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7/43)

16.

막사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점잖은 척 정자세를 지키는 자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호기심을 지우지 못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크리스티안이 여전히 막사 앞에서 대기 중인 것을 발견했다.

“크리스티안. 피곤할 텐데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군.”

“당연한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성실하기는.”

나는 크리스티안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런데 크리스티안이 갑자기 내 손을 피해 한 걸음 물러났다. 그는 지스카르의 시선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막사 밖으로 나온 지스카르는 특유의 무표정으로 크리스티안을 응시했다.

“크리스티안, 앞으로도 네가 레이를 전담해서 호위해라.”

순간 크리스티안의 눈이 흔들렸다. 그는 깊이 머리를 조아렸다.

“그것은……. 다른 기사에게 호위를 맡기시는 것이…….”

“그에게는 제대로 된 호위가 필요하다. 마정석이 없으면 그도 일반인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최소 이번 내란이 끝날 때까지라도 호위 역을 맡아라.”

크리스티안은 잠시 생각에 잠긴 뒤 그리하겠다고 대답했다.

던필이 웃는 낯으로 걸어 나왔다.

“크리스가 레이의 호위를 맡았으니 한동안은 친위대장직을 뱉어내지 않아도 되겠군요. 나름대로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나는 던필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의 시시하고 유쾌한 잡담을 정말로 오랜만에 듣는 것 같았다.

“오랜만이구나. 이름이 던필인가 던힐인가 그랬지.”

“이봐, 진짜로 이름을 까먹어서 그러는 건 아니겠지? 너는 날이 갈수록 더 건방지게 변하는 것 같다?”

던필이 장난기를 가득 담아서 말했다. 하지만 평소엔 실없이 굴어도 여기에 있는 세 사람 중에서 가장 이성적인 자라는 것을 알고 있다.

잠시 해후를 푼 다음 작전회의실로 쓰이는 막사로 향했다. 지스카르는 가장 안쪽 상석에 앉으며 내게 근처 자리를 권했다. 나는 사양하지 않고 기꺼이 엘 파셔의 황제와 동석했다. 던필은 황제의 뒤에, 크리스티안은 내 뒤쪽에 한 걸음 물러나서 기립했다.

잠시 뒤 마법사 로브를 입은 자들이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3중 영창이 가능한 엘 파셔 최고의 마법사이고, 황실 마탑의 총책임자이며, 현재 마법사단의 총지휘를 맡고 있는 드와이트 후작이 황제의 부름을 받아 이 자리에 도착했다. 열 명가량의 마법사가 후작의 뒷자리에 멈춰 섰다. 그들 중에 눈에 익은 자가 있었다.

럼포드 백작. 마물 사냥을 갔다가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질 뻔한 적이 있는데 그때 나를 구해준 마법사이다. 그의 마정석을 빼앗아서 지스카르와 대판 싸운 적도 있었지. 여러모로 인연이 깊은 자인지라 나는 눈짓으로 잠깐 알은척을 했다. 럼포드 백작은 어찌 반응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한편 드와이트 후작은 내 행동 하나하나를 불쾌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단 내 문제는 덮어둔 채 황제의 말을 기다렸다. 어째서 고위 마법사들을 모두 불러 모은 것인지 알고 싶어 하는 분위기였다.

지스카르는 나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네가 요구한 대로 드와이트 후작을 불러왔다. 알아서 하거라.”

드와이트 후작의 얼굴이 종잇조각처럼 일그러졌다. 자신이 불려온 이유가 노예의 요구 때문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불편한 심정을 돌려서 말했다.

“폐하. 저 노예에 관한 소문이 퍼지면서 병사들이 술렁이고 있습니다.”

“알고 있소.”

“폐하! 알고 계시면서도 어찌……!”

드와이트 후작이 분통을 터뜨렸으나 지스카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무표정을 유지했다. 그는 한 걸음 물러선 채 모든 것을 내게 일임하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나는 사양하지 않고 앞으로 나섰다.

“드와이트 후작, 초대형 마법진을 하나 구상하고 있는데 협조가 필요하다. 우선 2중 영창이 가능한 마법사 스물을 차출해서 전담반을 꾸려보도록 하라.”

“허!”

드와이트 후작은 황당함에 말문까지 막힌 모양이었다. 나는 개의치 않고 물었다.

“현재 부대 내에 마정석 보유량이 어느 정도인가?”

“7만 갈론 정도 보관 중이다.”

될 대로 되라는 듯이 드와이트 후작이 대답했다.

“턱도 없군. 마법진을 기동시키는 데 최소 60만 갈론의 마정석이 필요하다. 보름 안에 조달할 수 있겠는가?”

