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2권) (9/43)

목차

8.

매일 아침 열리는 어전 회의.

상석에 앉은 지스카르 황제는 금장이 입혀진 상소를 하나 집어 들었다. 그가 상소를 읽는 동안 마크시 공작이 머리를 조아렸다. 공손함을 가장한 채 공작은 황제를 압박하는 주장을 펼쳤다.

“폐하, 그 노예를 내치셔야 합니다. 이 많은 상소를 보십시오. 심지어 레나스의 대신관도 황실의 기강이 흐트러지는 것을 걱정했습니다.”

“어찌 레나스 신전에서 폐하의 사사로운 일까지 참견하려 든단 말인가!”

황제파 수장 중 하나인 울펜가모트 공작이 즉시 언성을 높였다.

“레나스 신전이 이 기회에 영향력을 높여보겠는 속셈인 모양인데 아주 가소롭기 짝이 없군!”

그랜트 공작이 뒤를 이어 동조했다. 많은 귀족들이 신전의 무도한 행태에 대해서 성토하는 의견을 내놓았다.

현재 엘 파셔는 황제의 애첩 이야기로 연일 설전을 이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표면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이 논쟁의 물밑에는 황권 강화를 원하는 황제와 자기 권세를 더욱 확장시키려는 황후 일파의 대립이 존재했다. 만약 이번에 황후 일파가 황제에게 압박을 가하여 침실 노예를 쫓아내는 데 성공한다면 그들은 앞으로도 황제의 결정에 간섭하고 국정을 흔드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다.

처음 마크시 공작은 자신의 세력을 과신하고 휘하의 귀족들을 모아서 기세 좋게 황제를 공격했다. 하지만 제대로 되는 일 하나 없이 순식간에 역으로 축출될 위기에 몰리고 말았다. 요 며칠 마크시 공작은 식사도 제대로 못 하고 밤엔 멸문지화당하는 꿈까지 꾸다가 비명을 지르고 깨길 반복했다.

단 며칠 만에 뱃살까지 쏙 빠져버린 마크시 공작이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도 아주 기운이 넘쳤다.

“폐하! 제가 이럴 줄 알았습니다. 그 수상한 노예가 아니나 다를까 마탑에 숨어들어 무도한 짓을 벌이려고 했다지요? 보십시오. 그런 자를 곁에 두시면 언젠가 진짜로 화를 입으실 겁니다! 제가 감히 폐하께 참견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사태를 예견했기 때문에 충언을 드렸던 것입니다!”

회의장이 조금 술렁거렸다. 모든 이가 황제의 애첩에게 이목을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탑에서 있었던 일은 이 중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거기까지.”

황제가 상소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시끄럽던 회장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아무리 소란스러운 와중이라도 지스카르 황제가 이야기를 시작하면 사람들은 모두 주목했고 조용히 경청했다.

“오늘은 일찍 폐장하겠소.”

지스카르는 짧게 선언하고 몸을 일으켰다. 황제가 독단으로 조의를 끝내버렸으나 뭐라고 의견을 제기할 사람은 거의 없었다.

“폐하!!”

오직 마크시 공작만이 끝장을 보자는 식으로 들러붙었지만 지스카르 황제는 무시했다.

잠시 후 울펜가모트 공작과 그랜트 공작이 회의장을 나와 황제를 찾았다. 집무실로 직행하려 했던 지스카르는 멈추어 섰다.

“당분간 자리를 비우게 될 거요. 그동안 두 공작께서 짐의 빈자리를 지키고 계시오.”

“계획이 좀 틀어졌군요. 폐하께서 자리를 비우신 동안 마크시 공작은 숨을 돌릴 시간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울펜가모트 공작이 불편한 얼굴로 말했다.

“큰 문제는 아니오. 돌아오자마자 해결하면 될 일이니.”

지스카르 황제는 대수로울 것 없다는 태도였다.

그랜트 공작이 울펜가모트 공작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어쩔 수 없잖나. 벌써 십 년 이상 정기적으로 행해온 마물 사냥이네. 소드 마스터이신 폐하께서 황위에 오른 이래 직접 무위를 보이는 것으로 국력을 과시해 왔지. 그런데 마크시 공작이 마음에 걸린다고 갑자기 이번 일정을 취소해 보게. 마크시 공작의 압력을 견디지 못했다는 뜻이나 다름없게 되지 않는가. 폐하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결과를 부를 것이네.”

