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7/43)

6.

브뤼셀 황후는 오늘도 시녀장을 불러 황제의 새로운 애첩에 대해서 물었다. 시녀장은 일부러 황후의 역성을 들기 위해 분개하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 발칙한 것이 아직도 황제궁 침소를 차지하고 있다는 모양입니다. 폐하께서 하루도 빠짐없이 노예를 찾고 계십니다.”

“도대체 이게 며칠째야! 폐하께서 이렇게 오랫동안 한 명의 첩에게 빠진 적이 있었던가?”

시녀장을 내보낸 뒤 브뤼셀 황후는 얼음이 든 찬물을 들이켰다. 아무리 물을 마셔도 계속 속이 탔다.

황제는 정치적인 이유로 브뤼셀 황후와 세 명의 후궁을 차례로 두었고, 그 외에 첩은 한 번도 만들지 않았다. 금욕적인 인간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특별히 한 여자를 마음에 들어 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마물 사냥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황제는 처음으로 첩을 들였다.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다. 덤으로 노예 출신.

다소 의외이긴 했으나, 황가나 귀족가에서 남첩을 두는 경우가 드물지는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이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났다. 황제는 노예 출신 남첩을 아예 황제궁 침소에다가 데려다 놓고 한시도 곁에서 떼어놓지 않았다. 소식통에 따르면 애첩이 아무리 소동을 부리고 무례를 범해도 벌을 내리지 않고 전부 용서한다고 한다. 예와 법도에 엄격한 그 황제가 말이다.

황제가 노예 남첩에게 빠져 헤어나질 못하고 있다는 소문이 사방에 쫘악 퍼졌다. 벌써 한 달째 독수공방하는 황후에게 측은한 눈길을 보내는 사람도 나오고 있었다.

“듣자 하니 그 노예, 수상쩍은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라면서! 족쇄를 차고 있는 것도 그 탓이고! 한데 폐하께서는 어찌 그런 자를 곁에 두신단 말인가!!”

“황후 전하, 진정하십시오.”

마크시 공작이 딸을 보기 위해 황후궁에 들어와 있었다. 그가 보다 못해 딸을 다독였다. 브뤼셀 황후는 겨우 몸가짐을 바로 했다.

“제가 너무 흥분했군요, 아버지.”

“아닙니다. 황후 전하의 마음을 제가 이해하고도 남습니다. 그보다 일전에 그 노예를 한 번 만나보았다고 들었는데 어떤 놈이던가요?”

“소문대로 당돌한 놈이더군요.”

“폐하의 총애를 믿고 날뛰는 것이겠지요.”

“후! 그때 혼쭐을 내줬어야 했는데!!”

브뤼셀 황후는 코웃음을 쳤다. 마크시 공작이 서둘러 그녀를 말렸다.

“그만두십시오. 황제의 총애가 그만큼 지극한데 함부로 손을 댔다간 뒷감당이 어려울 것입니다. 전에 시라크 전하께서 그 노예에게 상처를 입혔다던데, 다시는 그러지 못하게 잘 다독거려 주십시오.”

“아버지! 시라크 전하께서 오죽하면 그러겠습니까! 황제께선 그 노예에게만 정신이 팔려 황태자를 만나주지도 않으십니다.”

브뤼셀 황후는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훔치기 시작했다. 애첩에게 푹 빠진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가끔씩은 황후궁을 찾아 체면을 차리게 해주었어야 했다. 아니, 다른 건 다 제쳐 놓고서라도 시라크 황태자를 냉대하는 것은 도저히 용납이 안 되었다.

현 황제가 아직 황태자에 불과하던 때였다. 그는 정복 사업을 중단하고 스트라스와의 휴전을 주장했다. 하지만 황제를 포함한 대다수의 귀족들이 휴전에 반대하고 있었다. 그랜트와 울펜가모트 공작가문의 자제들이 황태자와 절친한 사이로 휴전을 지지했으나, 당시의 공작들은 아들과 입장을 달리했다. 모든 이가 적이 되었고 지스카르의 지위는 크게 흔들렸다.

그때 마크시 공작이 지스카르 황태자를 강력하게 지지하고 나섰다. 그는 외동딸인 브뤼셀을 황태자비로 주면서 한배에 올라탔고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결과 지스카르는 휴전협정을 성사시키고 무사히 황제가 될 수 있었다.

황제가 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사람이기 때문에 지스카르는 마크시 공작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그 결과 마크시 공작가의 권세는 날로 커져 갔다. 엘 파셔의 세 공작가문 중 가장 강성한 가문이 울펜가모트라는 말은 이미 옛말이 됐다.

바로 그것이 문제였다. 시간이 흐르자 마크시 공작은 과도하게 권력을 탐했고, 황권의 걸림돌이 되기 시작했다.

지금 황제의 의도는 명백했다. 마크시 공작을 누르고 황권을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노예 남첩을 더욱 싸고돌면서 브뤼셀 황후를 무시하고 있었다. 급기야는 시라크를 황태자에서 폐하겠다는 뜻까지 내비치는 중이었다.

“아버지! 저희가 황제 폐하를 위하여 얼마나 애를 썼던가요. 그런데 이제 와서 토사구팽을 하겠다는 뜻이라면, 저는 결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황후 전하, 누가 들을 수도 있으니 목소리를 낮추십시오. 설마 황제께서 거기까지 생각하고 계시겠습니까. 내가 폐하를 위해 어찌했는데! 그저 황제께서는 당신의 권위를 좀 더 과시하고 싶으셨던 것뿐일 것입니다. 그리고 쓸데없는 잡음이 자꾸 생기는 건 전부 그 노예가 폐하의 침소에 들어앉아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폐하를 알현해 그 노예를 쫓아내라고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겠습니다.”

“아버지만 믿겠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나니 마음이 좀 후련해지는군요.”

황후는 미소를 지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문득 창가를 보았다. 분홍색 꽃이 지고 푸른 잎사귀가 가득 피었다. 며칠 새에 날씨가 많이 더워져 있었다.

“곧 입하로군요. 여름을 맞이하는 연회를 열어야겠어요. 건방진 노예가 연회에 참석하겠다고 폐하께 생떼를 쓰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흐음, 가능한 일입니다. 대대로 애첩들은 자기 총애가 얼마나 대단한지 자랑하기 위해 그런 자리를 이용해 왔으니 말입니다.”

“평민이라 해도 마뜩잖은데 노예 따위가……. 주제도 모르는 것!”

“저만 믿으시고, 기분 좋은 이야기나 하시지요.”

“알겠습니다.”

시녀를 불러 식사를 준비시키고 그들은 느긋이 부녀간의 시간을 나누었다.

* * *

“연회장에 나가라고?”

저놈이 농담을 하고 있나? 나는 매우 심각해졌다. 내가 아는 지스카르는 안면 근육이 굳어서 농담을 못 하는 놈인데 이상하기도 하지.

“조촐한 입하 연회다. 시일은 열흘 후.”

“진심이냐?”

“잠깐 얼굴만 비추고 들어오면 된다.”

평소처럼 저녁 식사를 하던 와중에 지스카르가 난데없이 헛소리를 꺼냈다. 나는 입맛이 뚝 떨어져 고기를 찍었던 포크를 접시 위에 그냥 내려놓았다. 정확한 일정까지 알려주는 걸 보면 정말로 진심인 모양인데.

“나를 이해시켜 줄 순 없겠나? 노예를 연회장에 데려갈 생각을 하다니, 나는 지금 너의 용기에 적성 훈장을 내리고 싶을 정도다.”

