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4/43)

3.

희미한 빛이 커튼 사이로 스며들어 왔다. 아침이 되었구나 생각하며 옆으로 돌아누웠다. 그런데 지스카르의 얼굴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벌떡 몸을 일으켰다.

침대가 크게 흔들렸다. 지스카르도 기척을 느끼고 눈을 떴다. 그는 나른하게 일어나면서 말했다.

“항상 일찍 일어나는군.”

이불이 흘러내리며 아무것도 입지 않은 지스카르의 상반신이 그대로 드러났다. 젠장, 내 눈! 아침부터 저런 걸 보고 계속 살아야 하나?

지스카르는 확실하게 약속을 지켰다. 서류 정리를 시키는 대신 나를 안지 않기로 한 약속 말이다. 하지만 지스카르는 꼬박꼬박 자기 침실에서 잠을 잤고, 나는 매일 밤 놈과 같은 침대에서 극도로 불편한 숙면을 취해야 했다. 나는 치를 떨면서 말했다.

“잠은 부인과 함께 자라. 황후나 후궁과의 잠자리가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신체 건강하고 용모 단정한 여성을 첩으로 삼아!”

지스카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시녀를 불러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나도 그냥 옷이나 갈아입기로 했다. 벽에 대고 소리치기는 그만두기로 한 것이다.

지스카르는 급한 일이 있을 때를 제하고는 항상 아침 식사까지 이곳에서 해결하고 나갔다. 시녀들은 이제 아침이 되면 자연스럽게 2인분의 음식을 침실에 차려놓았다. 나는 마지막으로 벽을 향해 한마디만 더 했다.

“……아침 식사 정도는 가족과 해라.”

“앉아라.”

지스카르가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내키지 않았지만 놈이 말하는 대로 가서 앉았다. 아까 옷을 입으면서 짬을 내서 훑어보던 서류를 손에 든 채로.

지스카르가 다시 말했다.

“그건 내려놓고.”

뚝뚝 끊어지는 짧은 명령조에 갑자기 속에서 울컥하고 치밀어 올랐다. 아니 일일이 열 받지 마라, 레이. 밤새 시달리지 않게 된 것이 어디냐. 깊이 심호흡을 하는 동안 다시 여유를 되찾았다. 나는 서류를 팔랑팔랑 흔들었다.

“후우, 식탁 앞에서 서류 보기. 네가 자주 하던 짓이지? 원래 애들은 어른이 하는 걸 보고 배우는 법이거든.”

지스카르는 눈앞에서 팔랑대는 서류를 빼앗아갔다.

“아직 일을 전부 끝내지 못했나 보지? 생각보다 일 처리가 능숙하진 못하군.”

“심심해서 지역별로 세금 내역을 분류해 봤는데 어때?”

지스카르는 뒷장에 정리된 표를 확인하고 고개를 들었다.

“자랑하고 싶어서 일부러 서류를 식탁까지 가져온 것이냐?”

“그게 네놈 추리력의 한계인가?”

“자랑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이건 왜 식탁 앞에까지 들고 왔지?”

“눈에 띄는 이름이 있어서. 바룸 남작. 일 처리가 아주 깔끔하다. 감각도 좋고. 이런 인간이 밑에 있으면 일거리가 반으로 줄어들지. 재무부에 등용하면 아주 편할 텐데 말이야.”

“…….”

“그냥 지나치기 아까워서 하는 말이다. 개인적으로 인재를 얻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다고 생각하는지라.”

지스카르가 갑자기 입을 꾹 닫았다. 내가 서류를 만진다고 해서 진짜 엘 파셔의 관리인 것도 아니고, 사람을 천거하는 이야기까지 나눌 생각은 없는 모양이지. 뭐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나는 나이프로 청새치 살을 발라 입 안에 집어넣었다. 정말 지지리도 맛이 없다. 스트라스에서 주방장을 데려와 요리하는 법을 가르치든지 해야지.

그때 불쑥 지스카르가 입을 열었다.

“……바룸 남작이라면 짐도 과거에 눈여겨본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피안델 후작이 아끼는 가신이다. 그를 짐의 사람으로 들이려 했다가 쓸데없이 분란만 일으키게 될 것이다.”

나는 픽 웃으며 지스카르를 올려다봤다.

대꾸하지 않을 것처럼 있더니.

“저 정도면 약간의 분란 정도는 감수할 가치가 있는 인재다. 척하면 견적이 나오는데 그걸 모르다니. 아, 이 샐러드는 맛이 괜찮군. 간신히 먹을 게 하나 생겼어.”

“분란을 감수할 가치가 있다? 그건 손이 모자라는 절박한 상황일 때에나 해당하는 말이지. 짐의 치하에 모든 정국은 안정되어 있다. 평화로운 시기엔 많은 인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시대를 풍미하는 영웅도 난세에나 존재하는 법.”

문득 샐러드를 뒤적거리던 손을 멈추었다. 갑자기 기분이 묘했다.

“……휴전협정. 평화의 시대라는 거군.”

내가 황태자일 무렵 이 대륙엔 십 년 가까이 전쟁이 이어지고 있었다.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서 가장 절실한 것은 첫째도 둘째도 인재. 강력한 기사, 계산이 빠른 관리, 하다못해 손이 야무진 시종까지, 많은 인재들을 내 사람으로 만드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휴전협정이 성사되고 평화가 도래한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는 모양이다.

나는 포크를 들어 샐러드 접시 가운데에 쿡 꽂았다.

“그래도 나라면 바룸 남작을 손에 넣는다. 직접 만나봐야 알겠으나, 내 직감에 그자는 알짜배기야. 여유 있을 때 더욱 내 것으로 만들어놔야지. 안정이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는 법이니.”

“인재를 지나치게 탐한 나머지, 기껏 유지되고 있던 안정을 스스로의 손으로 깨버릴지도 모르지.”

지스카르와 나 사이에 따가운 시선이 교차했다. 지스카르는 시선을 고정한 채 내가 호평했던 샐러드를 집어 먹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짜다.”

“아, 도대체 음식 맛을 모른다니까!”

아침 식사가 끝난 후 지스카르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나가자마자 아침 어전 회의를 주재하고 쉴 틈도 없이 알현을 원하는 이들을 만나야 할 것이다. 과할 정도로 성실한 타입 같으니 손수 살펴볼 서류도 아주 많겠지. 나는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일만 열심히 할 것이 아니라 오늘쯤에서 황제의 의무도 이행하도록 해라. 후궁을 찾아서 합궁이나 한 번 하고 와. 나도 오늘 하루 정도는 편하게 취침해 보자.”

“…….”

지스카르가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나는 뭐가 잘못됐냐고 뻔뻔하게 어깨를 들썩였다.

방문이 열리기 직전이었다.

“지스카르!”

