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황성에 끌려온 지도 한 달 가까이 지났다. 나는 여전히 침실에 갇혀 있었고, 족쇄를 차고 있었으며, 서류 업무나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가끔 외출의 기회도 주어졌다. 이번에도 익숙한 다섯 명의 친위기사가 감시 역할로 불려왔다. 준비를 전부 마치고 일어나자 지스카르가 말했다.
“늦게까지 돌아다니지 말고 일찍 들어오너라.”
황당함에 지스카르를 쳐다봤다. 난 친위기사들을 불러서 물었다.
“그대들 군주께서 하시는 말씀 들었나? 다 큰 자식한테 잔소리하는 아버지처럼 행동하시는데 내가 어떻게 대답해 드리면 되지?”
“…….”
아무도 대답이 없다. 내가 너무 무례해서 할 말을 잃은 것이고, 지스카르의 말투가 진짜 내가 말한 대로였다는 데서 또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서류는? 조의(朝儀)에 필요한 문건이 있으니 두고 가라.”
방을 나가기 전에 지스카르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놈의 요구에 멈칫 그 자리에 섰다.
이미 말했지만 나는 매일 서류를 처리하면서 무료한 낮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지스카르가 던져 주는 서류의 분량이 점점 늘어갔다. 그리고 이제 지스카르는 당연한 듯이 회의에 필요한 서류를 내놓으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저놈을 갈아 마실까?
나는 서류뭉치를 들고 와서 지스카르에게 하나씩 던져 주었다.
“궁내부 예산안, 전월 대비 큰 변동 없음. 면세물품 목록 조정안, 주요물품 세 가지 추려놨으니 알아서 골라.”
“셋 다 면세품목에 포함시키는 게 낫겠군.”
지스카르가 서류를 살펴보며 말했다. 나는 인상을 쓰며 다음번 서류뭉치는 좀 거칠게 던졌다.
“그리고 외궁 보수를 위한 세부 자재 구성안, 이딴 건 건축업자들 불러서 회의시켜!”
“…….”
“마지막 새 주화 제조 시 철과 구리의 조합 비율 건의안! 제련 기술자를 고용하는 것을 추천하마. 내 능력을 파악하기 위해서 이걸 끼워 넣은 모양인데, 동전 만드는 법을 적어내라는 건 인간적으로 심하다 생각되지 않더냐?”
어이가 없어서 이번 서류는 아예 책상 아래 휴지통에 꽂아버렸다.
“……예의 암살 조직에서 건축과 제련 기술은 가르치지 않는 모양이지?”
“내가 암살 조직의 우두머리라면 절대로 가르치지 않을 것이다.”
“짐이 암살 조직의 우두머리라면 황실 예산이 어떻게 구성되는지도 가르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조직과 견해 차이가 있어 유감이군!!”
지스카르가 지그시 날 쳐다봤다. 그런 눈으로 쳐다보면 어쩌자고? 먼저 말장난 시작한 건 그쪽이야.
“나가봐도 좋다.”
“사양하지 않고.”
나는 방을 나섰다. 두어 번의 외출로 근처의 지리는 머릿속에 완벽하게 기억되어 있었다. 그러나 단순 지리 외에도 알아두어야 할 일이 많았다. 경비병이 전부 몇 명이나 되는지. 교대는 하루에 몇 번, 몇 시에 하는지.
탈출만이 목적이 아니라 엘 파셔의 황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해 두고 싶기도 했다. 이건 스트라스에 상당히 중요한 정보가 될 것이다. 내가 스트라스의 황태자인 것은 아니지만, 아예 스트라스인조차 아니군. 그래도 궁금한 건 궁금한 거니까.
갑자기 속이 허전하다고 느꼈다. 점심을 거른 것이다. 그동안 내 뒤를 따라다니던 기사들도 물론 점심을 걸렀다. 나는 잠시 돌아섰다.
“고생이 많군. 2교대로 식사라도 하고 오너라.”
“허허, 그놈! 들을수록 쏠쏠한 맛이 있네. 황제 폐하와 맞먹는 건 머리가 아주 비상해서 그렇다 치고, 사람한테 명령하는 말투는 어디서 배웠냐?”
이럴 때 끼어드는 놈은 정해져 있다. 말리는 사람도 정해져 있다. 던필이 깝죽대는 것을 크리스티안이 인상을 쓰며 나무랐다.
“던필!!”
“크리스 대장, 나는 이제 저 노예를 감시하는 게 아니라 모시고 다니는 것 같은 착각을 느낄 정도입니다? 내 정신 건강을 위해서 파업하고 싶어!”
존대에 반말이 뒤죽박죽 섞여 있었다. 이제 보니 두 사람 사적으로 친한 사이 같았다. 그러나 크리스티안은 공사가 엄격한 성격이었다. 던필이 막 나가기 시작하자 크리스티안의 울대에 핏줄이 섰다.