말이 떨어지는 순간 드와이트 후작이 내게 삿대질을 하며 고함을 질렀다.

“뭐라? 60만? 똥오줌도 분간 못 하는 놈이 아주 되는대로 지껄이는구나!! 마정석 60만 갈론이 어느 정도인 줄 아느냐? 주요 광산 열 곳에서 1년을 채굴해야 얻을 수 있는 양이다! 국방비 예산을 새로 짜야 할 정도인데, 그걸 마법진 하나 만드는 데 사용하겠다고?”

드와이트 후작은 지스카르의 앞으로 가서 성토를 했다.

“폐하, 저놈이 하는 짓을 보십시오. 정녕 저자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실 생각이십니까!”

다른 마법사들도 드와이트 후작의 말에 동조했다. 정말 그런 얼토당토않은 요구를 들어줄 셈인가. 진짜 황제가 미쳐 버린 건 아니겠지. 대충 그런 분위기다. 사실 내가 요구한 마정석의 양이 지나치게 과해서 저들이 분통을 터뜨릴 만도 했다.

나는 가볍게 웃으며 지스카르를 응시했다. 마법사들도 숨을 죽이고 황제의 대답을 기다렸다. 지스카르는 팔짱은 낀 채 말없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침묵이 이어졌다. 몇 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생긋 웃는 낯으로 지스카르의 발을 질근질근 밟았다.

“눈 딱 감고 마정석 60만 갈론, 서류에 결재해!”

“…….”

지스카르는 묵묵히 내 발을 옆으로 치웠다. 녀석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제야 입을 열었다.

“네 역성을 들어주고 싶어도 이건 도가 지나치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마라! 국가안보에 문제가 생길 정도로 막대한 양의 마정석을 함부로 방출할 수는 없다.”

“나더러 알아서 하라고 말했던 것이 바로 수 분 전의 일일 텐데?”

“상식선에서 요구하도록 해라.”

“재정 문제는 반란군 무리를 처단한 뒤 뼛골까지 빨아내면 금방 해결돼! 그깟 마정석 몇 개를 감당하지 못한다니 엘 파셔도 볼 장 다 봤군.”

“그런 도발은 통하지 않는다.”

“그동안 정신수양 좀 하셨는데.”

나와 지스카르가 툭툭 주고받는 말을 듣고 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노예와 황제 간에 할 대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총애하는 남첩과 황제의 대화로도 적합하지 않았다.

언쟁이 길어지자 나는 탁자를 거세게 내려쳤다. 쾅 하는 소리에 모든 이들이 이목을 내게 집중했다.

“난공불락의 요새를 함락시키기 위해 수만 명의 병사가 동원될 것이고, 수만 개의 창칼과 수백만 발의 화살, 수십여 대의 공성무기가 소모될 것이다! 그걸 일거에 해결해 주겠단 말이다. 마정석 60만 갈론이면 싸게 먹히는 것이 아닌가!”

지스카르는 생각에 잠겼다가 이윽고 결정을 내렸다.

“60만 갈론은 너무 많다.”

“그럼 58만 갈론.”

“58만 갈론을 준비시키마.”

“기어이 예산을 줄이는군. 적어도 엘 파셔는 재정 파탄으로 망할 일은 없겠어.”

나는 불평을 터뜨렸다. 한편 입을 벌린 채 대화를 듣고 있던 드와이트 후작은 이마를 짚었다. 얼굴이 완전히 핼쑥해졌다. 2만 갈론이 줄었지만 어쨌건 지스카르가 대량의 마정석을 내어주겠다고 결정했기 때문이다.

사실 2만 갈론도 60만 갈론이라는 이야기를 들어서 적어 보이는 것이지 엄청난 양이었다. 에브라함 요새 함락을 포함한 내란 평정을 위해 준비한 마정석의 총량이 7만 갈론이었음을 상기해 보면 그것이 얼마나 큰 단위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드와이트 후작.”

황제의 부름에 드와이트 후작은 겨우 고개를 들었다.

“후작의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오. 하지만 당장은 염려를 내려놓고 레이의 요구에 따르도록 하시오. 그가 하는 모든 말을 짐의 명이라고 생각하시오.”

“…….”

지스카르는 큰 소리를 치지 않아도 사람의 이목을 끄는 재주를 가졌다. 드와이트 후작은 입을 꾹 다문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한참 뒤에 그는 체념한 듯이 고개를 들고 내게 시선을 주었다. 나는 미리 준비해 놓았던 종이를 드와이트 후작에게 내밀었다.

“마법진의 기본 구성식이다. 기온별, 풍향별로 세부 값을 도출해서 정확히 오늘 0시까지 보고하라.”