막 밖으로 나가려던 지스카르가 고개를 돌렸다.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라 약간 머쓱해졌다. 그러나 이왕 불러 세운 김이다. 나는 지스카르에게 요구했다.

“밖에 나갈 수 있게 해줘.”

“허락할 수 없다.”

말을 꺼내자마자 지스카르가 즉각 거절했다. 게다가 묘하게 강경하기까지 했다. 어쨌든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대답이었다.

“……알았다.”

왜 갑자기 이런 멍청한 소리를 했을까. 요즘엔 밤에 시달리는 일도 없고 태평하게 잡담이나 하면서 지내다 보니 무슨 요구를 해도 다 들어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나 보다. 레이, 이런 멍청한 녀석. 자기 처지가 어떤지 자각해.

남 말하는 것처럼 스스로를 탓했다.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외출을 허락한다면…….”

나는 고개를 들었다. 지스카르가 뒤를 이어 말했다.

“네 정체가 무엇인지 말하겠느냐?”

“나는 대답할 것이 없다. 그리고 협상의 기본이 안 되어 있군. 사소한 자유를 허락하는 대가로 상대가 가진 최대의 비밀을 얻겠다고?”

나는 한심하다고 코웃음을 쳤다. 어차피 지스카르도 큰 기대를 걸고 한 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는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좀 더 쉬운 제안을 하지. 오늘 밤 스스로 다리를 벌려 짐에게 안겨라. 그리하면 감시인을 붙여 근방을 산책하는 것 정도는 허락하겠다.”

“뭐라고?”

순간 목소리 끝이 날카롭게 올라갔다.

“이 발정난 개 같은 놈이! 감히 그따위 망발을!!”

“그것으로 됐다. 그냥 얌전히 방에 있거라.”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욕을 퍼붓고 있는데 지스카르는 쓰게 말했다. 나가고 싶다는 말을 못 하게 하려고 일부러 과한 말을 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문이 열리기 직전 소리쳤다.

“잠시만!”

지스카르는 다시 멈춰 섰다. 나는 숨을 크게 쉬었다. 자신도 모르게 옷에 손이 갔다. 하지만 생각을 달리해 봐라. 이건 기회다. 이 상태로는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다. 나는 언제까지 방 안에 갇혀 있게 될까. 죽을 때까지? 아니, 지스카르가 이 놀이를 지겹다고 느낄 때쯤이겠지!

“하……겠다…….”

그 정도 굴욕쯤은 이제 참고 넘길 때도 되지 않았나. 놈에게 한두 번 당한 것도 아니잖아. 이제 와서 한 번 더 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오히려 지스카르는 실언을 한 것이다. 내가 이 기회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밖에 나갈 수 있게 허락해 준다면……, 네가 원하는 대로 하겠다.”

모멸감을 삼키면서 정확하게 다시 말했다.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지스카르는 대제국의 황제고, 나는 한낱 침노일 뿐이다. 새삼스럽게 발목에 달린 족쇄가 거치적거렸다.

지스카르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놈이 뒤늦게 제안을 철회할까 봐 나는 서둘러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지스카르가 사람을 불러들였다.

* * *

족쇄까지 단 노예 하나를 감시하기 위해 황제의 친위기사가 무려 다섯 명이나 동원되었다. 더 놀라운 것은 그중에 낯익은 친위대장까지 끼어 있다는 것이다.

“이름이 크리스……였던가.”

“크리스티안이다.”

“그건 됐고, 심심한 동정을 표하마. 이런 짓이나 하자고 친위대 대장이 된 건 아닐 텐데 말이다.”

크리스티안이 내 말투에 표정을 잔뜩 찌푸렸다. 이 정도면 익숙해질 만도 한데 일일이 반응하는 게 피곤하지도 않은 모양이다.

기사 중에 낯익은 자가 한 사람 더 끼어 있었다. 붉은 머리칼의 기사 던필, 그자도 날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실로 오랜만에 침실을 빠져나왔다. 복도를 걷는데 주위 시선이 따가웠다. 길 가다 마주치는 사람들이 아닌 척하면서 나를 한 번씩 힐끔거렸다. 내 행색이 특이하긴 하다. 발목에 족쇄를 찼는데 죄인으로 보이진 않고 멀끔하게 차려입은 채로 돌아다니고 있으니까.

내 외모나 족쇄를 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금방 내가 누구인지 파악한 것 같았다. 황제가 아예 침실에다 가둬놓고 매일같이 찾는 상대이니 소문이 아주 자자하게 퍼져 있겠지.

나는 애써 짜증을 털어내고 움직였다. 황제궁을 벗어나는데도 기사들은 나를 저지하지 않았다. 생각보다 내게 허락된 행동반경이 넓었다. 설마 황궁을 빠져나가는 것까지 허락되지는 않았겠지만.

문득 좋은 생각이 나서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크리스티안이 나를 저지했다.

“이 이상 가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안 된다고?”

내 행동반경은 중앙정원을 기준으로 우측까지였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며 멀찍이 떨어진 건물에 시선을 주었다. 유난히 높은 탑. 내 예상이 맞는다면 저곳이 마탑일 것이다. 구경을 핑계로 마탑에 들어가 운 좋게 마정석이라도 하나 얻을 수 있다면 단숨에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텐데.

마력이 담긴 보석을 ‘마정석’이라고 말한다. 마법사는 마정석에서 마력을 얻어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마정석은 매장량이 그렇게 풍부하지 않다. 게다가 내재된 마력을 전부 사용하고 나면 평범한 보석으로 되돌아간다. 한마디로 소모품이라는 것이다. 이쯤 말하면 알겠지만 마정석은 어마어마한 초고가품이다.

나는 아쉬움을 삼키며 돌아섰다. 대신 행동이 자유로운 지역을 샅샅이 조사하면서 다녔다.

늦은 오후 즈음에 익숙한 기합 소리를 듣고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 황실 근위기사대의 연병장이 있었다. 나는 눈에 이채를 띠었다. 엘 파셔가 자랑하는 근위대의 훈련 장면을 직접 볼 수 있게 되다니 운이 좋았다.

나는 연병장을 지나며 기사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흥미롭게 눈에 담았다. 감독하는 상관도 없는데 게으름 피우는 자들도 없고 기사들 군기가 잘 잡혀 있었다. 하지만 갈수록 눈살이 찌푸려졌다. 실력이 수준 이하인 놈들이 자꾸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나는 결국 걸음을 완전히 멈추었다.

혹시 내가 착각을 했나 싶어 기사들의 제복에 박힌 문장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심장을 뚫는 신성한 세 개의 검, 엘 파셔 황실 근위기사대의 문장이 확실했다.

“표정이 왜 그렇게 찌그러져 있어?”

내 표정을 보고 던필이 물었다. 이미 짐작은 했지만 이자는 꽤 사고뭉치인 듯, 상관인 크리스티안이 쓸데없는 말 말라고 눈치를 주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는 연병장을 응시하며 인상을 찡그렸다.