“던필! 공무 중이다! 언제까지 그 무분별한 태도가 용납될 것이라 생각하나?”
“저 녀석 때문에 네가 더 고민하고 있잖아. 안 그래도 생각이 많은 네가 울화병으로 넘어가기 전에 내가 나서서 그 궁금증을 풀어주지!”
“네 녀석!!”
조금 길어질 것 같은 소란은 웬 중년 부인이 접근해 오면서 중단되었다. 그녀가 내 앞을 가로막고 자기소개도 없이 대뜸 말했다.
“네가 바로 레이렷다? 따라오너라.”
“음?”
“황후 전하께서 너를 보자 하신다. 영광으로 알아야 할 것이야.”
브뤼셀 황후가 날 보자 한다고?
대충 정황으로 유추할 때 황후와 황태자는 오래전에 황제의 눈 밖에 난 상태인 것으로 보인다. 평소 냉대당하던 황후는 웬 놈의 노예가 나타나 황제의 침실을 차지한 뒤로 더욱 뒷방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황후는 물론 시라크까지 아침 문안조차 허락받지 못했다고 들었다. 지금까지 황제와 황후의 사이가 안 좋은 것이 공공연한 사실이었다면 나를 기폭제로 해서 황실의 골이 대대적으로 드러나는 형세였다.
갑자기 울컥한다. 상황을 가만 정리하고 보니 지스카르 이놈이 나를 골수까지 이용해 먹고 있지 않은가. 밤엔 내키는 대로 이 몸에다 욕정을 풀고, 밖에선 황실 외척 세력을 몰아내려고 내 존재를 이용해?
“뭣 하느냐? 황후 전하의 명령이라는데 따라오지 않고!”
“아…….”
부인이 다시 브뤼셀 황후를 들먹였다. 갑자기 황후의 증오를 한 몸에 받는 밉살스러운 애첩 역할이 내게 떡하니 안겨졌다. 나는 내키지 않는 발을 질질 끌고 어쩔 수 없이 황후궁으로 향했다.
“걱정 마라. 폐하의 분부도 있었고, 저쪽에서 해코지 못 하게 지켜주겠다.”
크리스티안이 내게만 들릴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보호해 주겠다고 강조 안 해도 된다. 지금 아쉬운 건 내가 아니라 황후 쪽이니까. 혹시 황후가 내게 손찌검이라도 하면 지스카르가 아주 옳다구나 하며 그 일을 빌미로 황후 세력을 압박하려 들 것이다. 황제가 끔찍하게 아끼는 애첩에게 손을 대서 좋을 일 따위 하나도 없다. 투기가 심하다고 책이나 잡히지.
일전에 시라크가 날 두들겨 팼던 일은 지금 와서 보면 아주 아슬아슬한 상황이었다. 안 그래도 시라크는 턱 끝까지 미움을 받고 있다. 내가 덮어달라고 하지 않았으면 벌써 무슨 사달이 나도 났을 것이다.
황후궁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나는 중년 부인의 안내를 받아 접빈실에 도착했다. 그때 약간 소란이 일었다. 친위기사들이 내 뒤를 따라 접빈실 안까지 들어오려고 했기 때문이다. 황후궁의 기사들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 접빈실 안에서 시라크 황태자가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크리스티안 경! 모후까지 계시는 곳에서 어찌 이 같은 무례를 저지르는가!”
“무슨 일이 있어도 그의 곁에서 떨어지지 말라는 황제 폐하의 엄명이 계셨습니다. 약간의 무례가 있더라도 이해해 주십시오.”
크리스티안은 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마지막 타협안으로 던필과 세 명의 기사는 밖에 남기로 했다. 자신의 뜻이 무시당했다고 생각한 시라크는 얼굴을 벌겋게 붉히며 분개했다. 그는 이를 갈다가 갑자기 분노의 화살을 돌려 나를 노려보았다.
“시라크 전하, 이 어미는 괜찮으니 화를 거두어주세요. 폐하의 명이라는데 어쩔 수 없지요.”
그때 성숙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여성, 브뤼셀 황후가 나섰다. 본인이 괜찮다고 하니 시라크는 하는 수 없이 물러났다. 황후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내게 물었다.
“이름이 레이라 하느냐?”
“…….”
나는 잠시 생각하며 말을 골랐다.
“그렇습니다.”
결국 내가 대답하자 크리스티안이 흠칫 날 봤다. 어전에서도 반말하는 주제에 무슨 바람이 불어서 존대냐는 거다.
저 녀석은 내가 공손히 말할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겠는데?
