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4/43)

13.

엘 파셔의 어전 회의는 큰 소리가 나는 일이 적은 편이었다. 황제의 성정 때문에 그런 것 같다는 의견이 많았다. 그러나 최근 몇 달 동안 소란이 끊이질 않고 있었다. 마크시 공작이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노스랜드의 도적놈들이 다시 약탈을 일삼았습니다. 또한 그 대역무도한 놈들이 주제넘게도 다시 무역을 요구했습니다. 폐하, 엘 파셔의 힘을 보여주어야 할 것으로 아룁니다!”

“쓸데없군. 가서 그냥 무역을 허가하겠다고 일러라.”

지스카르 황제가 귀찮다는 어조로 명령을 내렸다. 귀족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이는 벌써 수년째 쟁점이 된 문제였다. 그냥 한마디로 끝낼 문제가 절대 아니었다.

엘 파셔는 십여 년 전 대전쟁에서 주위의 크고 작은 나라를 모두 정복하고 대륙의 반을 평정했다. 하지만 북부의 빙하지대나 작은 섬들은 아직 완전히 점령하지 못했다. 엘 파셔는 그들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도적놈들, 해적 놈들 정도로 일축했다. 당연히 무역도 용납될 수 없었다.

사실 엘 파셔는 일 년 내내 눈으로 둘러싸인 노스랜드 따위 조금도 흥미 없었다. 거기서 살기 원하는 것은 원래 거기서 태어난 소수민족뿐이다. 소수민족들은 얼음물 속에서 싱싱한 생선을 능숙하게 낚아 올릴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생선과 엘 파셔의 곡물을 거래하길 원했다. 엘 파셔도 빙하지대의 희귀한 생선이 탐났다. 곡물은 남아돌았다. 그런데도 단지 명분상의 이유로 무역을 허가하지 않았다.

이에 노스랜드는 급기야 보복성으로 약탈을 시작했다. 약탈자를 소탕하고 싶어도 바다에 빙하가 떠다니기 때문에 추격조차 불가능했다. 이렇다 할 대책도 없이 북부지방의 주민들은 항상 고통받고 있었다.

명분 때문에 실리를 잃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명분은 대단히 중요했다. 무역을 허가하면 노스랜드는 엘 파셔가 인정한 독립된 국가가 된다. 한번 예외가 안정되었으니 과거에 통합된 구왕국 쪽에서 자신도 예외가 되길 원하며 반란을 획책하는 무리가 나타날 수 있었다.

무역을 허가하는가, 허가하지 않는가. 전자는 황제파의 주장이었고 후자가 마크시 공작 밑 황후파 귀족들의 의견이었다. 이 문제에 있어서 딱 떨어지는 해답은 없다고 하는 게 맞았다. 그런데도 황제가 난데없이 자기 마음대로 무역 허가 명령을 내렸다. 당연히 마크시 공작을 위시하여 귀족들이 벌떼같이 들고일어났다.

“폐하. 그리 간단히 말씀하실 문제가 아닙니다. 이는 작은 것을 얻기 위해 큰 것을 잃는 격이 될 것입니다.”

“마크시 공작의 말씀이 옳습니다. 어찌 경솔하게 결정을 내리려 하십니까!”

원래는 황제의 의견을 지지하는 대신도 많았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거의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도 황제의 결단은 너무 성급하고 경솔했다. 명분이 없으니 기세가 죽을 수밖에 없다. 기세등등한 황후파 귀족들만 크게 목소리를 높였다.

쾅!

지스카르가 옥좌를 세게 내려쳤다. 잠깐 장내는 소강상태가 되었다. 지스카르는 다시 명령했다.

“무역을 허가하겠다.”

“폐하!!”

“마음에 들지 않거든 마크시 공작 그대가 선봉에 서서 노스랜드를 평정하고 오시오. 하면 짐도 인정하겠소.”

“그것은…….”

“못 하겠소?”

지스카르는 대전을 내려다보았다.

“다들 들었는가? 무역을 허가한다. 더 이상 반론은 용납하지 않겠다.”

반론을 용납하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당연히 이대로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둘째 줄에 서 있던 귀족이 목청을 높였다.

“폐하. 이건 억지십니다! 어찌 문관인 마크시 공작님께 노스랜드의 소탕을 강요하십니까! 이제는 귀를 열고 마크시 공작님의 충언을 들어주십시오. 이미 한번 실수를 하지 않으셨습니까. 더 이상의 실수는 없으셔야 할 것입니다!”

지스카르는 손을 들었다. 갑자기 친위기사들이 달려 나와 큰소리를 내던 귀족을 붙잡았다.

“뭐? 이, 이건 무슨……!”

“반론은 용납지 않겠다고 했다. 끌고 나가 목을 베라.”

“예? 폐, 폐하. 폐하! 마크시 공작님!!”

그는 기사들에게 끌려나가며 소리를 질렀다. 마크시 공작이 다급히 나섰다.

“폐하.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인 줄로 아룁니다. 당장 명을 거둬주십시오!”

“그대는 항상 목청이 크군. 마크시 공작.”

황제가 평소보다 더욱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어전에서는 황제 본인과 그의 기사들 외에는 그 누구도 무장할 수 없었다. 황제의 뒤로 도합 열 명의 친위기사가 검을 차고 기립하고 있었다.

마크시 공작은 눈알을 굴려 그들을 하나씩 훑어보았다. 황제가 일순 정신이 나가서 기사들을 시켜 모조리 잡아 죽이라고 명령하면 이 자리에 있는 대신들은 손도 못 쓰고 몰살당할 수도 있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겠느냐 싶지만 요즘 황제의 행태를 보면 진짜로 그런 미친 일도 가능할 것 같았다.

결국 공작은 입을 다물었다. 모든 이들이 고개를 숙였다. 끌려나가는 귀족만이 새된 비명을 질렀다.

“다음 안건.”

적막 속에서 지스카르 황제가 입을 열었다.

* * *

던필은 지스카르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크리스티안 대신 그에게 친위대 대장직이 맡겨졌다. 하지만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때로 크리스티안을 이기고 이 자리에 앉기를 열망해 본 적이 아주 없었던 것도 아니나, 이런 방식을 원한 것은 아니다.

방금 처형당한 귀족을 떠올렸다. 회의장에서 숨을 죽이던 귀족들의 얼굴도 떠올렸다. 그들은 공포에 질려 지스카르 황제에게 굴종했다. 하지만 회의장을 나서는 순간 분노에 치를 떨 것이다. 휘하의 수백이 넘는 가신들을 이끌고 복수의 칼날을 갈기 시작하리라. 지스카르는 순식간에 셀 수 없이 많은 적을 만들었다.

절망적인 결과가 빤히 보이는데도 방법이 없었다. 지스카르가 개인적으로 그를 만나주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그때 문관 하나가 다급히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지스카르는 하루 중 세 번은 반드시 크리스티안과 레이의 행방에 대해서 보고를 받았다.

“놈들은 찾았느냐?”

“여기저기서 제보가 들어오고 있지만 아직 신빙성 있는 정보는 얻지 못했습니다.”

문관이 머리를 깊이 조아렸다. 예상대로의 대답이었다.

“어찌 생각하는가? 짐은 놈들에게 날개가 달리지 않은 다음에야 이렇게 꼬리가 잡히지 않을 수는 없다고 본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놈들의 등에는 날개가 달려 있지 않지. 아직까지 놈들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은 네놈들이 일에 태만하였다는 뜻이 아니겠느냐?”

