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지난 열흘간 무엇을 했느냐?”
만인지상 스트라스의 황제. 아버지는 자식들을 모아놓고 자주 같은 질문을 했다. 1황자 제노비스 형님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저는 마물 사냥을 나갔습니다. 제가 직접 오크를 세 마리나 잡았습니다! 폐하께 보여드리고자 이렇게 단걸음에 달려왔습니다!”
“호오! 그것 멋지구나!”
2황자 알렉시스 형님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저는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조금 더 정진하면 서평론을 완전히 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것도 대단하구나.”
아버지가 나를 보고 물었다.
“레브노아드! 요즘 검의 진척도는 어느 정도이냐?”
오랜만에 황실의 구성원이 전부 모여 즐기는 저녁 만찬 시간은 화기애애했다. 그러나 알 수 있었다. 열두 명의 형제들, 나이 어린 새 황후와 여섯의 후궁이 나의 대답에 신경을 온통 곤두세우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가능한 한 말을 골라서 대답했다.
“배울수록 나아지고 있습니다.”
“겸손은! 체르도 경이 네가 타고난 무골이라고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더구나! 그런데 한참 검 수련에 힘써야 할 시기에 갑자기 마법을 배우기 시작했다던데.”
“예. 비록 검에서 좋은 성과를 보고 있으나, 개인적으로 마법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하하하하! 이 녀석! 벌써 이야기 다 들었다! 또 마법에 재능이 남다르다지? 체르도 경이 일전에 짐에게 하소연을 하더구나! 너는 검을 들어야 한다고! 한데 궁중 마법사가 달려와 네가 또 마법을 위해 태어난 존재가 틀림없다고 감격하여 외치니 짐이 어찌 난감하지 않겠느냐! 하하하!”
“……예.”
“신학 대신 행정실무에 치중한 교육을 요구했다고 들었다. 짐이 직접 바레스노엘 공작에게 너의 교육에 힘써달라 부탁하였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잠시도 지체 말고 이 애비에게 이야기해야 할 것이야!”
“예.”
나는 낮게 한숨을 내뱉었다. 식당의 공기는 이미 피부로 느낄 수 있을 만큼 싸늘해져 있었다.
나는 일찍이 많은 분야에 아주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황제는 그런 나를 대단히 기꺼워하고 노골적으로 편애했다. 다른 자식들은 더 이상 본 척도 하지 않았다. 형제들이 나를 질투하고 증오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나는 일찍 세상을 떠난 전 황후의 마지막 아들이었고 아홉 번째로 태어난 황자로 황위와는 거리가 멀었다. 나이 많은 형님들이 여덟이나 있고 새 황후의 세력도 대단해서 본래 내가 끼어들 자리 같은 건 없어야 할 터였다. 하지만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면서 나는 순식간에 유력한 차기 황제감으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늦은 밤 은밀히 황제를 찾았다.
“레비! 하하, 잘 왔다! 체스라도 한 판 둘 테냐? 늙은 애비를 생각해 두어 판 정도는 슬쩍 물려주는 미덕도 보이고 하렴!”
“폐하. 저는 황태자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 아버지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말했다.
“어째서! 제노비스나 다른 녀석들은 황제감이 못 돼! 스트라스에 영화로운 새 시대를 가져올 자는 오직 너뿐이다!”
“그 자리는 제노비스 형님의 것입니다. 물론 제가 황위에 전혀 욕심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굳이 형님을 끌어내리고 황제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하, 역시 레비구나! 형님 생각도 해줄 줄 알고.”
아버지는 웃었다.
“하지만 네 목숨을 내놓아도 관계없을 만큼 형님들을 아끼는 것도 아닐 것이다. 현명한 레브노아드…….”
아버지는 턱을 괴며 진하게 웃었다.
황제는 정확하게 나를 파악하고 있었다.
* * *
“크윽!!”
점심때 먹은 식사에 독이 들어 있었다. 나는 정신을 집중했다. 시동어를 읊자 팔찌에 빼곡히 박힌 마정석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나는 음식을 입에 대기 전에 항상 해독 주문을 준비해 두곤 했다. 정신이 아득해져 갔지만 짧은 시동어로 해독 주문이 저절로 발동되었다.
까마득히 어릴 적부터 나는 독살의 위협에 시달렸다. 마법을 사용할 줄 모를 때엔 신관이 옆에 없으면 음식을 입에 대지도 않았다.
