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쉴 새 없이 달리던 마차가 멈추어 섰다. 빈첸시오 성을 떠난 지 열흘이 지나 드디어 황궁에 도착했다.
“폐하.”
낯익은 친위대장이 문을 열어주었고 지스카르가 먼저 마차에서 내렸다. 하지만 나는 마차 안에 처박혀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걸 보고 지스카르가 손을 뻗었다.
“이리 와라.”
“씹어 먹을 놈…….”
나는 옷깃을 움켜쥐고 욕을 뱉었다. 언뜻 밖을 보니 기사들이 도열해 있었다.
“당장 처형장으로 끌려가고 싶은 게 아니라면 지금은 얌전히 따라오너라.”
지스카르가 내게만 들릴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말대로 이 많은 사람 앞에서 소란을 피우는 건 현명한 선택이 아닐 것이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한마디 정도는 하고 싶어 낮게 으르렁거렸다.
“진짜 마차 안에서까지 그러고 싶으냐. 기사들이 바로 옆에 있는데……!”
“네가 기사라면 무엇 때문에 너를 마차에 태웠다고 생각할까?”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기나긴 마차 여행 동안 무료함을 줄이기 위해 여자를 들이는 것은 드문 일도 아니다. 확실히 그것 말고는 다른 이유가 없다. 나는 붉어진 얼굴을 손등으로 거칠게 쓸었다.
아니, 그만두자. 적어도 지금은 말이다.
놈의 손을 무시하고 혼자 마차에서 내렸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황태자 시절에도 보지 못했던 엘 파셔 황궁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할 기회였다.
엘 파셔 황궁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압도적인 거대함에 있다. 실제로 스트라스보다 엘 파셔의 황궁 부지가 두 배 정도 더 넓다고 들었다. 하지만 웅장함만 강조하고 있어 황궁은 대체로 투박한 느낌이 들었다.
그에 비하면 스트라스 황궁은 눈이 부실 만큼 화려하다. 외곽의 기둥 하나에도 섬세하게 부조를 새기고 풀 한 포기 심을 때도 조형미를 따진다. 무식한 엘 파셔의 놈들. 기둥 굵고 천장만 높으면 다 되는 줄 알지.
황제의 귀환 소식을 전해 듣고 많은 사람들이 황궁 앞까지 마중 나와 있었다. 갈색 머리카락의 미인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내가 알기로 지스카르는 성인이 되기도 전에 마크시 공작의 외동딸인 브뤼셀을 일찌감치 황태자비로 맞아들였다. 그렇다면 그녀는 아마도 브뤼셀 황태자비일 것이다. 아니 황후인가.
브뤼셀 황후가 남자아이를 데리고 앞으로 걸어 나왔다.
“폐하, 어서 오십시오. 이렇게 무사 귀환하신 것을 보니 겨우 마음이 놓입니다. 시라크 황태자도 폐하께 인사드리세요.”
“오, 오셨습니까. 폐하.”
까만 머리카락에 푸른 눈동자. 특히 매서운 눈매가 지스카르를 쏙 빼닮았다. 저 소년이 엘 파셔의 황태자인가.
그런데 어깨가 굳어 있는 것을 보니 황태자는 아버지를 어려워하는 듯했다. 이유를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대놓고 냉랭한 심기를 드러내고 찍어 누를 것처럼 내려다보는데 어떤 아이가 편하게 서 있을 수 있을까. 거기에 더해서 지스카르는 아들의 안부도 묻지 않고 대뜸 이렇게 말했다.
“또 종일 게으름만 피운 것은 아니겠지?”
“아, 아닙니다…….”
“호호, 그럴 리가요. 황태자 전하는 언제나 열심히 노력하고 계신답니다. 그보다도 폐하. 아직 저녁 식사를 못 하셨지요? 제가 모시겠습니다. 함께 가세요.”
브뤼셀 황후가 끼어들어 살갑게 말했다. 하지만 지스카르는 그녀에게도 매우 냉담했다.
“아니, 여독이 남아 짐은 들어가 쉬겠소.”
