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6/43)

15.

거대한 성벽이 침입자를 거부하며 길목을 가로막고 있었다. 에브라함 요새는 50년 전 증축된 이래 단 한 차례도 외부의 침공을 허락하지 않고 굳건히 그 자리를 지켜왔다. 지스카르 황제는 허리에 찬 검신 위에 손을 얹고 철벽의 요새를 응시하고 있었다. 던필이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폐하, 요새 앞에 진을 치고 시간만 보낸 지가 벌써 사흘째입니다. 폐하께서 겁을 집어먹은 것은 아니냐고 수군대는 자들까지 생기고 있습니다. 슬슬 움직여야 할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지스카르 황제가 던필을 보며 노기를 드러냈다.

“군기가 풀어질 대로 풀어졌군. 짐이 겁을 집어먹었다 했느냐?”

근처에 있다가 황제의 서슬 퍼런 음성을 들은 장교들이 몸을 경직시켰다. 그들은 서둘러 병사들의 기강을 다잡기 위해 흩어졌다.

던필은 쓴웃음을 지었다. 황제를 설득하는 데는 실패했으나 군기를 잡는 일은 성공했으니 오늘은 이 정도에서 만족해야 할까.

“외람되오나…….”

그때 바룸 남작이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그는 제도에서 반란이 일어나기 직전에 피안델 후작을 배반하고 지스카르 황제의 신하가 되었다. 남작은 가능한 한 깊이 머리를 조아리고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는 겁을 먹은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기다리고 계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폐하, 약속한 보름날로부터 벌써 사흘이나 지났습니다. ‘그’는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염없이 기다리실 것이 아니라 약속하신 대로 빈첸시오 성의 노예들을 끌어내어 처형하십시오. 제게 맡겨주시면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짐이 그대에게 발언권을 주었던가?”

“주제넘은 행동인 줄은 알고 있지만 부디 들어주십시오. 위협만 하고 실행을 하지 않으시니 그가 폐하의 말씀을 귀담아듣지 않는 것입니다. 먼저 양친 중 하나를 처형하십시오. 폐하께서 진심이라는 것을 알려주면 그도 움직일 것입니다. 물론 그는 정말로 양친의 생사에 관심이 없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가능성은 반반입니다. 반절의 가능성에 걸어보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바룸 남작은 황제의 냉엄한 분위기에 몹시 주눅이 든 상태였다. 그러나 손수건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가며 열심히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지스카르는 먼 곳으로 시선을 던진 채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남작의 마지막 질문에 그는 실소를 지었다.

“남아 있는 가능성마저 없애버릴 최악의 수로군. 녀석은 제 부모를 살해한 자와 살갑게 지낼 만큼 속 편한 녀석이 아니다.”

“대군을 사흘이나 방치해 놓고 그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도저히 그를 포기할 수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최악의 수라도 던져서 결착을 보십시오. 어찌 이렇게 우유부단하게 행동하십니까!”

바룸 남작은 감히 황제를 나무랐다. 두려움을 몰라서가 아니라, 죽음을 각오하고 황제를 일깨우려고 한 것이다. 지스카르 황제는 그의 무례를 따져서 처벌할 생각이 없었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진심으로 충언하려는 신하는 쉽게 얻기 힘들다.

“레이가 어째서 그대를 등용하지 않느냐고 따지더군. 틀림없이 쓸 만한 자일 거라고 단언하였는데, 그 말이 옳구나.”

바룸 남작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노예상회에서 겨우 한 번 만났을 뿐인데 어찌 자신을 등용하라고 권했단 말인가.

“그래. 레이가 그리 말했다. 그가 얼마나 특별한지 직접 보지 않으면 누구도 믿지 못할 것이다.”

지스카르는 레이의 이름을 입에 올리며 칼자루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분란의 싹을 깨끗하게 없애기 위해서 레이의 힘이 필요했다. 그러나 약속한 보름이 훨씬 지났는데도 레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사실상 협력을 거부한 것이다.

이제 사흘이 지나고 곧 나흘째가 될 것이다. 기약도 없이 계속 이렇게 있을 수는 없었다. 결단을 내려야 할 시기였다. 레이에 대한 미련을 깨끗하게 털어버리고 엘 파셔의 황제로서 정국을 안정시키는 것이 바로 지금 그가 해야 할 일이다.