황위쟁탈전에서 발을 빼겠다고 공개적으로 표명한 후에도 독살과 암살 시도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나는 너무나 뛰어나며, 지나치게 특별했다. 형제들은 언젠가 큰 위협이 될 수 있는 존재를 등 뒤에 그냥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그것은 솔직히 말해,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나는 형제들을 짓밟으면서까지 황제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황제가 되고픈 형제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을 만큼 너그럽지도 않았다.
나는 황제가 되기로 결정했다.
형제들에게 굴복하고 내 아래로 들어올 것을 요구했다. 당연히 쉽게 머리를 조아리는 자는 없었다. 대신 엄청난 암살 시도와 견제가 뒤따랐다. 그러나 대부분은 나의 위협이 되지 못했다.
“이것이 전하를 모함하기 위해 제노비스 1황자가 위조한 문서들입니다.”
“아.”
나는 문서를 받아 들었다. 두어 장을 넘겨보다가 화가 치밀어서 집어 던졌다. 어째서 그렇게 어리석은가! 내가 이따위 것에 당해줄 것이라고 생각한단 말인가? 그만 자신이 하잘것없다는 것을 인정해!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처박고 굴복하란 말이다!
“레브노아드 전하. 어찌할까요.”
나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노려보았다. 제노비스 형님은 굴복하지 않는다. 그가 절대로 황위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재판부에 제출해라.”
“예!”
제노비스 1황자는 반역을 공모한 혐의로 처형당했다. 황제가 내 편이었고 모든 과정은 수월하게 이루어졌다. 그러자 알렉시스 2황자가 모든 것은 모함이라며 무섭게 나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시류를 타고 새 황후와 3, 8황자도 나를 비난하는 일에 열을 올렸다.
하루도 빠짐없이 가시 돋친 공방전과 모함, 암살이 행해졌다. 대치는 끝을 보았다. 나는 2황자를 독살하고 새 황후는 간음을 했다는 죄목을 뒤집어씌워 처형했으며, 외가인 호루스 후작가문도 갓난아기 하나 남기지 않고 뿌리까지 멸족시켰다.
3, 8황자는 사고를 위장해 모두 제거했다. 2황자를 잃고 악에 받친 1후궁이 황위에 큰 뜻이 없는 황족까지 꾀어내 내게 도전했다. 그 일로 다섯 살밖에 안 된 13황자가 숙청당하기도 했다.
황위쟁탈전은 계속 이어졌다. 나는 일찍이 전쟁터에 나가 신하와 백성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으며, 한편으로 주변에 남은 피붙이들을 천천히 제거해 갔다. 불씨를 남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으므로 살아남은 후궁과 그녀들의 친가, 황녀들까지 숙청의 대상이 되었다.
형제들과 친족의 시체로 산을 쌓아 올려 나는 마침내 스트라스를 손에 넣었다.
한 번도 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나는 살아남기 위해서 그들을 죽여야 했다.
다만, 그들이 조금 가엾다고는 생각한다.
제노비스 형님은 1황자로 태어났다. 황위를 추구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는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아버님의 총애를 빼앗아간 내가 당연히 증오스러웠을 것이다. 다른 형제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나도 잘못한 것은 아니다. 내가 원해서 그들의 자리를 빼앗은 것이 아니다.
아마 특별히 사악한 자는 없었다. 그것뿐이다.
* * *
어느 날인가, 나는 붉은색 상사화가 흐드러지게 핀 정원을 감상하며 걷고 있었다. 문득 인기척을 느꼈다. 노련한 호위기사들이 지체 없이 검을 뽑아 들었다. 살기등등한 금속음 때문에 인기척의 주인공은 몹시 겁에 질린 듯했다. 수풀을 걷자 조그맣게 움츠린 소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체르도가 말했다.
“11황자입니다.”
“혼자 살아남았다더니 이런 곳에…….”
11황자의 어머니인 5후궁은 지난달 가까운 호수에 외유를 나갔다가 낙마하여 사망하였다. 실상은 4황자와 5황자가 손을 잡고 가장 힘없는 5후궁 일파를 제거한 것이다. 11황자는 그날 열이 나서 외유를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운 좋게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아니 운이 없다고 해야 하나?
