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7화 (134/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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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결투 장소에서 미리 자리를 선점하고 있었다. 아마도 소문이 꽤 퍼져나간 모양인 것 같은데, 르겐 그 녀석은 내 패배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말한 제안을 온 곳에 퍼트려서 취소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 같았는데, 안타깝게도 스스로 자신의 무덤을 판 격이랄까. 지는 순간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를 해야할텐데, 구경꾼이 많으면 많을 수록 모욕감은 더더욱 상승하게 될 것이고 명예는 더더욱 실추할 것이다. 괜히 힐다만 좋은 일 시키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이정도는 되야 그래도 그녀 역시 후계자의 권리를 더욱 쥘 수 있을테니 나중에 그 대가를 톡톡히 받아내면 될 것이다.

" 왔다! "

내 등장에 구경꾼들이 웅성거렸다. 모두가 내 패배를 예상하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내가 얼마나 버틸지에 대해서 서로 말을 주고 받겠지. 그들은 알고 있을까. 인간 대륙에서 전설이 될 마왕의 탄생이 바로 지금 이 순간부터라는 것을. 그리고 그들이 그 순간을 직접 두 눈으로 목격한 사람이 될 거라는 것을.

" 겁쟁이처럼 내빼지 않아서 다행이군. 네 용기는 높이 쳐주마. "

" 잘 차려입고 나오셨군요. 다행입니다. "

" 에르윈은 내가 잘 데려가마. 네놈따위에겐 과한 여자야. "

한낯 여자에 눈이 팔려 자신의 운명이 바뀔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여자가 에르윈이라면 목숨을 걸만하지만, 그렇다고 진짜 목숨을 걸 사람들이 있을까. 차라리 포기하고 말지. 어찌됐든간에 개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라는 말이 있으니까.

" 괜히 시간끌 필요도 없이 바로 시작하지요. 참고로 결투가 끝나자마자 저와 아가씨는 영지로 다시 돌아갈겁니다. "

" 그럴 수나 있을지 모르겠군. "

" 공작전하께 양해를 바라고 싶군요. "

" 아버지께서도 허락한 일이니 걱정말도록. 뭐, 제안은 네놈이 했으니 우리쪽엔 잘못도 없지만. "

아마 공작 역시 고작 기사 하나에게 이런 모욕을 당했다는 생각에 지금 이 결투를 묵인했을 것이다. 애들 싸움에 괜히 어른들이 나서면 안좋은 소리만 잔뜩 먹을테니 아예 참관하지도 않은 상태였다.

나는 준비된 결투장으로 걸어가서 검을 뽑았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철검이었기에 구경꾼들은 피식- 웃으면서 야유를 보냈다. 내가 검을 뽑아들자 공자의 옆에 나란히 서있던 두 사내 역시 나에게 뚜벅뚜벅 걸어왔다.

" 어차피 죽을 놈에게 자기 소개를 할 필요는 없겠지? "

" 마음대로 하십시오. 두 분 다 덤비셔도 상관없습니다. "

" 고작 애송이 하나한테 우리 둘다 덤비는건 우스운 일이지. 걱정말게. "

내 위치에서 왼쪽 편에 있는 사내가 검을 뽑아들었다. 광택부터 내가 들고 있는 검과는 차원이 틀릴 정도로 반짝거리며 빛이 났다.

딱봐도 명검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대단한 검인 것 같았지만, 아쉽게도 이미 나에게는 무기라는 것이 의미가 없었다. 내 눈에는 모든 물체가 다 무기가 될 수 있었다.

하다못해 머리카락 한 올까지.

" 꼴랑 혼자서 덤비실 생각입니까? 그럼 시시할텐데요. "

" 특별히 한 수는 봐주겠네. "

그의 어처구니없는 자신감에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물론 소드 마스터 상급이라면 이만한 자신감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만큼 자신의 적수가 될만한 자는 대륙에 흔치 않았다. 그랜드 소드 마스터라도 그를 단칼에 베는 것은 힘든 일일테니까. 물론 나는 가능했지만, 그를 단칼에 베고 싶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둘을 동시에 상대하여 죽이는 것이 내 목표인만큼, 그들에게 일단은 경각심을 심어줄 생각이었다.

" 검을 드시지요. "

사내가 은백색 검을 들어올리는 순간 번쩍- 했다. 아마 모두가 검에 반사된 햇빛이 눈에 비쳤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의 검이 잘릴 때까지.

- 툭

마나까지 씌여있던 그의 은백색 검날이 바닥에 툭- 떨어지는 순간 주변은 정적에 휩싸였다. 내 움직임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치 저절로 검이 잘린 것처럼 보였으리라. 그건 소드 마스터 두 사람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들은 아무 말도 없었다. 설마 자신들이 내 움직임을 놓쳤으리라곤 상상도 못할테니까.

