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8/43)

17.

에브라함 요새를 무너뜨리고 정신을 잃은 뒤 다음 날 아침이 되어 깨어났다. 슬슬 일어나야 할 것 같지만 세상 귀찮아서 눈도 뜨고 싶지 않았다. 지하 감옥에 끌려가 고문을 당한 뒤로 몸이 너무 약해졌다. 한 번 고문을 당하고 나면 쉽사리 자리를 털고 일어나기 힘들다고 하더니 그게 진짜인 모양이다.

그때 누군가 목덜미에 가만히 키스하는 것이 느껴졌다. 노예 낙인이 있었던 그곳이다. 그가 이번에는 내 손가락에 입 맞췄다. 나는 손톱을 전부 뽑히는 고문을 당한 적이 있다. 다행히 지금은 치료도 받고 손톱이 거의 다 자라서 보기에 흉하지 않다.

손길이 옛날에 상처 입었던 곳을 하나씩 훑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내 발등에 입을 맞췄다. 나는 그제야 눈을 뜨고 앞을 보았다. 지스카르가 침대맡에 걸터앉은 채 몸을 숙여 내 발등에 키스하고 있었다.

“무슨 짓이냐? 일국의 황제가 그런 짓을 하는 게 아니다.”

나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지스카르는 담담했다.

“어차피 이곳엔 아무도 없다.”

“보는 눈이 없으면 무슨 짓을 해도 된다는 거냐?”

답이 없었다. 지스카르는 물끄러미 내 발을 응시하고 있었다. 방 안에 적막이 가득 찼다. 갑자기 지스카르가 침대맡에서 일어났다.

“다행히 지금은 상태가 괜찮아 보이는군. 그래도 확실히 해야 하니 신관을 불러오마.”

난데없이 신관을 데려오겠다며 그는 방문으로 향했다. 나는 지스카르의 뒷모습을 보고 코웃음을 쳤다.

“미안하면 미안하다고 말을 하면 될 걸 언제까지 우물쭈물할 셈이냐. 시라크도 네놈보다는 대범해!”

내 말에 우뚝 지스카르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다시 내 앞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순순히 사과를 했다.

“미안하다.”

짧은 사과 후, 지스카르는 조용히 나를 응시했다.

“그 한마디로 만족할 수 있겠느냐?”

“됐어. 애초에 사과 따위 할 필요도 없다.”

나는 귀찮은 얼굴로 크게 손사래를 쳤다.

“황태자였을 때, 나도 소년을 침소로 불러들인 적이 있다. 그는 조금 두려운 표정이었지만 나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내게 복종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그자가 어느 왕족의 환생이었다면 나도 그에게 사과를 해야겠군.”

피식 실소가 흘러나온다. 나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나는 수백 명이 보는 앞에서 엘 파셔의 황제를 죽이려고 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어이없는 짓을 저질렀는지 모르겠다 싶군. 네 능력으로도 도저히 그 상황을 덮어버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고문을 당한 뒤로 가끔 악몽까지 꾸지만, 실은 그 자리에서 처형당하지 않은 것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할 일이지.”

“그래서 짐이 그간 네게 행한 일들을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지스카르가 물었다. 남이 통 크게 써서 좋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기어이 그걸 묻는다. 나는 짜증이 나서 지스카르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그래! 내가 한때 황태자이기도 하였기에 네가 행한 일들에 전혀 부당함이 없다는 것을 안다. 너는 무엇 하나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 그런데도 끝까지 내 앞에서 죄책감을 느낀다고 말할 테냐?”

뿌득, 멱살을 쥔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지스카르는 무표정한 얼굴로 침묵을 지켰고, 한참 만에 내 질문에 대답했다.

“그래.”

대답을 듣고 나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거 공교롭군. 나도 가끔씩 치가 떨릴 만큼 네놈에게 화가 나거든!”

허리춤에 달린 마정석 주머니가 빛을 흘리며 진동했다. 마법이 순식간에 근력을 수배로 강화해 주었다. 나는 몸을 일으키는 동시에, 지스카르를 뒤로 밀어붙여 침대에 처박았다. 마침 그의 발목에 매달려 있는 비상용 단검이 보였다. 나는 단검을 뽑아서 지스카르의 왼손을 겨누었다.

“이쪽 손, 예전에 자해한 적이 있지?”

“…….”

“나는 당시의 후유증으로 수시로 고열에 시달리고 픽픽 졸도하는 처지가 됐다. 한데 네 손은 그사이에 다 나아서 멀쩡해졌구나. 이거 아무리 생각해도 불공평한 것 같지 않으냐?”

지스카르는 자기 왼손에 잠시 눈길을 주었다.

“짐이 어찌하면 되겠느냐? 왼손을 아예 잘라버리면 네 마음에 차겠는가?”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고.”

나는 단검을 높이 치켜들어 망설임 없이 지스카르의 손등 위에 꽂아버렸다. 칼이 손을 꿰뚫고 침대 깊숙이 박혔다. 살을 찢고 뼈를 부수는 고통에 지스카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래 봤자 내가 당한 것에 천 분의 일에도 미치지 않는다. 나는 아예 힘을 줘서 검을 더 비틀었다.

으득.

손에서 끔찍한 소리가 났다. 그러나 지스카르는 끝내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잠깐 인상을 썼을 뿐, 흐트러짐이 거의 없었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다소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때 뺨에 손길이 닿았다. 지스카르가 오른손으로 내 얼굴을 쓸어내렸다.