우드득.

그는 손아귀에 더욱 힘을 주었다. 견고하게 만들어진 칼자루 끝의 폼멜이 으스러졌다. 강철이 맨손에서 부서져 버린 것이다. 일개 관리에 불과했던 바룸 남작은 황제의 어마어마한 힘을 보고 하얗게 질려버렸다. 그때 지스카르가 입을 열었다.

“짐은 군세를 이끌고 에브라함 요새를 공격해야 한다. 그런데 이 군세로 레이를 잡으러 가겠다고 한다면 남작은 어찌하겠는가?”

“에, 에. 예?”

바룸 남작은 너무 놀라서 제대로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남작은 여태 황제가 이성을 잃은 척 연기를 해왔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직접 황제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 몹시 당혹스러웠다. 황제는 정말 그자에게 미쳐 버린 건가? 황제가 정말로 정신을 놓아버린다면 엘 파셔는 어떻게 되는 거지?

갑자기 지스카르 황제가 성큼 저 앞으로 걸어갔다. 바룸 남작은 흠칫거리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지스카르는 바룸 남작과 대화하던 중이라는 것도 잊고 걸었다. 그의 눈에는 지금 오로지 한 가지 광경밖에 보이지 않았다. 레이가 크리스티안을 대동하고 태평하게 황제군 진영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지스카르를 보고 싱긋 웃으며 손까지 흔들어 보였다.

스르릉.

검이 스산한 소리를 내며 뽑혀 나왔다. 지스카르는 검을 뽑아 들고 휘적휘적 걸었다. 검에서 흉흉한 기운이 물씬 흘러나왔다. 레이는 손을 흔들다 말고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크리스티안을 보면서 물었다.

“저 녀석 지금 뭐 하는 거냐?”

“지금 그런 말을 할 때가…….”

크리스티안이 서둘러 앞을 보라고 말했다. 지스카르가 눈을 몇 번 깜짝이는 사이 수 미터의 거리를 좁혔고 바로 코앞까지 들이닥쳐 검을 휘둘렀다.

순간 레이의 발 앞으로 반투명한 막이 세워졌다. 3중 영창으로 만들어진 방어 마법이 지스카르의 검을 가로막았다. 레이는 허리에 손을 얹고 방어막 너머로 지스카르를 오만하게 마주 보았다.

쩌억!

그러나 얼마 버티지 못하고 방어막에 거미줄 같은 금이 갔다. 소드 마스터의 오라 소드를 막을 수 있는 마법은 적어도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레이는 남은 주문으로 돌풍을 일으켜 다리부터 일순 미끄러지듯 옆으로 몸을 뺐다. 바로 다음 오라 소드가 그가 서 있던 자리에 내리꽂혔고 2미터 깊이의 고랑이 패었다.

옆으로 빠져나온 레이는 땅을 짚고 균형을 잡으며 주문 두 개를 운용해 지스카르를 공격했다. 지스카르는 오라 소드를 크게 횡으로 휘둘러 양쪽에서 날아오는 화염 마법을 일검에 베어버렸다. 그 행동이 찰나의 벼락보다 빨랐다. 마법을 베었다 싶은 순간에 그는 이미 공세로 전환하여 땅을 짚고 있는 레이에게 오라 소드를 겨누고 있었다.

오라 소드가 번쩍하며 떨어지는 동시에 레이가 딛고 있던 바닥이 치솟았다. 레이는 훌쩍 뒤로 뛰었다. 간단하게 소드 마스터의 공격 범위 밖으로 벗어나면서 두 발로 땅을 밟았다. 레이는 아주 가소롭다는 얼굴로 이를 드러냈다.

“마정석이 이 손 안에 있는데 감히 이 몸에게 덤벼?”

우우우웅!

마정석이 네 번 동시에 울었다. 레이의 바로 앞에 불기운이 맺혔다. 엄청난 고열로 인해 주변이 일그러져 보일 정도였다.

“폐하!”

기사들이 달려오고 있었지만 레이는 물론 지스카르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그들은 두 사람을 제대로 쫓아오지도 못할 것이다.