지스카르는 내가 ‘적성 훈장’ 운운하는 것에 잠시 주목했다. 그건 스트라스에서 용맹함을 보여준 병사에게 내리는 훈장이었다. 하지만 그는 다시 연회 이야기로 돌아왔다.

“문제 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출신이 빈한한 정부들도 자주 연회에 참석해 왔다. 너는 노예이지만 그 이전에 짐의 정부이니 연회에 참석할 자격은 충분하다.”

“뭐?”

정부이니까 신분과 무관하게 연회에 데려가겠다니 스트라스에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귀족이라면 다들 첩을 하나씩 데리고 있기 마련이지만, 그걸 밖으로 드러내놓고 이야기하진 않는다. 뭐 자랑이라고 다들 보는 앞에 첩을 끼고 간단 말인가?

“이래서 엘 파셔 놈들은……. 어쨌든 헛소리 작작 해라. 내가 미쳤다고 네놈의 첩 자격으로 연회장에 가?”

“…….”

지스카르도 내심 엉터리 요구라고 생각하는지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좋아. 다른 건 차치하고 나는 족쇄를 차고 있다. 이런 걸 달고 연회장에 나가라니 농담이 지나쳐. 아하! 혹시 풀어주려고?”

나는 족쇄를 가리켰다. 이놈의 족쇄를 풀어주겠다면 매우 짜증 나는 요구지만 백번 양보해서 조금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고려해 보았으나 풀어줄 수 없다고 판단 내렸다.”

하지만 지스카르는 죽어도 족쇄는 안 풀어주겠단다. 나는 의자 팔걸이를 내려치며 버럭 소리 질렀다.

“미쳐도 곱게 미쳐!! 대관절 날 연회에 참석시켜서 뭐 하려고……!”

말하는 중간에 갑자기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지스카르는 어째서 웃냐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멀쩡한 황후를 내버려두고 노예 같은 걸 옆에 끼고 가다니 웃겨서 그런다. 나도 웃기는데 주위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이로써 브뤼셀 황후는 완전히 웃음거리가 되겠군.”

왜 나를 연회장에 데려가려는지 알았다. 지스카르가 섹스에 미친 짐승도 아닌데 어째서 나를 자기 침실에다가 가둬놓는 것인지, 그 이유는 깨달은 지도 제법 되었다. 그런데도 나는 새삼스럽게 분통을 터뜨렸다.

“족쇄를 채워 침실에 가둬놓고 아주 알차게 써먹는구나. 내 정체를 탐색할 수도 있고, 허전할 때마다 욕정을 채울 수도 있고, 무엇보다도 황후를 견제할 수 있다. 내가 침실에 갇혀 있은 지 한 달이 넘었으니 너의 총애가 황후에게서 완전히 떠나갔음을 이제 모든 이가 다 알 것이다. 이보다 더 유용할 수 있나!”

잔뜩 화가 나서 홱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지스카르가 내 팔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팔을 끌어당겨 난데없이 자기 품에 끌어안았다. 계속 나를 안고 놓아주지 않을 기세라 결국 손사래를 쳤다.

“아아, 알았으니까 이거 놔.”

“……무엇을 알았다는 건가.”

지스카르가 팔에서 조금 힘을 빼면서 물었다.

“네가 날 정쟁의 도구로만 본 것이 아니고, 세상 둘도 없는 보물처럼 귀하게 취급 중이라는 사실을 안다는 말이다.”

“지금도 정쟁 때문에 너를 억지로 연회에 데려가겠다고 하는데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나?”

“노예 의견 따윈 고려의 대상도 아닌데 자꾸 날 납득시키려고 하잖아. 그렇게 좋아 죽겠다는 눈으로 사람 보지 마라. 사내새끼의 구애 같은 건 필요 없다고!”

나는 뻔뻔하게 손가락으로 지스카르를 가리켰다. 호기심에서 시작한 놈이 내게 꽤나 집착하고 있다는 건 벌써 옛날에 인지한 사실이다.

무뚝뚝한 지스카르가 어이없는 심정을 표정에 그대로 드러냈다.

“짐을 상대로 뭐라고……? 정말 대단한 자신감이군.”

“그런 걸로 치든가.”

지스카르의 손에서 벗어나며 나는 코웃음을 쳤다.

옷을 탁탁 털면서 다시 맞은편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지스카르도 자기 자리에 앉았다.

“처음부터 너를 이런 일에 이용하려고 황궁에 데려왔던 것은 아니다.”

지스카르가 다시 연회 일로 화제를 되돌렸다. 나는 팔짱을 끼고 이야기를 들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나 외척 세력의 화살이 전부 네게로 향하게 되었다. 네게는 유감이지만 이젠 돌이킬 수 없다. 그렇다면 지금 상황을 이용하는 것이 최선이겠지.”

“날 이용해서 황후를 웃음거리로 만드시겠다?”

“공식적인 자리에 딱 한 번만 얼굴을 비춰라. 네 존재를 이용해서 적당히 빌미를 만들고 외척 세력을 숙청할 것이다. 다시는 너를 화살받이로 쓸 일이 없을 거라 약속하마.”

원래 이래라저래라만 하고 말이 짧은 놈인데 뭔가 구구절절 사정 설명이 길다. 정성이 갸륵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딱 한 번만 승냥이가 우글대는 연회장에 얼굴을 비춰주지. 하지만 시라크나 황후 일파를 숙청하는 일에 나를 자꾸 끌어들이지 마라.”

승낙은 했지만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도 있어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지스카르는 그 말을 흘려듣지 않고 신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는 왜 황후나 시라크에게 약하지?”

“내가?”

“시라크의 막무가내도 받아주지 않았느냐.”

“…….”

모르는 척하고 넘어가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지스카르가 끝까지 캐물을 기세였다. 별로 큰 비밀인 것은 아니다. 다만 설명하기가 조금 곤란한 일이라 애매하게 말했다.

“그냥 좀 신경이 쓰일 뿐이다. 치이는 게 불쌍하다고 할까. 그러니까…… 너라면 조금은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무엇을?”

“예를 들자면, 너는 정말로 시라크 꼬마가 미워서 만나주지도 않고 험한 말을 하는 건가?”

“…….”

지스카르는 냉담해 보이지만 사실 뼛속까지 차가운 놈은 아니다. 의외로 다감한 구석이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지스카르가 진심으로 자기 아들이 미워서 냉대했을까? 아니, 시라크를 폐위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행동했던 것이었다고 확신한다.

“시라크를 폐위하지 말라는 것이냐?”

지스카르가 심각하게 표정을 굳히면서 내 의견을 물었다. 나는 즉시 손을 저었다.

“아니. 그런 것이 아니다. 시라크는 커서 황제가 될 것이다. 황관은 조금 불쌍하다고 해서 함부로 주어져도 되는 것이 아니지.”

“하고 싶은 말이 뭐지?”

“황권 강화를 위해서 시라크와 외척 세력은 숙청해야 한다. 그 의견에는 나도 찬성하고 있지만 필요에 의해 죽어야 하는 자들이 그냥, 조금 불쌍하다는 것이다. 너도 시라크의 폐위를 결심하고 애정을 갈구하는 아이를 냉대하면서 기분이 아주 좋지는 않았을 테지? 조금 가엾지 않던가? 딱 그 정도의 감상이다.”

내 이야기를 모두 듣고 지스카르는 오래 침묵했다. 그는 한참 뒤 자기 미간을 눌렀다.