지스카르는 짧게 대화를 마치고 황후의 곁을 지나쳤다. 나는 조용히 지스카르의 뒤를 쫓았다. 브뤼셀 황후를 눈여겨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치맛자락 안으로 주먹을 숨긴 채 꽉 그러쥐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처자식 정도는 소중히 다루는 게 어때.”
혼자서 중얼거리자 지스카르가 내게 시선을 주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척 시치미를 떼고 계속 걸음을 옮겼다.
황제궁에 도착할 때까지 근처의 지리를 머릿속에 담아두었다. 기본적으로 용도가 같기 때문인가. 스트라스의 황제궁과 구조가 어느 정도 비슷했다. 그런데 언제까지 따라가야 해? 나를 어떻게 할 생각이지?
지스카르는 침소에 도착해서도 나를 시종이나 병사에게 떠넘기지 않았다.
“식사는 여기서 하겠다. 두 사람분으로 가져와라.”
“예.”
하명을 받은 시녀들이 소리 없이 물러났다. 나는 방 안에 들어선 순간부터 아까 보았던 시라크 황자처럼 굳어 있었다. 다른 것보다 침실이라는 장소가 나빴다. 이미 수차례 그 일을 겪었지만 나는 여전히 조금도 익숙해지지 못했다.
큰 거 좋아하는 엘 파셔답게 황제의 침소는 대단히 넓었다. 널찍한 공간에는 침대만 있는 것이 아니라 티테이블, 소파테이블에 간단히 업무를 볼 수 있는 책상까지 배치되어 있었다.
“앉아서 쉬거라.”
지스카르는 겉옷을 벗어 의자에 걸어놓고 바로 책상으로 향했다. 그는 책상 위에 어지럽게 쌓인 서류를 집어 들었다. 마차 안에서도 서류를 살피더니 황궁에 도착하자마자 또 서류부터 집어 든다. 잠시도 시간을 허투루 쓰기 싫어한다는 느낌이었다.
지스카르가 책상 의자에 앉는 것을 보고 나는 일부러 거기서 가장 멀리 떨어진 소파로 가서 앉았다. 하지만 이내 제 모습이 매우 꼴사납게 느껴져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정신 차려라, 레이. 네 배짱이 겨우 이 정도밖에 안 된단 말이냐.
지금 상황부터 정리해 보자. 일단 나는 지스카르에게 다시없는 특별대우를 받고 있었다.
첫째로 반말을 하고 욕까지 하는데 그걸 가만히 내버려두고 있다. 내가 노예고 놈이 황제라는 사실을 상기하면 파격도 이런 파격이 없었다.
게다가 암살자 비슷한 놈으로 의심받고 있는데 제대로 된 심문조차 하지 않았다. 곧장 침실로 데려온 것을 보면 앞으로도 한동안은 그럴 의사가 없다는 뜻.
놈에게 남창 취급받는 것은 정말 끔찍한 일이지만 이것조차도 따지고 보면 큰 행운이었다. 감옥에 갇혀 고문당하다가 처형당하는 대신 기회를 엿볼 시간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빈첸시오 성의 부모님과 노예들도 당분간 안전하게 지낼 수 있을 터였다.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음식이 도착했다. 시녀들이 테이블 위에 요리를 하나씩 내려놓았다. 지스카르는 서류를 내려놓고 자리에 앉으며 내게도 오라고 눈짓했다. 내키지 않았지만 식사를 거부해 봤자 나만 손해인지라 놈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지스카르가 물잔을 드는 걸 보며 나는 스푼을 들었다. 먼저 수프를 한 입 맛보았다. 그런데 무슨 맛이 이렇게 밋밋해? 인상을 찡그리며 수프 그릇을 옆으로 밀어내자 시중을 들기 위해 서 있던 시녀가 머뭇거리다가 뒤늦게 그것을 밖으로 치웠다. 주방장만 실력이 안 좋은 줄 알았더니 시녀들까지 일을 제대로 안 하는군.
물로 입 안을 헹구고 새우를 앞 접시 위로 가져왔다. 크기가 손톱만 해서 껍질이 잘 벗겨지지도 않았다. 웬만하면 남부해협에서 해산물 좀 들여오는 게 어떠냐.
그냥 다 포기하고 이것저것 입 안으로 밀어 넣고 있는데 지스카르가 나이프를 내리고 나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끼고 그를 마주 보았다.