“알고 있네. 답답해서 해본 말일 뿐. 이번에 사건이 터지지 않았다면 폐하께서 사냥을 떠나시기 전에 마크시 공작을 축출할 수 있었을 텐데.”

울펜가모트 공작은 미간에 주름을 잡고 있다가 지스카르 황제를 보았다.

“폐하, 솔직한 심정을 밝히자면 저도 마탑에서 일이 터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척 신경이 쓰였습니다. 그 노예는 너무 미심쩍습니다. 마크시 공작을 축출하고 이번 일을 일단락 내시거든 빠른 시일 내에 그 노예를 내치십시오.”

순간 지스카르의 얼굴에 칼날 같은 냉기가 어렸다.

“공도 마크시 공작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짐을 압박하기로 결정하셨소?”

“그, 그렇지 않습니다! 어찌 그리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지스카르는 싸늘한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고 이내 등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그가 완전히 떠나고 나서야 울펜가모트 공작은 한숨을 토했다.

“그러게 말을 가려 해야지.”

그랜트 공작의 핀잔을 듣고 울펜가모트 공작은 눈을 날카롭게 떴다.

“나는 폐하를 걱정하고 있는 것뿐이네!”

“마크시 공작도 그렇게 말하던데……. 아아, 알겠네. 그렇게 보지 말라니까.”

울펜가모트 공작은 골치가 아파와서 미간을 꾹꾹 눌렀다.

“나는 진심으로 걱정일세. 황후를 압박할 생각이었다 해도, 왜 하필 그런 수상한 노예를 선택하셨단 말인가. 폐하께서 단순히 그 노예를 이용하고 계신 것뿐이라면 좋겠지만 보다시피 그것은 아닌 것 같지 않나. 솔직히 그 노예 자체만 따지면 마크시 공작의 말이 구구절절 옳아. 언젠가 그놈 때문에 정말로 큰 화를 입을지도 모르네!”

“하긴, 걱정이 될 만도 하지. 이번에는 줄을 제대로 선 것이어야 하는데 말이야. 그 옛날 휴전협정에 반대하고 황제 폐하와 반목하는 길을 선택하는 바람에 그랜트와 울펜가모트 공작가는 크게 위축되었지. 또다시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이라면 명망 높은 두 공작가는 이번에야말로 쫄딱 망하는 거야.”

그랜트 공작이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말투가 다소 경박하고 귀족답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울펜가모트 공작은 평소 그랜트 공작의 그러한 언동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천박한 말투를! 자네가 그런 식이니 자네 아들도 그 모양이지!”

순간 그랜트 공작의 눈빛이 처음으로 날카로워졌다.

“그래 보여도 내 아들은 처신을 잘하는 편이라네. 진짜 문제가 될 만한 일을 한 적도 없고. 좋은 부인을 얻었고 후계자와 딸까지 낳았지. 그런데 크리스티안은? 떠올려보면 결정적일 때 큰 사건을 터뜨리는 건 항상 자네 아들이었던 것 같은데?”

아들 문제가 걸리자 울펜가모트 공작도 눈을 사납게 떴다. 두 공작 사이에 잠시 신경전이 이어졌다. 하지만 금방 그랜트 공작이 항복을 선언했다.

“됐어, 자네랑 싸우고 싶지는 않아. 실은 나도 그 노예가 신경이 쓰이긴 하네. 하지만 폐하께서 다른 사람도 아니고 던필과 크리스티안에게 감시를 맡긴 모양이니 괜찮겠지.”

“…….”

울펜가모트 공작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 * *

나의 탈출극 때문에 잘은 몰라도 지스카르의 입장이 상당히 곤란해졌을 것으로 추측되었다. 바깥소식에 깜깜하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예상 가능했다. 황후파 귀족들이 나의 수상쩍은 행보를 문제 삼아 공격을 퍼부었을 테지.

틀림없이 상황이 별로 안 좋을 텐데, 지스카르는 날 도로 방에 가두지 않고 계속 검술 훈련을 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나는 연무장 안으로 들어가 검을 쥐었다. 이런 일로 놈에게 고마움을 느껴야 하는지 참으로 심경이 복잡했다.