“그래, 레이. 듣던 대로 예쁘장하게 생겼구나. 폐하께서 널 마음에 들어 하실 만도 해.”
브뤼셀 황후가 우아하게 말하며 안으로 걸어갔다.
나는 예쁘장하다는 말에 혼자 조금 발끈했다. 이 분노는 브뤼셀 황후가 아니라 고스란히 지스카르에게 향했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여성을 골라서 애첩으로 내세웠으면 저 대사에 아무런 위화감도 없었을 것이 아닌가.
접빈실 창가 쪽 티테이블에 황후 외에도 귀부인 셋이 더 있었다. 나는 단숨에 그들의 신분을 파악했다. 지스카르에겐 황후 외에 세 명의 후궁이 있다고 들었다. 날 보려고 황후와 후궁이 전부 출동한 것이다.
“여기 앉거라.”
황후는 테이블 바깥쪽 자리를 하나 내주었다.
“이쪽은 케미안 1후궁, 이쪽 분은 크로커스 2후궁, 여기 계신 분이 이로파 3후궁이다. 여자들끼리 사적인 이야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너에 대한 궁금증이 커져 이렇게 호출을 하게 되었다.”
그야 나 같아도 어떤 놈인지 궁금하긴 했을 것이다. 이해는 되는데 나로서는 이 자리가 영 마뜩잖았다.
약간의 다과가 추가로 나왔다. 찝찝한 기분을 잊기 위해 나는 일단 아무 과자나 집어 들었다. 그랬더니 황후가 부채로 입을 가리며 다른 후궁들과 함께 낮게 웃기 시작했다. 이로파 3후궁이 말했다.
“레이. 티타임이잖니. 과자에 먼저 손을 대는 건 아주 배워먹지 못한 짓이란다.”
“식전이기 때문에 공복에 차를 마시기가 곤란해서 그랬습니다. 제 행동을 불쾌하게 느끼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호호……. 그래?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만.”
통쾌하던 웃음소리가 미묘하게 줄어들었다. 이번엔 크로커스 2후궁이 차를 권했다.
“그래도 티타임인데 차도 마시고 그래야지?”
“예.”
나는 순순히 찻잔을 들고 황후의 등 뒤에서 대기 중이던 시녀에게 눈짓했다.
“우유는 약간만.”
시녀는 약간 머뭇거리다 우유를 넣어주었다. 잔을 잠시 흔들어서 우유가 섞여 들어가자 차를 입에 댔다. 크로커스 2후궁의 표정이 눈에 띄게 일그러져 있었다. 시라크가 벌떡 일어나더니 소리쳤다.
“노예 주제에 차 마시는 법은 어떻게 아는 거야?”
“……황궁에 도착한 뒤로 여러 가지 배웠습니다.”
“노예 주제에 차라니! 건방지기 짝이 없어!”
그렇게 생각한다면 괜한 노예 불러다 차를 대접하지 말아다오.
“시라크 전하, 진정하세요. 장차 엘 파셔의 황제가 될 분께서 이런 일에 직접 나서서야 체통이 서지 않아요.”
브뤼셀 황후의 분위기가 전과 약간 달라졌다. 가식이나마 얼굴에 가득하던 미소가 사라졌다. 시라크는 분을 참으며 자리에 앉았고, 대신 황후가 일어났다. 그녀는 찻잔을 든 채 내 등 뒤에 섰다. 그녀가 손으로 내 어깨를 부드럽게 눌렀다.
“앉아 있거라. 폐하께서 차 마시는 법을 가르쳐 주셨나 보지? 아,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 폐하께서 아주 많이 사랑해 주시는 모양이구나.”
브뤼셀 황후는 빙그레 웃으며 내 어깨에 남은 차를 전부 쏟아부었다.
“어머나, 이런 실수를…….”
누가 봐도 실수가 아니지만 황후는 실수라고 말했다. 나는 물기에 달라붙은 상의를 조금 떼어냈다. 차는 뜨겁지 않고 미적지근했다. 찻물의 온도에서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밉살맞은 애첩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싶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거다.
이로파 3후궁이 서둘러 일어나 황후의 곁에 다가갔다.
“황후 전하, 괜찮으십니까. 찻물이 튀어 화상을 입지는 않으셨습니까.”
대놓고 나한테 부었는데 화상은 무슨.
짜고 치는 연극에 황후는 우아하게 대답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레이가 많이 젖었네요. 레이, 황후 전하께서 실수를 좀 하셨구나. 이해할 수 있지?”
크로커스 2후궁이 미안하다면서 호호호 웃었다. 진짜 미안하다면 표정 관리부터 좀 하던가.
그들 중에서 케미안 1후궁만 어깨를 움츠리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 중에서 그녀만이 가장 독기가 없었다. 그렇다고 나의 아군인 것은 아니고 소심해서 나서질 못할 뿐이었다.