“뭐지?”
“식사 예법에 익숙하군.”
지스카르가 내가 노예답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었다. 하지만 동요하는 대신 손에 들고 있는 포크를 까딱거리며 의뭉스럽게 웃었다.
“이런 생각은 해본 적 없나? 암살자들의 목표물은 대부분 높으신 분들이지. 암살 대상에게 쉽게 접근하기 위해서 암살자들에게 이 정도 식사 교양은 필수일지도 몰라.”
“…….”
지스카르는 여전히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나의 당돌한 대답에 옆에 서 있던 시녀들이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지스카르는 가만히 내 얼굴을 바라보다가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나도 태연하게 식사에 들어갔다.
나는 평범한 노예라고 하기엔 이상한 점들이 너무 많았다. 이 모든 것이 전생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지만 그걸 사실대로 털어놓는 수는 없는 일이다. 내 입으로 나의 전생이 대제국의 황태자라고 주장한다? 미친놈 소리 안 들으면 다행이지.
그렇다면 백번 입으로 말하는 것보다 행동으로 보여주겠다. 지스카르가 자기 눈으로 직접 보고 나를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줄 것이다.
확신하건대, 지스카르는 지금 이 순간에도 무표정한 얼굴 뒤로 나의 정체를 궁금히 여기고 있을 것이다. 나를 특별 취급하는 것도 틀림없이 그 탓이다. 오랜 고심 끝에 지스카르는 어떤 결정을 내릴까. 나를 끝까지 노예 취급할까. 그렇지 않으면 나의 특수한 사정을 이해할 것인가. 지스카르가 나에 대해서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내가 이곳에서 먼저 도망칠 수도 있겠지.
식사를 마치고 시녀들이 그릇을 전부 내어갔다. 지스카르는 서류를 마저 살피러 책상으로 이동했다.
할 일 없이 소파에 앉아 있는데 언제 지스카르의 지시가 있었는지 시종이 들어와 목욕을 권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권유를 받아들였다. 목욕을 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몸을 씻고 나오니 시녀가 시원한 음료와 간식거리를 내왔다. 오랜만에 시중을 받으니 편하긴 하다. 나는 소파에 앉으며 시녀를 불렀다.
“이건 치우고 따뜻한 홍차로 다시 내와라.”
“……예, 알겠습니다.”
시녀는 공손했지만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노예 놈이 뻔뻔하게 고개를 쳐들고 이래라저래라 하는 게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제가 마음에 안 들면 어쩌겠는가. 나는 다리를 모로 꼬며 실소했다.
간식을 주워 먹으며 소파에 앉아 지루하게 시간을 보냈다. 창을 내다보니 밖이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지스카르는 대충 일을 마무리하고 씻으러 나갔다가 옷을 갈아입고 들어왔다. 물에 젖은 머리를 가볍게 털면서 내가 앉아 있는 소파 쪽으로 걸어왔다. 놈이 날 내려다보며 손을 내밀었다. 나는 손을 쳐다보기만 하며 인상을 썼다.
지스카르는 어차피 그럴 줄 알았다는 분위기로 더 기다리지 않고 나를 확 안아 들었다. 그는 그대로 성큼 침대 쪽으로 향했다. 순간 모든 평정이 무너졌다.
“자, 잠깐……!”
지스카르는 당황하는 나를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머리카락을 귓가로 쓸어 넘기고 목 위로 입술을 댔다. 옆으로 피하려 하자 지스카르가 목덜미를 붙들고 바짝 끌어당겨 기어이 키스를 했다. 살을 빨아당기는 느낌에 소름이 돋았다.
“읏, 그만……!”
지스카르가 내 가슴께로 손을 가져가더니 윗옷 단추를 전부 풀었다. 그리고 옷깃을 젖히고 목덜미에서 쇄골 쪽으로 입술을 미끄러뜨렸다. 혓바닥을 넓게 써서 쇄골 사이를 깊숙이 핥았다. 뜨끈한 촉감에 나는 다시금 기겁을 했다. 저절로 고함이 튀어나갔다.
“그만 좀!! 네놈 머릿속에는 그 짓밖에 들어 있지 않은 거냐?”