어머니가 죽고, 외가가 망하다시피 하고, 황제가 찾아줄 리도 만무하고. 올해 여덟 살이 된 11황자는 황궁에 혼자 덩그러니 남았다. 더 이상 시녀들조차 몰락한 황자를 보살펴주지 않았다. 그 증거로 며칠을 못 갈아입었는지 옷에 때가 꼬질꼬질하다.
나는 충동적으로 손을 내밀었다.
“이리 오너라.”
웅크리고 있던 11황자가 고개를 들었다. 감히 나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바들바들 떨고 있었으나, 조금씩 내게 다가오더니 결국은 손을 잡았다. 한 번 손이 닿자 그는 얼른 일어나서 내 다리에 바싹 매달렸다.
“감히! 물러나시오!”
체르도가 언성을 높이며 11황자를 떼어놓으려고 했다. 나는 그에게 멈추라고 눈짓하고 11황자를 품에 안았다. 나의 충실한 기사들은 함부로 내 의사에 반하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대신 11황자에게서 경계를 놓지 않고 바짝 뒤를 따랐다.
저 먼 곳으로 시선을 주었다. 상사화가 정원 끝까지 가득 피어 붉은 융단이 깔린 것처럼 보였다. 멀리까지 뻗은 길을 지나면서 나는 11황자의 적금발을 쓰다듬었다.
“만약 네가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면, 나는 언제까지고 너를 곁에 두고 소중히 여기겠다.”
11황자가 커다란 눈망울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에…… 예에…….”
“그래. 착하구나, 에드리히…….”
눈을 떴다. 머리가 멍했다. 갑자기 웬 옛날 꿈이람.
나는 침대를 짚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잠깐 인상을 썼다. 어제 향유 없이 해보겠다고 지스카르의 것을 쑤셔 넣었다가 상처를 입은 부위가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시라크에게 얻어맞은 자리도 조금씩 욱신거린다. 부자가 합심해 사람을 죽이려 드는군.
나는 침대에 다시 드러누워 축 늘어졌다. 일찍 일어나 이미 환복까지 마친 지스카르가 침대맡으로 걸어와 나를 내려다보았다.
“얌전하군. 오늘은 외출하고 싶지 않나?”
나는 울컥했다. 또 무슨 조건을 걸려고? 그야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가능한 한 밖을 많이 돌아다니는 것이 내게는 유리했다. 하지만 오늘은 어쩐지 기운이 없었다.
“오늘은 쉬고 내일쯤…….”
힘없이 대답했다. 그런데 지스카르가 다가와 침대에 늘어져 있는 나를 안아 들고 어중간하게 세웠다. 이어서 반쯤 풀어진 셔츠를 벗기고 바지까지 벗기기 시작했다. 나는 크게 놀랐다.
“기, 기다려! 아침부터? 밖엔 나가지 않겠다고 했잖아! 왜!”
언제 향유를 가져왔는지 지스카르는 끈적이는 액을 자기 손에 묻혀 다리 사이로 넣었다.
“너……, 너……!”
놈이 자기 멋대로 해버리겠다면 그대로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약속이니 뭐니 하는 것도 지스카르가 넓으신 아량으로 시건방진 노예의 사정을 봐주었기에 성립되었던 것이었다. 나는 소리 지르길 그만두고 입술을 깨물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그때 지스카르가 내 입술에 손등을 댔다. 하지 말라는 것처럼 고개를 가로저었다.
문득 엉덩이에 닿는 촉감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스카르가 손에 묻힌 것은 향유가 아닌 다른 것이었다. 무엇보다 냄새가 달랐다.
“이건…… 약인가?”
“알았으면 입술은 그만 물어뜯어라.”
구멍 입구를 문지르며 연고를 바르던 손가락이 안쪽으로 슥 들어갔다. 나는 흠칫 지스카르의 옷깃을 붙잡았다. 그야 안쪽도 다쳤으니까.
지스카르의 손가락이 천천히 내벽을 밀고 안으로 들어와 안쪽을 둥글게 훑었다. 나는 좀 더 세게 옷깃을 움켜쥐었다. 이건 너무 기분 더럽잖아. 그 순간 구멍에서부터 등을 타고 찌르르 소름이 돋았다.
“헉! 치워!!”
결국 나는 소리를 질렀다.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다 집어치우고, 저놈이 순수하게 치료만을 목적으로 이러고 있다는 걸 내가 믿어야 돼?
지스카르는 뒤로 물러났다. 그는 낮게 한숨을 쉬었다.
“정 그러하다면 다른 사람을 부르마.”