“노예 주제에 말투가 아주 고약하구나!”

드와이트 후작이 다시 얼굴을 구겼다. 일단 황제의 뜻에 따르기는 하겠지만 내 불손한 말투만큼은 못 참겠다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나는 말투를 바꿀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더 이상 노예로 되돌아갈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말이 많은 자로군. 내 지시에 따르겠다면 따르겠다, 못 하겠으면 못 하겠다, 짧게 답해라.”

나는 턱 끝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드와이트 후작은 폭발 직전이었다. 다른 마법사들도 겨우겨우 분을 참고 있었다. 단지 황제의 면전이라 함부로 말을 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때였다. 지금껏 마법사들 사이에서 계속 눈치를 보던 럼포드 백작이 엉거주춤 앞으로 걸어 나왔다.

“나, 나는 해보겠소.”

마법사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를 쳐다봤다.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자 럼포드 백작은 얼굴을 약간 붉히며 내가 준 종이를 살펴봤다. 몇 줄을 읽더니 그는 침이라도 흘릴 것처럼 입을 벌렸다. 그는 보물이라도 숨기듯 얼른 종이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남은 종이들도 집어가려고 손을 뻗었다.

그런데 다른 마법사가 번개같이 뛰어나오더니 럼포드 백작이 가져가려고 했던 종이를 냉큼 가로챘다. 그는 서둘러 종이를 읽기 시작했다. 읽어갈수록 눈이 점점 커졌다.

나는 조용히 웃었다. 럼포드 백작도, 이 마법사도 내가 마정석을 처음으로 손에 넣고 지스카르와 격전을 벌였을 때 그 자리에 있었다. 내가 4중 영창을 하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하고 그들은 한차례 경악한 바가 있다. 그 뒤 내가 황제 암살 혐의로 체포되면서 의문을 접을 수밖에 없게 되었지만, 사실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단순한 노예가 아니라는 것을.

“…….”

“…….”

침묵이 이어졌다. 다른 마법사가 슬그머니 나와 종이를 집었다. 두 명, 세 명, 마법사들이 걸어 나왔다. 그때 뒤에 남아 있던 드와이트 후작이 그들을 밀어제치고 종이들을 가로챘다. 종이를 끝까지 거듭해서 몇 번을 읽고는 럼포드 백작의 것도 억지로 빼앗아서 읽었다. 그는 오만상을 다 쓰며 혼자 중얼거렸다.

“말도 안 돼. 마법진이 이렇게 거대하다니. 자, 잠깐. 이건 남방식인데…….”

“남부 알타 학파의 마법진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 이중 확장 구조를 택하면서 알타 학파와는 오래전에 그 길을 달리했지만.”

나는 태연하게 그의 말을 이었다. 드와이트 후작이 눈을 부릅뜨고 나를 노려보았다.

“이, 이런 것을……, 어떻게 이런 걸 알고 있느냐! 누가 네깟 놈에게 이런 지식을 가르쳐 주었더냐! 당장 이실직고하지 못하겠느냐!”

누가 가르쳐 줬느냐고? 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이내 아주 불쾌하게 이를 드러냈다.

“이번에는 내 쪽에서 묻겠다. 그대라면 한낱 노예에게 마법의 정수를 전수하겠는가? 그대들의 주장대로 스트라스에서 자객을 보냈다고 하자. 이 심후한 마법의 오의를 한 번 쓰고 버릴 암살자 따위에게 가르쳐 준단 말이냐? 이 마법을 완성하기 위해 동원된 기술이 얼마이고, 쏟아부은 투자 자금만 천문학적인 단위거늘!! 네놈이 감히 나를 웃겨?!”

내가 노성을 터뜨릴 때마다 드와이트 후작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가 더듬거리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 그렇다면, 대체 네가 누구란 말인가.”

나는 탁자 위에 남아 있는 종이를 손에 움켜쥐었다. 그것을 마법사들 앞에 내밀고 말했다.

“이게 얼마나 기가 막힌 마법인지 안다면, 꽁무니에 불붙은 망아지처럼 당장 움직여라! 네놈들에게 역사적인 순간에 동참할 수 있는 영광을 주겠다!”

럼포드 백작이 허둥지둥 종이를 받아온 뒤, 마법진을 만들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드와이트 후작은 아직도 얼이 빠져 종이만 쳐다보고 있었다.

마법사들을 다그치다가 나는 문득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고 보니 잊어버린 것이 있었다.

“아주 화려하고 커다란 가마를 준비해라. 휘황찬란한 예복도 준비해다오. 반란군 놈들이 감탄을 금치 못할 만큼 아주 화려한 것이어야 한다.”

“적의 눈을 다른 데로 분산시킬 생각이로군.”