“시라크를 상대로 무슨 생각을 하는가 했는데 이런 말을 들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군. 너의 사고는 항상 짐의 예상을 초월하는구나. 노예인 네가 숙청당해야만 하는 황족을 안타깝게 여기겠다고?”

“…….”

레브노아드 황태자는 숙청 작업 중에 황족과 외척의 씨를 말리다시피 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수백, 수천 명을 몰살시키고 시체 더미를 내려다보았다. 공포에 질려 죽어간 그들이 참 가여웠다. 하지만 또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나는 똑같이 수천 명의 목을 치고 시체의 산을 쌓아 올릴 테지.

정말로 재미없는 이야기다. 이런 시시한 이야기 따윈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입을 다물자 지스카르는 이쯤에서 대화를 마무리했다.

“……황후와 시라크는 잘라내야 할 싹이다. 다시는 신경 쓰지 말거라.”

“신경 안 써. 처음부터 나를 이런 일에 끌어들이지 말라 했을 텐데.”

대화가 길어지는 덕분에 어중간하게 저녁 식사를 마쳤다.

* * *

시간이 흘러 입하 연회 당일이 되었다. 나는 세 시간이나 시종들에게 둘러싸여 연회에 나갈 준비를 했다. 금색 자수로 멋을 낸 회백색 연회복으로 갈아입고, 약간 덥수룩하게 자라 있던 머리도 말끔하게 자르고 정리했다. 모든 것이 완벽했으나 발목에는 여전히 족쇄가 매달려 있었다. 세상에 이런 부조화는 또 없을 것이다.

지스카르는 한발 먼저 연회에 나갈 준비를 마치고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겨우 머리부터 발끝까지 준비가 끝났다. 그런데 지스카르는 날 응시하며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뭐 하는 거냐? 계속 그렇게 앉아 있을 건가?”

“정장이 잘 어울리는군.”

“나도 그리 생각한다.”

옷깃을 만지며 뭘 당연한 소리를 하느냐고 대꾸해 줬다.

“좀 더 키가 컸다면 더 어울렸을 텐데.”

지스카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종들이 달려와 그의 어깨에 붉은색 망토를 둘러주었다. 지스카르가 마지막에 남긴 말에 다른 의미가 있는 듯하여 나는 생각에 잠겼다.

그때 지스카르가 손을 내밀었다. 연회장까지 나를 에스코트해서 데려가기 위해서이다. 나는 잠시 그 손을 노려보았다. 연회에 참석하는 일을 너무 쉽게 생각했나 보다. 내가 여성을 에스코트해 본 일은 있어도 남의 에스코트를 받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저 손을 잡고 가야 한다고?

이제 와서 했던 말을 무르기도 꼴이 우습다. 나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지스카르의 손 위에 내 손을 턱 올렸다.

“……따르겠습니다.”

방을 나섬과 동시에 공대를 쓰고 무례하기 짝이 없던 태도도 수정했다. 소란을 일으키려고 연회에 참석하겠다고 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평소대로 행동했다간 연회장이 발칵 뒤집힐 것이 뻔하다.

“원래는 연회에 참석하여 아예 말을 하지 말라고 할 참이었다만. 너의 공손한 모습에 도통 익숙해지질 않는군.”

지스카르가 복도를 걸으며 말했다. 대제국 엘 파셔의 황제께서 그런 거에 익숙하지 않으면 어쩌나.

입하 연회는 초저녁 시간에 열리고 있었다. 하지만 셀 수 없이 많은 등불과 금박을 입힌 조각으로 장식하여 연회장 내부는 대낮보다 밝았다. 휘황찬란한 회장 앞에 도착하자 근위병이 목소리를 높여 황제의 도착을 알렸다.

지스카르가 옆에 있는 내게 시선을 잠시 주었다. 깊이 가라앉은 푸른 눈으로 내가 긴장을 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긴장 따위를 할 이유가 없었다. 연회장의 화려함이 오래된 감각을 일깨웠다. 레브노아드 황태자에게 연회 같은 건 대수로울 것도 없는 일상일 뿐이다.

“……가지.”

지스카르는 날 에스코트하여 연회장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지스카르는 평소 말을 많이 하지 않아 엄숙하고 엄격하다는 인상이 있었다. 흥겨운 연회가 한창이었으나 그가 장내에 모습을 드러내자 사람들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지위 고하를 불문한 모든 귀족이 조용히 몸을 사리며 좌우로 물러서서 길을 내었다.

잔잔하게 음악 소리만 들릴 뿐 연회장이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존재 자체만으로 좌중을 압도한다는 말이 지금 이 상황에서 딱 맞아떨어졌다.

연회장 중간에 다다라 지스카르가 술잔을 들어 올렸다.

“여름을 맞이하는 연회이니 모두 만끽하고 즐기시오.”

숨도 못 쉬던 사람들이 그제야 하나둘씩 웃고 입을 열었다. 장내가 다시 연회 분위기로 돌아왔다.

“폐하. 오셨습니까…….”

먼저 회장에 참석해 있던 브뤼셀 황후가 시라크 황태자를 데리고 지스카르를 맞이했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다. 황후가 황제의 에스코트를 받지 못하고 홀로 입장하는 것은 큰 수치였다. 황후에게 수치를 준 황제는 심지어 끔찍하게 아낀다는 애첩을 에스코트해서 데려왔다.

“연회를 준비하느라 수고가 많았소.”

“예.”

지스카르는 황후에게 짧게 인사치레 정도만 했다. 시라크에게는 말도 걸지 않았다. 그는 아까 들었던 술잔을 갑자기 내게 건넸다.

“레이, 들거라.”

“아.”

특별히 다정한 모습이라고 생각지 못했는데 주위 사람들은 놀라면서 그 행동에 주목했다. 놈의 무뚝뚝한 지난 행실을 근거로 유추할 때, 아마도 지스카르는 지금까지 한 번도 파트너를 먼저 챙겨주거나 애틋하게 행동한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러니까 술잔을 하나 건네는데도 사람들이 대단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지.

“너무 많이 마시지는 말고.”

지스카르가 자세를 낮추며 내 귓가에 말했다. 내게는 술 많이 마시면 죽여버린다 쯤으로 들렸지만 주변인의 귀에는 또 사랑스러운 애첩의 건강을 챙기는 모습으로 보였나 보다. 놀란 사람들이 ‘세상에’ 하며 낮게 탄성을 터뜨리는 소리가 들렸다.

황후를 대하는 태도와 나를 위하는 태도가 극명히 대비되었다. 브뤼셀 황후는 억지로 다른 곳을 보는 척하며 꽉 움켜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시라크가 그런 어미의 모습을 불안하게 올려다보았다.

그때 짧게 턱수염을 기른 풍채 당당한 노인이 다가왔다. 황후의 얼굴이 약간 밝아졌다.

“황제 폐하!!”

황후의 아비이며 시라크 황태자의 외조부인 마크시 공작.

황제의 취향에 맞춰 모든 귀족이 소리를 크게 내는 것을 자제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마크시 공작만큼은 연회장이 쩌렁쩌렁 울릴 만큼 큰 목소리를 고수했다. 황제의 앞에서도 기세를 죽이지 않는 모습이 그의 권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짐작하게 했다.

“폐하! 즐거운 연회장에서 이런 말씀을 올리기가 매우 송구스럽습니다만, 그래도 지금 하시는 행동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폐하의 애첩이 지금 족쇄를 차고 있는데……. 맙소사, 제 눈이 다 의심스러울 정도입니다. 조의 때마다 제가 몇 번이나 요청드리지 않았습니까. 정체를 알 수 없는 수상쩍은 자는 당장 내쳐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여태 끼고도시다가 연회장까지 데려오시다니요!”