준비운동을 하면서 몸을 푸는 동안 크리스티안의 시선을 느꼈다. 나 때문에 그도 난데없이 지스카르에게 호된 질책을 받았다. 그는 전보다 나를 감시하는 일에 더욱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리고 자세한 이유는 모르는 채이지만, 황제의 명령을 받아 내가 마탑 비슷한 곳에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감시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마정석을 얻는 길은 더욱더 요원해질 듯했다.

마탑 소동 직후 다시 검술 훈련을 시작할 때만 해도 분위기가 조금 경직되어 있었지만 연습에 집중하는 동안 어느덧 어색함은 사라졌다. 일단 딴생각을 할 만큼 훈련 일정이 그렇게 만만하지가 않다.

땅!!

나무기둥을 힘껏 후려치고 나는 조금 물러섰다. 타격감이 영 좋지 않았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면서 다시 검을 내려쳤다.

텅!!

나무기둥이 부르르 떨렸다. 나는 크게 만족하면서 팔을 위아래로 움직이고 근육을 풀었다. 이 감각을 그대로 살려서 다시 검을 들었다.

그때 크리스티안이 아직도 떨리고 있는 나무기둥을 손으로 잡았다.

“무서울 만큼 빠르게 발전하는군.”

“후우, 아직은 애송이 수준이라고 생각한다만.”

“잠시 쉬어라. 정확히 10분 쉬고 다시 시작한다.”

크리스티안의 지시에 순순히 검을 내려놓았다.

문득 소란을 느꼈다. 고개를 돌려서 보니 시녀들 셋이 수건 하나를 가지고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크리스티안도 소란이 난 쪽을 불쾌하게 보았다. 화들짝 놀란 시녀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 우연히 수건을 손에 들고 있던 시녀가 얼굴을 발갛게 붉히고 연무장 안으로 걸어왔다.

“수건을 가져왔습니다.”

“소란 피우지 말고 물러나라.”

“예.”

시녀는 연무장 외곽에 비치된 탁자에 수건을 올려놓고 잰걸음으로 빠르게 물러났다. 어차피 쉬는 시간이라 나는 의자로 가서 앉으며 크리스티안에게 농을 걸었다.

“크리스티안 경, 인기 좋은데? 일전에 연회장에서도 감히 다가오지 못할 뿐 많은 레이디들이 경에게 뜨거운 눈길을 보냈지. 남편이 이렇게 인기가 많으니 부인의 고생이 심하겠어.”

“에구. 너는 벌써부터 남의 남편, 부인 걱정도 하고 그러냐?”

던필이 연무장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고 돌아오며 기지개를 쭉 켰다. 잡담하면 절대로 빠질 수 없는 인간이라 그런지 돌아오는 타이밍도 기가 막혔다.

“크리스는 아직 미혼이다. 마음고생 할 부인이 아직 없단 말이지.”

“아직도 결혼을 안 했다고?”

전혀 예상 못 한 말이라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늦어도 20대 중반까지는 결혼을 하는 것이 일반의 상식이다. 심지어 지스카르는 열여섯에 브뤼셀 황태자비를 들였다. 그런데 크리스티안은 벌써 서른을 훌쩍 넘긴 상태였다.

전생의 나도 결혼이 조금 늦긴 했다. 하지만 국외로 출전하는 일이 많았고 특히 휴전협정만큼은 반드시 성사시키겠다고 일에 몰두하는 바람에 식이 미뤄졌던 것뿐이다.

애초에 내 곁에는 일찌감치 황태자비로 내정된 여인이 있었다. 바레스노엘 공작의 장녀, 얼굴은 귀여운데 머리가 굉장히 비상한 것이 개인적으로 무척 마음에 들어서 순진한 척 어리광을 부려와도 전부 받아주곤 했었지. 그에 비하자면 크리스티안은 가깝게 지내는 여자가 하나도 없는 것 같은데, 혹시 중요한 곳에 장애라도?

“내가 유곽에 끌고 가봐서 아는데 크리스는 고자가 아니다. 왜 이런 설명까지 해줘야 하지? 그런데 딱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게 눈에 보인단 말이야.”

“그런 게 아니면 그 나이까지 결혼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까.”