“엘 파셔의 최정예만 모였다는 황실 근위대 수준이 왜 이렇게 저질이지?”

“뭐라고?”

던필이 내 말을 듣고 황당하다는 얼굴을 했다. 하지만 말을 번복할 생각이 없었다. 전생에 나의 수족으로 움직였던 황태자 직속 친위기사들이 나서면 이런 놈들 따위 한 시간 내로 쓸어버릴 수 있을 거라 장담한다.

정말 이것들이 엘 파셔의 황실 근위기사? 그 옛날 내가 레브노아드 황태자로 전장을 뛰어다닐 때 엘 파셔 황실 근위기사들은 아군의 가장 위협적인 적이었다. 단순히 무력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끈질기게 사람 발목을 잡고 훼방을 놓는데 얼마나 치가 떨리던지.

놈들의 질긴 심줄과 정예한 무력은 내가 가장 잘 안다. 그런데 내가 없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런 폐물 집단으로 전락해 버렸단 말인가?

지스카르가 했던 말이 갑자기 생각났다. 평화의 시기엔 인재가 많이 필요로 하지 않다고.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오랫동안 전쟁이 없었던 것 같은데 설마하니 평화가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다는 것인가? 진짜로? 이 정도 수준이라면 나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좋아.”

아직 속단하긴 이르다는 생각에 직접 그들의 실력을 확인해 보기로 결심했다. 나는 연병장 안으로 들어가서 나란히 정리되어 있는 검 중의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귀한 무기에 멋대로 손을 대자 훈련 중이던 근위기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 이놈! 어디다 손을 대!!”

잔뜩 성이 난 근위기사가 곧장 날 향해 걸어왔다. 나는 그의 접근을 반기며 검을 바로 쥐었다. 그런데 크리스티안이 갑자기 내 앞을 가로막고 섰다.

황제의 최측근 호위부대인 친위기사대의 대장, 크리스티안의 얼굴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근위기사는 그 자리에 멈춰 섰고 금방 내가 누구이고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 것인지 파악을 끝냈다. 친위대장이 두 눈을 벌겋게 뜨고 있는데 황제의 첩에게 함부로 굴 수는 없는 일. 근위기사는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었지만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아무래도 내가 원하는 그림을 만들려면 크리스티안부터 먼저 설득해야 할 것 같았다.

“크리스티안 경. 내 재미있는 것을 보여주지. 경은 뒤에서 구경만 하고 있으면 되는데, 어때?”

그는 내가 무엇을 하려는지 궁금한 것 같았으나 깐깐한 태도로 고개를 젓기만 할 뿐 쉽게 넘어오지 않았다. 그가 내게서 검을 빼앗아 제자리에 내려놓으려 할 때였다. 붉은 머리의 친위기사 던필이 불쑥 크리스티안의 팔을 붙잡았다.

“대장님. 우리 재밌는 거, 구경 한번 해봅시다.”

“던필! 무슨……!”

“진짜 문제가 생길 거 같으면 그때 나서도 되지 않습니까?”

던필이 막무가내로 크리스티안을 붙잡고 잘해보라는 듯 나를 향해 씨익 웃었다. 황제 친위대의 기강이 저렇게 해이해도 되는지 몹시 걱정되는 광경이었지만, 어쨌거나 덕분에 좋은 기회를 얻긴 했다. 나는 검을 몇 개 들어서 무게를 가늠해 보고 가장 손에 잘 맞는 것으로 선택했다.

“이 정도면 나도 휘두를 수 있겠군. 좀 무겁긴 하지만…….”

“너 이놈, 진짜 그거 안 내려놔?”

결국 참다못한 근위기사가 소리를 질렀다. 근위기사는 움직이기 전에 힐끗 친위대 기사들을 보았는데 던필이 마음대로 하라며 고개를 끄덕이자 성큼 이쪽으로 다가왔다.

“혼쭐이 나기 싫으면 그 검을 내려놓아라. 네가 함부로 손을 댈 수 있는 물건이 아니야.”

그가 묵직하게 기세를 드러내며 내게 경고했다. 하지만 건방진 노예에게 겁을 주겠다는 의지만 있을 뿐 검을 들지도 않았다. 나는 얌전히 서 있다가 다짜고짜 검을 크게 휘둘렀다. 방심하고 있던 근위기사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본능적으로 검을 뽑았다.

카캉!!

충분히 막을 수 있도록 일부러 여유를 주고 공격했다. 근위기사가 검을 세워 공격을 막아낸 것을 보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이익……!”

난데없이 기습을 당한 근위기사는 크게 분노했다. 얼굴이 시뻘겋게 붉어지는 것을 바로 눈앞에서 보았다. 이 정도로 도발했으면 저자도 진심으로 덤비겠지. 나는 아래로 검을 당겨서 일단 대치 상태를 풀고 뒤로 물러났다.

“저놈 검을 익힌 적이 있군!”

멀찍이 있던 근위기사가 낮게 외쳤다. 나는 스스로 마법사를 자처했으나 검에도 상당히 조예가 있었다. 맨몸인 상태로는 일반 양민과 별다를 것이 없지만, 검이 주어진다면 나도 어느 수준까지는 힘을 쓸 수 있다.

“자, 이번에는 방심하지 마라. 내가 검을 쓸 줄 안다는 거 잘 기억하고.”

나는 당부의 말을 하며 연무장 안쪽, 좀 더 넓은 장소로 걸어갔다. 걸을 때마다 족쇄가 거치적거렸다. 제대로 검을 겨룰 수 있게 된 것은 좋았는데 족쇄를 달고 싸우는 건 아무리 수준 이하의 상대라도 좀 무리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노예로 태어나 한 번도 단련한 적이 없어서 완력 등이 크게 떨어지는 것도 문제였다.

하지만 질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검이 마치 손아귀에 달라붙는 듯했다. 십 년 이상의 공백이 있었음에도 그 옛날 레브노아드가 가지고 있던 모든 기억과 지식, 손의 감각이 바로 어제 일처럼 떠올랐다.

노예로 태어나 책 한 권 읽은 적이 없지만 황제가 보던 업무를 별 어려움 없이 쉽게 해결할 수 있었던 것처럼, 검을 다루는 것에도 전혀 무리를 느끼지 못했다.

“이 건방진 놈이!”

근위기사가 거칠게 뒤따라왔다. 그가 바로 지척에 다다라 검을 높게 들었다. 황제의 남첩이라는 편견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는지 근위기사는 여전히 방심하고 있었다. 그는 아무런 기교도 없이 그냥 힘으로 찍어 누르려고 했다.

나는 반걸음 옆으로 물러서며 쉽게 검을 피했다. 빈약한 몸뚱이가 의도한 대로 완벽하게 움직이진 않았지만 느려터진 내려치기를 피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기사의 검이 목표물을 잃고 허공을 크게 베었다. 검을 휘두른 다음 빈틈이 지나치게 컸다. 나는 바로 거리를 좁히며 검을 내질렀다.