“예? 아, 아닙니다. 저는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변명을 늘어놓던 문관은 갑자기 등을 찌르르 울리는 불길함에 무례를 각오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지스카르는 검을 아래로 꽂아 그의 목을 잘라버렸다. 잘려 나간 목에서 피가 왈칵 쏟아져 나와 바닥과 황제의 바짓단을 적셨다.

친위기사가 바로 시녀를 불렀다. 뒤따르던 시녀 둘이 급히 달려와 황제의 바짓단과 신발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그들은 하나같이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그중에 금발의 시녀가 유독 심하게 떨며 연방 헛손질을 했다.

타고난 성정이 심약했던 그녀는 옛날부터 황제를 어려워했다. 황제의 그림자조차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하지만 사실 그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었다.

본래 황제는 공명정대한 사람이었다. 잘못한 것이 있으면 벌을 받았지만, 일을 잘 처리하면 큰 상을 받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매일 한 사람 이상이 황제의 손에 죽어나가고 있었다. 모두 단지 황제의 심기를 거슬렀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폐하!”

소년의 목소리가 복도를 짜랑 울렸다. 시라크가 호위기사를 대동하고 서 있었다. 그는 목이 잘린 시체를 보고는 이를 악물었다.

“폐하, 제가 긴히 상의드릴 것이 있습니다. 시간을 내어주십시오.”

지스카르는 시라크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대신 금발 시녀의 얼굴에 손을 뻗었다. 시녀는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그녀는 열심히 바닥의 피를 닦는 데 집중했다. 지스카르는 손을 움직여 하녀의 금발을 쓸어 넘겼다. 그녀는 더욱 공포에 질려서 온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폐하. 정말 뭘 하시는 겁니까!”

시라크가 악을 쓰며 소리 질렀다. 지스카르는 그제야 일어섰다.

“네가 그놈들이 도망칠 수 있도록 도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시라크는 일순 뻣뻣하게 굳었다. 하지만 당당한 척 고개를 치켜들었다. 더 이상 과거에 그랬듯 주눅이 들어 고개를 숙이지는 않을 것이다.

“증거는 있습니까?”

“네가 올해 몇 살이지?”

시라크는 황제가 왜 갑자기 이런 질문을 던지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스카르가 아무리 자신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해도 자신의 나이를 모를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시라크는 머뭇거리면서 대답했다.

“……열다섯 살입니다.”

“어린애군. 그래서 어린애처럼 악만 쓰면 무엇이든 통할 거라고 생각했겠지.”

시라크는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조금 놀림을 당했다고 물러설 수는 없었다. 시라크는 계속 악에 받친 목소리로 소리 질렀다.

“그러는 폐하께서는 도망친 노예 같은 거나 찾으면서 시간을 허비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어린애인 저도 압니다.”

“이래서 너는 쓸 수가 없다. 머리가 굵어졌다 해도 그게 한계인 거지.”

“폐하!”

지스카르는 피가 묻은 검을 높게 들었다가 사납게 허공에 뿌렸다.

“몇 번이나 기회를 줘도 소용이 없군. 네가 얼마나 경솔한지 아직도 모르겠단 말이냐?”

황제가 노기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검을 들고 시라크를 향해 걸어갔다. 순간 시라크는 심장이 철렁했다. 회의장에서 귀족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았고, 방금 문관이 목이 잘리는 것도 보았다.

황제의 심기를 거스르다가 이미 수없는 이들이 죽어나갔는데 자신이 그중의 하나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했다. 황제의 말마따나 시라크가 더 이상 주눅이 들지 않겠다며 보여준 행동들은 모두가 정말로 경솔했다.

호위기사 두 명이 퍼렇게 질려서 시라크를 보호하기 위해 앞으로 뛰어나왔다. 하지만 비슷한 급의 기사가 열 명, 스무 명 이상 와도 결코 황제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황제가 휘황하게 빛나는 오라 소드를 크게 내려쳤다.

호위기사는 가까스로 황제의 검을 막았다. 하지만 황제의 앞에서 그는 장난감 병정이나 다를 바 없었다. 어마한 힘이 실린 오라 소드가 말 그대로 장난감 부수듯 그의 검을 부쉈다. 검과 함께 기사의 두부가 박살 났다.

두 번째 호위기사가 죽을 각오를 하고 검을 들었다. 그는 황제의 검을 한번 받아보지도 못했다. 지스카르는 단칼에 기사의 허리를 검으로 반 토막 냈다. 기사는 자기 몸통을 잡고 피를 주르르 토하다가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순식간에 시라크 혼자만 남았다. 황제가 은색 찬란한 보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시라크는 일순 자신의 목이 잘려 나가는 환상을 보았다.

카앙!

그러나 지스카르가 휘두른 검은 중간에서 가로막혔다. 사색이 된 던필이 이를 악물고 그의 검을 막고 있었다. 감히 황제의 앞에서 무기를 꺼낸 죄가 매우 컸다. 그는 즉시 검을 바닥에 던지고 무릎을 꿇었다.

“용서……하십시오. 하지만 이것만은 안 됩니다……. 폐하……!”

“왜 저것만은 안 된다는 것이냐?”

지스카르가 시라크를 가리키며 다시 검을 들었을 때였다. 털썩하고 소리가 들렸다. 시라크가 두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땅바닥에 주저앉은 것이다. 그는 새파랗게 질려서 턱을 달달 떨고 있었다. 오줌을 싸지 않은 것이 용했다.

지스카르는 눈을 가늘게 떴다.

“벨 생각도 나지 않게 만드는군.”

그는 비로소 검을 거두었다. 그리고 시라크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시라크는 여전히 공포에 질려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하지만 지스카르가 멀어지자 이를 악물었다.

“폐하. 정말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꼭 제 이야기를 들으셔야 합니다! 이대로 절 무시하면 진짜로 후회하게 되실 겁니다.”

황제의 만행에 치를 떨면서 서둘러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계속해서 황후파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황제가 생각을 바꾸어 진지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만 한다면 시라크는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최대한 그에게 알릴 생각이었다.

황제에게 계속해서 실망했지만 그래도 엘 파셔에 새 황제가 군림할 것이란 생각은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새 황제가 되는 것이 바로 자신이라 할지라도 그렇다.

그러나 대답은 없었다. 지스카르는 완전히 자리를 떠났다.

시라크가 마지막으로 내민 기회를 저버렸다.

“이제 더 이상 당신을 찾지 않을 것입니다. 폐하……!”

* * *

금방 겨울이 되어 날씨가 아주 추워졌다. 오늘은 창밖으로 눈이 내리는 것도 보았다. 두꺼운 옷으로 중무장을 한 신관이 오랜만에 노예상회를 방문했다.

수더분한 인상의 신관은 처음 노예상회에 도착했을 때 내 상태를 확인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매일 다양한 상처를 보고 치료해 왔지만 고문을 당한 사람을 보는 건 처음인 모양이었다.

그는 나를 몹시 가엾게 여기면서 정성껏 상처를 돌봐주었다. 딱 돈 받은 만큼만 신성력을 써도 될 텐데 거의 녹초가 될 때까지 신성력을 퍼부어주기도 했다.

“걸을 때 땅기는 느낌은 없고?”

신성력을 너무 많이 사용해서 조금 초췌해진 신관이 내 발을 신중히 살피며 물었다.

“약간이요.”

“그래? 일단 여기까지 하자. 물속에 발을 넣고 자주 주물러주거라.”

“예.”

신관은 물건들을 챙겨서 일어났다. 아서가 치료 과정을 모두 지켜보고 있다가 마지막으로 그를 배웅했다. 신관을 보낸 뒤 아서는 갑자기 되돌아와서 내 팔을 우악스럽게 움켜쥐었다.

“저 신관이 엄청 헌신적인걸. 좋아. 거의 새것처럼 깨끗해졌군. 좋은 값이 나오겠어.”