피식 웃으며 턱을 만졌다. 나는 크리스티안을 보고 물었다.

“왜 아직도 결혼을 하지 않았지? 말하기 곤란한 이유인가?”

“마음에 든 상대가 아직 없었다.”

“그건 흥미롭군. 사랑 없는 결혼은 안 한다는 주의?”

“단순히 결혼에 관심이 없었을 뿐이다! 언젠가는 하게 되겠지. 그동안 바쁘기도 했고.”

크리스티안은 인상을 팍 찌푸리며 대꾸했다.

“관심이 없다니 그 얼굴을 가지고 아깝군. 덧붙여 바빴다는 변명은 안 통해. 시간이라면 던필도 똑같이 부족했을 텐데 분위기로 보니 이쪽은 이미 결혼을 한 모양인데.”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던필이 품에서 대뜸 뚜껑 달린 회중시계를 꺼냈다.

“암! 나야 적령기가 돼서 바로 결혼했지! 금쪽같은 딸내미도 있고! 한번 보겠어?”

“딸의 초상화를 매일 들고 다닌단 말이냐?”

나는 어이없어하면서 회중시계를 받았다. 뚜껑을 열자 여자아이의 초상화가 나타났다. 천만다행으로 딸은 던필을 하나도 닮지 않았다. 금발에 파란 눈동자가 아주 사랑스러운 예쁘장한 꼬마였다.

“어때? 제 엄마를 아주 쏙 빼닮았다니까? 이름은 ‘크리스티나’라고 한다!”

던필이 호쾌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딸 이름을 들은 뒤 자연스럽게 크리스티안을 쳐다보게 되었다.

“하하하! 딸이 태어나면 꼭 이런 이름으로 지어야지 했는데 정말로 딸이 태어나지 뭐냐. 어떠냐, 우리 크리스 정말로 예쁘지? 얼마나 귀여워, 우리 크리스!”

“…….”

이런 일을 한두 번 당한 게 아닌지 크리스티안의 표정이 좋지 않다. 그렇다고 남의 소중한 딸 이름에다 대고 뭐라고 할 수 없고 그야말로 진퇴양난이다.

“……딸 이름으로 장난을 치다니. 그 이름에 동의한 네 아내도 보통 인물은 아니군.”

나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일부러 시계 안에 딸의 초상화를 넣어서 다니는 게 크리스티안을 놀리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괴짜 녀석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아무렴, 내 아내가 되려면 이 정도 배짱은 있어야지.”

던필이 웃으면서 회중시계를 다시 품에 넣었다.

“그래. 배짱도 있고, 좋은 여자다.”

그는 먼 곳을 보며 한 번 더 비슷한 말을 반복했다. 어렴풋이 아내에 대한 신뢰가 엿보였다. 대부분의 귀족과 황족은 정략결혼을 한다. 오로지 조건만 보고 만난 사이에 혹시 사랑이 없더라도 신뢰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면 그 정략결혼은 성공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나는 대충 던필의 집안 사정을 유추해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카락에 맺힌 땀이 뚝 하고 코끝에 떨어졌다. 수련을 하느라 땀투성이였는데 뒤늦게 그것이 신경 쓰였다.

“거기 수건.”

땀을 닦고 싶어 수건이 올려져 있는 탁자를 턱짓했다. 크리스티안이 수건을 가져와 반듯하게 펼쳐서 내게 건네주었다. 별생각 없이 수건으로 얼굴과 목을 훔쳐내다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크리스티안이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원수처럼 자기 손을 노려보고 있었다. 노예인 내가 크리스티안에게 수건을 갖다 바쳤어야 옳은 것인데 어째 상황이 반대가 되어 있었다.

던필이 다가와서 크리스티안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크리스, 네 심정을 조금은 이해하는데……. 그래도 남들 보는 눈도 있으니 다음에는 좀 주의하는 게 좋겠다.”

“알고 있으니 충고할 필요 없다. 그 손 치워!”

크리스티안이 그답지 않게 살짝 성질을 냈다. 사건의 원흉인 나는 그저 쓰게 웃었다.

짧은 휴식을 끝내고 다시 훈련에 들어가려고 검을 들었다. 그때 지스카르가 호위를 이끌고 연무장에 나타났다. 크리스티안과 던필은 즉시 바른 자세로 기립했다. 하지만 나는 불량하게 수건을 목에 두르며 황제를 맞이했다.