나는 옆을 보고 안 보이게 쳇 혀를 찼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맞는 말이라 맞장구를 쳐줄 뻔했지 뭔가. 노예 출신인 건 상관없다 해도 족쇄도 풀어주지 않고 연회장에 데려오는 건 진짜 어이가 없는 짓이다.

“어떤 자가 레이를 두고 수상하다고 입방아를 찧었지?”

지스카르가 짜증을 드러내면서 좌중을 둘러보았다. 황제가 이 정도로 분명하게 감정을 내비친 것은 극히 드문 일이라 사람들은 당황하며 서둘러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마크시 공작은 물러서지 않았다.

“폐하! 수상한 자이기에 구속해 두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 않습니까! 아니면 그 족쇄는 무엇이란 말입니까?”

“짐의 사생활에 관심이 지나치군. 짐이 애첩을 데려와 어떻게 즐기든 공작이 상관할 일이 아니오.”

“예? 그……!”

마크시 공작은 순간적으로 크게 당황했다. 한마디로 사랑하는 첩에게 재미로 족쇄를 씌우고 즐기고 있다는 뜻인데. 나는 수상한 놈이라서 족쇄를 차고 있는 게 맞았지만 그 사실을 덮기 위해 지스카르는 기꺼이 자신의 취향을 희생했다.

사람들이 고지식해 보이는 황제에게 희한한 취미가 있다는 것을 알고 놀라워했다. 물론 순진한 자들 몇몇만 그랬고, 대부분은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마크시 공작도 마찬가지였다.

“하하……. 다른 사람도 아닌 폐하께오서 그런 경박한 일에 관심이 있다고 믿기 힘듭니다. 화제를 돌리려 하지 마시고 저의 충언에 귀를 기울여주십시오.”

“공작의 관심사는 국사를 돌보는 데 있지 않고 온통 짐의 사사로운 일을 캐는 데만 몰려 있군. 하루 종일 충언이라고 하는 말은 짐이 아끼는 이를 험담하는 이야기뿐이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 오랫동안 정사를 이끌어온 공작이 몰두할 일은 아니라고 짐도 생각했소. 솔직히 말해보시오. 황후가 투기를 참지 못해서 공작을 앞세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순간 브뤼셀 황후가 깜짝 놀라 외쳤다.

“폐하!! 아닙니다! 저, 저를 어찌 보시고!”

“…….”

지스카르는 황후와 시라크를 차례로 차갑게 굽어보았다. 아비의 눈길을 갈구했던 시라크는 저도 모르게 움츠리고 몸을 낮추었다.

“연회장에서 할 이야기가 아니군. 물러나시오.”

지스카르는 그쯤에서 대화를 중단시켰다. 마크시 공작도 황후에게 불똥이 튈까 봐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일 리 없다. 노회한 공작은 틀림없이 다음을 기약하며 이를 갈고 있을 것이다. 지스카르도 연회가 끝난 직후부터 본격적으로 숙청 작업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지스카르는 나를 데리고 연회장을 좀 걸었다. 그가 목소리를 낮춰서 말했다.

“네 존재를 공식적으로 확인시켰으니 필요한 일은 모두 끝났다. 몸이 안 좋다고 핑계를 대줄 테니 들어가거라.”

“좀 돌아다니다 와도 되겠습니까?”

지스카르에게 이 손 좀 놓아달라고 눈치를 주었다.

지스카르는 의아해했다.

“연회에 참석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잠시 둘러보길 원한다 해도 짐의 곁에 있는 게 낫다. 너를 함부로 얕보는 자들이 많을 것이다.”

“폐하의 총애가 대단하다는 것을 직접 확인시켜 주셨는데 누가 감히 저를 함부로 대하겠습니까. 저도 엘 파셔의 황실 연회에 참석하는 것은 처음입니다. 이왕 여기까지 나왔으니 직접 연회장을 둘러보고 싶습니다만.”

“……원하는 대로 하거라.”

지스카르는 결국 내 손을 놓았다. 내가 어떻게 행동할지 탐색하겠다는 의도가 보였지만 개의치 않았다.

혼자가 되어 훌쩍 연회장을 가로질렀다. 귀족들은 나를 보며 어떻게 행동할지 망설이고 있었다. 노예 신분이라고 불쾌하게 숙덕대는 자들도 있었다. 혹자는 내 발목에 달린 족쇄 때문에 당혹스러운 심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녹빛의 고운 드레스를 입은 귀부인은 내게 호의적인 미소를 보냈다.

“반갑네. 나는 마테오 백작일세.”

“레이입니다.”

스트라스에서는 보기 힘들지만 엘 파셔에서는 종종 보이는 여백작이었다. 나는 간단하게 대답하고 너무 과하지도 무례하지도 않은 느낌으로 묵례했다. 백작의 눈에 살짝 이채가 돌았다. 노예라고 들었는데 분위기가 전혀 노예답지 않았으니까. 그녀는 여간내기가 아니라고 빠르게 판단을 내린 것 같았다.

“황제 폐하께서는 안목이 높은 분이시지. 폐하께서 자네를 선택한 것은 틀림없이 남들과는 다른 아름다움과 가치가 있기 때문일 게야.”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남첩에게 듣기 좋은 말을 건넸다. 이대로 나의 호감을 사고 더 나아가 황제에게 닿는 인맥을 만들 생각일 것이다.

내게 얻어먹을 게 있어서든 단순한 호기심에서든 귀족들 몇 명이 더 접근해 왔다. 나는 그들을 보면서 미소를 지었고 지스카르가 건네주었던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속이 시커먼 귀족들을 상대하는 건 내게 아주 익숙한 일이다.

“너 이놈!”

그때 시라크 황태자가 크게 언성을 높이며 다가왔다. 대화를 나누던 귀족들이 놀란 눈으로 그를 보았고 황태자를 위해 약간 공간을 열어주었다.

“왜 혼자 돌아다니고 있지? 폐하께서 곁에 안 계시면 너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모르나?”

“…….”

열다섯 살이나 된 황태자가 여전히 철이 없다. 나는 눈을 가늘게 좁히고 시라크를 응시했다.

“시라크 전하. 바로 옆에 붙어 있지 않아도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는 걸 모르시겠습니까? 이곳에 계신 귀한 분들께서 무엇 때문에 저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저의 뒤에 황제 폐하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시라크가 아직 어리고 처지가 가엾다 여겨 여태 막무가내를 많이 받아주었다. 하지만 그것도 여기까지다. 성가신 꼬마의 어리광을 마지막까지 받아줄 만큼 나는 상냥하지 못하다.

“뭐, 뭐야? 네놈이 감히! 네가 그따위로 입을 놀리고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시라크는 벌게져서 화를 냈다. 그는 단순히 소리를 지르는 데서 끝나지 않고 폭력까지 쓰려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귀족들이 웅성거렸다. 나의 무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시라크의 철없음을 걱정하는 것이다. 저러다 황제가 무슨 날벼락을 내릴 줄 알고. 하긴 애초에 상황 파악이 가능했다면 내게 시비를 걸러 접근하지도 않았겠지.

“…….”

“대답을 해라! 지금 귀가 먹었어, 입이 막혔어?”

내가 귀찮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자 시라크가 계속 나를 물고 늘어졌다. 솔직히 한숨이 나온다. 여기서 저 꼬마를 상대해 줘야 하는 거냐?

“황태자 전하. 그만하십시오.”