“뭐?”
“짐이 아니라 대신 치료해 줄 다른 사람을 부르겠다. 아니, 이 기회에 신관을 부르는 것이 낫겠군.”
정신이 퍼뜩 들었다. 치료받으려면 상처 입은 부위를 보여줘야 한다. 그야 신관 앞에서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지스카르의 흔적이 잔뜩 남아 있는 하반신을 내려다보았다.
지스카르가 사람을 부르기 위해 줄을 잡아당기려 하고 있었다.
“잠깐만!”
달랑.
급히 외쳤지만 지스카르는 이미 줄을 당긴 뒤였다. 나는 더 이상 뭐라 하지도 못하고 허탈한 얼굴을 했다. 지스카르가 다가왔다. 갑자기 이불을 가져와 내 몸에다가 둘렀다. 얼굴만 남기고 몸을 완전히 가리고 있으니 시녀가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갈아입힐 옷을 가져와라. 시중을 들 필요는 없다.”
시녀는 즉시 내가 입을 깨끗한 새 옷을 내왔다. 신관을 부른다더니 지스카르는 그런 이야기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물러간 후, 나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일부러 그랬지!”
“약부터 바르자. 외상에 잘 듣는다고 들었다.”
“…….”
반항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스카르는 내 몸에 두른 이불을 끌어 내렸다. 벗은 몸이 드러나는 것에 약간 긴장했지만 앉은 채 그대로 있었다.
지스카르는 연고를 손에 덜어 먼저 얼굴에 발라주었다. 시라크에게 얻어맞은 상처였다. 목과 어깨에도 작은 생채기가 있었지만 그건 대단치 않았다. 다만 배를 걷어차인 곳은 하룻밤 새 보라색으로 크게 멍이 들었다. 지스카르는 못마땅한 심정을 잠시 드러내었다가 손수 약을 발랐다.
방이 유난히 적막하다고 생각했다.
얼굴이나 팔다리만 만지던 손이 점차 사타구니 쪽으로 향했다. 그 꼴을 보고 있기가 굉장히 민망했다. 시선을 애매한 곳에 두고 뻣뻣하게 있자 지스카르가 나를 안아서 자기 품으로 끌어갔다.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표정을 숨기는 것으로 긴장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었다. 쓸데없이 눈치 빠른 놈.
지스카르는 허벅지 안쪽을 한 번 쓰다듬었다. 그리고 연고를 듬뿍 묻혀 다시 안으로 밀어 넣었다. 손가락은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안을 저으면서 끝까지 완전히 들어왔고, 나는 파르르 떨었다.
“기, 기분 더러워.”
“다른 자가 만지는 건 더 싫을 테지.”
“그건…….”
‘그렇다’고 생각한 순간 눈을 크게 떴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한 거냐?
확실히…… 지스카르의 손길이 익숙하다. 예전만큼 몸이 긴장하고 있지 않다. 그건 지스카르가 배려해 주기 때문이다. 다치지 않게 애써 신경 쓰는 것이 눈에 보이니까, 나도 모르게 조금 안심해 버린 것이다. 이건 길들고 있는 거라 봐야겠지.
“으응…….”
엉덩이를 훑는 손길에 나는 신음 소리를 냈다. 전에는 닿는 것만으로도 죽고 싶을 지경이었는데.
그렇군. 이대로 익숙해지는 것도 괜찮다. 언제까지 이런 일에 움츠리고 겁을 먹고 있을 텐가.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은가? 지스카르의 손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냉정해져야 한다. 좋은 기회가 생겨도 지금처럼 안절부절못하고 있다간 실수만 할 것이다.
애초에 노예로 태어나 황제의 밤 시중드는 일이 무슨 치욕이란 말이냐. 나는 더 이상 스트라스의 황태자가 아니다. 그러니 수치라고 생각할 것도 없다. 다른 노예라면 황제의 총애에 황송해서 몸 둘 바를 몰라 할 것이다. 지스카르와 뒹굴면서 신음 소리나 들려주고 있자. 황제의 귀여운 애첩을 가장하면서 탈출할 기회가 오길 기다리면 된다.
하, 이렇게 간단한 일이었는데…….
나는 지스카르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피식 웃었다.
하지만 이내 이를 까드득 깨물었다. 입 안을 잘못 깨물어 비릿한 피 맛이 났다. 모멸감에 온몸이 떨렸다. 내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안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견딜 수가 없는 걸까.