쉬익.

매서운 소리를 내며 검이 근위기사의 목 바로 옆을 스쳐 지나갔다. 검이 목젖을 꿰뚫기 직전, 검의 궤도를 틀어 근위기사의 목을 스치는 수준에서 그치게 했다. 근위기사도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알았고 목구멍 안으로 짧게 신음을 질렀다. 나는 검을 내리며 말했다.

“자, 한 번 더.”

“아, 아니야! 이건 방심해서 그런 거다! 방심했다고!”

이번에야말로 진심으로 덤벼보라고 기회를 주었으나 근위기사는 검을 드는 대신 동료들을 쳐다보면서 변명을 했다. 동료들이 바로 동조해 주지 않자 그는 더욱 목소리를 높이며 변명거리를 찾았다.

“그 입 좀 다물지? 설령 방심한 탓이라 해도 그것이 자랑은 아닐 텐데?”

근위기사의 행태가 한심하기 짝이 없어 혀를 찼다. 엘 파셔 황실 근위기사대가 왜 이렇게 바닥까지 추락해 버린 거냐? 지스카르 그놈이 일은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실상을 캐보면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건가?

근위기사는 죽일 듯이 나를 노려보았다. 얼굴이 벌게진 데다 눈에 핏발까지 섰다.

“건방진 놈이! 정말로 방심했을 뿐이다! 네가 잘나서 이긴 줄 알지!”

그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돌진해 왔다. 드디어 근위기사가 진심이 되어 검을 들었다. 나는 검끝을 끝까지 지켜보며 상대의 공격을 옆으로 빗겨서 쳐냈다. 중심을 잡기 위해서 자연스럽게 다리를 뒤로 뺐는데 순간 족쇄에 다리가 덜컥 걸렸다. 더 움직였다간 뒤로 넘어질 것 같았다. 내가 어정쩡하게 서서 빈틈을 보이자 근위기사는 눈을 번뜩이며 무차별로 공격을 퍼부었다.

나는 정면에서 막아야 할 공격은 최대한 피했다. 자칫하면 현격한 힘의 차이로 자세가 무너질 수도 있었다. 신중하게 비껴서 쳐야 할 공격, 흘려내야 할 공격 등에만 대응했다. 검이 맞닿는 순간 지체 없이 검을 당겨 상대의 공격을 밑으로 흘려보냈다.

근위기사는 검이 자꾸만 아래로 빠지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이를 악물고 이쪽 흐름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전력으로 위치를 바꿔가며 공격을 퍼부었다. 하지만 모든 공격이 전혀 통용되지 않았다.

“말도 안 돼.”

누군가의 신음성이 들렸다. 근위기사가 한 수 아래인 것이 그들의 눈에도 명확했기 때문이다.

촤륵.

나는 힐끗 족쇄를 확인하며 발과 발 사이의 간격을 가늠했다. 두 발로 땅을 딛고 완벽하게 안정적인 자세가 잡혔다고 판단되었을 때 방어 위주의 검을 순식간에 공세로 전환했다.

쉬익!

검을 깊이 횡으로 휘둘렀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근위기사의 제복이 잘려 나갔다. 뱃가죽을 벨 수도 있었지만 옷만 베었다.

옷이 잘림으로써 대련을 중단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근위기사는 크게 기합을 지르며 계속 내게 덤벼들었다.

적어도 완력 하나만은 나보다도 근위기사가 몇 배 뛰어났다. 근위기사는 그 차이를 이용하기 위해 검과 검이 맞부딪치자 온몸으로 밀어붙이며 힘겨루기에 들어갔다.

눈에 빤히 보이는 시도에 응해줄 이유가 없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힘을 빼면서 몸을 뒤로 물렸고 힘겨루기에 모든 것을 걸었던 근위기사는 자세가 무너졌다. 헛방질에 검을 쥔 손아귀에도 잠깐 힘이 풀렸다. 그 잠깐을 놓치지 않고 전신의 무게를 검에 실어 근위기사의 검을 힘껏 내려쳤다.

캉!

“으윽!”

짧게 신음하면서 근위기사는 검을 놓치고 말았다. 카랑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기사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겨루기에서 그냥 밀린 것도 아니고, 무기를 놓쳐 버렸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대패였다.

완전히 제압했다고 생각해서 나는 잠시 자세를 풀었다. 그런데 검을 놓친 근위기사가 갑자기 맨손으로 달려들어 주먹을 날렸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행동이었다. 나는 한끗 차이로 주먹을 피하면서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너무 급하게 움직이느라 족쇄를 감안하지 못했다. 나는 짧은 사슬 때문에 균형을 잃었고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급히 일어나려고 땅을 짚었다. 하지만 근위기사가 냅다 발목 족쇄를 밟았고, 그 탓에 몸을 지지하던 팔이 미끄러지며 머리부터 뒤로 넘어갔다.

쿵!

“으윽!!”

호되게 뒤통수를 처박고 신음을 흘렸다. 그때 위에서 근위기사의 비웃음 소리가 들렸다.

“하하! 꼴좋군!”

“큭. 대체…….”

“건방진 놈! 왜? 검을 놓쳤다고 끝인 줄 알았냐?”

그야 전투 중에 검을 놓쳤다고 다 끝난 것처럼 굴어선 안 된다. 하지만 그건 실제 전장에서나 해당하는 일이지 대련에서 적용할 소리는 아니다.

“그래? 이 몸도 실전처럼 대련에 임하여 네놈의 뱃가죽을 갈라버릴 것을 그랬구나! 검 대련 중에 주먹질을 하질 않나, 사슬을 발로 밟고 낄낄거려?”

근위기사가 다시 발끈하는 것이 보인다. 나는 바닥에 드러누우며 이쯤에서 도움을 요청했다.

“하아. 크리스티안 경 도와주시지요.”

엘 파셔 근위기사대의 실체가 너무 저질이라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저런 거 뒤처리는 크리스티안과 훌륭한 친위대 여러분께 전부 맡겨버리는 게 현명할 것이다.

“이것 참.”

던필이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크리스티안을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이제 보니 크리스티안이 던필의 힘을 이기지 못해 붙잡혀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는 던필을 나무라지 않고 바로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를 노려보고 있던 근위기사는 조금 멈칫거렸다.

“어디까지 추태를 부릴 셈이냐? 당장 물러서라!”

크리스티안의 서슬 퍼런 경고에 그제야 근위기사가 내 족쇄를 놓고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입으로는 황급히 변명을 쏟아내려 했다.

“그게 저놈이……!”

“그만!”

크리스티안은 딱 한 단어로 근위기사의 입을 다물게 했다. 그는 근위기사를 뒤로하고 내게 손을 내밀었다.

