노골적으로 비웃음을 던지자 그녀는 팔짱을 끼면서 나를 마주바라보았다. 그녀 역시 입꼬리가 씩 올라간 상태다.
" 충분해. 아니 많은 것 같은데? "
" 애교로 받아들이지요, 아름다운 공녀 아가씨. 이거 재밌는 싸움이 되겠는데요. "
" 그러게. 설마 이렇게 진행될거라는건 상상도 못하고 있었는데. 그 멍청한 놈만 넘어트리면 끝난다고 생각했는데…. "
우리 둘은 한참이나 서로를 바라보면서 웃었다.
" 그럼. "
" 배웅은 하지 않을께. "
" 솔직히 섭섭하네요. 뭐, 다음에 만날때까지 몸은 잘 챙기십시오. "
내가 노골적으로 그녀의 몸 위아래를 훑어내리자 그녀는 자신의 커다란 가슴을 더욱 내밀며 자신만만하게 받아쳤다.
" 어디 해볼 수 있으면 해보던가. 밑에 깔릴 놈이 누군지는 두고봐야지. "
소드 마스터들과의 결투보다 더 재밌는 결투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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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2연참 성공했는데, 잘하면 이거 계속 쓰겠는데요? 사실 이거 쓰는 저도 재밌어서 얼른 완결내고 싶네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