“옷을 준비해 주십시오. 갈아입고 가겠습니다.”
나는 물기를 툭툭 털면서 말했다. 브뤼셀 황후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내가 너무 태연자약한 데다가 뻔뻔하게 갈아입을 옷까지 요구했기 때문이다.
“옷이 젖은 것을 보고 폐하께서 오해하실까 걱정됩니다. 저는 황후 전하의 실수를 이해하지만 폐하께서는 다르실지도 모르니까요.”
“……그래?”
브뤼셀 황후는 더욱 눈을 가늘게 뜨고 입으로는 짙게 미소 지었다. 그래도 황후는 바보가 아닌 모양이다. 여기서 화를 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시라크보다는 훨씬 낫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때 아까부터 이 상황을 무척 유쾌하게 바라보고 있던 시라크가 갑자기 큰 소리를 냈다.
“여봐라! 모후의 잔이 비어 있지 않느냐! 새로 차를 가져와라!”
시라크 황자의 독촉에 시녀가 찻잎과 물병을 가져왔다. 따뜻한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물병은 항상 작은 불씨 위에 있었다. 시라크는 성큼 걸어가서 뜨거운 물병을 빼앗아 들었다.
나는 설마 했다. 설마 아니겠지. 진짜로 브뤼셀 황후가 했던 것처럼 저걸 나한테 부으려는 건가. 아까와는 달리 거기엔 뜨거운 물이 들어 있단 말이다. 게다가 똑같은 짓을 두 번 하면 아무리 실수라고 우겨도 씨알이 먹히겠냐고. 시라크의 멍청함이 상상을 넘어서서 나는 골치가 아파왔다.
시라크는 혼자 신이 나서 물병을 가지고 내게 다가왔다. 브뤼셀 황후도 뒤늦게 시라크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그를 말리려 나섰다.
그때 크리스티안이 시라크 황자의 팔을 붙잡았다. 그는 사정없이 황자의 팔을 뒤로 비틀어 물병을 빼앗아갔다.
“아아악!!”
시라크 황자가 고통스럽게 팔을 붙들고 비명을 질렀다.
“크, 크리스티안 경! 그대가 어떻게 감히, 황태자에게 이런 짓을……!!”
브뤼셀 황후가 노성을 터뜨렸다. 그녀는 서둘러 달려가 시라크 황자의 팔을 살폈다.
크리스티안은 물병을 옆에 내려놓고 황후를 향해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황후 전하. 시라크 전하께서 화상을 입으실까 우려되어 그만 끼어들고 말았습니다. 부디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뭐라?”
화상을 입을 뻔한 건 시라크가 아니라 나다. 빤한 변명에 브뤼셀 황후는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나도 기분이 조금 묘했다. 아무리 지스카르에게 날 지키라고 명령받았다 해도, 굳이 시라크의 팔을 비틀기까지 하고 누가 봐도 행동이 너무 과했다.
어쩌면 일부러 과하게 행동하는 것인가. 시라크에게 제대로 된 황태자 대접을 해주지 않는 것으로 그의 위신을 꺾기 위해서. 브뤼셀 황후도 같은 생각인지 쉽사리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했다.
하지만 끝내 크리스티안에게 죄를 묻진 못했다. 이건 일개 친위기사의 의도가 아니라 황제의 의도이다. 몹시 화가 났으나 아무런 준비도 없이 황제를 적대할 수는 없었다.
흉흉한 분위기에서 티타임이 마무리되었다. 주위 시선이 따가웠지만 나는 꿋꿋하게 젖은 옷을 다 갈아입고 황후궁을 나왔다.
황제궁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찜찜한 기분에 괜히 목 언저리를 주물렀다. 시라크가 끙끙 앓는 얼굴이 떠올랐다.
“지스카르가 많이 급한가 보지. 자기 친위기사까지 이용해서 황태자의 체면을 꺾으려 하다니.”
“무슨 소리지?”
크리스티안은 진짜로 내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물었다.
“지스카르가 황태자를 모욕하라고 시킨 것이 아니냐? 쉽게 물병을 빼앗을 수 있었을 텐데 일부러 애 팔을 꺾어버리지 않았느냐.”
“그건……! 실수였다. 네가 다칠 수도 있는 일이었고, 나도 모르게 손이 나간 것뿐이다.”
“실수? 무슨 그런 실수가 있지?”
내가 황당하게 물었다. 그때 던필이 대화를 듣고 있다가 끼어들었다.
“들어보니 과잉보호를 했나 보네. 이거 참 문제가 많아. 노예를 모시고 다니니까 이런 일이 생기는 거잖아.”
크리스티안이 살짝 화가 나서 노려보자 던필은 얼른 화제를 돌리면서 내게 말을 걸었다.