“…….”

나는 고개를 들어 빤히 아서의 얼굴을 응시했다. 눈이 마주치자 아서는 눈살을 찌푸렸다.

“뭐냐?”

“아무것도요.”

나는 방긋 웃었다. 아서는 못마땅하게 인상을 찡그렸지만 그냥 팔을 놓아주었다.

“이놈이 갈수록 뭔가 건방을 떨기 시작하네. 버릇을 고쳐주고 싶지만 시간이 없어서 안 되겠군. 오늘은 귀한 분이 오실 것이다. 죽기 직전까지 매질당하고 싶지 않으면 얌전히 기다려. 거기! 네 녀석도 마찬가지다!”

발 마사지를 위해 물을 떠오고 있는 크리스티안을 가리키며 아서가 으름장을 놓았다. 아서가 약방을 떠난 뒤 크리스티안은 한참 동안 그가 나간 문을 노려보았다.

“크리스티안, 조금만 더 참자.”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참인가?”

“흠. 완전히 나을 때까지 붙어 있고 싶지만 슬슬 움직일 때가 되긴 했지. 무슨 경매도 곧 시작되려는 것 같더군. 진짜 경매에 부쳐질 수는 없는 일이니.”

첫날 수모를 좀 당하긴 했지만 그 이후로는 별 탈 없이 노예상회에서 시간을 보내며 부상을 많이 회복했다. 특히 마음씨 좋은 신관이 정성을 다해준 덕분에 회복이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그런데 저자들은 왜 저렇게 수배령에 관심이 없는 건가. 머리색이 다르긴 해도 이제 부랑자로 위장하고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아직까지 못 알아볼 수가 있지?”

제이크와 아서의 막돼먹은 작태에 이를 갈던 크리스티안은 아예 우리 정체가 탄로 나서 여길 떠날 수밖에 없게 되길 바라고 있었다. 솔직히 나도 최근 들어선 조금만 수틀려도 싹 다 엎어버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두 놈이 도통 우리가 수배자임을 알아차려주지 않았다.

그때 방문이 열리고 노예 소년이 빗자루와 걸레를 들고 들어왔다. 소년은 청소하다가 이쪽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레아드 형 안녕. 체르도 아저씨도 안녕?”

나는 웃으며 인사를 받아줬고 크리스티안도 눈짓으로 알은척을 해주었다.

노예상회에서 시간을 보낸 지도 거의 한 달 보름쯤 되었다. 그동안 노예상회에서 잡일을 하는 어린 노예와 약간 안면을 트게 되었다. 주근깨가 잔뜩 박힌 소년의 이름은 피터라고 했다. 제법 능숙하게 빗질을 하며 피터가 이야기를 꺼냈다.

“레아드, 내가 들었는데 우리 마을에서 열리는 노예시장이 엄청 유명하대. 멀리서 높으신 분도 많이 온다더라.”

“그래, 나도 들었다. 귀족을 초청해 정기적으로 특별한 경매까지 연다지?”

거기에 출품 예정인 특상품 노예가 바로 나고 말이다. 또한 크리스티안도 비슷한 취급을 받고 경매에 보내질 예정이었다. 얼마 전에 얼굴을 가리는 덥수룩한 머리와 수염을 강제로 정리당했는데 바로 그 직후부터 그렇게 되었다. 크리스티안의 훤한 얼굴을 보고 놈들이 얼마나 놀라던지.

“사람이 많이 와서 나도 얼른 팔렸으면 좋겠다. 재수 좋으면 편한 데로 갈 수도 있대.”

피터가 배시시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노예라지만 자신이 빨리 팔렸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것이 묘한 느낌을 주었다.

“빨리 팔렸으면 좋겠어?”

“응. 나는 여기서 빨리 떠나고 싶어. 아서 님이 조금 무섭거든…….”

구석진 곳을 빗질하기 위해 몸을 살짝 굽히던 피터는 갑자기 인상을 찡그리고 어깨를 굳혔다. 나는 뭔가 꺼림칙한 기분이 들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터를 부축해 일으켜주면서 윗옷을 들춰보았다. 등 전체에 회초리 자국이 가득 남아 있었다.

“상처가 심하군. 피터,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렇게 체벌을 받았지?”

“잘못한 일 같은 건 없어. 주방 아줌마도 항상 내가 일을 잘한다고 칭찬한다고. 그런데 아서 님은 내 주근깨가 마음에 안 든다고 자꾸 매질을 해. 주근깨는 내가 어떻게 할 수도 없는 건데.”

말을 하고 나니 갑자기 서러워졌는지 피터는 눈물을 찔끔 흘렸다. 크리스티안도 멀찍이서 불편한 표정을 했다. 아무리 노예가 물건 취급을 받는다 해도 이유도 없이 폭행하고 가지고 노는 것을 훌륭하다고 생각해 줄 사람은 없다.

“아서 그놈은 쓰레기 중에서도 상급이군.”

나는 우울해하는 피터를 잘 다독여주었다. 그런데 아까 급한 일이 있다며 나간 아서가 생각보다 빨리 되돌아왔다. 그가 문을 반쯤 열고 안을 보더니 또 트집을 잡았다.

“야, 거기에 모여서 뭐 해? 피터 너는 재깍재깍 청소 안 해?”

“아서, 남작님께서 오셨다. 소란 피우지 말고 조용히 해.”

이어서 제이크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아까 말하던 귀빈이 도착한 모양이었다. 밖에서 제이크가 정중하게 손님을 안내하는 소리가 들렸다. 매일 거친 욕을 입에 달고 다니던 자인데 다른 인간인가 싶을 정도로 말투가 반듯했다.

“남작님, 어서 오십시오. 일단 2층 귀빈실로 가시지요.”

“그러세.”

그냥 노예상회에 손님이 온 것뿐이었다. 나는 특별히 관심을 두지 않고 피터에게 마저 일을 보라며 손을 잡아 일으켜주었다. 아서도 조용히 약방의 문을 닫고 나갔다.

그때 제이크가 갑자기 멈춰 서더니 아서가 닫은 방문을 다시 활짝 열었다.

“아! 여기 괜찮은 노예가 있는데 한번 보고 가시죠. 며칠 후 경매에 내려고 준비해 둔 노예인데 그간의 인연도 있고 하니까 남작님께 먼저 보여드리겠습니다. 피안델 후작님께 말씀 좀 잘 전해주십시오.”

“며칠 이곳에 머물며 천천히 골라보려고 하네. 벌써부터 독촉하지 말게나.”

“하하. 절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바룸 남작님. 그냥 한번 보고 가시지요.”

제이크가 친절하게 웃으면서 나와 크리스티안을 가리켰다. 바룸 남작은 피곤한 얼굴로 땅을 보고 있다가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순간 그의 눈이 화등잔처럼 커다래졌다. 얼굴색도 하얗게 질려서 나와 크리스티안을 몇 번씩 번갈아 보았다.

크리스티안이 낮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바룸 남작…….”

나는 바로 일이 파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크리스티안과 바룸 남작은 서로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가만 생각해 보니 나도 바룸 남작이라는 이름을 언젠가 한번 들어본 적이 있었다. 피안델 후작의 유능한 가신으로 지스카르와 등용 문제로 옥신각신한 적이 있었던 그 인물이다.

어쨌거나 이왕 이렇게 된 거, 나는 손가락을 안으로 까닥했다.

쾅!

마법으로 생겨난 돌풍이 방문을 닫았다. 멋대로 문이 닫히자 제이크와 뒤따라 들어온 아서가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문이 닫히는 것을 신호로 크리스티안도 움직였다.