그때 시라크의 폭주를 저지하고 나선 자가 있었다. 크리스티안이었다. 지스카르가 끝내 나를 믿지 못하고 자기 친위기사를 보냈나 의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던필이 투덜거리면서 나타났다.

“이봐, 크리스, 레이가 뭘 하든 그냥 지켜보기로 한 거 아니었냐? 내게 함부로 행동하지 말라고 경고하면서 정작 돌발 행동 하는 건 매번 너라는 거 알아?”

던필은 기사 복장이 아니라 세련되게 디자인된 연회복을 차려입고 있었다. 덕분에 평소와 다르게 제법 공작가의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싱긋 웃으며 내게 손을 들어 보였다.

“반갑다, 레이?”

“오랜만입니다. 던필 경.”

“하하, 멀리서 보긴 했는데 너 오늘 정말로 예의 바르구나. 이거 색다른 기분인걸?”

내 존대를 들으며 던필이 크게 감탄했다.

크리스티안은 잘생긴 얼굴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백색 연회복을 입었다. 나는 묵례를 하며 그의 참견에 감사를 표했다.

“황태자 전하께 함부로 할 수가 없어 내심 난감했습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

“크리스가 마음속으로 외치길, 네게 존대를 듣는 것이 너무 어색하다고 한다.”

“던필!”

나를 보는 주위의 눈이 또 한 번 바뀌었다. 크리스티안과 던필이 자연스럽게 내게 말을 걸어주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머지않아 울펜가모트 공작, 그랜트 공작이 될 신분이며 황제가 가장 신임하는 최측근으로 누구나 가까워지고 싶어 하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크리스티안! 던필! 네놈들이 또……!”

두 사람이 등장하면서 시라크는 잠시 뒤로 밀려나서 외면당하고 있었다. 그는 얼굴을 빨갛게 만들고 분개했다. 크리스티안과 던필에게 노성을 질렀으나 정작 분노에 가득한 시선은 내게 고정되어 있었다. 던필이 손가락을 까닥해서 시라크의 이목을 끌었다.

“전하, 지금까지는 장난이었다 치고 적당히 물러나시지요. 여기서 더 나가면 틀림없이 폐하의 진노가 있을 것입니다. 폐하께서 시라크 전하를 두둔할지, 레이의 편을 들지, 저랑 내기할까요?”

황제를 들먹이자 시라크는 울컥한 얼굴로 이를 악물었다.

“던필 경! 황태자 전하의 앞에서 어디 함부로……!!”

황후 쪽 사람으로 보이는 어느 귀족이 시라크의 역성을 들고 나왔다. 하지만 시라크는 말이 더 나오기도 전에 횅하니 그 자리에서 도망쳐 버렸다. 뒤에 남은 귀족은 매우 무안해져 버렸다.

“어린애랑 입씨름하기 싫다고 했지? 원하는 대로 해줬다.”

던필은 큰마음 먹고 한턱냈다는 느낌으로 말했다. 귀족들이 그의 행동에 주목하고 있었다. 행동력이 좋은 마테오 백작이 크리스티안과 던필을 의식하며 내게 말을 걸었다.

“후후, 자네도 참 대단하군. 두 분 기사님과는 어떻게 인연을 만들었는가.”

나는 잠시 시라크가 떠난 쪽을 보다가 다시 그녀를 보며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께서 은혜를 베푸시어 두 분께서 저의 호위를 맡아주신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딱딱하게 말할 필요 있어? 우리 일전에 마주 앉아서 술을 마신 적도 있잖아?”

던필이 과도하게 친한 척을 해왔다. 그는 자기 때문에 귀족들이 내게 더 호의적으로 대한다는 것을 알았고, 날 보며 어떠냐며 으스대듯 눈빛을 보내왔다. 나는 기가 막혀 실소를 지었다. 하지만 하는 짓이 가소로운 것만 빼면 내게 하등 해될 것이 없는 행동이긴 하다.

“레이, 술은 많이 마시지 않는 편이 낫다.”

크리스티안도 사무적인 느낌을 버리고 사적인 이야기를 해왔다. 내가 술을 마시는 것을 유난히 경계하는 것 같아서 좀 걸렸지만. 그러고 보니 지스카르도 내게 적당히 마시라고 말하지 않았나?

어쨌든 두 사람 덕분에 사람들이 아까보다 훨씬 호의적인 분위기로 변해서 하나둘씩 말을 걸어왔다. 나는 한 사람씩 꽤 공을 들여 대화를 나눠보았다. 적당한 인사치레에, 대단할 것 없는 이야기가 오간다. 적국의 황실 연회라 내심 특별한 것이 있을까 기대했으나 결국은 별것이 없었다.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비슷하다는 것이지.

나는 대화를 나누다가 불현듯 시라크가 떠난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시라크는 무안을 당한 탓인지 사람들의 눈을 피해 테라스로 들어간 상태였다. 꽤 시간이 지났지만 시라크는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

쟁반을 든 시종이 근처를 지나고 있었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그 위에 내려놓았다.

“잠시 실례.”

사람들을 뒤로하고 충동적으로 걸음을 옮겼다. 크리스티안과 던필이 당황하며 뭐라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나는 다짜고짜 시라크가 있는 테라스로 들어갔다. 생각에 잠겨 테라스 아래를 내다보던 시라크가 깜짝 놀라며 나를 쳐다보았다. 한 박자 늦었지만 그는 표정을 매섭게 구기고 소리를 질렀다.

“네놈이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와!!”

“네게 할 말이 있어서.”

“뭐, 뭐라고?”

내가 갑자기 하대를 하자 시라크는 입을 크게 벌렸다. 이내 지독한 모욕감에 바르르 떨었다. 분노에 사로잡힌 시라크가 진짜로 주먹을 쥐고 내게 달려들었다. 턱에 주먹을 꽂고 싶었던 모양이나 내가 발을 거는 바람에 그는 바닥에 추하게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어리광은 이제 작작 해라! 너는 황제가 되고 싶지 않으냐?”

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성큼 시라크를 향해 다가갔다. 바닥에 주저앉은 시라크는 웃기게도 노예를 상대로 자신도 모르게 엉덩이를 깔고 뒷걸음질 쳤다. 그 한심한 꼴에 더욱 화가 치밀었다. 나는 시라크의 팔을 거칠게 잡아당기고 얼굴을 가까이했다.

“황제가 되고 싶다면 어머니를 버려라. 그녀를 짓밟아 쫓아내고, 네 아버지에게 자신이 얼마나 쓸모 있는 존재인지 각인시켜! 생모를 버릴 수 없다면 그녀와 마크시 공작을 설득시켜라. 손 안에 주어진 것만 누리고 더 이상 권세를 탐하지 말라고 설득해. 그것도 할 수 없다면 황위를 포기해라! 이불을 뒤집어쓰고 쥐구멍 속으로 숨어버려!”

“뭐, 뭐……! 이, 이놈이 지금 미쳤나!!”

시라크는 몹시 당황하고 있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팔을 비틀어서 빼냈다. 나는 더 이상 시라크를 붙잡지 않았다. 내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있음에도 시라크는 불안하게 나를 노려보며 주춤거렸다. 그는 한참 만에 일어나서 테라스 밖으로 도망쳤다.

나는 쓸데없이 팔을 툭툭 털었다. 말 그대로 쓸데없는 참견을 했다 싶었다. 하지만 시라크는 곧 폐위당하고 아주 높을 확률로 죽임을 당할 것이다.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음에도 시라크는 아무것도 몰랐다. 주위의 그 누구도, 시라크에게 진실을 가르쳐 주지 않았던 것이 분명했다. 적어도 자신이 왜 죽는지, 어떻게 해야 했는지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여전히 굉장한 말들을 늘어놓는군.”