“이 시간에 한가하게 어쩐 일이지? 일이 좀 복잡해졌을 것 같은데.”

“그래, 누구의 탓으로 마크시 공작을 축출하는 일이 조금 미뤄졌다.”

지스카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미안하다는 소리는 전혀 하고 싶지 않고, 나는 어깨를 들썩였다. 애초에 날 이런 데 끌고 와서 가두지만 않았어도 서로 얼굴 붉힐 일 없었을 것 아닌가.

지스카르는 내 손에 든 검을 보며 물었다.

“검은 얼마나 늘었느냐?”

“그냥 제자리걸음 정도.”

“그럴 리가.”

질문에 별 의미를 두지 않고 아무렇게나 대답했다. 그러나 지스카르는 굳이 내 대답을 부정하고는 일부러 크리스티안을 불러 재차 같은 질문을 했다.

“얼마나 늘었지?”

“예, 폐하. 체력과 근력이 많이 부족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실력이 늘고 있습니다. 지금도 기술만큼은 황실 근위기사의 평균 수준을 상회합니다.”

“몸에 힘이 붙는 만큼 실력은 몇 배가 되어 늘 것이다. 특히 가까운 시일 내에 오라를 발현시킬지도 모르니 주의해서 지켜봐라.”

“…….”

지스카르의 당부에 크리스티안은 바로 답을 하지 못하고 조금 당황했다.

나도 인상을 쓰며 지스카르를 보았다.

“훈련을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오라를 발현시킨다는 거냐. 그것 다음 단계는 소드 마스터인데 혹시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보면 알 수 있다. 대충 잡아서 5년 정도. 다른 곳에 한눈팔지 않고 검에 전력을 다한다면 충분히 마스터가 될 수 있겠지.”

황제를 호위하러 온 친위기사들이 눈에 띄게 동요했다. 실제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황제가 직접 하는 말이다. 크리스티안이 막연히 실력이 좋다고 칭찬하는 말과는 차원이 달랐다. 솔직히 나도 체력이 달려서 끙끙대는 현시점에서 이 정도로 후한 평가가 나올 줄은 몰랐다. 나는 애먼 턱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내가 소드 마스터가 돼서 이번에야말로 널 찔러버리겠다고 하면? 좀 곤란해지는 거 아닌가?”

“같은 마스터라도 경험치의 차이가 있지.”

지스카르는 팔짱을 낀 채 전혀 안달을 내지 않았다. 하긴 마법사의 경우도 같다. 2중 영창 마법사보다 3중 영창 마법사가 뛰어난 것은 당연하지만, 똑같은 3중 영창 마법사라고 한다면 노련함에 따라 그 실력 차가 하늘과 땅이다.

부웅!

허공에다 검을 뿌렸다. 나는 그대로 검을 내버리듯 땅에 꽂아버렸다.

“설령 그 말이 사실이라 해도, 5년이나 이런 곳에 처박혀 칼을 휘두르고 있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5년이나 더 지스카르의 노예가 되어서 살라고? 차라리 죽었으면 죽었지 그리는 못 하겠다.

“…….”

지스카르는 말없이 내 모습을 응시하고 서 있었다. 놈이 침묵하고 나도 입을 다물었기에 무거운 정적이 찾아왔다.

“열흘 정도 마물 사냥을 나가야 한다.”

한참 만에 지스카르가 입을 열었다.

“너도 행사에 동행하게 될 것이다. 따로 준비할 것은 없겠지만 알아두어라.”

“마물 사냥? 이런 시기에?”

“매해 네 차례씩 진행해 왔던 정기 행사다. 마크시 공작 건은 돌아오는 즉시 처리할 것이다.”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대충 납득했다. 나는 다른 부분에 관심을 돌렸다.

“그런데 나도 데려가겠단 말인가? 황궁 밖으로?”

“성에 두고 가면 황후가 기뻐하며 잡아먹으려 들 테니.”

지스카르는 돌아서서 연무장을 벗어났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나도 땅에 박힌 검을 뽑았다. 괜히 칼을 버리면서 성질을 냈지만 지금은 계속 검을 배우는 게 나를 위해서도 좋았다. 다시 훈련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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