“……인성이 덜된 놈이긴 하지만 그래도 엄연히 황실 근위대의 일원이다. 그런데 족쇄까지 찬 상태로 그를 상대로 이긴다고?”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것이 싸움 구경이지. 구경은 잘 했느냐? 마무리가 별로였을지도.”

나는 크리스티안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키며 태평하게 말했다. 크리스티안은 할 말이 아주 많은 것 같았다.

“응? 이건 무슨 소란이냐?”

그때 낯선 소년의 음성이 들려왔다. 사람들이 목소리가 나는 방향을 보았다. 목소리의 주인은 시라크 황태자였다. 그가 자기 또래의 귀족 자제들과 연병장 안으로 들어왔다.

가장 먼저, 시라크는 나를 빤히 보았다. 황태자의 친구들이 속삭였다.

“전하, 쳐다보지도 마십시오. 미천한 노예입니다.”

“노예? 그런 것치고는 굉장히 멀끔한데…….”

“생긴 게 멀끔한 데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족쇄를 보십시오. 황제 폐하께서 이번에 침실에 데려놓은 노예가 바로 저놈입니다.”

나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듣기 좋은 이야기가 나올 것 같지도 않고 그만 돌아갈까.

그때 시라크가 눈을 크게 떴다.

“뭐? 그게 저놈이라고?”

“예, 생김새나 족쇄가 있는 것 보면 확실합니다.”

“정말이냐? 꼭 사내처럼 생겼는데.”

시라크의 순진한 말에 나는 표정을 구겼다. 황태자의 친구들도 바로 대답을 못 하다가 잠시 뒤 말했다.

“남자가…… 맞습니다.”

“크흠!”

시라크는 뒤늦게 헛기침을 했다. 자기 아버지가 남색한다는 사실을 드디어 깨달은 것이다. 그 상대가 바로 이 몸이고!

빌어먹을 이대로 죽어버리고 싶다. 뒈져 버리고 싶어. 그 전에 죽여버릴 테다, 지스카르!

시라크는 좀 전보다 더욱 유심히 내 얼굴을 뜯어보았다. 그는 곧 내 손에 검이 쥐어져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네놈은 여기서 무얼 하고 있지? 노예 주제에 검은 왜 들고 있느냐?”

나는 슬그머니 검을 크리스티안에게 떠넘겼다. 근위기사와 대련했다고 말하는 것은 좋지 않다. 웬 놈의 노예가 근위기사랑 싸웠는데 신기하게도 이겼단다, 이런 내막을 알면 분명히 어린애의 호기심을 건드릴 것이다.

사실 시라크는 올해로 열다섯 살이 되었고 코흘리개 취급을 받을 정도로 어리진 않았다. 그래도 지스카르의 아들이라고 생각하니 저 아래의 꼬맹이처럼 느껴졌다. 싸워도 지스카르하고 싸우지 저런 애와는 싸우고 싶지 않았다.

“왜 답이 없지? 무슨 일이냐고 묻고 있지 않느냐! 네놈이 폐하를 믿고 지금 나를 우습게 보는 거냐?”

이걸 어쩐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어쩔 수 없이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전하.”

내 대답에 근처에 있던 크리스티안이 흠칫했다. 왜 갑자기 태도를 바꿔서 존댓말을 하냐고 얼굴에 쓰여 있었다. 그러니까 애랑 입씨름하기 싫어서 그런다고.

내가 기껏 공손한 척 굴었는데 시라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모양이다.

“말이 짧군! 아주 건방진 놈이구나! 내가 본때를 한번 보여줘야겠군!”

시라크가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 들었다. 주위의 인간들 얼굴이 가관이다. 근위기사도 내게 지는 판인데 시라크가 내 상대가 될 리 만무했다. 상황이 아주 귀찮게 되었다. 나는 성가신 감정을 꾹 누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전하, 사실 저는 오래전부터 검을 익혔습니다. 전하께서는 제 상대가 될 수 없으십니다.”

“너 따위가 검을? 게다가 나보다도 강하다고 지금 지껄이는 거냐?”

이건 어느 쪽을 선택해도 정답이 없다. 여기서 정식으로 이겨버리면? 노예 따위한테 졌다고 방방 뛰고 난동을 부릴 것이다. 대충 져주면? 노예 주제에 자길 봐줬다고 생트집을 잡겠지. 시라크가 당장 덤비라고 외쳤으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닥치고 오라 했다!!”

“…….”

“이익!! 네놈이!”

아예 입을 다물자 시라크 황태자는 머리 꼭대기까지 화가 나서 내게 검을 휘둘렀다. 아무리 애들 검이라도 잘못 맞으면 죽는 수가 있다. 크리스티안이 중간에 끼어들어 시라크 황태자의 검을 빼앗았다.

“윽! 크리스티안 경? 감히!! 검을 내놓지 못하겠는가?”

“전하, 이 노예는 황제 폐하의 소유물입니다.”

“그래서? 폐하께서는 나보다도 저런 노예가 더 소중하다 하시던가? 그래?”

이번에야말로 진짜 어린애다운 발언이 튀어나왔다. 시라크 황태자는 아마도 황제에게 홀대를 당하는 중이다. 그간 쌓인 것이 많았는지 그는 황제가 총애하는 한낱 노예를 향해서도 질투심을 불태웠다.

시라크 황태자는 크리스티안에게 검을 돌려받는 것이 요원해지자 내게 마구 주먹을 휘둘렀다. 패고 싶은 만큼 패면 돌아가겠거니 해서 조금 참아주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황태자의 주먹이 맵다. 내가 검을 들고 잠시 근위기사를 압도한 적이 있지만, 일단 몸뚱이 자체는 근육도 거의 없고 그냥 일반인 수준이니.

“윽!”

배를 한 방 차였는데 절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누가 애한테 이런 단단한 신발을 신겼어!

“전하! 이러시면 진짜로 곤란합니다!”

던필이 등 뒤에서 시라크 황태자의 두 팔을 붙잡고 뜯어말렸다. 다른 친위기사들도 달려왔으나 던필처럼 직접 손을 대진 못하고 난감하게 있었다. 상대가 황태자다 보니 함부로 할 수가 없어 애를 먹는 모양새다.

시라크는 놓으라며 소리를 치며 거칠게 던필의 손을 뿌리쳤다. 그는 씩씩거리며 이쪽을 노려보았다.

“……가자!!”

한참 나를 흘기던 시라크는 크리스티안에게 검을 돌려받고 휑하니 연병장을 나가버렸다. 귀족 자제들이 허둥지둥 그 뒤를 쫓았다.

어찌 됐든 겨우 한숨 돌렸다.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 팔다리를 확인하고 먼지를 툭툭 털었다. 그만 돌아가야 할 것 같다. 어디서 얻어맞은 티를 내면서 돌아다녀 봐야 좋을 게 없으니까.

연병장을 나오는 길에 불쑥 던필이 말했다.