“짐이 어찌하면 되겠느냐? 너를 위하여.”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집스럽게 물었다.

“너를 위해서.”

놈이 하는 짓이 아주 웃겨서 실소가 흘러나왔다. 온몸으로 내가 좋아 죽겠다고 티를 내고 있지 않은가. 나는 지스카르의 이마를 툭툭 치며 물었다.

“그렇게 내가 좋으냐?”

“…….”

지스카르가 살짝 눈살을 찌푸린다. 질문이 마음에 안 든단 말이로군. 지스카르의 불만 사항을 수렴해서 질문 방식을 바꿔주었다.

“대답해 봐라. 너는 누구 것이냐?”

지스카르는 손등에 꽂혀 있는 칼을 아무렇게나 뽑아버리고 만신창이가 된 손으로 내 목덜미를 끌어당겼다.

“짐의 심장까지 뽑아서 너에게 주마.”

지스카르가 내게 키스를 하려고 했으나 나는 그 손을 매섭게 뿌리쳤다. 지스카르가 통증에 인상을 썼다. 나는 지스카르를 억누르고 말했다.

“더 이상 일방적으로 네게 당할 이유가 없다. 그동안 네게 실컷 당했으니, 이번에는 내 쪽에서 귀여워해 주마. 아니면 나를 안을 수는 있어도, 반대로 안기는 것은 용납할 수가 없느냐?”

지스카르가 미간을 살짝 좁혔다.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려는 것 같다. 애초에 이런 상황을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을 것이다. 까놓고 엉덩이를 대준다는 것이 꺼림칙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스카르는 금방 원하는 대로 하라고 말했다.

“말을 잘 듣는군.”

나는 가볍게 웃으며 피투성이인 그의 손을 가리켰다.

“일단 손부터 어떻게 좀 해보지? 벌써 침대가 피투성이인데.”

지스카르는 침대 시트를 쫙 찢었다. 입과 오른손을 써서 천을 왼손에 몇 차례 꽉 압박해서 묶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하나도 안 충분해 보이지만 제대로 아파보라고 찌른 건데 더 사정 봐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바로 지스카르의 턱을 당겨 키스했다. 불쑥 혀 집어넣길 좋아하는 녀석이 오늘은 아주 얌전했다. 나는 달래듯이 혀를 넣어서 핥아주었다. 가볍게 키스를 한 뒤 잠시 떨어졌다. 고개를 들자마자 지스카르와 눈이 마주쳤다. 지스카르가 내가 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째 그 시선이 신경 쓰였다. 나는 인상을 쓰며 녀석의 셔츠 단추를 풀고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셔츠를 벗기면서 그의 목덜미를 핥고 애무했다. 지스카르는 약간 간지러운 듯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녀석의 반응에 만족하면서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손으로도 허리를 훑으며 바지춤까지 이르렀다. 피부 아래에 팽팽한 근육이 느껴졌다. 아주 훌륭한 사내의 육체였다. 그 아래엔 더욱 훌륭한 남자의 상징이 있을 것이다.

나는 허리춤에서 더 전진하지 못하고 방황했다. 결국 도저히 참지 못하고 고개를 들었다.

“제기랄. 역시 남자는 내 취향이 아냐!”

저절로 욕이 터져 나왔다. 나는 손등으로 거칠게 입술을 닦아냈다. 다시금 지스카르와 눈이 마주치자 나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이참에 딱 까놓고 말해 보자. 네놈도 내가 팔다리에 근육도 없고 말랑말랑하니까 쉽게 만질 생각을 한 거지, 근육이 덕지덕지 붙은 우람한 녀석을 물고 빨고 할 자신 있어? 아예 상상하기 쉽게 예를 들어주지. 던필을 벗겨놓고 주물럭거린다고 생각해 봐. 대답해 봐라! 그거 할 수 있겠냐고!”

“……크리스티안도 있고 달리 사람이 많은데 왜 하필 던필을 예시로 드는 건가?”

지스카르가 유난히 무뚝뚝한 음성으로 물었다. 나는 당연한 소리를 왜 하냐며 대답했다.

“그야 크리스티안은 잘생겼으니까. 이왕이면 충격이 강한 쪽을 예시로 드는 게 맞지!”

“…….”

잠시 침묵하던 지스카르가 불쑥 입을 열었다.

“짐도 이 정도면 잘생긴 편이 아닌가.”

“뭐?”

나는 잠시 제 귀를 의심하며 인상을 썼다.

“너 지금 크리스티안을 질투한 것이냐?”

지스카르는 다짜고짜 나를 들어서 옆으로 쓰러뜨렸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나를 내려다보았다. 이로써 내가 다시 깔리고 지스카르가 위로 올라가는 모양으로 자세가 바뀌었다.

순간 기분이 싸했다. 나는 자세를 다시 바꾸기 위해, 신경을 분산시킬 목적으로 지스카르의 왼손을 가리켰다.

“그 손 바로 신관에게 보여야 하지 않을까?”

“네가 신경 쓸 필요 없는 일이다.”

“신경 안 쓸래도 자꾸 눈에 보이잖아. 당장 치료 안 하면 분명히 아작날걸.”

지스카르는 대답하지 않고 내 허리춤을 더듬거려 바로 바지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나는 황급히 옷 위로 녀석의 손을 붙잡았다.

“잠깐 기다려!”

지스카르가 손을 기어이 집어넣어 내 음경을 움켜쥐었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몸을 움츠렸다. 순식간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네가 못 하겠다면 짐이 하겠다.”