내 요구에 다들 영문을 몰라 눈만 끔뻑거리는데, 가만히 앉아 있던 지스카르가 입을 열었다. 역시 머리가 나쁘진 않은 놈이다.

“황제 폐하께서 제가 입을 옷을 골라주시겠습니까?”

나는 오랜만에 황제를 향해 예를 다하며 말했다. 지스카르는 내 존대에 손사래를 쳤다.

* * *

에브라함 요새의 굳건한 성문 앞에 제단 비슷한 것이 만들어졌다. 동서남북 각 방향에는 신에게 바친 제물들이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

나는 커다란 가마를 타고 제단에 도착했다. 가마에서 내리는 데는 세 명의 시중이 필요했다. 옷자락이 너무 길었기 때문이다. 내가 입은 옷은 신전의 고위 사제들만 입을 수 있는 예복으로 티끌 하나 묻지 않은 순백색이었다. 머리 위에도 신성의 표시로 하얀 성포를 둘렀다.

에브라함 요새 위에 있던 병사들이 내가 입은 예복을 보고 저마다 탄성을 터뜨렸다. 너무 꼴같잖아서 탄성이 안 나올 수가 없을 것이다.

나는 발칙한 반란군 무리를 슥 둘러보며 제단의 가운데에 올랐다. 주위의 이목이 모두 내게 집중되자 나는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반역을 꿈꾸는 극악무도한 놈들은 들어라! 나는 하늘로부터 엘 파셔를 지키라는 명을 받은 신의 사자다. 역심을 버리지 않는다면 신께서 천벌을 내릴 것이다.”

그때 성벽 위에서 풍채 좋은 사내가 나타났다. 에브라함 요새의 책임자인 페르디낭 백작이었다.

“저 덜떨어진 놈이 또 왔군.”

그가 혀를 끌끌 찼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응시했다.

“페르디낭 백작, 나를 모독하는 것은 신을 모독하는 것과 같다는 걸 알아야 할 것이다.”

“지랄 옆 차기 한다! 돌아가서 황제의 엉덩이나 빨아라!!”

페르디낭 백작은 귀족답지 않게 걸쭉한 입담을 자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에 대응하지 않고 담담하게 서 있었다. 잠시 뒤 제물로 바칠 물건들이 도착하자 나는 제사를 드리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내 지시에 따라 일꾼들이 네 방위에 제물을 바쳤다. 원래는 제대로 손질한 닭이나 돼지 등을 바쳐야 하지만 전쟁터인지라 대충 목만 자른 산짐승과 곡식 따위를 지저분하게 자루에 담아서 제물로 사용했다. 비록 모양새는 비루해도 그 양만큼은 작은 언덕을 이룰 정도로 많았다.

일꾼들이 제물을 쌓아 올릴 동안 나는 바람이 부는 방향을 살펴보며 가끔 바닥에 갖가지 도형을 그렸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제단의 중앙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진짜 고위 사제라도 된 것처럼 순백색 예복을 넓게 펼치고 하늘에 큰절을 두 번 했다.

“신이시여, 황제 폐하를 지켜주시고 저 무도한 자들에게 천벌을 내려주십시오!”

그때 어디론가 사라졌던 페르디낭 백작이 활을 들고 다시 나타났다. 부관으로 보이는 자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죽여버릴 생각이십니까? 재미있는 구경거리입니다만.”

페르디낭 백작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마치 나 들으라는 듯 목소리가 컸다.

“저 얼빠진 꼴을 더 이상은 못 봐주겠어!”

그는 코웃음을 치며 활시위를 당겼다. 제단은 에브라함 요새로부터 불과 200미터 떨어져 있었다. 충분히 화살이 닿을 만한 거리였다.

슉.

나는 절을 한 다음 고개를 들었다. 화살이 공기를 가르며 날아왔다. 화살이 내 머리를 꿰뚫기 직전, 크리스티안이 뛰어들었다. 오라 소드가 허공을 갈랐고 화살이 정확히 두 동강이 나서 바닥에 떨어졌다.

“크리스티안 울펜가모트!”

페르디낭 백작이 이를 부득 갈았다. 크리스티안은 요새를 올려다보며 외쳤다.

“페르디낭 백작!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성문을 여시오! 그리하면 폐하께서 정상참작을 해줄 것이오!”

“애첩을 데리고 도망친 네놈을 도로 받아주었던 것처럼 나도 정상참작을 해주겠다 이건가? 지랄! 미치광이 황제 밑으로 들어갈 바엔 차라리 똥물에 얼굴을 처박고 죽어버리고 말지! 노예 새끼를 신의 사자라고 내세워? 내전에서 승리하면 그 공을 저놈에게 돌릴 요량인가 본데, 애첩을 놓치지 않으려고 아주 발광을 하는구나!”