“무슨 속셈이야?”

“속셈이라니?”

“왜 그대로 맞아주었지? 혹여 그 상처를 빌미로, 폐하께 시라크 전하에 대한 좋지 않은 이야기를 늘어놓으려고 하는 거라면…….”

“그냥 어린애랑 싸우기 싫어서 그랬다.”

나는 손사래를 치며 진실을 이야기했다.

“뭐라는 거야? 웬 어린애 취급? 네가 황태자보다 나이가 많아 봐야 얼마나 많다고.”

“믿지 못하겠다면 어쩔 수 없고.”

더 이상 대답하지 않자 던필은 내 근처를 기웃거리다가 또 물었다.

“그럼 다른 질문! 검은 누구한테 배운 거냐? 언제부터 익히기 시작했어?”

근방을 지나던 시녀들이 힐끗 우리 쪽을 바라보았다. 황제의 친위기사가 족쇄를 찬 노예에게 수다스럽게 말을 걸고 있으니 아주 이상하게 보였을 것이다.

“던필. 임무 수행 중이다. 잡담은 그쯤 해라.”

크리스티안도 주변 시선을 느끼고 던필을 나무랐다.

“아니 솔직히 대장도 궁금하시지 않습니까? 노예 주제에 어떻게 근위기사와 맞먹는 실력을 갖게 된 거지? 그러니까 누구한테 검을 배운 거냐고.”

수다가 멈출 기미가 안 보인다. 나는 실소를 머금은 채 던필을 보고 대꾸했다.

“누구에게도 배우지 않았다. 나는 날 때부터 많은 것을 알고 있었고, 많은 것을 할 줄 알았다.”

“뭔 또 괴상한 소릴…….”

던필이 불만을 토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어느 정도 진실이다. 나는 날 때부터 레브노아드 황태자의 기억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때 갑자기 크리스티안이 딴 이야기를 했다.

“현재 엘 파셔 황실 근위기사대는 제3근위대까지 존재하고 있다. 제1, 2근위대는 스트라스와의 대전에서 수많은 무훈을 세운 대기사가 다수 소속된, 엘 파셔의 명실상부한 최정예 기사단이다. 네가 방문했던 제3근위대는 십 년 전에 창설되어 비교적 실력이 뒤떨어지는 자들이 배치되어 있다. 따라서 제3근위대는 강력한 황실 근위대임은 분명하나 제1, 2근위대와는 확실히 격의 차이가 있다.”

다른 화제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던필에게 잡담하지 말라고 나무란 주제에, 이번엔 크리스티안이 나를 추궁해 왔다.

“날 때부터 뭐든 알고 있다면 근위기사대 중 제3근위대는 최정예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것은 왜 몰랐지?”

“…….”

갑자기 할 말이 없어졌다. 십 년 전에 근위기사대가 3개대로 개편되었단 말인가. 충분히 옛날 일이지만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정보였다.

“많은 걸 알고 있다 했지 다 안다고는 하지 않았다. 제3근위대라는 게 있었군. 어쩐지 엘 파셔 정예치고 실력이 너무 저질이다 싶더니.”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크리스티안과 던필이 의심스럽게 봤지만 지들이 그래 봐야 어쩌겠는가. 그러려니 해야지.

* * *

침실에 당도했을 때쯤엔 이미 하늘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벌써 지스카르가 도착해 기다리고 있었다.

“하루 종일 돌아다니다 오는군. 무엇을 하다가…….”

지스카르는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이유는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아침에 멀쩡하게 나간 인간이 옷에 먼지를 묻히고 얼굴까지 조금 부어서 돌아왔으니까. 나는 사정을 이야기하려고 입을 열었다. 그런데 지스카르의 얼굴이 눈에 띄게 싸늘해졌다.

“누구 짓이지?”

“그건…….”

뜻밖에 반응이 너무 살벌하다고 할까. 덕분에 목구멍까지 나왔던 시라크의 이름이 다시 안으로 쑥 들어갔다. 안 그래도 미움을 받고 있는데 여기에 내 일까지 더하면 애가 더 불쌍해질 것 같았다. 난 대충 얼버무렸다.

“별일 아니다.”

“누구 짓이냐고 물었다.”

“그게 뭐가 중요하지?”

나는 다시 말을 돌렸다. 어차피 지스카르가 원한다면 누가 이랬는지 정도는 금방 알아낼 수 있다. 이건 내게 손을 댄 자를 그냥 묵인해 주라는 뜻이다. 지스카르는 금방 내 의도를 읽어냈는데 오히려 그것 때문에 더욱 못마땅해했다.

“지금 네 처지에 남의 허물을 덮어주겠다는 것이냐? 짐의 보호 아래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어야 네가 성안에서 안전하게 지낼 수 있다. 지금은 그 정도에서 끝났을지 모르나 다음은 어찌 될지 알 수 없다.”

“귀가 따가운걸. 언제까지 잔소리를 더 듣고 있어야 하지?”

“그래, 네 멋대로 하겠다는데 더는 말하지 않겠다. 잔소리라고 생각한다면 하는 수 없군.”

지스카르는 진짜로 내 행동이 마음에 안 드는지 평소답지 않게 말이 길었다. 불쾌함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만하고, 일단 벗고 이쪽으로 와라.”

순간 나는 뻣뻣하게 굳었다. 지금껏 새카맣게 잊고 말았다. 외출하는 대가로 무엇을 하기로 했는지. 아니, 어떻게 그걸 잊지?

지스카르는 손을 내밀고 기다렸다.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겠다는 투였다.

나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단추 위로 손을 가져갔다. 겉옷 제일 꼭대기의 단추를 푸는 데도 한참 시간이 걸렸다. 하! 이게 뭣 하는 짓인지. 망설이는 자신이 너무 한심했다.

지스카르는 내 모든 것을 틀어쥐고 있었다. 원한다면 무슨 짓이든 가능하다. 그럼에도 일부러 아량을 베풀어 약속 같은 것을 했고, 그대로 지켜주었다. 서류 업무를 한다면 내게 손을 대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스카르는 정말로 이행했다. 그런데 내가 이번 약속을 깬다면? 지스카르도 다시는 약속 따위 지킬 이유가 없다.

나는 생각을 정리하며 바로 겉옷을 벗고 셔츠까지 벗었다. 그러나 허리춤에서 다시 손이 멈췄다. 몸이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것이 너무 짜증스러웠다. 여기에 숨소리까지 거칠어지고 있었다.

“빌어……먹을…….”

그때 갑자기 지스카르가 다가와 내 몸을 안아 올렸다.

“엇? 왜…….”

“그만 됐다.”

허둥대는 나를 침대에 내려놓고 지스카르가 짧게 말했다. 그는 내 이마에 입을 맞추고 얼굴에도 입을 눌렀다. 내가 바르작대는 것을 멈추자 그도 입을 떼고 물러났다. 잠시 뒤 지스카르는 내게 직접 벗으라 하지 않고 손을 아래로 내려 내 허리춤에 댔다.