“……!”

뭐라고 해야 할지 갑자기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내 쪽에서 하겠다고 말하자니 아무리 생각해도 사내새끼를 상대로는 못 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내가 못 하겠으니까 내 것을 대주겠다는 식도 좀 아니지 않은가.

내가 질색하는 동안 지스카르가 등 뒤로 다친 손을 넣어 나를 바짝 품에 끌어안았다. 분명히 통증이 심할 텐데 지스카르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손을 함부로 다뤘다.

“윽.”

나는 다시 몸을 움츠렸다. 지스카르가 제 마음대로 성기를 주물렀다. 다리를 비틀어 손을 떨쳐 내려고 하자 손을 다리 사이로 더 깊이 밀어 넣었다. 금방 성기가 단단해졌다. 놈이 건드릴 때마다 너무 쉽게 흥분하는 것 같아 죽을 만큼 수치스러웠다. 그새 몸이 달아올라서 숨까지 가빠져 왔다. 오랜만이라 그런지 정말로 죽을 맛이었다. 나는 더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농담 아니니까 손 치워! 죽여버리기 전에!”

진짜로 농담이 아닌 진담이었다. 마정석이 담긴 주머니가 다시 진동했다. 그때 지스카르가 다리 사이에서 순순히 손을 빼서 마치 보라는 듯이 보여줬다. 그의 손가락에 맑고 끈적거리는 액체가 묻어 있었다. 나는 순간 굳고 말았다. 얼굴이 녹아버릴 것처럼 뜨거워졌다. 그사이에 지스카르는 아주 자연스럽게 내 마정석 주머니를 빼앗아갔다.

“이건 잠시 치워놓으마.”

그는 주머니를 침대맡의 탁상 위에 올려놓았다. 빼앗겼다고는 해도 사실 손을 뻗으면 언제든지 쥘 수 있는 거리였다. 나는 마정석 주머니를 바라봤다. 그때 지스카르가 다시 내 머리를 안고 자기 품으로 끌어당겼다.

“잠깐.”

내가 녀석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머뭇대는 사이, 지스카르가 바지를 완전히 벗겨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지스카르는 윗옷까지 바로 벗겨버린 다음 내 다리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다. 다시 중심을 잡히는 순간 나는 깜짝 놀라며 전신을 떨었다.

지스카르는 성기를 주무르고 빠르게 위로 쳐올리며 자극했다. 나를 좀 더 흥분시켜놓고 살짝 젖은 손가락을 엉덩이 쪽으로 옮겼다. 나는 당연히 질색을 했으나, 놈은 개의치 않고 손가락을 구멍 안으로 집어넣었다.

“으읏.”

중지가 한 마디 정도 들어온 것 같았다. 그런데 또 다른 손가락이 입구를 어루만지는가 싶더니 억지로 비집고 안으로 들어오려고 했다.

“아프지 않게 하마.”

“그런……, 으.”

손가락 두 개가 입구를 꾸욱 누르고 안으로 파고들었다. 내부가 건조한 상태인데 향유도 없다 보니 저항감이 굉장했다. 나는 지스카르의 팔을 붙잡고 가늘게 신음을 흘렸다.

“그만하……. 윽.”

지스카르는 잠시 손을 멈추었다. 하지만 이내 다시 삽입을 시작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이를 악물고 이물감을 참았다. 빌어먹게도 결국 손가락 두 개가 그 비좁은 구멍을 비집고 끝까지 들어갔다.

“아, 으……, 정말…….”

“레이.”

지스카르가 내 이마에 가볍게 키스를 했고 손가락을 넣은 채 잠시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새삼스럽게 손가락의 감촉이 더욱 노골적으로 다가왔다. 나는 불편함을 느끼고 있다가 일순 경련 비슷하게 몸을 움츠렸다. 안쪽의 내벽이 지스카르의 손가락을 꽉 조였다. 그걸 느끼는 순간 스스로 한 행동에 얼굴을 화끈 붉혔다.

지스카르가 내 머리를 다독이며 말했다.

“힘을 빼고…….”

“시끄러워!”

그때 손가락이 속을 깊숙하게 찔렀다. 더 들어올 곳도 없는데. 지스카르는 손가락을 깊이 넣었다가 천천히 빼길 반복했다. 한 번 움직이기 시작하자 점점 더 거침이 없어졌다. 허리를 웅크리며 도망치는 것을 기어이 따라잡아 몸이 들썩일 만큼 거칠게 쑤셔댔다.

“읏, 윽. 아……! 그만! 그만두라……. 흐읏.”

나는 지스카르의 옷깃을 쥐고 잡아당겼다. 뒤로만 자극당하고 있는데 음경이 점점 더 단단하게 발기하고 사정해 버릴 것만 같았다.

지스카르가 머리 위에서 말했다.

“레이, 이름을 불러봐라.”

나는 순간 오기가 생겨 이를 악물었다. 절대 저 자식이 원하는 대로 해주진 않을 생각이었다. 지스카르가 계속해서 손으로 날 다그쳤다.

내부를 둥글게 헤집어서 구멍을 벌려내다가 내가 그 행위에 조금 익숙해지는 것 같자 손짓을 바꿔서 느끼는 지점을 연속으로 쑤시며 짓눌렀다. 허리가 저절로 뒤틀리고 예민해진 내벽이 손가락을 바짝 조였다. 그러고 싶지 않은데 몸이 자기 멋대로 움직였다.