던필이 혀를 내두르면서 나타났다. 크리스티안과 던필이 테라스 바로 앞에서 대화를 듣고 있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크리스티안은 굳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시라크 전하가 어찌할 것이라고 생각하나?”

크리스티안의 태도가 자못 심각해서 나는 피식 웃었다.

“어쩌기는. 아직 어린애다. 내가 몇 마디 했다고 갑자기 행동거지가 바뀔 리 없지.”

던필이 내 말에 불만스럽게 의견을 냈다.

“그런데 뭣 하러 그런 소리를 해?”

“불쌍해서.”

지스카르에게도 말했지만 그냥 딱 그 정도 감상에서 해준 말일뿐이다.

잠시 숨을 돌릴 겸 테라스 난간을 잡고 바깥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오래 서 있기엔 날이 조금 더웠다. 나는 옷을 정리하면서 돌아섰다.

테라스 문을 열고 연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회장 내의 사람들이 양옆으로 길을 내주고 있었다. 내 뒤를 따라 연회장에 들어온 크리스티안과 던필이 앞을 보면서 묵례를 했다. 엘 파셔의 황제, 지스카르가 천천히 걸어서 내게 다가왔다. 그가 다정한 연인인 척 내 손을 잡고 몸을 낮추더니 추궁하는 어조로 물었다.

“혼자 연회장을 돌아보겠다더니 뭘 하는 것이지?”

“……그러게나 말이다.”

“너는 항상 시라크에게 관심이 많군.”

“꼭 그런 것은 아니다만…….”

나는 변명을 하려다 그냥 관두었다. 시라크 꼬마에게 신경 쓰지 않겠다고 해놓고 또 참견을 했다. 지스카르가 무슨 짓이냐고 지적해도 할 말이 없었다.

지스카르는 더 이상 혼자 다니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자신의 곁에 붙어 있으라고 명령했다. 뭐, 나쁘지는 않았다. 당연하지만 황제와 동행하자 접근해 오는 사람들의 급이 달라졌다. 엘 파셔의 정계, 사교계를 주름잡는 고위 귀족들이 황제와 그가 아끼는 남첩에서 차례로 인사했다.

나는 예의를 차리며 그들과 대화를 나눴다. 적당히 근황 이야기를 하다가 목이 마르면 시종을 불러 술잔을 들기도 했다. 긴장감이라곤 없는 내 모습을 보고 귀족들은 뻔뻔하다고 여기거나 흥미롭게 여기는 듯했다.

만나는 인간들의 급이 높아졌지만 이번에도 별것은 없었다. 나는 거물급 인사들의 얼굴과 성향 정도만 파악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연회가 끝나고 황제궁 침소로 되돌아왔다. 나는 지스카르가 시종들의 시중을 받으며 탈의를 하는 동안 잠시 기다렸다. 겉옷만 벗고 지스카르는 시종들을 전부 내보냈다.

“뭐 하는 거냐?”

왜 자기만 시중들게 하고 갑자기 내보느냐고 불만을 드러냈다. 이제 와서 노예답게 혼자 갈아입으라는 건 아닐 테고?

지스카르는 근처 의자에 잠시 기대고 서서 새삼스럽게 나를 빤히 주시했다. 이유를 알 수 없어 나도 똑같이 놈을 마주 보았다.

“연회장에서 놀랄 만큼 적응을 잘하더군. 짐이 염려한 것이 허무할 정도로.”

“왜? 염려한 것이 억울하기라도 한가?”

“고급스럽게 만들어진 정장도, 중앙 귀족들의 사교장인 황실 연회도 너에게 대단히 어울리는구나. 태생부터 노예라면 그럴 수가 없는데. 연회장의 다른 자들도 너를 보며 짐과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나는 피식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다른 놈들은 몰라도 너는 알잖나. 내가 빈첸시오 자작령에서 태어난 노예라는 것을.”

“…….”

지스카르는 대답하지 않고 계속 나를 응시했다. 침묵이 꽤 길어졌다. 나는 불편한 연회복 목깃을 당겼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셈이냐. 시종을 다시 불러. 옷을 갈아입게.”

지스카르가 성큼 이쪽으로 걸어왔다. 놈이 가까이 다가오자 나는 반사적으로 약간 물러섰다. 놈이 거의 코앞까지 다가와서 내 연회복의 목깃에 손을 올렸다.

“그 옷이 네게 무척 어울려서, 벗으라 하기 아깝군.”

놈이 너무 가깝다. 나는 표정을 일그러뜨리고 팔로 지스카르의 가슴팍을 꾹 밀어냈다.

“떨어져…….”

“시중이 필요하다면 짐이 도와주마.”

“됐다. 혼자 할 수 있으니!”

진짜로 놈이 시중만 들고 끝낸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지. 연회복을 벗는 것 이상의 일이 있을 것이 빤하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질색을 하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놈이 내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특유의 체취가 훅 들어왔다.

“윽! 네놈 때문에 억지로 연회장까지 다녀왔는데 양심도 없이 손을 대겠다고?”

“억지로 간 것이 맞긴 한가?”

이런 개자식이! 적응 못 하는 척하고 구석에 처박혀 있을 것을 그랬지!

지스카르가 내 연회복 맨 위의 단추를 풀었다. 나는 인상을 쓰며 놈의 팔을 붙잡아 방해했다. 아니, 이놈은 뭘 처먹어서 이렇게 힘이 센 건지 모르겠다. 아무리 방해해도 놈은 툭툭, 잘도 겉옷 단추를 끝까지 풀어냈다.

“양심 있으면……! 으, 이거 멈춰……!”

“오늘 특별히 손을 대지 않겠다고 약조한 적은 없다만.”

“그…….”

그 말이 맞기는 하다. 놈이 겉옷을 벗겨서 바닥에 던졌다. 정식 연회복이라 안에 조끼가 하나 더 남았다. 놈이 조끼 단추를 풀며 귓가에 입까지 댔다. 숨결이 뜨끈하고 소름 끼쳤다. 놈이 움츠러든 귓가로 더 얼굴을 밀착시키고 낮게 말했다.

“그 대신 충분히 기분 좋게 해주마.”

“뭣……! 어디서 개소리를……!!”

나는 눈을 부릅뜨고 진심으로 정색했다.

“입으로 해주는 걸 좋아하지 않나.”

순간 구음을 받고 거의 자지러지듯 느꼈던 일이 스쳐 갔다. 얼굴이 잠시 붉어졌지만 바로 표정은 차게 가라앉히고 놈을 노려보았다.

“사내새끼 좆 빠는 데 아주 재미가 붙었나 보구나. 그러다 버릇이라도 들면 어쩌려고?”

가능한 한 역겹다는 감정을 담아 놈을 조롱했다. 미친놈이 어디서 추잡스러운 소리를 지껄여.

툭.

조끼가 벗겨져서 바닥에 떨어졌다. 모욕적인 말을 들은 탓인지 꿈쩍도 하지 않던 지스카르가 귓가에서 떨어져 나왔다. 놈이 무표정하게 나를 내려다보더니 내 턱 끝을 잡았다.

“확실히 네 몸이 중독성이 있긴 하지.”

“……!”

내가 욕 비슷한 걸 하려 입을 열었을 때였다. 지스카르가 어깨를 잡아 끌어안고 입술에 키스했다. 입술을 빈틈없이 틀어막은 채로 강하게 짓눌러서 뒤로 넘어뜨리고, 다른 손으로 균형을 잃은 다리를 안아 들었다. 놈은 그대로 침대로 직행했다.