" 이럴 수가…. "

그 모습에 멀리서 구경하던 힐다가 놀라며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옆에 있던 자신의 호위 기사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거냐고 물었지만, 소드 마스터 상급도 알아채지 못한 움직임을 그가 보았을리는 절대 없었다.

" 동시에 덤비지 않으면 단칼에 죽을 겁니다. 한번 경고했으니, 다음엔 현명하게 생각하시지요. "

" 허…! "

두 상대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다시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응시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 왠지 그 표정이 내 가슴을 뒤흔드는 것 같았다. 즐겁다.

" 검은 알아서 구하십시오. 이제 무기따위가 문제가 아니란 것을 깨달았을테니까요. "

" … 정말 터무니없는 괴물이군. 주군은 정말… 말도 안되는 괴물을 건드리셨군 그래. "

둘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그들은 몸을 돌려서 공자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마지막 가는 길에 대한 인사일까. 곧 병사 하나가 달려와 검이 잘린 사내에게 새 검을 내밀었다. 잘 벼려진 검날에 그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 이봐, 친구. 마지막 가는 길인데 전력을 다해봐야하지 않겠나. "

" 그러지. 솔직히 저 친구가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는지 궁금하지만…, 여기가 우리들의 무덤같구만. "

순식간에 주변은 엄청난 살기가 휘몰아쳤다. 소드 마스터 상급의 둘이 내뿜는 최고의 기운. 모두가 오한에 다리를 부들부들 떨었다. 물론 나는 마치 산책을 하는 사람처럼 여유롭기 그지 없었다. 그들이 내뿜는 살기 역시 나에겐 그저 훈풍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 빨리 끝내고 싶으니 오시지요. "

" 마지막 가는 길을 그리 재촉하다니, 매너가 없군. "

" 저승가서도 같이 검이나 휘두르세 친구. "

그리고 그 둘은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나에게 달려왔다. 분명 일반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속도다.

소드 마스터 최하급에게도 거의 잔상정도만 보일 정도로 빠른 속도였지만, 나에게는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렸다. 얘네들이랑 놀아주는 것도 시시하구만. 스케일이 더욱 커지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나는 검을 휘둘렀다.

- 삭

- 땡그랑

그들이 휘두른 검은 반토막이 난 상태로 바닥에 떨어졌다.

" 허. 이걸로 끝인가. "

" 길고도 짧은 인생이었다. "

둘의 목에 천천히 붉은 실선이 생기더니 잠시 후에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 꺄아아아아아악! "

구경꾼들 중에서 여성들은 모두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손으로 얼굴을 가렸고, 남자들도 얼굴이 새하얘지며 입을 떡 벌렸다. 그들은 지금 눈앞에 벌어진 일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공자가 자랑하는 두 명의 소드 마스터가 무명의 기사 한 명에게 단칼에 죽다니. 이건 정말 베네딕트 왕국에서뿐만 아니라 대륙을 떠들썩하게 만들 사건이었다. 이런 엄청난 인물이 세르비아 영지에 숨어있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베네딕트 왕국을 휘청거리게 만드는 일이었다.

" 하. "

아마도 모두가 자신의 눈을 의심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눈을 비벼도 쓰러진 것은 공자의 두 소드 마스터였고, 아무렇지도 않게 서있는 것은 나였다.

" 아아…. "

결국 현실을 받아들인 공자는 허무한 신음을 내뱉으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렇게 되는 건 정말 꿈에서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나에게 사죄하는 것을 떠나서 자신의 엄청난 힘이 되어준 두 소드 마스터가 이리 허무하게 죽었다니. 공작의 영지에 있던 다섯의 소드 마스터 중에서 두 명이 사라져버린 셈이었다. 그것은 엄청난 전력의 손실에 해당되었고, 그는 그 후폭풍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 아아아!! "

그는 주먹으로 바닥을 쾅쾅- 치면서 괴성을 질러댔다. 놀라고 있는 것은 비단 그뿐만 아니었다.

설마 이런 일이 정말로 일어났을 줄은 몰랐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힐다를 보면서, 나는 비릿하게 웃었다. 이제 그녀는 나에 대한 이미지를 싹 바꿀 것이다.

무서운 사내에서 엄청난 괴물로. 더군다나 심리파악까지 수준급인…, 상종할 수 없는 최악의 괴물.

" 결투는 제 승리인 것 같습니다만. "

" 아아아아아아아악! "

공자는 미친듯이 바닥을 주먹으로 쾅쾅- 치면서 발악했다. 주위에 있던 기사들이 피투성이가 되는 그의 손을 보면서 황급히 달려가 그를 말렸다.

" 놔! 놔아아아아아아아아!! "

공자의 발버둥은 한참이나 지속되었다. 모두가 두려운 눈으로 몸을 덜덜 떨면서 얼른 여기서 나가고 싶은 눈치였으나, 기사들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입구를 틀어막은채 아무도 출입을 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다.