나를 더 몰아세울 셈인지 극점을 자극하던 지스카르가 손톱을 살짝 세워 약하게 긁어내렸다.

“하악! 지스카르. 그만 좀……!”

항복의 의미로 말한 게 아니다. 그만하라는 말을 한다는 것이 저도 모르게 이름을 말해 버렸다. 이유야 어쨌든 한 번 입을 열자 참을 수가 없어졌다.

“지스……카르……. 아학…… 아!”

“한 번 더…….”

“지스카르, 지스카르. 하, 흐으. 흣.”

저도 모르게 독촉하듯 그의 이름을 거듭 불렀다. 깊숙하게 찔러올 때마다 거짓말 같은 쾌락에 다리가 꼬이고 아랫배까지 저릿저릿했다.

뒤로 전해지는 쾌감에 떨면서 손을 아래로 더듬거렸다. 터지기 직전인 성기를 스스로 움켜쥐고 싶었다. 그런데 지스카르의 손바닥과 팔목이 음경 위로 지그시 누른 채 손이 갈 곳을 자꾸 가로막았다. 그것이 나를 더욱 안달 나게 했다.

이마 위로 약간 들뜬 숨길이 닿았다. 지스카르도 조금 숨이 거칠어져 있었다. 날 괴롭히기만 할 뿐 자기는 아직 아무것도 안 한 주제에 희한하게 놈도 흥분해 있었다.

“레이……!”

“흐윽, 윽……. 지스…… 지스카르!”

결국 한계에 다다라 모조리 쏟아내고 말았다. 사정이 끝날 때까지 지스카르는 내벽을 계속 자극하고 있었다. 저 좋자고 만지는 건지 사정을 도와주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여운이 지나고 겨우 정신이 들자 진짜 죽을 만큼 부끄러워졌다. 뒷구멍을 쑤신 것만으로 지금 사정해 버리지 않았던가.

“자, 괜찮으니까.”

지스카르가 내게 진정하라고 말했다.

“다른 손도 쓸 수 있었다면 앞으로도 도와줬을 텐데, 미안하군.”

지스카르가 뒤로만 괴롭힌 이유를 말하며 날 달래려 했다. 놈이 구멍에 넣고 있던 손을 빼냈다. 그래도 이제 끝이다 싶어 안도의 한숨을 토했다. 그때 잠시 떨어져 나갔던 손이 다시 음경을 잡았다.

“윽! 왜 또……!”

말을 하다가 지스카르는 아직 시작도 안 했음을 깨달았다. 이 자식은 처음부터 제 것을 쑤셔 넣든지 하지, 왜 손가락으로 그 짓이야. 그때 꼭 내 속을 읽은 것처럼 지스카르가 답했다.

“미처 향유를 준비하지 못한지라…….”

지스카르는 그리 말하면서 성기를 주무르고 다리 사이를 훑었다. 정확히는 손에 내가 사정한 정액을 묻히고 있었다. 나는 놈의 의도를 깨달았다. 그러니까 향유 대신 정액을 쓰겠다는 뜻이다.

지스카르는 나를 안아서 자기 무릎 위에 비스듬히 옆으로 앉혔다. 여전히 다리 사이에서 맴돌고 있던 손이 엉덩이 쪽으로 이동했다. 정액이 잔뜩 묻은 손가락 두 개가 다시 침입을 시도했다.

“읏…….”

저항이 완전히 없는 건 아니지만, 좀 전보다는 훨씬 쉽게 끝까지 밀려들어 갔다. 이미 한 번 열어놓은 데다가 윤활유까지 잔뜩 바른 덕인 듯하다. 지스카르가 안쪽에서 손가락을 움직이며 물었다.

“이제는 좀 편한가?”

“닥……쳐…….”

나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돌렸다. 손가락이 정액을 묻혀 내벽을 적시며 안과 밖을 몇 번이나 들락거렸다. 그러다 지스카르가 손가락 두 개에서 세 개로 늘려 입구를 지그시 눌렀다. 순간 나는 기겁했다. 두 개로도 겨우 했는데 세 개라니.

“뭐야! 아니, 왜 자꾸 손으로……!”

“상처 나지 않게 조심하마.”

“조심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 아, 윽……!”

녀석이 기어이 손가락을 집어넣어서 내벽을 한계까지 팽팽하게 벌렸다. 사실 완전히 발기한 지스카르의 음경은 이것보다 훨씬 두껍고 크다. 그 규격 이상의 물건으로 이미 몇 번이고 관계한 적이 있다. 그러니 감당하지 못할 정도는 아닐지도 몰랐다. 이건 그냥 내 심리적인 문제일지도 모르지. 어쨌거나 정말 이건 아니다.

내가 너무 심하게 떨자 지스카르가 삽입을 멈추고 내 머리를 쓸었다.

“힘을 빼라. 숨은 천천히 내쉬고…….”

나는 어떻게든 힘을 빼려고 애쓰며 지스카르가 말하는 대로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쉬었다. 다시 숨을 마시려는 때였다. 손가락이 밀려들어 왔다.

“우으! 좀……, 이런…….”

“레이, 긴장하지 말고. 힘을 빼면서.”

“으……, 흐, 흑…….”

지스카르는 내게 심호흡을 시키며 계속 삽입을 했다. 손가락이 좁은 내부를 억지로 벌려가며 아주 천천히 침입해 왔다.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았건만 정말로 손가락 세 개가 끝까지 들어왔다.