아니. 틀렸다. 처음 전제부터가 전부 잘못되었다. 나는 노예로 태어났으나 여전히 레브노아드이기도 하다. 때문에 이 목을 잘라 내놓을 수는 있으나 모욕을 당하는 것만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지스카르가 갑자기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나를 일으켜 입술에 키스했다. 내가 짜증스럽게 고개를 돌리자 손으로 얼굴을 틀어쥐고 다시 입을 맞추었다. 이참에 놈의 혓바닥을 확 깨물어버리려고 이를 세웠다. 하지만 지스카르가 바로 턱뼈를 꽉 짓눌러 그것을 막았다.
“크……웁……!”
지스카르가 혀를 넣어 멋대로 입 안을 희롱했다. 나는 손톱을 세워 놈의 팔을 잡아당기면서 신경질적으로 저항했다. 자기 팔에 상처가 생기든 말든 지스카르는 집요하게 혀와 입술을 빨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떨어졌다.
“결국 또 이렇게 되는군.”
모멸감에 경련하고 있는 내 팔에 지스카르가 손을 올렸다.
“너는 노예에 불과하다.”
“하아, 하아.”
“성은을 입는 것은 네게 황공한 일이어야 할 텐데.”
나는 간신히 숨을 가다듬으며 지스카르를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어째서 짐이 너에게 굴욕을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지스카르가 물었다.
“너는 누구지?”
자꾸 나더러 누구냐고 묻는데 비웃음이 삐져나왔다. 정말 몰라서 그렇게 묻는 거냐? 나를 노예에 불과하다고 치부하는 주제에, 나에 대한 아량이 너무 과하진 않은가 말이다.
“나는 레이다.”
“이름은 중요하지 않아.”
“이미 나에 대해서 털끝 하나까지 조사를 해놓았을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숨기지 않고 네 앞에 있다. 네 눈으로 나를 봐라. 너 스스로 판단해!”
“…….”
지스카르는 입술을 조금 열었다. 그러나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방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한참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지스카르는 침대에서 일어났고 아까 시녀가 가져온 옷을 내 앞에 내려놓았다. 나는 옷을 갈아입은 뒤 창가로 걸어갔다.
햇살이 방 안으로 따뜻하게 스며들고 있었다. 밖을 내다보니 날씨가 무척 좋았다. 지스카르도 내 시선을 따라 창밖을 보았다.
“밖에 나가고 싶은가?”
“피곤해서 쉴까 했는데 밖을 보니 또 볕을 쬐고 싶긴 하군. 또 무슨 거래라도 할까?”
지스카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정원을 둘러보려 한다. 따라오겠느냐?”
“무슨 바람인지 모르겠군. 대가 없이 밖에 나갈 수 있게 해주겠다니.”
“아침나절은 한가할 것 같다. 어울려주겠나?”
나는 창밖을 보던 시선을 거두고 돌아섰다. 놈의 말투 때문에 좀 웃었다.
“어울려달라고? 노예에겐 명령이 어울릴 텐데.”
“그렇군.”
지스카르가 시종을 불러들여 외출 준비를 명했다.
* * *
크리스티안, 던필 등 익숙한 친위기사들을 이끌고 황제궁에 딸린 내원으로 나왔다. 내원은 대단히 넓었고 조경도 화려하게 잘 되어 있었다. 정원 한편에 비치된 테이블 의자에 앉자 시녀들이 차를 내왔다.
탁자 위에는 본 적이 없는 물건이 놓여 있었다. 납작한 판과 각양각색의 모양을 한 인형이었다.
“이건 체스인가? 이상하게 생겼군.”
스트라스에도 체스가 있다. 그러나 말의 모양도 다르고 아마 규칙도 많이 다를 것이다.
“해보겠나? 하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
“좋아.”
딱히 할 일도 없었으므로 나는 승낙했다. 규칙이 생각보다 생소하고 복잡했다. 하지만 제각각 말의 생김새가 자기 성질과 쓰임을 가르쳐 주고 있었기 때문에 오래 헤매지는 않았다. 나는 어느새 엘 파셔식의 체스에 푹 빠져들었다.
“체크 메이트.”
상대편 영역에 킹을 내려놓고 씨익 웃었다. 연습게임을 포함해서 제대로 체스를 시작한 지 정확히 다섯 판째. 나는 당당히 지스카르에게 승리를 얻어냈다. 친위기사와 시녀들이 헛숨을 삼키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나는 개의치 않고 찻잔을 들었다.