그제서야 구경꾼들은 지금 자신들이 보통 사태에 말려든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는지 심각한 표정이 되어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쩌면 입막음의 대상으로 모두 공작에게 죽임을 당할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공작이 그런 최악의 수를 쓰진 않을터.

내 예상대로 출입구에서 꽤 익숙한 얼굴의 중년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상당히 굳어있는 표정을 지낸채 우리들에게 다가오는 사람은 바로 이 영지의 주인, 브룬힐트 공작이었다.

" 아아아아아악! "

공자는 아직까지 괴성을 지르며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공작은 그런 아들에게 다가가더니 못마땅한 눈빛으로 한참이나 노려보았다.

" 일어나라. "

" 으… 으으으으으! "

" 일어나라고 말했다, 르겐! "

쩌렁쩌렁한 호통이 울려퍼지자 모두가 침을 꿀꺽 삼키며 공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한참 나를 노려보다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 저놈이… 저놈이 우리 소드 마스터 두 분을 죽였습니다! 저놈이… 저놈이 말입니…! "

- 짜악

순간 모두가 경악하며 입을 쩍- 벌렸다. 공작이 르겐의 뺨을 손바닥으로 사정없이 후려친 것이다. 르겐은 바닥에 털썩 쓰러진 상태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 아… 버지? "

" 못난 새끼…. "

" 아… 아버지…. "

" 일을 이렇게 만들어? 니가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른지 알기나 하는거냐? 지금 네가 무슨 짓을 저지른지 알고 있는거냐!! "

공작은 르겐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르겐은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입을 벌린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못하는 거겠지. 공작은 한참 자신의 아들을 노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서 여유롭게 서있는 나를 바라보았다.

굳어있던 그의 표정은 순식간에 풀어지더니 내 시선을 정면으로 보았을때는 나도 놀랄 정도였다. 입가에 은은하게 미소까지 띠고 있는 그는 아주 자애로운 목소리였다.

방금까지 그렇게 화를 낸 사람이라고는 전혀 믿기지 않을 정도로.

" 그대에게 폐를 끼치서 미안하네. "

" … 아닙니다. "

" 결투는 정식으로 승낙한 것이었으니 그에 대한 불만은 일절 없네. 자네같은 인재가 있다니 정말 놀라울 뿐이야. "

" 과찬의 말씀입니다. "

설마 공작이 이렇게 큰 그릇이었을 줄이야. 사실 나는 공작이 화를 내진 않더라도 불쾌하다는 기운을 뿜어낼 줄 알았다. 하지만, 공작은 진심으로 나의 실력에 감탄하는 모습이었다. 나도 모르게 소름이 돋을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랄까. 세르비아 후작보다 결코 낮지 않은 인물. 확실히 힐다도 그의 자식이라는 느낌이 팍팍- 느껴졌다.

' 역시 호랑이한테 고양이 새끼가 나오는 법은 없는 모양이네. '

" 내 못난 아들놈은 자네에게 사죄를 할 것이네. 제안은 제안이니까. 그리고 이번 일로 해서 결코 자네에게 손해가 나는 일은 없을 것이네. 그건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

" … 감사합니다. "

" 그럼 내 부탁하나 해도 되겠나? "

" 부탁이라 하시면…? "

그는 미소를 띤 얼굴을 풀지 않은채 편안한 목소리로 계속 말을 이어갔다.

" 곧바로 영지로 돌아가지 말게. 이곳에서 며칠 더 편안하게 지내고 가게. 그대와 얘기를 조금 나누고 싶어서 말이야. "

" … 좀 힘들 것 같습니다만. "

" 내 이렇게 부탁하지. "

모두가 공작전하!- 하고 소리쳤다. 기사들도 깜짝 놀라며 입을 쩍 벌렸다. 공작이 내게 고개를 숙인 것이다. 순간 입에서 헛웃음이 튀어나올 뻔 했다.

' 씨발, 이거 진짜 재밌는데. '

하나하나가 보통 인물이 아니다. 손에 땀이 날 정도로 스릴이 있었다.

" 알겠습니다. 이만 고개를 드십시오. 제가 황송할 지경이니 말입니다. "

" … 부탁을 들어줘서 고맙네. 일단 내 못난 아들놈이 약속을 지켜야하는게 우선일 것 같은데. "

" 공자님께서 그러실 수 있을까요? "

공작은 순식간에 매서운 눈빛이 되어 아직도 충격을 먹은 얼굴로 붉게 달아온 뺨을 만지작거리는 르겐을 노려보았다.

" 얼른 약속을 이행해라, 르겐! "

" 아버지…, 어떻게… 어떻게 이러실 수…. "

" 약속을 이행하지 않으면,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다. "

============================ 작품 후기 ============================

3연참 성공! 혹시 뛰어넘으신 분이 있을 수도 있으니, 편수를 꼭 확인해주세요.

이거 술술 적히는데요. 오늘 제대로 연참을 날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피아 게임도 연참하기로 약속했는데, 큰일이네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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