그는 책상 위에 있던 가위를 낚아채 칼날 부분으로 순식간에 제이크의 목을 그었다. 정확히는 그었다기보다 힘으로 칼날을 박아서 목을 뜯어버렸다 정도가 맞을지도 모르겠다. 제이크가 반응하기도 전에 이어서 아서의 얼굴을 한 손에 움켜쥐고 바로 바닥에 처박아버렸다.

크리스티안이 움직이는 동안 나는 피터를 살짝 끌어와 입을 막았다. 소년이 깜짝 놀라 비명이라도 크게 지르면 낭패니까.

“꺼어어!”

제이크는 바람 새는 소리를 내며 자기 목을 움켜쥐었다. 손가락 사이로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어떻게 된 일인지 상황 파악을 하고 싶어서 눈을 크게 뜨고 내 쪽을 쳐다봤다.

“욱!! 우욱!”

아서는 눈만 내놓고 크리스티안의 손아래에서 버둥거리고 있었다. 순간이었는데 제이크는 베고 아서는 살려서 제압만 하다니 정말 마음에 드는 판단력이다.

“어……. 어헉…….”

바룸 남작은 현명하게도 비명을 지르지 않고 사색이 돼서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섣불리 도움을 청하겠다고 소리를 질렀다면 벌써 어디 한군데가 부러져 바닥을 뒹굴어야 했을 것이다.

나는 피터를 살짝 놓아주고 입에 손가락을 댔다. 쉿, 하고 말하자 피터는 눈물이 맺힌 상태에서도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서둘러 구석에 가서 웅크리고 앉았다. 험한 곳에서 눈칫밥 먹고 살아와서 그런지 행동이 빠르다. 아이를 뒤로 보내놓고 바룸 남작 앞으로 걸어갔다.

“네, 네가 어떻게 여기에…….”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된다니 굉장한 우연이군, 바룸 남작.”

내가 입을 열자마자 바룸 남작은 와락 인상을 찡그렸다.

“이런 상황이더라도 최소 말을 깍듯이 해라. 노예 놈!”

백작이 화를 내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나를 황제의 노예로 알고 있는데 보자마자 하대를 하니 사로잡힌 처지라도 그것만은 못 참겠다는 것이다.

그 태도가 매우 가소로워서 웃었다. 가까이에 있는 의자에 걸터앉아서 다시 바룸 남작을 내려다보았다. 웃음이 그치고 살짝 짜증이 치밀었다.

“말을 깍듯이 해야 할 것은 네놈이다. 더 이상 시답잖은 놈들에게 노예 취급 받는 건 신물이 나!”

바룸 남작은 뒤늦게 조금 당혹스러워했다. 내 말의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너, 너는…… 황제 폐하의 노예이다. 아니, 노예를 가장해서 숨어든 자객이다. 자객 같은 것에 내가 깍듯해야 할 이유가 뭐지?”

“네 추측이 전부 틀려먹었으니까.”

나는 짜증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바룸 남작은 뭐라 말을 하지 못하고 애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읍읍!!”

그때 아서가 어떻게든 빠져나오려고 입이 막힌 상태에서도 발버둥을 쳤다. 나는 턱 끝으로 아서를 가리켰다.

“크리스티안, 오른손을 잘라라. 계속 발버둥 치면 다음엔 왼손을 자른다고 해.”

크리스티안은 기다렸다는 듯 내 명령에 따랐다. 손 안에 있는 날붙이가 가위 정도라 이번에도 그걸 사용해야 했다. 그는 가위 날을 힘껏 아서의 오른쪽 손목에 박았다. 크리스티안도 힘 하면 지스카르 못지않다. 칼날을 비틀어 그는 기어코 손목을 아작 내버렸다.

“……!!”

아서가 고통에 미친 듯이 몸부림쳤다.

“다음은 왼손이라고 했을 텐데.”

내가 턱을 괴면서 말하자 아서는 목구멍으로 끄르륵거리면서 억지로 소리를 죽였다.

“크, 크리스티안 경. 저런 놈의 명령에 따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당신 정도 되는 사람이 뭐가 아쉬워서. 당신은 검으로 일가를 이루고도 남을 강력한 기사이고 심지어 울펜가모트의 주인이 될 사람이었습니다. 대체 왜 폐하를 배신한 거란 말입니까! 아니, 너무 갑작스럽지 않습니까?”

바룸 남작이 하얗게 질려서 크리스티안을 향해 외쳤다.

“질문은 내 쪽에서 먼저 하지.”

내가 입을 떼자 바룸 남작은 흠칫하며 이쪽을 다시 돌아보았다.

“피안델 후작은 마크시 공작과 가까운 사이지. 그렇다면 피안델 후작의 가신인 남작도 황후 쪽 인사겠군. 황제가 실정을 거듭하는 지금 황후파에겐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어째서 한가하게 여기서 어슬렁거리고 있지? 유능하기로 소문난 관리분이니 할 일이 많을 것 같다만.”

“그러는 두 사람이야말로 왜 노예상회 같은 곳에 있는 거지?”

바룸 남작이 말을 돌리려고 들기에 나는 살짝 노기를 드러냈다.

“내가 먼저 질문하겠다고 말했다. 물론 그쪽 의문을 적당히 해결해 줄 용의도 있으나, 내가 하는 질문에 대답부터 해.”

“아, 아직 새파랗게 어린놈이…….”

바룸 남작은 분한 듯이 말했다. 하지만 연이어 힐끗거리면서 내 모습을 살폈고 옷소매로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냈다. 고민하던 그는 입을 열었다.

“피안델 각하 앞에서 신중론을 내고 당분간 사태를 관망하자고 말씀 올렸다. 후작께서는 내 의견을 탐탁지 않게 여겼고, 쓸 만한 노예나 하나 사오라고 이곳으로 보내셨지. 한마디로 쫓겨난 셈이다.”

“신중론?”

굉장히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였다. 바룸 남작은 아까보다 더 땀을 흘렸다. 이야기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전보다 더욱 고민하는 모습이다. 하지만 바로 옆의 한 놈은 죽고 한 놈은 손목이 잘린 상황이다. 같은 꼴을 당하기 싫으니 그는 결국 입을 열었다.

“황제는 그렇게 쉽게 몰락할 인물이 아니니 좀 더 신중해야 한다고 말씀드렸다. 황제는 임의로 대신을 잡아 죽였으나, 죽은 자들은 하나같이 권위로 덮어버릴 수도 있는 별 볼 일 없는 하급 귀족이었고 진짜 거물에겐 아직 손도 대지 않았다. 황제가 죽인 시종들과 관리들도 전부 이쪽의 입김이 조금씩 닿아 있던 자들이었지. 황제는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만백성의 존경을 받는 현군이었다. 잠시 실정을 저지를 수는 있겠지. 그런데 빈틈을 보이는 수준을 넘어 너무 급작스럽게 밑바닥을 다 드러냈다. 황제가 가장 신뢰하는 친위대장이 너무 급작스럽게 배반을 했어.”

바룸 남작은 크리스티안을 노려보았다. 크리스티안에게서 뭔가를 읽어내고 싶은 모양이었으나 그는 아서를 제압하는 데 충실해서 큰 소득이 없어 보였다.

나는 얼굴을 어루만지면서 물었다.

“황제가 내 미색에 빠져서 진짜로 미쳐 버린 것일 수도 있잖은가?”

“미색?”

바룸 남작이 눈썹을 휙 추켜세웠다. 그 반응이 좀 재미있어서 웃었다.

“뭘 발끈하는 거냐? 내심 자신 있었는데 내 얼굴이 별로인가?”