지스카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놈은 묵묵히 손으로 맨살을 어루만졌다. 손끝에 유두 돌기가 걸리자 그것을 입으로 머금었다. 나는 깜짝 놀라며 어깨를 굳혔다. 긴장되어 어깨부터 전신이 조금씩 떨려왔다. 몸의 떨림을 억누르려고 애쓰는 동안 문득 한 가지를 깨달았다.
지스카르의 머리에 그 짓밖에 없는 게 아니다. 내 존재가치가 그것뿐인 것이다. 나는 잠자리 시중을 드는 노예이다. 나를 상대로 지스카르가 섹스를 하는 것 말고 무엇을 한단 말인가?
내가 이를 으득 깨물고 분노하는 동안 지스카르는 집요하게 유두를 혀로 핥고 괴롭혔다. 다른 손으로는 등을 어루만지면서 엉덩이 부근까지 미끄러져 내려왔다. 바지 속으로 침범한 손이 구멍 입구를 탐색했고 지그시 내부를 누르면서 들어왔다.
“으…….”
“이제 부은 것은 거의 가라앉은 것 같군.”
지스카르가 담담히 말했다. 녀석이 손을 빼고 나의 바지 허리끈을 풀기 시작했다. 질색을 하고 잠시 저항해 보았으나 당연히 허사였다. 족쇄를 차고 있어도 쉽게 입고 벗을 수 있도록 옆이 완전히 트이게 만들어진 바지가 금방 벗겨졌다.
아래만 헐벗겨 침대에 억눌러놓고 지스카르는 협탁에서 유리병을 꺼냈다. 뚜껑을 열자 익숙한 향유 냄새가 났다. 지스카르가 셔츠를 위로 밀어 올리고 향유를 내 등허리에 쏟아부었다.
차가워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지스카르는 내 허리를 어루만지면서 향유를 발라갔다. 나는 시트를 그러쥐고 가능한 한 참으려고 애를 써보았다. 등허리에 있던 손이 점차 아래로 더 내려갔다. 지스카르는 미끈대는 손으로 구멍 입구를 조금 쓸다가 중지를 세워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헉!”
빤히 이어질 일이었는데도 깜짝 놀라며 소리를 냈다. 나는 고개를 쳐들고 뒤로 손을 뻗어 지스카르의 팔을 붙들었다. 그러나 손가락은 점점 더 깊은 곳으로 향해갔다. 나는 어깨를 바짝 움츠렸다. 너무 심하게 긴장하여 어깨 근육이 뻐근했다.
“흑……. 흐…….”
쥐어짜듯 신음을 흘리며 시트를 끌어 쥐었다. 아까 고개를 치켜든 상태로 계속 뻣뻣하게 몸을 굳히고 있었다.
“매번 그렇게 긴장하는군.”
지스카르는 나지막이 한숨을 쉬며 등 뒤로 나를 끌어안고 기다려주었다. 나는 간신히 얕은 숨을 쉬며 고개를 조금 아래로 떨어뜨렸다. 뻣뻣하게 굳어 있던 내가 조금이나마 긴장을 풀자 지스카르는 다시 손을 움직였다.
미끈거리는 손가락이 안쪽을 가볍게 숙숙 쑤셨다. 가벼운 움직임에 약간 익숙해질 즈음, 놈이 입구에서 가장 깊은 곳까지 손가락을 한 번에 콱 밀어 넣었다. 나는 깜짝 놀라고 자지러졌다. 그사이에 숨이 무척 가빠져 있었다.
“헉헉……. 너, 네놈……!”
“가만히. 상처 입히고 싶지 않다.”
지스카르는 내 머리카락에 키스를 한 뒤 손가락으로 구멍을 좀 더 깊게 쑤시기 시작했다. 허리를 당기며 도망가면 벌을 주듯 손가락으로 더욱 거칠게 다그쳤다. 엉덩이가 들썩거리는 동안 손끝, 발끝이 오그라들었다.
“흣. 으으. 그 손……, 그만. 그만둬.”
정말 쥐어짜듯이 멈추라고 요구했다. 말을 들어줄 거라 생각하지 않았는데 진짜로 손가락이 쑥 빠져나왔다. 나는 그제야 입을 크게 벌리고 반 정도 억누르고 있던 숨을 토해냈다.