나는 크리스티안에게 손짓을 해서 뒤로 물러나라고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크리스티안 대신 페르디낭 백작을 향해 경고했다.

“그대들은 황제 폐하를 모욕하고 신의 사자인 이 몸을 모욕했다. 어리석은 자들이 신을 노하게 하였으니 하늘에서 천벌이 떨어지리라.”

“오냐! 그 천벌이라는 거 구경 한번 해보자!”

“신께서 절대 네놈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천벌이란 게 언제쯤 내리는 거냐고 묻고 있잖느냐아!”

에브라함의 병사들이 페르디낭 백작의 고함소리에 동조해서 야유를 퍼붓기 시작했다. 나는 언쟁에 응하지 않고 그쯤에서 철수하기로 했다.

나는 다시 크고 화려한 가마를 타고 병영으로 돌아왔다. 시중을 받으면서 가마에서 내리는데 따가운 시선이 쏟아졌다. 얼빠진 짓만 하고 돌아왔는데 시선이 고우면 그게 더 이상하다.

나는 태연하게 병사들의 사이를 가로질렀다. 막사에 도착하자 그 앞에 놓인 의자에 걸터앉았다. 전장을 한눈에 굽어볼 수 있어서 이 자리가 마음에 들었다. 그때 누군가 내 머리 위의 성포를 마음대로 벗겨냈다. 큰 손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나는 피식 웃으며 지스카르를 올려다보았다.

“왜? 내가 보기엔 제법 어울리는 것 같다만.”

“나중에 좀 더 어울리는 옷을 사주마.”

“흠, 사실 나는 옷보다는 보석이 가지고 싶은데…….”

“그래? 어떤 보석을 원하지?”

지스카르가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줄 것처럼 물었다. 원래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서라면 자기 심장도 내주고 싶은 게 사내의 마음인 법. 그래서 나는 생긋 웃으면서 애교 있게 대답했다.

“연구용으로 쓰게 마정석 5만 갈론만 선물해다오. 해줄 수 있지?”

“…….”

“왜 답이 없느냐?”

“역시 옷이 좋겠구나.”

“진국의 황제는 늦게 들인 후궁을 위해서 금은보화를 산처럼 쌓아서 선물해 주었다고 한다. 한데 네놈은 뭐냐? 이렇게 귀여운 애첩이 부탁하는데 그깟 마정석 5만 갈론이 아깝다 이거냐?”

내가 애첩을 들먹여서 그런지 지스카르의 표정이 모호하다. 그는 이마에 손을 올렸다.

“너는 스케일이 너무 커.”

나는 큭큭 웃었다. 농담은 충분히 했다. 나는 예복을 훌훌 벗어 던지며 물었다.

“반란군의 동태는 어떠냐?”

“남부 귀족들은 오래전부터 황후파와 결탁하여 짐과 사사건건 맞서왔다. 그들은 마크시 공작의 반란이 실패하자 반역죄로 한데 잡혀가기 전에 짐의 실정을 꼬투리 잡아 먼저 군세를 일으켰다.”

“그 정도는 따로 듣지 않아도 알아. 남부 귀족이 구왕국의 잔존 세력과 결탁하여 독립할 모양이던데 정말 그런 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당연히 그들만의 힘으로는 독립을 성공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필연적으로 외부세력을 끌어들이려고 할 것이다. 이미 스트라스와 접촉 중이라는 정황을 포착했다. 물밑 협상이 완료될 때까지 반란군은 에브라함 요새를 방패로 시간을 끌 심산이다. 결국 시간 싸움이지.”

지스카르는 묻는 대로 기밀을 술술 불어내고 있었다. 나는 새삼스럽게 녀석을 쳐다보았다.

“왠지 재미있군. 그 전엔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냐고 물으면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간신히 몇 마디나 하는 정도였으면서.”

“…….”

지스카르는 침묵했다. 그는 눈을 내리깔고 조용히 전장을 굽어보다가 한참 뒤에 입을 열었다.

“그렇구나. 진작 이렇게 했으면 좋았을 것을 그랬지.”

나도 나른하게 턱을 괴고 에브라함 요새를 응시했다. 제각각 자세는 달라도 시선은 같은 곳을 보고 있었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대화를 나누었다. 반란군 수뇌 중에서 반드시 생포해야 할 놈에 대해서라든지, 바룸 남작이 예상대로 쓸 만한 인간이었다든지.