지스카르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레이의 마법을 올려다보았다. 높게 타오르는 불길이 무척 위협적이고 아름다웠다. 정식 서품을 받은 기사들조차 황제의 검을 제대로 쫓지 못하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레이는 그가 전력을 다한 연격을 쉽게 피해버릴 뿐 아니라 손끝으로 불길을 불러들여 역으로 그의 목숨을 위협하고 있었다. 그의 압도적인 화려함에 시선을 빼앗기는 것은 전혀 이상할 일이 아니었다.

지스카르는 갑자기 전부 포기한 것처럼 검을 바닥에 던졌다. 그리고 성큼 레이를 향해 걸어갔다. 화염 마법이 이글대며 앞을 가로막고 있는데도 피하거나 벨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레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저놈이 맛이 가버린 게 아닌지 의심되었다. 지스카르를 이대로 죽여버릴 수도 있었지만 레이는 어쩔 수 없이 마법을 거두었다. 당장 갈아먹어도 시원찮을 놈이나, 그래도 진짜로 죽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마법은 거두어졌지만 미처 없애지 못한 잔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 지스카르가 손이 데는 건 상관도 하지 않고 불길 사이로 손을 뻗어 레이를 붙잡았다.

그사이 잔불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는 한 번에 레이를 끌어안았다. 두 팔로 온전히 레이를 안는 순간 전신에 전율이 일었다. 잠시간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손 안의 감각이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레이를 보자마자 할 일이 많았는데 더 이상 그 무엇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는 간신히 한마디를 되뇌었다.

“레이…….”

안기자마자 지스카르를 밀어버릴 준비를 하던 레이는 자기를 부르는 음성에 잠시 멈칫했다. 그는 머리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완전히 품에 안겨 있는 상태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안 봐도 지스카르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어쩌겠는가. 레이는 한숨을 토하며 잠시 이대로 기다려주었다.

기사들이 황제를 호위하기 위해 늦게 도착했다. 그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가늠하지 못하고 근처에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레이는 그들의 시선이 아주 따갑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스카르가 쉽게 자신을 놔줄 것 같지 않았다. 레이는 다 체념하고 아예 그의 등을 마주 안았다.

“그래그래. 그렇게 내가 보고 싶더냐. 아주 좋아 죽는구나.”

“…….”

어렵게 힘으로 밀어버리는 것보다 이것이 훨씬 더 효과가 좋았다. 지스카르가 조금 떨어졌다. 그의 표정이 애매했다. 그것을 보고 레이는 하 실소를 터뜨렸다.

“눈초리가 불손하군. 좋은 거 맞잖아?”

“정말 여전하군……. 레이.”

“너도 여전하구나. 엘 지스카르 파셔.”

두 사람은 각자의 이름을 부르며 잠시 서로를 마주 보았다. 한차례 시선을 교환한 뒤 레이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그는 잠시 앞쪽의 군영을 살핀 다음 질문을 했다.

“부모님은 어디에 계시지?”

지스카르는 새삼스럽게 레이를 바라보았다. 이내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약속한 보름은 벌써 전에 지났다. 한데 그들이 살아 있길 기대한단 말인가?”

지스카르를 마주 보며 레이도 싱긋 웃었다. 그리고 갑자기 그의 배에 주먹을 꽂았다. 퍽 하고 제대로 주먹이 꽂혔다. 맨주먹으로 칠 것이라고 생각지도 못했던 탓에 지스카르는 빤한 주먹을 막지 못했다. 친위기사들이 깜짝 놀라 검에 손을 올렸다.

“부모님을 죽이니 살리니 그따위 소리 한 번만 더 지껄였다간 바로 그 자리에서 네놈의 목을 비틀어버릴 것이다. 한 치의 거짓 없는 진심이니 새겨듣는 게 좋을 거야.”

레이는 주먹을 탁 털고 경고했다.

“…….”

지스카르는 한숨을 쉬며 바로 섰다.

“들어가서 이야기하지.”

그는 고개를 돌려 떨어져 있는 크리스티안에게도 눈짓을 했다. 크리스티안은 허리를 굽혀 인사한 뒤 뒤를 따랐다.

전국에 수배령까지 내려졌던 두 죄인이 당당하게 병영 안으로 들어왔다. 병사들은 묘한 눈으로 그들을 쳐다보며 가끔 수군거렸다. 자수하기 위해 돌아왔을 가능성도 있으나 분위기로 볼 때 그게 아닌 것 같았다. 황제도 그들을 포박하라고 명하지 않았다. 사실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황제의 태도였다.