나는 지스카르의 품에 얼굴을 묻고 다리를 부들부들 떨었다. 전신에 땀이 잔뜩 배었다. 그때였다. 지스카르가 손을 천천히 시계방향으로 돌렸다.

“……!”

내벽이 손가락과 같이 뒤틀리는 느낌이었다. 나는 지스카르의 팔을 와락 움켜쥐었다. 소리도 내지 못했다.

“레이. 숨을 쉬거라.”

“아……하악! 아, 하아하아…….”

나는 입을 벌리고 간신히 숨을 집어삼켰다. 그때 손이 다시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다. 지스카르는 펄쩍 뛰며 경련하는 나를 단단히 붙잡고 손가락을 계속 움직였다.

느리게 넣었다가 빼는 움직임이 계속 이어졌다. 넣을 때마다 벌벌 떨면서 허리를 움츠리고, 뺄 때는 속살이 전부 딸려 나오는 듯한 느낌에 허리를 빳빳이 세우고 발가락에 잔뜩 힘을 주었다. 녹아내릴 것처럼 다리 사이가 뜨겁고 끈적거렸다.

갑자기 지스카르가 내 머리를 붙들고 있던 손을 아래로 내렸다. 머리는 자신의 어깨와 팔에 기대게 해놓고, 그 손으로 내 허벅지를 잡아 벌렸다. 다리 사이가 어찌 되었는지 보겠다는 듯이.

“하, 하지 마! 이 미친놈이!”

순간 나는 정말로 기겁을 하며 외쳤다.

“괜찮아. 부끄러워하지 마라.”

지스카르가 머리카락에 키스를 하며 말했다. 전에는 내가 정말로 싫다 하면 그래도 멈추곤 하더니 이번에는 기어이 허벅지를 잡아서 옆으로 벌렸다. 다리 사이로 시선이 느껴졌다. 그곳은 불투명한 정액과 땀으로 뒤범벅되어 있었다. 허벅지가 젖은 채로 가늘게 경련하는데 스스로 보기에도 대단히 음란한 광경이었다.

지스카르가 다시 손가락을 움직였다. 구멍 깊숙이 박혀 있는 손가락을 천천히 빼자 정말로 살이 살짝 끌려 나오는 게 보인다. 나는 더 이상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지스카르도 팔로 바들바들 떨고 있는 나를 자기 품에 더욱 바짝 끌어안았다.

“으……, 윽……!”

“레이.”

“손 좀…… 치워.”

“레이. 짐에게만 전부 보여다오.”

목소리에 지독한 독점욕이 묻어났다. 그래도 전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몇 달 못 봤다고 그간 참았던 것이 아예 폭발해 버린 느낌이다.

갑자기 손가락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마지막까지 갈 것 같던 지스카르가 구멍에서 손을 빼내었다. 그는 벌써 반쯤 녹초가 되어버린 나를 침대 위에 바로 눕혔다. 그리고 눈과 입술에 차례로 가벼운 키스를 하면서 자기 셔츠를 벗고 허리끈을 풀기 시작했다. 놈은 이제까지 자기 옷도 다 벗지 않았다.

허리춤을 반쯤 풀다가 지스카르는 잠시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이제 보니 그는 나만큼이나 숨을 거칠게 쉬고 있었다.

“참을 수가 없을 지경이라서……. 그대로 안으면 크게 상처를 입힐 것 같아……. 어쩔 수 없었다.”

지스카르가 뒤늦게 날 괴롭힌 이유를 댄답시고 변명을 했다. 그렇지만 목소리가 잔뜩 억눌린 것이 정말로 주체를 못 할 지경인 건 맞는 것 같았다. 손가락이 아닌 뜨겁고 묵직한 살덩어리가 입구에 닿았다. 오랜만에 느끼는 굵기에 나는 흠칫 떨었다.

지스카르의 것이 입구를 강하게 누르면서 벌렸다. 길고 긴 전희 덕분인지 그 커다란 성기가 거짓말처럼 쉽게 쑥 들어왔다. 지스카르는 내 등 뒤로 손을 넣어 끌어안고 그 상태로 몸을 일으켜서 앉았다. 자세가 바뀌면서 나는 지스카르의 위에 털썩 올라앉았다. 동시에 깊숙하게 들어차 있던 성기가 뿌리까지 콱 찍혀 들어갔다.

“큭!”

일순 허리를 찌르는 듯한 통증이 있었다. 나는 끄응 신음을 흘리다가 숨을 좀 돌리려고 지스카르의 가슴에 이마를 댔다. 그런데 지스카르가 기다리지도 않고 내 엉덩이를 잡고 허리를 세게 추어올렸다. 항상 내가 따라오길 기다리며 천천히 쾌락을 끌어내는 편이었는데 이번에 시작부터 너무 빠르고 거칠었다.

“윽. 흐. 이런 건 별로…… 안 좋아……. 조금씩……!”

접합부가 쓰라려서 그를 붙잡았으나 지스카르는 움직임을 늦추지 않았다.

죽이니 살리니 하면서도 결국 놈과 이 짓을 하는 이유 중 하나가, 적어도 할 때만큼은 죽을 듯이 쾌락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성급함 때문에 찬물을 맞은 것처럼 흥분이 가라앉았다. 쌍욕이 튀어나올 것 같아 지스카르를 노려보았다.

그런데 지스카르의 표정이 굉장히 심각했다. 그가 내 얼굴을 마주 보며 몸을 일으켰다.