“당황할 것 없다. 내가 전략 게임에 강한 편이라서. 아, 차가 다 식었군. 시간이 꽤 지났는데?”
그때 지스카르가 체스 말을 옆으로 물리며 말했다.
“다시 한 판.”
문득 지스카르에게 시선을 주었다. 항상 보던 무뚝뚝하고 표정 없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나는 굉장히 우스운 것을 본 것처럼 풋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도 생각했지만. 엘 지스카르 파셔, 은근히 지는 걸 싫어하는군.”
휴전협정 때도 악수를 할지 말지 고민하는 것을 보고 한 소리 했더니 당장 눈을 파랗게 뜨고 노려봤었지.
“그때……?”
지스카르는 고개를 들며 의문을 표했다. 나는 대충 넘기면서 체스 말을 들었다.
“그럼 다시 한 판 할까.”
새로운 게임을 시작했다. 이번엔 초반부터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시녀가 새로 가져온 차가 전부 다 식어버렸을 때야 비로소 게임은 끝났다.
“체크 메이트.”
지스카르가 내 영역 가운데에 킹을 올렸다. 나는 주먹을 내려치며 소리쳤다.
“한 판 더!”
“너도 은근히 지기 싫어하는군.”
지스카르가 툭 말했다. 한참 열불을 내다가 또 한 번 지스카르의 얼굴을 보았다. 세상 무심한 듯 차가운 얼굴. 그것을 보는 순간 또 웃음보가 터졌다.
“하하! 네 녀석, 내가 한 말을 똑같이 돌려주려고 지금까지 벼르고 있었지?”
“…….”
지스카르는 입을 꾹 다물었다. 과묵함을 무기로 유치한 속내를 숨기려나 본데 내 앞에선 어림도 없는 일이다.
나는 킥킥 더 웃다가 체스판을 내려다보았다. 한낱 게임이지만 오랜만에 호승심이 솟았다.
“아아, 물론이다. 이 몸은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지. 무엇 하나 져줄까 보냐!”
팔로 체스판 위의 말을 한꺼번에 쓸어 바닥에 밀어냈다. 나는 새로운 체스 말이 담긴 상자를 판에 올려놓았다.
“다시 한 판!”
“너는…….”
지스카르가 입을 열어 뭐라 말하려고 했다.
그때였다. 가까이서 인기척이 들려와 대화는 중단되었다. 시라크 황태자가 자기 호위기사들과 함께 내원에 나타났다.
“누가 황자를 내원에 들였느냐!”
지스카르가 전에 없이 크게 불호령을 내렸다. 원래 황제궁 내원은 황제의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이었다. 이곳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침실 등을 방문할 때처럼 당연히 사전에 허락을 받아야만 했다. 그런데 상황을 보니 시라크는 허락을 받은 것이 아닌 듯했다. 시라크의 호위기사가 사색이 되어 자기 주인을 말렸다.
“전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거 놓아라!”
시라크는 기사의 손을 뿌리쳤다. 하지만 언제 기세 좋게 나섰냐 싶을 정도로 금방 기가 죽었다. 시라크는 지스카르의 앞에 서서 고개도 쉽게 들지 못했다.
“폐하…….”
“쥐새끼처럼 기어들어 오는 법은 누구에게 배웠느냐.”
나는 내색하진 않았으나 조금 놀랐다. 지스카르는 말을 아주 신중하게 한다. 지금까지 욕 한 번 하는 걸 본 적이 없을 정도니까. 그걸 감안하면 쥐새끼 운운한 저 말은 엄청난 수준의 폭언이었다. 아니 내용은 차치하고 목소리부터 대놓고 싸늘하다.
주위의 반응을 보니 시녀와 친위기사들, 시라크의 호위들까지 모두가 동요 없이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시라크 황자가 냉대받는 것에 굉장히 익숙했다.
“그것이…… 저는 폐하께서 만나주시지 않으셔서 여기까지 찾아온 것인데…….”
“짐은 바쁘니 다시 허락을 구하고 오너라.”
“하지만 아침 문안조차 허락해 주지 않으시고……!”
시라크가 갑자기 눈꼬리를 홱 치켜들고 나를 노려보았다.