계속 키스하면서 지스카르가 내 셔츠 위로 손을 더듬거렸다. 조금 성급하게 셔츠를 전부 벗길 때까지 나는 놈에게 짓눌려 입술을 내주고 있었다. 숨이 턱까지 찼다. 길게 빨릴 때마다 기분 더럽고 소름 끼쳤다. 그리고 목구멍이 뜨끈뜨끈했다.

“허억! 하아하아.”

드디어 놈이 떨어져 나왔다. 나는 벌겋게 달뜬 얼굴이 되어 거친 숨을 가쁘게 토했다. 지스카르도 한숨을 토하며 내 허리 위로 손을 얹었다. 허리에서부터 가슴 쪽으로 느긋하게 맨살을 만져 나가는 것이 아주 불쾌해서 약간 저항을 하며 몸을 뒤집었다. 지스카르는 말리지 않고 오히려 엎드리도록 살짝 밀어주었다.

놈의 손이 다시 아래쪽으로 파고들어 가슴팍을 어루만졌다. 유두를 찾고는 손끝으로 꽉 쥔다. 나는 놀라고 움츠렸다. 손이 닿는 곳부터 이상하게 열이 확 올랐다.

“흑……! 으……!”

“심장 고동이 굉장하군.”

진짜로 심장이 크게 벌렁거리고 있었다. 지스카르가 등을 살짝 누르면서 바지를 벗겨냈다. 허리 아래가 서늘해지는 느낌은 몇 번을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지스카르가 헐벗은 다리를 쓸어내리며 약간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어차피 시작한 이상 끝을 보지 않는 한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나는 각오를 하고 침대 시트를 움켜쥐었다. 그런데 엉덩이 사이로 들어온 것은 손가락도 성기도 아니었다.

“헉?!”

물기가 축축한 것이, 혓바닥이! 구멍을 꾹 누르며 핥았다. 나는 화들짝 놀라며 뒤를 보았다.

“무, 무슨!!”

“보다시피.”

지스카르가 손으로 허리를 좀 더 들었다. 엉덩이가 위로 들리자 그 사이로 얼굴을 묻고 혀로 입구를 핥았다. 손으로 엉덩이를 약간 당기면서 주름을 하나씩 천천히.

이놈은 미친놈이다. 나는 얼굴을 벌겋게 붉히며 그렇게 생각했다.

미친 게 아니면 같은 남자새끼 뒷구멍을 왜 빤단 말인가. 차라리 밑으로 기어와서 빨아보라고 시키면 시켰지. 대체 저놈은……!!

“으……, 아……! 헉!”

사람이 기겁하는데 놈은 여기서 한술 더 떴다. 검지를 안으로 넣어 구멍을 꾹 벌리더니 빈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최대한 깊이 집어넣고는 쭉 빨아버린다.

“아으읏!!”

순간 전류라도 통한 것처럼 허리가 와락 아래로 무너졌다. 희한한 데서 죽을 것 같은 쾌감을 느끼고 침대 시트를 잡히는 대로 마구 그러쥐며 허리를 벌벌 떨었다.

저, 저놈이 빠는데 왜 내가 부끄러운 거냐. 말할 수 없이 창피한 느낌. 아랫배부터 온몸에 부글부글 열이 채어 올랐다. 혓바닥으로 입구를 가볍게 핥을 때는 간지러운 쾌락에 바르르 떨고, 입을 대고 빨면 크게 자지러지고 저도 모르게 입구를 움찔거리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아……! 아아……!”

너무 과도하게 흥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쉽게 진정할 수가 없었다. 내가 헐떡거리는 동안 지스카르가 손을 앞으로 뻗어 내 성기를 꽉 쥐었다. 미칠 지경인 것이, 지금 내 물건이 금방이라도 쌀 것처럼 발기해 있다는 것이다.

엉덩이 사이로 혀가 닿는데 놈의 혀보다 내 구멍이 훨씬 뜨거웠다. 진짜 이건 아니다. 나는 뭔가 급한 마음에 몸을 일으켜 앞으로 도망가려고 했다. 그러나 지스카르가 아래로 성기를 꽉 잡고 다시 자기 쪽으로 끌어왔다. 아래를 함부로 잡아당기는데 거기서 또 자극을 느끼고 허리를 무너뜨렸다.

지스카르가 도망가려던 나를 다시 자기 앞으로 끌어왔다. 엉덩이를 잡고 바짝 당겨서 벌리며 놈이 헤집듯이 뒷구멍을 핥아댔다. 혀가 닿지도 않는 구멍 저 안쪽이 제멋대로 꽉 죄어들었고, 뜨거운 쾌락이 전신을 화끈 울렸다. 내가 엄청나게 느끼고 있다는 걸 인정하기 싫었다. 정말이지 미칠 지경이었다.

“흣, 아아아……! 흐윽, 아, 으……. 좀…… 좀 평범하게! 읏, 지……스카르, 지스카르!”

마지막으로 고함을 크게 지르자 드디어 지스카르가 떨어졌다. 나는 헐떡거리면서 겨우 안도했다. 지스카르는 나를 바로 눕히며 다시 자세를 바꾸었다. 그런데 계속 아래에서 올라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놈이 이번엔 내 성기를 핥기 시작했다.

“아! 진짜로……!”

입으로 해주겠다니 진짜 아주 끝장을 보겠다는 건가. 나는 이미 크게 흥분하고 단단하게 발기한 상태였다. 귀두를 진득하게 핥는 것만으로 넘칠 만큼 느꼈다. 발끝을 움츠리고 위로 끌어당기며 다리 사이에 있는 지스카르의 머리를 꽉 잡았다.

무슨 신호라고 생각했는지 놈이 성기를 한입에 삼켰다. 나는 진심으로 신음을 터뜨리며 자지러졌다. 너무 흥분해서 허리까지 살짝 띄우고 바들바들 떨고 있는데 놈의 손가락이 바짝 움츠러든 구멍을 건드렸다. 중지를 먼저 넣고 상태를 보다가 바로 검지까지 추가했다. 아까 혀로 애무당해서 그런지 향유도 바르지 않은 손가락 두 개가 너무 쉽게 쑥 안으로 들어갔다. 그대로 가장 깊은 곳까지 힘 있게 찔렀다.

“하악!! 아아아아!”

불똥이라도 튄 것처럼 눈앞이 번쩍했다. 뒤늦게 너무 크게 소리 질렀다는 생각이 들어 황급히 신음을 삼켰다.

“지스카르!”

진짜 그만해라. 여기서 그만하라고!

지스카르는 그만두기는커녕 더 거칠게 밀어붙여 내 성기를 뭉개버릴 듯이 아주 깊이까지 물었다. 목구멍 깊은 곳이 성기 끝을 강하게 눌러 조였다. 허윽, 놀라면서 앞의 자극에 정신을 뺏기려는 순간 놈의 손가락이 내벽을 거칠게 쑤셨다. 깊이까지 들어간 검지와 중지가 뒷구멍을 사납게 아무렇게나 휘저었다. 속살이 열리고 벌려지고, 음탕하게 뜨거워졌다.

“하앗! 하윽! 흑! 하아!”

나는 버들버들 떨며 신음을 질렀다. 뒤를 쑤시면서 성기를 빨아주는데 몸뚱이가 무섭도록 쾌락에 빠져들었다. 이성이 줄줄 녹아내리는 기분이다.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흣. 아! 그, 그만…….”