지스카르는 그대로 나를 다시 침대에 눕혔다. 또 자세가 바뀌었다. 그런데 지스카르가 자기 것을 넣은 상태로 내 다리를 잡고 위로 들어 올렸다. 점점 등까지 들리고 몸이 거의 반으로 접히다시피 했다.

“뭐……. 이, 이거…….”

너무 수치스러운 자세에 얼굴의 핏기가 싹 가셨다. 나는 당장 그 자세에서 벗어나려고 다리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지스카르가 다리를 어깨에 걸쳐 놓고 내 손목을 붙잡아 침대에 억눌렀다.

“레이.”

지스카르가 내 이름을 불렀다. 아주 짧고 강했다. 불현듯 내 느낌에 녀석이 무슨 경고를 하는 것 같았다. 그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지스카르가 허리를 세게 찍어 눌렀다. 순간 중심을 꿰뚫는 통증에 나는 짧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전신이 짓눌릴 정도로 처음부터 움직임이 아주 거칠었다.

“그만! 으윽. 그만, 멈춰!”

아무리 새된 소리를 내도 오히려 움직임은 더 거칠어졌다. 완전히 나왔다가 몸의 무게를 실어 박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찍어 누르는 동안 다리가 완전히 뒤로 넘어가서 발이 침대에 닿았다. 머리를 비틀며 나는 연신 소리를 질렀다.

“미친, 아프다고! ……흐윽, 아.”

갑자기 지스카르가 내 팔을 놓고 그 손으로 내 성기를 꽉 움켜쥐었다. 순간 내 전신이 펄쩍 뛰었다.

“정말…… 아플 뿐인가?”

지스카르가 물었다. 뽑아버릴 것처럼 내 음경을 바짝 잡아당기고, 성급하게 연이어 내벽을 찍어눌렀다. 놈의 질문에 대답해 줄 수가 없었다. 한 번 사정했던 음경이 그새 터질 듯 발기해 있었다. 허리가 아플 정도로 뒤를 희롱당하고 있었는데 언제부턴가 나는 다시 흥분해 버리고 말았다.

“레이. 짐의…… 이름이 뭐지?”

그때 위에서 질문이 떨어졌다. 나는 자유로운 한 손을 허우적대서 단단한 팔을 붙잡았다. 헛숨을 들이마시고 턱을 바르르 떨다가 마침내 외쳤다.

“……아……아아, 지…… 지스카르!”

지스카르는 굉장히 만족해했다. 하지만 자신도 흥분을 참기 힘든지 고개를 아래로 푹 숙였다. 그가 다그치듯이 내 음경을 강하게 주무르고 비틀어서 당겼다. 찌르르한 쾌락이 아랫배와 허리를 연이어 울렸다.

지스카르가 퍽퍽 찍어 내릴 때마다 말도 안 되는 열락에 빠져들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내가 지금 제정신인가 싶었다. 정말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윽. 흐윽. 지스카르.”

“레이, 계속…….”

“지스카르, 지스카르! 아. 더, 더 이상……!”

완전히 한계까지 올랐다. 지금 당장이라도 쏟아낼 것 같았다. 그때 지스카르가 내 중심을 세게 쥐었다. 진짜 악 소리가 날 만큼 세게 말이다. 지스카르가 제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말했다.

“아직…….”

“윽, 아! 지스카르…….”

놈이 제 이름을 불러주는 걸 좋아한다는 것을 안다. 나는 일부러 독촉하기 위해서 지스카르를 거듭해 불렀다. 그래도 지스카르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안 돼. 좀 더…….”

“지스카르, 지스카르, 지스……카르!”

“한 번 더.”

“지스…… 아윽.”

“다시……!”

아무리 해도 녀석은 부정만 했다. 그러면서 더욱 거칠게 허리를 움직였다. 놈의 그것이 구멍을 꿰뚫을 때마다 전신이 마구 뒤흔들렸다. 나는 지독한 쾌락에 발버둥 쳤다. 극한까지 내몰려서 이제는 정말로 해방되고 싶었다.

“지스카르. 흐읏, 아아! 지스…….”

지스카르가 어금니를 빠득 깨물었다. 녀석도 드디어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그가 내 몸속에서 정액을 쏟아냈다. 동시에 내 중심을 압박하던 손도 풀렸다. 나도 더 참지 못하고 사정을 하고 말았다. 소리도 못 낼 만큼 강렬한 절정이었다. 온몸을 경직시키고 오래 여운을 느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축 하고 늘어져 버렸다.

주위가 피투성이다. 지스카르의 왼손에서 배어 나온 것인데, 그 피 냄새와 정액의 비린내가 머리를 멍하게 만들었다.

“으…….”

“레이. 자, 끝났으니까…….”

지스카르는 녹초가 되어 괴로워하는 나를 달래며 바로 눕혀주었다. 다리를 내려주며 자기 성기도 빼냈다. 그 순간 안쪽에 가득 차 있던 정액의 일부가 흘러나왔다.

나는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다리를 움츠렸다. 그런데 지스카르가 한발 빨리 발목을 잡아 내 행동을 방해했다. 지스카르는 다리를 벌려서 기어이 그 꼴을 확인했다. 그때 바짝 긴장해 있던 구멍이 움찔거리며 정액을 다시 흘렸다.

“읏……, 아…….”

나는 말도 못 하고 신음만 흘렸다. 얼굴을 벌겋게 붉히고 가늘게 떨며 창피함에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때 지스카르가 말했다.

“숨기지 마라. 짐에게 전부 보여다오.”

“아……. 왜……. 이런 게…… 뭐가 좋다고…….”