내가 벌벌 떠는 것을 보고 그냥 봐주기로 한 건가.

갑자기 이상한 오기가 치솟았다. 나는 지스카르의 손을 뿌리쳤다.

“약속은 지킨다! 내가 할 테니까 네놈도 벗어. 설마 나더러 벗겨 달라고 할 것은 아니겠지.”

“…….”

지스카르는 잠시 날 보았다. 뭘 꾸물대느냐고 인상을 쓰자 그는 곧 옷을 벗기 시작했다. 누구랑은 다르게 참 시원하게도 벗는다. 나도 그냥 벗어버리면 된다. 어찌하든 밤일은 치를 텐데 벌벌 떨며 움츠러들어 있으면 꼴사납기만 하다.

나는 과감히 아랫도리를 벗었다. 전부 헐벗은 상태로 힐끗 지스카르를 돌보았다. 그리고 하필 놈의 몸뚱이 중 가장 못 볼 걸 정면으로 보고 바로 고개를 돌렸다. 진짜 못 할 짓이다 싶었다. 그래도 내 입으로 꺼낸 말은 책임을 질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보자. 그러니까 밤일을 수월하게 치르기 위해 먼저 향유를 뿌리고 손을, 손으로…….

“으윽!!”

차라리 생각을 하지 말자! 나는 벌떡 일어나서 지스카르를 확 침대 위로 떠밀어서 눕혔다. 내 힘에 넘어갈 놈이 아니지만 일단 내가 하라는 대로 따라주고 있었다. 나는 지스카르의 허리 위에 앉았다. 족쇄 때문에 놈을 등지는 자세로 올라타야 했는데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되어서 차라리 마음에 들었다.

얼마나 정력이 좋은지 지스카르의 성기는 이미 단단하게 서 있었다. 나는 허리를 들어 구멍을 거기에 맞췄다. 그리고 무작정 찍어 내렸다.

“읏! 레, 레이?!”

지스카르가 무려 말까지 더듬었다. 나는 못 들은 걸로 했다.

이를 악 깨물고 그저 힘을 주었다. 하지만 내부가 굉장히 건조하고 빡빡해서 도저히 더 이상 들어가질 않았다. 대체 지난번엔 어떻게 저 안쪽까지 들락거린 것인지 신기할 정도다. 계속 밀어붙이자 하반신으로 엄청난 고통이 밀려왔다. 아니 아픈 게 대수냐. 알 게 뭐냐.

“크으윽!”

입으로 신음을 흘리는지도 몰랐다. 오직 끝까지 넣는 데만 정신을 집중했기 때문에.

지스카르가 내 허리를 붙잡았다.

“그만둬! 레이, 상처를 입을 거다.”

“시끄러워……. 후으. 어쨌든 넣어서 끝내면 되는 거잖아.”

여기저기 향유를 바르고 애무랍시고 손가락을 넣고, 그따위 짓 할까 보냐.

“흑! 으으으으…….”

“레이……!”

몇 번이나 내 이름을 부르던 지스카르가 내 상태를 보더니 도저히 안 되겠다며 허리를 잡아 자기 것을 뒤로 빼냈다. 그러자 새로운 고통이 몸을 잠식했다. 안쪽이 잔뜩 긴장한 채 지스카르의 음경을 너무 꽉 물고 있어 다시 빼내려고 하자 아주 배 속의 내장까지 전부 뽑혀 나올 것 같았다.

“악! 아아악! 그만해!”

“으…… 그러니까, 이런…… 식으론!”

지스카르도 여간 힘든 게 아닌 듯 말에 신음이 섞여 있었다. 어느 순간 쑥하고 지스카르의 것이 빠져나왔다. 나는 앞으로 침대에 얼굴을 박고 엎어졌고, 지스카르도 침대를 짚고 내 등 위로 이마를 기댔다. 등으로 길게 한숨 소리가 전해졌다.

“후우……. 다시는 먼저 하라고 말하면 안 되겠군.”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인데.”

죽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허튼소리를 뱉어보았다. 지스카르는 잠시 내가 진정하길 기다려주었다.

아래의 통증이 조금 가라앉았다 싶을 때였다. 지스카르가 늘어진 나를 안아서 자기 무릎에 앉히고 구멍에 손을 댔다.

“으으으!”

무모한 짓을 한 탓에 손만 대도 거기가 어마어마하게 쓰라렸다. 이런 상태에서 놈의 것을 다시 넣었다간 진짜로 죽을 맛을 볼 것 같았다. 그렇다고 내가 거부할 힘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나는 지스카르의 손길 아래서 체념했다.

지스카르는 내 구멍에서 손을 뗐다. 놈이 가만히 위쪽에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인상을 쓰며 놈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나 지스카르의 손이 턱을 잡고 다시 자신을 보게 했다. 손에 힘을 더 주어 내 입을 벌리게 만들고 자기 입을 맞췄다.

“웁!”

지스카르는 혀를 휘감고 굴리다가 깊이 빨았다. 마치 먹을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몇 번이나. 격한 키스가 정말 오랫동안 이어졌다. 잠시 입술을 떼고 떨어질 때도 턱을 누르는 손 때문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다시 한번 지스카르가 입술을 덮쳤다. 이번엔 혀를 집어넣어 아랫니, 혓바닥, 혀의 아래쪽을 천천히 핥고 확인했다. 입 안에 침이 고여들었다. 결국 침이 길게 목까지 흘러내렸다.

한참 만에 지스카르는 나를 놓아주고 떨어졌다. 뒤로 물러나며 숨을 고른다고 낮게 한숨을 쉬었다.

“아. 하아, 하아.”

나는 아예 숨을 헐떡였다. 강제로 붙잡혀 있던 턱이 아픈 건 말할 필요가 없다. 고개를 젖히고 있느라 목이 뻐근하고 입 안이 다 얼얼했다.

그때 지스카르가 나를 침대에 눕히면서 자신은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놈이 내 사타구니까지 온 것을 느끼고 나는 살짝 굳었다.

“윽?”

그리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지스카르가 내 성기를 핥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녀석의 머리를 붙잡았다.

“뭘 하는 거냐! 그거……!!”

지스카르는 단숨에 성기를 입 속에 삼켰다. 뿌리까지 완전히 물고 혀로 내 음경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리고 빨아당겼다.

“하으윽!”

엄청난 자극에 허리를 치켜들었다. 전류가 통한 것처럼 등허리로 소름이 쫘악 돋았다. 나는 지스카르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금방이라도 사정해 버릴 것만 같았다. 순식간에 아랫배가 아플 만큼 중심에 피가 몰렸다. 잠깐 한 것뿐인데 진짜로 쏟아버릴 것 같았다.

“떠, 떨어져……!!”