“아니…… 그냥 반사적으로……. 확실히 잘난 얼굴이군. 오히려 직접 만나보니 진짜로 사람을 홀릴 만한 독특한 분위기가 있어.”

“흐음?”

나는 다리를 모로 꼬며 흥미롭다는 듯 웃었다. 바룸 남작은 떨리는 눈으로 새삼 내 모습을 더욱 유심하게 살펴보았다. 그의 눈에서 혼란을 살짝 엿보았다.

“황제가 무엇 때문에 내게 집착했는지 살짝 가르쳐 줄까?”

나는 마정석을 손끝에 들고 바룸 남작의 눈앞에 내밀었다. 마정석이 한 번 울면서 손톱 크기만 한 얼음 결정이 허공에 맺혔다. 마정석이 두 번, 세 번 서로 다른 음을 동시에 냈고 얼음 결정은 그 수배로 크기를 키웠다.

사람 몸통만 한 크기의 얼음을 보고 바룸 남작은 희게 질렸다. 하지만 내가 상당한 수준의 마법사인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놀라긴 해도 안색이 좀 바뀌는 수준에서 그쳤다. 3중 영창 마법사가 지휘관급의 고위 마법사지만, 갓 성인이 된 나이에 3중 영창이라는 것이 너무 놀랍지만, 그래도 아예 있을 수 없는 건 아니니까.

나는 한 번 더 시동어를 읊었다. 마정석이 네 번째 새로운 음을 냈다. 일순 얼음 결정이 방 안을 가득 채울 정도로 거대해졌다. 자칫 천장을 뚫을 것 같아, 나는 손바닥으로 결정을 살짝 돌려서 크기를 조절했다.

“속……임수인가?”

바룸 남작이 마법을 보면서 물었다.

“속임수?”

“4중 영창이 가능한 마법사는 없다! 그런 비슷한 정보가 들어왔었지만 당시는 경황이 없었으니까 착각일 거라고…….”

바룸 남작이 조금씩 숨을 거칠게 쉬면서 말했다. 이미 자기 눈으로 보고 똑똑한 머리로 확신을 내린 주제에 현실 부정하기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려오고 있었다. 단순히 상회의 직원인지 누구인지는 몰라도 이쪽으로 접근하는 자가 있었다.

“대체 다중영창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움직이는 거야!”

바룸 남작이 도저히 말이 안 된다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래서? 이게 속임수 같으냐?”

허공을 맴돌던 얼음 결정이 한꺼번에 문과 벽을 덮쳤다. 삼면의 벽과 천장이 단단하게 얼어붙었다. 누군가 이상함을 눈치채고 안으로 들어오려고 해도 당분간은 어려울 것이다.

손을 털고 돌아서면서 바룸 남작을 내려다보았다.

“황제가 나를 가지고 싶어 한다.”

세상 사람이 다 아는 이야기다. 하지만 똑같은 말을 듣고도 지금 바룸 남작은 다른 식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입술을 움찔거렸다. 나는 다시 의자로 돌아가서 털썩 앉았다.

“물론 놈의 수중에 얌전히 떨어질 생각 따윈 추호도 없지만.”

“너는 정체가 뭐냐!!”

“노예이고 자객이라며?”

내가 씹어뱉듯 외치자 바룸 남작은 할 말이 없는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나는 턱을 괴고 손끝으로 얼굴을 톡톡 치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바룸 남작을 만나 뜻밖에 새로운 정보를 많이 얻었다. 지스카르가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황후파의 움직임은 어떤지 어느 정도 예측이 갔다. 내가 생각에 잠긴 동안 크리스티안은 물론이고 바룸 남작까지 숨을 죽이고 기다리고 있었다.

“일단 가장 흥미를 끄는 부분은 이거로군.”

내가 손가락을 꼽으며 입을 열자 바룸 남작은 과하게 흠칫했다. 내 행동 하나하나에 지나치게 집중하고 긴장하고 있었다. 나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바룸 남작, 그대는 황제의 의중을 의심하면서 피안델 후작에게 성급히 움직이지 말고 당분간 사태를 관망하자고 고언을 올렸다. 이에 피안델 후작이 불같이 화를 내며 나름 아끼던 그대를 한지로 내쳐 버렸다. 피안델 후작이 그댈 쫓아내고 황제를 상대로 하고 싶었던 일이 뭘까. 이것은 즉 황후파가 어떤 중대한 결심을 했다는 뜻이 되지 않을까.”

바룸 남작은 티 내지 않으려 했으나 몸을 경직시켰다. 내 눈에 그것이 확실히 보였다.

지금까지 한 번도 대화에 끼어들지 않았던 크리스티안이 즉각 언성을 높였다.

“설마! 감히 반역을 도모한다는 거냐?”

“내가 너무 넘겨짚은 것일 수도 있지만, 분위기가…….”

나는 바룸 남작의 속을 정확히 읽기 위해 빤히 그를 보았다.

황제와 신하 간의 알력다툼은 항상 있는 일이다. 하지만 황제를 아예 끌어내리기 위해 반역을 일으키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성공할 가능성도 작고 여러모로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그런데 지스카르가 미친 짓을 시작하고 몇 달 만에 벌써 반역 이야기가 솔솔 나오고 있었다.

지스카르가 무슨 짓을 했기에 귀족들이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고 생각했을까. 귀족을 명분도 없이 제 마음대로 잡아 죽인다고 했던가.

“하긴 미치광이 황제의 눈먼 칼에 언제 자기 목이 떨어질지 모르는데 피안델 후작도 시간을 지체하기가 싫을 법하다. 힘없는 군소 귀족도 아니고 사병을 잔뜩 거느린 대귀족 체면에 뭐라도 한번 해봐야지.”

일부러 떠보기 위해서 꺼낸 말에 바룸 남작의 얼굴색이 더욱 나빠졌다.

“흠. 실제로 반란이 일어날지는 지켜보면 자연히 알게 될 테고.”

이 정도면 충분히 정보를 얻었다. 나는 의자를 밀어내고 일어섰다. 크리스티안에게도 슬슬 움직일 준비 하라고 눈치를 주었다. 바룸 남작이 더듬거리며 물었다.

“떠, 떠나려는 건가? 나를…… 죽이지 않고?”

“왜 죽인다는 거냐? 나는 딱히 그대에게 악감정이 없다.”

나는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오히려 호감이 있지. 나는 인재를 좋아하거든. 호감에서 한마디 하자면 황후파보다는 그래도 황제가 요 손톱만큼은 나을 것이다. 제도를 떠나 한적한 곳에 왔으니 한번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테지.”

아직 피터를 구석에 그냥 방치해 두었다. 나는 해치지 않는다고 잘 달래서 피터가 가까이 오도록 했다.

여태 아서를 제압하고 있던 크리스티안이 손을 놓고 떨어졌다. 아서는 피투성이가 된 오른쪽 손목을 움켜쥐고 간신히 몸을 일으켜 웅크리고 앉았다. 그는 희게 질려 잠시 제이크가 있는 쪽을 보았다. 제이크는 목이 잘린 채 과다출혈로 한참 전에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아서는 더욱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나는 피터를 데리고 가서 아서 앞에 섰다.

“저놈이 너를 매일 괴롭혔지? 뒷감당은 내가 다 할 테니까 말해봐라. 저놈을 어떻게 해줄까? 흠씬 두들겨줄까?”

내 말에 아서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가 피터를 보고 뭐라고 입을 뻥긋하기 직전이었다.

“개새끼. 죽여버려!”

피터가 바락 소리를 질렀다.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순박한 소년의 얼굴이 분노에 물들었다. 나는 아이의 눈을 가리고 돌아섰다.