“그리고 너도 희한한 의심을 하는군. 황제 폐하는 그런 지저분한 일에 우릴 끌어들이는 성품이 아니시다. 그런 것도 몰라?”
“하긴. 지스카르는 좀 고지식한 편이지.”
나는 곧 수긍했다. 그런데 던필이 표정을 콱 구기고 빨간 머리카락을 북북 긁었다.
“아니야, 노예가 그런 걸 어떻게 알아. 뭐든 알 거라고 전제하고 말하는 나도 참…….”
“던필. 잡담은 거기까지다.”
크리스티안이 그쯤에서 대화를 중단시키려 했다. 시답잖은 대화를 흘려들으며 나는 다시 목을 만졌다. 왜 자꾸 목에 손이 가나 했더니 황후궁에서 얻어온 옷이 조금 작은 것 같았다. 나는 불편한 겉옷을 벗어버렸다. 옷을 옆으로 내밀자 마침 곁에 있던 크리스티안이 두 손으로 옷을 받들었다.
처음에는 이상한 점을 인식하지 못했다. 하지만 금방 뭐가 문제인지 깨달았다. 뒤를 돌아보니 크리스티안이 잔뜩 인상을 쓴 채 길 가운데에 멈춰 서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공손하게 받아 든 내 옷을 내려다보면서. 친위기사들은 뭐라 설명하기 힘든 표정을 짓고 있었다. 던필조차 당혹스럽게 크리스티안을 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크리스티안 경, 뜻밖에 분위기에 휩쓸리기 쉬운 성격이었군.”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간단히 촌평했다. 이만 움직이자고 말하며 먼저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크리스티안이 무언가 단단히 각오한 얼굴로 갑자기 말을 꺼냈다.
“예전에 어디선가 너를 본 적이 있다.”
순간 팔과 다리가 멈칫했다.
나는 돌아섰다. 크리스티안을 보며 궁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디서?”
“그건…… 기억나지 않아.”
“나는 노예 숙소 근처를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다. 언제 빈첸시오 성에 들른 적이 있는가?”
“빈첸시오 성은 그때 첫 방문이었다.”
“그렇다면 착각이군.”
나는 가차 없이 단언했다. 그 반동인지 크리스티안은 언성을 높였다.
“착각이 아니다! 틀림없이 너를 어디선가 본 적이 있어!”
“기억도 안 난다면서 어째서 그렇게 확신한단 말이냐?”
“…….”
크리스티안은 대답하지 못했다.
결국엔 이렇다. 나는 쓴웃음을 짓고 돌아섰다.
* * *
조금 지체하는 사이에 벌써 해가 저물기 시작했다. 황제궁에 도착했으나 방으로 직행하지 않고 내원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오랜만에 밤하늘에 달까지 구경하고 갈 참이었다.
갑자기 배가 고파졌다. 생각해 보니 오늘 온종일 제대로 된 식사를 한 번도 안 했다. 황후궁에 불려가서 다과를 조금 먹었을 뿐. 그런데 친위기사들은 그것조차 입에 대지 못했다.
“농담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교대로 식사를 하고 와라. 몇 명 자리가 빈다고 무슨 일이 있겠느냐?”
“…….”
기사들은 답은 안 했지만 꽤 동요하는 얼굴이었다. 배가 고프긴 고팠나 보다.
“프리츠, 커멘더스, 펠드란. 다녀와라.”
크리스티안이 말했다. 세 명의 기사들은 약간 주저하다가 곧 움직였다. 그들이 사라지자마자 던필이 맞은편 의자를 하나 빼내어 척하니 앉았다. 그는 테이블 위에 나태하게 머리를 대고 불만을 쏟아냈다.
“아, 피곤하다! 너는 뭐 나올 게 있다고 하루 종일 빨빨대고 쏘다니는 거야?”
“던필……!”
또 핏대 올리는 크리스티안을 내가 막았다.
“크리스티안 경. 저놈의 태도가 나도 탐탁지 않지만, 하루 종일 피곤했을 텐데 그쪽도 좀 앉아라. 가끔 융통성도 필요한 법이다.”
크리스티안은 인상을 썼다. 하지만 던필 문제는 잠시 넘겨두고 내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저놈도 지스카르처럼 내 얼굴 뜯어보는 게 취미가 되려나.
결국 크리스티안은 의자를 꺼내 앉았다.
밤바람이 시원하게 머리를 흩뜨렸다. 나는 오랜만에 느긋한 기분이 되었다.
“그런데 너 말이야. 어째 크리스를 대하는 태도랑 나를 대하는 태도가 너무 다르다?”