그때 드와이트 후작이 다가왔다. 그는 여전히 내게 불만을 품고 있었지만 결국은 내가 시키는 대로 마법진을 만드는 일을 돕고 있었다. 그뿐인가. 그는 한시도 내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나의 마법적 식견이 자신을 아득히 초월하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드와이트 후작이 입을 열었다.

“마지막 마정석 7만 갈론이 방금 도착했다는군.”

때맞춰 좋은 소식이 전달되었다. 나는 빙긋 웃으면서 지스카르를 돌아보았다.

“슬슬 때가 된 것 같구나. 지스카르, 입성할 준비는 되었느냐?”

지스카르는 쓸데없이 말을 하는 대신 고개를 천천히 한 번 끄덕였다.

* * *

둥. 둥. 둥.

북소리가 개전을 암시하고 있었다. 지스카르가 커다란 흑마를 타고 일만 군세의 최전방에 섰다. 에브라함 요새도 경계를 강화하고 있었다.

개전에 앞서 나는 가마를 타고 다시 임시로 만든 제단 앞에 도착했다. 일꾼들이 제단에 제물이 담긴 자루들을 잔뜩 쌓아놓고 완전히 뒤로 물러났다. 크리스티안이 마지막까지 내 근처에 남아 있다가 그만 돌아가라고 눈짓을 하자 그때야 돌아갔다.

제단 위에 나 혼자만 남았다. 나는 하늘에 두 번 절을 했다.

“신이시여, 황제 폐하를 거역하는 무리에게 천벌을 내리소서!”

“또 시작했군. 지치지도 않아.”

페르디낭 백작이 성 아래를 내려다보며 혀를 끌끌 찼다. 나는 다시 한번 그들에게 경고했다.

“나라를 어지럽히는 반역도 무리는 들어라.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겠으니 나의 신성을 인정하고 성문을 열어젖히도록 해라.”

“시끄럽구나아!! 네놈이 신의 사자면, 나는 신의 할애비다!!”

페르디낭 백작이 목청을 돋워 커다랗게 소리를 질렀다. 그의 외침에 병사들이 폭소를 터뜨렸다. 사방에서 조소가 터져 나왔으나 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 정도는 충분히 예상했던 반응이다. 내심을 말하자면, 이렇게 나와주지 않으면 정말 실망할 뻔했어.

나는 소매 안쪽에서 마정석을 하나 끄집어냈다. 그 마정석을 매개로 삼아 짧게 마법의 주문을 외었다.

“온.”

쩌엉―!!

거대한 종을 후려친 것처럼 아주 크고 묵직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조소를 던지던 병사들은 화들짝 놀랐다. 페르디낭 백작도 소스라치게 놀라서 뒤로 몇 걸음 물러서기까지 했다.

내 발밑에서 가느다란 빛이 한 줄기 뻗어 나와 북쪽에 쌓아놓았던 자루 더미에 닿았다. 곧 수십 개, 수천 개의 빛이 온갖 도형을 그리고 상형 문자들을 새기면서 북쪽을 향해 뻗어나갔다. 부채꼴 모양의 마법진이 찬란하게 빛을 뿜어냈다.

에브라함 요새를 지키는 병사들은 멍청하게 성 아래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페르디낭 백작도 얼떨떨한 얼굴로 서 있었다. 한 박자 늦게야 그는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대, 대체 저게 뭐야……?”

눈치채는 게 너무 늦잖아. 나는 피식 웃으며 두 번째 주문을 외었다.

“온.”

수많은 빛줄기가 이번엔 남쪽으로 뻗어나갔다. 사실 제물로 위장한 자루들 안에는 마정석이 담겨 있었다. 저기에 작은 언덕을 이룬 것이 모조리 마정석이다. 그것들이 동시에 공명을 일으키며 또 한 차례 엄청난 굉음이 터져 나왔다.

“마법!! 저건 마법입니다! 페르디낭 백작님! 저게 전부 다 마정석이라고요!!”

그때 성벽 위에서 어느 마법사가 악을 써가며 소리 질렀다.

“마, 마법이라니. 대체 무슨 마법이 있다는 거냐?”

페르디낭 백작은 아직도 얼떨떨한 얼굴을 한 채 주춤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동안에도 마법진은 점차 모양을 갖춰가고 있었다. 그럴수록 그의 얼굴도 점점 새파랗게 질렸다. 그는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소리 질렀다.

“죽여라. 구, 궁수대! 당장 저놈을 쏴 죽여!!”

그동안 손 놓고 구경만 하던 페르디낭 백작이 이제 와서 나를 죽이라고 발악을 했다. 그러게 진작 나를 죽이든가, 제단을 파괴했으면 됐잖아.

“온.”