“폐하, 저 노예를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말씀해 주십시오!”

지휘관 중 하나인 브란덴 백작이 도저히 참다못해 레이를 가리키며 외쳤다. 자신을 삿대질하는 손가락을 보며 레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 손 치워라. 손목째로 부러뜨려버리기 전에.”

브란덴 백작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레이를 쳐다봤다.

“뭐, 뭐라고? 지금 노예 따위가 뭐라고 지껄인 거냐?”

“시답잖은 놈들에게 다시 노예 취급 받으려고 돌아온 것이 아니다. 내가 언제까지 이런 곳에 서 있어야 하지?”

레이가 불쾌하게 지스카르를 보며 물었다.

“그와 할 이야기가 있다. 모두 물러나라!”

황제가 엄중한 음성으로 명령했고 브란덴 백작은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황제는 먼저 레이를 막사 안으로 들여보내고 크리스티안에겐 기다리라고 말을 남겼다.

크리스티안은 명령대로 막사 앞을 지켰다. 사람들은 크리스티안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황제의 첩을 데리고 도망친 수치스러운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당당한 기도를 보니 전혀 그럴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크리스!”

던필이 뒤늦게 뛰어나왔다. 크리스티안은 오랜만에 만난 친우에게 눈짓으로 인사를 했다. 그 모습을 보고 던필은 애꿎은 제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당장이라도 그를 끌어안고 해후를 만끽하고 싶었으나 꾹 눌러 참았다. 앞으로도 대화를 나눌 시간은 많으리라.

* * *

막사 안으로 들어온 뒤 지스카르는 먼저 자리에 앉았다. 반면 나는 막사 안을 잠시 걸었다. 내부가 상당히 넓었다. 내부를 한 바퀴 돌아본 뒤 용건을 꺼냈다.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할까. 그러나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한 가지 요구 조건이 있다. 이를 수락하지 않으면 나는 어떠한 거래도 하지 않을 것이다.”

“먼저 이리 와서 앉아라.”

지스카르가 건너편 의자를 가리켰다. 나는 그 말을 무시했다. 놈의 입에서 대답을 듣기 전까진 앉고 싶은 생각조차 없었다.

“모든 위험으로부터 내 부모님을 보호해라. 그 일을 행하는 데 어떠한 대가도 바라지 마라. 너는 무조건 그 일을 행해야 한다. 내가 네 곁을 떠나버린다고 해도, 설혹 너의 적이 된다고 해도. 너는 조건 없이 그분들을 보호해야 한다.”

지스카르는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너는 여전히 양친의 생사에 집착하고 있다. 그걸 확인하게 된 이상, 너를 붙잡아놓기 위해 그 카드를 이용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아니, 너는 내 요구를 따르게 될 것이다.”

“짐이 왜 그런 허튼 요구를 들어줘야 하지?”

나는 지스카르를 내려다보며 자신만만하게 대답해 주었다. 거칠 것 따윈 전혀 없다.

“왜냐하면 네놈이 나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나는 성큼 걸어가서 지스카르의 앞에 멈춰 섰다.

“대답은?”

지스카르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약속하겠다.”

어이없다는 심정을 드러내면서도 녀석은 결국 대답했다. 하지만 지스카르는 이미 내 조건을 수락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제 곁에서 도망치면 부모님을 해치겠다고 협박한 주제에 그는 끝내 손을 쓰지 못했다. 밀정을 보내서 그들을 죽이겠다고 해놓고는 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지스카르를 시험해 보았다. 약속한 보름을 한참 넘겼는데도 과연 부모님은 아직도 무사했다.

“내게 너무 소중한 분들이기 때문에 너는 절대로 그들에게 위해를 가할 수 없을 것이다. 억울해도 하는 수 없다. 이런 건 먼저 반한 쪽이 질 수밖에 없는 일이니까.”

지스카르는 질렸다는 듯 깊이 한숨을 토했다.

“항상 자신감이 넘치는군.”

“그래서 불만인가?”

“아니. 참을 수 없을 만큼 마음에 든다……. 그 옛날에도 너는 아주 화려하고 자신만만했지. 레브노아드 반 스트라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지스카르에게 그 이름으로 불릴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한 번 전생을 부정당한 이후로 영원히 그런 날은 오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왠지 낯간지럽다는 느낌도 들었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무슨 심경의 변화지? ‘네가 레브노아드일 리가 없다. 레브노아드의 사생아이거나 특별한 목적으로 키워진 인간일 것이다.’ 이딴 소리나 지껄이던 주제에.”