“하아, 하아……. 하아…….”
한참을 그렇게 헐떡이고 있다가 뒤를 보았다. 지스카르가 옷을 벗고 있었다. 순간 공포가 수배로 급증했다. 처음 놈의 것을 넣을 때 얼마나 끔찍했는지, 얼마나 치욕스러웠는지 그 감각이 생생하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지스카르가 내 다리 사이로 손을 넣어 무릎을 꿇게 하며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 놈의 성기가 바로 구멍에 닿았다.
“으……윽…….”
지스카르가 천천히 자기 것을 밀어 넣고 있었다. 난 시트를 꽉 움켜쥐고 이물감을 버텼다. 몸이 심하게 떨리는 것을 스스로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지스카르의 성기가 좀 더 깊이 파고들었다. 나는 더 이상 말도 잇지 못했다.
“여전히 아픈가?”
“아, 아…….”
안쪽이 매우 뻐근했다. 어떻게 여기까지는 들어갔지만 더는 불가능할 것 같았다. 그때 엉덩이 위로 차갑고 끈적대는 것이 흘러내렸다. 지스카르가 결합부에 향유를 한 번 더 들이부었다. 놈은 급하게 오지 않고 아주, 아주 천천히 들어왔다.
“아……. 하아, 흑…….”
“자, 그대로…….”
굉장히 공을 들여서 지스카르는 뿌리까지 삽입하는 데 성공했다. 정말로 상처 입히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을 나도 느낄 수 있었다.
“하아하아…….”
나는 침대에 얼굴을 박은 채 가까스로 숨만 몰아쉬었다. 몸에 옅게 땀이 스며들었다. 등을 돌리고 있어 보이지 않았지만 지스카르도 틀림없이 흥분해 있었다. 놈이 길고 습하게 숨을 토하는 소리가 들렸다. 숨을 들이마시는 동안에 지스카르가 내 허리를 붙들고 깊이 삽입한 성기를 느리게 당겼다.
“아으윽! 움직이지 마!! 아, 안……!”
순간 나는 크게 경련하며 뒤쪽으로 손을 뻗어 지스카르의 팔을 붙잡았다. 놈의 것이 좁은 내부를 한계까지 아주 빡빡하게 메우고 있었다. 상상일 뿐이지만 여기서 움직였다간 생살이 다 찢어져 버릴 것 같았다.
“흐으으. 지스카르, 지스카르…….”
“레이, 그렇게 힘을 주면…… 네가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 긴장을 풀어라. 숨을 깊이 쉬고…….”
“미친……. 그만해! 나, 난…….”
나는 허리를 웅크리고 하반신에 있는 대로 힘을 주고 벌벌 떨고 있었다. 구멍이 심하게 수축해 오자 지스카르도 조금 통증이 있는 듯 불편하게 숨을 토했다.
지스카르는 나를 달래듯 손을 밑으로 내려 내 음경을 쥐었다. 새로운 자극에 윽 소리를 냈다. 지스카르는 부드럽게 음경을 주무르며 발기를 유도했다. 몸이 달아오르자 허리 아래로 긴장도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지스카르가 다시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생각처럼 거기가 쉽게 찢어지거나 하진 않았다. 느리게 시작했지만 성기가 들락거리는 것이 점차 수월해졌다. 지스카르는 금방 속도를 더했다. 몸이 앞으로 밀릴 정도로 지스카르가 거세게 성기를 퍽퍽 박아댔다.
“지스……카르! 으윽, 지스카르!”
자꾸 다리가 움츠러들었다. 순식간에 사타구니가 뻐근할 만큼 피가 쏠렸다. 지스카르가 팽팽하게 발기한 음경을 거칠게 비틀고 자극하며 흥분하기 시작한 나를 더욱 궁지로 몰아갔다.
놈이 성기를 완전히 뺐다가 끝까지 찍어 누르는 행위를 반복했다. 콱 찍힐 때마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사정감에 부들부들 떨었다. 진짜 미칠 일이었다. 앞을 자극당하면서 느끼는 것은 당연한 생리작용이라 쳐도 왜 뒤를 쑤시는데 이런 기분이 드는 건지.