한가함을 즐기고 있을 때 던필이 테이블 위에 비비적대고 있던 머리를 들고 말했다. 그의 시시한 잡담에 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너의 깃털처럼 가벼운 언행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하진 않나?”
“이봐, 말투가 좀 유쾌하다고 사람을 그렇게 쉽게 보면 안 돼. 내가 이래 봬도 황제의 친위대에서 세 손가락에 꼽힐 만큼 강한 사람이란 말이다.”
“못 믿겠군. 첫 만남에서의 추태를 생각해서도.”
처음 내가 도망치려 했을 때 헛손질을 하다 나동그라진 게 바로 던필이었다.
“그건 방심해서고! 잘 생각해 봐. 그 깐깐한 황제께서 아무나 측근으로 삼을까?”
“아아…….”
“좋아, 설득당하고 있어.”
던필이 괴짜지만 확실히 유쾌한 놈이긴 하다. 나는 순수하게 잡담을 즐기면서 크게 웃었다.
“너는 어느 가문 출신이고 이름은 정확히 무엇이라고 하지?”
던필이 꽤 마음에 들었으므로 그의 출신이 궁금해서 질문을 던졌다. 다리를 모로 꼬며 즐겁게 묻자 시시하게 잡담이나 하던 던필은 움찔했다.
“…….”
던필은 머리를 사납게 긁어댔다.
“뭐 이리 오만방자한 노예가 다 있는지…….”
불만을 토로했으나 그는 이내 질문에 대답했다.
“나는 그랜트 공작가의 장자인 던필 그랜트라고 한다.”
“엘 파셔 3대 공작가인 그랜트 가문?”
“그래.”
던필이 뭘 믿고 그렇게 막 나갔는지 그 이유를 지금 알았다. 배경이 저 정도이면 조금 괴짜 짓을 해도 얼마든지 무마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참에 크리스티안의 출신도 물었다.
“그쪽은?”
크리스티안은 푹 한숨을 쉬었다. 자포자기한 모양새로 곧바로 내 질문에 대답했다.
“울펜가모트 공작가문의 장남. 크리스티안 울펜가모트다.”
엘 파셔에는 세 개의 종신 공작가가 존재하는데 브뤼셀 황후를 배출한 마크시 공작가, 그리고 그랜트 공작가와 울펜가모트 공작가문이다. 크리스티안과 던필이 사적으로 친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같은 공작가문에 나이대까지 비슷하니 친구가 되기 쉬웠을 것이다.
“아아! 배고프다! 뭐 마실 거라도 없을까? 여기 보거라! 누구 없느냐!”
던필이 크게 소리를 질러 사람을 불렀다. 어디선가 시종이 후다닥 달려와 공손히 물었다.
“무엇을 준비할까요?”
“술과 고기 안주.”
쾅!
“던필!!”
크리스티안이 테이블을 냅다 내려쳤다. 이번엔 진짜로 핏대를 세울 만했다. 감시 역할을 하면서 술은 너무하잖아.
“나는 앙꼴주. 연도는 따지지 않을 테니 평범한 것으로.”
하지만 나는 성실한 크리스티안의 편을 들지 않고 던필 편을 들었다. 나도 출출한 데다가 술이 당겼기 때문이다.
던필은 혀를 끌끌 찼다.
“앙꼴주가 뭐냐! 단맛밖에 없는 과실주를 술이라고 마셔? 앙꼴인지 앵꼴인지는 치우고 진짜 알코올이 가득한 발칸주로 가자!”
던필이 마음대로 주문을 바꾸었다.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치워. 나는 앙꼴주 외엔 마시지 않는다. 취하는 건 질색이니까.”
“취하기 싫은데 술은 뭐 하러 마셔? 취하기 위해서 먹는 게 술 아닌가?”
던필이 술, 술 하면서 투덜투덜 불평했다.
“어째서 취하는 것이 싫지?”
날 보면서 크리스티안이 던필과 비슷한 질문을 했다. 하지만 장난기 가득한 던필과 달리 크리스티안은 무척 진지했다.
새삼 독주를 마시지 않는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취하는 것을 꺼렸던 것은 암살에 대처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 암살당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누가 나 같은 노예를 암살하려 할까.
“……그러고 보니 취하지 못할 이유가 없군.”
잠시 후 던필이 시킨 도수 높은 술과 고기 안주가 테이블 위에 올라왔다.
던필은 잔을 세 개 늘어놓고 거기다 발칸주를 퍼부었다.
“하하하! 레이! 아, 그냥 그렇게 부를 거니 그러려니 해라? 어쨌든 내가 술에 취하길 기다렸다 도망칠 생각은 않는 게 좋을 거다. 내 주량이 어느 정도인지 알면 놀랄걸?”
“던필…….”