“짐은 미신을 믿지 않는 편이라서 말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네가 레브노아드가 아닌 다른 누군가라는 설이 더 비현실적이더군. 외모와 성격은 따라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네 말대로 4중 영창에 검까지 쓰는 건 절대로 흉내를 낼 수 없지.”

지스카르는 근처의 의자를 끌어와서 다시 한번 앉기를 권했다. 나는 더 이상 사양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불쑥 말했다.

“사실은 나도 미신은 별로 믿지 않는 주의야.”

미신뿐 아니라 공인된 신학도 내심 허구라고 생각해 왔다. 내가 직접 환생을 겪지 않았다면 절대로 믿지 않았을 것이다. 지스카르가 새삼 나를 보고 조금 웃었다. 쓴웃음이나 실소 이런 것이 아니라 그냥 편안한 미소였다.

“레브노아드. 그 이름으로 불러주길 원하느냐?”

“아니, 레이가 좋다. 그게 내 이름이니까.”

“그래…….”

지스카르는 왜 노예의 이름을 고집하냐는 둥 황태자가 되기 싫으냐는 둥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다. 나는 부모님에게 받은 이름이 마음에 들고, 아마 녀석도 레이라는 지금 이름이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네 요구 조건을 승낙했다. 짐은 너의 거취와 상관없이 양친의 생사를 책임질 것이다. 이제 어찌할 셈인가……. 떠날 생각인가?”

“이제 너와 거래를 해야지. 내전을 무마할 방법이 있다고 했는데 어디 이야기를 들어보자. 전란이 심화하는 것은 나도 바라는 바가 아니다. 내 평생의 숙원이 휴전협정을 성사시키는 것이기도 했으니까. 그러니 내용에 따라서 네게 협조해 줄 생각이 있다.”

나는 손가락을 꼽으며 말했다.

지스카르가 갑자기 한동안 침묵했다.

“……역시 모든 것을 외면하고 떠날 수는 없었던 모양이군. 너는 나라가 혼란에 빠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전쟁은 더더욱 안 될 말이지. 그 신념 또한 너의 족쇄다. 스스로 족쇄를 차기 위해 너는 결국 짐의 곁으로 되돌아왔구나.”

“족쇄라면 족쇄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뭐라고 해도 상관없다. 나는 모든 것을 원 궤도로 돌리고 나의 과오를 청산하길 원한다. 그렇게 결정했으면 행할 뿐이다.”

지스카르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짐의 곁에 머물겠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아는가? 짐의 것이 될 각오는 섰더냐?”

지스카르가 다짜고짜 다가와서 내 얼굴을 붙잡고 키스를 했다. 목마른 사람처럼 내 입술을 빨고 탐했다.

나는 거칠게 지스카르를 떼어냈다. 그리고 녀석의 머리채를 쥐었다.

“멋대로 지껄이는군. 내가 세상 전부를 소유할 수는 있어도, 어느 놈도 감히 이 몸을 휘두를 수는 없다!”

내 쪽에서 먼저 지스카르의 입술을 덮쳤다. 혀를 집어넣어 처음으로 입 안을 핥았다. 사내놈이 상대라 당장 불결한 냄새 같은 게 나지 않을까 걱정됐는데 그런 것이 전혀 없어 내심 안심이 됐다.

하긴 여태 그래 왔으니 내 쪽에서 먼저 한다고 변할 일은 아닌가. 지스카르는 천만 다행히도 청결을 따지는 편이었다. 이전에도 한 번도 내 앞에서 땀 냄새를 풍기고 온 적이 없다. 나는 시작한 김에 지스카르를 더 밀어붙였다.

지스카르는 웃기게도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하지만 손을 뻗어 다시 내 뺨을 붙잡았다. 내가 지스카르를 누르고 있었으나 어느새 힘의 차이로 자세가 바뀌고 말았다. 그는 내 몸을 으스러질 듯 안고 입술과 혀를 빨았다.