“하아, 흣…… 지스카르……. 그만, 아……!”
이대로 쾌락에 절여져서 사정해 버릴 것 같았다.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과 흥분한 채 끝까지 가버리고 싶은 욕망이 공존했다.
지스카르가 내 허리에 얹은 손에 지그시 힘을 주었다.
“좀 더…….”
낮은 톤의 음성과 조금 불규칙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좀 더 불러……!”
“지스카르, 으읏…….”
한계까지 밀어붙여 열락에 완전히 사로잡혔다. 나는 그만두라는 말 대신 성급하게 지스카르를 불렀다. 지스카르가 나보다 더욱 성급하게 내벽을 쳐올렸다. 내 음경을 쥐고 쥐어짜듯이 자극했다. 정말로 더 견딜 수가 없었다.
지스카르가 몸을 바짝 짓누르며 몸속에서 사정했다. 나도 완전히 막바지에 도달했으나 지스카르가 음경을 아플 만큼 강하게 틀어쥐고 있어서 아직 사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이런 식으로 사람을 괴롭히다니.
그때 놀란 것처럼 지스카르의 손이 확 떨어져 나갔다. 나는 겨우 신음을 지르며 정액을 밖으로 내보냈다. 지스카르는 꼭 사과라도 하는 것처럼 음경을 주물러주며 나머지를 전부 사정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하아. 흐으…….”
지스카르가 등 뒤에서 힘을 잃은 나를 끌어안았다.
“실수했군…….”
지스카르도 숨소리가 흐트러져 있었다. 나를 바로 사정하지 못하게 한 변명이랍시고 놈이 다시 말했다.
“네 몸에 너무 빠져서…….”
“그냥 닥쳐!”
나는 순간 발악하듯 소리쳤다. 천만다행으로 지스카르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편하게 침대에 눕혀주고 이불을 끌어 덮어주었다. 잠시 후 그 자신도 옆자리에 푹 누웠다. 그런데 가만히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거 아주 짜증 나는 모양새가 아닌가.
절대 한 침대에선 못 잔다는 생각에 비실대면서도 침대 밖으로 향했다. 그때 지스카르가 내 허리 위로 팔을 둘러서 붙들었다.
“아직 여유가 있다면 한 번 더 해도 좋다만.”
“윽……. 으…….”
도망가는 걸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스르르 허리를 압박하는 손이 풀렸다. 그와 동시에 나도 그냥 침대에 엎드려 누웠다. 만사 포기하고 누워 있다 보니 슬슬 졸음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대로 수마에 몸을 맡겼다.
* * *
“실물을 그대로 옮겨 그리지 않은 걸 보면 코르디오 계열 그림은 아니고……. 그림자 처리 방식을 보니 역시 가스팔 계열인가? 황제의 침소에 붙은 그림이니 거장 가스팔이 직접 그린 것?”
벽에 걸린 사과 그림을 노려보며 나는 깊은 고뇌에 빠졌다. 그러나 이내 한숨을 터뜨리며 돌아섰다. 절그럭대는 족쇄 소리가 신경에 거슬려서 소파에 주저앉았다.
엿새째, 아니 이레째인가? 지스카르의 침실에 눌어붙어 있게 된 지가.
음식이나 옷, 시중인, 모든 것이 풍족하게 주어졌지만 이곳 침실에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었다. 그리고 밤이 되면 일과를 마친 지스카르가 되돌아왔고, 어김없이 그 짓!
이 패턴이 며칠째 반복되니 뇌가 굳어가는 것 같았다. 나는 혹시 지스카르가 그걸 노리고 일부러 이러는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의심해 보는 중이었다.
“으음……!”
혼자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가 홧김에 침대맡에 달린 줄을 잡아당겼다. 필요한 것이 있을 때마다 이것으로 호출하면 황제궁에 속한 시녀들이 와서 시중을 들어주었다. 이번에도 재깍 시녀가 들어와 공손히 인사했다.
“무엇이 필요하십니까?”
“브리튼 122년산 앙꼴주. 보관 중인 것이 있느냐?”
일순 시녀가 눈꼬리를 휙 치켜올렸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들었다는 표정이랄까. 그녀는 간신히 동요를 숨기고 다시 정숙한 황실의 시녀로 되돌아와 대답했다.