“하하. 죽여버리는 건 좀 그렇고 그냥 크게 혼내주마.”

애한테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일을 결정하게 하는 건 정서상 좋지 않다. 나는 웃으면서 피터를 달랬고 뒤쪽으로 크리스티안에게 눈짓을 했다.

크리스티안이 침대에서 적당히 이불을 가져와 아서의 입을 틀어막고 다른 손으로 그의 가슴 한복판에 가위를 박아 넣었다. 아서는 온몸으로 발버둥 치다가 천천히 숨이 넘어갔다.

크리스티안은 아주 더러운 것을 만졌다는 태도로 이불의 남은 부분으로 손을 닦고 그것까지 아서의 머리 위로 퍽 내던졌다. 사실 크리스티안만 그런 게 아니고 나도 쌓인 게 많긴 했다.

“노예를 사러 왔다고 들었다. 이 아이가 착하고 일도 잘하니 꼭 데리고 가주었으면 하는데.”

나는 피터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바룸 남작에게 마지막으로 부탁을 한 가지 했다.

“내가…… 왜 네 말을 들어야 하지?”

“나와는 상관없는 평범한 아이다. 나랑 비슷한 또래라고 혹시 이 몸처럼 뭔가 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하지는 말고.”

나는 피터를 살짝 바룸 남작에게 떠넘겼다. 바룸 남작은 망설였지만 일단 피터를 거둬들이기로 한 것 같았다. 독한 인간은 못 되는 거 같으니 죄 없는 아이를 괴롭히진 않겠지.

바룸 남작과 오랫동안 이야기한 것은 정보를 캐기 위함도 있지만, 다른 중요한 목적도 있었다. 이 몸을 매우 특별한 존재로 여기게 만들 것. 그래서 내가 하는 모든 행동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도록 할 것. 그런 것이 잘 통할지 실제로 한번 확인해 보고 싶었다. 바룸 남작의 얼굴을 보았을 때 소기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된 것 같았다.

빠지직.

나는 마법을 사용해 문을 가로막고 있는 얼음을 부쉈다. 그리고 바룸 남작을 남겨두고 크리스티안과 함께 방을 나왔다. 미리 준비해 둔 외투 등 물품을 들고 감시가 소홀한 옆문을 통해 유유히 노예상회를 벗어났다. 마음만 먹으면 이런 곳을 벗어나는 일이야 식은 죽 먹기보다 쉽다.

나는 크게 기지개를 켰다. 오랜만에 바깥바람을 쐬니 기분이 아주 상쾌했다. 그러나 겨울바람이 많이 차기도 해서 다시 외투를 제대로 여몄다.

크리스티안과 나는 마을을 벗어나 다시 오크가 득시글거리는 근처 산으로 향했다. 산 중턱 즈음에 크리스티안의 친위대 제복이나 검 등이 숨겨져 있었다.

숨겨두었던 물건을 모두 챙기고 다시 움직이려 했을 때였다. 뒤를 따르던 크리스티안이 갑자기 멈추어 섰다.

“뭐지?”

“처음부터 스트라스로 돌아갈 생각이 아니었지? 레이, 너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는 건가?”

“스트라스에 한번 가볼까 운만 뗐지. 내가 언제 거기로 가겠다더냐?”

“레이!!”

“너의 도움에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다. 하지만 이 몸이 어째서 너에게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해 주어야 하느냐? 네놈이 나의 무엇이기에?”

크리스티안은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불쾌하게 그를 보았다.

크리스티안이 내게 사적인 감정이 있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그는 내게 손끝 하나도 대지 못했고 실수로 어디에 닿기만 해도 굉장히 송구스러워했다. 나를 매우 공경해서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으나, 나는 직감적으로 그렇지 않다는 데에 걸었다. 내 멋대로 크리스티안의 의중을 확신했다. 내가 지스카르의 것이기에 신하인 크리스티안은 감히 나를 욕심을 낼 수가 없는 것이다.

지스카르를 배신한 것치고 크리스티안은 황제의 실정에 너무 예민하게 반응했다. 반란이 일어났다고 하자 즉시 격한 분노에 휩싸였다.

내 생각이 그냥 추측에 불과하다면, 지금 이 의심을 확인해 볼 방법이 있다.

“크리스티안. 나를 위해서 지스카르를 죽일 수 있느냐? 내가 명령했을 때 놈의 심장에 칼을 꽂을 수 있냐고 지금 묻고 있다.”

“그런 것은…… 가능하지 않다…….”

크리스티안은 난감한 태도였으나 분명하게 불가하다고 대답했다. 그는 내가 하는 다른 명령에 모두 따르겠지만, 지스카르의 신변에 해를 가하는 명령만큼은 결코 따르지 않을 것이다. 크리스티안은 황제에게 충성을 서약한 기사였고 아직도 그 서약을 그대로 지키고 있다.

나는 거추장스러운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물었다.

“네가 여전히 지스카르에게 충성하고 있다는 것은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로서도 추측하기 힘든 것이 있더군. 어째서 나를 데리고 도망쳤지? 마치 지스카르를 배반한 것처럼 말이다.”

“…….”

“말하기 싫다면 강요하지 않겠다. 내가 명령한다고 네가 지스카르와 관련된 말을 한 톨이라도 하겠는가.”

나는 바로 돌아섰다. 그때 등 뒤로 크리스티안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레브노아드 반 스트라스를 알고 있다. 그는 대륙 최초로 4중 영창을 이뤄낸 자로 단신으로 전장을 압도하던 불세출 영웅이었다. 그가 죽은 지 십 년도 넘어 전부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무의식이 여전히 그를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레브노아드 반 스트라스, 네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던 것일 테지. 한데 그 꼬락서니는 뭐였지? 그는 비참하게 쓰러져 자비나 구걸하는 인간이 아니란 말이다.”

“적국의 황태자에게 그렇게 관심이 많을 줄 미처 몰랐군.”

“관심이 많을 수밖에. 폐하께서……!”

크리스티안은 불현듯 말을 멈추고 고개를 저었다. 그는 다시 이야기를 이었다.

“……폐하께서는……. 그분은 항상 단호하고 결단력이 있는 분이었다. 너를 죽일 수 없다고 결정했다면, 모든 자를 등지는 한이 있더라도 적어도 너 하나만큼은 철저하게 지켰어야 했다. 한데 그런 어중간한 태도라니. 내가 모든 것을 걸었던 주군은 그렇게 어리석은 분이 아니었어.”

“나를 데리고 도망친 이유가 뭐냐고 묻고 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판단했다. 네가 그런 꼴로 방치되어 있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폐하께서 나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설마하니 다 꼴 보기 싫어서 그냥 판을 깨버리고 싶었다는 건 아닐 테고.”

나는 허리에 손을 얹고 핵심을 말해보라고 독촉했다.

“……폐하께서는 잠시 혼란하신 것뿐이다. 그것이 전부 네 탓이라고는 말하지 않겠다. 다만 폐하께서 이성을 되찾으실 수 있도록 잠시 그분의 곁을 떠나 있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오래 지나지 않아 폐하께서 문제 되는 일을 모두 해결하고 다시 너를 찾으실 것이다. 그때까지 내 검으로 너를 지킬 것이다.”

크리스티안은 충직한 황제의 기사 그 표본과도 같았다. 그의 사고는 완벽하게 지스카르를 중심으로 편향되어 있었다. 내 입장에선 웃기지도 않는 소리다. 누구 마음대로 놈이 찾을 때까지 나를 지킨다는 거냐? 상처 없이 잘 보존했다가 때가 되면 갖다 바치겠다는 뜻과 같지 않나.

나는 실소를 던지며 말했다.