크리스티안은 이마를 짚었다. 화낼 기력도 떨어진 것 같았다. 저런 상식 밖의 놈에게 그간 친구라는 명목으로 시달림을 당하였을 크리스티안에게 심심한 동정의 표시를.
나는 술잔을 들어서 뭐 하냐고 눈치를 줬다. 던필이 옳다구나 건배를 했고 나는 술을 쭉 들이켰다.
“쿨럭! 쿨럭쿨럭! 하악!!”
갑자기 독주를 마신 대가는 혹독했다. 나는 잔을 반도 못 비우고 가슴팍을 쥐고 한참 동안 기침을 뱉었다.
“하하하하! 그게 얼마나 독한 술인데 초보자가 단숨에 마셔?”
던필이 배를 잡고 폭소를 터뜨렸다. 나는 거칠게 입술을 훔치고 다시 잔을 쥐었다. 그리고 남은 잔을 모조리 비워버렸다.
“푸하!”
“……아하,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랬지.”
“기억하고 있군. 잔이 비었는데 채우지 않고 뭘 하고 있느냐?”
“아이쿠, 알아 모시겠습니다.”
던필이 계속 잔을 채워주었고 나는 쉼 없이 술을 마셨다. 크리스티안은 끝까지 술잔에 손을 대지 않았고, 대신 약간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지켜보았다.
갑자기 눈앞의 광경이 마구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왜인지 바닥이 훅 꺼졌다. 거기까지가 내가 기억하는 그날의 마지막 광경이었다.
“이런! 무리하는 것 같더라니.”
술에 쉬한 레이가 균형을 잃더니 휙 뒤로 넘어갔다. 뒤통수부터 바닥에 처박힐 뻔할 것을 크리스티안이 간발의 차로 붙들었다. 그는 진심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레이. 정신 차려라.”
레이는 완전히 취해서 반쯤 꿈속에 있었다. 자신을 안은 두 팔이 따뜻했다. 레이는 갑자기 그 촉감과 냄새에 사로잡혀 크리스티안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우응, 어머니…….”
“어라? 저 녀석 봐라?”
던필은 무척 재미있어하며 웃었다. 평소엔 제 나이보다 열 살은 더 먹은 것처럼 행동하면서 술주정은 엄마를 찾는 거라니.
반면 크리스는 무척 당황해서 레이를 떨어뜨리려고 애썼다.
“던필! 그를 좀 떼어내!”
“여자가 달라붙은 것도 아닌데 그렇게 정색할 것 없잖아? 뭐 어때. 귀여운 주정이네.”
“멍청한 소리를! 폐하께서 총애하시는 자다!”
“그것도 그렇군. 그런데 폐하 취향도 참 독특하지? 우리 아주 어렸을 때부터 같이 어울려 다니곤 했잖아. 그런데 우리 황제님이 남색에 관심이 있는 줄 이번에 처음 알았다니까?”
크리스티안과 던필 그리고 지스카르까지, 세 사람은 어렸을 적부터 알고 지내던 친우였다. 나이가 들어 각자의 신분과 입장에 따라 행동하고 있지만 사적인 공간에서는 아직 친밀함을 이어오고 있었다.
“뭐어, 그쪽이었으면 진작 말해줬으면 좋았을 것을…….”
던필은 턱을 괴고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웅얼거렸다. 그는 눈으로 흘끗 크리스티안을 좇았다.
“남색이 금기도 아니고 남첩을 둔 자가 주위에 수두룩한데 뭐가 그렇게 신경이 쓰인다는 거지? 그보다 레이를 내려놓게 도와달란 말이다.”
“앗. 그렇게 생각해?”
“잡담 좀 그만하고!!”
던필은 괜히 화색이 만연해져서 크리스티안을 돕는 시늉을 했다.
“네네, 알겠습니다. 레이, 이러다 들키면 크리스가 친위대장직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단다. 억하심정이 있는 게 아니면 좀 비켜주련?”
레이를 품에서 떼어내려고 했으나 그는 되레 크리스티안의 옷깃을 꼭 쥐었다.
“어이쿠, 요놈 방긋방긋 웃는다. 이것 좀 봐.”
던필은 킥킥 웃으며 레이의 뺨을 꾹 눌렀다.
“하하! 그냥 내버려두면 잠들 테니 그때 데려가자.”
“그때까지 이대로 있으라는 거냐?”
“몸을 가누지 못하잖아. 어차피 누군가가 안고 있어야 한…….”
갑자기 던필은 하던 말을 뚝 끊었다. 누군가 어둠이 깔린 정원 안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상대가 누구인지 파악한 두 사람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폐하!”
“폐하, 어찌 여기까지…….”