내가 세 번째로 주문을 외자 빛을 머금은 선들이 이번에는 동쪽으로 뻗어갔다. 무려 15만 갈론에 달하는 마정석이 동시에 공명했다.

그 순간, 그 어마어마한 마력의 반동으로 인하여 대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바람이 매섭게 휘몰아쳤다.

갑작스러운 돌풍 때문에 궁수들은 대부분 활을 놓치거나 얼굴을 감싸며 뒤로 물러섰다. 덕분에 정확히 제단까지 날아온 화살은 대여섯 발이 전부였다. 그러나 단 한 발이라도 명중하면 치명상을 입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마법진의 중심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화살들이 제단 곳곳에 틀어박혔다. 그중 한 발이 팔을 스치고 갔다.

“뭣들 하고 있느냐!! 죽여라! 빨리 활을 쏴서 저놈을 죽여버리란 말이다!!”

페르디낭 백작의 발악에 가까운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팔을 움직여보았다. 문제가 될 만한 부상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뒤, 고개를 들었다. 마지막 주문을 외우기 위해서.

“온.”

가느다란 선들이 앞다퉈 서쪽으로 뻗어나갔다. 대기는 더욱 심하게 요동쳤다. 돌풍이 거센 모래폭풍으로 변해 땅을 후려치고 성벽을 뒤흔들었다.

“우왓!”

“으아악!”

병사들은 벽을 붙잡고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다음 순간 갑자기 소동이 멈추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폭풍이 완전히 그쳤다. 모래 먼지가 자욱하게 날리는 가운데에 둥근 마법진이 은은하게 빛을 뿌리고 있었다. 네 개의 부채꼴이 모여서 마침내 한 개의 완벽한 원형을 이루었다.

웅웅웅웅.

마정석에서 흘러나오는 낮은 울림만 제하면 모든 것이 고요했다. 그때 마법진에서 거미줄 같은 선이 소리 없이 뻗어 나왔다. 순식간에 대지를 집어삼키며 마법진이 확장을 시작했다. 마구잡이로 뻗어나간 마법진은 가지를 뻗은 나무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그 크기가 평야를 가득 메울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컸다. 마법진이 뿜어내는 빛으로 눈을 뜨기 힘들 정도로 사방이 밝아졌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마정석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저 멀리 하늘 위로 던졌다. 마정석이 빛을 내며 천천히 성벽을 향해 날아갔다.

“어리석은 자들이 신의 노여움을 샀나니, 이것은 천벌이니라.”

사방은 완벽한 정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내 낭랑한 음성이 유독 크게 울렸다. 문득 페르디낭 백작과 눈이 마주쳤다. 크게 부릅뜬 두 눈동자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다음 순간 마정석이 허공 위에서 산산이 부서졌고, 어마어마한 굉음과 함께 백색의 섬광이 터져 나왔다. 그 빛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무지한 병사들은 잘 모를 것이다. 그럼에도 에브라함의 병사들은 본능적으로 빛을 피해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서로 밀치고 먼저 도망치려는 자들로 인해 철통같던 에브라함 요새가 순식간에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그러나 몇 걸음 가기도 전에 빛무리가 병사들을 전부 집어삼켰다.

강한 빛 때문에 곧 앞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마치 종말이 온 듯 세상이 두려운 빛으로 잠식되었다.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한참 뒤에야 요란한 폭음이 가라앉았다. 이윽고 눈을 떴을 때, 나는 미소를 지었다. 스스로 이룬 이적이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에브라함 요새의 반절이 녹아버린 것처럼 둥글게 패어 있었다. 굳건한 성문은 날아가버린 지 오래고, 직선거리로 요새 내의 도시가 훤히 드러냈다. 인간의 소행이라고 하기는 지나치게 두려운 광경이다. 신이 눈물을 흘려 그 뜨거움에 대지가 녹아버렸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

나는 뒤돌아섰다. 팔을 가슴에 얹고 정중하게 말했다.

“황제 폐하, 길을 열었습니다. 입성하시지요.”

반세기에 가까운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함락된 적이 없는 에브라함 요새. 그 굳건한 성채를 무너뜨리기 위하여 아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을 것이고 엄청난 수의 사상자가 나왔을 것이다. 그것이 한순간에 해결되었다. 기뻐하며 춤이라도 춰야 하거늘 황제가 이끄는 일만의 병사들은 그저 입을 벌리고 눈만 크게 뜨고 있을 뿐이다.

지스카르가 흑마를 몰고 홀로 앞으로 나왔다. 그는 바로 내 옆에서 말을 세웠다. 여름날의 초콜릿처럼 녹아버린 에브라함 요새를 올려다보고 그다음 고개를 돌려 나를 내려다보았다. 무언의 시선을 받고 나는 싱긋 웃었다.