“이런 모습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을 테지. 크리스티안도 마찬가지일 테고.”

난데없이 튀어나온 크리스티안의 이름에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너무 황당해서 웃지도 못하겠다. 저놈 진짜 그렇게 안 봤는데 말이다. 나는 없는 힘을 짜내 지스카르를 뿌리쳤다.

“손…… 놔……! 제길……, 남의 일이라고.”

목소리에 독기가 없다. 힘이 빠져서 어쩔 수가 없었다. 지스카르도 지치긴 마찬가지인 듯하다. 다른 것보다도 손의 출혈 때문이었다. 그가 초췌한 얼굴로 뒤늦게 침대 시트로 손을 한 번 더 둘둘 동여맸다.

저 손, 저런 식으로 대충 뒀다간 진짜 망가질 것 같은데.

내가 피투성이인 손을 진지하게 쳐다보는 사이 지스카르가 다시 날 잡아당겨 품에 꽉 끌어안았다. 둘 다 헐벗은 상태에서 안기니 이제 와 새삼스럽게 소름이 끼쳤다. 질색을 하며 놈을 밀어보았지만 다 죽어가는 꼴을 하고도 힘이 어찌나 센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놔……! 이제 좀…… 쉬자.”

놈이 놓아주기는커녕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나는 버둥거리다 결국 힘에 부쳐서 녀석의 품속에 늘어지고 말았다.

한동안 중얼거리면서 지스카르에게 욕을 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그 꼴로 나도 모르게 잠이 들어버리고 말았다. 다시 열이 오르면 전부 지스카르 그 개자식 탓이다.

잠결에 어깨 위로 이불을 덮어주는 것이 느껴졌다. 온기에 더욱 깊이 잠에 빠져버렸다.

* * *

“폐하께서 아직 안에 계십니다. 누구도 들이지 말라고 하셨으므로 지금은 알현이 어려우십니다.”

경비를 서고 있던 기사들이 방문자를 가로막고 말했다. 크리스티안은 한동안 문을 응시했다.

“나중에 다시 오겠다.”

크리스티안은 걸음을 돌렸다. 그는 복도를 걸어가며 눈을 내리깔았다. 생각해 봤자 의미가 없는 일을 자꾸 생각하게 된다. 좋지 않은 버릇이 생기고 말았다.

“크리스.”

얼마쯤 가자 던필이 복도 한쪽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크리스티안이 누구를 만나러 갔다가 허탕을 치고 나온 것인지 알았다. 그는 안쪽 침실을 가리켰다.

“폐하랑 레이가 방에 틀어박힌 지 꼬박 하루네. 정력 좋은 우리 황제께서 몇 달이나 독수공방하셨으니 그 녀석 아마도 죽어나고 있을걸.”

크리스티안은 즉시 인상을 찡그렸다.

“던필. 무엄한 소리를 삼가라.”

“아, 이 잔소리를 들으니 네가 정말 돌아왔다는 실감이 나는걸.”

던필은 피식 웃으며 크리스티안의 곁으로 다가갔다. 경박하게 굴던 그가 불현듯 웃음기를 지웠다. 한숨을 한 번 토하고 그가 입을 열었다.

“레이는 폐하의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말했지?”

크리스티안은 대답 없이 복도를 걸었다.

“……그래, 네 말대로다.”

한참 후 크리스티안은 순순히 던필의 말을 인정했다. 그 반응에 던필은 크게 놀랐다. 일전에 같은 말을 했을 때 크리스티안은 지독한 모욕을 당했다는 얼굴로 화를 냈다. 던필이 보기에 크리스티안은 시치미를 뗀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말 어지간히도 둔한 녀석이 아니던가. 그런데 어째서 반응이 이렇게 달라졌단 말인가.

“설마 도망 다니던 도중에 레이와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거야?”

크리스티안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대답은 없지만 사실상 긍정이나 다를 바 없었다. 던필이 어이가 없어서 소리쳤다.

“잠깐 기다려! 진심이라는 거냐? 그가 대단한 것은 나도 정말 인정하지만 그래도 결국엔 노예에 불과한데……!”

크리스티안이 걸음을 멈췄다. 그는 냉랭한 어조로 대꾸했다.

“노예가 아니다.”

“그래! 노예이긴 한데 노예라 보기엔 확실히 무리가 있지!”

던필은 인상을 쓰며 창밖을 보았다. 에브라함 요새에서 적어도 몇 달은 치열한 혈전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백 년 이상 빈틈을 내주지 않았던 거대 요새가 그의 마법 한 번에 반파되어 무너져 버렸다. 병사들은 아직도 당시의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부서진 요새를 돌아다니며 열광하고 있었다. 맙소사, 노예가 아니라 정말로 신의 사자란 말인가.

그러다 문득 던필은 다시 고개를 돌려 크리스티안을 응시했다. 갑자기 머리를 스치는 단어가 있었다.

“레브노아드 반 스트라스…….”

왜 갑자기 그 단어가 떠올랐을까. 갑자기가 아니다. 크리스티안이 그의 이름을 중얼거리곤 하는 것을 몇 번이나 들었다.

“레이가 혹시 레브노아드 전 황태자와 어떤 관계가 있는 거냐?”

던필은 아직 제대로 감을 잡지 못했다. 크리스티안이 정확하게 답을 내려주었다.

“바로 그가 레브노아드 황태자다.”

“…….”

던필은 당황스러워 양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는 당연히 한 번에 믿지 못했다.