“네놈! 여기가 어디라고 네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냐! 네가 주제도 모르고 폐하께 꼬리를 친다고 들었다!! 천것 주제에 아직도 폐하의 주위를 맴돌아? 그래, 바로 네놈이 문제였어!”
시라크는 아버지를 내게 뺏기기라도 한 것처럼 삿대질하고 화를 냈다. 지스카르가 나와 유난히 시간을 많이 보낸 건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없었더라도 지스카르가 시라크를 찾았을 것 같지는 않다. 시라크는 이미 오래전에 황제의 총애를 잃었다.
“황자를 끌어내라.”
지스카르가 차갑게 명령했다. 기사들이 자신을 끌어내려 하자 시라크는 앞뒤 가리지 않고 와락 지스카르의 팔에 매달렸다.
“폐하! 저런 놈과 보낼 시간은 있고, 저와 모후를 만나주실 시간은 없으신 겁니까? 왜 절 찾지 않는 거예요! 왜 그러시는 건데요!”
나는 한숨을 쉬며 아예 그 광경에서 눈을 돌렸다. 주위에 보는 눈도 많은데 황태자가 저렇게 떼를 쓰다니 보기가 민망했다. 시라크는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나 황제에게 총애받고 있지 못했다. 그렇다면 매사 말과 행동에 극도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하지만 시라크는 그럴 만한 인물이 못 되었다.
시라크는 결국 기사들에게 끌려나가고 말았다. 주변이 어수선해서 계속 체스를 둘 만한 분위기가 아니다. 지스카르는 그만 일을 보러 들어가기로 했다. 나도 방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황제궁 입구까지만 같은 길을 걸었다. 나는 걸어가다가 시라크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아무리 황후 소생에 황태자 신분이더라도 황제가 냉대하면 그 입지는 급속도로 작아진다. 시라크 황태자에게 황위를 물려주지 않을 생각인가?”
친위기사들이 움찔거렸다. 내 무례한 발언을 제지해야 하는 건지 고민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한두 번 무례했어야지. 내가 다시 입을 열 때까지도 결국 방해는 없었다.
“왜지? 너무 철이 없는 것이 성에 차지 않는가? 그게 아니면 마음에 드는 아들이 따로 있나?”
너무 예민한 이야기를 계속 꺼낸 덕에 주위 시선이 아주 따가웠다. 어차피 재미도 없는 이야기. 나는 묻는 걸 그만두었다. 그때 지스카르가 대답했다.
“그래, 시라크의 재능과 성품이 모두 탐탁지 않다. 무엇보다도 브뤼셀 황후와 외가인 마크시 공작가의 권세가 너무 강해서 시라크가 황제가 되면 외척이 득세하게 될 것이다.”
황실의 민감한 사안이다. 설마 대답해 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는데.
“네 생각은 어떻지?”
그런데 지스카르는 여기에서 끝내지 않고 무려 의견을 구하기까지 했다. 시녀들이 마른침을 삼켰고 친위기사들은 뻣뻣하게 어깨를 굳혔다.
나는 쓰게 웃었다.
“내가 아는 누군가와 행동 방식이 비슷하군. 황제의 총애는 권력을 낳는다. 어중간한 자식들은 아예 내 핏줄이 아닌 걸로 치고, 확실한 재목만 골라서 밀어주는 것이 장차 제국을 위한 일이다. 나도 그 뜻에 동의하고 있다.”
스트라스의 황제가, 아버지가 지나치게 냉정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나라의 안위를 제일로 생각하는 이성적인 군주였다. 감정에 치우쳐 아무 자식에게나 애정을 주었더라면 훨씬 큰 혼란을 초래했을 것이고 온 나라가 내전의 불길에 휩싸였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대화의 끝이었다. 지스카르가 다시 걷기 시작했고 나도 뒤를 따라 걸었다. 주위는 나뭇가지 흔들리는 소리 말고는 무척 고요했다.
나는 즉흥적으로 말했다.
“노예가 주는 사랑은 하잘것없다. 사랑받은 노예는 커서 그냥 노예가 된다. 그래서 노예들은 첫째 아이를 낳아도 둘째 아이를 낳아도 언제나 똑같이 사랑을 베풀지. 그들의 애정은 아무리 퍼내도 단 하루도 마르지 않아.”
빈첸시오 성의 노예들. 아둔하고 계산할 줄 모르는 자들. 그래서 나는 그들의 곁을 떠날 줄을 몰랐다. 스트라스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나는 아마도…… 굉장히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