나는 금방 숨이 차서 고개를 뒤로 뺐다. 그러나 지스카르가 승냥이처럼 다시 쫓아와 입술을 눌렀다. 손으로 턱을 쥐어 입을 크게 벌리게 만들고, 다른 손은 목덜미를 잡고 더욱 바짝 끌어당겼다.

“우움!”

괴로울 정도로 지독한 키스였다. 겨우 지스카르가 떨어져 나왔다. 그는 한 번 더 내 입술에 쪼듯이 키스하고 턱에 흘러내린 침을 핥아냈다. 그는 눈을 들어 내 얼굴을 응시했다.

“말을 거창하게 하지만, 결과적으로 짐에게 좋은 일만 시키는군.”

“그렇지도 않아. 너는 당장 이성을 잃을 정도로 나를 사랑하지만, 나는 그만큼 너를 사랑하지 않거든. 내게 다른 볼일이 생기면 너 같은 건 버리고 어디론가 떠나버릴 것이다.”

“…….”

지스카르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그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자아, 나의 지스카르. 언제까지 사랑 타령이나 할 셈이냐? 내전을 종식시킬 방법이 있다더니 다 허풍이었나? 그렇다면 더 이상 네게 볼일이 없으니 이 몸은 그만 떠나겠다.”

나는 지스카르를 밀어내고 막사를 벗어나려고 했다. 그때 지스카르가 내 팔을 붙잡았다. 그는 나를 번쩍 들어서 품에 안은 뒤 의자로 돌아가서 앉았다.

“허풍이 아니다.”

“이건 놓고 이야기하지?”

“거절하지.”

지스카르가 짧게 끊어서 대답했다. 살짝 짜증이 난 느낌이라고 할까. 나는 유치해서 못 보겠다는 듯 조소를 날려주었다. 지스카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리고 복수라도 하겠다는 것처럼 갑자기 목덜미를 깨물고 강하게 빨았다.

“윽!”

나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목에 선명하게 자국을 남겨놓고 지스카르는 태연하게 말했다.

“네 말대로 사랑 타령은 그만하고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해보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원인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너는 이번 내전의 발단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나는 목덜미를 만지면서 지스카르를 노려보았다.

놈의 무릎에서 일어나 맞은편 자리로 가서 앉았다. 다리를 모로 꼬면서 나는 지스카르의 질문에 답을 해주었다.

“일국의 황제가 비천한 노예에게 홀려서 이성을 잃었기 때문이지. 노예 따위가 주제도 모르고 감히 황제를 시해하려고 했다. 삼대를 멸해야 할 중죄임에도 황제는 그 노예를 죽이지 못하고 계속해서 감싸기만 했다. 그 비상식적인 행동은 결국 정적들에게 빌미를 만들어주었다.”

“아주 가차 없군. 짐에게도, 그리고 너 자신에게도.”

“아무도 노예 따윈 인간 취급하지 않는다. 그것은 나도 매한가지다. 내가 첫 만남에 반말을 하고 난동을 부리는 노예를 만났다면, 사정 들을 것도 없이 그 자리에서 목을 쳤을 것이다.”

노예 부모를 둔 노예 주제에 이런 대답이라니. 하지만 현실이 그렇다. 레브노아드였을 때는 더욱 노예에 관해서 가차 없었다. 지스카르도 솔직하게 인정했다.

“그래. 짐은 천한 노예에게 과도하게 집착했다. 하지만 네가 단순한 노예가 아니라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할 특별한 존재임을 증명할 수 있다면 그간 보여준 짐의 행적은 비상식적인 일이 아니게 될 것이다.”

나는 눈을 빛냈다. 이건 상당히 흥미가 동하는 이야기다.

“특별한 존재라?”

“너는 이 대륙의 유일한 4중 영창 마법사이다. 그 능력만으로도 너는 대단히 귀하다. 처음부터 그 사실을 널리 알리고 강조했다면 일찍이 면천되어 적당한 작위까지 받았을지도 모르지. 짐이 너를 아낀 이유도 충분히 설명되었을 터였다. 하지만 너를 놓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마정석을 쥐여 줄 생각조차 하지 않았군.”

“나도 뒤늦게 매우 후회했다. 마정석을 얻은 순간 다 때려 부수는 게 아니라 이 귀한 능력을 걸고 너와 협상했을 수도 있었는데. 널 찢어 죽여버리고 싶은 생각에 사로잡혀 그 쉬운 길을 놓쳤지 뭔가.”