“그게 어떻게 그렇게 돼? 혹시 폐하께서도 같은 생각이시냐?”

“못 믿겠다면 어쩔 수 없지.”

던필이 그 자리에 멈춰 서 있는 동안 크리스티안은 먼저 걸음을 옮겼다. 던필은 잠시 뒤처져 있다가 어안이 벙벙한 기분으로 다시 그를 쫓았다.

“그가 십여 년 전에 죽은 레브노아드 황태자의 현신이라고? 뭔가 머리로 받아들이기 힘든데 신의 사자라는 것도 허황한 소리인 건 마찬가지네. 그래, 일단 그런 거라고 가정을 하면 이치에 전부 들어맞긴 해. 폐하께서 첫 만남부터 그에게 신경을 썼던 것도. 폐하는 오래전부터 레브노아드 황태자에게 관심이 많았으니까. 4중 영창 마법사임과 동시에 뛰어난 기사라는 점도 맞아떨어지는군. 외모라든가, 언동이 왜 그렇게 거만했는지도…….”

던필은 제 머리를 북북 긁으며 중얼거렸다. 크리스티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으니 됐군.”

던필이 다시 크리스티안의 어깨를 붙잡았다. 이걸로 됐을 리가 없다. 그는 기가 막혀서 외쳤다.

“거기 서! 그가 레브노아드 황태자라고 해서 네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잖아. 그 인간은 남자다. 네가 같은 사내에게 목매는 걸 보고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

“너도 레이와 똑같은 말을 하는군. 남자라서, 그게 도대체 어떻단 말이냐.”

탁.

크리스티안은 던필이 붙잡은 손을 불쾌하게 뿌리쳤다.

“내가 마음에 든 자가 남자였다. 그뿐이다. 레이가 여자가 되면 뭐가 달라지기라도 한다던가?”

“아주 달라! 모든 것이 달라져!”

던필은 기가 막혀서 소리 질렀다. 어떻게 그런 말을 그리 쉽게 내뱉을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어렸을 때부터 여자보다 사내가 좋았다. 그러나 감히 사람들 앞에서 남자가 좋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크리스티안을 처음 본 순간 마음을 빼앗겼지만 그의 곁을 맴돌며 짓궂은 장난을 칠 뿐, 더 이상은 다가가지 못했다.

그런데 만약 크리스티안이 여자였다면? 하다못해 자신이 여자이기라도 했다면?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마음을 전하는 일 정도는 가능했겠지.

던필은 가벼운 겉모습과 달리 누구보다도 책무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주어진 의무를 등한시하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크리스티안에게 구애를 한다? 그런 건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한 일이다. 때문에 던필은 일찍 마음을 접고 훌륭한 여성을 아내로 맞이하여 후사를 보았다. 마음이 생각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래된 연정을 완벽하게 접지는 못하겠지만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가문과 아내와 자식들을 최우선으로 하고 마음을 다할 것이다.

“크리스, 너는 울펜가모트의 유일한 직계이다. 네가 후계를 만들지 않으면 이백 년 역사를 가진 공작 가문의 대가 끊어지게 돼. 폐하께서는 일찍이 황후와 후궁을 들여 시라크 황자 외에도 후계를 두고 계시니 남색에 빠진다 해도 큰 문제가 없지만 너는 경우가 달라. 결혼도 하지 않고 대를 이을 자식도 없는 상태로 남색만 탐하는 것을 용납받을 수 있을 것 같은가? 사내끼리의 사랑에는 결실이 없다!”

던필의 말은 매우 상식적인 것이고 그 상황에 처한 자라면 누구나 고민할 만한 문제였다. 그러나 크리스티안은 잠시도 고뇌하지 않았다.

“양자라도 들이면 될 것 아닌가.”

“그건 네 핏줄이 아니잖아! 공작님과 가문의 원로들이 그걸 용납할 거 같아?”

“용납하지 않으면?”

“가문에서 널 제재하려 들겠지. 온 세상이 너의 무책임함을 손가락질할 테고!”

“그때는 울펜가모트 성을 버리겠다. 나는 기사다. 애를 만드는 건 내 일이 아니야.”

크리스티안은 고려할 가치도 없다고 대꾸했다. 그가 귀찮은 기색을 드러내는 것을 보고 던필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하……. 너는 항상 내 말에는 귀를 기울여주지 않는군. 하지만 전부 자업자득인가.”

크리스티안은 눈살을 찌푸리며 던필을 노려보았다. 그는 도무지 던필이 무슨 뜻으로 저런 흰소리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내게 불만이 많은 모양이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똑바로 이야기해라.”

“아아, 정말 어지간히 둔하다니까!”

던필은 이마를 짚으며 한탄했다. 크리스티안은 직접 고백이라도 하지 않는 한 영원히 그의 마음을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차라리 그래서 다행이었다.

“크리스티안. 나는 아주 미덥지 못한 놈이다. 그래도 친구로 지내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크리스티안은 혀를 차면서 등을 돌렸다. 완전히 돌아서기 전에 한마디 던졌다.

“정리가 끝나면 술 상대 정도는 되어주마.”

던필은 웃었다. 그는 먼저 가는 크리스티안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뒤늦은 인사를 건넸다.

“잘 돌아왔다, 크리스! 네가 그대로 객사할까 봐 내가 밤잠도 못 잤다는 거 알아?”

“과연? 그래도 잠은 잤겠지.”

“내가 잠이 좀 많긴 해도 이건 맹세코 사실이라고!”

3