밀어닥치는 기운을 참느라 말도 억지로 뱉었다. 지스카르는 내 요구에 따르며 잠시 떨어져 나왔고 대신 귀두를 혀로 핥았다. 요도구를 비집고 들어가려는 것처럼 혀끝이 유독 입구를 찌르고 괴롭혔다.

쿡쿡 밀려드는 얕은 사정감에 다시 놈의 머리를 밀었다. 다리를 어떻게든 움츠려 지스카르를 떨어지게 만들려고 애썼다. 그러나 전부 허사였다.

곧 뜨끈한 혓바닥이 귀두에서 음경으로, 뿌리까지 길게 핥으며 내려왔다. 순간 전신에 소름이 쫘악 돋았다. 지금 이 짓을 하고 있는 것이 지스카르라는 것을 떠올리니 한 번 더 손가락 끝까지 소름이 돋고 짜릿짜릿한 느낌이 들었다.

“지스, 지스……카르……. 읏.”

그 무뚝뚝한 놈이 잘도 이런 미친 짓을 한다 싶었다. 뭔가 심장이 크게 벌렁거리고 이 상황이 굉장히 자극적으로 다가왔다.

지스카르가 마치 내 속을 읽은 것처럼 다시 기둥을 길게 핥았다. 더럽지도 않은지 이어서 성기를 입에 물었다. 놈이 일부러 얼굴을 깊이 눌러 목구멍 저 안쪽까지 성기를 삼켰다. 귀두에 목젖 같은 것이 쿡 닿는다. 이런 미친놈이라는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놈이 자기 목구멍을 완전히 다 쓰며 내 성기를 자극해 갔다. 꽉 조이고 쭉쭉 빨아당기는 감각에 도저히 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만! 윽!”

해버렸다.

쩌릿하게 사정하는 동안엔 아무 생각도 못 하고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러나 절정이 가시자마자 바로 기분이 저 아래로 가라앉았다. 놈이 구음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도 않아 사정해 버렸다. 레브노아드일 때 여자들과 관계하면서 구강성교 따위 지겨울 만큼 많이 해봤다. 아니 대체, 처음도 아닌데 왜 이렇게 심하게 흥분하는 거란 말이냐.

그때 지스카르가 내 허벅지를 놓아주며 얼굴을 들었다. 순간 정신없는 와중에 놈의 입 안에다가 해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크게 낭패감을 느꼈다.

“그, 그러게 떨어지라고 했다. 일부러 네놈 입에다 한 게 아니야.”

지스카르는 입 안에 고인 정액을 바닥에 뱉어냈다. 그는 입가를 닦으며 날 쳐다보았다.

“하아, 입에 해서 불쾌하다고 말한 적 없다만.”

“…….”

나는 예상치 못한 말에 얼이 빠졌다. 숨을 몰아쉬며 새삼 지스카르를 보았다.

“잘도 그런 짓을 하는군. 남자 걸 입에 물고 굴욕적이지 않나?”

“네 몸인데 굴욕적일 것이 뭐가 있지?”

지스카르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당연하다는 식으로 말했다. 그는 내 몸 위로 올라오면서 손으로 뒤를 만졌다. 나는 퍼뜩 당황했다.

“또 한다고?”

“한 건 너 혼자뿐일 텐데.”

그러고 보니 그랬다. 젠장, 아직 한참 더 남은 거냐?

“읏!”

살짝 손끝이 구멍 안으로 들어가자 나는 신음을 질렀다. 평소에 불쾌해서 소리를 냈다면 지금은 아파서 낸 목소리다. 지스카르는 바로 손을 뗐다.

“…….”

잠시 침묵이 흘렀다.

지스카르는 나를 안고 자세를 바꾸게 했다. 내가 요구에 못 이겨 엎드리자 그는 배 밑으로 손을 넣었다. 다리 사이의 내 음경을 쥐고 부드럽게 주무르는 덕에 나는 다시 자극을 받았다.

“하아…….”

길게 달뜬 숨을 토하던 중에 엉덩이 사이로 묵직한 것을 느꼈다. 단단하게 발기한 지스카르의 성기였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안으로 비집고 들어오지 않았다. 엉덩이 사이에 성기를 그냥 바싹 갖다 대기만 하면서 손으로 내 것을 주물렀다.

문득 구멍의 상처가 다 나을 때까지 삽입 성교는 없을 거란 걸 깨달았다.

아프지 않은 건 다행이지만 이렇게 비비적거려지는 건 그 나름대로 기분이 더럽다. 그러나 기분이 더러운 거랑은 무관하게 몸은 천천히 흥분해 갔다. 떨리는 쾌락이 이성을 슬슬 녹여내고 있었다.

한 번 사정해서 말랑거리던 성기가 지스카르의 손 안에서 다시 단단해지기 시작했다. 귀두 끝에 이슬이 맺히자 지스카르가 손끝으로 뭉근하게 문질렀다. 나는 흠칫 다리를 움츠렸다. 덕분에 지스카르의 성기가 엉덩이 사이에 꾹 눌렸다.

“음…….”

지스카르는 만족스럽게 목을 울렸다. 정말 이 정도로 만족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왠지 놈의 목소리를 들으니 나도 기이하게 몸이 지끈거렸다.

지스카르가 왕복 운동하듯이 엉덩이 사이에 성기를 밀착하고 문질렀다. 치우라고 발작해야 할 타이밍 같은데 나는 바르르 떨기만 했다. 고개를 밑으로 늘어뜨리며 이해 불가한 쾌락에 떨었다. 지스카르가 내 성기를 주물럭대서 어쩔 수 없이 흥분하는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만지면 서고 주무르면 싸는 게 당연한 거니까.

“하읏, 으으으……!”

이것저것 생각하기 싫은 지경까지 왔다. 인정하기 싫지만, 아주 빌어먹을 일이지만, 지스카르와 뒹구는 건 정말로 환장할 만큼 자극적이었다.

“……!!”

자지러지며 소리를 낼 뻔한 것을 베개에 얼굴을 처박아 간신히 삼켰다. 오늘 두 번째로 사정이었다. 지스카르도 등 뒤에서 나를 꽉 끌어안고 사정했다.

한참 뒤에 절정이 가시자 나는 지스카르에게 깔려 있던 몸을 억지로 빼서 옆으로 한 바퀴 굴렀다. 겨우 빈자리에 편히 누울 수 있게 되었다. 다행히 지스카르는 더 이상 지분대지 않았다. 대신 내 얼굴이나 어깨, 복부 쪽에 잠깐씩 시선을 주었다. 시라크에게 얻은 맞은 곳이었는데 특히 배에 푸릇하게 멍이 들려 하고 있었다.

“…….”

지스카르는 할 말이 생긴 얼굴이다. 하지만 잔소리하지 않겠다고 한 약속을 끝내 지켰다.

뼛속까지 성실한 놈.

나는 노곤함에 그대로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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