“네가 직접 나를 데리고 나올 것까진 없지 않았나?”

“너의 죽음을 원하는 자가 얼마나 많은지 아는가? 던필마저 너를 죽이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또한 대대적인 추적을 따돌리고 너를 지킬 수 있을 만큼 실력이 있는 자가 달리 누가 있지?”

“주군을 생각하는 마음이 아주 지극하시군.”

크리스티안은 애초부터 내 사람이 아니라 지스카르의 최측근이고 친위기사였다. 그러니 내 앞에서 감히 지스카르를 우선했다고 지적하는 건 전혀 합당하지 않은 소리다. 다만 크리스티안은 무척 탐나는 인물이기에, 그를 내 사람으로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이 다소간의 불만으로 남았다.

시시한 이야기는 그쯤에서 그만두었다.

황혼이 지고 있었다. 나는 붉게 번져가는 하늘을 보며 말했다.

“마음을 약하게 만드는 사람들로부터 냉정해질 수 없다면 그때는 소중한 이들을 지키기 위해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한데 나는 지스카르의 옷자락에 매달려 인정에 호소했지. 경멸스럽게도.”

빠드득, 이를 사리물었다.

시궁창에 처박혀도 이 자긍심만큼은 결코 모욕당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 나는 스스로 자긍심을 시궁창에 처박았다.

“마물 사냥에 따라나섰던 날. 비로소 마정석을 손에 넣은 그때, 나는 훨씬 더 좋은 선택지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 마정석만 챙긴 다음 천천히 방법을 모색해도 좋았고, 지스카르와 거래를 할 수도 있었을지도 모르지. 한데 힘을 되찾았다고 보란 듯이 모조리 뒤엎어놓았다. 어린애처럼 잘난 척하면서 수백 명이 보는 앞에서 힘자랑을 한 것이다. 하! 이미 돌이킬 수도 없도록 난장판을 만든 다음 눈물로 애걸복걸하다니.”

나는 신랄하게 자신을 비난했다. 이 비난은 비단 내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감상에 빠져 어리석은 짓을 한 것은 지스카르도 마찬가지다.

“이 과오는 청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도, 그리고 지스카르도.”

* * *

유난히 길었던 겨울이 끝나가고 있었다. 계절이 바뀌었음에도 지스카르 황제는 계속해서 학살과 폭정을 일삼았다. 그는 단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시종과 시녀, 황후파 귀족들을 무자비하게 베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피비린내 나는 횡행은 나아지기는커녕 더욱 심해져 갔다.

노예 출신 남첩에게 눈이 멀어버린 황제는 총애하던 자가 친위기사와 함께 도망가 버리자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렸다. 뭇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던 엘 파셔의 황제는 그렇게 미쳐 버리고 말았다.

더 이상 황제를 두둔하는 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신하 중 반은 황제의 변화를 조롱했고, 남은 반은 황제의 몰락을 눈물로 슬퍼했다. 중론이 완전히 황후파로 기울었다.

던필은 그 날도 황제궁을 찾았다. 지스카르를 설득하기 위해서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황제궁을 찾았다. 매일 절망을 보았고, 오늘 또 절망을 볼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포기할 수는 없었다.

창밖을 내다보는데 하늘이 갑자기 일그러져 보였다. 피로가 심해서 눈앞이 침침했다. 던필은 눈꺼풀을 꾹꾹 눌렀다. 피곤해서 멀쩡한 세상이 잠깐 일그러져 보였던 것처럼, 눈앞의 현실도 찰나의 꿈일 뿐이고 실은 옛날처럼 잘 돌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황제가 무너지면 엘 파셔는 틀림없이 기울 것이다. 그러나 지스카르 황제는 더 이상 그런 일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황제는 말할 것도 없고 크리스티안도 마찬가지였다.

던필은 두 사람을 단 한 치도 이해할 수 없었다. 날 때부터 부여받은 무거운 책무를, 그 목숨보다도 중한 의무를 어찌 잊는단 말인가. 사랑이라는 이기적인 감정 때문에 이 나라를 벼랑으로 몰아넣고 정말 웃을 수가 있는가?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문득 던필은 시끄러운 소음을 듣고 다시 밖을 보았다. 순간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수백이 넘는 병사가 황제궁을 포위하고 있었다. 금방 입구가 뚫렸고 병사들이 궁내로 진입했다.

반란.

던필은 생각보다 놀라지 않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황제가 멋대로 귀족들을 베기 시작한 뒤로부터 그들의 분노가 극에 달한 상황이었다. 반역은 벌써 오래전부터 예견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즉시 계단을 통해 아래로 내려가니 황제궁은 허무할 만큼 쉽게 제압되고 있었다. 황제궁을 수호하는 황제의 친위대가 제아무리 정예 중의 정예라 해도 적의 수가 이 정도로 많다면 그들로서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전투다운 전투도 없이 상황이 종료될 모양이다.

그 와중에 던필은 한 가지 놀라운 광경을 보았다. 시라크 황태자가 선두에 서서 제법 꼿꼿한 음성으로 외쳤다.

“먼저 폐하를 찾아라. 폐하께서는 심신이 불편하시니 조심스럽게 모셔야 한다. 절대 무례를 범하지 마라!”

“황태자는 여기가 어디라고 직접 나선 거야. 그래도 많이 크긴 했군.”

던필은 실소를 터뜨렸다.

시라크 황태자의 말대로 현 황제는 심신이 불편하니 조용한 곳에 유폐될 것이다. 그리고 두 번 다시 하늘을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결국 시라크 황태자가 엘 파셔의 새 황제가 되는가. 이제 한 뼘 정도 성장한 황태자가 노회한 마크시 공작과 외척의 간섭을 뿌리치고 엘 파셔를 제대로 이끌어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이제는 그 정도가 마지막으로 남은 희망인 모양이었다.

던필은 검을 뽑아 들었다. 솔직히 반쯤 체념한 상태지만 그래도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한 몸으로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못 해도 반군의 목 서른 개 정도는 잘라놓고 죽어야 이름값 했단 소리를 듣겠지.

“적이다!”

그때 다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반란군이 갑자기 등장한 근위대 기사들에게 공격받고 있었다. 던필은 이상한 느낌을 받고 다시 바깥 상황을 확인했다.

황제궁을 포위하고 있던 반란군도 교전 중이었다. 황실 근위대가 반란군을 척살하기 위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반란을 예측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면 이렇게 빨리 근위대를 무장시켜서 불러올 수 없다.

“우아악! 어떻게 된 거야!”

시라크는 황제궁 너무 깊은 곳까지 들어왔다가 순식간에 역으로 포위되어 버렸다. 그는 사색이 돼서 비명을 질렀다.

“시라크 황태자! 감히 반역을 주도하다니, 그 대가를 치를 각오는 하고 여기까지 왔는가!”

커다란 목소리가 복도를 쩌렁쩌렁 울렸다. 울펜가모트 공작이 황제궁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의 뒤로 오십이 넘는 울펜가모트의 기사가 따랐다.

“울펜가모트 공작?”

던필은 아직 현실감이 없어 인상을 썼다. 그는 황명으로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었나? 그러나 공작은 지금 황제궁에 있었고 가문의 기사를 이끌고 반란군을 진압하고 있었다.

던필은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난간을 넘었다. 그대로 1층 복도로 뛰어내려 근위대 사이로 합류했다. 수 분 만에 반란군을 여섯 이상 베고 그는 다시 울펜가모트 공작을 보았다. 거리가 가까워 울펜가모트 공작도 던필을 발견했다.

“던필.”

“공작님! 대체?”

“폐하의 명령이셨네. 사람들 눈을 피해서 역도들을 초멸할 준비를 했지.”