나는 지스카르를 마주 보고 싱긋 웃었다. 지스카르는 말없이 눈을 가늘게 떴다. 어차피 모르고 있었던 것도 아닐 테고? 나는 이야기나 계속해 보라고 턱짓했다.

지스카르는 설명을 이어갔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물론 여론이 악화된 상황이니 단순히 네 능력을 알리는 수준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고, 너의 독보적인 가치를 드러낼 만한 인상적인 무대가 필요하겠지. 이걸 마침 잘 되었다고 말해야 할지 짐의 입장에서는 매우 속이 쓰리다만, 현재 내전이 시작되었고 바로 눈앞에 천혜의 요새라 불리는 에브라함 요새가 있다. 너에게 이보다 좋은 무대는 없겠구나. 네가 진정 전쟁의 화신이라 칭송받던 레브노아드 황태자라면 이번 내전에서 화려하게 승리를 이끌어내 보아라. 온 나라가 너의 활약상에 경악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일찍이 너를 발견하여 귀하게 여겼던 짐의 혜안에 감탄하게 될 것이다.”

나는 낮게 웃기 시작했다. 아주 재미있었다. 녀석의 생각과 내가 계획했던 바가 거의 일치하고 있었다.

서로의 생각이 같은 것은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내가 특별했기 때문에 지스카르가 내게 눈을 떼지 못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이 몸을 비천한 노예로만 알았고, 나를 놓치지 않으려 했던 지스카르의 행동이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이 상황을 타개하고 싶다면 내가 노예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세간에 확실하게 증명하면 된다.

“계획이 성공한다면 짐은 실추된 위신을 바로 세우고, 반란을 빠르게 평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너도 그간의 죄를 사함 받고 새로운 신분을 손에 넣게 될 것이다. 뛰어난 마법사를 다수 배출했던 퍼싱 백작가가 현재 명맥이 끊긴 상태다. 네게 퍼싱 백작가의 성을 하사하겠다.”

“잠깐, 거기까지. 지금 내게 백작 나부랭이의 성을 주겠다고 했느냐?”

나는 중간에서 지스카르의 말을 가로막았다. 지스카르는 내 반응이 의외라는 분위기였다.

“……노예에서 백작으로 신분 상승을 했는데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단 말인가. 엘 파셔나 스트라스의 경우까지 찾아봐도 아주 이례적인 일이다.”

그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다시 물었다.

“어떤 신분이어야 네가 만족하겠는가?”

“나는 한때 황태자였고, 황제가 될 몸이었다. 물론 네 자리를 내놓으라고 할 생각까진 없다. 황제가 되지 못한 황실의 혈통에겐 대공위를 수여한다. 엘 파셔의 유일한 대공. 그게 내가 원하는 신분이다.”

지스카르는 미간을 찡그렸다. 녀석이 얼마나 황당해하는지 그 속내를 그대로 보여주는 극적인 표정 변화다.

“너답지 않군. 그런 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왜 안 된단 말이냐.”

“너의 원래 신분을 생각한다면 대공위가 합당한 것도 사실이나, 현재로선 네가 황족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할 길이 없다. 오직 실력과 공훈만으로도 작위를 수여해야 하는데 백작 이상의 작위는 사실상 무리다. 네가 짐을 시해하려 했던 일을 공훈으로 누를 수 있을지, 뭐라고 무마를 시킬지 그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프다. 퍼싱 백작가보다 명망 높은 가문을 원한다면 짐이 더 수소문은 해보겠다.”

나는 큭큭 웃었다. 덕분에 지스카르의 미간에 난 골이 좀 더 깊어졌다.

“지스카르, 더는 이 몸을 인간들의 기준에 맞출 필요가 없다.”

나는 지스카르의 잘생긴 턱을 손끝으로 잡았다.

“신의 화신이라 칭송받던 자들이 때때로 존재했다. 위대한 능력을 먼저 깨우친 선지자가 어리석은 백성의 눈에 마치 신의 화신처럼 보였던 것이다. 나는 이제 인간이 아니라 신의 화신이 될 것이다. 엘 파셔는 이 몸을 찬양하며 기꺼이 대공위를 바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을 경악에 빠뜨리라 했느냐? 아예 턱이 빠지게 만들어줄 테니 기대해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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