“구하기가 힘든 술입니다.”
“그래서 없다는 말인가? 황제의 술 창고가 부실하기 짝이 없군.”
“앙꼴주는 술이라 언급하기도 힘든 과실주라, 찾는 분이 없으시기에 구비해 두지 않았던 것뿐입니다.”
“브리튼 150년산은?”
물론 그것도 대단히 귀한 술이다. 물량이 너무 없어서 아무리 돈을 줘도 구할 수 없는 종류의. 앙꼴주를 즐겨 마시는 사람도 없고 그냥 구색으로 갖춰놓은 것일 테니 황제궁에도 기껏해야 한두 병뿐일 것이다.
시녀의 고뇌가 눈에 훤히 보였다. 몇 병 없는 귀한 술을 노예 따위에게 주자니 속이 쓰릴 테지. 그녀는 굉장히 망설이면서 대답했다.
“있……습니다…….”
“가져와.”
시녀는 죽상을 하고 물러났다. 이내 브리튼 150년산 앙꼴주가 내 앞에 놓였다. 시녀는 방을 나설 때까지 미련을 못 버리고 두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이건 좀 유쾌하다. 나는 피식 웃으며 잔에 밑바닥만 약간 채울 만큼 술을 따라 마셨다. 알코올은 거의 없고 단맛만 입 안에 남았다. 과거에 나는 술을 마시고 싶을 때 가끔씩 앙꼴주만 입에 대곤 했다. 술에 취하는 것이 싫었다. 취해 있는 동안 누가 뒤통수에 칼을 꽂을지 알 수 없었으니까…….
“…….”
나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 줄을 잡아당겼다. 시녀가 매우 불안한 얼굴로 들어왔고 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얼마 후, 탁자 위에는 파티장을 방불케 할 만큼 많은 종류의 음식이 올라왔다. 대부분 끄트머리만 약간씩 맛보고 포크와 나이프를 내렸다.
“이거 간은 한 건가?”
트집이 아니라 정말로 싱거워서 그랬다. 이곳의 모든 음식은 전부 내 입맛에 맞지 않았다. 스트라스가 향신료를 많이 써서 다양한 맛을 즐기는 반면, 엘 파셔는 음식을 싱겁게 대충 만들어 막 먹는 편이었다. 엘 파셔 놈들의 의견은 좀 다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렇다.
사실 난 음식을 전혀 가리지 않는다. 노예로 태어나 멀건 죽에 딱딱한 빵만 먹고도 불평 한 번 하지 않았으니까. 그렇다고 좋은 음식을 구별할 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끊임없이 테이블에 음식이 올라왔다. 그중에서 겨우 입맛에 맞는 것을 두어 가지 찾았을 즈음이었다. 시녀장까지 총출동해서 주위가 다소 분주했는데,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지스카르가 잠시 침실에 들른 것이다. 그는 이 난장판을 말없이 가만히 둘러보았다.
“폐, 폐하!”
시녀장이 머리를 조아리며 마치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외쳤다. 제멋대로 날뛰고 있는 노예에게 황제가 따끔하게 불호령을 내려줄 것으로 기대하는 것 같았다. 상황 파악을 끝낸 지스카르가 사람들에게 물러나라고 명했다. 황제가 이 난장판에 대해 별 언급을 하지 않는 것에 시녀들은 대단히 놀란 것 같았다.
지스카르는 맞은편 소파에 와서 앉았다.
“시녀들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닐 텐데?”
“…….”
무고한 시녀들을 괴롭히며 화풀이했던 것이 사실이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짚었다. 레브노아드, 그새 완전히 타락해 버렸구나. 아니면 레이, 이제 막 성인식을 치른 애송이의 치기 어린 반항이라는 거냐.
내가 별 쓸모없는 생각을 하는 동안 지스카르는 여분의 포크로 타르트를 집어 먹었다. 나는 불만스레 눈을 뜨고 지스카르를 쳐다봤다.
“그런데 대낮에 여긴 어떻게 왔지? 벌써 일이 끝났을 리 없을 텐데?”
“한가하더군.”