지스카르는 수행하는 자 없이 혼자였다. 주변에 사람이라곤 사적으로 친분이 있는 그들 셋뿐이었으나 어쩐지 분위기가 어색하고 공기 중에 긴장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술에 취한 레이에겐 관계없는 일이었다. 그는 좀 더 크리스티안의 품에 파고들어 냄새를 킁킁 맡았다. 사람 냄새. 좋은 냄새. 크리스티안은 더 말로 표현할 수도 없을 만큼 당황했다.
“아……!! 이, 이건……!”
“어머니……. 으응.”
레이가 다시 미소를 지으며 어머니를 찾았다. 던필이 그 모습을 보고 급히 말했다.
“보십시오! 이 녀석은 엄마인 줄 착각하고 크리스에게 달라붙은 겁니다. 혹시 오해하실까 봐 말씀드리는 거니까요.”
“이리 다오.”
지스카르가 손을 뻗었다. 레이는 약간 반항하며 싫은 기색을 보였다. 무뚝뚝한 목소리가 싫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딘지 익숙한 냄새도 났다. 몸이 흔들리지 않도록 커다란 손이 어깨를 감싸주었다. 그 배려도 어딘지 익숙하다. 레이는 어느새 조금 안심했다.
지스카르는 완전히 잠들어버린 레이를 안고 잠시 근처 의자에 앉았다.
“늦게까지 무엇을 하는가 했더니 술을 먹었단 말인가.”
테이블 위에 술잔과 안주가 널려 있었다. 지스카르는 주위 상황을 인지하고 실소를 지었다.
“크리스티안. 너답지 않은 일 처리 방식이군.”
“……죄송합니다.”
“어차피 던필이 막무가내로 저지른 짓일 테지.”
“아신다니 불호령은 제게 내려주십시오. 혹시 술에 취하면 저 녀석이 숨기고 있던 말을 털어놓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독주를 한번 먹여보았지요.”
던필이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황제와 신하의 입장이라 아예 친구처럼 지내진 못해도 격식을 많이 내려놓은 대화였다.
“레이는 오늘 하루 무얼 하던가?”
지스카르가 레이의 벌꿀 색 머리칼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허락된 범위 안에서 황성을 탐색했습니다. 항상 그래 왔듯 감시의 눈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오후 즈음에는 황후궁에 불려갔습니다. 그리고…….”
레이의 외출이 끝나면 크리스티안은 언제나 당일 있었던 일을 자세하게 지스카르에게 보고했다. 크리스티안은 가능한 한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하며 레이의 행동에 의견을 내보았다.
“그는 누굴 상대로든 거침이 없습니다. 그러나 황후궁에 도착해서는 한 수 접어주고 몸을 낮추었습니다. 이유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는데…….”
던필이 주먹을 휘휘 휘두르며 끼어들었다.
“철없는 황태자에게 평소처럼 시원하게 한 방 먹여버리지 왜 사정 봐주는지 모르겠다 이 말이지요.”
“던필, 황족에 대해 말이 지나치다.”
아무리 폐위가 예정된 황태자라지만 크리스티안은 언급에 주의를 요구했다. 하지만 던필은 그 정도에 눈 깜짝할 인간이 아니었다.
“그보다 희한하지 않습니까? 저 녀석이 윗전의 눈치를 보고 굽실거려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그게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어디의 대단한 혈통을 가진 인간을 데려다 놓은 기분이랄까요. 거참, 혈통 하면 나도 빠지질 않는데.”
던필은 장차 그랜트 공작이 될 몸이었다. 그보다 높은 신분은 황족 빼고는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레이는 황족이기는커녕 귀족조차 아니었다.
“…….”
“…….”
“오, 다들 동감하시나 보다.”
크리스티안은 물론 지스카르까지 동의한다는 사실에 던필은 감탄했다.
잠시 후 지스카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냥 노예일 뿐이다.”
레이의 머리가 스르르 뒤로 넘어갔다. 지스카르는 손수 머리를 안아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해주었다. 그들이 아는 황제는 결코 이렇게 누구를 챙기는 인물이 아니다. 던필이 정말 노예일 뿐이냐고 웃었다.
지스카르는 눈을 내리깔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를 함부로 다루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틀림없이 그는 노예였다. 노예는 노예로 대우를 하는 것이 당연했다.
“폐하, 긴히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크리스티안은 심각하게 말문을 열었다.
“확신이 서지 않아 미처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만, 저는 어디선가 그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 건 처음 그를 발견했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예?”
크리스티안은 일순 이해하지 못해 되물었다. 지스카르는 레이의 모습을 머리카락 한 올까지 찬찬히 눈에 담았다.
처음 봤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그가 누구의 얼굴을 하고 있는지. 이 금발이 누구를 닮았는지. 먼 타지에서 딱 한 번 마주했던 그 사내.
“……너는 누구지?”
지스카르의 목소리가 허공에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