“……!”

황제는 울펜가모트 공작을 바로 처형하지 않고 죄를 지은 친아들을 직접 찢어 죽이라는 초유의 끔찍한 명령을 내린 다음, 그대로 지하 감옥에 가둬버렸다. 울펜가모트 공작가문도 가주가 수감된 직후부터 황명으로 연금 상태에 들어갔다. 덕분에 울펜가모트는 멸문이 거의 확실시되며 지금까지 황후파나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있었다.

그사이 울펜가모트 공작은 황제의 명에 따라 병력을 준비했다. 공작가문은 세간에 연금 상태라고 알려져 있었으나 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황제의 밀명을 수행하고 있었다.

“으아악!”

그때 2층 복도에서 수십의 반란군이 비명을 지르며 튀어나왔다. 지스카르 황제가 오라 소드를 들고 모습을 드러냈다. 백색 오라가 성난 듯 사납게 타올랐고 좁은 복도에 마구 엉겨 있는 반란군이 단칼에 서넛씩 썰려 나갔다.

제아무리 죽음을 각오하고 반란에 동참했다 해도 앞사람이 짚단 잘리듯 죽어나가는데 당당하게 자리를 지킬 자는 많지 않았다. 그들은 뒤로 도망치다가 계단 아래로 와르르 굴러떨어졌다.

퍼렇게 질린 병사를 발끝 아래로 내려다보며 지스카르 황제가 계단 위에 섰다. 황제가 미쳤다는 이야기가 온 나라 안에 자자하게 퍼져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는 과거와 한 터럭도 다르지 않았다. 예로부터 황제의 압도적인 무위에 누구도 감히 그의 권위를 넘보고 나서는 자가 없었다. 그는 여전히 세상 사람들이 추앙하던 무신 그 자체였다.

“반역도는 단 한 놈도 짐의 궁에서 살아나갈 생각을 마라!!”

황제가 검을 들어 반란군을 가리키며 벽력같이 일갈했다.

그 딱 한 마디에 근위대와 울펜가모트 기사들의 사기가 찌를 듯이 올랐다. 그들은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지르며 반란군을 공격했다.

반면 반란군은 그러지 않아도 예상 밖의 병력을 만나 당황하던 참이었다. 그 와중에 황제가 직접 검을 들고 나타나니 밑바닥까지 사기가 떨어졌다. 황제를 따르는 병사가 속속 추가로 도착하면서 반란군은 어느덧 머릿수에서도 밀리기 시작했다.

“폐하!”

던필은 반란군을 베며 황제에게 다가갔다. 그는 황제의 친위기사이니 황제의 지척에 있어야 했다. 가까이 도착하니 놀랍게도 그랜트 공작이 황제의 곁에 있었다.

“아버지?”

“던필, 뭘 꾸물대다 이제 나타난 거냐. 변고의 낌새가 있자마자 네가 가장 먼저 폐하의 곁으로 달려왔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

“맞는 말씀이긴 합니다만.”

던필은 울고 싶은 심정으로 원망스럽게 지스카르를 보았다.

“반역도 놈들이 방심하도록 일부러 저까지 속이셨으면서 그런 지적은 조금 억울합니다.”

지스카르는 눈살을 찌푸렸다.

“던필. 너는 항상 크리스티안과 관련되면 짐을 의심부터 하는군.”

던필은 즉시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사실 백 번 속았어도 좋았다. 백 번 그 이상도 속아주겠다. 황제가 여전히 건재한 것이 사실이라면 진심으로 이 목도 내놓을 수 있었다.

“폐하! 불충한 신하를 죽여주십시오!”

“일어나서 호위 업무나 똑바로 하라.”

던필은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홀랑 일어났다. 그랜트 공작은 자기 아들의 얄팍한 행태에 실소했으나 이내 추가 병력을 지휘하기 위해 밑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제게는 귀띔을 해주시는 것이 좋았을 것 같습니다.”

백 번 속아도 좋다고 해놓고 그랜트 공작이 내려가자마자 던필은 또 한마디 하고 말았다. 지스카르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

“네가 진심으로 낙담하지 않으면 곤란하다. 황후파의 눈을 가리는데 확실히 네 덕을 많이 보았다.”

“맙소사.”

던필은 치를 떨었다. 그러나 검을 쥔 손이 최근 들어 가장 가벼웠다. 반란이 수포로 돌아갈 것 같자 마지막 수단으로 황제만이라도 시해하려고 반란군이 한꺼번에 모여들었다.

던필은 더 이상 황제가 친히 나설 일이 없도록 앞으로 나아가 반역도를 도륙했다.

“못 해도 반군의 목 쉰 개는 자르고, 죽지도 않는 걸로 한번 해보자고!”

정확히 급소만 노려 휙휙 베어 넘기는 것이 그의 전투 방식이었다. 던필의 검은 대인전투에서 가장 빛을 발했다.

황제가 일갈한 대로 반란군은 한 명도 황제궁에서 살아나가지 못했다. 겨우 시라크 황태자만이 살아남아 사로잡혔다. 기사들에게 끌려나가는 동안 그는 넋이 빠진 얼굴이었다.

상황이 정리되자마자 그랜드 공작과 울펜가모트 공작이 즉각 병사를 모아 반역도들을 척살하기 위해 떠났다. 마크시 공작을 비롯하여 황후파 귀족의 위치를 일찌감치 파악해 두고 있었다. 이제 피바람이 불 시간이었다.

“그러니까 황후파를 일소하기 위해서 일부러 연기를 하신 겁니까?”

“연기라…….”

던필의 물음에 지스카르는 실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레이를 두고 이성을 잃어 실제로 말도 안 되는 짓을 몇 달이나 계속했다. 상황을 수습해 보고자 했을 때는 더 이상 돌이키지도 못할 만큼 사태가 심각해져서 그는 차라리 진짜 미쳐 버린 것으로 하고 위협적으로 황후파 귀족을 몰아세웠다.

반역만큼 거슬리는 놈들을 일소하기에 좋은 명분도 없다. 자기 목숨이 아까웠던 황후파가 예상대로 움직여준 덕분에 그는 황후파를 모조리 숙청할 수 있었다. 그러나 거듭된 실책으로 이미 국정이 피폐해지고 황제는 인망을 크게 잃었다.

물론 다소 위신이 흔들렸다 해도 황제는 스스로가 강력한 무력의 소유자이고, 여전히 자기 세력 및 병권을 온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이성을 잃는 일만 없다면 설혹 다시 반역이 일어난다 해도 충분히 이를 진압하고 국정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만족스러운 마무리가 아니다. 도처에 불만의 씨를 남긴 채로 끝내는 것은 그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불만 세력이 튀어나왔을 때 이를 수습할 준비를 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역심을 품을 환경을 만들어주지 말아야 했다. 이를 위해서 황제는 실망한 대신들에게 충분한 해답을 주고 과거의 권위를 되찾을 필요가 있었다.

근본적인 해결책. 그것이 지스카르가 원하는 것이다.

“한시라도 빨리 레이를 찾아야 한다. 앞서 내렸던 수배령은 무시하고, 그를 무사히 짐의 앞으로 데려와라. 서둘러라!”

황제의 명령이 떨어졌다.

던필은 아직도 황제가 레이에게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불쑥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황명에 반발하지 않았다. 주군을 의심하는 것을 한 번으로 족했다. 던필을 포함해 모든 기사가 일제히 무릎을 꿇고 황제의 지엄한 명령을 받들었다.

다음 권에서 계속

두 개의 제국, 제국의 노예 2권

지은이: 레브노아드

발행처: 대원씨아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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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n of Destiny, MoD(모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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