그러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서류를 폈다. 아무리 봐도 한가해 보이지 않았다.
“폐하.”
밖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허가가 떨어지자 친위기사가 문을 열고 들어와 머리를 깊이 조아렸다.
“피안델 후작께서 급한 일로 독대를 청하고 계십니다.”
지스카르는 기사의 말을 듣고도 아무 대답 없이 그 자세로 약 1분 정도 더 앉아 있었다. 언제나 칼같이 행동하던 녀석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그 행동에 깔린 귀찮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통쾌해서 절로 웃음이 났다.
지스카르가 피식거리고 있는 나를 보더니 서류를 탁자 위에 두고 일어났다.
“한 시간 내로 돌아오겠다.”
“…….”
순간 만면의 미소가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젠장, 영원히 돌아오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다.
지스카르가 나가고 주위가 다시 조용해졌다. 쓸데없이 음식을 몇 개 더 주워 먹다가 방 안을 돌아다녔다. 문득 지스카르가 놓고 간 서류가 눈에 띄었다. 간식을 먹으면서 대충 훑어볼 물건이니 대단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흥미 삼아 한번 읽어보았다.
“클레리몬 남작, 빙켄 남작 간의 조세 조정 건.”
계속 읽다가 약간의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먼저 이런 한심한 걸로 쌈질을 할 만큼 세상이 평화롭다는 것과.
“내부 세역 계산이 전부 엉터리라는 것. 황제에게 제출하는 문서를 이따위로 만들어? 네놈들은 전부 모가지다.”
나는 책상으로 걸어가 펜을 뽑아 들었다. 줄을 북 그어주려다가 문득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잠시 후 줄을 긋고 오류 표기를 했다. 글자 같은 건 실로 오랜만에 써보는데 어색한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손에 착 달라붙는 것처럼 과거의 감각이 그대로 살아났다.
왠지 굳어 있던 뇌가 눈을 뜬 기분이다. 순식간에 조세 조정 건을 정리하고, 책상에 널려 있는 다른 서류를 펼쳐 보았다. 이번 건은 엘 파셔의 체계가 다소 생소해서 약간 생각을 해야 했다. 그런 식으로, 나는 어느 사이 서류를 처리하는 일에 푹 빠져버렸던 것 같다.
덜컥.
문 열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지스카르가 서류를 붙들고 있는 나를 보더니 가까이 다가왔다. 머리 위에서 내가 마음대로 끼적여 놓은 종이들을 훑어보다가 입을 열었다.
“요즘 암살 단체에서는 서류 업무도 가르치는 모양이군.”
“…….”
나는 입을 다물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지스카르가 내 어깨를 눌렀다. 나를 의자에 다시 앉혀놓고 지스카르는 소파로 가 앉았다.
“계속해라.”
내가 어느 정도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해 보겠다는 말이다. 내가 좋아서 마음대로 시작한 일이지만 놈의 의도에 순순히 협조해 주고 싶진 않았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
지스카르는 소파테이블 위에 술병이 있는 것을 보고 그쪽으로 걸어갔다. 방금 들어와서 목이라도 말랐나 보다. 생각 없이 술을 따라서 한 모금 머금은 그가 갑자기 술잔을 입에서 떼고 잔을 빤히 보았다.
지스카르는 죄 없는 보라색 앙꼴주를 한참 노려보다가 고개를 돌려서 내게 시선을 주었다. 그는 잠시 뒤 앙꼴주를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명령에 따른다면 오늘 밤에는 안지 않겠다.”
“……!”
나는 퍼뜩 지스카르를 마주 보고 반응했다. 저런 제안에 좋다고 냉큼 서류 정리를 하는 것도 꼴이 우스웠지만……, 그래도 거절하기 힘든 제안임은 사실이다. 오랜만에 펜을 쥐는 것도 솔직히 즐거웠고.
결국 지스카르의 제안에 응했다. 내가 서류를 읽는 동안에도 지스카르는 계속 소파에 앉아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놈이 내 얼굴 관찰하는 버릇이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저렇게 쳐다보니 역시 신경이 쓰인다. 다행히 지스카르는 시선을 거뒀고, 나는 완전히 일에 빠져들 수 있었다.
하루가 천천히 저물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