“어떠냐. 놀라서 턱이 빠질 지경이지?”

“……스트라스의 마법은 이런 일도 가능하단 말인가?”

“걱정 마라. 그랬다면 예전에 스트라스가 세계를 정복했겠지. 엄청난 양의 마정석은 둘째치더라도, 사정거리가 겨우 300미터에 불과한 데다가 마법진을 완성하는 데 7일이 넘는 시간이 소요된다. 그런데 자기 코앞에서 마법진을 만드는 걸 누가 가만히 보고만 있겠느냐? 실용성이 없다 하여 봉인했던 마법인데 이런 식으로 사용될 줄은 나조차도 몰랐다.”

마법진을 만들던 것이 천대받는 노예였고, 황제가 그 노예에게 미쳐서 허튼짓 중이라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이게 다 네 악명 덕이라며 나는 지스카르의 발치를 툭툭 두드렸다.

“…….”

지스카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갑자기 손을 내밀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의 손을 붙잡고 말 위에 올랐다. 사실 놈의 발치에 서서 위를 올려다봐야 하는 게 마음에 안 들었다.

말에 올라탄 뒤엔 체면 불고하고 지스카르에게 약간 몸을 기댔다. 발밑이 어지러웠다. 코끝이 화끈해서 손을 대어보니 코피가 약간 흘러나왔다. 지스카르가 미간을 찌푸리며 내 얼굴에 손을 얹었다.

“레이?”

“실용성이 낮다 하나, 신의 이적이라 불릴 만한 마법을 펼쳐 보였다……. 후우, 지치는 게 당연하지…….”

나는 코를 훔친 뒤 주변의 눈을 의식하며 억지로 고개를 들었다. 신의 사자가 이깟 마법 하나 썼다고 지쳐서야 말이 아니다. 나는 가능한 한 빨리 입성하라고 눈짓을 보냈다. 지스카르는 잠시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가 다시 말을 몰았다.

사실 에브라함 성이 완전히 무너진 것은 아니다. 부서지지 않은 성벽 위에 생존자가 얼마 남아 있었다. 그러나 요새의 병사들은 모두 넋을 놓았고 감히 활이나 무기를 집을 생각조차 못 했다.

지휘관이 병사를 이끌고 요새 안으로 무혈 입성했다. 병사들은 여전히 현실감이 없는지 무너진 성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드와이트 후작과 마법사들이 허둥지둥 달려와서 마법진의 흔적을 살펴보고 녹아내린 성벽을 만져 보았다. 잠시 뒤 드와이트 후작은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더니 그만 무릎을 꿇고 말았다. 제 손으로 만든 마법진의 위력을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이로써 계획의 반절 정도는 성공한 셈인가. 나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현기증이 심해지면서 갑자기 전신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아?”

나는 당황해서 무엇이든 붙잡고 몸을 지탱하려고 했다. 그러나 팔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몸을 바로잡기는커녕 오히려 눈앞이 흐려졌다. 의식이 꺼져가는 와중에도 기가 막혔다. 이렇게 몸이 쇠약해져 있을 줄이야.

그때 지스카르가 내 팔을 붙잡았다. 그는 쓰러지는 나를 제 품 안에 끌어안았다. 한데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지스카르가 목덜미를 감싸 안으며 입술을 덮었다. 당혹감에 입이 조금 열리자 그 기회를 놓칠세라 혀까지 집어넣어 키스했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힘만 있었다면 이게 무슨 짓이냐고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엄청난 수의 병사들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이놈이 진짜로 미쳐 버린 거지!

그때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어느 병사가 주먹을 부르르 떨며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그는 크게 흥분하여 얼굴과 목덜미까지 시뻘겋게 변해 있었다. 그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커다랗게 괴성을 질렀다.

“으아아아아아!! 황제 폐하 만세!!”

처음에는 그 혼자였다. 그런데 그의 목소리를 들은 병사들이 마치 전염이라도 된 듯이 하나둘씩 주먹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목이 터져라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엘 파셔에 신의 축복이 있으라!!”

“만세!! 황제 폐하 만세!!”

“와아아아아!!”

실로 폭발적인 반응이었다. 지스카르는 침노에게 입맞춤한 것이 아니다. 황제가 강력한 신의 사자를 손에 넣자 병사들이 흥분을 참지 못해 미친 듯이 환호했다.

지스카르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내 얼굴을 어루만졌다. 나는 실소를 짓고 말았다. 역시 무시 못 할 녀석이야.

지스카르에게 뒤를 맡기고 의식의 끈을 놓았다. 마지막 순간까지 커다란 함성이 천지간을 쩌렁쩌렁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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