사정감이 급하게 치밀어왔다. 싸버릴 것 같았다. 지스카르의 머리를 밀치며 떨어지라고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만! 비, 비켜!! 나……!”

이 미친놈이 끝까지 요지부동이다. 나는 죽을 것 같은 심정으로 외쳤다.

“지스카르!”

이름을 부르자 드디어 지스카르가 입을 떼고 떨어졌다. 그 순간 전부 다 쏟아냈다. 아랫배가 뻐근하게 땅겨올 만큼 굉장한 절정이었다.

사정이 끝났는데도 한참 동안 절정의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지스카르가 손등으로 자기 입을 훔치더니 헐떡거리며 늘어져 있는 나를 안아서 자기한테 기대도록 앉혔다.

“입으로 해주는 데 정말로 약하구나.”

“……!!”

힘없이 헐떡이던 나는 순간 눈을 번뜩이고 놈을 노려봤다. 그런데 지스카르의 얼굴이 무척 나른하게 보였다. 나만 죽도록 괴롭힌 주제에 놈도 크게 흥분한 느낌이었다.

놈이 내 뺨을 감싸며 끌어당겼다. 그런데 잠깐, 이놈이 지금 키스하려는 건가?

“치워. 밑구멍을 쪽쪽 빨다가 어딜 지금. 씻고 오던가!”

“……네 몸일 텐데?”

“내 거라고 안 더러우란 법 있느냐?”

내가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지스카르는 거칠게 입을 맞췄다. 필사적으로 머리를 뒤로 빼려고 하자 손으로 뒤통수를 꽉 붙들고 잡아먹을 것처럼 몇 번이나 입 안을 빨았다.

키스를 하고 밀어붙이면서 놈이 성급하게 턱뼈를 꽉 눌러 입을 더 열게 했다. 내가 언제라도 물어뜯을 태세로 기다리고 있음을 놈도 알았나 보다.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하고 놈이 혀를 가능한 한 깊이 밀어 넣었다. 멀찍이 도망가는 혀를 따라잡아 기어이 엉켜들었다. 정말 지독한 키스였다. 숨을 쉴 겨를도 없다. 좀 떨어질 만하면 다시 겹쳐 오고 또 빨아 당기고.

“하아……!”

지스카르도 꽤 힘들었는지 크게 숨을 뱉고 떨어졌다. 놈이 그 정도이니 나는 정말 숨넘어가기 직전이었다.

“허억허억! 하악!”

헐떡거리는 나를 지스카르는 강하게 품에 끌어안았다. 다리 사이로 놈이 손을 뻗고 있었다. 죽어버린 내 성기를 손으로 지그시 주물렀다.

“하아, 으…….”

아까 너무 과하게 했기 때문에 한동안은 다시 세우기가 힘들 것이다. 내심 네 멋대로 해보라는 생각까지 하며 숨을 가늘게 몰아쉬고 있었다. 그런데 놈이 거길 꾹꾹 쥐어짜니 얕은 자극 같은 것이 아득하게 밀려들었다.

지스카르가 성기를 계속 자극시키며 나를 앞으로 밀어 엎드리게 했다. 놈이 침대맡에서 향유를 찾고 있었다. 미끈거리는 윤활유를 자기 성기에만 가볍게 발라 내 구멍에 가져다 댔다. 이 와중에도 놈이 향유를 많이 쓰지 않은 것이 내심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쓸데없는 걱정임을 금방 알게 되었다.

아까 한번 열린 내벽이 녹진녹진하게 풀려서 이물의 침입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저항 없이 수월하게 들어왔지만 정작 뿌리까지 넣은 후에는 배 속이 좀 과장해서 터질 듯이 빠듯했다. 너무 꽉 차서 이상하게 목구멍까지 그득해진 느낌이다.

“읏……. 흐…….”

“하아……. 레이…….”

지스카르가 위쪽에서 굉장히 길게 숨을 토하며 다시 내 이름을 불렀다. 아랫구멍을 한계까지 벌려 완전히 점령하고 전에 없이 큰 충족감을 표하고 있었다. 내가 하는 것만 보고 저놈은 아직 한 번도 안 했다. 그래서 저렇게 크게 반응하는 것이 분명했다.

다급하게 자기 욕망만 충족해도 부족할 판인데 지스카르는 내 성기를 더욱 정성 들여서 주물렀다. 빨리 다시 세우려고 독촉하는 모양이었다.

그냥 혼자 해버려, 개자식아. 나는 침대에 붉어진 얼굴을 파묻으며 속으로 욕을 했다. 하지만 떨리는 쾌락이 서서히 치밀어 올랐다. 성기에 피가 쏠리는 것을 느끼면서, 대체 왜 이렇게 빨리 서는 거냐고 질색을 했다.

내가 발기하는 것을 보고 지스카르는 바로 움직였다. 조금 급하게 허리를 잡고 성기를 확 처박는다.

“읏!”

꿰뚫리면서 약간 통증이 있었다. 놈이 성기를 뿌리까지 박은 채 속을 꾹 누르면서 원을 그리듯이 허리를 비틀었다. 뭔가 아주 수치스러운 기분이라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서서히 창피함을 압도하는 자극적인 열락이 몸을 가득 채웠다.

“윽……. 흐읏, 흐…….”

“레이.”

“부, 부르지 마.”

왜 저놈이 내 이름을 부르면 이렇게 닭살이 돋을까. 나는 달뜬 숨을 토하며 거절을 표했다. 그러자 놈이 마치 나무라듯이 성기를 손으로 꽉 쥐어짰다. 나는 불쾌해할 겨를도 없이 치밀어드는 쾌감에 떨었다. 성기가 그새 터지기 직전까지 발기해 있었다.

지스카르가 느릿하게 성기를 넣었다 빼며 압박하자 귀두에서 물이 뚝뚝 흘렀다. 나는 다시 견딜 수 없게 되었다.

“우……, 읏. 으으……!”

“레이, 참지 말고…….”

지스카르가 몸을 조금 숙이며 등 뒤에서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지……스……카르……!”

내가 억눌린 음성으로 이름을 부르자 놈이 움칫했다. 생각 없이 말한 것인데, 이름을 불린 것에 놈이 무섭게 흥분했다. 지스카르가 팔에 단단히 힘을 주고 성기를 힘껏 끝까지 처박았다. 힘을 강하게 담은 채로 빠르게 박는 것을 반복했다. 너무 강하게 밀어 쳐서 앞으로 몸이 밀렸다. 무자비하게 찔릴 때마다 고통이 아니라 마른 쾌락이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하읏! 흣……! 하아!”

“레이. 한 번 더.”

“아……. 학…….”

“레이……!”

정말로 참기 힘들었다. 놈이 자꾸 독촉하는 소리도 나를 이상할 만큼 흥분시켰다. 나는 침대에 처박고 있던 고개를 들고 억눌렀던 목소리를 터뜨렸다.

“아, 아아! 지, 지스카르!”

눈가가 화끈하고 전신에 짜릿하게 흐르는 극치감! 나는 다시 한번 뜨겁게 사정했다. 두 번째인데도 이렇게 극치감이 클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지스카르도 내가 사정하는 순간에 내 안에서 불뚝대며 모든 것을 다 털어냈다.

일을 전부 치른 뒤에도 지스카르는 나를 계속 등 뒤에서 안고 있었다. 놈을 떼어내고 싶었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조금 지쳐서 다 포기하고 잠을 청했다. 그리고 언제인지도 모르게 잠들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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